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니어 수료 에세이

<노래 부르는 법을 배우기 시작하다.>

조한이 했다는 말인, “노래가 돌아왔다.” 제목 뭐로 하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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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1 때였다. 정말, 아무 이유 없이 불현 듯이 어느 날 '기타가 배우고 싶다'라는 생각이 들었고, 나는 기타를 구해서 독학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냥 흥미가 있어서 좋아하는 음악들을 연주하는 정도면 좋겠다고 생각을 했지만 점차 나의 음악에 대한 관심과 열정은 늘어가서 중학교 2학년이 되었을 무렵, 나는 장래희망을 프로뮤지션으로 결정했다. 동시에 그 무렵 나는 상하 수직적인 교사와 학생의 폭력적인 관계에, 별로 미래에 대해서 꿈도 없고 의지도 없어서 아무것도 아닌 관계 자체에만 집착해서 쉽게 친구가 되고 쉽게 따돌리는 관계들에 지쳐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을 속여 가면서까지 잘 지내지 않으면 외면당할 것을 노심초사해야 해야 했고 이제 그것들에 더 이상 회의적일 수가 없게 된 상태였다.

나는 억압적인 딱딱한 학교에서의 생활에 더 이상은 적응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결국 대안학교에 대해 찾아보다가 '하고 싶은 일하면서 먹고 살 거라는' 하자 작업장 학교를 알게 되었다. 고민해본 끝에 마음에 든 그 학교에 가기로 결정했고 내 생각을 학교 아이들과 교사들에게 이야기했다. 그랬더니 거의 모든 사람들에게 ‘정신 차려라, 그냥 충동적인거야.’, ‘그래도 고등학교는 가야지.’, '대학가서 해라', '학생이 공부해야지 무슨 멍청한 소리냐.'하며 거의 매일 설교를 들어야만 했다. 왜 하고 싶은 일이 있는데 대학을 위해 미루어야하는 건지, 지금 교과서가 가르치는 지식들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의 이유는 나에게 납득되기 어려웠다. 답은 ‘일단’ 일반학교에 다녀야지, 대학에 가야지 올바른 학생이기 때문이란다. 정말 진절머리가 났다. 학교에 있는 애들도 시시하고 멍청한 말만 한다고 생각하는 둥, 진지한 소리는 해봤자 소용없다고 생각했다. 결국 중학교 졸업식과 길찾기 예비학교의 날짜가 겹치는 우연이 일어났을 때, 난 졸업식에 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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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장 학교에 일단 들어오기만 하면, 전부 나랑 착착 맞는 아웃사이더들이 모여있겠고, 음악도 할 수 있겠다고, 내가 했던 모든 고민들은 접고 생활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역시 막연한 기대들은 시작부터 삐걱거리기 마련이었다. 길찾기 예비학교 둘째 날에는 4명씩 모여서 서로의 경험들을 인터뷰하고 하나의 스토리를 만드는 ‘인상과 풍경’이라는 시간이 있었는데, 각자의 이야기가 전혀 모이질 않자, 답답한 나머지 내가 나서서 거의 억지로 이야기를 뽑아내고 구성해버리는 식으로 마무리 짓고 말았다. 발표는 다음 날이어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어머니와 통화했는데 나는 그저 다른 애들이 실망스러웠다는 말 밖에 하질 못했다. 결국 다음 날 발표는 별로 좋은 호응을 얻어내질 못했고 열심히 했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이후 자서전쓰기나 인문학, 드로잉 프로젝트 등을 제외한 팀으로서 진행하는 여러 프로젝트들이 있었다. 그 때마다 나는 그저 최대한 내 할당량을 많이 챙겨서 열심히 하는 게 팀 작업으로서 잘해내는 거라고 믿었다. 일반 학교 다닐 때처럼 무기력하게 지내는 것이 싫어서 최대한 많은 것들을 해보려고 했기 때문이었고 있는 대로 여러 가지를 한꺼번에 하려다보니 효율성도 떨어지고, 일에 치여서 길찾기가 끝나갈 때 즈음에는 허다하게 밤을 새게 되었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내가 하고 싶은 일이라는 음악, 기타 연습도 변변히 못한 것 같고, 뭐 하나 떡하니 이룬 것도 없는 것 같은 느낌마저 받았다. 결국 길찾기가 끝날 때 즈음에는 ‘솔직히 말해서 재미없었다.’라고 에세이에 써버리고 말았고, 생각해보니 작업장 학교에 오면서 접어두었던 고민들은 아무런 진전도 없어보였다.

그렇게 길찾기를 수료한 나는 주니어가 되어 공연팀에 들어가면 하고 싶은 음악, 팀으로서의 관계 등 모두 잘해보겠다고 다짐하며 주니어에 지원했다. 또 접고 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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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니어가 되어서 공연팀 ‘촌닭들’에 지원하고, 입단하게 되었던 8월 25일 여름, 불현 듯 우리는 우리의 ‘새 이름’을 짓고 다시 새 출발하게 되었다. Felicidade, 보리, Festeza, 딴따라-(개인적으로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했음), 닥쳐 등의 각축 끝에 결국 ‘Festeza’라는 이름이 발탁되었다. 의미는 촌닭들의 타이틀곡이었던 ‘슬픔’이란 의미의 ‘Tristeza’와 ‘축제’라는 의미의 ‘Festezo’가 합쳐진 신조어인데, ‘인재지변의 시대에 만연하는 슬픔에 공감하고 그들에게 위로를 건네며 슬픔을 뛰어넘는 축제의 노래를 하자’라는 Full-meaning이다. 내 기억에, 그런 ‘이야기가 있는 공연을 지향하는 팀’으로서 가장 처음 시작한 것은 ‘교가’만들기였던 것 같다. 작업장 학교의 마지막 8개월의 한 학기를 마치고나서 다음 시즌2를 준비하면서 앞으로의 이야기보다는 지난 시즌 1을 지내온 죽돌들에게 무엇이 기억이 되고 선물이 될 수 있을지 고민하다가 멜로디부터, 가사까지 Festeza가 만들기로 했었던 것이다. 각자 가사를 써오기로 해서 모여 미리 만들어놓은 코드와 멜로디에 맞춰보는 식으로 다 같이 모여 노래를 짓게 됐는데, 나는 영 내키지가 않았다. 보기에, 가사도, 멜로디도 내가 생각한 ‘멋진 음악’과는 약간 거리가 있는, 노래도 CCM의 느낌이 나는데다가 가사도 유치하게만 느껴져서 전혀 진지하게 임하지 않았다. 나는 기타 반주를 맡았으니 베이스를 치기로 한 무브와 구석에서 연주만 맞추면 그게 그냥 우리 역할 다 한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런 ‘될 대로 되라, 난 뭐 상관없다.’식의 마인드는 전혀 팀에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것이었다.

충분히 그 날 이후 반성했다고 생각했지만, 나 하나 뿐만의 문제가 아닌 ‘공연팀’으로서 결여되는 논의와 이야기의 문제는 계속 나타났다. 곡을 정할 때도, 브레이크를 맞추거나 악기 파트에 대해서도 그저 다른 사람이 이렇게 하자고 하면 별 의견도 내지 않고, 그렇다고 좋으면 좋다고 딱히 분명하게 의사 표시도 하지 않는 답답한 회의들이 매번 이어졌고, 그럴 때마다 뒤 끝이 개운치 않았다. 끝끝내 정선 고한시장에서의 공연에서는, 다 같이 짜던 공연 전 멘트도 어느새 그 날 멘트하는 사람에게 일임해버리고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최악의 사태까지 갔고, 그 날 공연은 완전히 말아먹었다. 그때가 돼서야, 우리 사이에는 무언가 소통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로에 대해서 너무 모르고, 관심이 없는 게 아닐까 하는 것 말이다. 언제부터인가 전혀 모르고 있었는데 갑작스럽게 한 명이 학교를 그만두게 되었다고도 하고, 개인적인 힘든 일들로 오랫동안 학교에 나오지 않게 되더라도 그저 나중이 되어야지 서로 미안하다고 밖에는 말하지 못하게 되었던 것 같다.

작업장학교에 나온다는 것, 그것은 서로간의 ‘나와야 하는 학교’라는 약속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강제적이나 억압하는 그런 ‘구속’이 아니라 어딘가로부터 ‘탈’해서 스스로들이 선택해서 모인 학교이고 그렇기 때문에 서로 각자의 ‘학교에 대한 기대들’과 ‘서로에 대한 기대들’을 나누며 같이 하고, 수다 떨 수 있는 학습을 찾아가야 한다는 뜻이었다. 나는 계속 접고 펴지기를 반복하는 나의 ‘같이 하는 사람들과의 의리’를 더 이상 구부리지 않겠다는 다짐을 했다. 그러나 그 후, 메솟으로의 이동 학습 중에도, 다녀온 후에도 왠지 모르게 다른 죽돌들과 우스갯소리, 농담 따먹기 따위가 아니라 같이 학습하는 사람들로서의 이야기들을 건네거나, 지속시켜나가는 것이 낯설고 어색하며 힘들기만 했다. 특히 메솟에서 그랬는데, 너무나 다른 상황에선 가만히만 있어도 너무나 새로운 경험들이 날아와 몸에 부딪치기 때문에 많은 경험들을 정리하는데도 힘들고 다른 사람의 생각들이 아무런 여과없이 내 머릿속에 들어온 게 아닌가 싶어서 무엇이 내 생각인지를 구분할 수가 없었고, 그것들을 정리하는 데에만 온 신경을 쓰게 되니 다른 사람이 무얼 말하든지 들리지 않았고, 돌아온 후에도 학교 생활이 재미있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것은 극단적인 생각으로까지 이어졌고, 이렇게 계속해서 외로움을 느끼면서 학교를 ‘혼자’ 다니는 것보다는 그만두는 게 낫지 않을까 고민하기까지 되었다.

2.

길찾기로 들어올 때부터 음악가에 대해 이야기하던 나는 원래는 세션 기타리스트가 되고 싶었다. ‘프로뮤지션’인 것인데, 초일류의 스킬을 정복해서 누구보다 잘 치는 기타리스트로 인정받겠다고 꿈꾸며 기타 학원에 다니기 시작했고, 교본도 하나 얻어서 차근차근 공부했다. 그러나 이미 혼자서도 즐겁게 잘 치다가 가게 된 학원에서 배우는 기타는 전혀 재미있지 않았다. 그러다가 누구나 기타치고 음악하고 싶다고 해서 완벽하게 잘 치는 테크니션이 될 필요는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고, 난 작사 작곡하는 밴드로, 음악가로 방향을 돌렸다. 사회적, 특히 환경적 이슈에 관심이 많았던 나는 ‘음악을 통해 사람들에게 메시지를 전하고 무언가를 바꿀 수 있는 사람이 될 수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막 작업장 학교에 들어왔을 때다, 촌닭들이라 불리는 처음 보는 퍼커션을 연주하는 팀들이 우리를 환영하며 공연을 벌였고 그들의 공연에 감탄한 나는 주니어가 되어서 공연팀에 입단했다. 나와 내 동기들이 입단한 직후, 공연팀은 회의를 거쳐서 ‘Festeza’라는 이름을 새로 지었다. 의미를 설명하자면 촌닭들의 타이틀곡이었던 ‘슬픔’이란 의미의 ‘Tristeza’와 ‘축제’라는 의미의 ‘Festezo’가 합쳐진 신조어인데, ‘인재지변의 시대에 만연하는 슬픔에 공감하고 그들에게 위로를 건네며 슬픔을 뛰어넘는 축제의 노래를 하자’라는 의미를 담은 것이다. 따라서 Festeza라는 이름이 우리에게 주는 가장 중요한 화두는 ‘이야기가 있는 공연’이었고, 처음부터 그 이름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퀄리티’였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공연하는 곳이 어디이고, 우리가 노래를 부르고 악기를 치는 것이 어떤 이야기를 가질 수 있을지 고민하며 공부해가는 팀’이었던 것이다.

N. 시민문화 워크숍 (제목??)

내 생각에 이번 8개월의 긴 학기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것은 ‘시민문화 워크숍’이었다. ‘세계를 구하는 시인들’이라는 거창한 부제를 달고 있는 이 프로젝트는 각자의 영역에서 각자의 시민정체성을 이야기하며 할 수 있는 것들 하며 살아가고 있는 ‘시인들 - 市 詩 時 施 視 翅 始, 柴’을 만나는 시간이었다. 때로는 ‘길섶의 시인’으로서 여행을 떠나기도 했다. 온갖 예술가들이 자신의 예술매체를 통해 공간의 변화를 시도한 ‘플랫폼 인 기무사’부터, 예술가가 살고 있는 마을로 마을의 재활력화를 꿈꾸는 정선 사북/고한 ‘예술마을 프로젝트, 동+감’, 4대강 개발이 시작된 낙동강, 세계를 바꾸는 Change maker들의 이야기를 들어볼 수 있었던 ‘홍콩 MaD컨퍼런스’, 그리고 태국 국경 지대에서 살아가는 국경을 넘은 버마의 청소년들과 만났던 ‘메솟/맬라캠프’까지. 나에게 있어서 시민문화 워크숍은 우리의 시민의식을 , 정체성에 대해 고민해보게 된 계기가 되었던 것 같다. 모두의 상황이나 현실들이 다르기 때문에 각자의 ‘시민 정체성’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들도 다를테고, ‘무조건 연대’보다는 그랬을 때 서로의 접점에서 ‘연찬’의 가능성을 일깨워주었다. 세계를 인지하고 타인의 현실들, 그 안에 만연하는 슬픔을 대하는 입장과 감수성을 고민했다.

2009년 11월 2일부터 11월 8일까지 작업장 학교는 정선 사북/고한으로 7박 8일간의 여행을 다녀왔다. 과거 탄광촌이었던 사북/고한은 석탄이 주된 연료로 각광받던 시절에 경제적으로 큰 번영을 누렸고, 전국에서 일하려고 찾아온 사람들 북새통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석유가 석탄을 밀어내가면서 탄광의 경제적 사정은 점점 나빠지기 시작했고, 결국 폐광된다. 일자리를 잃은 갈 곳 없는 광부들은 도시로 이주해가거나, 마을에 가게를 내서 살게 되었다. 마을의 주민 번영회는 경제가 다시 살아나길 바라며 카지노 유치에 힘을 쏟았고, 그래서 지금 그 마을 산 중턱에는 카지노와 리조트가 들어서게 되어 경제적인 풍요는 얻을 수 있었지만 도박 중독자나 대금업만 늘어난 마을은 정작 점점 활력을 잃게 되었다고 한다.

여행의 중반에 이르러서까지도, 나는 어떠한 확신이라고는 전혀 없었다. 출발할 때부터 그곳에서 공부한 것을 노래로 쓰고 부름으로서 내 작업을 시작하려고 마음먹었는데, 막상 카지노가 보여주는 그들 땅의 현재 모습과 탄좌와 석탄산이 보여주고 있는 역사를 접하게 되면서 마음은 답답하고, 무언가를 하고 싶은데 대체 ‘감히’ 내가 어떤 입장을 무슨 생각을 가지고 이곳에서 지켜나갈 수 있을지 몰랐다. 다른 프로젝트들에 도저히 집중할 수가 없었다.

옛 광부들이 사용하던 캐비닛, 장비들과 손때와 기름때가 뒤섞인 작업복과 벽, 폭약과 곳곳에 붙어있는 안전제일이라는 문구, 그리고 석탄 찌꺼기가 40년 동안 쌓인 경석산에 오르면서 나는 그들이 얼마나 고된 삶을 이어나갔을는지 상상하며 멋대로 내가 그 시대의 사람인양 그 시대로부터 멈춰진 시간 위에 또 다른 시간을 보내고 있는 흔적들을 보며 그들의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이면 좋을지 모른 채 마치 전지적인 시점을 가진 것 같은 느낌을 받기도 했다. 자꾸 그들의 슬픔에 ‘공감’하려는 것이 그들이 되어서 ‘동조’하려는 식으로 되어가고 있는 것을 보고, 내가 타인의 현실을 대할 때 어떤 식으로 마음이 움직이는 것이었는지 기억해내는 것이 필요했다.

혼란스러운 상태에서 동원탄좌에 3번째 간 날, 어떤 아저씨 한 분을 만났다.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그 분은 탄광에서 25년간 일하시다가 지금은 아무도 없는 탄좌 건물을 동료들과 지키고 있다고 하셨다. 나는 들어오면서 밖에서 보았던 하이원 리조트의 관광 개발에 대한 안내 표지판에 대해 이야기를 건넸고, 그 분께서는 혹시라도 지금껏 보존해오고 있는 흔적들을, 과거의 동료들과 함께 일했던 삶터가 관광 개발로 깎여나가는 것에 대해 우려한다고 말씀하셨다. 내가 물었다. “만약 정말 그렇게 되면 어떡하죠?”

“그렇게 되지 않게 하도록 우리들이 여기 있는 거지.”

그 말은 마음을 잔잔하게 울렸고 나는 스스로에게 ‘그들의 흔적과 삶에서 현재의 나는 무엇을 느끼고 무엇을 노래하려 하는가?’라는 질문을 다시 던졌다. 밥딜런을 모티브로 한 영화인 ‘I'm not there’에서 나에게 가장 중요하게 남았던 대사가 있다. ‘너의 시대를 노래해라.’

오랜 세월동안 광부들은 위험한 작업환경과 고된 노동으로의, ‘Life on Edge’를 살아가고 있었고 그것들은 그들의 존재를 흔적으로 남겼다. 그 흔적들은 내게 그 사실들을 말하고 있는 것인데, 마치 내가 광부인 것처럼 시선을 가지고 생각한다는 것은 부자연스러울뿐더러, 할 수 있는 일도 아니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역사의 흔적으로부터 이어진 시간을 따라, 지금의 마을의 모습, 그럼에도 계속해서 자신의 삶터를 지켜오는 사람, 떠나야 했던 사람들에게 노래하는 것이다. 닿지 못할지 몰라도, 노래뿐이지만 적어도 나는 그 슬픔에 공감하고 위로를 건넬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기에 그들을 위한 노래를 지었다.

정선 여행에서 만났던 광부들의 역사와 더불어 내가 겪었던 시대에 대한 혼동은 시민으로서, 모두와 함께 슬픔에 공감하고 위로할 때 그들을 위한 노래를 만들고 부르는 음악가의 역할에 대해 생각해보게 했다.

동시에 그것은 우리가 노래하는 ‘동시대’나 ‘세계’가 무엇인지를 물었다. 시민문화 워크숍이 끝나갈 때 즈음, 나는 이 단어들을 정의하고 내가 세계를 인식하는 과정을 들여다보고 정리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중간 학기 에세이를 정리하면서 마지막으로 히옥스와 미팅을 가졌고, ‘우주’와 ‘세계관’이라는 생각해본 적도 없던 키워드들을 제시받았고, 생각해보기에는 그 말들이 막연하게 크게만 느껴져서 부담되기만 했다. 결국 나는 이 단어들에 대한 생각을 에세이에 ‘여러 세계관들이 있고 그래서 내가 보지 못하는 세계관들을 갖기 위해 공부해야겠다.’라고 억지로 우겨 넣고 중간에세이를 마쳤다.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는데, 이것은 단지 내가 한 학기동안 공부해오던 것을 넘어서는, 상위의 개념이 아니라 내게 필요했던 ‘감수성과 인식’에 대해서 조금 더 생각을 풀 게 될 수 있는 힌트였다.

-Take me home, country road

09 가을학기 시민문화 워크숍을 정리하면서 나에게 남았던 질문들이 있다. 거의 히옥스로부터 던져졌다고 당시 심정으로 표현할 수 있겠는데, 바로 ‘우주적 관점’과 ‘세계관’에 대해서 생각해보라는 말이었다. 정말 느닷없이 커다란 이야기인 것만 같아서 차라리 머리가 아팠으면 좋았을 걸 오히려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다. 정선 여행이 나에게 넘겼던 ‘시대를 노래한다는 것’에 대해서도 아직 풀어내지 못했는데 무언가 그 위에 상위적인 개념이 얹어진 듯 머리가 무겁기만 했다. 결국 그 막연했던 말들은 에세이에 ‘여러 세계관들이 있고 그래서 내가 보지 못하는 세계관들을 갖기 위해 공부해야겠다.’라는 내용의 앞뒤 잘라먹은 말로 우겨 넣어졌다. 새해가 되어서 작업장 학교가 홍콩과 태국 국경 지대로의 여행을 떠나면서, 내 생각이 나아갈 수 있을지 불확실한 마음속에서 막연하게나마 이 여행에 기대를 걸어야만 했다. 학교에서 여행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2년 전 글로벌 학교가 그곳에 다녀온 기록 영상을 보다가 등장한 밴드가 ‘떠나온 사람들’이라는 노래를 불렀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 사람들이나 음악하고 있다는 사람들을 만나고 싶었다. 정선에서 내가 누군가의 현실들과 만나고, 그것을 위로하고 공감하여 노래한다는 것이라고는 했지만, 사실 그때까지도 그 이야기들을 내 안으로 연장시켜 끌고 들어오는 그 과정인 ‘공감’에 대해서는, 그래서 이 이야기를 하게 된 나와는 무슨 상관인 것인지를 확실히 할 수 없게 되었다. 동시대를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이고, 어떻게 그것이 내 세계와 만날 수 있는 것인지를 말이다. 이번 여행을 잘해낼 수 있을 거라고 장담할 수 없었다.

우리는 거의 매일 그곳에서 NGO단체들과 만나고, 청소년들과 만나며 그들이 겪고 있는 문제 상황들에 대해서 듣게 되었고 가끔씩은 듣는 것조차 감당이 되질 않는 이야기들도 있었다. 너무나 다른 상황에서 엄청난 일들이 일어난다고 생각했고, 그 이야기들을 들으면서 계속 수많은 ‘다름’의 벽 밖에 보이질 않았다. 나는 그 다름을 넘어서는 접점을 발견하고 싶었다. 그렇지 않고서는 그들과 이야기한들 모든 것들이 다른 조건과 현실을 확인하는 것뿐일지도 모른다는 것이 답답하게 느껴지기만 했다.

여행 중에는 여러 학교들과 만났는데, 특히 매솟의 CDC(Children development center)학교와 멜라 캠프의 LMTC(Leadership management training collage)학교와는 각 팀으로 나누어 Activity를 진행하면서 만났었다. Festeza는 우리가 부르던 노래들을 그곳 청소년들과 함께 부를 수 있게 하는 것을 준비했었다. 작업장 학교에서 하는 춤, 그리고 노래들을 알려주었다. 여행 일정 상 메솟에서 지내다가 멜라 캠프로 간 것이므로 먼저 CDC학교에서 activity를 진행하게 되었다. ‘뭉게구름’을 저쪽 청소년들에게 알려주고, 우리도 카렌족이 부르는 노래를 배우면서 다 같이 노래를 불렀는데, 불현 듯 지금 노래를 부르고 하는 것이 대체 무슨 의미인건지 알 수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노래를 부른다고 자신의 상황이나 꿈, 생각들을 표현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대체 매체 학습을 한다는 나는 지금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면서 무엇을 이야기할 수 있다는 건지 알 수가 없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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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널 수 있지만, 건너지 못하는 다리를 보면서

다음 날, 우리는 LMTC학교가 있는 멜라 캠프에 도착했다. LMTC에서도 CDC에서 했던 것처럼 Activity를 진행해야 했기 때문에 Tristeza와 Take me home, country road를 부르기로 정하고 1학년 학생들과 만났다. 서로 자기소개를 한 뒤, 노래를 연습하고 각자 악기를 맡아 Take me home country road를 연주할 수 있도록 연습했다.

긴 시간동안 고민해서 정한 activity는 아니었지만 나름대로 안 되는 영어도 잘 굴려보고, 진행도 하면서 열심히 했지만 아무래도 CDC에서 그랬던 것처럼 이 노래를 부르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다는 의문에 한편으로는 기분이 마냥 흥겹지만은 않았던 것 같다.

어쨌든 열심히 연습하면서 쇼하자의 시간은 다가왔고, 우리는 히옥스의 제안으로, 나와 LMTC학생인 네이투와 칫이 ‘컨트리로드’에 대한 자신의 생각과 소개를 하기로 했다.

그 두명의 학생은 컨트리로드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이 노래의 멜로디는 즐겁지만, 가사는 자신의 고향을 떠올리게 하는 것 같아 슬픈 감정이 생긴다며 스피치를 마쳤다.

그리고 노래를 부르면서 이번 Activities의 쇼하자는 끝났고, 우리는 모여서 컨트리로드에 대해 이야기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이야기를 나누기 전, 컨트리로드는 당신의 시골고향일 수도 있고, 상상하고 있는 ‘이상’이나 Homeland 등… 아무래도 괜찮다고 말하고 시작을 했지만 LMTC학생들은 빠짐없이 전부다 자신의 실제적 경험과 국가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주었다. 처음 이야기를 시작한 것은 나였다, 난 어릴 적에 살던 나무도 있고, 산도 강도 있고 무엇보다도 지금의 내가 계속 간직할 수 있는 추억을 만들어준 고향에서 어쩔 수 없는 이유로 떠나와서 지금은 도시에서 살고 있고 너무 삭막한 풍경, 그리고 도시의 사람들 사이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다른 곳을 고향이라고 불러본 적은 없다고 말했다.

이야기를 나누면서 나는 좀 당황스러웠다. 그렇게 시작을 열었는데 그 이후로 모두가 자신이 여기까지 오게 된 경험에 대해서 이야기하는데, 그들의 경험은 마을이 불타고, 헤어지고, 누군가가 죽었던 이야기들이었기 때문이었다. 듣고 있기가 참 미안했는데, 더욱이 많은 학생들이 이야기를 열기 전에 나를 가리키며 '나도 저 한국학생과 같습니다.'라고 말했던 까닯이었다. 사실 어떻게 보면 굉장히 배부른 소리였을지 모른다. 나야 이 도시에서 필요에 의해 공부하고 있고, 금전적 문제도 있어서 거처를 옮기는 것이 그렇게 간단한 일은 못되지만, 사실 마음먹고 다 때려치우고 돌아가서 텐트라도 치고 초야에 묻혀 살 수도 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들에게는 이동의 '선택권'이 없었고, 나에게는 있었다. 나에 비하면, 그 사람들의 경험과 나의 것에는 엄밀한 현실의 강도가 존재하고, 그들 선택에는 나로선 상상할 수 없는 무게가 딸려있었다. 그 때문에 다른 현실을 마주했을 때 나는 대체 어렴풋이 느껴지는 접점이 대체 어디쯤에 있는 건지 가늠할 수 없었다.

그들은 어떻게 생각했는지 모르겠다. 다만 그들이 했던 두 가지 말을 잊을 수가 없다. ‘나도 저 한국 학생과 같습니다.’ 그리고, ‘우선 이렇게 우리들의 이야기를 할 기회가 생긴 것에 감사하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나는 메솟에서의 일정이 막바지에 다다를 때 즈음, 우리는 CDC학교 친구들과 태국-버마간 국경 다리를 방문했던 때가 기억난다. 그곳을 본 순간, 나는 허탈함과 동시에 가슴이 먹먹해져옴을 느낄 수 있었다. 작은 강이 하나, 그 위에 커다란 다리가 놓여 있는데 인근 주민들이 태국에서 장을 본 뒤 그 다리를 통해 버마로 돌아가기도 하고, 삯을 내고 커다란 튜브로 건너편까지 가기도 하는 것이 보였다. 벌거벗은 아이들이 뛰어놀고 있었다. 곳곳에 군인들이 순찰을 돌기는 했지만, 엄중한 검문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사람들은 그대로 자유로이 국경을 넘고 있었다. 마웅저 선생님의 설명을 들으니, 오가는 것은 딱히 어떤 검문이나 심사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불법 이주해서 살 수 없도록 자동으로 12시간의 비자가 있고, 그 기한을 넘기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 아이들에게는 국경을 넘는 것은 큰 문제가 아니지만 진짜 문제는 국경을 넘고난 뒤, 타국에서 앞으로 살아가는 것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건너려면, 건널 수 있지만 건너지 못하는 것이다.

내가 그 다리를 보았을 때 느꼈던 감정들은 웬 것일까 생각해보았었다. 바로 눈앞에 자신들의 조국이 보이고 넘어갈 수 있는 다리가 있는데도 넘어갈 수 없었던 CDC 학생들을 보면서 나는 왜 슬퍼졌는지.

내 고향에 대해서 생각해보면 분명 나에게는 이동의 권리만은 분명히 존재하지만, 몇 년마다 찾아가는 내 고향의 산과 흙은 점점 파여져 없어져가고, 도로들은 계속 새로 닦여지고, 집은 사라지고 지어지고, 시냇물은 메말라가며 옛 모습을 잃어가고 있었다. 갈 수는 있는거다, 하지만 이미 내가 알고 있던 그 모습들은 하나 둘씩 자취를 감추고 있는 것이다. 산업 개발화의 물결이라고 해야 하는지.

다시 내가 왜 저들 앞에 놓인 강을 보며 가슴이 먹먹해졌는지 묻는다면, 나는 어쩌면 그것은 내가 ‘모름지기 인간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점점 사라져가는 내 고향으로 가는 것이 힘들어지겠지만, 나는 그들이 앞에 놓인 강의 경계를 넘을 수 있도록 지지하고 응원해줄 수 있고, 그들 또한 다른 현실들에 대해 지지하고 응원해줄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한다. 내가 그들의 상황과 내 상황을 연결할 ‘전 지구적’인 문제의 지점을 찾으려거든 더 많은 공부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만, 우리는 그전에 전 지구적인 감수성에 대해 생각해봐야 할 것 같다. 나와는 다른, 가령 아이티의 지진 난민들이라든가, 몰디브의 난민들이라든가 용산 참사의 희생자들을, 개발로 서식지를 잃고 쫓겨나는 도롱뇽, 족제비, 너구리들을 보고 눈물짓는 것은 왜 그런 것일까? 난 그것이 ‘우리가 사람이면 누구나 그러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다는 생각을 한다. 이것은 우리가 마치 경제적 이윤만을 바라보고 강바닥을 콘크리트로 뒤덮어 버리고 산의 구멍을 뚫는 것과 같다. 아무리 한쪽에서 자연보호를 외쳐도 공사가 멈추지 않는 것은 무조건 그 사람들이 나쁘다기만보다는 그저 같은 세계의 일면인 다른 현실들을 보는 세계관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했다. 이럴 때에는 ‘생태적’이라는 말이 맞는 것 같다. ‘전 지구적’, ‘전 생물적’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관점을 말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주거지를 잃어가고 있지만, 동물들은 서식지를 잃어가고 있는 세상이고, 원인인 개발문제, 기후변화는 전혀 다른 문제들의 평행선이 아니다. 모든 상황과 입장이 얽혀져 있는 상황이고 그렇기 때문에 작업장 학교에서 기후변화를 이야기하는 동시에, 개발이나 이주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두 개의 관심을 가지고 있다기보다는 각자의 매체를 통해서 동시대의 여러 세계관들이 교차하는 부분을 바라보는 생태적인 감수성을 가지고 파편화된 각각의 삶들을 잇는 작업을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우리가 다 같이 노래하고, 노래로 만나 이야기를 나누며 서로를 지지하게 되고, 인식하게 되는 것이 노래가 지금 가질 수 있는 의미가 아닌가 싶다. 모두가 같이 부를 수 있는 노래가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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