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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을 위한 시민문화 워크숍글 수 603
나는 20대지만 10대로 말한다.(가제) <개요> 공통주제: 10대, 페미니즘을 말하며 past path-finder: 학교를 자퇴하며 - 마음 닫고 입 닫고 path finder: 신세계를 보다, 글과의 만남 1학기: 웹진 ‘하자로’ - story teller를 말하기까지 2학기: 디자인 STUDIO202 BUT 주말영상학교 - 내 안에 샘솟는 비루한 캐릭터 3학기: 휴학, 그리고 <얘. 너. 나> - 10대를 직접 만났지만 돌아온 3학기: 시민문화 워크숍과 팀 프로젝트 - 나와 내 주변, 세대를 이야기하다. 내가 말하는 어른은! 그래서 나는 세대를 이야기한다. 같이 얘기해보는 것. 주변을 둘러보는 것 3학기 plus: Maesot - 내 세계 밖 10대를 만나, 내 삶을 들여다보다. 내 문제에만 시선을 두지 않는 것, 계속된다. 다른 삶을 살고 있다. 하지만 내 삶도 한국 10대의 삶은 아닌데? 나에게 하자란. 끊임없는 타자화와의 싸움. 작업 대상과 대화 대상 구분 경계를 뛰어넘어 처음으로 TV를 보며 눈물을 흘린 건 초등학교 4학년 때였다. 다 쓰러져가는 집, 밖에서만 잠기는 자물쇠 대문을 열고 들어가니 한 아이가 있었다. 옷을 다 벗고 지저분한 모습으로 콧물을 스윽 닦던 아이는 제작진과 조명을 보며 두려운 표정을 지었다. 곧이어 아이의 아버지가 들어왔고, 제작진을 내쫓고 아이를 계속해서 학대했다. 아이의 아버지는 시종일관 술에 취해있었고, 경찰에 신고하겠다는 마을 주민에게 “남의 집 일에 간섭하지 마!”라며 계속해서 아이를 구타했다. 나는 그 장면이 너무나 충격적이어서 계속 울었다. 아이의 인생이 너무 슬펐고, 방안에 앉아 TV를 볼 수 있는 내 삶이 너무나 감사하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한 편으론 그 아이에게서 알 수 없는 동질감을 느꼈다. 눈물 콧물 범벅이 되어 TV를 못 끄고 있는데 할머니와 이모할머니께서 방으로 들어오셨고, 울고 있는 나를 보며 왜 우냐고 하셨다. TV를 보고 울었다고 하니 나에게 참 착하다고 하셨다. 글쎄, 나는 착해서 울었을까? 나는 할머니의 말과 다르게 착하지 않았던 것 같다. 전교생 사오백 명에 육박하는 아이들과 마주치는 일반학교 생활은 내가 착하지 않다는 걸 알려주었다. 정말 착한 아이는 아무도 싫어하지 않았고, 아무도 그 아이를 욕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욕을 많이 먹었고, 싸우기도 많이 싸웠다. 어떤 이유가 됐건 나는 매번 친구와의 관계에서 스트레스를 받아야 했고, 억지로 웃음 짓고 억지로 빈말을 해야 했다. 그래야 싸움을 피할 수 있었다. 성격상 내 생각을 다 말해야 직성이 풀리는데, 내 생각을 말하면 모두 상처받거나 나에게 시비를 걸었다. 그래서 늘 답답했다. 내 진심을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고, 집에 가도 매일 혼자 앉아서 컴퓨터나 해야 했다. 그래서 인터넷 세상에 말 한 번 해본 적 없는 사람들에게 고민 상담을 하기도 했다. 실체 없는 나 자신과 대화를 하기도 했다. 외로운 나날이었다. 그래서 학교에서 나눠주는 설문지에 적힌 ‘고민을 털어놓는 사람은? 1. 부모님 2. 선생님 3. 상담 선생님 4. 친구 5. 기타’에 거짓으로 체크하곤 했다. 그래서 그 때 내 꿈은 ‘평범한 사람’이었다. 수학 선생님이 되어 아이들을 가르치고, 이란성 쌍둥이를 낳아 그저 그렇게 사는 삶을 원했다. 그 때 나의 평범함의 기준은 모든 사람이 경쟁하며 치열하게 갖고 싶어 하는 공무원이라는 직업과, 선생님이지만 현모양처가 되어 남편의 내조를 열심히 하는 여성이었다. - story teller를 말하기까지 내가 하자에 들어와 처음으로 잡은 마이크는 키보드였다. 그 때부터 글이 가진 매력을 알았다. 글을 읽는 사람이 속으로 내 글을 읽을 때, 내 생각의 진행 과정이나 회로를 그대로 따라가는 것, 눈으로 직접 보여주지 않아도, 입으로 소리 내어 말하지 않아도 그저 2차원의 면 위에 쓰인 활자를 읽기만 하면 되는 그 편안함이 좋았다. 감춰둔 생각이나 감정이 많아서 그런 건지는 몰라도, 나는 일방적인 글을 많이 썼다. 읽는 사람이나 누구와 함께 생각을 나눈 뒤 글을 쓸 것인지 보다는, 내 생각이, 내가 말하는 것 자체가 더 중요했다. 반면에 글쓰기 팀에 있던, 웹진 ‘하자로’의 편집국에서 일할 때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일하진 않았다. 하자와 하자 밖을 연결해주는 제 2의 문으로서의 역할을 다 하길 바랐다. 그래서 중간에 다른 길을 찾아간 팀원 한 명의 자리를 채우기 위한 마음까지 다 담아 열심히 했다. 객관적이지만 주관적인 내용을 담을 수 있는, 직접적으로 사실과 현상을 전달하는 웹진에 매력을 느꼈다. 하지만 칼럼을 쓰는 건 유독 피했다. 객관적인 내용보다는 내가 독자들에게 직접적으로 무언가를 말하는 것이 더 의미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 다시 읽어보아도 편집자가 웹진의 컨셉을, 기사를 어떻게 기획했는지 설명하는 것과 내 생각이 따로 분리된 글을 썼다. 하지만 <소녀에겐 가장 중요하지만 그 소녀에겐 반복되는 어떤 이야기>라는 긴 이름의 영화를 찍으며, 나는 내가 학교생활을 하며 느낀 학생과 학생 사이의 ‘친구’라고 부르는 관계에 깊고 오래된 위계가 있다는 문제의식을 드러냈다. 남 말처럼 느껴지는 문장이지만, 내가 쓴 시나리오 두 편 중 유독 찍고 싶은 시나리오가 한국 여자 10대의 이야기였다. 그 생각은 내가 하자에 들어와 처음으로 나 자신이 책임감을 갖고 주체가 되어 글을 쓰면서 시작했다. 내가 여자였고, 내가 10대였고, 내가 학교에서 위계질서 안에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이야기였다. 내 개인적인 경험 사실을 캐릭터를 만들고 이야기를 지어내 플롯을 전개하는 경험은 처음이었다. 관객과의 대화가 끝나고 나캉이 내게 “밤비 영화, 아직 다 말할 순 없지만 공감할 수 있었어요”라는 말을 했는데, 그 말을 듣고 나는 영상 매체의 힘을 느꼈다. 내가 만들어낸 민지와 아름이가 경험한 픽션이, 사실은 논픽션이라는 것을 관객도 다 알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2학기가 되어서도, 팀원이 하나도 없지만 나 혼자서 편집국을 맡아 웹진을 다시 이끌겠다며 스튜디오 202의 디자인 프로젝트를 거부하면서까지 가져온 고집의 성과, 성과보다는 결과였다. - 10대를 만나기까지 그 때부터 나는 10대를 입에 달고 살았다. 어딜 가나 10대 문제라고 하면 발 벗고 나섰다. 그리고 집에 가는 버스에 앉아 창밖을 보다가 목격한, 다방에서 일하는 중학교 후배를 통해 성매매 문제에도 관심이 생겼다. 사실 나는 10대 문제에서 크게 ‘한 건’ 한 것도 없고, 성매매를 한 적도 없지만, 내가 경험하지 않았던 문제에 관심이 갔다. 그리고 그 다음 학기 중간에 휴학을 신청했다. 유리가 내게 했던 코멘트가 생각난다. <얘. 너. 나>와 시간이 겹쳐 프로젝트를 하지 않겠다고 말했던 내게 “대체 예의가 있는 거냐 없는 거냐, 다른 죽돌들 생각은 해 본거냐?”라는 말이 비수를 꽂았다. 그 말 한 마디에 오만 가지 생각이 솟구쳤다. 바로 아르바이트를 하러 도망쳤다. 나는 그 때까지도 내 얘기를 하는 게 너무 중요했다. 말 하고자 하는 욕구가 폭발할 지경인 상태에 다른 사람들까지 왜 봐야하지, 라는 생각이 가장 컸다. 근데 모순되게 나는 10대가 ‘꿈이 없는 세대’나 ‘문제아’ 같은 수식어로만 설명되는 게 싫다는 이유로 <얘. 너. 나>를 기획했다. 모두 각자 개성이 있고 살아온 이야기가 다르고, 하고 있는 행동의 이유도 다르다는 걸 말하고 싶었다. 그리고 실제로 골치 덩어리의 대표라고 불리는 소위 일친 청소년을 만나 얘기를 나누고 싶었다. 일반학교에 다닐 때도 다른 아이들의 과거나 가정 상황 같은 건 잘 알지 못했던 것도 있고, 어떤 부분에선 ‘연구’가 목적이었다. 직접 얘기를 들어봐야 더 잘 알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제로 만나보니 내가 생각했던 깊은 관계를 맺거나, 서로의 과거를 얘기하며 자서전을 잘 쓰는 건 바랄 수 없었다. 첫 번째 장소인 성사중학교 아이들은 정은 많이 나눴지만 어떤 질문을 하기 힘들 정도로 정신이 없었고, 두 번째 장소였던 마포 보호관찰소 아이들은 마음의 벽이 너무 두꺼워 출석조차 제대로 하지 않아 몇 마디 나눠보는 것만으로도 큰 성과였다. 그렇게 나에게는 미적지근한 프로젝트가 되어 <얘. 너. 나>를 마감했다. 그 뒤로 10대를 만나고자 했던 건 <예술마을 고한·사북> 프로젝트였다. 과거 석탄마을로 호황을 누리던 사북, 고한은 정부의 폐광조치로 생존을 위해 카지노마을로 급변, 그 정체성마저도 불명확해졌다. 그래서 고한 중고교의 아이들은 카지노에 들어가기 위해 수업 중에도 딜러 연습을 하고 학교 앞에는 관광 레저 대학교 현수막만이 크게 붙어있다. 나는 그 아이들에게 어떤 꿈을 갖고 있는지 질문하고 싶었고, 가능하다면 그 꿈들을 수집해 작업으로 만들고 싶었다. 하지만 그것도 내 바람일 뿐, 학원과 야자, 정규 수업 때문에 제대로 묻지도 못하고 학교 운동장에 “너넨 꿈이 뭐니?”라고 쓰고 숙소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그 곳에서 내가 한 수많은 상상들은 결국 사색으로 그쳤고, 나는 정선 에세이에 ‘고한고교에서의 사색’이라며 챕터를 마감했다. 당시 나는 해보지 않고서는 모르는 것이고, 왜 지나가던 아이를 붙잡고 말을 걸 용기를 갖지 못했냐며 나를 자책했다. 하지만 나의 그 실망감은 용기의 문제나, <얘. 너. 나>에서 느낀 마음의 벽과 정신 사나움의 문제가 아니었다. 내가 어떤 ‘질문’을 하겠다고 했지만 사실 정확히 어떤 질문을 갖고 있던 것은 아니었다. ‘경험을 나누는 것’만이 중요했던 그 모호한 마음가짐으로 인해, ‘어떻게 하다가 보호 관찰을 하게 되었느냐’로 질문해 ‘싸우다가요’로 끝나는 대답을 들었다. 하지만 내가 가졌던 그 만남들이 나에게 중요하지 않았던 것도, 그 만남이 허무하기만 한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계속해서 10대를 외치고 있었다. - 나의 10대를 말하기까지 나는 정선에서 밤마다 가진 리뷰모임 때 “영원히 10대로 살고 싶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 때 난 열아홉이라 20대를 앞두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 말을 하고 싶었던 건, 그 때는 덧붙이지 못했지만, 어떤 모습의 어른이 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덧붙이지 못했던 건 그 어른이 어떤 모습인지 제대로 설명할 길이 막막했기 때문이다. 단순히 “안 돼”라고 말하거나, 10대 문제에는 관심도 없으면서 ‘꿈이 없는’이나 ‘글러먹은’을 10대의 수식어로 붙이는 어른이라고만 설명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그런 종류의 막막함은 페미니즘을 공부하며 함께 느낀 문제였다. 내가 페미니즘 공부를 시작하며 처음 정독한 책은 정희진의 <페미니즘의 도전>인데, 이 책은 내가 길찾기를 할 때 느낀 격한 감동을 다시금 느끼게 해주었다. 느끼고 있던 불편함이 사실 나만의 생각이나 하찮은 투덜거림이 아닌 진실이고, 어떤 부분에선 수정되어야 한다는 것을 콕콕 집어 말해주었기 때문이다. 책과 하나가 되어 한 달 동안 페미니즘에 흠뻑 빠져 살았다. 그리고 책을 정독한 후 나는 ‘여성주의로 다시 본 평등’이라는 제목으로 연구 주제를 발표했다. 한국 사회에서 여성이 인간으로서의 대우를 받고 있는가를 재질문하는 연구를 통해, 나는 ‘앎의 상처를 뛰어넘어 empower’와 ‘대화를 통한 재창조’를 이야기했다. 그런데 이 발표를 하기 전 많은 사람들이 내게 페미니즘을 공부할 때 너무 남자를 편협한 사람으로 묶어 말하는 것이 아니냐, 는 질문을 했다. 나는 그 때마다 내가 페미니즘 이론에서 말하는 남자는 모든 남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 사회의 강자라고 표현되는 남자를 말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좀 더 설명하자면, sex라는 기준을 떠나 성적 관습이나 규범 아래에서 성차별을 하는 사람을 통틀어 남성이라고 비유한 것이다. 지금 사회에서는 어떤지 아직 잘 모르겠으나, 내가 지금까지 느껴온 성적 불평등은 과거 남성들이 만들어낸 하나의 색안경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대답을 하며 나는 내가 10대나 여성에만 국한된 문제를 보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내가 일반학교 학생이기 때문에 교육의 의무와 획일화를 경험했고, 여자이기 때문에 성차별을 당한 것은 내 경험에서 나온 문제의식이었지만, 나는 공부를 통해 나의 경험만을 이야기 하지는 않았다. 내가 느낀 문제의식을 나만의 것으로만 이야기하면, 그것은 내 문제이지 사회의 문제가 될 수 없기 때문이고, 그것은 문제의식보다는 불평을 털어놓는 것으로만 끝나기 때문이다. 이 생각을 하게 된 것은 페미니즘 이론을 공부하며 알게 된 ‘개인적인 것은 정치적인 것이다’로만 한 것이 아니라, 시민문화 워크숍을 들으며 ‘나를 구하는 것이 세계를 구하는 것이다’라는 말을 통해서 다시 한 번 고민해본 지점이다. 매혹적인 말이었다. 내가 경험하지 못한 것을 구해내기 위한 일을 하는 것은, 투철한 봉사정신을 가진 천사들만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내 문제 하나 건사하는 것도 바쁜 이 시대에 내가 어떻게 ‘남 일’까지 상관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내가 보기에 시인들은 천사나 성인군자가 아니었고, 제각기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세계를 구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나는 자연스럽게 10대를 얘기하던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고, 내가 10대이고, 앞으로 함께 살아갈 사람들과 어떤 ‘기여’를 얘기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88만원 세대라는 어른들이 준 수식어에 기죽어 무기력해지는 삶이 아닌, 제각기 자신을 구하며 동시에 세계를 구할 수 있는, 기여하는 세대가 우리 세대이길 바랐다. (* 나를 구하는 것이 세계를 구하는 것이라는 부분을 좀 더 설명할 것인지?) 하지만 나는 그 말을 에세이에 적으면서 풀어도, 풀어도 풀리지 않는 매듭 하나를 발견했다. 나에게 세대가 무엇이고, 나에게 10대가 무엇인지 질문하는 사람들에게 나는 아무런 대답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14살부터 19살까지가 10대인지, 10살부터 20살까지가 10대인지 묻는 사람도 있었다. 꽤 오랫동안 받아온 질문이었지만 제대로 답하기엔 생각할 시간이 부족했다. 그리고 새로운 학기가 돌아와 나는 홍콩과 태국으로 가는 비행기에 몸을 싣게 되었다. 태국과 Burma 국경지역 Maesot의 10대들을 만날 기대를 품고 떠난 여행이었다. 그곳에서 나는 내가 상상했던 정치적이고, 치열하게 민주주의를 입에 달고, 평화와 관련된 책을 양 손에 가득 끼고 공부하며 돌아다니는 10대를 찾지는 못했다. 내가 대화하고 싶던 사람은 정치 얘기를 꺼내면 입장을 바로바로 얘기하고, 어떤 부분에서는 나에게 당찬 질문도 할 수 있는 사람이길 바랐다. 너무 편안하게 얘기하려고 했던 건 아닌지 반성해본다. 어쨌든 그곳에서 나는 주로 중학생 즈음 되는 여자 아이들과 친하게 지냈는데, 그 아이들과 내가 말했던 건 대부분 한국 방송을 통해 알게 된 아이돌 가수 얘기와 로맨틱한 드라마 얘기였다. 심지어 그 아이들은 TV를 보며 가수가 되는 꿈을 키우고 있었다. 유명한 가수가 되어 자신의 국가 사정을 알리고 도움을 요청하고 싶다는 이유였다. 그 얘기를 듣고, 처음에는 내가 한국 아이돌에게 갖고 있던 부정, 대국민의 사랑스러운 인형(doll)이 되려는 것인가, 라는 생각을 했다. 그러면서 대중매체에는 책임감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다시 돌이켜보면 그 아이들이 마음먹고 꿋꿋이 버티면 고국을 위한 노래를 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Maesot 아이들과 대화를 나누며 나는 내가 그 아이들과 어떤 관계를 맺고자 하는지 질문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내가 그 사람들을 모두 대상화하여 하나의 타자화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을 하며 나 스스로에게 큰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나는 대상화 하는 것과 별개로, 내가 처음에 가져간 질문은 ‘너희 세대를 어떻게 정의하고 싶은가?’였다. ![]()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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