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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을 위한 시민문화 워크숍글 수 603
나의 柴(시)선을 담아 현실에서 살아가기. 나는 "하고 싶은 일 하며 먹고 살기"라는 하자작업장학교의 모토를 보고 입학했다. 그때 내가 생각했던 ‘하고 싶은 일 하며 먹고 살기란’, 좋아하는 것들을 잘 하게 되면 그것을 가지고 먹고 사는 문제까지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다는 의미였다. 나는 그림을 그리고 사진을 찍는 것이 좋았다. 그때의 나에겐 그러한 즐거움 속에서 내가 보고 싶어 하는 것들을 만들어내는 과정은 놀이와 같았다. 하자에 처음 들어와 나의 이야기를 그림을 통해 표현해보는 드로잉 프로젝트를 길찾기 과정에서 하게 된 후로 나는 "표현" 하는 것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나는 "왜 표현하는가?" 라는 질문들을 계속해서 마주하며 표현한 것이 혼자만의 놀이에서 벗어나 '작업물'이라는 이름으로 사람들과 나누려고 한다면, 그것을 통해 이야기하고자 하는 "무엇"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주니어 과정을 이어나가면서 지속시키고자 했던 고민은 ‘나의 이야기를 담는 것'이었다. 주니어 과정을 위한 학습계약서를 쓸 때, "내가 이끌리는 것들을 일단 끄집어내 보고 싶다."고 적었다. 나의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는 내안에 어떤 이야기들이 있는지 들여다보아야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자에서 1년 반을 보내며 내 안에 있는 이야기들을 찾기도 했고, 새로운 것을 발견하기도 하며 이야기들을 넓혀 가기도 했다. 이 시간들을 통해 나는 "어떻게 살아갈까"에 대한 고민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지금 나는 "어떻게 살아갈까"에 대한 고민들을 지켜가며 "살아가기" 위해 지나 온 과정들을 되짚어보며 단단하게 다져두고자 한다. 만남을 통해 나를 마주하다. - 메솟 현장학습 하자작업장학교에서 우리는 많은 만남들을 가지며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시대를 읽으려는 노력들을 해왔고, 그 연장선으로 6시간의 비행을 거쳐 메솟으로 현장학습을 가게 되었다. 메솟은 버마와 태국의 국경지역으로, 버마의 군부독재(SPDC)로 인해 정치적 망명을 선택했거나 이주해온 난민들이 거주하는 지역이다. 군부독재가 행하는 무분별한 체포, 살인, 집단 강간, 강제 노동, 강제 징병, 소수민족 탄압, 인신매매와 같은 일들이 만연하게 벌어지는 상황들은 "생존"하기 위해서라도 국경을 넘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한 사실을 매체를 통해 접하는 것과, 실제로 메솟에 도착했을 때 내가 느끼게 되는 무게는 확연히 달랐다. 내가 '직접' 그 사람들을 만났기 때문이었다. 더 이상 매체를 통해 '간접적'으로 접할 수 있는 문제 상황이 아니라 '내 친구들의 경험'이며, 믿을 수밖에 없는 현실이었다. 만남을 통해 그 '상황'은 더 이상 나와 무관한 일이 아니라 내가 직접 접촉한 것이 되었고, 그들과 어떤 관계를 이어나갈 수 있을지를 고민하게 되는, 내가 시선을 계속해서 주어야 할 것이 되었다. 생존을 위해 국경을 넘은 이들은 어디에도 소속되지 못한 ‘틈 사이’의 사람들이 되어 이동의 제약 안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그 틈바구니 속 현실에서 생계를 유지하는 것이란 외부의 원조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생존하기 위해서 초대받지 못한 손님, 이주노동자가 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내가 만난 CDC(Children Development Center)학교의 미누는 자신에게 태국어를 익히는 것은 곧 일자리를 얻을 수 있는, 살아갈 수 있는 기회를 얻는 것과 같다고 이야기했다. 그러나 태국어를 잘 한다고 해서 바로 일자리를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ID카드가 없는 상황에서 직업을 가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들은 위조한 ID카드를 만들거나, 불법 노동자가 되어야 했다. 그 사실이 발각되었을 경우에는 버마로 강제추방 되어야 했다. 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강제추방이었다. 그들은 태국경찰을 만날 때를 대비하여 경찰에게 줄 돈을 항상 가지고 다녔다. CDC학교 친구들과 태국과 버마의 국경다리를 간 적이 있었다. 그 사이의 경계를 긋고 있는 강물을 바라보았던 순간을 무어라 말할 수 있을까? 걸어서, 헤엄쳐서 오갈 수 있는 폭이 좁은 강에서 검게 탄 아이들이 마냥 즐겁게 수영을 하다 호기심에 찬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강물은 반짝였고 아름다웠지만 그것이 마냥 아름다울 수 없었던 이유는 그 강에 얽힌 내 옆의 친구들의 기억 때문이다. 고국으로 돌아갈 수는 없고, 태국에 안전하게 소속되지도 못하는 틈바구니의 현실을 보고 들었기 때문이리라. 그 강은 경계이자 벽이었다. 그 틈을 벗어나는 방법은 없는 것일까? 메솟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내 소개를 한다는 것은 내가 살아가고 있는 현실과 그것을 둘러싼 조건, 상황들에 대한 설명이기도 했다. 서로를 둘러싼 상황들을 설명하면서 우리는 각자의 삶의 조건이 다르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이동하는 것, 모이는 것, 표현의 자유와 같이 나에게는 이미 자연스러운 행위라고 생각되는 것들이 그들에게는 '생존의 위협'을 감수해야 하는 종류의 행동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당황스러웠다. 메솟에서 만난 사람들은 나에게 “너는 lucky'하다”라는 말을 자주 했다. 내가 그들에게 행운아로 비춰졌던 이유는 인간의 기본적인 권리가 보장되는 민주주의 국가에서 큰 노력 없이도 국가와 부모님에 의해 안정된 삶이 보장되어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특히 지금 그들을 만나기 위해 비행기를 타고 여기까지 아무런 탈 없이 와 있는 나를 그들은 lucky하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들은 자신의 삶의 조건에서 생존의 보장에 대한 ‘확답’을 들을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나의 친구가 된 CDC 학생인 파치만 하더라도 그러한 보장을 얻기 위해서 수많은 단체들을 찾아다니며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고, 지원을 요청하는 일들을 계속 하고 있었다. 나는 나의 현실에서도 언제까지 지금과 같은 안정된 삶을 살 수 있을 거란 보장이 없고, 그들과는 다른 ‘또 다른’ 문제들로 인해 느끼는 불안감과, 답답함이 있다고 이야기하고 싶었다. 어렸을 때의 나는 흔히 말하는 조기교육과, 영재양성 시스템 속에서 자랐다. 시험 문제를 풀고, 그 결과로 나의 가치가 매겨지는 압박감 속에서, 나는 내가 그냥 살아가면 되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하나의 잣대로 평가되고 증명되는 상황을 잘 견디지 못했다. 그러한 상황에서 괴로워하던 나를 보던 부모님은 그 구조에서 벗어나게 해야 하겠다는 결심을 하셨다. 나는 그렇게 9살에 들어서게 되었다. 볍씨학교는 '생명이 소중한 세상, 생명이 자유로운 세상'이라는 모토 아래 만들어진 공간이었다. 자급자족 하는 삶을 지향했고. 존중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생명은 인간뿐만 아니라 생태계까지 포함한 것이었다. 우리는 '서로를 존중하는 것이란 뭘까?'를 고민하며 차별하지 않으면서도 함께 살아갈 수 있는 방법들을 생각하며 우리들만의 약속을 만들기도 했다. 내가 오랜 시간을 보낸 볍씨학교는 그러한 약속을 실천하는 것에 있어서 큰 어려움이 없는 곳이었다. 그러나 나를 둘러싼 부수적인 것들로 나의 가치를 계속해서 증명해야 했던 사회적인 흐름들로부터 '탈'해서, 대안적인 공간에서 만들어갔던 나의 삶은 현실에서 쉽게 통용되는 것은 아니었다. 나는 볍씨학교 라는 ‘대안적인’공간에서 학습을 하면서도 동시에 내가 ‘탈’했던 한국 사회 속에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제도'에 대한 '대안'을 말한다는 것은, 사회에서 '주류'가 아닌 '비주류'라는 뜻이며, 그것을 지키려 하는 사람들 역시 다수가 아닌 소수였고 지금도 그렇다. 학교에서 돌아와 집에서 마주한 부모님은 생계를 유지하는 것에 대한 책임감과 공동체 안에서 배워왔던 가치들을 지켜나가는 것 사이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러한 삶의 모습을 지켜나가는 것이 경제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것까지 만족시킬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가치'를 지키면서도 과연 '하고 싶은 일 하며 먹고 살 수 있을까?' 라는 고민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한편으로 나는 안전한 바운더리를 벗어나 어른이 되는 것이 두렵기도 했다. 메솟에서의 현장학습은 낯선 장소와 사람들을 마주했을 때, 스스로를 되돌아보고, 내 삶에서 어떤 것들이 보장되어 왔었는지를 이해하며 인정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나는 우리들의 만남을 단순한 차이를 확인하는 것에서 그치고 싶지는 않았다. 서로 다른 조건과 환경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들과 함께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우리는 어떻게 함께 살아갈 수 있을까?"였다. 우리는 우리의 삶의 모습을 스스로 만들어나갈 수 있기를 바랐다. '어떻게'를 상상하는 과정에서 현실의 제약에 대한 답답함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답답한 현실과 마주했을 때, 우리가 해야 할 행동은 그저 주저앉아 울어버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NGO단체들은 말해주었다. 그들의 상황을 알리는 잡지를 만들고, 교육을 하고, 주변의 인식을 바꾸는 운동들을 꾸준히 하고 있는 NGO단체들을 만나면서 그들에게 정말로 힘을 보태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서로가 맞닿은 이상 할 수 있는 것들을 시작으로 서로에게 힘을 줄 수 있는 일들을 만들어 나가고 싶다. 무엇을 읽어내며 살아가야 하는 것일까? : 기후변화 시대의 living literacy 하자에서 나는 "기후변화 시대의 living literacy"라는 프로젝트를 통해 '기후변화'로 인해 우리의 삶의 조건과 상황들이 어떻게 변해가고 있는지를 알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나는 내가 살아가고 있는 환경을 좀 더 넓은 범위에서 바라보며 '읽어내려는' 시도들을 해볼 수 있었다. 도시에서 사는 십대로 스스로 경제적 활동을 하고 있지 못하는 나의 상황에서 자급자족과 같은 방식으로 생태적인 삶을 실천하는 것은 어렵다. 그렇다면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내가 첫 번째로 했던 생각은 소비하는 것에 대해 고려하는 것이었다. 나는 현명한 소비를 하겠다고 결심하며 되도록이면 공정한 방식으로 만들어지는 물건들을 사려고 애썼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러한 선택을 어렵게 만드는 문제들에 부딪혔다. 내가 소비하고 있는 물건이 어디에서 온 것인지 알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고, 환경을 위한 제품들은 내가 사기에는 턱없이 비쌌다. 스스로 돈을 벌고 있지 않은 내가 그런 가격을 주고 사기에는 옆에 있는 값싼 물건들을 살 수 밖에 없었다. 광고에 솔깃할 때도 많이 있었다. 공정한 물건이 무엇인지, 환경 친화'적'이라는 선전문구 아래 쏟아져 나오는 상품들에 대해 그 가치를 제대로 판단을 하기에는 너무도 많은 정보들이 나의 판단을 주저하게 만들었다. 하자안의 죽돌들과 경험을 나누며 나는 이러한 어려움이 더 이상 나만의 이야기가 아니며, 그렇다고 나를 뺀 나머지들의 이야기 역시 아니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현재 주어진 환경 속에서 현명하게 '선택'하는 소비자만으로는 생산과정과 그 '조건'에 대한 변화를 일으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가 보다 올바른 선택을 하기위해서는 소비자로서 그리고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능동적인 참여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변화를 도모하다 : 청소년을 위한 시민문화 워크숍 “세계를 구하는 시인들” 기후변화 시대의 living literacy에 이어 우리는 청소년을 위한 시민문화 워크숍, "세계를 구하는 시인들"에 참여했다. 이 워크숍에서 만난 시인들은 현실에서 자신들의 신념을 어떻게 실천하고 있는지, 그들의 삶 속에서 어떤 방식으로 변화를 도모하고 있는지 이야기해주셨다. 시민문화 워크숍은 삶의 조건들 사이에서 나의 신념과 맞는 것들을 '선택'하기만 하는 수동적인 자세가 아니라, 나의 신념에 맞는 내 삶의 조건들을 능동적으로 만들 수 있다는 용기를 주었다. 나는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생각과 더불어 어떻게 변화를 도모할 수 있을까?, 내가 할 수 있는 범위를 어떻게 넓혀 나갈 수 있을까?에 대한 상상을 할 수 있었다. 우리가 만난 시인들은 각자의 입장과 위치에서 운동, 시, 예술, 의료, 음악과 같은 도구를 통해 "함께 살기"를 이야기 하는 분들이셨다. 그러나 시인들을 만나며 가졌던 마음은 각각의 시인에 대한 '영웅화'는 아니었다. 나는 시인들과의 만남을 통해 특별한 능력을 가진 누군가가 아닌, 이 시대를 살아가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시민들, 그리고 그들의 생각과 행동이 모여 사회를 바꾸어 나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스스로를 시민이라 부르며 자신의 판단에 의해 능동적으로 움직이고자 했을 때는, 내가 하는 선택이 사회에서 어떤 흐름을 만들어 낼지에 대한 책임감도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시민이고 싶다. 내가 지키고자 하는 것을 지켜나가는 것이 사회에서의 아웃사이더를 자처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구성하는 한 사람의 시민으로서 변화를 도모하는 것이 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 예술마을 고한/사북 프로젝트, 개인연구를 하며. 나는 각기 다른 시를 품은 일곱 명의 시인들을 만난 후 나 스스로에게는 어떤 '시'를 이름붙일 수 있을까 생각하며 정선의 고한, 사북으로 떠났다. 고한과 사북은 오래전부터 '탄광지역'으로 유명한 곳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대체연료들의 등장으로 인해 석탄의 수요가 자연스럽게 줄어들었고 마을의 경제적 활동이 쇠퇴될 수밖에 없었다. 마을 사람들에게 유일한 생계수단인 탄광을 대체할 무언가가 필요했고, 그 자리에는 카지노가 빠르게 들어서게 되었다. 그러한 변화 후의 모습을 보게 된 나는 그 변화에 '미처' 따라가지 못한 흔적들을 보게 되었다. 광부들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는 사택. 그들이 신었던 장화가 가득한 방을 보면서, 나는 마을의 이야기들을 상상해볼 수 있었다. 근대의 분업화된 노동의 구조에서 광부들은 탄좌에서 꼭 필요한 '구성원'이었다. 사람보다 그가 가진 역할이 앞서 나오는 순간 구성원이라는 이름은, 마치 하나의 톱니바퀴가 된 듯했다. 톱니가 하나 빠지면 그 역할을 대신 할 수 있는 또 다른 톱니로 대체될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광부들이 떠난 사택에서 누군가 접어놓았을 종이별과, 집 안의 가훈들과 같은 사람의 흔적들이 주인 없이 놓아져 있는 것을 마주했을 때 나는 안타까웠다. 사택에서 방치된 채 잊혀져가는 물건들을 담는 데에 집중했었던 것은 산업전사라는 이름으로 비장했던 광부의 '역할'에 대한 기억은 있었지만, 역할 이면의 개개인의 기억은 방치되어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정선에서 본 모습들은 내 주변에서 일어나는 변화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필요에 의해 변화하는 삶의 조건들 속에서 역할 뒤에 있는 사람과 장소의 기억이 놓쳐진다. 나는 기억의 함몰들이 과거와 현재에 틈을 만드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그 틈 사이, 어디에도 소속되지 못한 사람들이 있었다. 나에게 흔적이란, 현재를 살고 있는 내가 과거의 순간을 기억하고자 했을 때 그 틈을 이어줄 수 있는 ‘문’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사회의 흐름으로 인한 변화와 개발로 개개인이 무언가를 떠나보낼 '여유'가 주어지지 않는 상황들 속에서 기억할 만한 '거리'들이 존중되지 않는 것이 폭력적이라고 느껴졌다. 그렇기 때문에 나에게 변화의 순간들에도 살아남아 있는 실마리 같은 흔적들은 반갑고 소중한 것이었다. 나는 정선에서 섶(柴)시를 품은 시인이고 싶었다. 땔감 나무 '섶'은 작고 힘없는 존재일 수도 있지만, 나의 시선을 가지고 변화하는 흐름들을 섬세하게 읽어가며 시선을 주고받고 싶었다. 그리고 그 땔감나무가 횃불이 되어 시선을 도모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나는 카메라를 통해서 흔적을 담고자 했다. 내가 보는 순간들뿐만 아니라 그것을 담기까지의 과정의 이야기들이 반영되길 바랐다. 흔적들을 통해 내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들은 변화 속 놓쳐지며 어디에도 썩 어울리지 못하고 부유하게 되는 남겨진 것들에 대한 이야기였다. 여행에서 돌아온 후 내가 찍은 사진들을 집에서 조각조각 분리하기도 하고, 합치기도 하면서 나는 어떻게 하면 그 '이야기'들이 담길지 고민했고, 후에 그 이미지들을 가져와 하자에서 나누며 이야기를 '작업물' 을 통해 전달하는 것을 해보았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덩그러니 놓여 진 주인 잃은 물건들의 쓸쓸한 느낌에 몰두해버렸고, 결과적으로 쓸쓸한 물건들이 있는 풍경만이 전달되었다. 나는 여전히 표현을 통해 이야기를 전달하는 것에 있어 시각적인 부분에 치중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후 나는 이야기를 담은 표현에 대해 고민하면서 "이끌림을 넘어 이야기하기"라는 제목으로 연구주제를 발표했다. 내가 만들어가고 싶은 작업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생각해본 경험이었다. 연구주제 발표에서 내가 만들어낸 이미지들이 과거의 포착된 '순간'으로써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보는 사람에게 있어 이야기와 기억을 전달하게 하는 연속성을 지녔으면 좋겠다고 이야기했다. 매체가 가지는 힘은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이야기를 표현하고, 그 자체로 유용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기록하고, 다른 방식으로 조명할 수 있게 하는 매체의 역할에 대해 다시 바라보며 그 매체를 쥐고 있는 '나의 역할'에 대해서 조금씩 상상해보기 시작했다. 나의 목소리를 내며 살아가기. 나는 사람이 존재 자체로 존중받아야 한다고 믿는다. 충분히 함께 먹을 수 있는 만큼의 음식이 있는 곳에서는 배고픈 사람이 있어서는 안 되며, 누구나 평화롭게 살 수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이런 믿음은 아주 어렸을 때부터 몸으로 익혀진 나의 신념이다. 그리고 나는 그러한 믿음을 지키며 살아가는데 큰 불편함이 없는 공동체 안에서 자라왔다. 10년간의 대안 공간 안에서의 경험은 현 사회에서 일상 속에 녹아 있는 권력, 힘의 논리를 낯선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하는 힘을 주었다. 메솟에서 만난 사람들처럼 나와는 너무 다른 조건에 있는 사람들과의 만남은 어려웠다. 내가 그들이 처한 상황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라는 생각에 휩싸이며 나는 한동안 경험이 아닌 일들에 대하여 목소리를 내는 것에 두려움을 느꼈다. 마음속에선 강하게 동요하고 있는 일들도 입 밖으로는 모호하게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한 과정에서 내가 느끼는 문제의식과 나 자신의 현실을 도대체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라는 혼란스러움도 있었지만 오히려 나의 현실과 삶을 되돌아볼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그렇게 처음으로 내 삶에 맞닥뜨린 지난 1년 반은 마냥 좋았다고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지키고 싶은 것들과 충돌하는 현실에서의 괴리감을 마주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순간들마다 나는 분노하고 울기도 하며 때로는 무기력해지기도 했다. 그러나 그러한 괴리감을 느낀다고 해서 현실에서는 옴짝달싹하지 못하며, '그래 나는 lucky했었지.' 라고 하는 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인 것일까? 그건 아닌 것 같았다. 일상의 위협을 느끼지 않을 수 있었던 환경 안에서 자란 내가 가져야 할 것은 그러한 요동치는 감정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현실에서 나의 목소리를 지키는 것에 대해 책임감을 가지고 움직이는 것이었다. 나의 시야 안으로 들어오게 된 “어디에도 소속되지 못한 사람들”, “필요에 의해 변화하는 흐름 속에서 어쩔 수 없이 놓쳐지는 기억들”과 맞닿았을 때 그 순간 내가 해야 할 것은 입 꾹 다물고 안타까워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지키고 싶은 것들에 나의 마음과 생각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그것을 위한 도구로써의 매체를 집어 들었다. 그 과정에서 "표현"한다는 것은 나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것과 같다는 것을 알았다. 지금의 나에게 “하고 싶은 것을 하며 먹고 사는 것”은 내가 가진 ‘조건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좋아하는 것, 지키고자 하는 것을 할 수 있도록 나의 삶을 만들어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제 매체를 쥔 나는, 사회의 흐름들에 그저 떠내려가는 것이 아닌, 나의 목소리를 능동적으로 낼 수 있는 사람이고 싶다. 하자 안에서 보낸 시간들은, 불편하고 어려운 현실이지만 마주하고자, 깨어있고자 했던 힘, 그리고 나의 삶에서 그 인식들을 어떻게 반영할 것인가를 스스로에게 계속해서 질문할 수 있는 힘을 만들어준 시간이었다. 이러한 나의 배움을 지속적으로 가져가기 위해, 마냥 쉽지만은 않을 것임을 알지만, 앞으로도 담담히,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일들에 시선을 주며, 걸어가고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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