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웃긴데 진지하다, 그 녹록한 소통“거친 삶을 살아라”
“진정한 깡은 존재의 고독감을 이기고 자기 성격을 주장할 줄 아는 것”
장장 7시간, 3000여 청중들을 사로잡은 6명의 명사들. 지식과 엔터테인먼트의 만남이다. 새롭게 떠오르고 있는 문화 트렌드‘강연콘서트’ 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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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타치며 노래한 진중권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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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연과 음악이 어우러진 ‘강연콘서트’는 청중은 물론 강사까지 편안한 마음으로 참여하게 했다. 인생 경험부터 사회적 발언까지 다채롭게 이야기됐다. |
음악이 흐르고 강연이 시작된다. 강사는 청년기의 치기 어린 방황을 고백하다 청중에게 꼭 이야기하고픈 메시지도 전한다. 자연스레 날카로운 현실 비판도 곁들여지고 깜짝 서비스로 노래도 선사한다. 객석은 박수치고 깔깔 웃다가 어느새 펜을 꺼내 진지함에 빠져든다. 티켓 판매 1주일 만에 3000장이 팔리는 ‘강연콘서트’ 현장 얘기다.
명사들의 강연을 콘서트 형식처럼 꾸민 강연콘서트가 새로운 문화로 등장했다. 지난달 화제가 된 이야기콘서트 ‘김제동, 신영복에게 길을 묻다’ 등은 시민단체가 마련한 행사였지만 강연콘서트를 아예 사업으로 내건 전문회사까지 생겼다. 지식과 엔터테인먼트의 21세기형 만남, 엄숙주의의 탈피, 닫힌 광장에 대한 대중적 욕망의 이벤트 등 분석도 다양하다.
7시간짜리 강연콘서트 현장지난달 31일 서울 성북구 안암동 고려대 화정체육관. 3000명이 넘는 청중이 모여들었다. 인기 아이돌그룹의 콘서트 현장이 아니다. 7시간짜리 강연을 듣기 위해 VIP석 1만5000원, 일반석 1만원의 티켓을 구입해 온 사람들이다. 이날 강사는 팝 아티스트 낸시랭, 논객 진중권, 디자이너 최범석, 희망제작소 박원순 상임이사, 톱모델에서 싱어송라이터로 데뷔한 장윤주, 그룹 장기하와 얼굴들이었다. 오전 11시 낸시랭이 첫 주자로 등장한 후 강사들의 순서가 이어졌다. 중간에 점심시간을 겸한 휴식을 포함, 7시간짜리로 구성됐다. 마지막 강사 장윤주의 코너가 끝난 오후 6시까지 관객 대부분은 오전처럼 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주제는 ‘무한청춘엔진’. 강사들은 각자 청춘·꿈·꼴·끼·깡 등 소제목을 갖고 40~50분 강연을 했다. 강연 후에는 즉석 질의응답이 이어졌고 강사들의 노래도 곁들여졌다.
박원순 변호사는 강연 분위기가 무르익자 “절대로 안 굶어 죽는다. 쫀쫀하게 굴지 마라. 뭐가 무서워서 이 젊은 나이에 먹고 사는 것에 쩔쩔매고들 있나. 여러분의 끼를 발산해라. 거친 삶을 살아라. 훨씬 가치있고 보람있다. 남들 다 가는 고속도로보다 좀 위험이 있다고 해도 다른 길을 가라”고 당부했다. 그는 틈틈이 과거를 회상하며 “나도 모르게 어느새 ‘탐욕의 궤도열차’에 올라탄 적이 있다. 공안검사가 아닌 인권변호사가 된 게 얼마나 다행인가. 인생은 버리는 만큼 얻는다”고 털어놨다. 대학 시절 감옥에 간 얘기를 하면서는 “책읽기에 그만한 곳이 없다. 감옥의 면학 분위기는 정말 좋다. 인생에 한 번은 다녀와야 한다”고 말해 객석에서 웃음이 터져나왔다. 그는 무반주로 ‘낙엽따라 가버린 사랑’을 불러 큰 박수를 받았다.
곧이어 장기하와 얼굴들이 무대에 올랐다. 장기하는 “처음엔 얘기를 해달라고 부탁 받았는데 음악으로 대신해도 된다고 하기에 이 자리에 왔다. 노래하고 있는데 강연하는 기분”이라고 말했다. 그는 노래 중간에 “우리가 생뚱맞지는 않죠?”하며 ‘싸구려 커피’ ‘달이 차오른다, 가자’ 등 히트곡을 불러 환호받았다. 무대 뒤에서 만난 장기하는 “명사들의 이름 값에 비해 티켓 값이 비싼 것도 아니고 색다른 분위기로 좋은 것 같다”고 평했다.
오후 4시 다섯번째 주자로 나선 진중권은 “조명 때문에 여러분이 잘 안 보인다. 이런 환경(콘서트장 같은 무대)에서 얘기하는 것은 처음”이라며 어색해했다. ‘깡’을 키워드로 강연을 시작한 그는 초등학교 때 내성적이고 수줍음이 많아 손 들고 대답도 못했을 정도였다며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논객으로서 최근에 겪고 있는 어려움이나 사명감, 황우석 사태 때 우울증으로 2년간 글쓰기를 중단한 일 등을 털어놨다. 그는 철학자 디오게네스를 가장 존경한다며 “진정한 깡은 존재의 고독감을 이기고 자기의 성격을 주장할 줄 아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우리 사회는 ‘욕망의 획일화’로 100명이 똑같은 포트폴리오를 갖고 있다. 요즘 젊은이들은 시장권력, 국가권력에 너무나 순응적인 사람이 됐다. 여러분이 갖고 있는 욕망이 진짜 자신의 것인지, 나만의 욕망을 추구할 용기가 있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보라”며 끝맺음했다.
오전 11시부터 마지막 강사 장윤주의 강연까지 다 지켜본 서울산업대 신지영씨(시각디자인학과 1학년)는 “그냥 강연이었으면 7시간을 견디지 못했을 것”이라며 “평소 TV와 책을 통해 볼 수 없었던 강사들의 일면과 숨은 얘기를 직접 들어 신선했다”고 말했다. “맨날 싸움하는 모습만 보던 진중권씨가 기타 치며 노래하는 것을 보니 즐겁다”고 덧붙이기도 했다.
신개념 문화현상, 상품 될까 |
| 음악으로 이야기를 대신한 장기하와 얼굴들 |
이날 행사를 연 (주)마이크임팩트는 오는 28일 강연콘서트 ‘무한청춘엔진 2탄’을 연다. 대표적인 ‘소셜테이너’ 김제동씨를 비롯해 연예인 노홍철·김신영, 사진작가 김중만, 경제전문가 박경철씨 등이 강사로 나온다. 콘서트, 뮤지컬 등 다른 공연이 쏟아지는 연말이지만 3000~4000명의 관객을 예상하고 있다. 마이크임팩트는 강연콘서트가 음악콘서트, 뮤지컬, 연극 가운데 골라 즐기는 하나의 문화장르가 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강연콘서트에 대한 열렬한 호응의 배경에는 현재의 정치·사회적 분위기가 자리잡고 있다는 분석도 있다. 강사도 그저 유명인이나 스타에 그치지 않는다. 사회적 발언으로 현 시대에 존재감이 남다른 신영복, 진중권, 박원순, 김제동 등이 핵심을 이루기 때문이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이동연 교수는 두 가지 측면으로 풀이했다. “MB정권이 들어선 후 지식인들의 발언이 제약을 받으면서 지식인들과 시대적 고민을 함께 나누려는 대중의 욕구가 작용한 결과”라는 것이다. “또 하나는 지식과 교양의 욕구가 있는 관객들을 차별화해 전략적으로 접근한 새 문화상품으로 볼 수 있다”고도 했다. 마이크임팩트의 조남권 실장은 “사실 몇 천명이 몰리는 것에 내부적으로도 놀라고 있다”며 “닫혀있는 광장, 소통 부재의 답답한 현실에서 비롯된 문화적 대리만족 성격이 강한 것 같다”고 말했다.
지난달 참가비 1만원의 이야기콘서트를 진행한 민주넷 풀뿌리팀은 지방 투어를 계획하고 있다. 오는 13일 청주, 27일 춘천, 12월 울산·전주 등이 예정돼 있다. 강사는 지난달 23일 서울 행사와 마찬가지로 성공회대 신영복 교수다. 토크쇼를 벌인 김제동씨 역할은 각 지역의 유명 인사나 해당 지역 출신 연예인이 맡게 된다. 기획자 이구경숙씨(한국여성단체연합 정책국장)는 “사람들의 삶이 팍팍해지면서 위안을 얻으려는 욕구가 큰 것 같다. 요즘 사람들은 영상과 노래 등 문화적 재미에 익숙해 효과적인 메시지 전달 차원에서 이야기와 음악이 곁들여진 강연회를 떠올렸다”고 말했다. 그는 “젊은이뿐 아니라 10대 청소년과 중장년층의 호응도 크다. 지방에서도 300~600석 정도의 공간에서 진행될 것”이라고 전했다.
한양대 탁현민 겸임교수는 “대통령은 물론 정당과도 소통이 되지 않는 상태다. 갑갑함을 느낀 대중의 요구에 부응한 새로운 강연문화”라고 정의했다. 그는 “실험적인 문화현상으로 앞으로 트렌드화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봤다. 진중권씨는 “진지함과 오락성이 결합된 일종의 컨버전스(융합)”라고 말했다. 이동연 교수는 “딱딱한 강연에 음악을 담아 부드럽게 풀어내는 것은 좋지만, 자칫 지식이 공연산업의 상품으로 전락할 위험도 있다”고 했다.
<글 김희연·사진 남호진기자 egghee@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