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삶을 스스로 업그레이드 하는 법을 배우다


0. 나 없는 내 인생


김포공항 옆에 위치했던 우리 학교는 하루에도 여러 번 비행기가 뜨는 모습을 볼 수 있었는데,   그 무렵, 어디론가 떠나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학교라는 곳이 매일 나와 씨름을 하는 곳이라면, 이곳만 벗어나면 달라질 거라고 생각했었다.  


나에게 있어 학교는 언제까지나 ‘대학 입학 후’ 만을 대답하는 자동응답기였다. 대화를 하길 원하며 0번을 누르지만 선생님은 내가 누구인지, 어떤 경험을 가지고 있는지, ‘나’ 자체를 묻지 않았고, 지금까지 해온 성적으로 갈 수 있는 대학 1순위, 2순위, 3순위로 이야기 마무리되곤 하는 그런 공간이었다.


나는 매번 내가 하고 싶은 일에 대해서는 끊임없이 이야기 했지만 “영화 만드는 거? 그게 지금 중요하다고 생각하니? 그거 대학가서 동아리 활동으로 충분히 할 수 있어.”, “딴 생각 그만해. 지금 중요한건 공부야” 라는 말로 학교는 나에게 ‘튀지 않는 것이 제일‘인 열심히 공부하는 로봇이 되기를 바랐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바로 1순위, 2순위, 3순위를 매겨 이야기 해주는 선생님도 참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다. 나의 “반항”이 선생님의 훈계로 바로 꺾여버리던 그 시절, 나는 소위 '모범생'이라고 불리는 사람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몸으로 경험하고 자신의 생각과 행동을 온몸으로 싫다. 라고 표현하는 소위 어른들이 말하는 ’문제아’들을 동경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지금까지 해온 것들이 있기 때문에 나는 또 그렇게 되기가 너무 어려웠었나 보다.


나는 똑똑했다. 내가 방황하는 꼴을 보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다른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그 때 내가 '넘겨다 본' 하자는 해보면 알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정말로 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 곳이었다. 내가 하고자 하는 일에 자유가 아른거리는 그곳! 신비의 세계!

나는 교복을 입은 채 어정쩡한 모습으로 그 앞에서 "이걸 넘어, 넘지 마? " 라는 고민을 하고 있는 학생이었다. 고민의 시간이 길어질수록 나는 힘이 들었고, 단순하게 학교자체만을 부정하기 시작했다. “자퇴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그런 부분에서 어떻게 보면 나는 심각한 “문제아”였다. 결국 나는 “하자에 가서 영화를 찍겠다.” 고 결심했다.


고등학교에서의 1년은 나에게 처음으로 어떻게 살고 싶은지에 질문을 던지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그 시간이 있었기에 나는 학교라는 울타리를 넘겠다는 선택을 하게 되었다. 지금에선 그 때의 고민들이 참 귀여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조금은 부담스럽기도 하다. 지금도 그 고민은 계속되고 있고, 그 답을 찾아 이것저것을 해보는 중이니까.


1. 주위를 둘러보다.


나는 일반 학교를 다닐 때, 반장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그래도 수많은 학생보다는 “반장”이라는 이름으로 단 ‘한 명’이 되고 싶었다. 그리고 같은 교복을 입은 학생들 중에서 반장이라는 이름으로라도 불리고 싶었다. 그것이 나를 설명해준다고 생각했으므로.


자퇴를 한 후, 나는 가족들 뿐 아니라 가까운 친구에서부터 먼 친척에게 설명해야 될게 많아졌다. 사실 아무리 설명을 해봤자 득이 되는 이야기는 없었다. 가족들은 나의 결정에 대해 여태껏 잘해왔으면서 대학을 앞두고 제정신이냐는 의견과 요즘은 남들과 다른 생각을 가져야만 성공하니 잘 결정했다는 의견으로 갈라졌다. 쉬운 선택은 아니었고 나를 위한 결정이라고 생각했지만, 갑자기 나에게 쏠린 가족들의 기대는  앞으로 내가 더 잘 해야 하나? 더 열심히 해야 하나? 라는 의문을 가지게 했고, 그 사이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전전긍긍했었다. 그리고 나는 입을 닫아버렸다. 더 이상 설명하려고 하지 않고 되도록이면 가족과의 자리를 피했다.


하자작업장학교는 시험도 반장도 없었다. 번호 대신에 내가 불리고 싶은 이름을 정하고 모두가 나를 그렇게 불러주었다. 더군다나 “나”에 대해서 설명하기 전에 내 상태는 어떤지, 내가 무슨 일을 하고 싶은지 왜 하고 싶은지 묻는 것이었다. 학교에 입학하고 첫 번째로 한 것은 영화 찍기가 아니라, 자전적 글쓰기와 인문학이었다.


별로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나의 과거를 글로써 풀어내보는 과정을 통해 스스로를 돌아보며 현재의 내가 이 자리에 있기까지 어떤 상황이 있었는지를 되짚어볼 수 있었다. 자서전을 쓰면서 마치 내가 살아온 인생을 새롭게 정리하는 기분이랄까? “역시 나의 선택은 백 번 옳았어!” 라고 속으로 외쳤다. 나를 서새롬이 아닌 홍조라는 이름으로 설명할 때 새로운 인생이라고 말했지만 태어날 때부터 지금까지 지난 18년 동안의 나를 지우는 것은 아니었다. 누군가에게 인정받기 위해서 사는 삶이 아닌  나의 삶을 되찾겠다는 말이었다.

작업장학교에서의 시간들이 너무나도 새롭고 재밌었다. 나는 이곳저곳 판이 생기는 곳마다 욕심껏 참여하면서 끊임없이 무엇인가 하고 있는 사람들 틈 속에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에 대한 답을 찾으러 다녔다.


인문학 프로젝트 <애, 전, 별, 친>은 너무나 익숙하게 생각했던 ‘사랑, 돈, 이별, 가족’ 이라는 4개의 테마를 가지고 책을 읽고 밑줄을 긋고 나누고 토론하는 시간이었다. 지금까지 별다른 고민 없이 생각했던 질문과 개념들을 다시  한번 살펴보는 시간이었다. 그때까지 내가 해왔던 학습방법이 머릿속에 입력해야 할 것들이 많았다면 하자에서의 학습은 내가 누구와 어떤 경험을 하는지 들여다보는 것들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자전적 글쓰기와는 달리 내가 아직 겪어보지 못한 일들을 ‘타인의 삶’을 통해 추측해보는 시간이었다. 매번 “잘 모르겠지만......”으로 말을 시작하는 조심스러운 시간이기도 했다. 특히 “전/ 錢”의 테마로 <멋진 한 세상>을 읽었을 때가 생각난다. 나는 ‘살자니 고생이오, 죽자니 청춘’이라는 책의 한 구절처럼 어떤 각도에서 보느냐에 따라 해석할 수 있는 지점이 다양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인문학은 이제껏 내가 배우고 학습했던 방법과 다르게 정답을 요구하는 것이 아닌, 나의 생각을 물어주는 것이었다.


2. 함께 하는 것의 필요성을 배우다.


나를 알고 내 주변을 살피는 인문학 프로젝트<애, 전, 별, 친>은 시대를 읽고 해석하는 <기후변화 시대의 living literacy> 프로젝트로 이어졌다. 기후변화라는 글로벌 이슈에 대한 영상, 다큐멘터리를 보고 토론하는 과정에서 나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라는 질문에 맞부딪히게 되었다. 알고 있는 것과 할 수 있는 것 사이의 괴리감에 빠져있었던 때, 홍콩창의력학교의 학생들과 함께 <유스토크>에 참여했다.

지구 반대편 끔찍하게 벌어지는 상황들 속에 내가 누리고 있는 삶과 괴리감을 느끼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짚어보고 토론해보는 시간을 가지면서 내가 살고 있는 서울이라는 도시의 빠른 변화와 함께 그 변화에 발 빠르게 움직이지 못해 뒤쳐지고 소외되는 것들을 보게 되었다.

내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마을이 재개발로 사라진 후 나는 알 수 없는 허전함에 시달려야 했고, 아파트가 들어선 마을에서 옛 기억을 더듬어 보기는 쉽지 않았다. 그것을 계기로 나는 내가 살고 있는 도시는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 또, 급변하는 도시 안에서 살고 있는 내가 추구하는 삶의 조건은 무엇이고, 점점 더 삭막해져 가는 도시 속에서 어떤 것에 가치를 두고 살아 갈 것인지를 진지하게 생각 하게 되었다. 그리고 타인과 주변의 문제로만 인식했던 상황들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홍콩창의력학교와의 <유스토크> 발제를 준비하면서 도시의 역사적인 배경에 대해 알아보았다.

도시의 속도는 사람을 만들기도 하고, 상황을 만들기도 했지만 따지고 보면 그 속도는 사람들이 만든 것이었다. 나는 재개발과 도시의 ‘속도’에 대한 이야기로 발제를 했고 주로 서울, 홍콩 두 도시에서 살아가는 10대들과 도시의 개발이 서로에게 어떻게 영향을 끼치는 지에 집중하면서  내가 경험하고, 알고 있는 사실에서 생각을 멈추는 것이 아니라 그 상황이 어떤 상황인지 어떤 맥락에 위치해있는지 해석해 보고자했다. 내 이야기라고 생각했지만 그 이야기는 내가 속해있는 사회의 한 단면을 대변해 주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생각을 했다. 건축폐자재와 높은 건물들로 바람이 제대로 순환하지 않고, 우리가 쉽게 쓰고 버리는 종이컵 때문에 나무들은 계속 베어지고 있었다. 결국 이 모든 일들이 합쳐져 기후변화문제를 더욱 앞당기고 있었다.


홍콩창의력학교와 하자작업장학교의 10대들은 비디오 컨퍼런스를 통해 발제와 토론을 거쳐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담은 선언문을 만들었고, 그것을 토대로 제1회 서울국제청소년창의서밋에서 직접 만나 홍대와 청계광장에서 거리 movement를 계획하고 실행했다. 폐 종이상자로 각자의 피켓을 만들어 거리로 나가 사람들에게 우리의 선언문과 약속을 알리면서 사람들의 참여를 도모하고자 하였다. 처음은 우리끼리의 작은 퍼포먼스로 결연하고 담담하게 시작되었다. 하지만 예상외로 적지 않은 사람들이 관심을 보였다. 우리들의 movement에 대해 질문해오는 사람들에게 열심히 설명을 하고, 때로는 묵묵히 내가 만든 피켓을 들어올리기도 하면서, 다른 사람에게도 우리의 이야기가 전달되기를 바랐다.

혼자서 결심하고 끝이 났을 일일 수도 있었지만 서로 뜻이 통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움직임을 만들어 낸다는 것은 굉장히 신기한 일이었다. 그렇지만 그 움직임은 내가 움직이지 않으면 절대로 만들어 낼 수 없는 다는 것을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다. 


3. 진심에 귀 기울이기


길찾기 때부터 공동작업은 매번 나에게 ‘공동’이라는 의미를 묻게 했다. 내가 생각했던 공동 작업은 단순히 하나의 일을 여럿이 나눠서 한다는 것이었기 때문에 똑같이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팀원들이 작업에 소홀하면 기분이 나빴고, 작업이 내 생각대로 잘 풀리면 혹시 내가 너무 독단적으로 일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고민이 들었다. 그렇지만 공동작업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 시기, 양상과 영등포 프로젝트의  원고를 하나하나 살펴보고 하나의 주제로 편집하는 과정을 통해서 길찾기 죽돌들이 제각각 다른 감각과 시선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공동작업' 이란  서로 다른 관점과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공동의 키워드를 가지고 함께 작업을 하면서 서로의 진심에서 시작되는 이야기들의 접점을 찾아내 하나의 흐름으로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길찾기를 수료하고 나는 주니어 과정에서 영상팀을 지원했다. 길찾기 때와 다른 점은 서로의 많은 관심사 중에도 “영상”이라는 공통의 키워드를 가지고 만난 것이었다. 자신을 작업자라고 칭하면서 어떤 작업을 할지 함께 고민하며 시간을 보냈고, 처음으로 내 시나리오를 써보았다. 생각보다 쉬이 써지지 않는 글에 나는 “아이씨, 내 머리 속에서 벌써 영화는 상영 중인데.......”  라는 푸념을 늘어놓았다.

이야기를 만드는 과정은 정말로 어려운 일이었다. 그렇지만 내가 생각하는 것과 시나리오가 다른 점은 바로 남들에게 보여 줄 수 있다는 점이었고, 남들에게 내 생각을 표현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임을 알았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를 영화감독이라고 말 할 수는 없지만 영상팀에 있는 시간들은 의욕과 의기를 충만하게 해주었다. 좋아하는 영화에서부터 “이런 것을 해보는 것은 어떨까?” 하는 제안까지 같은 분야의 관심사를 가진 판돌과 동료작업자와의 대화는 즐거웠다. 


주니어가 되어 처음으로 작업장 학교 모두가 정선 사북/고한으로 7박 8일간의 여행을 다녀왔다. 여행 중 페스테자의 “사북사태”-(무브의 에세이 참조)를 시작으로 작업장학교의 죽돌들 모두 팀별로 모여 앉아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모두 진지함 속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와중에 아무런 문제없이 순탄하다고 생각했던 우리 영상팀은 난감함을 감출 수 없었다.

왜 우리는 갈등이 없는 거지? 라는 질문을 시작으로 팀에 속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이야기했다. 그동안 우리는 2개월이라는 시간을 함께 보냈지만 각자가 원하는 것을 확실히 얘기 하지 않았고 좋게 넘어가면서 갈등을 피해왔던 것을  알게 되었다. 결론적으로 이런 식의 태도는 나에게도 모두에게도 좋은 태도는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는 계기였다. 공동 작업을 하는 데 “나”의 입장이 제대로 서있지 않으면 “우리”의 입장 또한 가질 수 없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한 팀으로 함께 부딪혀 나가자며 의기투합했고, “앞으로 만들어 갈 영상팀”에 대해 가슴 찡한 약속까지 했다.  


정선에 다녀온 영상팀은 코펜하겐 정상회담 전까지, 공동작업으로  기후변화 시리즈를 만들기로 했다. 반야가 제안한 기후변화시리즈는 <기후변화 시대의 living literacy>의 연장선상에서 기후변화는 계속 진행되고 있다는 뜻의 “TCK TCK TCK”이라는 구호를 빌려와 캠페인 영상을 만드는 것이었다. 캠페인 영상을 통해,  10대인 우리의 관심과 고민, 그리고 작지만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고, 다른 사람에게도 이러한 움직임을 제안하고 싶었다. 처음 계획은 가볍게 매주 하나씩 만들어 보는 것이었지만, 결국 코펜하겐 정상회담이 막을 내린 이후에 우리는 단 하나의 영상을 완성했다. 하나의 캠페인 영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많은 아이디어 회의와 토론의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만들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영상을 상영하고 나서 들은 코멘트는 “너희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알리려는 내용과 상황들이 너무 많아서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불분명하다는 것, 그리고 이것을 만드는 ‘우리들’의 시선과 관점이 잘 드러나지 않는 다는 것이었다.

나는 캠페인의 목표가 너무 당연하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생각해보니 영상을 만드는 개인의 맥락은 각자의 머릿속에만 있었고  영상에는  “결론”만 나와 있었다. 나는 “우리” 라는 함정에 빠져있었던 것 같다. “우리”라는 이름하에 내가 움직이지 않으면 팀이 원하는, 그리고 내가 원하는 작업이 될 수 없었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게 만들어야하는 캠페인 영상은 우리의 이야기 속에 각자의 시작점과 지나온 과정을 잘 담고 있어야 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라는 말이 있다. 그렇다고 보이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는  말은 아니다. 보이는 것을 넘어서 살펴보는 마음을 베풀라는 뜻일 거다. 우리는 서로의 보이는 것 너머의 이야기에 더 귀 기울여 주어야 한다.


4. 보이지 않는 벽을 넘어


교통과 통신수단이 발달하면서 국경이 허물어졌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우리는 지금 인터넷을 통해 보다 쉽고 다양하게 국경을 넘는 경험을 하거나 시시각각 새로운 정보를 접할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메솟으로 현장학습을 가기 전에 나는 인터넷을 통해 버마의 독재, 폭력, 강간, 인권유린의 무자비한 상황들을 알게 되었지만, 사실 비행기를 타고 그곳으로 가 사람들을 만나기 전까지는 믿기지도 않고, 이해할 수도 없는 일들이었다.


버마의 8888항쟁 이후 지금까지 현재 메솟과 멜라캠프 안으로 “탈”한 사람들 중 대부분은 8888항쟁을 주도적으로 이끈 학생운동세대이다. 때문에 태국에서 활동하는 활동가들의 대부분은 불법 이주민이나, 공식적으로 “국적 없는” 난민의 상태이다. 그들은 국가와 민족, 사회의 울타리를 벗어났지만, 미처 넘어오지 못하고 남겨진 사람들을 진심으로 안타까워하며 그들을 위해 “통로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기도 했다. 각자의 경험과 사실들을 국제사회에 호소하며 버마사회의 올바른 정치,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요구하고 있었다. 많은 활동가들이 출발한 지점과 겪어온 시간들이 다른 만큼 운동의 모습도 다양했다. 군부에 대항하는 방법으로 무장투쟁을 선택한 활동가, 생사의 위험에 처해있는 소수민족을 위해 의료지원을 하는 활동가, 배움을 지속하지 못하는 청소년에게 교육의 기회를 마련해주고자 노력하는 활동가들을 만나고 그들이 속해있는 단체에 대한 설명도 들었다.


그 중 CDC(Children Development Center)는 국제단체의 지원으로 운영되는 학교이다. 유치원생부터 고등학생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학생들이 공부하고 있었다. 영상팀은 “picturing your future”이라는 제목으로 그곳 학생들과 만나서 서로의 꿈을 묻고, 미래의 자신을 소개하는 영상을 만들었다. 프로젝트 도중 돌아가면서 자신의 꿈을 이야기 했는데  한 친구가 “나는 검사가 되고 싶어서 법을 공부하고 싶지만  ID카드가 없어서 대학에 갈 수 없다.” 라고 대답했다. 나는 “대학이 전부는 아니다. 다른 방법을 찾으면 할 수 있다. 꿈을 잃지 말자.”라며  내가 했던 자퇴의 경험과 고민을 바탕으로 그들이 현재 놓여있는 상황에 대한 고려나 이해 없이 쉽고 빠르게 조언 아닌 조언을 해버리는 섣부름을 범했다.

그들에게 ID 카드란, 자신의 존재를 의미했다. 태국과 버마의 국경을 따라 흐르는 강을 보러 갔을 때, 한 친구가 나에게 버마에 굉장히 가고 싶다고 말했다. 나는 언제 마지막으로 가봤냐고 물었고, 이윽고 자신은 버마에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다고 이야기했다. 부모님이 태국으로 탈출했고, 그 이후에 자신은 메솟에서 태어나 줄곧 메솟에서 자랐다고 했다. 그 친구는 자신이 태어난 태국에도, 조국이라고 생각하는 버마에도, 그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다. 버마인도 태국인도 아닌 사람.

태어났더니 그곳은 태국이고 자신은 외국인인 셈인데, 그렇다고 자신의 나라로 돌아갈 수 없는 상황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버마의 난민/불법이주자 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태국어를 배우고, 수시로 외국인을 마주하며 영어를 익히고 조국이 아닌 그렇다고 타국도 아닌 곳에서 살아가는 것을 말이다.

ID카드가 정말로 그들의 identity를 대변해 줄 수 있을까? 잘 모르겠다. ID카드가 없어서 나의 친구들은 대학이나 다른 사회로의 진출, 미래를 상상하기 어렵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때문에 국적을 얻기 위해 재정착을 원하고, 암암리에 ID카드를 사고판다.

그런데 돈이나 운으로 자신의 identity를 가지게 되면 그것으로 문제는 다 해결된다는 말인가. 문제는 단지 그뿐일까?


내가 알게 된 친구의 이야기는 이제 나에게 구체적인 ‘한 개인’의 이야기가 되었지만, 우리가 만나기 전까지 그 친구는 버마의 수많은 청소년 중 한 명이고, 아직도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뭉뚱그려 표현되는 난민이다. 오늘도 인터넷에서는 여러 가지 사건사고들로 정신이 없고 공항에서는 전 세계를 돌아다니는 비행기가 뜨고 내린다. 그러나 지금 내가 나의 친구와 마주한 현실은 우리에게 국경보다 더 넘기 힘든 벽이 되어 나를 그리고 우리를 무기력감에 빠지게 한다.


무수히 많은 사연과 이야기들. 우리는 많은 경우 분노하고 인터넷 기사를 스크랩해서 나르고 거리운동에 참여하지만 그 이야기가 온전히 ‘너’와 ‘나’ 의 문제로 다가오지 않는다면 그 분노와 열정을 지속하기 어려울 것이다. 내가 알고 있는 진실 또한, 하나의 사건으로만 기억된다면 순간순간 쉽게 잊혀져 가게 된다. 태국에서 돌아와서, 내가 살아가고 있는 이곳 한국에서도 ‘너’와‘나’가 함께 살고 있다는 현실 감각을 잃지 않으려면 그들과 나의 이야기의 끈을 놓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고 그 뒤를 이어 어떻게 해야 할 지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5. 정 (定) 답은 없다.


약 1년 반 동안, 나는 작업장학교에 속해 있는 학생으로서 내가 "탈" 해온 일반학교라는 공간에 대한 이야기를 해왔다. 그리고 그것과 반대되는 말로 "대안학교"라는 공간을 설명했다. 그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는 나뿐만 아니라 같이 생활하고 있는 사람들을 한번 살펴보아야 했다. 모두 나처럼 하고 싶은 일을 미루기만 하는 일반 학교가 싫고 성적으로 등수를 매기는 제도가 싫어서 대안학교에 온 것은 아니었다. 일반학교에서 관계 맺기의 어려움을 느낀 친구, 공동체에서 벗어나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싶어 한 친구, 생태적인 삶을 지향하는 대안학교를 졸업하고 다른 배움의 경험을 하러 온 친구 등 저마다 속해있었던 곳이 다르고 작업장학교를 선택한 이유도 달랐다. 그리고 여기서 배우고자하는 이유도 다양했다. 그렇게 하나하나 들여다보니, 내가 이전에 인식하고 있던 범위 안에서의 안과 밖, 나와 너, 내가 선택한 학교와 떠나온 학교로 설명하기에는 너무 과장되거나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현실은 단 두 가지로 나눠서 생각 할 수 없는 많은 존재와 상황들을 가지고 있고 너무 다양해서 어떤 결을 읽느냐에 따라 이야기 할 수 있는 부분은 달랐고 또 달라질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주변의 상황과 존재를 의식하지 않고 뭉뚱그려 판단하고 바로 대안을 이야기 한다는 것은 너무 섣부르고 위험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하나의 잣대를 가지고 이것과 저것을 구분하려고 하면 그 사이에 자꾸만 소외되는 것들이 늘어난다.

그 동안 나는 작업장학교에 다니고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떠나온 일반학교에서의 기억을 떠올리면서 억울해했었다. 나의 미래는 남들이 내게 보이는 기대와 내가 하고 싶은 일 사이에서 매일 저울질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하자작업장학교는 그 사이의 것들을 자꾸 보게 만드는 곳이었다. 해보기 전부터 저울질 하며 이것과 저것을 구분지어 놓고 하나를 버려야 한다는 생각에 괴로워하고 있던 나에게 어느 하나를 포기하는 것이 아닌 둘 다에 대한 가능성과 함께 정해진 길과 정해진 답은 없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주었다. 그렇게 나는 이 시간동안 끊임없이 나 자신에게 어떻게 살고 싶으냐고 물었다.

지금, 나는 많은 경험과 만남을 통해 나만의 답을 ‘만들면서’ 나를 설명하기 위해 고군분투 하고 있다.


삶은 끝없이 배우며 알아가는 과정이다. 나를 알고, 관계를 알고 세계를 알아가는 과정. 학교에서도 가르쳐주지 않는 과목이라서 그럴까.

하자작업장학교에서 나에게는 어느 것도 쉬이 ‘안다’라고 말 할 수 있는 단계가 오지 않았다. 이제 좀 뭘 알겠다 싶으면 금세 머리를 치는 깨달음이 따르기 일쑤였다. 그러면서도 나는 아는 것을 모른 척 해버리고 모르면서 아는 척 하기도 했다. 서로를 자주 오해하고 내가 보고 있는 세계가 전부라고 착각하기도 했다. “완전히 안다”라고 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끝까지 알고자 하지 않으면 지금 내가 알고 있는 것까지 모르게 될 것 같다.

그러므로 삶의 정답을 찾는 것이 아닌 내가 원하는 삶을 스스로 정의내릴 수 있기 위한 배움의 "업그레이드"가 필요하다.  


나는 영상을 만드는 것이 즐겁다. 주니어 과정동안 영상은 경험을 기록으로 남기고 해석하고 생각을 정리한 것을 표현하는 도구였다. 이전에는 영화를 만드는 것은 남들과 다른 생각을 통해서 이미지를 창조하는 것이고 다른 누구도 상관없이 내가 즐겁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작업장학교에서의 시간들을 통해 영상을 하나의 매개로 하여 서로의 협력을 끌어낼 수 있다는 사실을 경험하며 그 가능성을 확인했다. 그리고 하고 싶은 영상과 해야 하는 영상이 따로 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둘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고 싶으니 해야만 하는” 영상이 있을 뿐이다.

그렇게 영화를 찍겠다는 처음의 결심은 지금에서야 확신을 얻었고 앞으로 나의 카메라가 어디로 향해야 하는지 이제 막 고민하기 시작했다.


나에게는 수료가 하고 싶은 일에 대한 실험을 시작하는 때임을 알려주는 계기가 될 것 같다. 

나는 이곳에서 스스로를 업그레이드하는 법을 배웠고 그것이 다시 혼자임을 자처하고 앞만 보고 가겠다는 것은 아니다. “나”라는 존재로 홀로 서게 된 것은 누군가와 함께 할 준비가 되어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제는 이것과 저것들 사이에서 고민하지 않는다. 정해진 방법과 정답이 아닌, 다양한 시도와 시행착오를 통해 나의 방법들을 만들며 그 안에서 나의 답을 찾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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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en we meet a desert, make it a garde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