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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을 위한 시민문화 워크숍글 수 603
12시 48분에 올립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Time line
07 여름 도봉고등학교 자퇴 : 학교에서 내가 쓰고 있던 가면들을 벗어던지고 싶었다. 또래 아이들에 대한 공격적 의식. 07 가을 하자작업장학교 입학, 길찾기 과정 수료 자서전 쓰기 걸어서 바다까지 자치회의, 하자알자, 영화보기, 지식채널e 등 길찾기 수료식 “환승” 08 봄 주니어 1학기 글쓰기 팀 On going 프로젝트, 웹진 “하자로” 편집국 개인 글쓰기 작업, 비평(동무) 길드하자 청소년을 위한 인문학, 니하우 베이징! 자판기 운영 수료 에세이, “첫 학기를 알차게, 학습을 열어보자” 08 가을 주니어 2학기 STUDIO 202 명함제작 프로젝트 주말영상학교, 1scene 1cut, 3cut, 5cut, 단편영화 로마인 이야기 08 프리서밋, 데일리 스케치 save my city <동서남북> 프로젝트 학기 수료 에세이 “제목” 09 봄 주니어 3학기 시민/문화 팀 인문학5 애전별친 기후변화 시대의 living literacy 이대 인문학 “세계를 뒤흔든 8인의 독일인” 이미지 탐구생활 시즌2 페미니즘 공부모임 -휴학- <얘. 너. 나> 09/10 주니어 3학기 영상팀 시민문화 워크숍 “세계를 구한 시인들” studio workshop 부담만찬 Art in village 예술마을 고한·사북 프로젝트 tck tck tck 시리즈물 제작 페미니즘 공부모임2 개인 연구주제 ‘여성주의로 다시 본 평등’ 홍콩 MaD 컨퍼런스 Maesot/Maela 현장학습
학교는 나에게 플랫폼이다. (미정)
나는 언제나 솔직한 내 생각을 이야기하고 싶다. 예전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런데 하자에 들어오기 전에 나는 많은 것을 숨기고 있었다. 대중 혹은 국민 혹은 시민들 속 한 명의 구성원으로서 내가 어떤 역할을 가지고 있을 것인지 고민하는 것이 두려워서, 다른 사람들과 같은 모습으로 사는 것이 내 위치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하자에 들어오기 전 나의 바람은 ‘평범한 사람’이었다. 꽤 잘했던 수학을 전공으로 수학 선생님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가르치는 것보다 말하는 것에 더 끌렸고, 묻혀 사는 것보다 앞에 서는 것이 더 좋았던 본능 혹은 열망에, 나는 하자에 들어와 “내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말을 많이 했다.
- 작가가 아니라도 글을 쓸 수 있다. 길찾기 때 처음으로 글을 써보았다. 그 전에 일기도 써봤고, 인터넷에서 댓글 달기도 해봤지만 그 때 나에게 글은 작가라는 타이틀을 단 사람들이 전문적으로 뭔가를 쓴 것이 글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담임이었던 귀가 리뷰를 써오라고 했을 때는 꽤 막막했다. 다섯 문장으로 시작한 리뷰쓰기는 한 문장, 한 문장씩 늘다가 한 장을 채우기도 했다. 처음에는 감정의 상태를 많이 썼는데 나중에는 내 입장을 쓰려는 노력을 했다. 그 때 내가 배운 것은 리뷰를 쓸 때 ‘재미있다’보다 왜 재미있었는지를 쓰는 것이었다. 자서전을 쓸 때는 더 막막했다. 리뷰는 영화나 기사 혹은 인문학을 듣고 그에 대한 내 생각을 쓰면 되었지만, 17년 인생을 글로 풀어내라고 하면 내 인생에서 무엇을 쓸 수 있을 것인지 막막했다. 내 삶을 읽어내는 과정이 중요하다던 자서전에서 나는 내가 가장 최근에 겪었던 문제 상황과, 내 머릿속에서 나를 괴롭혀온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썼다. 쓰면서 혼자 울기도 했고, 자서전을 봐주던 판돌 모모가 내게 “이것 말고 다른 얘기를 써 보는 게 어때?”라고 제안했지만 나는 굳이 쓰기 싫고 다시 보기도 싫은, 학교에서 겪은 싸움을 썼다. 나는 일반학교에 다닐 때의 내 모습을 다시 기억하고 싶지 않다. 하자에 들어와 ‘주체가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보통 사람’으로 ‘평범하게’ 살고 싶다고 했던 내 모습이 부끄럽기도 했다. 내가 보통 사람이 되고 싶었던 이유는 그렇게 사는 게 가장 편하고 안전한 삶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학교는 학생들에게 계속 안정된 삶을 살 수 있는 사람이 되라고 공부를 시켰고, 반 친구들도 도전적이기보다는 자신의 바운더리 안에서 해결할 수 있는 일만 해결했다. 다른 사람의 문제는 그 사람의 문제일 뿐이었기 때문에, 같이 해결하기 보다는 그 사람에게 ‘힘내라’ 혹은 ‘이해한다’는 말밖에 하지 않았다. 나도 그 아이들 속에서 힘내라는 겉치레식 인사만 할 뿐, 내가 할 수 없다는 것에 허탈감을 느끼진 않았다. 오히려 타인의 고통을 통해 내 삶에서 다행스러움을 느끼기도 했다. 나는 학교에서 가면을 쓰고 살았다. 학교에서 내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두 가지였는데, 공부와 급우 관계였다. 그 두 가지만 신경 쓰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벅찼다. 중학교 2학년 때까지는 공부에는 신경도 쓰지 않았고, 사실 공부를 하겠다고 마음먹고 성적을 올릴 때도 공부가 나를 힘들게 하지는 않았다. 부모님은 내가 성적이 60점이건 90점이건 모두 잘했다고 했고, 최선을 다했으면 된 거라고 하셨다. 하지만 나는 공부 때문에 최선을 다해본 적은 없는 것 같다. 내가 최선을 다한 것은 친구와의 관계였다. 그룹에서 같이 지내는 아이 중 잠재적으로 그룹의 구성원을 들었다 놨다 하는 리더가 있었다. 그 아이의 마음에 들지 않는 행동을 하면 그 사람은 그룹에서 배제되었다. 그게 바로 왕따다. 왕따라는 말이 주는 찌질함과 잉여스러움에 아무도 왕따를 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나는 되도록 내 성격을 많이 숨겼다. 원래 솔직하게 하고 싶은 말을 다 해야 직성이 풀리는데, 하고 싶은 말은 하지 않고 리더에게 필요한 말을 많이 했다. 그룹 내 인간관계 안에 있는 위계는 나에게 정말 거대했다. 아이들과 대화하게 되는 시간은 쉬는 시간과 방과 후 시간, 따로 만났을 때의 시간들인데, 수업 시간에는 거의 장난을 많이 쳤지 얘기를 주고받는 경우는 드물었다. 누가 누구랑 싸우면 필담으로 얘기하며 상황을 판단하고 둘 중 한 명을 배제하는 일을 많이 했다. 대부분 쉬는 시간에 모여도 연예인 얘기나 선생님 욕, 외모에 대한 상담, 뛰어 다니는 것, 아니면 그룹 내에 마음에 들지 않는 아이를 욕하는 것이었다. 사람에 대한 평가와 판단이 그렇게 제대로 이루어지는 경험은 학교에서 가장 많이 했을 것이다. 다른 사람의 행동 하나하나에 대한 관심이 극에 치닫는 때였던 것 같다. 그런데 나는 그런 대화들이 한 편으로는 재미있었지만, 두렵기도 했다. 다음 타겟이 내가 되는 것이 너무 무서웠다. 나는 마음에 있는 솔직한 이야기도 하고 싶었고, 싸워도 금방 풀릴 수 있는 친구가 필요했다. 그런 친구를 찾다가 결국 크게 싸우는 일이 생기면서 학교를 나왔다. 하지만 그 때의 습관인지 하자에 와서도 나는 얼마간 가면 쓰기를 했다. 그 가면을 벗게 된 계기가 글을 쓸 때였다. 생전 처음 접하는 주제들 속에서 나는 내가 겪은 경험이나 보았던 것이 좁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때부터 시야를 넓히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좀 더 넓은 시야로 많은 것을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많은 것을 볼수록 내가 다른 사람과 할 수 있는 얘기가 뒷담화에 제한되지 않을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자서전과 리뷰들을 쓰며 나는 더 이상 글쓰기가 전문적인 작가들만 쓰는 게 아닌, 모든 사람들이 솔직한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경험해보지 못한 대화의 주제를 얘기하면서 대화의 상대가 5~10명이 아닐 수도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특정 인물에 대한 이야기가 아닌, 사회적 이슈에 대한 이야기는 많은 사람들이 알 수 있는 통로가 많기 때문이다.
- 혼자만의 불평을 넘어, 문제의식을 갖는다. 그렇게 길찾기를 수료하며 나는 호감을 갖게 된 글쓰기 팀에 들어갔다. 그 때 글쓰기 팀은 내가 해오던 방식과 전혀 다른 글쓰기, 웹진 ‘하자로’의 편집국을 맡아 기사와 칼럼 쓰기 등을 했다. 객관적 사실에 입각한 내용의 글을 써야 했는데, 기존의 글쓰기 팀은 다 수료해서 어려움이 많았다. 게다가 팀원이 3명밖에 되지 않아 더 힘들었는데 한 명이 다른 길을 찾기 위해 하자를 나가게 되어 두 명이서 편집국을 운영할 수밖에 없었다. 담임 모모가 정말 많은 도움을 주셨다. 웹진을 하면서 글쓰기 훈련을 받기도 했지만, 그 다음 학기를 이어갈 중요한 경험을 하기도 했다. 기사를 쓸 때 제 3자의 입장에서 사건 혹은 행사를 보고 사실을 적었지만, 마지막에는 꼭 내 생각을 덧붙였다. 기사들이 하나하나 무거운 주제를 갖고 있어 사실을 쓰는 것만으로도 사전 지식을 채우는 것에 벅차긴 했지만, 적어도 내 입장에서 쓸 수 있는 말을 썼다는 것에 뿌듯함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면서 나는 ‘story teller(이야기 전달자)’가 되겠다는 말을 꺼냈다. 누구의 이야기를 어떤 사람에게 전할 것인지는 구체적이지 않았지만, 적어도 내가 어떤 이야기를 통해 내 생각도 함께 밝힐 수 있는 사람이고 싶었다. 그 때부터 나는 ‘어떤 이야기를 전달하고 싶냐’는 질문과 ‘왜 이야기를 전달하고 싶은가’라는 질문을 받았다. 하지만 그 때 나는 당장 대답할 수 없었다. 그 때까지 기사를 쓰며 내가 가장 관심 갖고 그 내용에 집중할 수 있던 주제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 생각을 전달하는 게 중요한데 그것이 왜 중요한지는 잘 몰랐다. 그 다음 학기까지 그 질문을 계속 가져갔지만, 나는 오히려 웹진을 더 하고 싶어서 디자인 스튜디오 202에 들어가서도 웹진을 계속 기획했다. 글쓰기 팀이라고 혼자 부르고 다닌 그 팀의 구성원은 나뿐이었지만, 나는 청탁을 하면서 웹진을 하면 수월하게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혼자서 잡지 하나를 기획하는 건 무리가 있었고, 결국 나는 디자인을 거부하고 주말영상학교를 신청했다. 그림 그리기는 나에게 취미였고, 명함을 만들면서도 계속 거부감이 들었다. 웹진을 하지 못한 것에 대한 실망감이 어린 행동을 하게 했던 것 같다. 영상학교를 하며 나는 이야기를 만드는 즐거움과 영화를 보는 즐거움을 알게 되었다. 원이 보여준 여성 감독들의 영화를 보며 졸기도 하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을 갖기도 했다. 실제로 영화를 찍을 때는 시나리오 쓰기에 가장 큰 매력을 느꼈다. 집에서 뒹구는 내 모습을 히키코모리처럼 만들기도 했고, 평소에 해보고 싶었던 것이나 상상했던 것을 영상으로 만드는 과정을 통해 정말 계속 즐거웠다. 마지막 이수 과정에서 단편 영화를 찍게 되었는데, 내가 가져간 시나리오는 푸콘 가족 같은 느낌의 가족에 대한 이야기와, 자서전에 쓴 내용을 수정한 학교 얘기였다. 그 때까지 쓴 시나리오들이 대부분 내가 경험한 것을 각색한 거라, 영화도 그렇게 찍을 생각이었다. 영화를 찍어본 다른 죽돌들이 내 경험을 써보라고 제안했기 때문이다. 내 경험을 이야기함으로서 한 사람의 주체가 되어보는 것이 그 때는 무척 중요했고, 길찾기 때부터 계속 듣고, 경험해본 것이었다. 그래서 고등학교 때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는데, 쓰다 보니 이것저것 살이 붙여지고 사실이 각색되어 다른 이야기가 만들어졌다. 그래서 완성된 것이 왕따 민지와 노는 그룹에서 제외된 아름이 친해져 둘 다 다시 노는 그룹으로 들어가나, 나중에는 민지가 이용당하고 성경험까지 하게 된다는 이야기이다. 내가 겪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가 만들어지면서 나는 두 캐릭터 모두에 감정을 많이 이입했다. 어떤 때는 민지가 되고 어떤 때는 아름이 되다 보니 두 아이의 상황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었다. 그 때 나는 내 개인적 경험과 시나리오의 내용이 한 사람의 개인적인 경험으로만 끝나지 않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밤비도 아름이도 민지도 한국에 단 한 명만 있지 않을 것이고, 그 아이들이 겪는 상황이 단순히 절대 악인 한 명의 인물에게서 비롯된 것도 아닐 거라는 생각을 했다. 그 때 나는 처음으로 내가 학교에서 싸운 아이들을 절대적으로 미워할 수 없겠다는 생각을 했다. 실제로 영화를 찍어 편집하는 과정에서 나는 민지와 아름이가 선과 악으로 대조되고 책임감 없이 끝나버린다는 코멘트를 들었다. 민지가 임신 테스트기를 사용한 뒤 울고 끝나는데, 그 뒤에 다른 캐릭터들에게 원하는 것이나 민지에게 원하는, 감독의 생각이 없던 것이다. 나는 논픽션에서 픽션을 뽑았지만 다시 논픽션으로만 끝나는 영화를 만든 것이다. 내가 영화에 조금은 개입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나는 학교 안에 팽배한 위계질서가 결국 민지나 아름이라는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는 말을 자막과 내레이션으로 넣었다. 세이랜과 유리의 코멘트와 시나리오 쓰기를 통해, 나는 내가 겪은 상황들에서 내가 어떤 불평을 했다면, 그것이 나만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의 문제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그것을 문제의식이라고 생각했고, 앞으로도 계속 내가 갖고 있는 문제의식들을 나타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내 생각을 말하고 싶은 욕심과 글쓰기나 영상 작업에 흥미가 있다는 이유로, 나는 매체 작업자라는 정체성에 한 발 다가섰다.
- 휴학과 <얘. 너. 나>. 문제의식으로만 되지 않는 게 있다. 그리고 나는 19살이 되었고, 주니어 3학기가 되었다. 학기 시작 전 방학 동안 나는 필통에서 주최한 작당 MT에 가게 되었다. 탈학교, 대안학교, 일반학교 청소년 등 다양한 10대들이 모여 말 그대로 작당해보는 MT였다. 그 때 나는 한창 하자에서의 경험을 다른 10대들도 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자로 들어오면 많은 10대들이 주체가 되는 경험을 통해 자신을 다시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될 거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나는 하자 죽돌 같은 10대가 많았으면 했다. 그런데 작당에 가서 보니 정말 하자뿐만이 아닌, 일반학교 탈학교 다른 대안학교 청소년들도 제각각 다양한 생각과 입장들을 갖고 있었다. 나는 그곳의 프로그램을 통해 애니고를 졸업하고 대학에 들어간 이삭과 같은 학교를 졸업하고 재수를 준비 중인 금자를 만났다. 셋이서 짧은 시간동안 한 페이지의 기획서를 작성해야 했는데, 나는 영화를 찍고 난 뒤 내가 갖게 된 문제의식, 10대 문제에 대해 얘기하고 그것을 프로그램으로 기획할 수 있을지 의논했다. 그렇게 나온 것이 문제아들의 자서전쓰기 프로젝트 <얘. 너. 나>이다. 나중에 그 기획서를 본 운짱의 제안으로 그 때의 멤버가 모여 <얘. 너. 나>를 시작하게 되었고, 그렇게 다시 하자로 돌아와 나는 ‘시민/문화’ 팀이 되었다. 왜 영상팀이 되지 않았냐는 질문을 받았는데, 바로 영화를 찍는 것보다 실제로 10대 문제를 제대로 읽고 싶었다. 그래서 <얘. 너. 나>의 참가자 아이들을 만나는 것이 더 필요하다는 판단을 했다. 하지만 영화를 찍는 것도 병행하고 싶어서 영화를 찍는 게 가능하다면 하고 싶다고 학습계약서에 쓰기도 했다. 수료를 계획했던 학기라, 마음이 급한 것도 있었다. 19살이 되었고, 수능을 보고 대학에 갈 나이가 되어서 마음이 더 급한 것도 있었다. 하자센터는 2009년을 기점으로 창의센터로의 준비를 하고 있었고, 그래서 지하부터 3층까지 팀 방이 골고루 분포되었던 작업장학교는 3층으로 모이게 되었다. 그러면서 서로 한 층에서 공유할 수 있는 프로젝트도 생겼고, 지켜야 할 약속이나 배려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나는 처음에는 그 분위기에 동의했지만, 학기 중간에 갈수록 낯선 불편함을 많이 느꼈다. 그 전에는 글로벌학교가 있는지도 모를 정도로 서로의 교류가 적어 시너지 프로젝트가 필요했다면, 이번학기는 서로의 교류가 굉장히 많았다. 낯선 분위기에 당황스러웠고, 학기마다 매 번 바뀌는 팀 구성원에 다시 한 번 민감해졌다. 같은 팀이었던 렌죠, 반야, 산과 어떤 이야기를 나눠야 하는지도 모르겠고 다시 혼자서 웹진을 할 때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기후변화 시대의 ‘living literacy’ 프로젝트를 할 때는 소그룹을 짜서 디스커션을 하기도 했는데, 그 때는 환경 얘기를 하는 것에 관심이 가지 않았다. 도시에서 계속 살아왔고, 기후변화가 일반학교에서 도덕이나 과학을 배우는 것과 비슷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여러 가지로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하는 것이 불편하다고 느꼈다. 그러다가 <얘. 너. 나> 프로그램 날짜가 잡히며 다른 프로젝트와 시간이 겹쳐 그만 두겠다는 이야기를 꺼냈는데, 유리에게 “어째서 너는 너만 생각하냐, 다른 사람에게 예의를 지킬 수는 없느냐”는 말을 듣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리고 바로 하자를 뛰쳐나갔다. 휴학이건 학적정리건 그 학기는 할 수 없었다. 나는 내가 다른 죽돌들을 생각하지 않는다는 걸 전혀 모르고 있었다. 기본적으로 하자에서 배우는 것만 잘 하면 된다고 생각했지만 그렇지 않았다. 프로젝트만으로 배울 수 없는 것이 있었고, 나는 혼자 작업하는 사람이 아니라 팀이 있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런데 앞으로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막막했고, 기후변화 프로젝트도 계기 없이 참가하기 힘들다고 판단했다. 그 때부터 말도 없이 학교에 나가지 않았는데, 지금 생각하면 참 철없고 부끄러운 행동이었다. 하지만 <얘. 너. 나>는 하자에서 하는 게 아니기도 했고, 무슨 일이 있어도 붙잡고 하고 싶은 프로젝트였다. 그렇게 그 시기는 <얘. 너. 나> 기획과 프로그램 멘토링으로 채웠다. 하지만 내가 하자를 휴학한 것은 다른 죽돌을 배려하지 않았다는 자책감에서만 비롯된 건 아니다. 나는 그 때 자취와 함께 주말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는데, 돈을 벌기 시작한 것은 용돈을 모으기 위해서였다. 하자에서 저녁 혹은 밤 늦게까지 있는 날이면 저녁을 사먹어야 했고, 그럴 때마다 나는 빌려서 사먹었다. 빌리면 갚기 위해서 집에 말해야 했는데, 그런 원조를 받지 못할 사정이 있었다. 밥 한 끼 사먹을 돈은 받을 수 있지만, 자취에 적은 돈이 드는 것도 아니었고, 장사 하시던 할머니는 계속 건강이 악화되고 있고, 불경기였다. 그리고 부모님께서 버시는 건 필요한 곳이 많았다. 나는 주말에 남는 시간동안 아르바이트를 하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저녁 외에도 필요한 것이 많아졌고, 내가 감당할 수 없는 것도 많아졌다. 가족과의 대화가 필요하다고 말했지만 나는 이미 내 상황을 설명했고, 우리는 서로의 상황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서로의 생각은 잘 알지 못했다. ‘어쩔 수 없다’는 말이 세상에서 제일 싫었던 때이다. 다행히 <얘. 너. 나>는 지원금으로 멘토 겸 기획팀에게 월급을 주어 상황이 조금은 호전되었다. 그래도 나 스스로 버는 돈으로는 식비를 해결하는 게 전부였다. 같이 살던 나르샤가 방을 빼면서 나도 집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얘. 너. 나>는 내가 문제의식을 갖고 시작한 첫 프로젝트이면서, 멘토나 기획자가 되어본 첫 경험이기도 했다. 프로그램은 일주일에 한 번씩 글쓰기와 글쓰기를 돕기 위한 프로그램이 번갈아가며 진행되었다. 처음에는 프로그램 전 사전 인터뷰를 위해 몇 아이들을 만나는 것으로 시작했다. 그 때 나는 무엇을 물어봐야 할지, 어떤 말을 해야 할지를 몰라 답답했다. <얘. 너. 나> 기획을 설명하고 코멘트를 부탁했더니 대부분 괜찮은 반응을 보였다. 긍정적인 마인드로 세 명의 기획팀을 더 받아 프로젝트가 시작했다. 시작은 마포구를 중심으로 성사중학교 2학년과 함께 했다. 연세대의 사이 프로젝트의 특화 프로그램으로 <얘. 너. 나>가 들어가면서 그곳의 몇 가지 요구(제안?)가 있었기 때문이다. 성사중학교 아이들은 처음에 기획팀을 미워한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우리를 많이 괴롭혔다. 하지만 나중에는 말 속에 정을 가득 담아서 우리를 감동시키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성사중학교에서 기획팀이 멘토로서의 자질이 부족하다고 판단했다. 정작 멘토링을 할 때 아이들에게 바라는 것이 있어야 하고, 대화 방식이나 관계를 맺는 것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는데 그렇지 못했다. 나는 멘토링을 하면서도 기획팀의 입장에서 아이들을 연구하는 사람처럼 행동하기도 했다. 멘토로의 준비가 덜 된 것이다. 하지만 팀 안에서 그런 이야기들이 잘 공유되지 않아 방법을 찾지 못하고 프로그램을 끝냈다. 그리고 성사중 프로그램을 하다가 중간에 다른 시설을 제안 받았다. 보호 관찰중인 아이들을 대상으로 마포 청소년 수련관에서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것이었다. 그 아이들은 중2부터 20살까지 연령대나 지역이 다양했고, 우리는 흔쾌히 받아들였다. 보호 관찰소 아이들은 성사중 아이들과 다르게 자퇴한 아이도 있었는데, 나이가 더 있다 보니 기획팀에게 마음의 벽을 두고 있었다. 나는 19살로 또래였지만 친해지는 것 외에 다른 것은 해보지 못했다. 성사중에서 나타난 멘토로서의 자질 부족이 다시 한 번 느껴졌다. 기획할 때는 모든 게 예상대로 될 거라 생각했는데, 보호 관찰소 아이들은 출석도 잘 하지 않았다. 남자 애들은 대부분 폭주를 뛰거나 동네에서 배달 알바를 했고, 여자 아이들은 학교를 다니거나 여의도로 갔다. 중간에 소년원에 들어간 아이도 몇 명 있었다. 당황스러운 일들이 잔뜩 일어난 상태로 프로그램이 끝났다. 나는 프로그램이 끝나고 <얘. 너. 나>가 실패했다고 생각했다. 목적이나 목표를 달성한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다큐를 만들기로 한 영상들은 아이들이 나오질 않아서 소스가 많이 부족했고, 성사중과 보호 관찰소 아이들의 자서전 내용도 기획팀이 책 안에 편집할 내용이 많이 필요했다. 그러면서 나는 내가 그 아이들에게 무엇을 바라고 있었는지, 어떤 대화를 하고 싶었는지 묻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멘토보다는 기획자로 남는 것이 나았을 거라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멘토링이라는 소통의 또 다른 방법을 통해, 매체 언어만이 아니라도 내가 가진 문제의식을 다른 방식으로 표현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 하자는 나에게 플랫폼이다. <얘. 너. 나>가 끝난 때에 맞춰 나는 다시 하자로 돌아오겠다고 결심했다. 어떤 방법으로건 영화를 찍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원 인터뷰에서 양상이 내게 들어오고 싶은 이유를 분명히 말해달라고 하셨다. 나는 너무 당황했다. 사실 돌이켜보면 하자를 나간 이유도, <얘. 너. 나>를 하게 된 이유도 모두 다음 영화를 찍기 위한 것이었지만, 나는 돌아오면서 영화에 표현하고 싶다고 한 내 입장을 분명히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자를 나가면서 내가 느낀 소외감과 낯선 하자 분위기에 나는 적응할 자신을 갖지도 못했다. 그래서 더 대답하기 힘들었다. 유리와 세이랜의 보호로 인터뷰가 끝났다. 이 학기에 내가 가장 주력했던 건 시민문화 워크숍 ‘세계를 구한 시인들’인데, 지금 사회에 필요한 일을 하고 있는 시인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자리였다. 그 때 나는 ‘나를 구하는 것이 세계를 구하는 것이다’라는 한 시인의 이야기를 통해 다시 한 번 문제의식에 부여했던 나의 의미를 넓힐 수 있었다. 내가 문제의식만 느끼는 것에서 멈추는 게 아니라 내 입장을 이야기하는 것, 특히 매체작업을 통해 이야기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나는 홍성태 시인의 88만원 세대가 아닌 다른 이름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우리 세대가 기여하는 세대이길 바란다고 에세이에 썼다. 탈학교하고 하자라는 대안학교에서 매체 작업을 하고 있는 내가, 그리고 다른 죽돌들이, 그리고 더 넓게는 이 시대의 청소년들이 자신의 입장을 말할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기여를 얘기했다. 기여는 봉사활동을 하는 거라는 고정적 이미지가 있었는데, 내가 사회에 입장을 이야기하는 것으로도 충분히 기여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 이후 하게 된 Maesot 현장학습은 Burma와 태국의 국경지역에 있는 난민들을 만날 수 있는 자리였다. 현장학습에 가기 전 사전조사를 하며 나는 Maesot 사람들이 굉장히 정치적이라는 이야기를 들었고, 그래서 그 사람들이 가진 정치적 입장이 무엇인지 궁금했다. 그리고 그에 앞서 내가 말한 ‘기여하는 세대’를 생각해, 그곳 사람들에게, 특히 앞으로 시대를 이끌어나갈 청소년들에게 자신의 세대를 어떻게 정의하는지 질문하고 싶었다. 실제로 갔을 때는 원래 갖고 있던 이미지와 다르게 내가 친해진 아이들은 정치적인 생각과 다른 생각을 많이 했다. 어떤 아이는 Burma의 국가 상황에 대해 질문하면 곧바로 민주주의를 대답하긴 했지만, 그건 자신의 입장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입장이고, 그 아이는 그것이 필요해서 민주주의를 원한다고 답하기도 했다. 반면에 Maela 캠프에 갔을 때는 정치적 이야기를 하는 아이가 대단히 많았다. Maesot에서는 CDC 학생들과 단체 방문을 하는 등 일정한 아이들과 계속 붙어있었으나 Maela에서는 LMTC의 학생들을 계속 마주쳤다. 영상팀으로 워크숍도 진행했는데, 나는 세대에 대한 질문보다 오히려 그 아이들이 하고 싶은 얘기를 다 할 수 있길 원했다. 함께 만든 영상은 민족과 국적을 따지지 않고 모든 사람들이 평화를 외치며 빙글빙글 도는 것이었다. Maesot과 Maela의 아이들과 평화에 대해 더 나눠볼 수 있으면 좋았을 거라는 아쉬움과 함께, 사람들이 평등하길 바라는 아이들의 마음에 동할 수 있어 기쁘기도 했다. Maela에서 나는 LMTC 학생들이 그곳에서 공부한 리더쉽과 전문 분야를 갖고 다시 고국 Burma로 돌아가 자신의 지식(knowledge)을 알리고 싶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Burma의 아이들에게 Maesot과 Maela는 하나의 플랫폼이 된다는 생각을 했다. Burma는 획일화된 군사 교육으로 인해 다른 교육을 받기 힘든 상황이라 Maesot이나 Maela 같은 곳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아이들이 계속해서 말했던, 한 명, 한 명이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에 동의했다. 그 아이들이 말한 지도자(leader)는 단순히 한 단체의 권력이 되는 것이 아니라, 시민문화 워크숍에서 말한 시인처럼 기여하는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나는 나에게 하자가 Maesot이나 Maela 같이, 하나의 플랫폼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일전에 겪어오던 문제 상황들을 문제의식으로 가져가고, 나 혼자서만 그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들, ‘세대’와 기여를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을 하자에서 학습했기 때문이다. 또한 국가적 상황이나 설정은 다르지만 많은 청소년들이 입시 제도를 거쳐 직업을 갖는 것 외에 다른 길을 생각하지 못하는 상황에 놓여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하자뿐만 아니라 다른 대안교육도 어떤 플랫폼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모든 플랫폼들이 각각 다른 방식으로 사회에 지속적인 기여를 하면 나는 MaD 컨퍼런스에서 말한 Make a Difference가 가능할 거라는 생각도 했다.
19살 가을에는 미처 답하지 못한, 하자에 다시 돌아와 8개월간의 과정을 계속 하게 된 이유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이제는 대답할 수 있다. 하자는 let's do it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그리고 나에게는 플랫폼으로 남게 된 공간이다. 내가 다른 곳으로 발돋움을 할 수 있게 도와주었고, 그 안에서 내가 누구로서 어떻게 살고 싶은지를 고민할 수 있게 도와주었다. 근거와 입장 없는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있게 지탱해주었다. 그리고 내가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맺을 때 가면을 벗고 당당하게 ‘동료 작업자’라고 생각할 수 있게 해주었다. 사실 아직도 갈 길이 멀다. 하자에서 내가 알게 된 것, 보게 된 것을 이 글 하나로만 정리하기는 힘들다. 나는 앞으로 다음 플랫폼을 향해 발을 딛을 것이다. 그리고 그 플랫폼으로 진입할 때 하자에서 배운 것들을 다 지우거나 잊지 않고, 지속할 것이다. 앞으로 나아갈 곳은 내게 또 다른 배움이 공간이 될 것이다. 공부하는 사람으로, 이야기하는 사람으로, 대화 상대가 될 수 있는 사람으로 살아가고 싶다. ![]()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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