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하는 법을 배우다


0. 도피하기. “교복”입은 탈학교 학생


김포공항 옆에 위치했던 우리학교는 하루에도 여러 번 비행기가 뜨는 모습을 볼 수 있었는데,  그렇게 비행기를 보면서 어디론가 떠나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건 그 무렵이었던 것 같다. 그냥 학교라는 곳이 매일 나와 씨름을 하는 곳이라면, 이곳만 벗어나면 달라질 거라고 생각했었다.  


나에게 있어 학교는 언제까지나 ‘대학 입학 후’ 만을 대답하는 자동응답기였다.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끊임없이 나오는 새로운 입시전략 속에서 상담을 원한다면 0번을 누르지만 아무도 네가 누구 인지, 어떤 경험을 가지고 있는지, ‘나’ 자체를 묻지 않았고, 지금까지 해온 성적으로 갈 수 있는 대학 1순위, 2순위, 3순위로 이야기를 마무리되곤 하는 그런 공간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매번 내가 하고 싶은 일에 대해서는 끊임없이 이야기 했지만 그것조차


“영화 만드는 거? 그게 지금 중요하다고 생각하니?

그거 대학가서 동아리 활동으로 충분히 할 수 있어.”, “딴 생각 그만해. 지금 중요한건 공부야”


라는 말로 오히려 학교는 나에게 ‘튀지 않는 것이 제일‘인 그렇지만 열심히 공부하는 로봇이 되기를 바랐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바로 1순위, 2순위, 3순위를 매겨 이야기 해주는 선생님도 참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다. 나의 “반항”이 선생님의 훈계로 바로 꺾여버리는 그 시절, 나는 소위 '모범생'이라고 불리는 사람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몸으로 경험하고 자신의 생각과 행동을 온몸으로 싫다. 라고 표현하는 소위 어른들이 말하는 ’문제아’들을 동경했는지도 모른다. 그때는 나는 이게 싫고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내가 지금까지 해온 것들이 있기 때문에 나는 또 그렇게 되기가 너무 어려웠었나보다.


나는 똑똑했다. 내가 방황하는 꼴을 보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다른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그 때 내가 '넘겨다본' 하자는 해보면 알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었고 정말로 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 곳이었다. 내가 하고자하는 일에 자유가 아른거리는 그곳! 신비의 세계! 그리고 나는 교복을 입은 채 어정쩡한 모습으로 그 앞에서 "이걸 넘어, 넘지 마? " 라는 고민을 하고 있는 학생이었다. 고민의 시간이 길어질 수 록 나는 힘이 들었고, 단순하게 학교자체 만을 부정하기 시작했다. 자퇴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그런 부분에서 어떻게 보면 나는 심각한 “문제아”였다. 결국 나는 “하자에 가서 영화를 찍겠다.” 고 결심했다.


고등학교에서 1년은 나에게 처음으로 어떻게 살고 싶은지에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시간이 있었기에 나는 학교라는 울타리를 넘겠다는 선택을 하게 된 것이었다. 지금 입장에선 그때의 고민들이 참 귀여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조금은 부담스럽기도 하다. 지금도 그 고민은 계속되고 있고, 나는 그 답을 찾아 이것저것을 해보는 중이니까,



1. 내가 선택한 길


학교를 벗어나 하자작업장학교에 입학했다. 이곳은 선생님을 판돌, 학생을 죽돌 이라고 부르는 이상한 공간이었다. 또한 내가 불려지고 싶은 이름으로 불러주는 고마운 공간이기도 했다. 마치 새 인생을 새롭게 출발하는 기분이랄까? 역시 나의 선택은 백번 옳았어! 속으로 외치면서 본격적인 죽돌 생활을 시작했다. 하. 지. 만. 하자작업장학교에서 첫 번째로 한 것은 영화 찍기가 아니라, 자전적 글쓰기와 인문학이다. 별로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과거를 글로써 풀어내는 과정에서 나를 되돌아보는 학습이라고 했던 자서전 쓰기는, 현재의 내가 이 자리에 있기 까지 어떤 상황이 있었는지를 되짚어보는 과정이었다. 억울하고 분통했던 기억을 써야 할 때는 울기도 많이 울었지만 그런 과정이 오히려 나를 좀 더 강하게 만들었다. 우울 할 때면 즐거웠던 기억을 꺼내볼 수도 있었다. 그러한 시간들이 모이고 합쳐져 지금의 내가 만들어 졌다는 것이 대견스럽기도 하고, 스스로 뿌듯한 기분이 들었다.


인문학 수업 혹은 프로젝트 <애, 전, 별, 친>은 너무나 쉽고 익숙하게 생각했던 4개의 테마를 가지고 책을 읽고 밑줄을 긋고 나누고 토론하는 과정은 어쩔 땐 명확했던 개념이 모호해지기도 하고 생각해 본적 없지만 새롭게 알게 된 일도 많았다. 자전적 글쓰기와는 다르게 아직 겪어보지 못한 일들, 하지만 내 주변과 앞으로 살아가면서 벌어지게 될 일들에 관해서 이야기해보았지만 매번 “잘 모르겠지만......”으로 시작하는 너무 조심스러운 시간이었다. 특히 “전”의 테마로 <멋진 한 세상>을 읽었을 때가 생각난다. 나는 ‘살자니 고생이오, 죽자니 청춘’이라는 책의 한 구절처럼 삶은 어떤 면을 보느냐에 따라 해석할 수 있는 것이 천차만별이었다. 인문학은 삶을 공부하는 것이었고 다양한 삶을 내가 함부로 예측할 수도 단정 지을 수도 없다는 것을 느꼈다.   하자에서 배우는 경험과 시간들이 너무나도 새롭고 재밌는 거여서 나는 이곳저곳 판이 생기는 곳 마다 참여하면서 시간을 보냈고 그토록 원했던 주니어과정에서 영상팀에 들어갔다.


나는 길찾기 때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 자신의 전공을 가지고 작업자라고 부르는 게 싫지만은 않았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를 영화감독이라고 말 할 수는 없지만 영상팀에 있는 시간들은 의욕과 의기를 충만하게 해주는 공간이었다. 좋아하는 영화에서부터 “이런 것을 해보는 것은 어떨까?” 하는 제안까지 같은 분야의 관심사를 가진 판돌과 동료작업자와 이야기는 즐거웠다.  하지만 영상팀에 들어왔더라도 영화는 그렇게 만만한 것은 아니었다. “무슨 영화를 찍고 싶니? 어떤 주제에 관심이 있니? “라는 질문에 제대로 대답을 하지 못했고, 그 질문을 곰곰이 생각해 보기 시작했었다. 온 관심은 어떤 영화를 찍을까? 이었는데,  사실 영화는 생각만으로 찍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처음으로 내 시나리오를 써보았지만, 생각보다 쉬이 써지지 않는 글에 나는 ”아이씨, 내 머리 속에서 벌써 영화는 상영중인데....... “ 라는 푸념을 늘어놓고 있었다. 그렇지만 생각을 글로 표현하는 것은 또 다른 재미가 있었다. 바로 남들에게 보여 줄 수 있다는 점이었다. 뭔가 흥분되고 나는 한 것 고조되었지만 실상은 ”고작 시나리오 한개? “라는 물음을 받았어야 했다. 그렇지만 나는 고작 시나리오 한개 쓸 수 있는 것도 감지덕지 했다. 이야기를 만드는 과정은 정말로 어려운 일이었다. 그렇지만 한번 해보니 해볼만 하다고 생각했고, 또 다른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했다. 이렇게 해본 경험은 또 다른 것들을 시도하게 만들었다.


나는 학기의 개인 연구 주제를 “빔 벤더스의 영화와 로드무비”로 잡고 나는 처음으로 내가 좋아하는 영화를 해석해보는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막연하게 좋은 인상으로 남아있던 영화를 다시보고 자료를 찾아보는 과정에서 이야기는 어디에서 왔고, 내가 보고 있는 또는 내가 구현하고 싶어 하는 이미지들에 대해서 생각 할 수 있었다. 나는 그가 표현하는 “길”이 좋았다. 주인공들이 걷고 있는 길의 여정은 단순히 여행자체를 위한 여행일 수 도 있고 아닐 수 도 있다. 확실한 것은 모두가 무언가를 찾는, 추구하는 물음을 가지고 있고 집을 떠나 길을 걷고 있다는 것 이었다. 나도 내가 선택 한 이 길에서 나의 여행을 보는 관객이 되기도 하고, 어떤 여행이었는지 지나온 길을 연구해보기도 하면서 어떻게 작업을 하면 좋을까 고민도 하면서 뚜벅 뚜벅 내가 선택한 길을 걷고 있었다.


2. 혼자가 아니라 함께 하는 법


길찾기 때부터 공동작업은 매번 나에게 ‘공동’이라는 의미를 묻게 했다. 내가 생각했던 공동 작업은 단순히 하나의 일을 여럿이 나눠서 한다는 것이었기 때문에 똑같이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팀원들이 작업에 소홀하면 기분이 나빴고, 작업이 내 생각대로 잘 풀리면 혹시 내가 너무 독단적으로 일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고민이 들었다. 그렇지만 공동작업은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 시기, 양상과 영등포 프로젝트의 편집회의를 해보는 경험을 하면서 원고를 하나하나 살펴보고 전체를 생각해서 틀린 문맥을 다듬기도 필요한 것은 적절하게 배치하기도 했던 경험이 있다. 편집을 해보면서 어떤 애는 이 부분을 잘하고 어떤 애는 이 부분이 약하다는 것을 알아 볼 수 있었다. 공동작업을 할 때 가장 필요한 것은 서로가 어떤 부분을 잘하는지 알아보는 것이었다. 때로는 나조차도 내가 어떤 부분을 잘 하는지 모르기 때문에 대화가 필요했고 서로를 진심으로 알아가는 것이 필요했다.


영상팀은 “TCK TCK TCK” 이라는 구호와 함께, 캠페인 영상을 만들었다. 많은 대화와 여러 가지 아이디어가 있었기 때문에 무언가를 하고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었다. 그렇지만 영상을 만들고 나서 가장 많이 들었던 코멘트 중 하나는 “너희”가 없다는 말이었다.  나는 캠페인의 내용과 목표가 너무 당연하다고 생각했고 그렇기 때문에 단순히 너는 이 부분을 할 수 있고 저 부분을 할 수 있으니까 우리 이렇게 하자라는 식으로 일을 해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공동 작업을 하는 데 “나”의 입장이 제대로 서있지 않으면 “우리”의 입장이 제대로 될 수 없는 거나 마찬가지인 것을 그 때는 미처 알지 못했다. 영상팀은 그 이후에도 여러 차례 시행착오를 겪고 있다. 나의 입장을 만들어 가는 과정이 쉽지 않은 만큼, 공동작업을 한다는 것은 서로의 몸과 마음을 함께 협력하는 방법을 탐구하는 과정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혼자서 생각하고 단정 짓는 것이 아니라 만나고 부딪혀 보는 경험을 통해서, 서로 어울리는 법을 배우는 것이었다.


3. 세상과 만날 준비


나를 알고 내 주변을 살피는 작업장학교에서의 학습은 더 나아가 시대를 읽고 해석하는 <기후변화 시대의 living literacy> 프로젝트로 이어졌다. 기후변화라는 글로벌 이슈에 대한 영상,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토론하는 과정에서 나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라는 질문에 맞부딪히게 되었다. 끔찍하게 벌어지는 상황들 속에 내가 누리고 있는 삶, 그곳에서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다시 한번 짚어보는 시간이었다. 알고 있는 것과 할 수 있는 것 사이의 괴리감에 빠져있었던 찰나, 나는 히옥스가 제안한 <유스토크> 기획팀에 지원했다. HKSC의 학생들과 함께하는 <유스토크>를 위해 나는 기획팀의 일원으로서 집중해서 이야기 하고 싶은 주제를 가지고 발제를 해야 했었다.


나는 다시 한번 내가 살고 있는 도시는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 또, 급변하는 도시 안에서 살고 있는 내가 추구하는 삶의 조건은 무엇이고, 점점 더 삭막해져 가는 도시 속에서 어떤 것에 가치를 두고 살아 갈 것인지를 진지하게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나에게도 어린 시절 추억의 장소를 잃어버린 기억이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 주변에 개발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해 살 곳을 잃은 사람의 슬픔을 더 공감할 수도 있었다. 나는 반신반의한 마음으로 재개발과 도시의 속도에 대한 개인적인 이야기로 발제를 했고 그것이 의외로 이야기가 잘되어서 나는 주로 서울, 홍콩 두 도시에서 살아가는 10대들의 이러한 개인의 경험의 맥락이 어떻게 연결이 되는지에 집중 해보는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타인과 주변의 문제로만 인식했던 상황들에 대해 이야기를 가지고 가기 시작했다. 또한 나는 기후변화라는 글로벌 이슈에 대해서 좌절감과 죄책감이 아니라 책임감을 갖고 내가 좀 더 창의적이고 생산적인 생각들을 하길 원했다.


< 유스토크>를 하면서, 도시가 어떤 역사와 문화를 가지고 있었는지 이유는 무엇이었는지 찾아가는 과정을 통해서, 조건이 사람을 만들기도 하고 사람이 상황을 만들어내고 그것들이 저마다의 사연들 속에서 함께 살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함께 있다는 것으로 서로에게 좋던 나쁘던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나는 보는 것에 대해서만 말하지 않았고, 그 것을 적극적으로 해석하고 있었다. 나의 주변에서 내가 보지 않으면 모르는 것이 있지만 본다고 해서 다 알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홍콩창의력학교와 하자작업장학교는 학생과 죽돌 들은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담은 선언문을 만들었고, 그것을 토대로 제1회 창의 서밋 때, 다시 만나 홍대와 청계광장에서 거리에서 "save my earth, save myself"라는 구호를 통해 우리의 목소리를 내본 경험으로 이어졌다. 처음에는 해보는데 에 의미를 두자라는 마음으로 시작했지만 하면 할수록 우리의 행동에 관심과 응원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냉담한 눈으로 쳐다보는 사람들도 있었다. 반응은 제각각이었지만 중요한 것은 내가 할 수 있는 일부터 실천하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알고 잇는 것을 질문을 하는 사람들에게 설명을 하고, 함께 움직임을 권하는 캠페인 영상을 만들기도 하면서 말이다. 내가 먼저 실천하고 그 다음에 남들에게 전하는 일이 내가 할 수 있는 일 중에서 가장 최선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내가 만약 이 프로젝트를 하지 않았더라면, 이후에 갔던 두 차례의 현장학습이 나에게 큰 의미로 다가 오지 못했을 것이다. 깊게 생각해보지 못했던 문제들은 사실 내가 살아가고 있는 곳에서 시시각각 마주해야했고, 생각하고 있어야했다. 내가 지금 누리고 있는 편리함도 어쩌면 누군가가 희생함으로서 만들어진 것이었을 테니까 말이다. 세계는 아주 크고 나는 아주 작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았다. 내가 있고 그 다음에 세계가 있었다. 나는 아주 작은 단위의 세계였고, 나는 다른 세계들과 연결이 되어 있었다. 이것은 탈학교 한 후 나와 세상을 마주하는 첫 번째 과정이기도 했다.



4. 사이에서 만남  


약 1년 반 동안, 나는 작업장학교에 속해 있는 학생으로서 내가 “탈” 해온 일반학교라는 공간에 대한 이야기를 해왔다. 내가 이전에 인식하고 있던 범위로 안과 밖, 나와 너, 내가 선택한 학교와 떠나온 학교로 설명하기에는 단어도 힘도 많이 부족하다고 느꼈다. 현실은 그 두 가지만 생각 할 수 없는 많은 상황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령, 메솟에서 버마시민운동을 하는 사람의 대부분은 불법이주민이나, 공식적으로 “국적 없는” 난민의 상태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몸담았던 사회라는 울타리를 벗어나면서도, 남겨진 사람들을 진심으로 안타까워했다. 다른 사람에게 믿을 수 없는 경험을 전달하는 통로의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기도 했다. 때로는 격렬하게 운동을 하고, 미래를 내다보며 청소년의 교육을 신경 쓰거나, 그 둘 사이에 소외된 사람들을 돌보아주며 의료지원 등을 해주는 단체들을 만날 수 있었다.  단체별로 다 같은 맥락상에 위치해있지만, 각자의 경험과 사실들을 국제사회에 호소하며 버마의 올바른 정치,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요구하고 있었다.


그에 반해, CDC (Children Development Center)학교의 학생들은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태국과 버마의 국경을 따라 흐르는 강을 보러 갔을 때, 한 친구는 자신은 버마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만 버마에 한번도 가본 적이 없다고 얘기했다. 부모님이 먼저 버마에서 태국으로 탈출했고, 그 이후에 자신은 메솟에서 태어나 줄 곧 메솟에서 자랐다고 얘기했었다. 나를 잊지 말아달라는 말에 절대 잊을 수 없다고 대답한 나는 해 줄 말을 찾지 못했다. 내 눈앞에 있는 친구의 실체는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었는데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을 시시각각 느끼고 있다는 사실은 나로서도 견디기 힘든 상황이었다.


버마의 8888항쟁 이후 지금까지 현재 메솟과 멜라 캠프 안에는 여러 가지 상황으로 “탈”한 사람들이지만 8888항쟁의 학생운동(지금은 학생이 아닌) 세대와 그 이후의 “국적 없음”의 상태에서 한 번도 버마에 속해 보지 않았던 (조금 특별한 경험을 가진) 세대가 할 수 있는 이야기는 참으로 다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NGO들이 버마민주화 운동을 지속하되, 운동의 한 갈래로 청소년들의 교육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버마의 민주화가 더 지체된다면 이와 같은 상황은 점점 많아지고 그에 따라 발생되는 문제들도 속속들이 생겨날 것이기 때문이다. 마웅저 선생님이나 많은 NGO들 모두가 출발한 지점도 서로가 떠나온 시간들도 다르다. 하나의 잣대를 가지고 이것과 저것을 구분하려고 하면 그 사이에 자꾸만 소외되는 것들이 늘어난다. 소외되는 것은 없어야 된다고 생각한다. 편을 가르기 보다는 서로를 존중해주고 그렇기 때문에 다시 모두가 함께 해야 하는 것을 생각해봐야 할 필요가 있다. 


5. 서로의 다리가 되어


저마다의 “탈”의 경험들이 모인 일시적 자율공간이라고 불리는 작업장학교는 어떨까?

작업장학교야 말로 정말로 다양하다. 첫 번째로 <고래 이야기>를 만들었던 죽돌 들과 그 다음과 다음에서 지금 시즌1을 마무리하는 죽돌 들까지 매번 다르지만 자신들을 스스로 정의하고 이야기를 만들었거나 만들어 가고 있기 때문이다. 한 공간 안에서 같은 시간을 보내는 죽돌 들 가운데서도 출발한 지점도, 서로의 경계지점도 다르다는 것을 매 시간 나는 느끼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가끔 나는 어른들이 10대와 20대를 warm한 세대 또는 88만원 세대라고 불리는 것에 대해 이야기 하고 싶다. 어느 순간부터 “우리”라는 연결성을 갖고 하나로 불러지는데 나는 도대체 그곳에 낄 수 도 끼고 싶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경험한 우리라는 폭은 공항고등학교학생들일 수 도 있고, 작업장학교의  죽돌, 크게는 메솟과 멜라에 있는 친구들, 홍콩창의력학교의 학생일 수 가 있었다. 그렇게 “우리”는 이미 너무 다양해서 어떤 결을 읽느냐에 따라 이야기 할 수 있는 부분은 다를 것이다. 나만 봤을 때도 작업장학교에서 너무 다른 경험으로 모여 있었기 때문에 하나로 아우르는 단어나 표현을 찾을 수 없어서 애를 먹었던 경험이 있었다. “일반학교” “대안학교” “우리” “탈” “사회” “시민” “정치”라는 단어들이 갖고 있는 의미로 나와 우리를 놓고 설명하거나 지금을 표현하기에는 부족하거나 과장되어버린다. 그래서 나는 세대를 아우를 수 있는 자신들의 이름 짓기에 골몰하기 전에, 서로의 이름들을 알아주는 과정이 필요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전에 나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지만, 어느새 나는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그래도 우리가 함께 모여서 할 수 있는 것이 뭘까?”라고 얘기하고 고민한다. 다양하고 이질적인 “우리” 세대들에게 꼭 필요한 것은 좋은 만남의 장소가 아닐까 라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그게 온라인이던 오프라인이던 모여서 이야기하고 같이 해 볼 수 있는 움직임을 제안하면서 즐겁게 놀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그 공간에는 노래도 있고 춤도 있고 사람도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그동안 나에게 작업장학교는 내가 하고자하는 일에 자유가 아른거리는 그곳! 신비의 세계! 는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이 무엇인지 내게 찬찬히 설명해 보라며 질문을 던진 곳이었다. 나는 이곳에서 처음으로 함께 사는 법을 배웠다. 서로의 몸과 마음을 함께 협력하는 방법을 혼자서 생각하고 단정 짓는 것이 아니라 만나고 부딪혀 보는 경험을 통해서, 서로 어울리는 법을 익혀나갔다. 영화는 혼자서 찍는 줄만 알았던 내가 나를 만나고 여러 결의 사람들을 만나면서 세상과 함께 마주하는 법을 배운 것이다. 앞으로 나는 카메라를 들고 기후변화, 평화, 대안교육이라는 이슈와 길과 영화라는 키워드를 가진 네트워킹을 하는 사람이 될 것이다. 내가 선택한 길에서 현실과 마주하는 경험들을 통해 또 다시 길을 떠날 수 있는 자기만의 방향을 잡으면서 학습했다. 그리고 하자작업장학교는 정처 없이 떠돌 뻔한 나의 여정에 베이스캠프가 될 것이다.


0. 번외 길 위에서


나는 분명히 첫 번째 울타리를 넘자마자, 나는 새로운 울타리 안으로 들어왔다. 이곳에서 나는 또 어떻게 살아야 될까? 하고 열렬히 고민했으며, 지금에서 내가 살고 싶은 삶을 정의 했다. 그리고는 예전처럼 울타리를 부정하지만은 않는다. 세상에는 내가 경험하게 될, 수많은 울타리들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으니까 말이다. 또한 벗어나기 싫은 또 다른 울타리가 생겼으니 말이다. 울타리 이야기를 해서 미안하지만 원래의 나의 테마는 길이다. Road. 누군가가 “네가 말하는 길은 어떤 것이니?” 라고 묻는다. 그것이 의미를 묻는 것이라면, 아직은 잘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내가 있었기 때문에 길이 있었고, 길이 있었기 때문에 내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걷고 있는 길은 뻥 뚫린 고속도로처럼 그렇게 황량하지만은 않은 것 같다. 조금은 시끌벅적한 시골장터 같은 것이 내가 걷고 있는 곳이다. 내 길 위에는 다양한 삶이 있고 이야기가 있고 또 나는 다양한 울타리를 거칠 것이며, 넘어야 할 다리들을 만날 것이다. 누구보다 그것들은 잘 알고 있는 “나”이기에 지금 여기에서 나의 자취를 남긴다. 여기서 만난 사람들도 같이 살고 있다는 것도 이제 다시 길을 가면서 만나고 알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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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en we meet a desert, make it a garde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