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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해서 물방울을 떨어뜨리는 노력 동녘 다시 연 학교 2010년 3월, 우리는 그 때의 수료와 졸업을 끝으로 작업장학교 시즌1을 끝내고 학교를 닫았다. 2001년 첫 개교 때의 하자의 십대들은 학교는 그만두었지만 배움을 그만둔 것이 아니라고 했다. 자기들은 지구 전체에 퍼지는 서로의 목소리를 듣고 모여 춤을 추는 고래들이고 자기들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우린 여기 있다고 자신의 존재를, 실존을 어떤 사명처럼 이야기했다. 더 이상 학교는 준비하는 상아탑이 아니라며, 예술가나 작업자가 장래희망으로 막연히 '이 다음에~'하면서 이야기 꺼낼 것이 아니라 지금 내가 예술가이며 작업자이고 그래서 참여하고, 내 삶을 기획할 수 있다고 했다. 그 후 10년이 지나 지금의 십대는 휴대폰, 컴퓨터, 집에서 떨어지지 않고 길 위에서도 잠을 자고, 그래서 더 이상 우리 학교가 십대들이 스스로 필요로 하며 만들었던 그때의 여러 언어 실험과 시도들이 기획된 학교가 아니었고 그 역할이지 않았다. '학교를 닫아야 하나?'라고 생각하기 시작했을 때 우리는 우연히 안데스 산맥 원주민들의 크리킨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숲이 타고 있었습니다. 숲속의 동물들은 앞을 다투며 도망을 갔습니다. 하지만 크리킨디(벌새)란 이름의 새는 왔다갔다 하며 작은 주둥이로 물고 온 단 한 방울의 물로 불을 끄느라 분주했습니다. 다른 동물들이 이런 그의 모습을 보고 "저런다고 무슨 소용이 있어"라며 비웃었습니다. 크리킨디는 대답했습니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할 뿐이야." 우리는 '이게 우리 이야기야!'라며 크리킨디 이야기를 이 다음 시즌2의 새로운 학교의 이야기로 시작하자고 했다. 우리 세상도 너무나 많고 또 복잡한 문제로 불타고 있고 그것이 불안하고, 무서워서 나랑 상관없다고 생각하고 싶어도 외면하지 않아야 한다. 각자의 '시'자를 가지고 시인이 되어 길가에 피어있는 보잘 것 없는 '섶柴시'라고 해도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하자고 이야기하며 시즌 1을 마무리했다. 그리고 다음 10년을 새로 기약하며 모두가 크리킨디라는 약속을 하고 8명의 죽돌이 학교만들기 팀으로 4월부터 8월까지의 여름을 보냈다. 우리가 정말 크리킨디로서 숲의 불을 끄는 학교, 한 팀이 되어 큰 물방울을 만들 수 있는 학교를 있을지 도전해보며 많은 행동과 생각을 이어오던 시간이었다. 그리고 지금 시즌2의 학교를 다시 열고, 새로운 사람들과 함께 마음붙이기를 끝내고 정말 다음 불을 끄는 일을 어떻게 할 것인지 해보는 경험과 함께 공부하는 1년의 반을 지났다.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학교에서 보내야 하는 것, 일정을 소화해야 한다는 급급함 등의 피곤함과 시간 문제에 대한 고민도 있었다. 여기있는 나는 내가 아닌 것 같다고 생각에 갈등하는 사람도 있었고, 도대체 하고 싶은 일은 언제하냐는 사람도 있었다. 우리의 물방울은 고작 이것밖에 안되냐고 걱정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지금까지 해왔다. 하고 싶은 일이 있고 해야 하는 일을 받아들여 최선을 다하고자 했다. 중간 지점에서 질문해보았을 때, 우리가 만든 학교는 다니기에, 공부하기에 어떤 학교였을까. 좋은 학교였을까? 빗물 시溡자를 가지고 사람들의 작은 물방울 하나 하나가 모이면 빗물이 되어 불을 끌 수 있다고 이야기하던 나는 어떻게 학교를 다녔나? 학교만들기 3월 시즌 1을 마무리하던 즈음에 학교만들기 팀으로 같이 하자는 제안을 받았다. 그때 주니어 수료를 앞두고 있던 나는 학교를 나가게 되면 밖에서의 학습을 혼자서 지속시킬 자신이 없었다. 세계를 구하는 시인으로 보잘 것 없는 섶의 시인부터 시작한다고 해도 나는 무엇부터 하면 좋을지도 몰랐고, 아직은 스스로 나의 경로를 만들어나가기에는 방황할 것 같아 섣부르다고 생각했다. 작업장학교에 길찾기로 입학하기 전 예비학교에서 '여기 아니면 갈 곳이 없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던 한 판돌의 말에 '그치만 여기 아니면 정말 갈 곳이 없는데요…'라고 속으로 대답하던 그때의 나는 적을 두고서 공부하고 무언가 해보는 경험이 더 필요하다고 판단했고, 학교만들기 팀을 같이 하려고 마음먹었다. 그렇지만 쉽게 이야기하기에는 그때 우리의, 특히 공연팀은 관계의 폭풍우를 막 지난 참이었다. 한동안 서로 이야기도 잘 없어 소통도 안되고 눈치만 보고 머뭇머뭇하다가 누군가 그런 생활의 답답함을 토로하는 식의 이야기들이 있었다. 개개인의 좋지 않은 사정들이 있어서 학교에서의 생활에도 어려움이 있기도 했다. 서로 간의 소통의 부재로 결국 나중에 미안하다고 밖에 이야기할 수 없는 관계를 나와야 했고, 그래서 우리는 한 팀으로 뭔가 해낼 수 있을거다, 라는 믿음이 필요했다. 나는 막연하지만 그 희망이 보였다고 이야기했고, 서로에 대한 기대가 있는 의리있는 학교가 되었으면 한다며 학교만들기 팀을 시작했다. 시즌1의 마지막 졸업생인 토.토는 '앙가주망engagement이 아니라 인볼빙involving이 화두'라며 '마음붙이기'가 가장 어려운 도전이었다고 한다. 그거다, 자신의 발과 발딛고 있는 곳은 분명히 불에 타고 있는데 그것을 모르고 있던 것을 넘어서 자기 발등에만 불이 떨어진게 아니라 사방팔방이 불에 타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라는 것이 어떤 위기에 빠져있는지, 그래서 그것이 어떻게 자기 삶을 바꾸고 이루고 있는지 아는 것이다. 기후변화, 무차별한 개발과 재개발논리, 소비주의 등 우리 주변에 당장의 위기로서 처해졌고 이미 우리와 사회의 어느 부분으로 자리잡고 있는 문제들이 있는데 정말로 삶이 지속가능하냐는 질문까지 생각해봐야 할지도 모른다. 자기 삶이 어디에 위치해있는지 주변을 읽어내는 문해력, 그리고 내가 세계의 한 부분이었다는 것을 인식하고나서, 그러니까 마음붙이기를 넘어서 우리는 자신을 구하고 그것을 넘어서 타인과 함께 크고 복잡한 세계의 문제를 풀기 위해 무언가 작은 것부터라도 시작하지 않으면 안되겠다고 말하는게 학교의 시작이었다. 이 시간동안, 우리는 여러 장소에 가서 여러 사람들을 만나고 여러 일들을 경험했다. 학교에서 문제아라고 불리는 아이들과 학교의 거리를 좁히는 사이프로젝트, 일방적이고 불공정한 재개발에 농성과 파티를 벌여 목소리를 만들었던 두리반 51+파티, 4대강의 개발을 반대하는 여러 공연들과 소신공양하신 문수스님의 추모제, 더운 여름날 쪽방촌에 대한 정책 연구를 위한 쪽방촌 온도재기 프로젝트, 어른으로 성장한다는 것의 의미를 생각해보고 성년이 되는 것을 축하했던 성년식… 작업장학교는 적은 인원이기도 했고, 그랬기 때문에 정말 '세계를 구하는' 팀이 되볼까? 하며 한 팀이 되어 많은 일들을 해내보기도 했다. 여러 시도들과 고민들이 있던 여름이었다. 나는 체력적으로 정말 힘들었을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한다는게 대체 무슨 의미가 있냐는 생각도 했었고, 누군가는 우리가 이야기하는 대안이 정말 대안적인 삶으로 기획될 수 있고 지속될 수 있냐며 불안함에 그만두기도 했다. 서로 너무나 지쳤을 때, 소통이 어려울 때, 고작 이것밖에 못해냈다고 생각했을 때 많은 고민에 갈대같이 흔들리기도 했지만 그때마다 그것들을 무릅쓰고라도 '우리가 해내고 싶은 일이 무엇이냐'라고 되물으며 힘내고자 했다. 우리가 해내고 싶은 일, 그리고 각자의 꿈도 있다. 만들고자 했던 학교는 각자의 꿈을 나누고 실현시키면서 모였을 때 그 꿈들과 사람들이 정말 세계를 구하는데 '일당백'으로 무언가 해낼 수 있는 , 그래서 누구나 올 수 있고 참여할 수 있는 열린 학교였다. 우리가 나누었던 옛날 우화 중에, 성문을 닫고 혼자서만 아름다운 정원을 차지하고 있다가 겨울이 들어왔다 나가지 못해서 성 바깥에는 이미 봄이 찾아왔다는 것도 모르더라는 욕심많은 거인의 이야기가 있다. 우리 학교는 그 거인처럼 좋은 것을 독차지하지 않고 학교의 문을 바깥과 통하게 열어놓고 같이 하자고 이야기하며 우리는 꾸준히 물방울을 나른다. 그러면 언젠가 점점 물방울이 커지고 많아져서 불을 끌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갖는다. 그럴 수 있기를 바라며 9월, 학교를 다시 열었다. 우리의 질문 : 공감(empathy)한다는 것은 지난 여름, 학교만들기 팀이 종로 돈의동 쪽방촌에서 온도재기를 했을 무렵의 일이다. 쪽방촌 여름철 폭염에 대한 정책을 연구하고, 제안하기 위해서 오전 오후 온도 변화에 따른 65세 이상의 노인들의 건강 변화를 체크하는 일이었는데, 2주일동안 아침 8시와 2시에 나와서 하면 되는 일이었다. 집이 먼 편인 남자 죽돌들은 대안교육센터에서 일하는 부암동 은진네 집 빈 방에서 4명이서 2주일을 지내야 했다. 남의 집에서 지내는게 쉬운 일은 아니지만 우리의 걱정은 다른 공간에서 2주일동안 지내는 것도, 하루에 두번이나 종로까지 차를 타고 왔다 갔다 해야 하는 것도 아니라 쪽방촌에서의 안전 문제였다. 조를 짤 때도 쪽방촌 안에서의 안전이 걱정되는 이유로 남자 죽돌들이 조마다 배치되는 것을 신경쓸 정도였다. 여차하면 물리적(?) 방어의 역할도 해야 한다는게 주최측의 설명이었다. 나는 조금 긴장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에이, 어차피 거기도 사람사는데인데 뭐 별 일 있겠느냐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실제로 쪽방촌에 가보니 내가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열악한 환경에서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었다. 방들이 위 아래로 빈틈도 없이 딱딱 들어차있고 공동 샤워실과 세탁기를 써야하고 어디에선가는 냄새도 났다. 참상이었다고 이것저것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정말 온도재기를 하면서 한낮에는 40도 가까이 되는 실내 기온에 땀이 주르륵 흘렀고 불과 몇분 있는데도 그렇게 괴로웠는데 어떻게 거기서 살아가나 생각이 들 정도였다. 가장 힘들었던 것은 낮이고 아침이고 우리가 돌아야 하는 골목길에 서넛명씩 꼭 술을 마시고 취해계시는 아저씨들이 항상 가만히 보내주시는 법이 없었다는 거였다. 특히 그 중에 한 분은 '왜 누군 해주고 누군 안 해주냐'며 화를 내며 따지셨고 우리가 노인분들만 대상으로 하는 것이라고 대답하면 노인네는 죽으면 안되고 우린 죽어도 되냐고 하시며 우리를 참 난감하게 하셨다. 항상 우리한테 화를 내셨고 언젠가는 기분이 매우 안 좋으셨던 모양인지 욱하셔서 때리려고도 손이 올라갔던 아찔한 순간도 있었다. 어느새 그런게 너무 싫고, 날씨도 너무 덥고, 차타고 돌아다니는 것도 너무 힘들게만 느껴져서 그 아저씨를 마주치지 않기 위해 피해다닌 적도 있었다. 어느날은 피해다니던 와중에 다시 그 아저씨를 맞닥뜨리게 되어서 이번에 또 그러시면 어쩌나 걱정하고 있는데 갑자기 무기력하게 '나같은 놈은 쓰레기니까 신경쓰지 말고 가서 노인들이나 잘 봐달라'고 말씀하시고 그냥 가시는게 아닌가. 그리고나서 화도 나고 미안함, 씁쓸함, 허무함 등의 알 수 없는 감정을 잘 알 수가 없었다. 인류애를 생각했는데도 가까이 있는 한 사람에 대한 미운 감정을 다스리기 힘들고,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고 보람있게 시작했는데도 어느 순간부터 그 일이 너무나 힘들어지는 갈등들을 겪었던 것이다. 공감empathy과 동정pity이 어떻게 다르냐는 우리의 질문은 여기서부터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쪽방촌 온도재기 전에 극단 타이헨을 만났을 때는 신체의 무언가 결여되어있고 그것을 안됬다고, 불쌍하다고 그 사람을 대상화시키고 우리가 막연히 불쌍히 여겼던 '장애인'이 스테이지 위의 배우가 되어 몸을 내보이며 연기하는 모습에 꽤 놀랐었다. 비장애인은 쿠로코라는 보이지 않는 역으로 그들의 수족이 되는 일을 맡는데, 쿠로코와 배우가 서로를 파트너로 연극을 같이 만들어나가는 것, 그리고 장애인의 신체가 통제불능uncontrollable하고, 예측불능unpredictable한 움직임을 예술로 만들어내는 것이 기존의 이해를 엎어버리는 경험이었다. 그래서 타이헨의 경우 연극을 같이 만들어가는 파트너로서 공감하고 이해해나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쪽방촌 어르신들은 무엇을 같이 이뤄내는 것인가? 사실 타이헨도 마찬가지인데, 도우미 없이 많은 부분의 생활이 불가한 신체장애인인 배우들과 함께할 '쿠로코가 된다는 것' 또한 타인의 도움없이 살아갈 수 없는 존재일 수 있는 사람들과 같이 살아가기를 결심하게 되는 것이다. 9월 이후에도 공감과 동정의 차이가 뭐냐는 질문의 답을 가지기는 어려웠고, 그래서 우리가 같이 살아가는 게 뭐냐는 질문은 이어졌다. 학교를 시작하고, 우리는 이 '살아가기'의 문제를 생태, 평화, 통합의 키워드를 가지고 공부해보기로 하였다. 같이 살아간다는 것은- 2010 창의 서밋 '지속가능한 창의성sustainable creativity'에서는 문명의 전환기에 그전에 문제를 일으키는 구식의 사고방식이 아니라 새로운 사고를 가지고 해결책으로써 우리가 다시 생각해봐야 할 가치들에 대해 물었었다. 여러 발제자들이 '돌봄', '부족', '마을'등의 키워드를 가지고 같이 일하고, 살아가며 변화의 파도를 타고 위기를 헤쳐나가는 방식에 대해 이야기했었다. 강연자 중에서는 일본의 전쟁을 억제하는 헌법 9조를 지금 세대의 일본 젊은 이들의 자발적인 참여로 채택하고, 평화를 지키자며 걷기 운동을 하는 Walk9의 마사키 다카시 선생님이라는 분이 계셨다. 마사키 선생님은 농부이면서도 철학자, 평화 운동가이신 분인데 우리 모두가 자연의 소중함과 가치를 깨닫고 그라운딩(회귀)해야 하며, 자연의 어머니가 가장 슬퍼하는 것이 전쟁이라고 이야기하셨다. 우리는 마사키 선생님을 모셔서 평화 세미나를 열고, 선생님이 이야기하시는 자연과 평화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문제는, 우리가 정말 자연과의 일방적인 착취의 관계에서 벗어나 인류가 자연의 일부로서 살아가지 않으면, 인류나 지구의 자연 어느쪽도 앞으로도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이었다. 또한 인간의 전쟁으로 인해 바다의 물고기들, 숲의 새와 벌레들이 얼마나 죄없이 죽어갈지 생각해보자는 것이었다. 정말 우리의 삶의 지속가능성을 질문할 때는 생태적 공생의 영역까지 생각해봐야 한다. 우리의 삶의 라이프스타일이 너무나 소비주의 적이고, 그것이 자연으로부터의 무차별 자원 착취에서 제 3세계의 노동자 착취, 그리고 소비자들의 돈을 착취하기에 이르기까지 복잡히 얽혀져있는 문제에서 우리의 라이프 스타일에 대해서부터 고민하기 시작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 사이의 문제도 너무 복잡하다. 과거에 있었던 일들이 지금까지도 잊혀지면 안된다며 사회적 기억 운동이란 것을 벌이는 사람들도 있다. 우리의 세상은 분쟁과 갈등이 얽혀있고 우리는 그 실타래를 어떻게 이해하고 머릿 속에서 풀어내야 할지 감이 잘 오지 않았다. 만지기조차 선뜻할 수는 없었던 것이었다. 학교만들기 팀이 제주도 가시리에 갔었을 때, 그곳의 마을만들기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일하고 계셨던 지금종 선생님께서 해주셨던 마을 사람들에 대해서 해주셨던 이야기가 있다. 제주도 4.3 항쟁 이후 가시리에서 공산주의자로 몰려 죽은 주민들과 그 학살에 가담했던 그 때의 사람들 혹은 그 자손들이 같은 마을에서 살고 있는데, 그 사람들이 모두 한 마을에서 이웃이 되어서 지내고 있지만 그 사람들은 더 이상 그런 일들로 인해서 앞으로 다른 나쁜 일들이 생기지 않도록 무덤까지 비밀을 가져가겠다고 하는 것이었다. 평화적인 방법일 수도 있고, 그저 그 사실을 쉬쉬하고 묻어두는 것일 수도 있지만 그 사람들이 한 마을에서 지금 어떤 식으로 같이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후 우리가 평화워크숍으로 모신 조진석 선생님께서는 '꽃순이 할머니'라는 동화책을 가지고 오셔서 위안부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해주셨다. 그 다음 수업에는 나카무라라는 가상의 일본인 병사의 이야기를 해주셨는데, 사실은 그 일본인 병사도 국가가 벌인 전쟁으로 피해입고, 어쩔 수 없었다고 자기 합리화를 해야만 했던 수많은 사람들 중 한명일 수 있었던 것이다. 이제 할머니가 되어버린 정신대 피해 여성들은 긴긴 세월 지금까지도 일본군의 과거 행적과 자신들의 한 때의 청춘을 송두리째 빼앗아가버렸던 행각들을 사죄해야 한다고 이야기하신다. 역사 속의 사건이지만, 그 당사자들이 현재도 살아가고 있고 스스로 목소리를 내고 있다. 할머니들과 그들을 지지하는 정대협이라든지, 여러 그룹들은 이게 우리 사회 안에서 '그들의 일이었고, 그들의 목소리를 낸다'를 넘어서 모두의 일로 관심가지고 참여해주었으면 한다고 한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책임을 회피하는 식의 보상도 됐고 정말 진정성있는 사죄를 해야 한다고 하신다. '그런데 사죄가 뭘까, 할머니들은 그렇게나 일본이 증오스러울텐데 앞에 나서서 사죄를 받아내는 걸로 족한건가? 사죄를 어떻게 해야하는거지?' 정대협 20주년 포럼에 참여했을 때 이야기를 듣다보면 이런 질문들이 생기기도 했었다. 그날 행사의 시작에서는 다나카 노부유키라는 사람이 과거 일본군 병사였던 아버지의 전쟁 일기를 한국에 기증하며 사실을 알고 그것을 딛고 한국과 일본이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말하고, 우리가 서밋 때 만났던 walk9의 마사키 다카시 선생님은 과거 일제 시대 일본이 한국에 저지른 일들에 대해 사죄하며 젊은 이들과 걸으며 헌법 9조를 일본이 다시 채택하고 먼저 전쟁을 버리자며 눈물흘리며 걷는다. 많은 사람들이 당시의 참상에 대해 이야기하고 사죄하는 것은 피해자와 가해자를 나누며 너희와 우리가 이렇게 떨어져있어, 라고 이야기한다기보다는 그런 일과 감정과 역사의 골을 넘어서, 그래도 앞으로 이런 일이 없도록 하며 같이 살아가야 하기 때문인가 싶었다. 근래에 서로 돌봄과 마을로서 같이 살아가야 한다는 이야기가 주변에서 많이 들리고 있고 창의 서밋에 왔던 창의/직업학교 'NOMADS'의 교장 피터스핀더는 우리가 세계를 떠돌면서 자신과 같은 동류의 '부족TRIBE'를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하자 안의 예비 사회적 기업인 '유자살롱' 또한 사회의 어디에도 이끌리지 않고 부유하는 이른바 '무중력 청소년'들을 음악을 매개로 서로 만나게 하는 MEE'T-ribe'라는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우리가 정말 '부족'이라는 말을 사용할 수 있을까? 그 말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고, 사실 나는 우리가 이야기하는 같이 살기에서도 지금은 아직도 질문 형태라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보통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장애인들이나 사회의 바깥 쪽에 있다고 여겨지는 쪽방촌 사람들이나 난민들, 그리고 심지어는 제 아무리 범죄자였던 사람들과도 같이 살아가야 한다면, 우리가 같이 살고 있다고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다른 존재들을 이해하기 위한 감수성을 가져야 하는건가? 이 세계는 너무 넓어져왔고 이제는 밖으로 나갈 곳도 없이 다양한 사람들이 여러 일들과 함께 늘어나서 점차 좁아지고 있다. 정말 다른 사람의 일도 내일로 받아들이고 숲의 불을 같이 끈다고 말할 수 있는 건지, 아니 우리가 같이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는 아직도 어려운 질문이다.
일상 학교에 다니면서 여러 프로젝트를 거치면서 공부하고 알게 되는 것들이 많다. 하지만 그 내용과 정작 자기 삶의 괴리를 느낀다면, 우리의 삶 자체가 대안을 가지고 지속되는 것도 어쩌면 힘든 일이다. 그래서 우리 학교는 일상을 간과하지 않고, 우리의 일상이 어떻게 움직이는지도 관찰하며 만들어간다. 음식 이야기를 해보자면 우리 학교에 다니는 몇몇은 먹거리에 신경을 써야 하는 사람들이 있다. 아토피 피부염으로 밀가루와 계란을 먹으면 안되는 사람, 몸의 건강 때문에 식단을 조절해야 하는 사람 등… 주로 밀가루에 문제가 있는 경우가 많은데 이게 다 수입해오는 과정에서의 과도한 방부제 처리의 영향인 탓도 있고, 그렇다고 밀가루 아닌 다른 음식에 화학조미료, 미국의 초대형 농장에서 비행기로 농약친 옥수수 원료, 비위생적인 환경에서 사육되어 대량도축당하는 육류가 안 들어간 음식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요즘은 불신 정도가 아니라 알면서도 먹어야 하는 아이러니한 상황들이 주위에 너무 많다. 점심에는 하모니 식당의 급식을 먹지만 밤 10시까지 있을 때도 많은 우리는 저녁은 매식으로 하는 경우가 많으니 이 문제에 대해서도 고민이 많다. 그래서 토요일 점심은 우리가 재료도 사다가 직접 요리해보자고 하는 '공동의 식탁'도 계획했는데 일정이 안 맞는 탓에 실제로 그렇게 많이 하지는 못했다. 먹거리 뿐만 아니라 우리의 생활 습관으로부터 실천을 시작해야한다며 텀블러와 과테말라의 트라마에 주문한 트라마 하자 수저집을 판매하기도 하고 화분과 화단에 살아있는 식물을 키워보는 시도들도, 우리의 일상을 스스로 구성해보려 하는 시도들이다. 의례 이번 학기를 시작하면서 내 화두는 축제와 의식ritual이었다. 학교만들기 팀은 5월에 성년식을 기획하고 준비한 적이 있었는데, 이 사회에서 어른이 된다는 것이 무엇일지, 성장과 성숙을 축하하며 마을의 이웃들과 어른들이 그것을 축복해주며 스스로가 자신의 성장을 의미있게 생각한다는 것에 대해 이야기나누었다. 그 때 나는 '사회에서 실속 있는 선물을 주고받는 것 등이 자연스럽게 시간에 의해서 사라진다고 이야기하지만 여기저기서 대수롭지 않게, 선물을 주고받는 식으로 인식되는 것 같다. 뭘 꼭 사고, 줘야하고 이런 식의 시장논리로 일상들이 점철된다는 것이 진짜 무섭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성년의 날을 떠올리면 향수나 장미를 주는 날이면 간지럽게 왜하나 싶었다. 그런데 오늘 성년식을 하고 의식으로서 일상을 회복한다는 것, 그것을 사람의 몸과 정신에 새겨가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 의식들이 사람 한명 한명의 성장으로써 개인의 역사에 쌓여간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사람 하나하나의 역사가 굉장히 중요해져야 하는 때다 싶었다. 저번에 좋아하는 뮤지션의 최근 앨범인 orbital period, 궤도주기의 뜻이 ‘태어난 날짜와 요일이 일정한 주기인 28년에 한 번 씩 돌아온다.’ 라는 것이었는데 그걸 보고 사람이 하나의 행성인 것 같았다. 사람이 하나의 별 같구나 싶었다.'라고 이야기했다. 아마 거의 모든 것이 돈으로, 물건으로 의미가 설명되지 않는 것이 없고 유례와 기원도 없이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따르고 있는 허례허식들이 감동과 의미도 없이 사람을 설명할 수 있다고 믿는 사회에 우리가 사람들을 만나서 의미있게 지혜와 삶을 나누고 그렇게 삶을 진정 풍요롭게 할 수 있는 감동을 만들고 싶다. 그렇게 벌이는 축제와 의식이 더욱 많은 사람을, 더욱 많은 다른 존재들을 배려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북극의 오로라 Playing for change라고 전세계를 돌아다니며 하나의 노래를 연주하는 뮤지션들의 영상을 찍어서 한곡의 노래로 잇고, 소외 지역에 음악학교를 짓고 교육하는 그룹이 있다. 버스 하나를 타고 같이 떠날 수 있는 팀이다(비행기 탈 때도 있겠지만). 또, 17hippies라는 멤버 모두가 각자 예술가이고 그들이 모였을 때는, 정말 많은 악기 하나하나를 가지고 멋진 공연을 만들어낸다. 학교만들기를 시작하면서 자주 우리가 이야기했던 위 두팀의 이야기는, 우리도 꼭 저렇게 뭉쳤을 때는 세계를 구할 수 있는, 그러기 위해서 서로 꿈을 나누고 같이 공부하며 자꾸 일을 더 잘하게 되는 팀이 되자고 나누었던 것이다. 히옥스는 언젠가 우리가 그런 팀으로 같이 할 수 있게 되는 때에는, 다 같이 북극의 오로라를 보러 가자고 하신다. 우리는 팀으로서, 그리고 나는 그 안에서 어떻게 지내왔을까? 작업장학교의 문을 다시 열고 새로운 사람들을 맞을 준비를 하면서 우리는 '누구나 올 수 있는 학교'에 대해서 이야기했었다. 누군가의 '크리킨디의 학교'라고 표현처럼 우리는 누구나 크리킨디가 될 수 있고, 그럴 수 있다면 좋다고 생각하고 있다. 만약 스스로 꼭 적을 옮기지 않더라도 그 배움을 경험하고 싶다면 와보게끔 하고 싶었고, 교환학생 등의 여러가지 새로운 방식들에 대해서도 시도해본다. 그게 개인들에게 어떤 경험으로 남을지는 각자 다르겠지만 우리에게 하나 걱정이었던 것은 '신입생들이 크리킨디 이야기를 어이없어하거나, 부담스러워하거나, 힘들어하면 어쩌나'였다. 누구나 오고 누구나 다닐 수 있는 학교이고 싶었지만 다니기 어려워할까봐 걱정도 있었다. 그래서 길찾기는 없지만 한달 간의 시간을 두고 같이 해보면서 계속 같이 하고 싶은지 아닌지를 스스로 결정하기로 했었다. 그 기간동안 달맞이 축제를 같이 기획해내고 매체 수업, 평화 세미나도 같이 했었다. 그리고나서 한달이 지났을 때는 모두가 계속 하고 싶다고 이야기했었는데, 그 후 몇주가 지나도 지각문제는 별로 나아지지 않고, 나왔다가 안나왔다가를 반복하는 사람도 있고 여전히 집중하기에 힘들어하고 뭔가 해볼 여유가 다들 없었다. 겨우 일정만 소화해냈고 그 이상의 하고 싶은 일들이 잘 나오지 않고 학교 전체가 가동해서 움직인다는 느낌도 없었다. 항상 지쳐있었다. '크리킨디가 된다는 것이 이렇게 힘든 일일까?'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아마 특히 신입생들은 한달의 적응기로 몸을 만든다는게 쉽지는 않았을 도전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 12월 말이 되었을 때는 학교를 그만둔 사람들도 있다. 아직 손발이 잘 안 맞았던 건지, 이번 학기에는 팀으로 달맞이 축제, 창의 서밋 코디, 따비에 발족식 등의 일들을 하게 되면서 자기가 할 일을 잘 못찾기도 하고, 내용의 핵심을 잘못 이해해서 전혀 엉뚱한 이야기를 하거나, 잘 못 알아들은 채로 서로를 잘 돕지 못하는 일도 있었다. 핵심을 못 짚어서 무얼하면 좋을지 어쩔 줄 모르며 보내던 시간도 많았고, 그 때문에 자기가 대체 학교에 가서 무엇을 한건지 잘 모르겠던 날들에는 잠시 갈피를 못잡고 방황한 적도 있었던 것 같다. 언젠가부터는 일정을 소화해내는데 급급하고 피곤해 무언가 더 생기는 것이 두려워 서로 더 이야기해보려는 것도 겁냈었고, 가끔 제안을 할 때 반응이 돌아오지 않았던 것에는 상처입고 또 한쪽 구석에서 꽁하고 있기도했다. 우리 학교가 한 팀으로서 좀 더 많은 일들을, 좀 더 큰 일들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말과 해야하는 일만 늘어나서 '옆'그레이드하지 말고 할 때는 의기투합해서 해내고, 그것이 즐거워서 자꾸만 하게 되고 할 때마다 좀 더 잘하고, 사람들이 좋아하고, 우리의 공부가 나날이 쌓여가는 것을 보여줄 수 있는 좋은 것들이 많이 생겨났으면 한다. 그러다보니 자기가 정말 하고 싶어지는 일도 찾으면 좋겠고 학교에 있기 때문에 더 키워갈 수 있고, 더 나아가서 자기 삶의 형태에 대해서도 실험해보고 고민해보면서 학교랑 같이 커가고 언젠가는 자신의 길을 또 다른 장소에서, 또 다른 사람들과 가볼 수도 있지 않을까 기대한다. 그러려면 정말 하나씩 무언가를 마칠 때마다 평가도 꼼꼼히 해봐야 하고, 공부를 어떻게 해나가야 할지도 더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고 본다. 빗물의 시溡 작년, 마을 안에서 노래를 짓고 부르면서 다른 사람들도 같이 악기를 치게 하고, 노래부르게 하는 '마을의 음악가'에 대해서 이야기를 시작했었다. 마을에 무슨 일이 생기거나, 잔치가 벌어졌을 때 여기저기 가서 활약하고 다른 사람들도 기뻐해줄 수 있는 음악가가 되고 싶었다. 우리가 '세계를 구하는 시인'이라는 이야기를 나눌 때부터는 내가 할 수 있는 일로 음악가로서 참여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번 학기를 새로 시작하게 되면서는 학교만들기 과정동안 '작업장학교에서 경험하고 배운 연출에 대한 센스와 이해를 가지고 3일간의 축제를 기획할 수도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도 하게 됬다. 음악가로서 일상의 의식, 의례의 화두를 가지고 기획해내는 경험을 하겠다고 했던 나는 한동안 자기 곡조차 잘 안 쓰게 되었다. 학기 초에는 라디오 프로젝트도 해보겠다고 하면서 여러 이야기를 자유롭게 하고 다른 프로젝트를 이어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상상을 했지만 학교의 바쁜 일정을 소화하는 것에 바빠서 제대로 해내지 못했다. 이제는 다음 단계로 가야할 것 같다. 세계는 언제 구하냐고 가끔 이야기하는 것처럼 우리가 좀 더 전체적인 모습으로 나아가는 것을 볼 수 있어야 하고, 그 안에서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이 어떻게 가고 있는지도, 우릭 일을 해내는 역량을 어떻게 키워낼 수 있을지도 보아야 한다. 하자의 처음왔을 때, 나는 건물 안에서 2층짜리 조형물이 만들어지고 있고 누군가 분주히 돌아다니며 영상 실험을 하고, 어느 방에선가는 게릴라 공연이 펼쳐지는 식으로 막연한 로망을 가지고 있었다. 이제는 그 막연한 로망만 가지고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며 실망할 것이 아니라, 우리의 물방울을 어떻게 더 크게 만들어낼 수 있을지 고민도 해봐야 하고 더 많은 다른 사람들도 같이 해보게 할 수 있게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작은 물방울이라도 포기하지 않고 불을 끌 수 있다는 희망으로 계속 떨어트리려는 노력을 잇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안다. 물방울이 무수한 빗물이 되기까지는 계속 물방울을 나르는 노력이 있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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