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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후(戰後) 영화의 흐름
제2차 세계대전을 치르고 난 뒤의 영화예술은 가장 커다란 시련 앞에 놓이게 되었다. 그것은 1940년대에 이미 출연을 예고했던 텔레비전이 실용단계에 이르러 전세계에 퍼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전후의 세계의 영화는 전쟁이라는 폐허 속에서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1952년경 헐리우드에서 시작된 주요한 변화들을 '확대된 자유 expanded freedoms'라고 부른다. 그는 검열로부터의 자유, 스튜디오 중심 제작으로부터의 자유, 국내 흥행 실적에 의한 제작 지배 및 일관 작업의 횡포로부터의 자유를 열거한다. 계속해서 그와 같은 많은 문제점들이 어느 정도 다른 방식으로 구성되고 취급되겠지만, 1952년은 중요한 해로 남아있다. 그 해는 전국에 처음으로 1녀 내내 텔레비젼의 네트워크가 적용되던 해였다. 그 해는 또한 와이드 스크린과 스테레오 사운드, 보다 값싼(이스트만)컬러가 등장한 해이기도 하였다. 더불어서 그 당시 메이저 스튜디오들이 몰락하기 시작하였으며, 새로운 독립제작사의 성장이 싹트기 시작하였다. 때를 맞추어 이 무렵 해외에서의 미국 영화제작과 헐리우드에의 해외 작품 수입 의존도가 높아졌다. 마침내 1952년은 대법원의 판결에서 영화 내용에 대한 사회적 통제가 완화되기 시작한 해였다.
텔레비전의 보급과 등장
1946년 5개 방송국과 몇 백 대 TV 세트밖에 보유하지 못했던 TV는 1948년 최초의 TV 대규모 흥행의 해를 맞기까지 빠른 성장을 기록하여, 그때쯤에는 '밀턴 벌'과 '에드 설리반'을 대도시의 중심에서 시청할 수 있었다. 1950년대까지는 100개의 방송국 개설과 400만대의 TV 세트의 보급의 이루어졌다. 다음 단계는 전국에 걸치는 것이었다. 즉 1951년에는 동축케이블과 전자중계소가 해안 및 그 사이의 육지 대부분을 연결하였다. 1950년대 초부터 시청자는 계속 확대되었다. 오늘날 미국에는 사람보다 TV 수가 더 많을 정도이다.
TV가 완전히 자리를 잡게 되자, 사람들과 제작물은 TV로부터 영화로 옮겨가기 시작했다. 1950년대 초반, 소위 TV드라마의 황금시대로부터, 극장용 장편영화가 창작되었다. 재정적 통제, 스튜디오 시설, 이야기 소재, 제작진과 연기자들은 영화와 TV사이에서 계속 이리저리 오갔다. 이 상황은 그리 쉽게 변화할 것 같지 않다.
스튜디오 몰락과 독립제작자의 부상
1950년대 초반 영화산업이 경험한 압력과 변화의 또 다른 결과는 제작-배급 활동의 대쇄신이었으며, 그것은 또한 제작되고 있는 영화의 내용과 형식에도 영향을 미쳤다. 제작 회사들중에서 점차 줄어는 불규칙한 영화 수입에 의해 가장 심한 타격을 입은 것은 많은 극장을 거느리고 있다가 날려버린 거대한 스튜디오들이었다.
유나이티드 아티스츠의 일급 제작자겸 감독인 빌리 와일더는 탄식조로 말한다. "우리는 영화를 만들었지만, 이제는 거래를 만든다," 더 컸던 스튜디오들이 흥행을 통제하고 있을 때에는 힘없는 경쟁자였지만, 새로운 상황 하에서 유나이티드 아티스츠는 번창하였고 다른 회사들의 모범이 되었다. 스튜디오들은 제작 공간과 시설을 독립제작자에게 대여하였으며, 그들의 제작을 전체적으로 혹은 부분적으로 재정 지원하고, 완성된 영화를 배급하였다.
국제화
세계 각국간에 완성 작품은 물론, 제작 단계에서도 국제적인 교류가 빈번해졌으며, 이에 따라 영화는 더욱 더 문화적인 역할을 더해가고 있는 것과 더불어 국제교류가 도리어 영화에 반영되는 등 각국의 개성을 더욱 선명하게 드러내고 있음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스튜디오 시절에는 세트에서 찍던 것을 로마, 홍콩, 도쿄 등지에 가서 직접 촬영. (헐리우드 중심의)재정-배급등의 국제화.
무엇을 선택하고, 실험하는가? / 마야 데렌을 중심으로.
실험영화 (experimental film)
영화가 지닌 독특한 표현력을 천착하여 창의적이고도 독창적인 실험과정을 통해 제작하는 영화작품들의 총칭. 1920년대 유럽의 전위영화를 기조로하여 근자의 신미국영화에 이르는 새로운 형태의 전위적 영화운동 전반을 지칭하는 용어이지만, 사적인 면에서는 유럽의 전위영화가 일단의 종말을 고한 뒤 20년대 말부터 미국에서 새롭게 시작되어 50년대 후반의 지하영화와 합류되기까지의 기간을 가리키기도 한다. 따라서 실험영화란 유럽의 뒤를 이은 미국적 전위영화로서 30년대와 40년대의 기간동안 존속했던 특정 조류인 동시에, 이후의 지하영화, 확대영화, 신미국영화 등으로 발전해 갔다는 점에서 전후의 모든 새로운 영화경향의 근간이 되는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미국 최초의 전위영화는 현대파 화가인 실러(Ckarles Sheeler)와 스트랜드(Paul Strand)의 공동작품인 <맨해타>(Manhatta '21)>로서 뉴욕을 노래한 월트 휘트만의 시를 영상시적으로 옮긴, 인물이 등장하지 않는 영화였다. 이로부터 이후의 몇몇 실험영화까지는 모두가 유럽의 전위영화, 특히 델(Louis Delluc)의 포토제니(Photgenie) 이론과 표현주의의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사실상의 최초의 전위영화는 와트슨(James Sibley Watson)과 웨버(Melville Webber)의 공동작품인 <어셔가의 몰락>(The Fall of the house of Usher '28)이었으며, 1933년에는 이들에 의해 최초의 유성 실험영화인 <소돔의 운명>(Lot in Sodom)이 발표되었다. 이후 미국의 실험영화는 경제 대공황으롱 인해 침체기를 맞게 되는데, 이들의 기술적 미학적 수준은 유럽의 전위영화에 비해 별다른 평가를 받지 못했으나, 반면에 미국적인 스타일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이후의 발전단계에 크게 이바지하고 있다.
미국의 실험영화가 다시 개화하여 한 정점을 이룬 것은 1940년을 전후하여 16mm가 세계적으로 보급되면서 부터였다. 서부에서는 각기 개별적으로 추상영화를 제작해왔던 휘트니(John Whitney), 스미스(Harry Smith), 벨슨(Jordan Belssn) 등이 1947년에 샌프란시스코에서 시사회 및 심포지움을 개척하였고, 동부에서는 절대영화의 창시자인 리히터(Hans Richter)가 나치스를 피해 미국으로 건너온 직후 2년간(1944-1946), 마찬가지로 이민r해온 뒤샹(Marcel Duchamp), 레제(Fernand Leger), 그리고 미국인인 캘더(Alexander Calder) 등과 함께 일련의 실험영화를 제작하였다.
이들의 작품은 독일의 표현주의, 러시아의 몽타쥬, 프랑스의 트릭촬영과 포토제니 등의 총체적 영향을 받아들여 꿈, 시적 영상, 심리적 비도덕성, 에로틱한 상징, 성적 환상에 대한 초현실주의적인 경향을 띠었다. 데렌(Maya Deren)의 <카메라를 위한 율동연구>(A Study in Choreography for the Camera '45)와 <오후의 올가미>(Meskes of the Afternoon '49), 앵거(Kenneth Anger)의 <불꽃놀이>(Fire-Work '47), 마르코폴로스(Gregory Markopoulos)의 <프시케>(Psycke '48) 등이 대표적이다.
마야 데렌(Maya Deren)
1917년 러시아 우크라이나출생. 1922년 유태인 학살을 피해 미국으로 옮겨왔다. 1943년 알렉산더 해미드와 함께 첫 번째 영화 <오후의 올가미>를 연출했다. 그녀는 여러 실험 단편을 만들었고, 예술로서의 영화의 형식에 관한 여러 저서를 냈으며, 1947년 영화감독으로는 처음으로 창조적인 영상 작업에 수여되는 구겐하임상을 받았다.
영화 매체는 이차원적인 평면에 시각적인 구성을 투사한다는 점에서 조형미술과 같으며, 무브먼트의 조정이 가능하다는 점에서는 무용과, 사건의 드라마틱한 느낌을 밀도있게 표현한다는 점에서는 연극과, 일정한 리듬과 시간의 조절로 구성되며, 노래와 악기의 도움도 받을 수 있다는 점에서는 음악과, 이미지들을 병치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는 시와, 언어만이 가질 수 있는 추상적 개념을 사운드 트랙 속에 담을 수 있다는 점은 일반적으로 문학의 특성과 일치하는 것으로, 그러한 영화의 표현 한계는 실로 무한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변형된 시간의 의례 Ritual in Transfigured Time USA/1946/15min/16mm/B&W
미국 실험영화의 어머니라 불리울 수 있는 마야 데렌은 총 6편의 작품을 남겼다. 이 작품은 그 가운데 네 번째 작품으로 그녀가 어려서부터 집착해 온 무용을 영화적으로 풀어낸 작품이다. 그녀의 첫 번째 작품이자 가장 대표적인 작품인 <오후의 올가미>에서부터 보여준 공간과 시간의 파괴가 이 영화에까지 이어진다. 그녀의 여러 글에서 영화 매체의 가장 큰 특성이 시간성과 공간성의 파괴, 혹은 변형할 수 있다는 것이라 지적한다. 제목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이 영화는 그 중 시간의 변형에 더욱 초점을 맞춘다. 시간을 멈추고, 늘이면서 인간 동작을 조형화한다. 무용 역시 이런 조형화에 일조한다. 마야 데렌은 운명의 세 여신 (Fates)을 현대에 되살려 새로운 신화를 창조했고, 이를 무용적으로 풀어냈다. 이 영화는 그리스, 로마의 조각상들이 어떻게 생성되었는가를 다시금 생각게 해준다. (박동현)
마야 데렌은 단 여섯편의 단편영화로 20년대 프랑스 아방가르드 전통을 부활시키면서 2차대전 이후 미국의 독립영화, 실험영화, 아방가르드영화 의 기치를 올린 공로로 영화사의 한 페이지를 온전히 차지하고 있다. 특 히 1943년에 만든 13분짜리 흑백무성영화 `오후의 그물망'(meshes of the afternoon)은 ‘영상으로 만든 시(詩)’, ‘꿈과 같은 황홀한 영화’등으 로 불리며 미국 독립영화의 기념비적인 작품이 되었다. 이 영화는 한 여 인(마야 데렌이 연기)이 길 위에 떨어진 꽃을 주워 자신의 집으로 들어가 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계단을 올라가 열쇠로 문을 따던 그녀가 열쇠를 떨어뜨리고 그 열쇠는 계단 아래로 통통 튀어내려간다. 집에 들어서면 식 탁 위에 빵과 식칼이 놓여 있고 방의 다른 한편에는 전화기가 놓여 있다. 여인은 의자에 쓰러져 잠이 드는데 두건을 쓰고 거울로 얼굴을 가린 이상 한 인물을 꿈속에서 계속해서 쫓아간다. 그러나 그녀는 그 인물을 잡을 수가 없다. 그러다 마침내 그녀 자신이 세명의 인격으로 분리되고 그 분 리된 인격의 한명이 자신을 죽이려고 한다. 그 순간 그녀는 어떤 남자에 의해 잠에서 풀려난다. 그러나 그녀의 현실세계는 꿈의 세계에 의해서 밀려나고 그 남자가 집으로 다시 돌아왔을 때 그녀는 이미 죽어있다. 마야 데렌은 극단적인 카메라 앵글과 슬로모션, 휙휙 돌아가는 카메라, 독창적인 편집을 통해 행동의 연속성을 유지하면서도 시공간의 통일성은 단절시킨다. 그럼으로써 여인이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점점 더 통제하기 힘들어지는 상황을 만들어내고 있다. 이 영화는 브뉘엘과 장 콕토 같은 20년대 유럽의 아방가르드영화를 이끈 감독들의 영화스타일을 계승 발전시키면서 뒤에 오는 영화들에는 스타일면에서 새로운 모델이 되어 개인적인 영화(p ersonal cinema)에 관심을 가진 젊은 영화인들에게 많은 영감을 불어넣었 다. 케네스 엥거나 스탄 브라카지 등도 마야 데렌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던 것이다.
마야 데렌은 이후에도 3분짜리 흑백영화 `영화를 위한 안무연구'(A study in choreography for cinema)(1945)에서 남자 무용수가 카메라와 짝이 되 어 발레하는 장면을 찍었다. 슬로모션과 무용수의 발을 쫓아가는 유려한 카메라를 통해 카메라의 움직임 자체가 발레가 되는 효과를 만들어냈다. 단편소설이 그렇듯 단편영화는 그 자체가 하나의 완결된 형식과 내용을 갖는다. 삶의 단면이나 시각적 이미지를 농축된 화면 속에 담아낸다는 점에서 그건 결코 장편극영화로 가기 위한 길목으로서의 연습용 영화가 아니다. 마야 데렌 감독이 보여주었듯이 단편영화는 단지 장편영화에 종속된 하위장르로서가 아니라 자율적인 형식으로 새로움과 독창성을 발휘할 여지가 충분히 있는 것이다. 한국영화는 아직 이야기를 사실적으로 전달하는 데만 지나치게 치중하는 경향이 있다. 지난 1백년간의 ‘영화적인 전통’에 기반하면서 그것을 뛰어넘는 ‘영상적인 실험’이 부재하다는 점이 한국영화의 큰 걸음을 막고 있다. 우리가 단편영화에 주목하고 관심을 가지는 것은 단편영화에서 더욱 과감한 ‘문체’실험을 발견할 수 있 길 기대하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의 실패는 생략의 실패다.’미국 실험영화 감독 마야데렌의 말 이다. 그녀는 <예술에대한 사유들의 어떤 아나그램(Anagram)>이라는책에서“발견의도구 그리고 발명의도구/영화 예술”이라는 글을 통해 위와 같은 압축적 말을한다. 즉, 영화의 복제가능성 때문에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은 적절한 영화형식을발전시키는 대신 단순한 현실의 복제에 머문다. 그래서 영화의 실패는 생략의 실패라는것이다. 이런 생략의 실패를 지양하고자 하는 영화란 원인과 효과가 비교적 명확한 고전 서사 영화보다는 당연히 예술영화나 실험영화들이다. 마야 데렌의 작품 <오후의 그물>이 그 한 예 일 것이다. 장르영화는 이런 예술영화나 실험영화와는 다른 종류의 생략에 능한데 그것은 축적되어온 관행, 그 관행이 생성해낸 관객의 선-지식에의존 한 생략이다. 예컨대 우리는 서부극에서 카우보이가 떠나갈 때 그 이후를 궁금해하지 않는다. 그러나 장르영화가 이 같은 생략과는 다른방식의 생략, 즉 설명하지않는 과묵함을 영화속 인물의심리적 잠금장치로 사용할 때 이 과묵이 자아내는 긴장감의 파고는 높고 불안하다. 바로 이것이 담겨져있는 것이 관행과 도상을 거느린 장르영화이기 때문에 그 파고는 더 낯설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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