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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을 위한 하자 인문학 5 : 애전별친愛錢別親글 수 387
서쪽 숲 나라 엘리노어 파전 당신은 유월의 풀밭보다 아름다워요. 달을 지켜보는 외딴 별처럼 빛나고요. 나는 나만의 푸른 풀밭을 갖고 싶었어요. 그리고 나만의 별을 꿈꾸었지요. 하지만 난 당신이 누군지 정말 몰라요. 1 일벌레 나라의 젊은 임금님이 마지막 시구를 다 쓰자마자, 하녀 셀리나가 문을 똑똑 두드렸어요. 임금님이 짜증스럽게 소리쳤어요. "뭐야, 셀리나?" 셀리나가 차분하게 대답했어요. "대신들이 뵙자고 하는데요." "무슨 일로?" "저한테는 무슨 일인지 말씀해주시지 않았어요." 임금님은 귀찮다는 듯이 말했어요. "난 지금 글 쓰느라 바빠." 그러자 셀리나도 딱 잘라서 말했어요. "당장 오시랬어요." "음 그럼 네가 대신들한테 가서..." "저는 계단청소를 해야 해요." 임금님은 못마땅한 듯 끄응 소리를 내며 펜을 놓고 밖으로 나왔어요. 임금님이 계단을 내려가는데, 셀리나가 말했어요. "폐하께서 대신들을 만나시는 동안 방을 청소해도 되겠죠?" "그래, 하지만 제발 책상에는 손대지 마. 도대체 몇 번이나 얘기해야 알아듣겠어?" 셀리나는 이렇게 대꾸했어요. "예, 알았어요. 폐하는 계단의 양탄자 누르개나 조심하세요." "무슨 소리야? 양탄자 누르개는 있지도 않잖아?" "그러니까 조심하시라고요." 젊은 임금님은 혼잣말로 중얼거렸어요. "셀리나는 가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한다니까." 이럴 때면 임금님은, '나는 도대체 왜 셀리나를 쫒아내지 않는 거지?"하고 이상하게 생각했어요. 하지만 임금님은 곧 셀리나가 갈 곳이 없다는 사실을 떠올렸지요. 셀리나는 태어난 지 한 달 만에 고아원 계단에 버려져 거기에서 하녀일을 배우며 자랐어요. 그리고 열네 살이 되자 양철 옷가방 하나만 달랑 들고 궁전으로 왔어요. 셀리나는 지난 5년 동안 정말 열심히 일했어요. 덕분에 부엌데기에서 벗어나 임금님의 방을 청소하는 하녀가 되었지요. 만약 임금님이 쫒아낸다면 셀리나는 갈 곳이 없어요. 아마 고아원으로 돌아가서 죽을 때까지 거기에서 살아야 하겠지요. 그래서 임금님은 셀리나를 흘겨보기만 하고 아래층으로 내려갔어요. 누름대가 없는 양탄자를 조심조심 밟으면서 말이에요. 일벌레 나라에는 왕비님이 없었어요. 그래서 대신들은 틈만 나면 임금님에게 우르르 몰려와 왕비를 맞아들이라고 졸랐어요. 공주님만이 왕비가 될 수 있다는 말도 하면서요. 그러면 젊은 임금님은 이렇게 물었어요. "어떤 공주들이 있소?" 이 젊은 임금님의 아버지는 아들에게 '존'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어요. 존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들은 성실하고 부지런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래요. 일벌레 나라 사람들은 쓸데없는 생각을 아예 하지 않았어요. 다들 자기 일에만 파묻혀서 남의 일에는 조금도 마음을 쓰지 않았죠. 하지만 자기가 맡은 일만은 빈틈없이 해냈어요. 임금님을 공주님과 짝지어 주는 일은 대신들의 몫이었고, 공주님과 결혼하는 일은 임금님의 몫이었어요. 존 임금님은 어릴 때부터 공주님과 결혼해야 한다고 배워 왔어요. 그래서 결혼할 나이가 되자 의젓하게 물었어요. "어떤 공주들이 있소?" 그러자 총리 대신이 목록을 살펴보며 대답했어요. "지도에서 우리 나라 위에 있는 북쪽 산 나라에 공주님이 있습니다. 밑에 있는 남쪽 나라에도 공주님이 있고요. 그리고 오른쪽에 있는 동쪽 늪 나라에도 공주님이 있습니다. 폐하께서는 이 공주들 가운데 아무에게나 결혼하자고 청하시면 됩니다." "왼쪽에 있는 서쪽 숲 나라는 어떤가? 거기에는 공주가 없소?" "저희는 서쪽에 무엇이 있는지 모릅니다. 폐하. 저희가 알기로는 울타리를 넘어서 서쪽 나라로 가 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저희는 단지 서쪽 숲 나라가 마녀들이 사는 허허벌판이라는 것밖에 모릅니다." 임금님이 따졌어요. "어쩌면 아름다운 공주들이 사는 푸른 숲이 우거진 풍요로운 나라일지도 모르잖소. 내가 내일 서쪽 나라로 사냥을 가서 알아보겠소." 대신들이 깜짝 놀라서 소리쳤어요. "폐하! 절대로 안 됩니다!" "절대로 안 된다고!" 존 임금님은 그 말을 곰곰이 되씹었어요. 그러자 까맣게 잊고 있던 어린 시절의 일이 떠올랐어요. 존 임금님의 부모님도 서쪽 숲으로는 절대 가지 말라고 입버릇처럼 일렀거든요. 그때마다 꼬마 존은 어머니에게 물었어요. "왜 서쪽 숲에 가면 안 돼요?" 그러면 어머니는 걱정스럽게 말했어요. "거기엔 위험한 것들만 잔뜩 있단다." "뭐가 위험한데요, 어머니?" 어머니는 난처한 듯이 말했어요. "그건 말해줄 수 없단다. 나도 모르거든." "그럼 서쪽 숲이 위험한 줄은 어떻게 아셨어요?" "다들 그렇게 알고 있으니까. 이 나라의 어머니들은 모두 나처럼 아이들에게 타이른단다. 서쪽 숲에는 아주 이상한 것이 살거든." "하지만 서쪽 숲은 위험하지 않을지도 몰라." 존 왕자는 이렇게 중얼거렸어요. 그 뒤로 존의 머릿속에서는 '아무도 모르는 이상한 것이 산다'는 말이 떠나지 않았어요. 이상한 것이란 도대체 뭘까요? 존은 궁금해서 죽을 지경이었어요. 어느 날 존은 서쪽 숲으로 가보려고 궁전을 몰래 빠져나왔어요. 그런데 서쪽 숲으로 가니 높다란 울타리가 둘러쳐져 있지 뭐예요? 울타리는 너무 높아서 그 너머에 뭐가 있는지 보이지 않았어요. 또 가느다란 널빤지를 촘촘히 잇대어 놓아서 그 안을 들여다볼 수도 없었고요. 결국 울타리 때문에 서쪽 숲은 아예 보이지 않았어요. 아득한 옛날부터 있었던 것 같은 울타리에는 아이들만 올망졸망 붙어 있었어요. 몸을 웅크리고 조그만 틈새라도 있는지 구석구석 살펴보는 아이도 있고, 울타리 너머를 보려고 발돋움을 하는 아이도 있었어요. 어린 왕자도 몸을 웅크리고 틈새를 찾아보려고 했지만 헛일이었어요. 울타리는 너무 높고 촘촘했으니까요. 왕자는 풀이 죽어 궁전으로 돌아와 어머니한테 갔어요. 왕자가 물었어요. "어머니, 누가 서쪽 숲에다 울타리를 쳐놨어요?" 어머니는 깜짝 놀라 소리쳤어요. "아니, 너도 거기에 가봤단 말이냐?" 그리고는 이렇게 덧붙였어요. "그 글쎄다. 그 울타리를 누가 언제 세웠는지는 아무도 모른단다. 그저 까마득한 옛날부터 울타리가 있었어." 왕자가 말했어요. "저는 울타리를 부숴버리고 싶어요." 그러자 어머니는 깜짝 놀랐어요. "그 울타리를 널 지켜주고 있는걸!" 어린 왕자가 야무지게 물었어요. "무엇이 무서워서 절 지켜야 하죠?" 하지만 그것은 왕비님도 몰랐어요. 그래서 왕비님은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는, 입술에 손가락을 살며시 갖다 댔답니다. 든든한 울타리가 있어요 일벌레 나라의 어머니들은 마음이 놓이지 않았어요. 그래서 아이들한테 울타리 너머는 위험하다고 입이 닳도록 이야기했죠. 그래도 아이들은 틈만 나면 울타리로 뛰어가 틈새를 찾곤 했어요. 일벌레 나라의 아이들은 누구나 서쪽 숲에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품고 있었어요. 하지만 그 아이들이 자라서 결혼을 하고 자식을 낳으면 "서쪽 숲은 위험하니까 가지 말아라"하고 타일렀죠. 무엇 때문인지도 모르면서 말이에요. 그러니 존 임금님이 서쪽 숲으로 사냥을 가겠다고 했을 때 대신들이 펄쩍 뛴 것도 당연하지요. 대신들은 모두 자기 자식을 걱정하고 있었거든요. 대신들은 또 다시 소리쳤어요. "폐하, 절대로 안 됩니다!" 존 임금님은 나직이 대꾸했어요. "내가 어렸을 때 우리 어머니도 그렇게 말씀하셨지. 어쨌든 나는 내일 서쪽 숲으로 사냥을 갈 것이요." "폐하! 폐하께서 그 울타리를 무너뜨리시면, 이 나라의 모든 어머니와 아버지들이 벌떼같이 몰려나와 반대할 겁니다." 젊은 임금님이 말했어요. "걱정 마시오. 울타리를 뛰어 넘어 갈 테니까. 아무튼 내일 서쪽 숲에서 사냥을 할 거요." 임금님은 셀리나에게 사냥 도구를 챙기라고 말하러 방으로 갔어요. 그런데 셀리나가 빗자루를 든 채 임금님의 책상 위로 몸을 기울여 뭔가를 읽고 있지 않겠어요. 그것은 임금님이 쓴 시였어요! 임금님은 날카롭게 소리쳤어요. "그만 두지 못해!" 셀리나는 천연덕스럽게 말했어요. "아, 알았어요." 그러고는 책상에서 물러나 벽난로의 먼지를 탁탁 털었어요. 임금님은 셀리나가 말을 꺼내기를 기다렸지만, 셀리나는 아무 말 없이 청소만 했어요. 임금님이 일부러 무뚝뚝하게 말했어요. "나, 내일 사냥하러 갈 거야. 짐 좀 챙겨줘." 셀리나가 물었어요. "무슨 짐이요?" "그야 사냥할 때 쓸 것들이지." 임금님은 이렇게 말하면서 속으로 흉을 보았어요. '셀리나는 정말 머리가 나빠.' 셀리나가 말했어요. "알았어요. 사냥을 가신다고요?" "내가 방금 그렇게 말했잖아." "어디로 가세요?" "서쪽 숲으로" 그러자 셀리나는 호들갑스럽게 소리쳤어요. "어머나 세상에!" 임금님은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말했어요. "제발 내 말을 귀담아 들어줬음 좋겠어." 셀리나는 다시 먼지떨이로 책상을 탁탁 털었어요. 그 바람에 임금님이 시를 써 놓은 종이가 바닥에 팔랑 내려앉았어요. 임금님은 발끈 성을 내며 종이를 집어 들었어요. 그러고는 우물쭈물 얼굴을 붉히다가 간신히 입을 열었어요. "이거 읽었지? 그렇지?" 셀리나가 고개를 끄덕였어요. "음. 음!" 두 사람은 한동안 아무 말도 안했어요. 임금님이 다시 입을 열었어요. "읽을 만해?" 셀리나도 물었어요. "그거 시 아니에요?" "맞아" "저도 시라고 생각했어요. 음, 이제 방 청소는 거의 다 끝났네요?" 셀리나는 그렇게 말하고는 휙 나가 버리지 뭐예요. 혼자 남은 임금님은 셀리나에게 몹시 화가 났어요. 그래서 애꿎은 종이만 콱콱 꾸겨서 휴지통에 던져 버렸답니다. 2 이튿날 사냥 행렬이 서쪽 숲으로 떠났어요. 꿈에 부푼 젊은 임금님은 하얀 말을 타고 앞장섰고, 그 뒤로 사냥꾼들과 대신들이 따라갔어요. 곧 높다란 울타리가 나타났어요. 하지만 임금님이 보기에는 어렸을 때만큼 울타리가 높아 보이지 않았어요. 지금도 아이들은 울타리에 꼭 붙어서서 틈새를 찾거나 발돋움으로 울타리 너머를 보려고 애쓰고 있었어요. "얘들아, 비켜라!" 울타리 앞에 닿자 임금님은 이렇게 소리치더니 울타리 쪽으로 말머리를 돌렸어요. 다음 순간 임금님이 탄 말이 하얀 새처럼 울타리를 휘익 넘어갔고, 신하들이 딸그락딸그락 말발굽 소리를 내며 그뒤를 쫒았어요. 하지만 아무도 임금님을 뒤따르려고 하지 않았어요. 어떤 신하들은 자기 자식들한테 서쪽 숲에 가지 말라고 타이르는 처지였어요. 물론 자기도 은근히 겁이 났고요. 또 아침에 부모님한테 다시 한 번 주의를 받고 나온 신하도 있었어요. 부모님들도 임금님이 서쪽 숲으로 사냥하러 간다는 소문을 들었던 거지요. 그래서 자식을 둔 아버지이거나, 부모님의 아들인 신하들은 울타리 앞에서 말머리를 돌렸어요. 결국 부모님도 없고 자식도 없는 젊은 임금님만이 울타리를 훌쩍 뛰어넘어 숲으로 들어갔지요. 임금님은 말에서 내리자마자 맥이 쭉 빠졌어요. 바닥에는 낙엽 수북이 쌓여서 발목까지 푹푹 빠지고, 눈앞에는 볼품 없는 덤불 숲이 가로막고 있었거든요. 덤불 숲에는 삭정이와 마른 나뭇가지, 시꺼멓게 썩은 고사리와 잡초가 허연 이끼에 덮여 있었어요. 게다가 온갖 쓰레기가 가득했어요. 찢어진 그림과 망가진 인형, 찻잔과 받침, 녹슨 나팔, 부서진 새 둥지와 시든 꽃 목걸이, 너덜너덜한 리본, 깨진 유리구슬 따위가 곳곳에 널려 있었어요. 겉장이 떨어져 나간 책은 온통 낙서투성이고, 오래된 물감상자에는 굳어서 못 쓰게 된 물감이 조금 남아 있었어요. 그 밖에도 잡동사니가 수두룩했지만 하나같이 쓸모 없는 것들 뿐이었어요. 임금님은 윙윙 소리 나는 팽이를 돌려 보려고 했지만 감는 것이 망가졌는지 돌지 않았어요. 꼬리가 떨어진 연도 날지 못했어요. 임금님은 실망스럽고 짜증이 났어요. 그래서 쓰레기 더미너머에는 무엇이 있는지 보려고 쓰레기 숲을 뚫고 달려갔어요. 이번에는 잿빛 모래 벌판이 쓸쓸하게 펼쳐져 있었어요. 평평한 모래 벌판은 끝없이 넓었어요. 임금님은 한 시간이나 말을 타고 달렸지만 아무리 가도 똑같은 모래 벌판 밖에 보이지 않았어요. 임금님은 문득 겁이 났어요. 아무것도 없는 모래 벌판에서 영원히 말을 달려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 거예요. 뒤를 돌아보니 멀리 키 작은 덤불 숲이 그림자처럼 어렴풋이 보였어요. 만약 저 덤불 숲마저 보이지 않게 되면, 임금님은 이 모래 벌판에서 영영 길을 잃을 지도 몰라요. 겁에 질린 임금님은 말머리를 돌려 덤불 숲 쪽으로 힘껏 달렸어요. 임금님은 한 시간 만에 일벌레 나라의 울타리까지 왔어요. 그제야 임금님은 후유 하고 한숨을 쉬었어요. 울타리에 다닥다닥 붙어 있던 아이들이 임금님을 보고 기뻐서 소리쳤어요. "숲 나라엔 뭐가 있어요?" 임금님이 대답했어요. "쓰레기 더미밖에 없어." 아이들은 미심쩍은 눈초리로 임금님을 빤히 쳐다보았어요. 한 아이가 물었어요. "그럼 숲 속에는 무엇이 있나요?" 임금님이 대답했어요. "숲은 없어." 아이들은 도저히 믿지 못하겠다는 듯한 얼굴이었어요. 그래서 임금님은 두 말 않고 궁전으로 돌아갔어요. 궁전에서는 신하들이 임금님을 반갑게 맞았어요. 신하들이 외쳤어요. "폐하께서 무사히 돌아오시다니, 하느님 고맙습니다!" 그러고는 아이들과 똑같이 물었어요. "거기엔 무엇이 있습니까?" 존 임금님이 대답했어요. "아무것도 없소, 사람도 없고." "외따로 사는 마녀도 없습니까?" "외롭게 사는 공주도 없고 그러니 내일 북쪽 산나라에 가서 공주에게 결혼하자고 하겠소." 임금님은 2층으로 올라가서 셀리나에게 짐을 꾸리라고 했어요. 셀리나가 물었어요. "왜요? 임금님이 대꾸했어요. "북쪽 나라의 공주를 만나러 갈 거야." "털외투와 털장갑이 필요하겠군요." 셀리나는 그렇게 말하고 짐을 꾸리러 갔어요. 임금님은 문득 자기가 쓴 시가 필요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하지만 셀리나가 벌써 휴지통을 비워버렸지 뭐예요. 그래서 골이 난 임금님은 셀리나가 뜨거운 우유를 갖다 줄 때도 '잘 자라'는 인사조차 하지 않았답니다. 3 이튿날, 북쪽 산에 닿은 임금님은 깜짝 놀랐어요. 미리 소식을 보냈는데도 아무도 임금님을 마중 나오지 않았거든요. 임금님이 몸소 찾아오는 일은 퍽 드문에 말이죠. 북쪽 산 나라의 날씨는 굉장히 차가웠어요. 아니, 차갑다기보다는 싸늘했어요. 거리에도 사람들이 있고 가게나 집에도 사람들이 있었지만, 존 임금님을 쳐다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요. 우연히 존 임금님과 눈이 마주쳐도 눈 하나 깜짝 하지 않는 거예요. 존 임금님은 생각했어요. '저 사람들은 아예 표정이 없는 걸까. 저렇게 딱딱하고 차가운 얼굴은 난생 처음 보는군.' 존 임금님은 그 사람들을 보기만 해도 등골이 오싹했어요. 공기도 마찬가지였지요. 마치 얼어붙은 눈처럼 공기는 아무 움직임도 없었어요. 어느 모로 보나 썩 신나는 출발은 아니었지요. 그래도 젊은 임금님은 궁전으로 올라갔어요. 궁전은 얼음산 꼭대기에 있었는데, 꼭 얼음으로 만든 것처럼 반짝거렸어요. 말은 임금님을 태우고 힘겹게 산꼭대기로 올라갔어요. 궁전에 닿았을 때 임금님의 손은 빨갛고 코는 시퍼렇게 얼어 있었어요. 임금님이 자기 이름을 말하자, 키다리 문지기가 따라오라고 손짓했어요. 존 임금님은 문지기를 따라가면서 자기 모습이 멋지게 보이지 않을까봐 걱정했어요. 방은 온통 새하얘서 꼭 얼음창고에 들어온 기분이었어요. 존 임금님은 난로가 있는지 살펴 보았어요. 커다란 난로가 있긴 했지만, 안에는 얼음 조각만 잔뜩 들어 있지 뭐예요. 방 끝에는 북쪽 나라의 임금님이 앉아 있었어요. 그 밑에는 신하들이 두 줄로 길게 늘어서 있었는데 신하들은 동상처럼 꼼짝도 하지 않았어요. 여자들은 흰옷을 입고, 남자들은 유리 같은 갑옷을 입고 있었어요. 북쪽 나라 임금님은 어떤 옷을 입었는지 보이지 않았어요. 얼어붙은 폭포처럼 하얀 수염이 턱과 뺨에서부터 발끝까지 늘어져 있었거든요. 공주님은 임금님의 발치에 앉아 있었는데, 하얀 천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어요. 문지기가 걸음을 멈추고 소곤거렸어요. "일벌레 나라의 존 임금님이 오셨습니다." 그래도 방안은 여전히 조용했어요. 아무도 움직이거나 입을 열지 않았어요. 존 임금님은 꼭 얼음창고에 들어간 기분이었어요. 하지만 이대로 돌아갈 수는 없었어요. 존 임금님은 용기를 내어 북쪽 산 나라의 임금님이 있는 쪽으로 쭈르르 미끄러져 갔어요. 미끄럼을 탈 생각은 없었지만 바닥이 얼음판이어서 어쩔 수 없었죠. 늙은 임금님은 차갑고 의심스런 눈초리로 존 임금님을 빤히 쳐다보았어요. 존 임금님은 '흠흠'하고 목을 가다듬고 나서 나지막이 말했어요. "공주님과 결혼하고 싶어서 왔습니다." 북쪽 나라 임금님은 발치에 앉아 있던 공주님에게 살짝 고갯짓을 했어요. '네 맘대로 하라!'는 뜻인 것 같았어요. 하지만 존 임금님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말문이 막혔어요. 전에 쓴 시라도 생각나면 좋으련만! 존 임금님은 그 시를 생각해내려고 무진 애를 썼어요. 그러나 시란 첫느낌이 가장 중요한 법이에요. 그 느낌을 놓치면 다시는 똑같은 시를 쓸 수 없게 되죠. 결국 존 임금님은 공주 앞에 무릎을 꿇고 이렇게 속삭였어요. 당신은 눈송이보다 희고 얼음보다 차갑소 얼굴은 보이지 않지만 아마도 예쁘지 않을 거요 눈처럼 차가운 여인이여 나는 당신과 결혼하고 싶지 않소 하지만 나는 결혼신청을 하러 왔으니 당신이 거절해 주기 바라오! 존 임금님이 말을 마치자, 방 안은 다시 숨막힐 듯이 조용해졌어요. 그제야 존 임금님은 자기가 엉뚱한 시를 읊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존 임금님은 5분 동안 기다렸다가 꾸벅 절을 하고 방 밖으로 미끄려져 나왔어요. 존 임금님은 바깥에 나오자 두 손으로 가슴을 쓸어 내리며 몇 번이나 숨을 내쉬었어요. 그러고는 말에 올라타 쏜살같이 일벌레 나라로 돌아왔어요. 신하들이 물었어요. "결정하셨습니까?" 존 임금님이 말했어요. "확실하게 결정했어." 신하들은 기뻐서 손바닥을 쓱쓱 비비며 물었어요. "그럼 결혼식은 언제입니까?" "흥, 그런 일은 절대로 없어!" 존 임금님은 이렇게 내뱉고는 자기 방으로 올라갔어요. 그러고는 셀리나를 불러 불을 피우라고 했어요. 셀리나는 불을 피우는 솜씨가 좋아서 금세 불을 활활 지폈죠. "북쪽의 공주님은 어땠어요?" 임금님이 말했어요. "눈곱만큼도 맘에 들지 않았어." "폐하가요, 아니면 공주님이요?" 임금님이 쏘아붙였어요. "네 주제를 좀 알아라, 셀리나!" "아, 알았어요. 더 시키실 일은 없으세요?" "있어, 짐을 다시 싸 줘. 내일은 남쪽 나라의 공주를 만나러 갈 거야." "그럼 밀짚모자와 무명 잠옷이 필요하시겠네요." 셀리나는 이렇게 말하고 짐을 챙기러 가려고 했어요. 그런데 임금님이 다시 부르지 않겠어요. "어, 셀리나......, 저, 저...... ." 셀리나는 문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어요. "저, 그런데 말이야, 셀리나! 네가 읽었던 음, 내 시가 음, 어떤 내용이었는지 기억나?" "저는 할 일이 너무 많아서 시나 외우고 있을 틈이 없어요." 셀리나는 이렇게 대꾸하고 나가 버렸어요. 임금님은 그만 기분이 몹시 상하고 말았지요. 그래서 셀리나가 침대를 따뜻하게 데워 주려고 뜨거운 물병을 가지고 왔을 때도 '고맙다'는 말을 하지 않았답니다. 4 이튿날 젊은 임금님은 남쪽 나라로 떠났어요. 여행길은 상쾌하기 그지없었어요. 임금님은 아주 기분이 좋아졌어요. 하늘은 파랗고, 바람은 잔잔하고, 햇살은 따사로이 내리쬐고 있었어요. 갈수록 점점 푸르러지는 하늘, 더욱 잔잔해지는 바람, 더욱더 따갑게 내리쬐는 햇볕...... 하지만 마침내 남쪽 나라에 다다랐을 때에는 상쾌한 기분이 싹 달아나고 그저 나른하기만 했어요. 남쪽 나라에는 취할 듯 진한 장미 향기가 풍기고 눈이 따갑도록 뜨거운 해가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어요. 땅은 뜨겁게 달아올라 말발굽에 박힌 쇳조각까지 녹일 정도였지요. 존 임금님의 말은 하도 지쳐서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했어요. 말 옆구리에서는 번들거리는 땀이 흘러내리고, 존 임금님의 이마에서도 땀이 비 오듯 흘러내렸어요. 미리 심부름꾼을 보내 존 임금님이 찾아온다는 소식을 전했지만, 이번에도 마중 나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요. 남쪽 나라 임금님이 사는 도시는 마치 잠든 것처럼 고요했어요. 창마다 커튼이 내려져 있고, 거리에는 사람 그림자 하나 보이지 않았어요. 하지만 길을 물을 필요는 없었죠. 둥근 지붕과 뾰족탑이 있는 궁전은 황금으로 지었기 때문에 해처럼 눈부시게 빛났거든요. 임금님의 말은 비틀비틀 걷다가 궁전 문에 닿자 털썩 주저앉고 말았어요. 임금님도 안장에서 비틀비틀 내려와 넓은 문간을 지키는 문지기에게 이름을 말했어요. 하지만 뚱뚱한 문지기는 하품만 할 뿐 들은 척도 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존 임금님은 혼자서 남쪽 나라 임금님을 찾아가야 했어요. 남쪽 나라 임금님은 호화로운 황금 걸상에 기대어 앉아 있고, 공주님은 임금님 발치에 있는 금빛 방석 위에 축 늘어져 있었어요. 대신들은 방석을 높이 쌓아 높은 황금 걸상에 누워 빈둥거리고 있었고요. 모두 금빛 옷을 입고 있는 탓에, 어느 것이 사람이고 어느 것이 방석인지 알아보기 힘들었어요. 하지만 임금님과 공주님만은 확실히 알 수 있었어요. 공주님은 아름다웠어요. 물론 너무너무 뚱뚱하긴 했지만요. 임금님은 공주님보다 훨씬 더 뚱뚱했어요. 존 임금님이 가까이 다가가도 임금님은 졸린 듯 멍청하게 웃을 뿐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았어요. 존 임금님이 나직이 말했어요. "저는 따님께 결혼을 청하러 왔습니다." 임금님은 아까보다 더 졸린 듯 히죽 웃었어요. '으음, 마음대로 해.' 임금님은 꼭 이렇게 말하는 듯했어요. 모두들 온갖 일이 귀찮은 듯 존 임금님이 알아서 해 주기만을 기다리는 것 같았어요. 그래서 존 임금님은 공주에게 결혼하자고 말해야 겠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무슨 말을 할지도 생각나지 않고 기운도 쭉 빠졌어요. 존 임금님은 잊어버린 시를 다시 떠올리려고 애썼어요. 그 시를 공주님한테 들려주면 틀림없이 결혼하겠다고 할 것 같았거든요. 머릿속이 빙빙 도는 것 같더니, 드디어 시구가 떠올랐어요. 존 임금님은 바닥에 축 늘어져 있는 공주님 앞에 무릎을 꿇고 웅얼웅얼 시를 읊었답니다. 버터보다도 기름진 당신은 불가에 있으면 흐물흐물 녹아 버릴 것 같소 당신은 내가 바라는 것보다 훨씬 더 뚱뚱하군요 당신을 보고 있으면 용기가 점점 없어져 간다오 하지만 나는 결혼신청을 하러 왔으니 당신이 거절해 주기 바라오 공주님은 존 임금님의 얼굴에 대고 하품을 쩌억 했어요. 그러고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어요. 존 임금님은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왔어요. 그리고 쓰러진 말을 일으켜 세워 올라타고, 일벌레 나라로 터덜터덜 돌아왔어요. 대신들은 목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다가 임금님에게 물었어요. "결정하셨습니까? 남쪽 나라의 공주님과는 마음이 맞았나요?" "완전하게." 대신들은 기뻐서 얼굴이 환해졌어요. "그럼 남쪽 나라 공주님은 언제 폐하의 신부가 됩니까?" "절대로 그런 일은 없어!" 존 임금님은 그렇게 소리치고 자기 방으로 올라 갔어요. 그러고는 셀리나를 불러 얼음을 띄운 오렌지 주스를 가져오라고 했어요. 셀리나는 오렌지 주스를 아주 맛있게 만들거든요. 곧 셀리나가 길쭉한 잔에 주스를 담고 빨대를 꽂은 다음 오렌지색 얼음을 동동 띄워서 가져왔어요. 임금님이 주스를 마시는 동안, 셀리나가 물었어요. "남쪽 나라 공주님과는 잘됐어요?" 존 임금님은 시큰둥하게 대답했어요. "아니." "폐하가 마음에 안 드신 거예요, 아니면 그 공주님이 폐하를 싫다고 한 거예요?" "네 분수를 잊지 마, 셀리나!" "아, 알았어요. 이제 시키실 일 없으세요?" "있어, 내일은 동쪽 늪 나라의 공주님을 만나러 갈 거야." "그럼 덧신과 비옷을 준비해야겠군요." 셀리나는 이렇게 말하고, 임금님의 가방을 들고 나가려고 했어요. "잠깐, 셀리나!" 셀리나는 걸음을 멈추었어요. "내 휴지통을 어디에 비우지?" 셀리나가 대답했어요. "쓰레기통에요." "이번 주에 쓰레기통을 비웠을까?" "제가 일부러 청소부한테 버리라고 했는걸요. 쓰레기가 너무 많이 찬 것 같아서요." 셀리나의 대답을 듣고, 임금님은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었어요. 그래서 셀리나가 시원하게 목욕을 할 수 있도록 준비해 두었다고 알리러 왔을 때, 임금님은 뒤도 돌아보지 않았어요. 임금님은 등을 돌리고 서서 창문을 톡톡 두드리며, 셀리나 따위는 눈에 보이지도 않는다는 듯이 노래만 흥얼거렸답니다. 5 동쪽 늪 나라로 가는 길은 북쪽 산 나라와 남쪽 나라로 갔던 여행과는 사뭇 달랐어요. 길은 멀지 않았지만 바람이 사납게 불어대는 통에 임금님은 안장에서 떨어질 뻔 했지요. 마치 세상의 온갖 바람이 동쪽 나라로 모여든 것 같았어요.. 바람은 한꺼번에 휘이잉, 윙윙, 쌩쌩, 으르릉거렸어요. 살을 에는 듯한 찬 바람, 거칠게 몰아치는 바람이 나뭇가지를 때리고 기둥과 팻말을 쓰러뜨렸어요. 덜커덩, 우당탕 소리에 존 임금님은 귀가 먹먹했어요. 경치를 볼 엄두도 내지 못했고요. 날아가려는 모자를 붙들랴, 말에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애쓰랴, 임금님은 정신이 하나도 없었거든요. 그저 늪 나라의 시골은 춥고 질퍽질퍽하며, 도시는 칙칙한 잿빛이라는 것만 어렴풋이 느꼈어요. 존 임금님은 싸늘하고 조용하던 북쪽 나라와 나른한 남쪽 나라를 생각하면서 중얼거렸어요. "이런 곳을 조용하다고 할 순 없겠지!" 아무렴, 그렇고말고요. 늪 나라의 도시에서는 사람들이 이리저리 몰려다니며 뭔가를 열심히 하고 있었어요. 창문이 덜컹거리고, 문이 쾅쾅거리고, 개가 컹컹 짖고, 마차가 천둥처럼 요란한 소리를 내며 거리를 내달렸어요. 사람들은 발을 동동 구르며 고래고래 소리치고 있었고요. '이번에는 마중 나온 사람이 있을까?' 이번에도 미리 심부름꾼을 보냈기 때문에 존 임금님은 한 가닥 기대를 걸었어요. 네모난 돌로 지은 궁전에 거의 다 왔을 때였어요. 갑자기 문이 열리면서 사람들이 물밀듯이 쏟아져 나오는 거예요. 존 임금님은 자기를 반기는 줄 알고 뛸 듯이 기뻤어요. 짧은 치마를 입은 여자가 막대기를 쥐고 머리칼을 나부끼며 앞장서서 뛰어왔어요. 그 여자는 존 임금님에게 다가오더니, 다짜고짜 말갈기를 붙들고 소리쳤어요. "하키 할 줄 알아?" 그러고는 존 임금님이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대뜸 고함을 쳤어요. "남자 한 사람이 모자라! 따라와!" 그러더니 존 임금님을 말에서 끌어내려 손에 막대기를 쥐여 주었어요. 어리둥절해하던 존 임금님이 정신을 차려 보니, 어느새 궁전 뒤의 넓은 들판으로 끌려와 있었어요. 그곳은 발목까지 푹푹 빠지는 진창인데, 앞이 훤히 트여 있고 밑은 절벽이었어요. 절벽 밑에서는 싸늘한 잿빛 파도가 바위에 철썩철썩 부딪치고, 절벽 위에서는 거센 바람이 몰아쳤어요. 경기가 시작되었어요. 하지만 존 임금님은 자기가 어느 편인지, 무슨 경기를 하고 있는지도 몰랐어요. 한 시간 동안 칼바람 속에서 정강이를 얻어맞기만 했죠. 바다에서 날아오는 짭짤한 물방울 때문에 살갖이 따끔거리고, 사람들의 아우성 소리에 귀가 아팠어요. 존 임금님은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리다가 진창에 고꾸라지고 말았어요. 그 바람에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진흙투성이가 되었죠. 마침내 경기가 끝난 것 같았어요. 존 임금님은 지칠 대로 지쳐서 털썩 주저 앉았어요. 하지만 마음 편히 쉴 수도 없었어요. 아까 그 여자가 존 임금님의 등을 탁 치며 이렇게 말하는 게 아니겠어요. "일어나! 넌 누구냐?" 존 임금님은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어요. "난 일벌레 나라의 임금님이요." "오 그래? 그런데 뭣하러 왔어?" "공주에게 결혼 신청을 하러 왔소." "그럴 리가! 아무튼, 계속 말해 봐." 임금님은 갸냘픈 목소리로 말했어요. "설마 당신이 공주는 아니겠......" "아니, 내가 공주야. 왜, 그러면 안 돼? 어서 얘기나 해 봐!" 존 임금님은 정신을 차리려고 무진 애를 썼어요. 그러다가 잊어버린 시를 기억해냈죠. 하지만 존 임금님의 입에서 나온 것은 이런 시였답니다. 당신은 천둥보다 시끄럽고 소금보다 꺼칠꺼칠하구려 사람이란 타고난 대로 사는 법이니 어차피 당신 잘못은 아니오 나는 당신과 취미가 다르오 당신 성격도 나와는 맞지 않소 난 당신에게 결혼을 신청하러 왔지만 부디 당신이 거절해 주기를 그러자 공주님이 사납게 고함쳤어요. "흥, 그렇게는 못해!" 공주님은 하키 막대기를 높이 쳐들고 존 임금님에게 덤벼들지 뭐예요. 게다가 공주님 뒤에서는 성난 신하들까지 막대기를 쳐들고 쫒아 오는 거예요. 존 임금님은 무시무시한 진흙투성이의 무리를 힐끗 보고는 그대로 내뺐어요. 존 임금님은 아슬아슬하게 막대기를 피해서 말등에 올라타고 따그닥따그닥 달렸어요. 정신없이 달리던 임금님은 늪 나라 사람들의 고함 소리가 바람 소리에 묻혀 버린 다음에야 고삐를 늦추었지요. 얼마 지나지 않아 바람 소리도 잦아들었어요. 마침내 젊은 임금님은 진흙투성이가 된 채 지친 몸을 이끌고 헉헉거리며 돌아왔어요. 대신들은 문 앞에서 임금님을 기다리고 있다가 소리쳤어요. "폐하, 다녀오셨습니까! 동쪽 나라 공주님과는 뜻이 잘 맞으셨는지요?" 존 임금님은 숨을 몰아쉬며 대답했어요. "완전하게!" 대신들은 기뻐서 덩실덩실 춤을 추었어요. "그럼, 경사스러운 날은 언제로 정하셨습니까?" 그러자 존 임금님이 소리를 버럭 질렀어요. "그런 일은 절대 없어!" 그러고는 곧장 자기 방으로 올라가, 셀리나에게 잠자리를 준비하라고 소리쳤어요. 셀리나는 언제나 솜씨 좋게 잠자리를 마련해주었거든요. 얼마 안 있어, 당장 눞고 싶을 만큼 아늑해 보이는 잠자리가 준비되었어요. 셀리나가 잠옷과 슬리퍼를 내놓으면서 물었어요. "동쪽 나라 공주님은 어땠나요? 존 임금님은 이맛살을 찌푸리며 대답했어요. "생각하기도 싫어!" "폐하가 마음에 안 들었나요? 아니면 그 공주님인 싫다고 한 거예요?" "주제도 모르고 까부는 구나, 셀리나!" "아, 알았어요. 더 필요하신 건 없나요?" "아니, 그렇지 않아. 그게 없으면 아무 일도 안 될 거야......." "그게 뭔데요?" "내 시 말이야." "폐하의 시요? 예전에 썼던 그 시 말씀하시는 거예요?" "물론이야." "저런, 왜 진작 말하지 않으셨어요?" 셀리나는 이렇게 말하며 호주머니에서 종이 쪽지를 꺼내는 게 아니겠어요. 6 젊은 임금님은 분통이 터져 발을 동동 굴렀어요. 임금님은 셀리나를 사납게 윽박질렀어요. "그럼, 이걸 늘 가지고 다녔단 말야?" "왜, 그럼 안 돼요? 폐하께서 버리셨잖아요?" "넌 그걸 쓰레기통에 버렸다고 했잖아." "저는 그런 말 한 적 없어요." "그 시의 내용도 생각나지 않는댔잖아." "그건 사실이에요. 저는 시를 외울 틈이 없거든요." "아무튼 그 시를 항상 갖고 다녔잖아." "그건 '아주' 다른 문제예요." "왜 그랬지?" 셀리나는 딱 부러지게 말했어요. "그건 제 맘이에요. 폐하의 작품은 그렇게 해도 돼요. 자기 작품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 사람은 존경 받을 가치가 없으니까요." 젊은 임금님은 애처롭게 말했어요. "셀리나, 난 정말로 내 작품을 아껴. 정말이야. 시를 구겨서 휴지통에 버린 다음에 얼마나 뉘우쳤는지 몰라. 난 네가 그 시를 좋아하지 않아서 버렸던 거야." "저는 싫다고 하지 않았는데요." "아니........ 그랬어?" "그 시는 괜찮았어요." "셀리나, 정말이야? 정말 괜찮았어? 셀리나, 난 그 시를 잊어버렸어! 나한테 다시 읽어 줘." 그러자 셀리나가 말했어요. "안 돼요. 폐하께서는 이번 일로 혼 좀 나셔야 해요. 그러면 다음부터는 시 쓴 종이를 버리기 전에 꼭 외우시겠죠." 그 순간 젊은 임금님이 기뻐하며 소리쳤어요. "그 시가 생각났어! 아, 그래, 이젠 완전히 생각나. 들어 봐!" 그러고는 셀리나의 손을 잡고 시를 읊었어요. 당신은 꿀보다 달콤하고 비둘기보다 다정하오 당신은 세상의 모든 남자가 사랑하는 바로 그런 여자요 나는 당신 없이는 살 수가 없소 더 이상 무슨 말을 하리오 내가 결혼해 달라고 하면 부디 허락해 주기를! 잠시 침묵이 흘렀어요. 셀리나는 말없이 앞치마만 만지작거렸어요. 젊은 임금님이 걱정스레 물었어요. "이 시가 아니야?" "대강 비슷해요." "셀리나, 나와 결혼해 줘! 제발!" 셀리나가 말했어요. "내일 다시 한 번 말해 주세요. 서쪽 숲 나라에서요." 존 임금님은 깜짝 놀라서 소리쳤어요. "서쪽 숲이라고! 그곳에 가면 안 되잖아." "누가 그래요?" "우리 어머니 아버지께서." 그러자 셀리나가 말했어요. "저는 부모님이 없어요. 고아원에서 자랐거든요." 임금님이 물었어요. "그럼 너는 서쪽 숲에 간단 말이야?" 셀리나가 대답했어요. "네. 쉬는 날마다 꼬박꼬박 가는걸요. 내일은 제가 한 나절만 일하는 날이에요. 서쪽 숲에 가고 싶으시면 뒷문에서 기다리세요. 저와 함께 서쪽 숲에 가도록 하죠." "서쪽 숲에 어떻게 들어가는데?" "울타리에 구멍이 있어요." 임금님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물었어요. "서쪽 숲에 갈 때 가져가고 싶은 거 없어?" "이거면 돼요." 셀리나는 이렇게 말하고 종이 쪽지를 호주머니에 도로 넣었어요. 7 이튿날, 점심때가 지나자 셀리나는 일을 마치고 몸단장을 했어요. 레이스가 달린 분홍빛 웃옷을 입고 리본이 달린 모자를 썼어요. 그리고는 임금님과 뒷문에서 만나, 손을 잡고 울타리쪽으로 갔어요. 일벌레 나라와 서쪽 숲 나라를 갈라 놓은 울타리로요. 여느 때처럼 울타리에는 아이들이 올망졸망 모여서 그 안을 들여다보려고 애쓰고 있었어요. 임금님과 셀리나가 나타나자, 아이들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두 사람을 지켜보았어요. 임금님과 셀리나는 울타리를 따라 걸어갔어요. 셀리나는 조그만 소리로 널빤지의 개수를 세면서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려 보았어요. 아이들은 다 큰 어른들이 자기들하고 똑같이 구는 걸 신기하게 바라봤어요. 그래서 두 사람을 졸졸 따라갔답니다. 하지만 임금님과 셀리나는 너무 들떠서 아이들이 따라오는 걸 눈치 채지 못했어요. 칠백칠십칠 번째 널빤지 앞에 왔을 때, 셀리나가 말했어요. "여기예요!" 그러고는 널빤지에 난 구멍으로 손가락을 집어넣더니 안쪽에 있는 걸쇠를 붙잡았어요. 널빤지가 좁은 문처럼 열리자, 셀리나와 임금님은 그 안으로 들어갔어요. 아이들도 우르르 따라 들어갔지요. 울타리 안으로 들어선 순간, 임금님은 자기 눈을 믿을 수가 없어서 눈을 비볐어요. 그곳엔 나무와 꽃으로 뒤덮인 숲이 있었어요. 싱싱한 나뭇가지마다 새들이 내려앉아 노래 부르고, 햇살을 흠뻑 받은 나뭇잎과 아름다운 꽃이 활짝 피어 있었어요. 임금님은 이렇게 아름다운 꽃과 향기는 처음이었어요! 셀리나가 임금님의 손을 잡고 길을 가르쳐 주었어요. 덕분에 임금님은 꽃과 나뭇잎을 헤치며 쉽사리 길을 찾아 나갔지요. 임금님은 다시 한 번 눈을 비볐어요. 잿빛 모래 벌판은 온데간데없고 짙푸른 풀밭이 눈앞에 펼쳐 있는 거예요. 드넓은 풀밭에는 군데군데 작은 숲이 있고, 숲마다 개울과 폭포가 흐르며 꽃들이 가득 피어 있었어요. 작은 숲 사이사이에는 아담한 밤색 오두막과 우윳빛 사원이 있고, 이끼가 깔린 땅에는 보랏빛 제비꽃이 피어 있으며, 새파란 하늘에는 온갖 새들이 날아다녔어요. 알록달록한 새끼 사슴이 개울에서 물을 마시고, 다람쥐들이 풀밭에서 뛰어 놀았어요. 작은 숲 너머에는 반짝이는 모래와 고운 조개껍데기, 알록달록한 자갈이 깔린 아름다운 금빛 바닷가가 있었어요. 그리고 짙푸른 바다, 유리처럼 맑은 바다에서 잔물결이 일렁이다가 하얗게 빛나는 절벽에 찰싹찰싹 부딪혔어요. 눈처럼 하얀 석회 동굴이 많은 절벽에 말이에요. 갈매기와 백조와 이름 모를 바다새들은 은빛 동그라미를 그리며 바다 위를 맴돌거나 모래밭에 내려앉아 부리로 날개를 다듬었어요. 숲의 동물들뿐 아니라 새들도 사람을 겁내지 않았지요. 햇빛과 달빛을 섞어 놓은 듯한 눈부신 빛이 온 누리를 비추는 곳, 서쪽 숲 나라! 임금님은 마치 더없이 아름다운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어요. 임금님이 조그맣게 한숨을 쉬었어요. "오, 셀리나! 난 이렇게 아름다운 경치를 한 번도 보지 못했어!" 셀리나가 말했어요. "정말이세요?" 임금님은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았어요. 그래오, 임금님도 언젠가 이런 꽃향기를 맡고 이런 개울과 바닷가를 거닐어 본 적이 있었어요. 언제였을까요? 그건 임금님이 아주 어렸을 때의 일이에요. 그 뒤로 그것들은 죽어 버렸거나, 살아 있더라도 예전처럼 아름답게 느껴지지 않았어요. 그래서 임금님은 어느덧 하나둘씩 잊어버렸죠. 임금님이 일벌레 나라에서 자라는 동안, 누군가가 울타리 너머로 그런 기억들을 던져 버린 것 같았어요. 서쪽 숲에는 아름다운 풀밭과 바닷가 말고도 다른 것들이 있었어요. 아까 따라 들어온 아이들은 이리저리 뛰어다녔지요. 아이들은 이끼 위에서 달리기를 하고, 개울과 바다 속에 들어가 첨벙거리고, 모래와 꽃과 조개껍데기를 가지고 놀았어요. 동굴이나 오두막으로 우르르 몰려들어 갔다가 인형과 나팔, 찻잔과 찻주전자, 이야기책과 그림책 같은 보물을 들고 뛰어나오기도 했고요. 인형은 요정처럼 아름답고, 나팔은 천사의 나팔처럼 맑은 소리를 냈어요. 찻주전자에는 임금님께 드릴 차가 가득 들어있고, 책 표지에서는 꼬마 요정과 영웅이 튀어나와 아이들과 어울려 놀았어요. 그 작은 보물들을 보고 있던 임금님은 잊어버렸던 게 생각난 듯 '앗!'하고 소리쳤어요. 그러더니 코앞에 있는 조그만 사원으로 뛰어 들어 갔어요. 잠시 뒤, 임금님은 윙윙 소리나는 팽이를 들고 나왔어요. 그 팽이는 임금님이 어렸을 때 맨 처음 가지고 놀던 장난감이었어요. 풀밭에서 팽이를 돌리니 아름다운 음악소리가 흘러나왔어요. 임금님이 갓난아이였을 때 어머니가 불러주던 자장가 같은 음악이! 임금님이 소리쳤어요. "아, 셀리나! 부모님은 왜 우리를 여기에 못오게 했을까?" 셀리나가 말했어요. "부모님은 다른 건 모두 잊어버리고, 서쪽 숲 나라에는 일벌레 나라를 위태롭게 만드는 게 있다는 사실만 기억했던 거지요." 임금님이 물었어요. "그게 뭔데?" 셀리나가 대답했어요. "꿈이죠." 임금님은 고개를 갸웃했어요. "어째서 전에 왔을 때는 이런 것들이 보이지 않았을까?" "혼자서 빈손으로 왔기 때문이지요." "그래, 이번에는 내 시를 가져왔지." 그러자 셀리나가 살며시 웃었어요. "그리고 저도 데려오셨잖아요." 임금님은 서쪽 숲 나라에 들어온 뒤 처음으로 셀리나를 똑바로 보았어요. 그러고는 셀리나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공주님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어요. 셀리나의 눈동자와 머리카락과 얼굴에는 은은한 빛이 감돌고 있었어요. 예전의 셀리나는 물론이고 누구한테서도 보지 못했던 은은한 빛이! 사랑스럽기 그지없는 미소와 다정한 손길, 너무도 아름다운 저 목소리. 아, 셀리나.... 임금님은 머리가 핑핑 도는 것 같았어요. 이제 셀리나는 은빛 서리가 내린 장미꽃잎 같은 옷을 입고 머리에는 무지개 같은 빛을 두르고 있었어요. 임금님이 말했어요. "셀리나, 당신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소." 셀리나가 말했어요. "그래요, 서쪽 숲에서는요." "셀리나, 내 시는 어디 있소?" 셀리나가 시를 건네주자, 임금님은 큰 소리로 읽었어요. 당신은 유월의 풀밭보다 아름다워요 달을 지켜보는 외딴 별처럼 빛나고요 나는 나만의 푸른 풀밭을 갖고 싶었어요 그리고 나만의 별을 꿈꾸었지요 하지만 난 당신이 누군지 정말 몰라요 임금님은 큰 소리로 물었어요. "오, 셀리나! 당신은 공주요?" 셀리나가 말했어요. "서쪽 숲에서는요." "그럼 나와 결혼해주겠소?" "네, 서쪽 숲에서요." "서쪽 숲 밖에서도 결혼해 주시오!" 임금님은 이렇게 소리치더니, 셀리나의 손을 꼭 잡고 새와 꽃의 숲을 지나 울타리까지 왔어요. 임금님이 숨가쁘게 말했어요. "자, 셀리나! 그렇게 해주겠어?" "뭘요?" "나하고 결혼해 주겠냐고?" 셀리나가 대답했어요. "네, 좋아요." 그리하여 셀리나는 임금님과 결혼했어요. 자기 일을 척척 잘 해내던 셀리나는 훌륭한 왕비님이 되었답니다. 결혼식날, 임금님은 일벌레 나라와 서쪽 숲 나라 사이에 있는 울타리에서 칠백칠십칠 번째 널빤지를 떼어 버렸어요. 그 뒤로는 어린아이나 어른이나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서쪽 숲 나라로 갈 수 있었답니다. 너무 뚱뚱해지지만 않는다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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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에서 영감을 받아 만들어진 노래, "서쪽 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