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는 시골길. 앙상한 나무가 한 그루 서있을 뿐 아무것도 없다. 이 나무 아래서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이라는 두 떠돌이 사나이가 실없는 수작과 부질없는 행위를 하면서 ‘고도’라는 인물이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다. 거기에 포조와 럭키라는 기이한 두 사나이가 나타나서 한데 어울리다가 사라진다. 잠시 후 한 소년이 나타나서 “고도씨가 오늘밤에는 못 오고 내일은 꼭 온다”는 말을 전하고 가 버린다. 제2막은 그 다음날이지만 제1막과 거의 같은 패턴으로 되풀이되고, 마지막에 또 소년이 나타나서 같은 말을 전한다. 다른 점은 포조가 장님이 됐고 럭키가 벙어리가 된 점  결국 ‘고도’는 오지 않는다. 이들이 기다리는 ‘고도’란 무엇인가. 신(神)인가 죽음인가 행복인가. ‘고도’는 그 무엇도 아니면서 동시에 모든 것일 수도 있다. 시간과 공간이 단절된 상황 속에서 이 연극은 언제나 시작되고 끝나면서 또 어디서나 생길 수 있는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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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도를 기다리며...부조리극을 접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딱히 스토리랄 것도 없고 처음과 끝이 같다. 결국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건가?

상상리뷰를 쓰면서 백날 기다려봤자 오지 않는 고도는, 어쩌면 처음부터 있지도 않는 '무언가' 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지금도 그 생각은 변함없이 오히려 굳건해졌다.

----고도는 없다- 를 전제로 함. (브레인 스토밍한 것.)-----------------------------------------------------------------------------------------------------
1) 고도 따윈 없다, 세상이 그 두사람을, 아니 블라디미르만을 엿먹이고 있다.
2) 둘의 맹목적 신념은 대체 왜 인가? 왜 둘은 고도를 버리지 못하는가, 고도가 신이라면 구원의 약속만을 계속해서 미룰 뿐, 어째서 이토록 황폐하게 살아가도록 보고만 있는 것일까? 
3) 왜 희망은 항상 잔인한걸까? 절망은 그냥 오지 않는다. 희망이 산산히 부서져야만이 찾아 오는 것이다. - 앙상하고 볼품없는 나무에 나뭇잎이 돋아남,   아마도 그것은 계속 그러기를 반복하지 않았을까? 계속 잊고 또 잊으면서 항상 희망을 가지고 다시 부숴버리기를 반복할 뿐이다. 
4) 끝없는 망각과 기다림,
 둘이 지껄이는 말도 안되는 이야기와 혼란, 그리고 수십가지의 놀이들. 뭐라도 하지 않으면 미쳐버릴 것 같은 그들의 존재, 그리고 그들의 존재로서 존재한다고 믿어지는 고도의 존재.
기다려야 한다는 세뇌??세뇌인가???
5)포조- 눈이 멀다.                왜 지배자이던 포조가 장님이 되었나? (그럼에도 럭키가 그를 계속해서 따르는 이유는?)
럭키- 벙어리가 되었다.    어차피 포조가 시켜야지만이 말을 하던 럭키를 굳이 벙어리로 만든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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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는 그저 하염없이 이런저런 '짓거리들' 을 해가면서 고도를 기다리고 있다.
그러다가 에스트라공이 지루하고 피곤한지 '이제 집에 가자~' 라고 칭얼대면 블라디미르가 '안돼, 고도를 기다려야지.' 라고 말하는 패턴이 있다. 에스트라공은 "어째서?" 라고 말하지 않고 "참, 그렇지~"라고 익살스럽게 대답한다. 어째서 '어째서' 가 아니란 말인가? 관객과의 대화에서 연기자들의 해설은 블라디미르는 이상을 쫓는 자이며, 에스트라공은 현실주의자라고 했는데, 왜 에스트라공은 그런 비참한 상황은 그만둘 생각은 않고 , 또 왜인지는 묻지도 않고 그간 오지도 않던, 앞으로도 안 올지 모르는 고도를 기다려야 한다고 그저 그렇게만 말한다. 소년의 전언은 듣지도 않고 움츠러들어서 잠자려 애쓰며, 계속해서 마주치는 인물들이나 반복되는 말들에 대한 자신의 기억을 부정해가면서까지 지독한 현실을 버텨내려 한다.  
왜 맹목적 기다림인가? 왜 둘은 고도를 버리지 못하는 걸까?
상상리뷰에서 썼듯이 나는 고도의 존재는 연극의 제목(두 인물이 자기들 이야기에 제목이 있는지 알던말던 관심없지만),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의 기다림과 둘의 언어에서 밖에 인식할 수 있다. 그 둘이 어느 순간 고도를 잊기라도 한다면
그의 존재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고도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했고, 그 존재는 고고와 디디의 필요에 의해 생긴 망상이라고 생각한다.
쇼의 리뷰를 읽다가 '종교적인 시각' 으로 보았다는 것이 놀라웠다. (무슨 이야기인지 더 설명이 필요할 듯.)
만약 내가 내 나름의 종교적 시각으로 이 작품을 바라본다면, 어찌보면 비판이 아니라 비난이 될지도 모르겠다.
고도=신 혹은 구원 이라고 생각해보면 고고, 디디(믿는 자들)가 필요에 의해 의지하기 위한 존재로서 그것들을 만들어냈고, 언제부턴가 그것을 왜 기다리고 있는지조차 모를 만큼 잊었고, 지금도 이러고 있는 것이다. 신 따위는 있지도 않다는 가정하에.

자꾸 고도를 다른 어떤 것들에 비유하는데, 고도가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 그들 자체의 존재를 의미한다고 생각되기도 한다.
고도를 기다리면서 하게 되는 짓거리들이 모든 하나하나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는 생각치 않는다. 그거 막연한 기다림이 낳는 망각, 자신들의 존재가 흐릿해지는 걸 원치 않기 때문에 고고와 디디는 그렇게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고 있는 것이고 그렇게 버텨가면서 처절하게 고도를 기다린다. 하지만 그 자체가 끝없는 망각이고, 자신들의 존재로 존재하는 고도를 기다리며 존재하게 되는, 웃기는 연결고리로 인한 어쩔 수 없는 기다림이 되어버린게 아닐까 싶다.

2부의 막이 오르자, 가장 먼저 나뭇잎에 잎이 돋아난 게 보였다. 그들은 곧 그것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정작 에스트라공은 별 차이를 못느꼈나보다 관심도 없었는지. 나는 그것이 어떤 갑자기 돋아난 자그마한 희망을 의미한다고 생각했다.
앞에 이야기 꺼냈듯이 에스트라공은 현실주의자를 상징한다고 했다. 이유모르게 돋아난 희망을 부정하고 무관심한 에스트라공은 그 희망을 가진다는 것 자체를 이미 포기했다고 생각한다. (우리 모두 이상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는 나는 차라리 그나마 무언가 머저리같이라도 기다리고 있는 에스트라공보다 그저 기다리는 것 조차 포기해버린 사람들이 어떤 모습을 보일지 궁금하다. 이미 우리 시대에 많은 사람들이 기다리기조차 꺼려하며 그것이 현명하다고 이야기하고 소극적으로 이야기하고 있지 않은가? 그들이 옳은 것일까, 블라디미르가 옳은 것일까?)
절망은 어느 순간 갑자기 '그냥' 찾아오는 게 아니라, 기대고 있던 희망이 산산히 부서짐과 동시에 찾아오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기에 에스트라공은 더 이상 미쳐버리기를 원하지 않았던 것이다.
뒤에 절망을 감추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점에서 언제나 희망이라는 것은 잔인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 같다.
아마도 그 나무에는 나뭇잎이 떨어지고 돋기를 수없이 반복했을 것이며 그 때마다 느낀 절망에 더 이상 온전한 희망을 기대하기조차 두려워진게 아닐까. 

결국 고도는 오지 않는다.
그렇게 된통 당해놓고서도, 내일 또 와서 기다리겠노라고 슬프게 되뇌이며 돌아가는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
극이 끝나고 문을 나서는 순간 , '고도는 없다, 그렇다면 혹시 모두가 그 둘을... 아니 블라디미르를 엿먹이며 놀리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세상이 그렇게 믿게 만들어놓고는 책임지지 않는다. 아직까지 그들을, 혹은 그들 엿먹이고 있을지 모르는 것이다.
속았다고 생각하던지 '그럴리가 없다, 나는 고도를 기다리겠어.' 라고 말하던지 딱히 상관은 없다.
사실 나도 그렇게 기다리는 것이 나쁘다던가, 좋다던가라고 확실히 말은 못 하겠다.

고도따위나 기다리는 게 재미나 있을까 싶은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