2011인문주간: 후쿠시마를 넘어, 인간과 자연의 행복한 공존으로
9.23(금) ‘동아시아인들이 바라본 자연’(강사: 김경희)
인간과 자연: ‘무위(無爲)’의 기술
악한 자들은 너의 발톱을 두려워한다.
선한 자들은 너의 우아함에 기뻐한다.
내 시에 대해
이런 말들을 하는 것을
나는 듣기 좋아했다.
―브레히트, 「차나무 뿌리로 만든 사자상」
* 인간과 자연
- 인간 대 자연? 자연 속의 인간, 인간 속의 자연.
* 기계론과 유기체론
* 장자의 우주와 인간
- 우주(宇宙): “실재성은 있지만, 특정한 곳에 국한되지 않는 것이 우(宇)이다. 지속성은 있지만, 시작도 끝도 없는 것이 주(宙)이다.” ("장자" 「경상초」)
- 우물 안 개구리: “가을이 되자 때마침 물이 불어나 모든 하천이 황하로 물을 쏟아 보냈다. 출렁이는 물결의 웅대함 때문에 양쪽 물가에서는 맞은편에 서 있는 것이 소인지 말인지 구별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이에 황하의 신인 하백(河伯)은 스스로 기쁨에 겨워 세상의 아름다움이 다 자기에게 있다고 생각했다. 마침 물의 세찬 흐름을 따라 동쪽으로 흘러가 북해에 다다랐다. 동쪽을 쳐다보니, 물의 끝이 보이질 않았다. 이에 하백은 고개를 돌려 멍한 표정으로 북해의 신인 약(若)을 바라보면서 탄식하였다. 세간의 속담에 ‘도(道)에 대해 조금 들었다고 해서 세상에 나만한 사람이 없다’고 우쭐대는 사람이 있다더니, 나를 두고 한 말인가 봅니다.[…]’ 북해의 신인 약이 말했다. ‘우물 안 개구리에게 바다에 관해 말해줄 수 없는 것은 자신이 머무는 곳에만 얽매여 있기 때문이고, 여름 한철 벌레에게 얼음에 관해 말해줄 수 없는 것은 벌레가 자신이 사는 짧은 기간에만 얽매여 있기 때문이며, 한 귀퉁이만 아는 선비에게 도(道)에 대해 말해줄 수 없는 것은 자신이 들은 가르침에 얽매여 있기 때문이다.[…]이 바다가 장강이나 황하의 흐름을 능가한다는 건 수량으로 헤아릴 수가 없을 정도이다. 그런데도 내가 스스로 자랑하지 않는 것은[…]내가 하늘과 땅 사이에 있는 것이 마치 작은 돌이나 작은 나무가 큰 산에 있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바로 작다는 것이 드러나는데 어찌 스스로 자랑할 수 있겠는가. 사방의 바다가 하늘과 땅 사이에 있는 것도 잘 생각해 보면, 개미구멍이 큰 연못가에 있는 것 같지 않겠는가. 중국이 사방의 바다에 둘러싸여 있는 것을 생각해 보면, 마치 돌피의 낟알이 커다란 창고 속에 있는 것 같지 않겠는가. 사물의 수를 만(萬)이라고 하는데 인간은 그 중의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은 중국의 9개의 주에 무리지어 모여 있는데, 곡식이 자라는 곳이나 배나 수레가 다닐 수 있는 곳은 그 가운데에서 또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만물과 비교하면, 인간이란 한 올의 가는 털이 말의 몸에 붙어 있는 것과 흡수하지 않겠는가.’” ("장자" 「추수」)
* "노자"의 ‘무위(無爲)’와 ‘자연(自然)’
- ‘무위(無爲)’: “[…]저 지혜롭다고 하는 자들이 감히 작위[爲]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 무위(無爲)를 행하면 다스려지지 않음이 없을 것이다.”(3장) “도는 항상 무위(無爲)하면서도 하지 않음도 없다[無不爲].”(37장)
- ‘자연(自然)’: Nature? ‘스스로 그러함(so-of-itself, spontaneous)’. “[…]사람은 땅을 본받고, 땅은 하늘을 본받고, 하늘은 도(道)를 본받고, 도는 자연(自然)을 본받는다.”(25장)
- “[…]작위하는 자는 실패하고, 꽉 붙잡는 자는 놓친다. 이 때문에 성인은 무위(無爲)하여 실패하는 일이 없고, 꽉 붙잡지 않아 놓치는 일이 없다.…만물의 자연(自然)을 도울 뿐 감히 작위하지 않는다.” ("노자" 64장)
* 인간 활동과 자연에 대한 폭력
- 인간의 활동: 노동, 작업, 행위(한나 아렌트).
- 자연에 대한 폭력으로서의 작업: “육체의 노동과 구별되는 우리 손의 작업은 […]무한히 다양한 사물을 제작하며, 이 사물의 총계는 인공세계를 구성한다. 이것들은 대개 모두 그렇지는 않지만, 사용물이며 지속성과 ‘가치’를 소유한다. […] 이런 지속성과 견고성이 없다면 인공세계는 불안정하게 되어 죽을 운명인 인간의 거처가 되지 못한다.[…]이런 관점에서 세계의 사물은 인간의 삶을 안정화시키는 기능을 하며, 이 사물들의 객관성은—동일한 인간은 똑같은 개울에 들어갈 수 없다는 헤라클레이토스의 말과는 모순되지만—항상 변화하는 본질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같은 의자와 같은 탁자에 관계함으로써 자신의 동일성을, 즉 자신의 정체성을 확보할 수 있다는 사실에 놓여 있다. 달리 말하면, 인간의 주관성에 대립하여 서 있는 것은 손대지 않은 자연의 웅대한 무관심이기보다는 인위적 세계의 객관성이다. 자연의 압도적 힘은 오히려 그 반대로 인간을 강요하여 그 자신의 생물학적 순환 속에서 돌게끔 한다. 이 운동은 자연의 포괄적인 순환운동과 매우 일치한다. 자연이 우리에게 제공하는 것을 가지고 우리 자신의 세계를 건설하고 이 세계를 자연적 환경이 되게 함으로써 자연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우리 인간만이 자연을 ‘객관적’인 어떤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사람과 자연 사이에 세계가 없다면, 영원한 운동만이 존재하고 어떤 객관성도 있을 수 없다.[…]호모 파베르의 작업인 제작은 사물화로 이루어진다. 모든 사물, 심지어 가장 약한 사물에까지 내재하는 견고성은 작업이 가해진 재료에서 생긴다. 그러나 이 재료 자체는 단순히 채집하는 까닭에 자연을 변화시키지 않고 내버려둘 수 있는 들의 곡식이나 나무의 과실처럼 단순히 주어진 것이 아니다. 재료는 이미 인간 손의 생산물이다. 목재를 얻기 위해 나무를 파괴하는 경우처럼 생명과정을 없애거나 또는 지구의 모태에서 철과 돌과 대리석을 채굴하는 경우처럼 자연의 느린 과정을 중단시킴으로써, 인간 손은 재료들을 그것이 원래 있던 자연적 환경으로부터 떼놓았다. 이런 침해와 폭력의 요소는 모든 제작에 존재한다. 그리고 인공세계의 창조자인 제작인은 언제나 자연의 파괴자였다. 자신의 육체나 길들인 동물로 생활하는 ‘노동하는 동물’은 모든 피조물의 주인이자 지배자일 수도 있지만, 그러나 그는 여전히 자연과 지구의 하인으로 남는다. 오직 제작인만이 전지구의 군주이자 지배자처럼 행동한다. 그의 생산성은 창조주인 신의 이미지로 보이고, 그래서 신이 무에서 창조한다면 인간은 주어진 물질로 창조하는 까닭에 인간 생산성은 그 정의상 프로메테우스의 반란의 결과물이다. 왜냐하면 신이 창조한 자연을 파괴함으로써만 인위적 세계는 건설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폭력의 경험은 인간의 힘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경험이기 때문에 단순노동에서 경험하는 고통스럽고 힘이 빠지는 노고와는 정반대이다. 이 경험으로 우리는 자기 확신과 만족을 얻는다. 그리고 전생애에 걸쳐 필요한 자신감의 원천도 이런 폭력의 경험이다.[…]그것은 폭력적인 힘의 행사를 통해 느끼는 의기양양함과 관련된다. 인간의 이런 힘을 통해서 스스로를 요소들의 거대한 힘과 비교해보고, 도구의 발명을 통하여 자연적 수준을 훨씬 넘어 폭력을 증대시키는 방법을 알게 된다.” (한나 아렌트, "인간의 조건", 193-198쪽)
* 무위(無爲)와 유위(有爲)
무위(無爲): 아무 것도 하지 않음(nonaction, inactivity)? 무위(無爲)의 위(爲).
“어떤 이는 말한다. ‘무위(無爲)란 고요히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고 가만히 움직이지도 않으며 끌어당겨도 오지 않고 밀쳐내도 가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도(道)를 터득한 모습이다.’ 나는 이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시험 삼아 이렇게 물어보자. 신농(神農)․요(堯)․순(舜)․우(禹)․탕(湯) 같은 이들은 성인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은가? 이 점에 관해 논하는 자들은 그들이 성인이라는 것을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이 다섯 성인의 행적을 살펴보면, 누구도 앞서 말한 의미의 무위(無爲)를 하지 않았다는 것은 분명하다.[…]이 다섯 성인은 세상의 훌륭한 통치자들로서, 자신의 몸을 수고롭게 하고 생각을 다 짜내어 백성들을 위해 이로움을 일으키고 해로움을 제거하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천자로부터 일반 서민에 이르기까지 수족을 움직이지 않고 근심 걱정하는 일 없이 일이 처리되었다든가 구하는 바가 충족되었다는 말을 나는 들어본 적이 없다.[…]내가 말하는 무위(無爲)란 사사로운 뜻이 공적인 일에 끼어들지 않고, 개인의 취향과 욕구가 올바른 수단을 왜곡하지 않으며, 이치에 따라 일을 진행하고 자질에 맞게 공을 세우며, 자연(自然)의 추세를 잘 헤아려서 교묘한 속임수가 비집고 들어갈 여지가 없게 하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일이 성취되더라도 자신을 과시할 게 없고, 공을 세워도 명성을 소유할 게 없다. 이것은 느껴지는 게 있는데도 반응을 하지 않고 공격을 받아도 꿈쩍도 하지 않는 그런 류의 무위(無爲)가 아니다. 만약 불을 질러 우물을 마르게 하고, 회수(淮水)의 물을 산으로 끌어올리려 한다면, 이것은 주관적 조작을 발휘해서 자연(自然)을 배반하는 것이다. 이런 것을 유위(有爲)라고 한다. 만약 물위를 갈 때는 배를 사용하고, 모래 위를 갈 때는 작은 수레[鳩]를 사용하며, 늪지를 갈 때는 바퀴 없는 썰매[輴]을 사용하고, 산속을 갈 때는 삼태기[蔂]를 사용하는 것, 여름철에는 물을 흘려보내고, 겨울철에는 물을 가두어 비축하는 것, 높은 곳은 밭으로 만들고 낮은 곳은 연못으로 만드는 것, 이런 것들은 내가 말하는 유위(有爲)가 아니다.” ("회남자" 「수무훈」)
* 무위의 작업과 기술
- “목수 경(慶)이 나무를 깎아서 거(鐻)라고 하는 악기걸이를 만들었다. 거가 완성되자, 그것을 본 사람들이 모두 놀라서 귀신같은 솜씨라고 하였다. 노나라 임금이 이 이야기를 듣고 그를 만나 물었다. ‘그대는 어떤 기술로 이것을 만들었는가?’ 목수 경이 대답했다. ‘저 같은 장인이 무슨 특별한 기술이 있겠습니까만, 한 가지 있기는 합니다. 저는 거를 만들 일을 앞두고서 감히 저의 기운을 소모시킨 적이 없습니다. 반드시 재계[齋]하여 마음을 고요하게 만듭니다. 재계한 지 3일이 되면, 작품을 잘 만들어서 받을 상이나 벼슬․녹봉 따위에 대한 생각을 마음에 품지 않게 됩니다. 재계한 지 5일이 되면, 제가 만들 작품에 대한 세간의 비난이나 칭찬, 작품의 뛰어남과 서투름에 대한 생각을 마음에 품지 않게 됩니다. 재계한 지 7일이 되면, 갑자기 저한테 사지와 형체가 있다는 사실도 잊어버리게 됩니다. 이쯤 되면 군주의 존재도 조정의 일도 마음에서 깨끗이 사라져서, 제 솜씨가 오롯하게 되고 저를 어지럽힐 만한 외적 요소들이 다 소멸합니다. 그런 뒤에 저는 산림 속으로 들어가 나무들의 자연스러운 성질을 관찰합니다. 그러다 최상의 형태를 가진 나무를 발견하게 되지요. 그런 다음에 완성된 거의 모습을 떠올려봅니다. 또 그런 다음에 나무에 손을 댑니다. 이 가운데 하나라도 여의치 않으면 그만둡니다. 거를 만드는 일은 제 자신의 자연스러운 본성을 나무의 자연스러운 본성에 합치시키는 과정입니다. 제가 만든 기물이 귀신같다고 여겨지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장자" 「달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