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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냇물이 굽이굽이 흘러 마침내 바다에 닿을 때까지> 2010월 9월 4일부터 시작된 하자 작업장 학교에서의
생활이 어느새 4개월째로 접어들었다. 숨가쁘게 달려온 그
시간 속에서 나는 무엇을 배우고 어떻게 지내왔을까를 생각하고 중간정리를 하려니 막막하기 그지없다. 여태껏
중요하다 여겨온 것들이 조금씩 그 의미를 잃어가며 다른 생각의 씨앗들이 대신 자리잡았다. 짧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만남과 소통, 그리고 혼자였다면 느끼기 어려웠을 감동이 있었다. 또 학교를 그만두고 혼자 지낸 약 10개월의 시간은 내게 어떤 의미였는지
다시 돌아보고자 한다. 벌써 한 해를 넘겨 지나쳐 버린 일이라 이미 극복한 생각과 감정들이 있겠지만
당시의 기억을 되살려 한번도 제대로 매듭짓지 못한 나의 생활을 다시 꺼내어 곱게 개어 두고 싶다. 무작정
잘 쓰고 싶다는 욕심에 글의 개요를 쓰는데 몇 일, 글을 시작하는데 몇 시간을 망설였는지 모른다. 어떤 글이 되었든 일단은 쓰고 보자는 생각으로 마음을 비우고 긴 호흡을 내쉬어 본다. 그리고는 눈을 감고 그리 오래되진 않은 기억을 더듬는다. 난, 이곳에 오기 전에 어떤 사람이었는지, 어떤 생활을 했었는지. 1. 17살의 끝, 터닝포인트를 찾았다. 2009년 11월 11일,
자퇴를 하게 된 결정적 계기가 된 책 <중상위권 역전 스토리! 대입혁명>을 별 생각 없이 집어 들었다. 책의 표지에는 ‘해외 명문대 입학,
특목고의 전유물이 아니다! 일반고, 특성화고, 검정고시, 예술고도 가능하다!’ 라는
자극적인 타이포와 함께 시선을 끄는 빨강색과 검은색이 강렬한 대비를 이루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서구의
학생들은 고교 시절까지 한국의 학생들처럼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경우가 드물기 때문에 학업의 열정이나 학업 수준이 월등한 한국 학생들이 어느 정도의
영어 실력을 전제 조건으로 해외 명문대에 지원한다면 진학한 확률이 높다는 내용설명과 함께 여러 방면의 성공사례들이 수록된 책이었다. 아빠께서 사오신 그 책을 읽었을 때, 꾹 꾹 눌어왔던 어떤 마음이
터져버렸다. 책을 단숨에 몇 번이나 읽은 후에도 가라앉지 않고 오히려 걷잡을 수 없이 퍼지는 그 마음에
나는 그날 밤 더 이상 한국에서 머무르지 않고 미국의 대학에서 더 넓고 다양한 만남과 배움을 경험하고 싶다고 집에 돌아온 부모님을 강하게 설득했다. 이전에도 유학을 보내 달라는 투정과 같은 제안을 몇 번 했었지만 충분한 근거와 설명, 자료가 부족하다는 등의 이유로 매번 돌아오는 대답은 조금 더 주어진 상황에서 노력해 보라는 아빠의 말씀과 엄마의
안타까운 설득이었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나는 설명할
수 없는 자신감과 확신에 차있었고, 무엇보다 확실한 자료와 사례를 확인한 후였다. 오늘 당장 부모님의 동의를 받지 못한다면 학교자퇴 및 유학에 관한 결정이 또 다시 흐지부지 될 것 같은 조급한
마음에 설득하기를 멈추지 않는 입술만 타 들어갔다. 나를 외국으로 보내는데 긍정적이었던 엄마는 갑작스런
나의 제안에 신중한 태도를 보이며 차근차근 생각해보자고 했고, 아빠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언제나처럼 식탁에 둘러앉아 긴 얘기를 나눈 후 자퇴를 결정했다. 드디어
학교를 나갈 수 있게 됐다. 그 날밤에 올려다보았던 맑고 차가운 밤 하늘의 오리온 자리는 오래도록 잊혀지지 않을 것 같았다. 2. 다시 돌아가라 그러면 그럴 수 있을까 한국에 들어온 후, 나는 수많은 날들을 바꿀 수 없는 현실을 비판하고 때론 그 틀 안에서 어떻게든 우뚝 일어서 보려고 애를 쓰며 보냈다. 학교의 납득이 가지 않는 교칙과 끝이 없는 경쟁을 비판하면서 나는 할 수 있을 거라고, 나는 저 사람들과 다르니 꼭 성공할 수 있을 거라 멋대로 생각했다. 그러다 좀처럼 오르지 않는 성적에 지칠 때면 모든 걸 다 제쳐두고 서점에 들어가 자기계발서적 따위를 뒤적이며 다시 일어설 수 있을 거라 최면을 걸곤 했다. 외국에 살다 왔다는 사실은 꽤 오랜 시간 동안 성적이 안 나와도 날 보호해줄 쓸만한 핑계거리가 되어주었고, 습관과 같은 성실함과 밝은 성격으로 친구들과 선생님들과의 관계도 좋았다. 오히려 학교 생활을 하면서 백일장, 교내 토론대회, 발표수업 등 내가 할 수 있는 활동을 꾸준히 열심히 하면서 활발한 모범생의 모습으로 힘들지 않은 나날들을 보냈었다. 그래서 꽤 오랫동안 난 내가 괜찮은 줄만 알았다. 내가 그곳에서 가지는 의문들과 문제의식 정도는 다른 학생들도 비슷하게 가지는 체제에 대한 불만이겠거니 생각했다. 하지만 학교 일상 곳곳에서 접하는 일방적인 교육의 방식과 교사와 학생의 관계는 내가 가진 문제의식을 끊임없이 자극하고 키웠다. 학생들은 매 년 매 학기 매 달 끊임없이 순위와 숫자들로 함부로 등급화 되고 있었고, 자신의 시험결과와 자신 스스로를 동일시하는 친구들도 여럿 보았다. 교사가 관리하기 힘들다고 판단한 학생들은 학생부에서 올바른 인성교육을 위해 욕지거리를 듣거나 더욱 모진 취급을 받기도 했다. 수업시간에는 정해진 진도에 맞춰 어디에 필요한 건지도 잘 이해되지 않는 지식과 정보들을 일방적으로 주입 받았고, 그 속도에 맞춰나가는 것은 물론 남들보다 먼저 더 많은 양을 더 빨리 알기 위해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치열한 경쟁이 있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미처 생각해볼 틈도 주지 않고 무조건 입시를 위해 짜맞춰진 시스템을 가동시키는 학교는 그저 정부가 운영하는 대형 학원에 지나지 않았다. 중학교 때, 강사와 교사는 엄연히 다른 존재이며 교사인 자신에게 자부심을 느끼고 있다고 말씀하시던 한 선생님이 있었다. 우스웠다. 그분이 뱉은 말이 아니라, 그런 말을 하면서 자신의 제자들이 얼마나 대단한 명문고 명문대에 진학했는지를 무슨 훈장을 늘어놓듯 자랑스럽게 읊는 그 모습이 말이다. 그 선생님뿐만 아니라, 모두들 내게 좋은 성적으로 명문대를 입학하면, 그때 하고 싶은 것을 모두 해도 늦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게 아닌 것 같아서, 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 먼저 알아야 되지 않겠냐 물었더니 그것도 대학 가서 찾으면 된다 했다. 도대체 대학에서는 무엇을 배우길래 가면 다 해결된다 그러는 건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그랬더니 일단 높이 올라가고 보면 알게 될 것이라고 했다. 좋은 대학의 졸업장은 행복한 인생을 시작하기 위한 프리미엄 티켓이라며. 나는 그 말을 믿을 수 없었다. 영영 돌아오지 않을 나의 십대를 다 바쳐도 게임에서 승자가 될 것이란 보장은 없었고, 무엇보다 그 과정에서 내가 행복하지 않았다. 하지만 거기서 더 생각하는 것은 허락되지 않았다. 눈 앞에 달려가는 무리를 따라잡아야 하는, 더 ‘시급한’ 목표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 목표와 모순되는 나의 생각과 감정들은 자꾸만 나를 분열시켰고, 나중에는 감당하기 힘든 지경이 되었다. `『공부를 하려고 마음을 다잡고
책상에 앉으면, 또 몇 분도 안되 내 마음은 딴 곳에 가있다. 머리는
딱딱하게 굳어져 가는 듯하고, 헛된 욕심과 쓸데없는 공상만이 그 속을 가득 채운다. 고2 2학기 중간고사가 허무하게 끝난 지 벌써 15일 지났는데도 흐트러진 내 마음과 정신은 좀처럼 제자리로 돌아올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도대체 뭐가 문제인지 도무지 알 길이 없어 몇 일을 멍하니 보내다 그 답을 찾았다. 참으로 간단한 문제였다. 난 꿈이 없다. 지금의 난 차갑게 식은 채 바람에 날아가기만을 기다리는 시커먼 잿더미와 같다는 생각을
한다. 내가 중요하다고 여겨온 것들이 언제부터 내게 중요했는지, 누가
중요하다 한 건지, 왜 중요한 건지 모르겠다. 그냥 캄캄하다. 내가 진정 원하는 것이 뭔지, 어느 길로 나아가야 하는지 하나도
알 수 없어 밑도 끝도 없이 헤매고 있는 나를 발견할 때마다 한심해 미칠 지경이지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아 두렵다. 하루 몇 시간씩 몰래 컴퓨터 앞에 앉아 실재하는 것 같지도 않는 것들에 매달리고, TV의 환상에 중독되고, 학교공부와는 상관없는 책을 읽는다. 한국에서 더 성장하고 싶었지만 난 점점 겉잡을 수 없이 한심한 인간으로 변해가고 있다. 매 번 나를 짓누르는 열등감도 한없이 무겁기만 하다. 내색은 하지
않지만 나보다 성적이 좋은 학생들에게, 더 부유한 환경에서 공부하는 아이들에게, 나보다 더 뛰어난 재능을 가진 사람들에게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열등감을 느끼며 매번 끔찍이도 힘들어 한다. 이젠 눈물도 말라 쥐어짜도 나오지 않고, 심장이 굳어버려 아프지도
않다. 그저 덤덤하고 고요한 상태로 시간이라는 절실한 자원을 낭비하고 있다. 무섭고 두렵다. 나중에 정말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닥치면 난 어떡해야
하지? 어쩌자고 지금 이렇게 미친 척 시간을 보내고 있는 걸까. 내게
남은 건 뭘까. 역겨운 패배감, 두려움, 열등감, 초라한 자존심, 불안함, 초조함, 자기비하 또는 연민, 희미한
옛 기억들만이 텅 빈 속을 더 쓰리게 한다. 엄마를 똑바로 볼 자신이 없고, 아빠를 볼 면목이 없고, 동생에게 떳떳하지 못하고, 친구들을 대할 자신감이 사라진다. 어김없이 날 찾아올 내일이 두렵다. 이 불행의 연속은 도대체 언제쯤이면 끝이 날까? 』 2009년 10월 어느 날 일기 中 그렇게 하루 하루를 주어진 상황과 눈 앞에 놓인 체제에 억지로 나 자신을 끼워 맞추려 하다 보니 내가 본래 어떤 사람이었는지 헷갈렸다. 아침에 힘겹게 눈을 뜨면 무채색의 교복에 매달려 숨을 죽인 채 시험을 위한 수업을 듣고, 반강제인 야간자율학습을 하고, 그걸로 모자라 피곤한 몸을 이끌고 학원으로 가 학업에 정진해야 하는 나와 친구들의 일상이 가여웠다. 우리는 왜 그렇게까지 해야 하는 걸까. 어느 순간, 모두에게 똑같이 주어진 시험문제와 그에 따라 나오는 복잡한 숫자들과 씨름하는데 시간을 내주기엔 내 인생이 너무 아깝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해야 하는, 혹시 하고 싶은 다른 일들이 있을 거라 느꼈지만 그게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아무도 내게 알려주지 않으니 내가 스스로 찾아야만 했고, 그걸 찾기 위해서는 우선 생각할, 혹은 무엇이든 해볼 시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왜 학교를 그만두려 하냐고 물어오는 사람들에게는 뭐라고 이야기해야 할지 잘 몰랐다. 그 모든 걸 적합하게 포장하기 위해 선택한 것이 어쩌면 미국 유학이 아니었을까. 미국 명문대에 진학을 바탕으로 한 나의 자퇴선언은 갑작스럽긴 해도 그들에게는 합리적(reasonable)으로 받아들여졌는지 더 이상 이유를 캐묻지 않았고, 대신 다 이해한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던 그들을 탓하는 것은 아니다. 당시엔 나조차 정말 유학을 위해 학교를 그만두는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미국 유학에 대한 목표에 대한 의구심을 가지기엔 난 아직 어렸고, 학교를 나오면서까지 상위 0.01%의 엘리트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다. 3. 기약 없는 터널 속을 지나다. 학교라는 집단에서 나와 혼자가 되니, 기대했던 자유로움보다는 예상하지 못했던 공허함이 있었다. 팽팽하게 잡아당기고 있던 거대한 고무줄이 갑자기 끊어져버린 것 같았다. 하지만
크게 당황하지 않고 차근차근 그 흐름에 익숙해지려고 노력했다. 베개로 써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두꺼운
토플 책과 SAT문제집을 사고, 연간 계획을 세우고, 한달 목표와 일주일 시간표, 하루 계획표를 짰다. 하지만 실제로 그 계획들을 실행에 옮기기 까지는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걸렸다.
하루 종일 혼자 집에 앉아 검정고시, 토플, SAT 공부를
하며 도서관, 학원, 집 사이를 떠돌아 다녔다. 이 정도로는 안되겠다 싶어서 과외활동을 대신해 여러 봉사활동도 계속 알아봤지만 연달아 이런저런 이유로 번복되었다. 차선책으로 매일 저녁 운동 프로그램을 짜 땀을 흘리고 매주 두 번씩 재즈댄스 레슨을 받으며 균형 잡힌 생활을
하려 했다. 하지만 스스로에게 주어진 시간을 주체적이고 효율적으로 사용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애써 세워둔 계획은 번번히 미뤄지거나 지켜지지 않았고, 눈 앞에
여전히 버티고 선 시험은 초조하고 부담스러웠다. 해야 할 과제나 숙제는 늘 밀려있을 때가 많았지만 아무도
알지 못했다. 스스로를 제어하기가 힘들었다. 내 것이 아닌
목표를 집어 던지고 학교를 나왔지만 내가 선택한 목표 또한 내가 진정 원하는 것인지 의심이 들었다. 내가 그렸던 미래는, 주위 모든 사람들이 격려하고 나를 설레게 만들었던 그 꿈은, 그저
추앙 받기 위해 조작된 가짜였던 걸까.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허망할 수가 없다. 그것이 정말 살아 숨쉬는 나의 꿈이었더라면, 날 이렇게까지 무기력하게
내버려 둘 수 없다. 다들 무언가를 위해 숨도 고르지 못하고 내달리고 있다. 언제 찢겨지고 무너져 내릴지 모르는 위태로운 신기루일 수도 있음을 의심조차 해보지 않고 계속 간다. 그럼에도 그들이 부러운 것은, 이토록 멍하니 멈춰서 있는 내 자신이
더할 나위 없이 한심해서 일테다. 미쳐버리고 싶다. 진정으로, 미치고 싶다. 언제
마무리될지 모르는 이 지겨운 정적을 파괴하고 부서지지 않을 것 같은 무기력의 벽을 무너뜨린 채 나는 그저, 미치고
싶다. 2010년 6월 15일 만다라 일기 中 4. Say Hello to
Haja! 2010년 2월 2일, 달리는 열차 안에서, 엄마께서 조심스럽게 내게 얘기를 꺼내셨다. 알고 지내던 한 교무님께 내 이야기를 했더니 하자학교에 대한 소개를 들었다고 하셨다. 조한혜정 교수님에 관한 이야기, 학교에 관련된 대학이야기, 학교에서 하는 활동이야기 등 들리는 내용들을 모두 알아들을 순 없었지만 이제야 작은 실마리를 잡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집에 돌아와 학교 홈페이지를 찾아 들어가 보았지만 어떤 학교인지 잘 알 수 없었다. 게다가 학교 문을 닫을 상태라 9월에 다시 신입생을 받을 것이라 했다. 또 이렇게 되는구나, 라는 생각에 힘이 빠졌다. 그 뒤로, 하자라는 공간은 한참 동안 내 기억 속에 머물다 점차 희미해졌다. 2010년 7월 15일,
우연히 자은교무님과 안부전화를 하시던 부모님에게 뜻밖의 말을 들었다. 교무님이 시간이 나셔서
나를 하자학교(그때는 학교이름을 정확히 잘 몰랐다)에 데려가
소개시켜 주시겠다고 하셨다. 그렇게 갑자기 찾아가게 된 학교를 살펴볼 새도 없이(공사 중이라 어수선했지만) 하자센터장님과 기획부장님을 만나 부모님, 교무님과 함께 앉아 간단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내 소개를 하고, 학교 시스템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나서 학교를 둘러보다 집으로 돌아왔지만 마음은 계속 그곳에 머물러 있었다. 그 뒤로 몇 주간 간간히 학교 홈페이지를 들락거리다 입학공지가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7월 지나고, 8월에 검정고시를 합격한 후 다음 영어시험 준비와
함께 잠시 휴식기간을 가지던 중 문득 작업장학교가 떠올라서 들어가 보았더니 드디어 입학공지가 올라와 있었다. 입학
설명회 당일 날이었지만 그래도 서류전형일 까지 날짜는 조금 남아있어서 다행이라 생각하며 그때부터 서류를 준비했다.
전 담임 선생님께 연락을 드리고, 한 장 한 장 지원서를 채워가면서 정말 무사히 통과했으면
좋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입학공지의 엄청난 조회수를 보고 미리 겁먹었는지도 모르겠다.) 서류전형의 마지막 날 아침 서류를 내러 혼자 학교에 갔다 왔다. 몇
일 뒤, 1차에 통과했다는 문자를 받고 2차 면접은 어떻게
준비를 해야 하나 걱정하다 결국 아무런 대책 없이 면접을 보러 갔다. 그냥 내가 지나온 시간과 생각들에게
솔직하자며 질문에 답했다. 생각보다 훨씬 편안한 분위기에서 진행된 면접이었다. 이야기 중 엄마께서 갑자기 눈물을 흘리셔서 당황스러웠다. 내가 좀
힘든 시간을 보내긴 했지만 남 앞에서 눈물을 흘릴 만큼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그때 질문을 하시던
분께서는 뭔가 이해를 하시는 듯 했지만 난 끝까지 그게 무엇인지 알아 낼 수가 없었다. 몇 일 뒤, 2차 합격 통보와 함께 3차 쇼하자 전형에 대한 공지가 올라왔다. 자신을 가장 잘 나타낼 수 있는 매체를 선택해서 5분 내외로 발표를
하는 것이3차 관문이었다. 글, 그림, 노래, 프레젠테이션
중 나는 가장 잘 나타낼 수 있는 게 무엇일까 한참을 고민하다 결국 위의 모든 것을 통합하여 보여줄 수 있는 나만의 영상을 만들어 보자 결심했다. 당시 한참 꽂혀있던 소설의 분위기를 그대로 영상 콘셉트으로 정하고, 시나리오를
짰다. 나의 프로필, 관심사, 취미 등을 고려해 화면을 구성하고 영상을 편집했다. 그리고 그 영상을
발표하는 프레젠테이션을 만들고 대본을 썼다. 처음 만들어 보는 영상이라 수많은 시행착오의 연속이었지만
영상을 만들고 쇼를 준비하는 내내 흥미를 느꼈다. 드디어 31일, 준비한 것들을 보여주는 날이 왔다. 정해진 시간보다 훨씬 일찍 도착해
대본연습을 했지만 정작 내 차례에는 쓸데없이 너무 긴장을 했던 것 같다. 준비한 것을 충분히 보여주지 못한 것 같아 속상했다. 그곳에 모인 사람들 모두 처음 보는 얼굴이라 누가 지원자이고 누가 학생인지 구별할 수 없었지만, 참
다양한 사람들이 있었다. 떨리는 목소리로 노래를 들여준 사람, 자신의
이야기를 음악과 함께 낭송한 사람, 유쾌하고 거침없는 모습으로 담담하게 시를 읊어준 사람, 춤과 노래를 좋아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꽃의 모양과 향기가 제 각각이듯, 그 사람들에게서도 모두 다른 향이 나는 것 같았다. 그 안에서 난
어떤 모양과 향기를 가지고, 어떤 이야기를 써내려 갈 수 있을지 기대가 되었다. 2010년 9월 4일, 나는 그렇게 하자작업장학교를 만났다. 5. 내가 만든 서툰
울타리를 부수고, 넓은 들판에서 길을 잃었다. 대안학교인 작업장학교에 입학한 후, 나의 생활은 다시 학교를 중심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아침 열 시부터 저녁 열 시까지의 시간을 학교에서 보내면서 그곳의 생활에 적응하는 기간을 가졌다. 영어가 아닌 글로비쉬를 배우고, 점심시간 오도리(춤) 시간을 가지고, 종이컵이나
일회용 수저를 쓰는 대신 텀블러와 수저집을 들고 다니기로 하고, 매주 토요일에는 모두 모여 한 주 동안
준비한 시나 노래, 음악, 이야기 등을 나누는 포잇트리 아워를
가지고, 매체 수업을 들으며 문화 작업자로써 익혀야 할 기본적인 툴을 배우기도 하며 내가 의미 있다고
생각만 했던 일들이 눈 앞에서 진행되는 것을 보았다. 하자는 내게 또 다른 세계처럼 느껴졌다. 아무도 대학이 얼마나 이상적인 곳인가에 대해 역설하지 않았고, 암묵적으로
치열하게 전개되는 경쟁도 없었다. 그 대신 타 들어 가는 숲에서, 모든
동물들이 도망갈 때 작은 부리로 물을 날라 불을 끄려 하는 벌새 크리킨디의 이야기를 퍼뜨리며 세계를 구하는 시인이 되자고 약속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세상을 구원하는 한 사람의 영웅이 아니라, 각자의 위치에서 함께
머리를 맞대고 협력하는 시인들. 아직도 밖에서는 수많은 학생들이 좁은 책상에 코를 박고 저 혼자 잘되어
보겠다고 눈물 나는 사투를 벌이고 있는데, 세계를 구하는 시인들이라니.
일반학교를 나온 지 일년도 채 되지 않은 나에겐 꿈같이 아득한 이야기였다. 학교를 마치고
밤 늦게 집으로 돌아가면, 야자를 마치고 하교한 동생과 강의와 상담을 끝내고 학원에서 막 퇴근하신 부모님이
계셨다. 싫든 좋든 늘 자연스럽게 둥근 식탁에 둘러 앉아 하루간에 있었던 이야기를 나누던 우리 가족인데, 난 갑자기 말이 하기가 어렵다는 느낌을 받았다. 학교에서의 자유롭고
새로운 공기의 흐름에 익숙해져 있다 집으로 돌아와 ‘장녀’로서의
책임감과 다시금 들려오는 공/사교육 현장의 냉혹함에 온몸이 다시 뻣뻣해졌다. 늘 남는 건 하나의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였다. 난, 어느 쪽인 걸까? 시간이 날 때마다 엄마는 내게 원하는 큰 꿈을
이루기 위해선 각고(刻苦)의 노력을 쏟아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늘 스스로와 경쟁하여 최고가 되라 하셨고, 힘에 부칠 때면 마음을
독하게 먹고 다시 일어나야 한다고 했다. 나도 그 말을 당연하게 여겼다. 인생이 즐기는 것이라 하면 성취를 위해 노력하는 것을 즐기면 되겠다고 생각했다. 허비되는 1분 1초가
아까워 어딜 가든 영어단어를 외웠거나 읽을거리를 가지고 다녔고, 끝없는 경쟁 속에서 흔들리지 않겠다
다짐하고 진짜 적은 내 안에 있다 생각하며 앞만 보고 달려갔다. 배우는 것이 재미있었고, 시험을 쳐서 좋은 점수와 코멘트가 적힌 성적표를 받는 것도 좋았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그게 마음대로 되지 않았고, 노력한 만큼 돌아오는 것도 없었다. 곧 그런 것들은 지겨워 졌다. 하지만 넓고 화려하게 살고 싶은 꿈은
변하지 않았다. 큰 변화를 만들고 이끄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하자에서
만난 사람들이 말하는 슬로라이프, 소박한 삶, 마을과 부족이야기에
충분한 매료되었지만 내가 원하는 인생의 스토리로는 부족하다 생각했다. 소수의 가진 자들에게 지배당하거나
그들이 가진 힘에 휘둘리느니, 차라리 내가 가진 자가 되어서 가지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 일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사회에서 떨어진 비주류가 되어 ‘남들이
어떻게 볼진 몰라도 나는 행복해.’와 같은 말을 하며 살고 싶지도 않았다. 내가 원하는 라이프스타일은 하자에서 생활하면서 더 많은 내적 갈등을 겪게 만들었다. 사회의 ‘승자’와 ‘루저’사이에서 난 어떤 존재이며, 또
어떤 역할을 하고 싶은지에 대한 고민은 더 많은 배움과 만남, 대화를 통해 더 깊어져야 할 것 같다. 6. 어딘가에서부터, 무언가를, 누군가와 함께 한다는 것 작업장학교에서는 내가 평소에 막연하게 여겼던 주제들에 대해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문제와 직면할 수 있도록 한다. 나뿐만 아니라, 우리 나라의 많은 학생들은 당장 마주봐야 할 일을
먼 훗날- 대학에 합격하고 나서, 혹은 졸업하고 나서, 취직하고 나서 등등- 로 미루는 것에 더 익숙해져 있다. 누군가의 말처럼, 물에 들어가지 않고서는 수영하는 법을 익힐 수
없다. 그 사실이 이곳에서는 피부로 느껴졌다. 상위 0.01%의 힘과 권력이 아니어도, 내(혹은 우리)가 지금 이 자리에서 시작 할 수 있는 것들이 있었다. 그 첫 번째 예로, 3개월 내내 진행되었던 평화워크숍이 있다. 평화 워크숍은 어깨동무의 이마까라상 (최혜경 선생님)과 함께 시작한 평화워크숍은, 조진석 선생님, 평화 운동가이신 마사키 다카시 선생님, 이탈리아의 평화운동가 브루노, 평화박물관의 김영환 선생님을 거쳐 다시 이마까라상의 워크숍으로 마무리 되었다.
나는 평소 우리끼리 모여 앉아 평화에 대한 생각을 나누고 의논하는 것은 실질적으로 아무런 소용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평화에 대한 고민이나 생각은 멈추지 않았지만, 나는 꽤
오랫동안 평화와 관련된 문제들을 나의 인생의 범위에 끌어들이지 못하고 거리를 둔 채 관망하는 관찰자의 입장에 서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브루노와 함께한 3일간의 워크숍은 인상적이었다. 마침 일어난 연평도 폭격을 계기로, 평화는 이제 남을 위해 ‘지켜져야’ 하는 것이 아닌 나와 가족을 위해서라도 ‘지켜야’ 하는 것이 되었다. 만일
내가 혼자였더라면 이쯤에서 생각하고 멈추었겠지만, 내 주위엔 같은 고민을 하는 동료들이 있었다. 서로 어떤 시선을 가지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나누면서 평화에 대한 막막함을 조금씩 구체화시킬 수 있게 되었다. 평화를 여러 관점에서 바라보고, 또 수많은 이해관계가 얽혀있음을
알고, 이에 관련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우선 서로의 언어를 알아야 한다. 평화는 절로 얻어지거나 전쟁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행동하는 것임을 배웠고, 작더라도 함께 시작한 우리의 또는 움직임이 변화 그 자체가 될 수 있음을 알았다. 두 번째 예로는 김만리 선생님을 중심으로 구성된 타이헨 극단과 함께했던 쿠로코 워크숍이다. 신체장애인들이
쿠로코의 보조로 무대에 서는 순간 장애인이 아닌 배우로써 예측되지 않는, 혹은 통제불능의 신체로 예술적
표현을 한다는 것은 내게 큰 놀라움이었다.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이라는 뜻의 ‘쿠로코’는, 도움이 필요한
장애인들에게 손길을 내미는 정상인인 봉사자가 아닌, 연극의 무대 위와 뒤에서 장애인인 배우와 함께 소통하며
극을 만들어 나가는 비장애인인 파트너임을 이해하는데 많은 생각과 시간이 필요했다. 즉 쿠로코는 연극에
있어 필수적이지만 무대 위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보이지 않는 어둠의 일부가 되어 배우를 빛나게 해주는
것이다. 타이헨 극단의 연극은 쿠로코와 쿠로코 사이의 소통, 쿠로코와
배우와의 피드백, 쿠로코와 연출자 사이의 이해, 배우와 연출자간의
소통이 원활히 이루어질 때 비로소 완성된다. 한국인과 일본인, 장애인과
비장애인 간의 언어적 소통이 생각보다 쉽지는 않았지만 서로 이해한 바를 짚어가며 차근차근 대화를 했다. 쿠로코는
배우가 연기에 집중할 수 있도록 보조를 하고, 무대 위로 등장시키거나 의상을 갈아 입히는 기능적인 역할을
수행 할뿐만 아니라, 쿠로코로써 가져야 할 마음가짐-예를
들면 소통의 중요성을 이해하는 것-에 대해 다른 쿠로코들과 함께 느낌과 경험을 공유하며 공부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시간이 갈수록 쿠로코로써 연극에 참여한다는 것에 더 큰 책임감을 느꼈다. 아직 작고 미약할지 몰라도, 나는 지금부터
시작할 수 있는 일들을 미루지 않고 행동하는 것이 의미 있다는 걸 차차 배워가고 있다. 깊은 산골짜기의
작은 물줄기가 모여 시냇물이라는 흐름을 만들고, 그 물의 흐름이 바다로 전해져 커다란 파도를 일으킬 수 있다는 당연하지만 실감하기 어렵던 그 사실이, 조금씩 현실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7. 십대 문화 작업자라는, 조금은 생소한 표현 지난 3개월 동안 문화 작업자로서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기초적인 수준의 수업(영상언어에 대한 이해, 디자인, 사운드
엔지니어링)을 들었다. 그 중 영상언어 수업은 가장 흥미로웠다. 영상은 화면, 음악, 연출, 시나리오 등 여러 요소가 조화를 이루어 만들어 지는 종합적인 예술이라는 점에서 처음부터 재미를 느끼고 있었다. 거기에 편집이 가지는 의미, 영상문화의 역사와 가능성, 영화에서의 continuity, 미장센과 몽타주의 효과, 클로즈업과 롱 테이크의 차이, 나레이티브 영화와 이미지 영화의 차이
등을 들여다 보니 예전에는 그냥 즐겨보던 영화도 다른 시선으로 감상하게 되었다. 수업의 궁극적인 목표(GOAL)는 자신을 대표할 수 있는 것들을 통해 자화상을 영상의 형태로 만들어 보는 것이었는데, 나 같은 경우 불면증 상태의 나와, 머릿속에 떠다니는 공상을 주제로
영상을 만들고 있다. 디자인 수업에서는 데코레이션이 아닌, 목적이
있는 디자인에 대한 수업을 했다. 손을 풀기 위해, 그리고
디자인에 대한 각자의 감각을 키우기 위해 매일 데이북을 스케치, 스크랩, 낙서, 콜라주, 그림
등으로 채워 나갔고, 페차쿠차, 서울 미디어 시티 등 의
전시회를 다니며 작가의 의도를 읽기 위한 훈련도 했다. 여러 작가의 작품을 감상하다 보니 재미있는 것이
하나 있었다. 서울 미디어 시티에서 정말 난해해서 본 것을 후회한 한 작가의 비디오 아트를 감상한 후(다 보지 않고 나오긴 했지만) 팜플렛에서 그 작품의 관한 설명을 읽었는데, 그 작품의 의미, 철학 등이 적혀있었다. 어쩐지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같다는 느낌이었다. 아직
작품을 받아들이거나 이해하는 나의 세계가 좁아서 그런 걸까.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의 작품만 감상해도
되는 건지, 아니면 좋고 싫고를 떠나 억지로라도 다양한 스타일의 작품을 접해보아야 하는지 모르겠다. 한편, 디자인 수업에서는 또 일러스트레이터를 다루는 툴 수업도 했는데
아직 나는 툴을 사용하는 것이 불편하다. 포토샵을 더 배우고 싶었지만 일러스트레이터를 익히다 보면 포토샵을
다루는 것도 수월해 지지 않을까 싶다. 학교에 들어 간지 42일째, 팀을 결정하던 날 나는 공연팀에 들어 가고 싶다고 말했다. 무대 위에 서는 게 좋았고, 음악을 통해 공연을 하는 사람들과, 또 공연을 감상하는 사람들과 연결될 수 있다는 걸 상상만 해도 가슴이 벅찼다. 다만 그전까지 내가 해야 하는 것과 더 잘 할 수 있는 것에만 집중을 하다 보니 정작 하고 싶은 것에는 다가갈 용기나 여유를 찾지 못하고 매번 이러 저리 미루기만 해왔다. 음악은 언제나 내게 망설임이었다. 정말 하고 싶지만 재능이 없다, 시간이 부족하다, 기회가 없다는 뻔하고 소심한 이유들로 늘 피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참 바보 같았다. 방송이나 신문에 나오는 신동들과 나를 비교하면서, ‘봐, 음악이나 공연은 저런 얘들이나 하는 거야’ 라고 생각하며 마음을 눌렀다. 그런데 히옥스가 언젠가 얼마나 좋은 연필을 가졌냐 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 연필로 어떤 글을 쓰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말을 하셨다. 그 말에 머리가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왜 진작 그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나는 한 번도 음악이나 공연으로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지 생각해 본적이 없었다. 항상 음악을 즐기는 것에 머물러 있었다. 그래서 공연팀으로써 무슨 음악을 하고 싶은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지, 가고자 하는 방향은 어느 쪽인지 등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때 무슨 말을 해야 할 지 몰라 그저 가만히 앉아 듣기만 할 때가 많았다. 나는 아직 내가 음악을 통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잘 알지 못한다. 나는 그저 음악으로 내가 느끼는 감정을 표현할 수 있으면 좋겠다 생각했을 뿐이다. 음악과 사회를 연결 짓는 사람들 틈에서, 난 내가 한 팀의 일원이라는 생각을 하기가 어려웠다. 우리 팀이 어떤 방향으로 갔으면 좋겠는지를 생각하기도 어렵다. 실제로 나를 포함한 9월 신입생들은 그 전 사람들이 하고 있었던 것을 배우고 익히는 것을 해야 하는 사람들이 맞다. 하지만 공연팀의 경우 그 갭이 더욱 막막하게 느껴졌다. 함께 공연을 하기엔 우리의 바탕이 너무 부족해 보였고, 팀으로서의 호흡도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늘 바쁜 학교일정으로 연습시간은 턱없이 부족했다. 공연팀은 촌닭들이었을 때부터 주로 브라질 음악을 했다고 한다. 왜 하필 브라질 음악인지, 다른 음악을 할 수는 없는 건지에 대한 질문도 있었다. 학교에 입학한 지 3개월이 지났지만 공연팀에는 아직 들어 온지 한 달 정도 밖에 된 것 같지않다. 우리는 아직 서로의 목소리를 모르고, 차차 알아가는 중이기 때문이다. 앞으로 공연팀에서 나는 어떤 역할을 어떻게 수행할 것인지, 또 어떻게 내가 느끼는 갭을 좁혀 나갈 것인지 걱정도 되지만 기대가 더 크다. 조급함을 느끼는 건 그만큼 하고 싶다는 마음이 커서 그런 게 아닐까 생각한다. 8. 판에서 노는 법을
배워가고 있다. 나는, 더 잘 놀 수 있을까? 3개월 동안의 생활은, 내가 겪어왔던 그 어떤 3개월보다 바쁘고 정신 없었다. 9월에는 도심 속의 한가위를 즐기기
위해 열었던 달맞이 축제와, 학교의 시작과 포부를 알리려 열었던 작업장학교 시즌2의 시작파티, 세 가지의 매체 수업과 인문학 워크숍(평화, 기후, 생태) 등의 시작이 있었고, 10월에는 온 하자를 축제와 에너지와 세계
각국의 ‘부족’들로 채웠던 제2회 서울 청소년 창의서밋, 처음 장애인 분들과 연극의 장면을 만들기
위해 소통이란 걸 해봤던 타이헨 쿠로코 워크숍, 팀으로 작업하는걸 실감할 수 있었던 따비에 창단식, 율면에서의 농활 체험과 그 외의 크고 작은 일들이 있었다. 11월, 12월도 마찬가지로 바쁘고 꽉 찬 한 달을 보냈다. 그 동안 보고
느낀 것도 많았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 기간 동안
충분히 주위 사람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관찰하고, 또 내가 무슨 일을 할 수 있을지 생각해 보았다. 그 결과 더 잘하고 싶은 것들이 있었다. 바로 내가 가진 영어구사
능력을 이용한 글로비쉬 수업진행과 통역, 그리고 사회자로서 말하기, 코멘트
하기다. 글로비쉬 수업과 통역을 맡는 것은 영어공부가 아직 부족한 내게 큰 부담으로 다가왔다. 1차 입학서류를 쓸 때도, 2차 면접을 볼 때도, 3차 쇼하자를 할 때도 영어에 익숙하다고 자기 PR을 하곤 했지만
사실 그건 영어=경쟁력이라며 무조건 잘한다고 우기라는 주위 사람들의 한결 같은 조언이 있었기 때문이다. 모든 언어가 그렇겠지만, 영어공부는 하면 할수록 어렵고 난해하다. 한국에 들어 온지 3년이 지나고
4년째가 되자 잘 잡아가던 가락을 놓쳐버린 것 같다고 느낄 때가 많고, 그럴 때 마다 영어공부에
대한 욕심은 더 커진다. 나는 준비되었다고 느끼지 않으면 어떤 일이든 시작하는데 어려움을 느낀다. 그래서 글로비쉬 수업을 하거나 통역을 하면서 더 큰 부담을 느끼는 걸 지도 모른다. 글로비쉬 수업 준비를 할 때면 늘 혼자 영어 실력을 더 쌓은 후 가르치는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물에 들어가지 않고서는 수영을 배울 수가 없다. 해도 해도 부족하게 느껴지는 것이 준비라는 것 또한 안다. 그러니
좀 더 자신을 가지고 편안한 마음으로 그 일에 임할 수 있게 되면 좋겠다. 그와 동시에, 내가 만족할 수 있을 정도의 영어 실력을 갖추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부분들이 있지만 시간적 여유를 찾지 못해
일단 미루는 것으로 타협하고 있는 듯 하다. 9. 시냇물이 굽이굽이 흘러 마침내 바다가 될 때까지 나는 서울 흑석동에서 태어나, 부산으로 내려갔고, 그 사이 유럽에서 잠깐 생활을 하기도 했다. 그 후 다시 부산에서 세 개의 학교를 거쳐 2002년 인도 방갈로르에서 1년, 뉴 델리에서 4년
살면서 또 세 번의 전학을 했다. 그러다 2007년 한국에서 2개의 학교를 다니다 9번째 학교인 작업장 학교로 오게 되었고, 어느새 이곳에 온지 3개월이 지났다. 나는 여태까지의 생활이 굽이쳐 흐르는 시냇물 같았다고 생각한다. 좁았던
물줄기는, 앞으로 더 많은 곡선을 그리며 더 넓고 깊어질 것이다. 그
동안 여러 곳에서 적응하고 생활하며 참 많은 것을 배웠겠지만, 이 곳만큼 짧은 시간 동안 많은 생각과
흥미로 가득 했던 곳은 없었다. 잠시 떠오른 생각들을 그대로 흘려 보내는 것이 아니라, 계속 꼬리에 꼬리를 물고 더 큰 생각으로 확장시킬 수 있는 힘을 키워 나가고 있는 것 같다. 뿐만 아니라 생태와 기후변화, 평화, 인문학의 주제들이 따로 떨어진 문제가 아니라 통합되어야 한다는 점 또한 내게 큰 위안이었다. 아직 그 주제들을 어떤 식으로 연결해야 하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같이
사는 법을 깨우치고, 작더라도 함께 시작한 변화의 의미를 알아가고, 혼자
상상하는데 그치지 않고 같이 꿈 꾸고 행동하는 것은 더 이상 내게 낯선 것이 아니게 됐다. 하지만 익숙해지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 된다는 것 또한 안다. 이제야 비로소 신입생이라는 역할은 벗어놓을 때가 되었음을
느낀다. 지난 3개월 동안 내게 일어났던 많은 일등 중, 아직 이 글에 쓰지 못한 것들도 있지만, 앞으로 차차 풀어나가면
되지 않을까. 한참을 걸어온 것 같지만, 이제 겨우 조금
지나왔을 뿐이니 말이다. 오랫동안 정리하지 못해 질질 끌고 다녔던 나의 멀지 않은 과거를 이젠 떠나
보낼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앞으로 다가올 일들을 위해, 지금을
살고 싶다. ![]() 당신과 내가 잠시나마 함께일 때의 기억.
여전히 '우리'는 아니지만, 당신과 내가 함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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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가 내게 물었다.
‘What’s happening to your life?’
나는 먹먹해진 목을 가다듬고 어깨를 으쓱하며 태연히 대답했다
‘I don’t know.’
정말, 정말로 알 수가 없어서, 그리 대답해버리곤 다시 벽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