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줄

여성해방주의
기독교정신과 지리산
국민대회 때 거리에 가득한 최루탄 속에서 눈물을 흘리던 모습

시대와 사회와 삶에 대한 성찰과 고뇌 뿐 아니라 어둠을 뚫고 나아가 새벽을 깨우려는 의지로 충만하다
80년대 초 우리 사회를 무고한 아벨을 죽인 어둠의 시대로 인식하였지만, 춥고 어두움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는 희망과 용기를 간직하는 것이 어둠을 이기는 비결이라고 생각했다.

부당한 역사에 대한 회개에서 치유와 화해에 이르는 씻김굿을 그 주요한 창작.

어머니라는 주의 한을 어머니의 가슴으로 품어 역사 속에서 희생당한 뭇 민중여성의 넋에 접맥시키려는 여성민중주의를 표방한 번에서 독자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다.

민주화에 방해가 되는 바람직하지 못한 여성의 리스트를 열거하기도 하였다.


오늘날 어찌하여 민주길이 막혔는고 하니
복종생활 순종생활 굴종생활 '석삼종'때문이라
여자팔자 빙자해서 기생 노릇하는 여자
현모양처 빙자해서 법적 매춘하는 여자
사랑타령 빙자해서 노리개 노릇하는 여자
미모 빙자해서 사치놀음 하는 여자
가정교육 빙자해서 자녀차별 하는 여자
남편출세 빙자해서 큰소리치는 여자


* 쓸쓸함이 따뜻함에게
                         고정희

언제부턴가 나는
따뜻한 세상 하나 만들고 싶었습니다
아무리 추운 거리에서 돌아와도, 거기
내 마음과 그대 마음 맞물려 넣으면
아름다운 모닥불로 타오르는 세상,

불 그림자 멀리 멀리
얼음짱을 녹이고 노여움을 녹이고
가시철망 담벼락을 와르르 녹혀
부드러운 강물로 깊어지는 세상,
그런 세상에 살고 싶었습니다
그대 따뜻함에 내 쓸쓸함 기대어
우리 삶을 둥지 따로 틀 필요없다면
곤륜산 가는 길이 멀지 않다 싶었습니다

그런데 그게 쉽지가 않습니다
내 피가 너무 따뜻하여
그대 쓸쓸함 보이지 않는 날은
그대 쓸쓸함과 내 따뜻함이
물과 기름으로 와 외롭습니다

내가 너무 쓸쓸하여
그대 따뜻함 보이지 않는 날은
그대 따듯함과 내 쓸쓸함이
화산과 빙산으로 와 좌초합니다

오 진실로 원하고 원하옵기는
그대 가슴 속에 든 화산과
내 가슴 속에 든 빙산이 제풀에 만나
곤륜산 가는 길 트는 일입니다

한쪽으로 만장봉 계곡물 풀어
우거진 사랑 발 담그게 하고
한쪽으로 선연한 능선 좌우에
마가목 구엽초 오가피 다래눈
저너기 떡취 얼러지나물 함께
따뜻한 세상 한번 어우르는 일입니다

그게 뜻만으로 되질 않습니다
따뜻한 세상에 지금 사시는 분은
그 길을 가르쳐 주시기 바랍니다.

 

고정희는 1948년 전라남도 해남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광주 YMCA 대학생부 간사와 크리스찬 아카데미 출판부 책임간사, 가정법률상담소 출판부장을 지내면서 기독교 정신에 입각한 자유, 사랑, 정의 실천의 정신으로 대학생 문화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또한 그녀는 1980년대 초부터 여자와 남자가, 그리고 아이들과 어른들이 서로 평등하고 자유롭게 어울려 사는 대안 사회를 모색하는 여성주의 공동체 모임인 <또 하나의 문화>에 동인으로 참가하여 중추적인 역할을 감당해 나갔다.

운동가의 강인함과 시인의 열정 및 섬세함을 동시에 갖춘 고정희는 훈련된 지도자의 역량으로 <여성신문> 초대 주간을 맡아 명실상부한 여성주의적 대안 언론의 초석을 튼튼히 다진다.
고 정희를 한국문화사, 여성문화사의 한 중요한 모범으로 기리고자 할 때 또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시인으로서 고정희가 이룩한 업적이다. 고정희는 한국에서 페미니즘 문학이라는 개념을 최초로 정립하고 그 뛰어난 실천적 전범을 보였던 작가였다. 한국 문학사에서 고정희 이전에 '여성의 경험'과 '여성의 역사성' 그리고 '여성과 사회가 맺는 관계방식'을 특별한 문학적 가치로 강조하고 이론화한 작가는 아무도 없었다. 고정희가 없었다면 한국문학사에 페미니즘이라는 중요한 인식의 장은 훨씬 더 늦게 열렸을 것이다.

시인 고정희는 1975년 <현대시학>을 통해 문단에 나온 이래 15년간 <실락원 기행>, <초혼제>, <지리산의 봄>, <저 무덤 위의 푸른 잔디>, <여성해방 출사표>, <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여백을 남긴다> 등 모두 10권의 시집을 발표한다.

고정희의 시세계는 기독교적 세계관의 지상실현을 꿈꾸는 희망찬 노래에서부터 민족민중문학에 대한 치열한 모색, 그리고 여성해방을 지향하는 페미니즘 문학의 선구자적 작업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시적 탐구와 정열을 감싸 안는다. 그리고 그 모든 시에서 생명에의 강한 의지와 사랑이 넘쳐난다. 고정희의 이와 같은 치열한 역사의식과 탐구정신은 5. 18 광주 항쟁을 대하는 그녀의 태도에서도 분명히 드러난다. 즉 그녀는 전통적인 남도 가락과 씻김굿 형식을 빌어와 민중의 고난과 그 고난 속에서 다져지는 저항의 힘을 힘차게 노래하였던 것이다. 현실사회의 개혁과 더불어 새로운 글쓰기의 혁명은 이처럼 고정희에게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두 개의 중요한 삶의 지향점이었다.

이토록 정직하게, 줄기차게, 자유를 향한 이념을 불태우며 민족, 민중, 그리고 여성의 해방을 위해 노력한 고정희의 문학가로서, 여성운동가로서의 실천은 한국 문학사에 대단히 중요한 귀감이 될 것이 틀림없다.
 
 

profi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