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와 아울러 살아가기 위한 탐색>


스스로가 하자작업장학교에서 보낸 시간을 되짚어보니 나는 하자작업장학교에서 3년 가까이 시간을 보내고 있다. 하지만 시간을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이 이 학교에서 보냈다고 '뛰어난 선배님'의 위치에 자리 잡은 것은 아니다. 학교를 여는데 함께한 몇 명은 Non-stop team 혹은 making school team라고 부르며 학교가 어떤 과정을 거쳐 시즌2까지 이르렀는지를 기억하고 작업장학교의 여정에 선두로 선 사람일 뿐. 이 학교의 학생이라는 것은 내 또래들이고, 친구들이며 동료 작업자가 될 사람들이다. 

이번 하자작업장학교 시즌2에서는 누구도 우위를 가리지 않고 평등한 위치에서 함께 배워가기로 한 약속이 '공통의 경험'을 하며 '소통의 언어'를 만든다. 이 학교에서 말하는 개인의 언어란 암묵적으로 통용되는 '말하는 스타일'과 연결지점이 있다. 그리고 분명히 다른 점은 말하는 스타일을 기반하는 것은 스스로가 어떤 부분에 집중을 하고 있는지, 그것에 대해서 나는 어떤 말이나 어떤 것들을 이용하여 표현하는지에 있다. 이것이 내가 경험한 하자작업장학교에서 말하는 언어이고, 어떻게 말하는지는 그 다음의 순서이다. 

지금에 와서 꺼낼 수 있는 말이지만, 그 공감 가능한 언어와 생각이라는 것은 시대의 변화와 함께 달라진다. 시대의 변화의 행렬에 따라오지 않는 것들은 진부하게 만들어 버리는 만큼 변화라는 것은 무서운 것이라 생각한다. 그런데 21세기에는 급 변화하고 있다. 우리는 가장 큰 고용실업 문제의 시대, 기후변화의 시대, 자연을 도시로 뒤집어 엎어버리려는 시대에 살아간다. 기후변화가 무엇이냐고 묻는, 혹은 묻지 않는 내 친척이나 가깝지만 먼 주변 친구들을 보면 정말 이건 위기 중 위기가 아닌가 생각한다. '엉덩이에 불이 났는데 뜨거운 것을 느끼지 못 한다'는 어느 내 친구의 표현이 알맞은 걸까? (송아지가 더 내 친구보다 사태를 더 잘 느낄 것이다.) 기후가 이상 현상을 보이고 있다는 것은 어느 때가 가을인지 봄인지 그 경계는 느슨할 정도이며 여름에는 지나치게 덥고, 겨울에 지나치게 춥다. 그리고 '왜 이러지?'라고 의문을 품으며 버티거나 에어콘이나 히터로 일시적인 문제해결을 하며 한 시름 놓으면 이것이 왜 이 지경까지 되었는지에 대한 문제의식은 다음에 찾아오기를 기약한다. 

이 시점에서 나는 두 가지 뉘앙스의 '어떻게 하면 좋지?'를 생각한다. 정말 어떻게 하면 좋을지 당황스러움도 경험하고, 의식하며 어떻게 하면 좋을지 생각하고 시도해본다. 그 여정에는 안데스 산맥의 원주민들에게 내려오는 ‘세상에서 가장 작은 새 : 크리킨디’와 산업개발로부터 스스로의 마을을 지키고 떠들썩하게 대작전을 벌이며 즐겁거나 슬픈 일에도 서로를 북돋는 위로하는 축제를 벌일 수 있고 떠나간 이들도 반갑게 맞이할 수 있는 폼포코 너구리 대작전의 너구리도 있으며 많은 이상적 형태들이 이 학교를 지속가능하게 만든다. 그러나 이상과 현실의 갭을 줄이기란 쉽지 않은 것이니 만큼 새해가 다가오기 전에 중간점검을 해보자. 지난 3개월간 어떤 학교에서 무엇을 해왔는지, 적어도 1년 이상 함께 할 동료들과 이 학교를 이해 가능하고 설명 가능한 학교로 만들 것인지.


[다른 10대에게도 좋은 학교를 만들자]

'자기주도적 학습'과 '프로젝트학습(learning by doing)을 학습 원리로 2001년 9월 10일에 시작한 하자작업장학교가 지난 2010년 3월 28일에 마지막 학생들의 수료식과 동시에 학교의 문을 닫았다. ’스스로를 업그레이드하자’, ’하고 싶은 일 하면서 하기 싫은 일도 할 거다’, ‘일 하면서 배운다.’ 등 당시의 슬로건은 그대로 지속하면서 경험과 재능이 개인에서 끝나는 것이 아닌, '대안'이라는 다른 경험의 판에서 학습해온 사람들이 공공성의 영역에 몸을 담는다면 어떨까? 하는 발상이 오늘날 이 학교를 다시 개교하게 된 가장 큰 이유이다. 내가 학교 만들기 팀에 가담하기로 한 결심한 가장 큰 이유는 내가 대안 중학교를 다닐 나이부터 지금까지 일반학교를 선택하지 않은 이유가 일반적인 제도에서 '탈'했지 학교라는 공간에서 '탈'했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하자작업장학교에서 내게 필요한 지식과 정보, 경험들을 스스로 재구축하는 작업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작업을 할 수 있는 공간은 어디일까 생각하면 이미 만들어진 곳은 없다. 그것이 내가 이 학교 만들기 팀에 가담하기로 한 결심한 가장 큰 이유이다.

이 기간 동안 우리는 많은 것들을 실험해왔다. 재개발, 불공정거래 등에 의해 억울하게 위기에 빠진 홍대의 두리반에 가서 그곳의 축제에 스태프로 조력하기, 4대강 반대/문수스님 추모공연, 성년식을 맞이하여 20대가 된 하자의 주민들을 축하하기 등이 있다. '사회'라고 말해왔던 그 현장들은 정말로 어떠한지 경험하면서 내 주변과 세계가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에 대해 의식하려고 노력했다. 더 이상 신경 쓰지 않는 성년식이나 어머니들, 외국인들, 이주민들 등의 마음을 무겁게 만드는 추석이라든지 일상의 회복을 시도하고 사회적 참여라는 것은 무엇인지에 대해 체감하려고 했던 시도는 이번 시즌2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내가 1년전 '청소년을 위한 시민문화 워크숍'이라는 강의에 참여하면서 그때도 우리 사회를 얘기했지만 당시엔 주워들은 것, 검색해서 찾은 지식들을 기반 하여 말을 했지만 분석과 관찰로만 '사회'를 말하는 것은 단호히 말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다. 나는 이제야 조금 입이 텄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학교를 만든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 과정 중에 개인적인 사정으로 어쩔 수 없이 그만두어야 했던 멤버도 있고 각자의 이해범위에 미치지 않은 일들도 많아서 고생하고 스스로의 능력 부족을 실감하며 조급했던 적도 있다. 심신의 유지를 위해서 생활의 리듬도 가꾸어야 하지만 해야 하는 일들이 일이 쉽지 않아 이것도 저것도 신경 쓰기 어려운 상황도 많았다. 내 경우에는 '이럴 때 일수록 크리킨디의 마음을 잃지 말자!' 라고 스스로를 다독여 봐도 '크리킨디는 고작 그것밖에 못 했어'라고 되돌아오는 심각한 상황도 적잖게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학교는 약 5개월간의 준비기간과 함께 새로운 화두를 가지고 학교를 열게 되었다. 

예나 지금이나 이 학교를 설명하기란 참 어렵다. 짧게 설명하기에도, 길게 설명하기에도 쉽지 않다. 그런데 어쩌다가 '독수리 오형제를 키우는 학교이다'라고 설명하게 되었다. 우연찮게 발견한 표현이지만 참 재미있는 발상이다. 이 시대에 선뜻 세상을 구하려는 영웅은 없다. 독수리 오형제사이에는 각자의 포지션이 있고 동료관계가 있으며 뜻을 모을 수 있는 의지와 사건을 타개하는 지혜가 있다. 그리고 연령대는 청소년이다.(..농담이다.) 아직도 함축적인 내용을 내포하는 단어를 찾고 있지만 아직까지는 독수리 형제들에 가깝다. 개교한지 근 3개월 정도밖에 안 되었지만, 어떻게든 학교가 굴러가고 있다. 하지만 3개월의 과정중간에 튕겨져 나가는 학생들이 있는 것을 보면 아직 이 학교의 정체성은 우리가 마음먹은 만큼 덜 구체적으로 드러나고 있는 것은 아닐지도 생각해본다. 그리고 아직도 내가 다니기 적당한 학교인지도 고려하면서 작업장학교 시즌2는 더 짜임새 있게 만들어야 할 필요가 있다.


[크리킨디 학교]

시즌2로 접어드는 순간부터 만나는 사람들에게 크리킨디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 대다수는 감동했다. 무언가를 할 수 있는 부분을 찾는 다는 것, 설령 그 부분이 협소하고 미미한 것이라도 과정을 거치는 것. 감동의 지점은 아마 '스스로의 능력을 재고 시작하기에 앞서, 우선은 할 수 있는 것을 한다는 것'이 아닐까 짐작한다. 불이 난 숲은 내 숲임과 동시에 모두의 숲이며 불이 다른 곳까지 번져나가기 전에 막는 것, 이것이 자기근거와 동기를 부여하고 마음을 붙이게끔 만드는 것 같다. 이 과정에는 선뜻 누구라도 하기 어려운 일을 찾아 주도적인 참여에 마음을 쓰는 것이 중요했다.

그런 목표는 좋다. 하지만 크리킨디의 마음을 유지하는 것은 나에겐 쉽지 않았다. 한 가지 예로 들자면 지난여름 7월 말부터 8월 초까지 작업장학교는 종로구의 쪽방촌에서 폭염이 노인건강에 끼치는 영향이 어느 정도일지 전문연구팀을 도와 2주일동안 온도조사를 했다.  쪽방이란 겨우 한 사람이 누울 수 있는 정도의 작은 방을 의미한다. 또한 창문도 없고 공동부엌, 공동화장실, 공동샤워실을 써야 하는 그런 방들이고 좁은 골목을 따라 따닥따닥 옆으로 붙어있거나 위로 쌓여있는 그런 집들이 모인 장소가 바로 쪽방촌이다. 보통 폭염주의보가 발령되면 집 밖에서 나오지 않는 것이 보편적인 행동요령이지만 그곳은 되려 집 안이 더 뜨거울 정도로 쪽방촌 지역은 매우 뜨거웠다. 그래서 쪽방촌 같은 특정 지역에는 주의보가 발령될 때 어떤 다른 사항을 넣어야 한다든지, 어떤 복지가 더 필요한지 등 개선할 방법을 찾고자 했다. 일정 기간, 일정 시간대에 찾아가 온도를 측정하고 돈의동 사랑의 쉼터에 이 프로젝트에 참여여부를 확인한 65세 이상 어르신들의 혈압과 체온 측정을 했다.

이 온도재기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는 이른 아침이나 뜨거운 낮이나 할 것 없이 술 취한 아저씨들을 종종 마주칠 수 있었다. 그분들이 화내고 싸우는 소리를 항상 들을 수 있었고 때로는 거동이 불편한 어르신들의 집 앞에서 하루 종일 난동을 부리는 아저씨들도 있었다. 그런 소리를 하루 종일 듣고 있어야 하는 어르신들의 상황을 조금씩 알게 되면서 나는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는 공황상태에도 빠지곤 했다. 어느 하루는 이 기간 동안 자주 마주치던, 때와 장소를 구분하지 않고 거의 만취상태인 아저씨와 또 대면하게 되었다. 돈의동 쪽방촌은 복잡한 골목길로 되어있어서 돌아가도 종종 마주칠 수 있는 가능성이 높다. 한 번은 시간이 없어 우회하지 않고 그대로 직진을 했는데, 결국 불편한 자리를 할 수 밖에 없었다. 사실 이 프로젝트 팀이 돈의동에 자주 들락날락 거린다는 것은 그 대상이 아닌 다른 분들에게는 눈엣가시였다. '누구는 도와주고, 누구는 도와주지 않고'라고 말 하면 나로선 당연히 '우리측에서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서 뭐라 말씀드릴 것이 없네요.'라고 대답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마찰의 지점은 여기였다. '너는 뭐냐?'고 윽박지르는 말에 나는 충격을 받았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중이고, 특정 다수를 위한 것이 아닌 불특정 다수와 내 주변을 비롯한 세계를 구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정말 나는 무엇인가? 옆 사람도 못 구하는 처지에서 세계를 구하려고 하니 말이다. 그렇다고 이런 의도를 그분께 설명해드리려니 소귀의 경 읽기에 가깝고 시간도 여의치 않아서 애써 상황정리하고 자리를 뜨려 했지만 자칫했다가는 폭력사태가 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갑자기 나는 나에게 대체 왜 그러는지 모르는 아저씨에 대한 혐오감과 한심함이 느껴져 화가 나 그 자리에서 그대로 노려보게 되었다. 사태의 심각성이 점점 불거지면서 우리가 자리를 뜨는 것으로 일단락 마무리 되었지만, 나는 그 날의 리뷰 시간 때 차마 그때의 감정에 대한 솔직한 심정을 털어놓지 못 했다. 왜냐하면 날마다 어르신들과 친해지려고 노력했고, 크리킨디의 마음을 갖고 행동하자는 마음가짐이 누군가를 함부로 미워해서는 안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세계시민으로서 자라나기를 원하며 이해의 범위를 넓혀가려고 노력하는데 고작 옆 사람도 이해 못 한다는 것은 참을 수 없는 괴로움이었다.

마지막 날, 여느 때와 같이 반대편 골목으로 우회해서 들어가는데 다시 그 아저씨와 대면하게 되었다. 잔뜩 긴장하고 경계했다. 그런데 "나 같은 놈은 쓰레기니까 신경쓰지 말고 노인분들이나 잘 돌봐드려."라고 했다. 그대로 뒤돌아서는 그분을 보면서 수많은 감정이 교차했다. 다행이라서 마음이 편한 것이 아니었다. 내가 미워했던 그 아저씨에게 미안해지고 스스로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을 보면서 마음이 무거워지면서 무어라 형용하기 어려운 감정이었다. 쪽방촌을 드나들면서 우리는 "동정심"pity과 "공감"empathy를 혼동하지 말자. 그런 얘기를 나누기도 했지만 쪽방촌의 안에서 이 두 단어가 도저히 구분이 안 되고 "인류애"를 가지려고 생각했는데 한 인간에 대한 증오심조차 해결해내지 못했다는 생각에  혼돈과 패닉 상태가 되어버렸다. 이런 결과에서 오는 나 자신에 대한 초라해지는 마음은  내가 하는 일마다 '고작 이것밖에?'라고 생각하게 만든다.

나는 이런 슬픔을 넘는, 고통을 넘는 문화와 일상을 갖는 사람이 되고 싶다. 이 말은 술을 먹어 취하여 망각하고 싶은, 그런 고통의 회피의 의미가 아니다. 어떤 슬픔을 넘는다는 것은 해소할 줄 알고 이해하는 것이다. 작업장학교가 가는 길에는 알고 가야할 고통과 슬픔도 있다. '할 수 있는 일을 한다.'는 이 신조가 '센 경험'을 하게끔 만들어 곤란하게 만들 때도 있지만 '공익'이라는 일을 하는 한 불가피한 상황은 외면하지 않겠다. 이런 크리킨디 학교에서 어떤 수식어가 붙은 크리킨디가 되고 싶은지는 아직도 고민이지만 한 가지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한 가지 일에만 맹목적으로 하는 사람이 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옛날부터 아버지가 '대학을 가지 않아도 대학에 갈 수 있을 만큼 공부해라'라고 누누히 말 했다. 기술에 매몰하는 테크니션이 되지는 않지만 그만큼 노련하고 능력이 있는 사람이 되어 정말 하고자 하는 일에 마음을 쓰고 싶다. 


[하나의 '좋은 일'을 하기 위해 얼마만큼 노력을 해야 하는가?]

('무브'라는 별명에 부여한 의미는 '막연하게 멈춰 있는 것보다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하자작업장학교에서 스스로의 변화된 모습을 기대하는 모습을 고민하면서 새롭고 낯선 것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했던 저에게 있어 필요한 변화라고 생각했습니다. 저의 꿈은 세계와 사회속의 난무하는 이슈들 속에서 사회적 책임을 갖고 사는 한 명의 음악인이고 시민으로서 살아가는 것 입니다. 어느 순간 나의 현실이 다른 외부적 요인으로 위기에 처해있을 때 저는 무력해지고 싶지 않습니다. 나의 삶과 무관하지 않는 많은 공통의 문제라면 내가 해낼 수 있는 것을 해내고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하고 살 수 있는 공간, 환경을 가꾸어나가고 소중한 것들을 간직하면서 살아가고 싶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서로의 꿈을 나누고 영향을 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위의 글은 이번 학기를 시작을 알리는 나의 출사표이고 다른 사람들에게 나를 설명할 때, 그리고 내 학교를 설명할 때 기반하는 내용이다. 작년에 시민문화 워크숍 강의도 듣고 태국 북부의 버마와 국경을 접하고 있는 메솟에 다녀오면서 '꿈'에 대한 얘기와 내가 살아가는 사회에 대해 이야기가 시작된 듯하다. 꿈 얘기가 나와서 하는 말인데 꿈이란 바라거나 이루고 싶은 이상적인 상상과 동시에 공상적인 바람도 의미한다. 어떻게 보면 오늘날 꿈이라는 것도 의미가 다르게 변해가고 있는 것 같다. 어렸을 적의 나를 예로 들자면 '너는 꿈이 뭐니?'라는 질문에 '나는 커서 소방관이 되고 싶어요.'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10대 초반이 되었을 때에는 평범한 회사원이 되어 가정을 꾸리고 살고 싶다, 사춘기 때는 세계 최정상은 못 되어도 국내 최정상 기타리스트가 되고 싶다, 라는 말을 했다. 어느 순간부터 개인의 꿈이란 직업이 되어버렸고 어디서 어떻게 누구와 살고 싶은지에 대한 구체적인 상상은 더 이상 없었다. 그런데 하자작업장학교에서 다시 생각하게 된 내 꿈은 소박하지만 실현시키기가 참 어려운 꿈이다. 하고 싶은 일 하면서 살기란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 그리고 사람이라면 윤리적으로 해야 할 것은 무엇인지를 다시 생각한다. 

공생, 공감(감정 이입), 그리고 함께 살기라는 말은 본디 어려운 말이다. 보편적인 의미에서의 '일반 주류'에 속하는 내 친척들만 보아도 모이기만 하면 '나 하나 살기도 바쁘다'라고 한다. 이 정도의 개인주의화가 되어가는 현시대에 밀접한 관계를 가진 이웃을 만들기란 쉽지 않다. 위와 같은 단어들은 종교에서만 꺼낼 법한 단어로 다가오기도 하고 누군가를 돌본다는 것은 그만큼 선뜻 마음내기가 어려운 부분이 있다. '아무도 돌보지 마라'는 엄기호의 책 제목처럼 현재 돈으로 굴러가는 신자유주의 한국 사회에서 개인의 생존도 벅찰 지경에 감히 누가 누구를 돌보는 것인지? 그런 가슴 아픈 말에 나는 반박할 자신이 없다. 그런데 3개월 동안 이 세 가지 개념에 대한 공부를 해왔다. 오랜 시간동안 의식적으로 공부해 오지 않았지만 이 세 가지 키워드들에 대한 생각이 어떻게 얼마만큼 생각이 진전이 되어왔는지 정리해 보았다.


1) 평화 워크숍

평화에 대한 공부의 시작은 '나로부터 시작하는 평화'라는 질문으로 출발했다. 이 말은 처음 듣는 말인데도 왠지 진부하게 느껴졌지만('나'로 부터 시작한다는 것을 익히 들어온 말이라서 그런 것일까?) 어깨에 힘 빼고 집중하기엔 그만한 것이 없었다. 이 말은 '내가 어떤 것에 대하여 평화롭지 못 하다고 생각하는가?'라는 질문으로 평화감수성을 터치한다. 하지만 동시에 이만큼 어려운 말도 없다. 평화롭지 못한 것은 뭔지, 내가 대상을 공감Empathy의 시선으로 보는 것인지 아니면 동정Pity의 시선으로 보는 것인지, 대상을 내가 감히 비평화적인 상태라고 정의할 수 있는지, 비평화적인 것을 제거하면 평화로워지는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들이 평화라는 말을 더 복잡하고 어렵게 만들었다. 그만큼 내가 살아오는 그동안 평화라는 말을 의식한 적이 없었다고 새삼 느꼈다. 물론 사춘기 시절에 도법스님의 생명평화의 개념도 있지만 지금도 그렇지만 깊이가 있는 개념이라 이해가 될 정도는 아니었다. 사춘기에 무엇에 집중했느냐고 묻는다면, 대답하지 않겠다. 아니, 중요한 것은 이게 아니다. 본론으로 돌아가서 밥 말리는 세계평화를 위해서 저항과 평화의 노래를 불렀다지만 내게 평화란 상상속의 이미지에 머물러있는 정도이다. 그 이미지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자연이 떠오르고 정말 근심과 걱정에 시달릴 정도가 아닌 상태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내가 생각하는 평화에 대한 상상력이란 것이 부끄럽게도 광고에 의해 너무 퇴색되어서 슬픈감도 적잖게 든다. 그 상상이란 어린이가 자연에서 뛰놀고 있을 법한 그런 느낌이다.

하지만 평화라는 말이 언제까지나 좋은 말로 남아있기엔 위기의 시대가 도래했다. 요즘 연평도 사건으로 남북 분위기가 흉흉하다. 나는 남북의 전쟁이 날것만 같아 공포감도 느낀다. 사건이 터진 직후 얼마 안 되어 신도림역에서 인천방향으로 가는 탱크와 트럭들이 무더기로 실려 가는 것을 보니 더 그렇다. 설상가상으로 뉴스에서 언급되는 국방의 실체는 너무 심각하다. 사건이 터진 시각 6시간 이후까지도 몰랐다는 강화도 담당 어느 고위 계급군인 진술에 따르면 자신의 진급파티를 벌이고 있었다는 것일 정도이니 말이다. 지금 대공포 50%가 고장이 나서 못 쓰는 것, 북한 측에서 공격해오리라고 생각을 했지만 별로 중요하지 않게 생각했다는 것. 사실 그만큼 휴전이라는 개념이 무뎌진 것은 아닐까? 하지만 이 정도로 무방비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군인도 나라를 지키지 않는 나라에서 나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 어떻게 하면 불안에 떨지 않고 잘 살 수 있을까?

지난 10월, '지구시민으로 다시 태어나자, 세계시민으로서의 감수성을 키우자'라고 말씀하신 마사키 다카시 선생님의 평화포럼에 이어 11월 24-26일 동안 이태리에서 온 저널리스트이자, 평화교육활동가인 브루노 피코찌(http://bippi.org)와 함께 평화 워크숍을 했었다. 태국 버마의 군부독재, 20주년이 된 정대협의 활동 등 세계의 다양한 분쟁상황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에 대한 내용으로 세계정치의 일방적이고 큰 흐름에도 불구하고 우리 스스로는 어떤 일을 하면 좋을지에 대하여 토론하고 상황극 통한 공부를 했다. 이 워크숍이 시작하기 약 1주일 전에 정대협 심포지엄에서 만난 한 할머니께서 '평화는 정의 위에서, 정의에 기초하여 말해져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내가 그곳에 다녀오고 나서 한 동안 생각했던 질문은 '평화를 얻는데 쟁취는 불가피한가?'였다. 대부분의 의제들은 배상과 사죄를 요구하는 내용들이었다. 일본은 과거에 이미 일정 금액을 지불함으로써 청산된 일이라고 하고, 한국은 마음의 상처가 아물지 않았다고 하고. 물론, 그때 할머니가 말씀하신 정의라는 단어에서 오는 '올바른 도리'의 뉘앙스가 어떤 느낌인지는 알 수 있다. 그러나 '전쟁통에 어쩔 수 없었다, 나도 피해자다'라고 말한다면 인권이든 정의든 모든 문제를 유린하는 전쟁 속에 누가 잘못이었는지 다시 묻기 너무 어려운 문제이다. 평화 워크숍 시간에 강의해주신 조진석 선생님이 말씀해준 것을 예를 들어, 가족의 부양을 위해서 전쟁에 참전 할 수 밖에 어쩔 수 없었다는 나까무라(가명)의 진술에 우리는 '그래도 죄'로 봐야 하는지, 아니면 이해 할 수 있는지? 우리는 적이 없는 싸움을 하는건 아닐가? 정의 위의 평화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화해는 할 수 있을까?  갈등 속에서 어떻게 이 문제가 해결될지는 짐작하기란 사실 너무 어려운 문제라서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 모르겠다. 법으로도, 윤리적으로도 충분히 동의가 되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이런 지점들에서 상상속의 평화랑 현실적으로 생각해봐야 하는 평화라는 것에 의식이 트이기 시작했다.

평화운동가 브루노 피코찌는 [공정No Fairness, 정의No justice, 동의No agreement, 행동No act], 이 네 개의 지침 없이는 평화는 없다고 말한다. 'NO'에서 오는 뉘앙스는 강력하고, 확고하고, 단호했다. 하지만 이상적인 미래를 그리며 접근하는 브루노의 입장에 반해 나의 '평화로움'에서 오는 느낌은 안정된, 평온한, 재앙과 전쟁이 없는 그러한 종류들의 문제없음의 상황들이었다. 그것들은 마음에 둔 이미지들 이었을 뿐, 현실에서의 분명한 태도에 대한 의식이 부족했다. 그만큼 이상과 현실의 갭을 줄이기 위해서는 아름다운 소망과 함께 뚜렷한 접근 방식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한다. 전군이 입학식 때 나에게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은행가'책을 건네주며 '하나의 좋은 일을 해내기 위해서 얼마만큼의 노력이 필요한가?'를 말씀해주셨다. 그 노력의 내용은 분명하고 구체적인 것이 되게끔 노력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어떻게 평화라는 단어에 마음을 더 붙일 수 있는지, 이 시대의 키워드가 될 수 있는지 곰곰히 생각해본다.


2) 극단 타이헨

극단 타이헨은 제일교포인 연출가 김만리 선생님의 <신체장애자의 장애자체를 표현력으로 전환하고 미답의 미(美)를 창조할 수 있다>라는 착상에 근거함으로써 시작된 그룹이다. 이 그룹은 장애자자신이 연출하고 연기하는 극단으로 1983년부터 오사카를 중심으로 활동을 해오고 있는 그룹이다. 그분이 생각하는 자신의 신체예술은 <신체는 하나의 소우주이고 불안전하게 보이는 연기자들의 몸짓과 움직임에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신체적 표현에서 오는 절묘한 밸런스가 있다. 그 무대를 통해 관객들도 자기 자신과 우주를 느끼게 된다.> 라고 설명한다. 타이헨 극단 창립시기부터 관습적으로 "극단"이라는 명칭을 쓰고 있는데 본래 스토리가 있는 표현을 지향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1989년부터는 대사의 사용도 그만 둬 상징적인 신체표현으로 작품을 만들어 왔다. 지금까지 27년의 시간을 들여서 표현해온 몸짓과 움직임은 바로 ”댄스”가 아니고 또 일본 전통춤인 "부토(舞踏)"도 아닌 어디에도 없었던 신체표현이다.

이번 5월에 서울 정립회관이라는 장애인복지시설에서 김만리 선생님의 신체표현워크숍이 있었다. 학교 만들기 팀은 워크숍 마지막 날 보조해주는 역할로 참여하게 되었고 주로 옷을 갈아입혀드리는 일과 이동을 도와드리는 일을 했다. 갈아입혀드렸던 옷은 레오타드로 갈아입혀드렸다. (레오타드란 상하의가 붙어있고 몸에 착 달라붙는 옷을 말한다. 쉽게 설명하면 타이즈와 비슷하다.) 중학교에 다닐 무렵에 거동이 불편하신 어르신들과 장애가 있는 어린이, 청년, 어른들을 위해서 2주에 한 번씩 봉사활동을 한 경험이 있기 때문에 옷을 갈아입혀 드리는 것에 대한 낯설음이나 거부감은 비교적 덜했기 때문에 그렇게 무리는 없었다. 

이 극단의 신체표현 워크숍에서는 장애인들이 옷에 착 달라붙는 레오타드를 입어 자신의 몸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놓고 연출가의 지시에 따라서 무대 위를 돌아다니는데 무어라 설명하기 어려운 느낌이었다. 연출가는 '기氣'를 따라가시고 몸이 표현하고자 하는 것을 그대로 표출해보세요'라고 말하는데 연기자들이 곡의 분위기나 연출가가 의도하는 내용의 흐름에 자신을 싣는 모습들은 정말이지 새로웠다. 나도 가끔 명상이나 절을 하면서 기의 흐름이라는 것을 느끼는데 실존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건 나만 느끼는 것이 아닌 것 같다. 잘은 모르겠지만 내 입장에선 믿을 만 하다고 생각한다. 말로 한 번 설명해보자면 '고도의 집중상태가 되고 의식이 신체를 조종하는 것이 아니고 신체가 의식의 명령을 듣지 않는 상태'랄까? 이 설명에 근거삼아서 나는 그 무대 위의 연기자들이 어떤 상태로 표현을 하고 있는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내가 타이헨의 예술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정도의 이해수준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한 가지 추측을 해보자면 무의식 상태에서 의도를 가지고 무언가를 표현 다는 것, 모습 태態, 변할 변変을 써서 장애인의 모습을 연기자 혹은 예술가로 변신하는 것, 신체표현에서 나오는 내용을 추측할 수 없지만 관찰하며 의미를 재해석하게 만드는 것. 이런 것들이 예술을 관찰하는 시점에서 보자면 인정할 수 있는 부분인 것 같기도 하다. 정말 새로운 종류의 표현 매체가 나타난 것이다.

그 워크숍이 끝난 이후에도 작업장학교와 지속적인 관계를 맺으며 3차례 정도 워크숍에서 스태프 역할을 맡게 되었는데 이 극단에서는 스태프를 쿠로코kuroko라고 부른다.(구로코로 읽어도 가능하다.) 쿠로코는 전신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을 뜻하며 주로 어둠속에서 일을 하는데 이 극단에서는 암전 때 배우를 무대로 옮겨드리는 것과 무대 뒤로 데려오는 것을 주로 하며 무대 세팅, 식사 보조를 포함한 전반적인 실무를 맡는다. 하지만 쿠로코의 일이라는 것은 중학교 시절에 봉사활동 차원에서 도와드렸던 것 정도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옮겨드리는 것을 예로 들자면 한 엑스트라 배우가 자신의 몸무게가 많이 나간다는 생각과 자꾸 옮겨주는 것이 고맙지만 한편으로는 미안한 심정에 연기가 제대로 안 된다는 말씀을 해주셨다. 배우는 쿠로코에게 완전히 몸을 맡기기 때문에 있고 부분도 있기 때문에 쿠로코와 배우들 사이의 신뢰관계도 필요하다. 그러니 만큼 무언가를 할 때마다 끊임없이 소통을 유지하는데 한 가지 예로 배우를 들어 올릴 때 '옮겨드리겠습니다.'와 내려드릴 때 '내리겠습니다. 불편한 곳은 없었습니까?'라는 식의 피드백도 주고받는다. 물론 어떤 말을 하시는지 알아듣기가 쉽지 않지만 그만큼 장애인을 돌볼 때 막중한 책임감도 필요하고 고도의 집중력도 필요하다. 쿠로코는 단순히 도움이Helper로 배우와 만나지 않는다. 상대는 돌봄의 대상으로 치부하는 것이 아닌 적어도 이 극단에서는 연기자로서의 존중과 예를 표한다.  충분히 존중받을 가치와 이유를 가지고 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이야기를 잇자면 쿠로코는 이름에 걸맞게 주로 무대가 어두울 때 일을 하는 역할이라 신속하고 정확하고 안전하게 해내야 한다. 때문에 쿠로코들 사이에서 무대로 나갈 때와 들어올 때의 움직이는 순서, 동선 등 체계적으로 움직이는 철두철미한 성격을 띄고 있다. 

하지만 장애인들의 신체표현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나의 예술로 볼 수 없다면 어떻게 보이게 되는 걸까? 장애인의 신체표현에서 미답의'미'를 강조하지만 어떤 시점이 없으면 그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단계에 머무를 것이다. 보편적인 의미로 아름답다는 것은 예쁘고 고운, 보기도 좋은 어떤 모습인데 정말 아름다운 것이 뭘까? 김만리 선생님도 역시 자신들의 추함을 인정함과 동시에 아름답다는 말을 했지만 사실 내 이해수준에서는 아름답다고는 말을 하기가 참 어렵다. 하지만 통제되지 않은 몸짓으로 무언가를 의도하여 표현하는 것을 볼 때 미묘한 감정들이 스쳐가는 경험은 있다. 장애를 가지고 있다고 해서 표현과 소통이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느끼게 된 것은 무대 위에서 집단으로 움직이는 것을 보았을 때다. 그것은 일종의 언어였다. 말을 하지 않아도 무엇을 의도하는지는 조금은 보였던 것 같다. 이 극단이 의도하고자 하는 것을 이해하려면 거시적인 관점, 즉 하나를 놓고 전체를 볼 수 있는 관점이 필요하다.

아무도 역사에 대해서 되묻지 않는 시대에 일본 장애인 극단이 일제시대에 문화운동을 벌였던 황웅도의 일대기를 중심으로 3월 20일부터 27일까지 한국에서 두 차례의 공연을 펼치려고 한다. 과연 이것이 우리들과 한국에 미치는 여파는 어디까지인지는 짐작이 되지 않는다. 더 관찰 해봐야한다.


3) 율면 여행

율면여행의 시작은 이번 10월에 열린 창의서밋이 열렸을 때 왔던 홍콩창의력학교 일행에 서울투어를 해줄 팀이 없어서 급히 경로를 바꾼 것이 바로 경기도 이천 율면이다. 그 마을에는 하자의 사회적기업 '콩세알'의 세 명의 젊은이들이 있었다. 그들은 소비자와 판매자, 그리고 유통하는 사람간의 신뢰관계가 있는 공정거래를 원칙으로 하는 유기농 식품 유통과 공정거래를 도와주고 있다. 간단히 말하자면 농부는 재배한 것의 제값을 받고 소비자는 값에 걸 맞는 건강한 식품을 받도록 하는 것이다. 도시와 농촌을 잇는다고 멀찌감치에서 연결해주는 것이 아닌 직접 유기농 식품도 재배하고 '마을'에서 얽히고 설키며 살고 있다.

율면 여행은 두 차례에 걸쳐 다녀왔다. 첫 번째 여행에서 어느 어르신이 마지막 추수철이라 일손이 많이 필요하시다고 하셨는데 그 말이 마음이 쓰였다. 심심찮게 농촌의 젊은이들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도 들어왔기 때문일까? '어르신들만 남은 농촌은 얼마나 쓸쓸할까'라는 생각도 좀 들었다. 그러나 다행히 다시 올 것을 기약하고 헤어졌다. 젊은이 세 명중 한 명은 작업장학교의 오랜 친구인데 원래는 도시에서 인디밴드를 하다가 농사에 재미를 들여 농촌으로 내려왔단다. 우리 학교에서도 음악 농부를 꿈꾸는 사람이 있는데 음악 농부는 어떻게 살고 있는지 보러 갈 겸, 올해의 마지막 추수도 도와줄 겸 이천 율면에 또 다시 다녀오게 되었다.

이번 학기에는 매일 아침을 여는 모임에서 '오늘의 문장'이라는 시간을 가졌다. 두고두고 생각해볼 문장, 다짐 등 여러 가지 형태로 요즘 흘러가는 생각을 나누는 시간인데 나는 '자활노동을 기본으로 생활하며 산다.'라고 얘기를 꺼낸 적이 있다. 자기 힘으로 몸을 움직이면서 일을 한다는 것은 농부를 보면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의 밭의 규모를 알면 언제 일어나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감각이 뚜렷한 '농부의 부지런함'이 스스로를 살리는 노동을 한다. 일을 할 시간과 놀 시간이 따로 있고 동시에 일을 하면서 놀기도 하는 (밭을 일구는 것이 일이자 놀이인)멋진 시간도 갖고 있는 농부, 혼자서도 일할 수 있고 공동작업으로 하면 더 이로운 농부의 밭 일구기. 썩 괜찮은 삶의 원칙이라 생각한다. 이런 생활을 우리 학교에서도 시도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이와 같은 멋진 상상이 도시 속에서는 어떤 형태로 적용될 수 있는지를 고심해서 생각했지만 실제로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농부처럼 하나를 집중적으로 하거나 밭을 일구어 놓으면 저절로 크는 시스템에 비해 우리는 다이나믹하게 변동하는 일정과 생활리듬을 지켜나가기가 쉽지 않은 일이란 것을 안다. 우리도 농부처럼 일과 놀이를 함께 할 수 없을까? 물론 그 일이란 것이 스스로에게도, 다른 사람들에게도 이로울 수 있는 것이라면 더할 나위가 없겠다. 

'생태'란 말이 어떻게 읽힐까? 사실 나는 삭막한 도시에서 물 좋고 공기 좋은 생태로 휴가를 가는 사람들을 보면 괴리감도 느껴지고 자연으로 돌아가자는 일본의 평화운동가 마사키 선생님이 떠오른다. 삭막한 환경에서 사는 것을 알면서도 지내는 것, 그런 장소를 벗어나 잠시 위안을 얻을 수 있는 곳으로 떠나는 것. 어째서 자연이란 관광의 장소가 되어버렸는지, 휴가 때만 올 수 있는 장소가 되어버렸는지 고개를 갸우뚱할 노릇이다. 물론 나도 어느 순간부터 자연보다 도시에서 지내는 시간이 더 많아졌지만 말이다. 자연으로 가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지만 위안을 얻으며 떠난 적은 없다. 그런데 이토록 좋은 생태계가 인간의 무의식적인 태도에서 망가지고 있다. 내가 오늘 산 무언가가 세계 건너편에서는 자외선 파괴로 인해 고래의 피부가 타고 있고 빙하가 녹고 있으며 외계 생명체의 출현이 예고되고 생명체들이 멸종되며 지구는 나날이 뜨거워지고 있다. 무언가를 소비한다는 것은 무언가를 생산한다는 것과 상반되어 이루어지는데 소비와 공급이 늘어나는 점에서 균형을 이루고 있다. 다른 의미에서 균형을 이룬다면 이건 또 문제다. 


[한 팀으로서의 공연, 영상, 디자인작업은]

먼저 나는 현재 있는 사람들 중 공연팀에서 가장 오래있었던 사람으로서, 음악인으로 살아갈 사람으로서 얘기를 하겠다. 이번 한 학기동안 음향 세팅, 행사 오퍼레이터, 합주 진행, 워크숍 기획, 오도리(춤) 등 음악과 소리, 퍼포먼스에 관련된 것이라면 보다 더 주도적으로 하겠노라고 다짐했었다. 이런 마음가짐으로 하다 보니 이것저것 도맡아 하게 된 것 같다. 전교생이 합주를 할 때마다 밸런스를 조절하면서 어느 정도의 수준이 되어야 무대에 오르는지도 생각하며 우리학교의 적당한 수준은 어느 정도인지를 생각을 하며 우리가 Playing for change나 17 Hippies처럼 다양한 악기,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연주할 수 있는 그룹을 상상하기 시작했다. 비록 악기를 쥐지 않아도 같은 리듬으로 박수 칠 줄 알면서 춤도 추고 노래도 부르는, 그런 '잘 노는' 너구리 마을 같은 모습 말이다.

공연팀 워크숍을 할 때마다 도달해야하는 목표를 설정하면서 난이도를 조절하며 낯선 음악을 익히는 속도를 이번학기에 새로 들어온 사람들 각 개인들에게 맞추면서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것에 대한 감을 잡는 연습을 했다. 그렇다면 그 난이도를 설정하는 공연팀 4명은 어느 정도의 수준이 되어야 하는 것인지에 대한 고민을 하면서 각각에게 아이디어를 제공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특히 나와 길찾기 때부터 같이 한 오피가 Rhytymist가 되기를 제안 받고 스스로가 되겠노라 선언하면서 정말 리듬에 탁월한 사람이 되려면 어떤 감을 익히면 좋을지 나름의 기대를 하면서 소스들을 준 것 같다. 그 사이에서 나는 다른 남미 아티스트들을 찾아서 나름의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려 노력하고 개인악기연습을 하면서 실력을 유지해왔다.

추측하건데 지금의 공연팀은 '리더'라는 말은 싫어하는 경향이 있다. 한 명의 대표와 여러명의 멤버로 이루어진 팀은 공동작업을 중시하는 우리 학교에서 그런 것은 당연히 거부의 대상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나는 내가 가졌단 마음가짐은 팀 내의 '리더'이지 '대표'가 아니다. 작업장학교 초기에 잠깐 '무브와 얼굴들(스스로 짓지 않았다. 판돌 중 한명이 지어줬다.)'이라는 이름을 갖고 밴드를 한 적이 있는데, 지금의 작업장학교 공연팀은 그것이 아니란 말이다. 선두에 서서 이끌어가는 것에 좀 더 마음을 썼었던 것이 내가 생각했던 리더쉽이고 그만큼 우리가 같이 동의할 수 있는 지점을 찾는데도 신경 쓰면서 했기 때문에 이 팀의 대표는 없다. 다만 어떤 진행하는 방식에 있어서 그만큼 제안하고 선두에 서는 사람이 되었던 것이다. 나는 우리 팀에 리더들이 많았으면 한다. 서로가 하고 싶은 것을 제안하면서 동의할 수 있는 것을 꿈꾸면서 여러 가지가 조합이 되어 우리의 팀 정체성으로 드러났으면 좋겠다. 

그렇다면 세 팀으로서는 잘 되었을까? 하자작업장학교에 입학문의가 끊임없이 들어오고 있는데 그럴 때 마다 심심찮게 듣는 질문은 '뭘 배우는 학교인가요?'이다. 그리고 늘 하는 대답중 하나는 '공연, 영상, 디자인 팀으로 나누어 그룹작업을 하면서 배웁니다. 요즘에는 세 팀이 통합적으로 움직이고 있어서 어느 한 팀에 들어가셔도 나머지 분야에 대해서 배우셔야 해요'이다. 그룹 작업이 곧 팀 작업으로 연결되는 작업장학교의 세 팀은 한 팀으로서 잘 했는지 평가해보자.

지난 해 까지만 해도 그룹작업은 각 방에서 이루어져서 그 작업하는 과정은 어땠는지를 서로가 전혀 알지 못 했다.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발표회 때 보고 과정을 묻고 듣고 어떤 느낌이 들었는지, 그런 코멘트를 할 수 있는 것이 나로선 전부였다. 물론, 우리 팀 공연에 온 다른 사람들도 피차일반이었다. 서로를 알지 못 하니 우리는 같은 학교의 멤버가 아닌 시사회에 온 관객느낌? 그런 감정도 사뭇 있었다. 어쩌면 그래서 이 학교가 잠시 문을 닫기 전에는 공연을 같이 한 것일까?(디자인 작업이나 영상작업을 왜 같이 안 했을까 하는 질문이 들긴 하지만 그간 학교 내부와 외부를 통틀어서 가장 많이 워크숍을 열어본 공연팀이기 때문인 것은 아닐지, 같이 노래를 부르는 것이 '하나'로 보여지기 가장 좋은 방법은 아니었는지 여러 가지 생각이 든다.)

이번 학기에 한 것 중에 팀워크가 가장 활발히 돌아갔던 것은 버마를 지원하는 그룹인 '따비에(Tha byae)'의 발족식을 준비할 때가 아니었을까? 주문에 맞게 공연을 준비하고 분위기를 연출하는 것, 공간 디자인, 영상 촬영 등 전체적인 관점에서 같이 의견을 공유하는 작업이 하나의 끝을 보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아닌가 생각한다. 그룹워크로 숙련을 해오던 나에게는 하나의 큰 프로젝트를 하기란 좀처럼 하기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우리가 '작업, 작업자'라는 말을 쓸 때는 작업장학교 내부에 국한되지 않는다. 정말 누구와 어떤 방식으로 일 할수 있는지, 어떻게 의견들을 조합하고 조율할 수 있는지 그런 내용을 채우는, 가장 적당한 방법을 찾는 '감'을 익히는 과정은 괜찮았다고 생각한다. 

그런 작업의 기술과 감각의 보완을 위해서 사운드, 영상언어, 디자인 워크숍을 다 같이 들었는데 솔직히 말하자면 사운드 워크숍을 제외한 두 가지 워크숍은 나름 잘 되었다고 생각했다. 디자인 워크숍의 경우에 강사인 달갱은 옛부터 작업장학교와 깊은 관계를 갖고 있기 때문에 일치하는 코드가 있었고 어떤 프로세스를 가지고 워크숍을 진행해야 하는지 잘 알고 계셨다. 영상언어 수업의 이지행 감독님은 워낙에 학식이 뛰어나신 분이고 현직 강사이다보니 많은 정보를 디테일하게 잘 설명해 주셨지만 내가 그 수준범위에 도달하지 못 한 경우도 종종 있다. 그래도 배운 것을 가지고 자화상(Self-Portrait)을 영상으로 표현하는데 도움이 되고 이 워크숍동안 영상을 보며 눈치챈 기술(기술을 알려주시지는 않았기 때문이다)로 시도해 보기도 하고 이 두 워크숍은 작업장학교의 멤버들이 어떤 생각과 그걸 표현하기 위해서 어떻게 하는지는 어느 정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사운드 워크숍은 약간 낮은 점수를 주고 싶다. 왜냐하면 사운드워크숍 강사인 나잠이 '끝내주는 음악'을 하는 사람인 것 같다. 이 말은 즉슨 너무 전문적인 기술과 이론을 배웠더니 머리에 들어오는 것이 그리 많지는 않았다. 듣고 강의를 듣다보니 실험은 종강무렵에 시작했고, 우리가 자력으로 녹음할 수 있는지, 소리 편집을 할 수 있는지를 물어본다면 이 워크숍은 대실패다. 기초적인 부분(예를 들자면 그 누구나 음향장비를 다룰 줄 알고 Sound Operating을 할 수 있는지)을 모두가 이해했다면 어떤 부분은 성공이지만 말이다. 하지만 무척이나 아쉬움이 남는다.

팀 작업을 잘 하는데 있어서 도움이 많이 된 워크숍은 'Creative Process workshop'이 아닌가 싶다. 이 워크숍은 매체 워크숍과는 달리 약간 외전 느낌이 들지만 팀 작업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내용을 내포하고 있다. [어디 나라에 카오스 파일럿츠(Kaos Pilots)의 메테 뭐시기]는 창의적인 과정에 대한 워크숍을 두 차례 걸쳐서 진행했는데 그 내용은 작업장학교의 Mind Set을 언어로 풀어내는 내용인 것 같았다. 동료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어떤 부분에 집중하고 있고 무엇을 하고자 하며 그것을 어떻게 표현하려고 하는가? 결과에 대한 기대는 무엇이고 앞으로 더 해나가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 등 여러가지 질문들은 내가 경험했던 어떤 과정을 말로 설명해주는 듯 했다. 


['대작전'을 꿈꾸며 다음 단계로 올라설 준비를 한다]

지금에 와서 말하는 것이지만 심심찮게 들은 과거 죽돌들의 사건인지 사고인지 모를 일들을 들었는데 매 때마다 나는 그런 일을 벌이는 것이 부러웠다. 미술관 습격사건, 청소년 우드스탁 등 이름만 들어도 흥미진진할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간혹 '안될 건 또 뭐야?'라는 질문과 대답을 자신 있게 던지곤 하는데 정말로 해보면 되지 않을까? 그 대상과 목표와 얻고자 하는 기대도 잘 신경 쓰면서 즐겁지만 가볍지는 않게, 하지만 어깨에 힘은 빼고 하는 것, 정말 하고자 하는 것을 만들고 그것을 해내기 위한 방법과 수단을 모색하고 충분히 잘 해내는 것. 이게 내가 도달해야 할 '다음 단계'가 아닐까? 자, 지금부터 눈에 띄게 움직이는 것과 보여지는 모습들, 들려주는 소리, 그를 둘러싼 사람들. 더 잘 했으면 좋겠는 마음과 함께 정말 같이 나눴으면 하는 고민들이 무엇인가, 어떤 방법으로 잘 전달할 수 있는가를 생각해본다. 그 내용은 차차 채워나가자. 나와도, 세계와도 연결되어 있고 그 내용의 출처는 꿈과 현실에 맞물려서 구체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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