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65

세사르 바예호

 

어머니, 내일은 산띠아고에 갑니다

어머니의 축복과 통곡에 흠뻑 젖겠지요

이젠 삶의 허상에도 적응이 되어 갑니다

이것저것 헛되어 바쁜 생활에서 오는

장밋빛 상처도 아물고 있습니다

 

당신께서는 놀라움의 무지개로 저를 기다리시겠지요,

삶이 다하도록 쌓아올린 당신의 소망의 작은 기둥들

우리 집의 마당과 그 아래 울긋불긋 치장한 둥그런

아치형의

천장이 있는 복도, 또 나를 기다리는 나의 귀족 의자,

왕조시대의 가죽으로 멋지게 양 팔받이를 단

더 이상 증고조 할아버지의 엉덩이에 삑삑거리지 않도록

가죽줄로 묶고 또 묶은 그물.

저는 저의 가장 순수한 사랑을 체질하여 고르고 있습니다

저는 저의 중심을 찾고 있습니다, 물 밑을 가늠하는

저의 숨결이 헐떡거리는 것이 들리는지요?

새벽 기상나팔 소리가 들리지 않나요?

저는 이 땅의 모든 빈 구멍들을 메꿀

당신의 사랑의 공식을 그려 보고 있습니다

아, 세상에서 가장 먼 목소리들을 묶을 소리 없는 리본이 있다면,

아, 세상에서 가장 먼 만남들을 묶어 줄 소리 없는 리본이 있다면,

그래야지요, 죽어서 살아 계시는 어머니, 그렇게 되어야지요

당신 피의 두 갈래 무지개 밑으로

우리 모두 조심조심 까치발로 지나가야지요, 우리 아버지까지

거기를 지나가시려면

어른 키 절반 이하로 굽혀 절하셨는데요,

당신께서 가지신 첫아이 키만큼 되시려구요

그래야지요, 죽어서 살아 계시는 어머니

당신 뼈로 만든 기둥들 사이

통곡으로도 무너질 수 없는 기둥들 사이,

운명의 신도 그 곁에서는

손가락 하나 얼씬거릴 수 없었던 그곳

 

그래야지요, 죽어서 살아 계시는 어머니

그렇구말구요



형 미겔에게 l

―그의 죽음에 부쳐

세사르 바예호

 

형! 오늘 난 툇마루에 앉아 있어.

형이 여기 없으니까 너무 그리워.

이맘때면 장난을 쳤던 게 생각 나. 엄마는

우리를 쓰다듬으며 말씀하셨지 "아이구, 얘들아……"

 

저녁 기도 전이면

늘 술래잡기를 했듯이

지금은 내가 숨을 차례야. 형이 나를 찾지 못해야 하는데.

대청 마루, 현관, 통로.

그 다음에는 형이 숨고, 나는 형을 찾지 못해야 해.

그 술래잡기에서 우리가

울었던 일 생각나.

 

형! 8월 어느 날 밤,

형은 새벽녘에 숨었어.

그런데, 웃으며 숨는 대신 시무룩했지.

가버린 시절 그 오후의 형의 쌍둥이는

지금 형을 못 찾아 마음이 시무룩해졌어. 벌써

어둠이 영혼에 고이는 걸.

 

형! 너무 늦게까지 숨어 있으면 안 돼.

알았지? 엄마가 걱정하시거든.



아가페 Agape

세사르 바예호

 

그 누구도 오늘 나에게 물으러 오지 않았습니다.

이 오후에 그 아무것도 내게 청하지 않았습니다.

 

찬란한 빛의 행렬 아래에서

단 한 송이 묘지의 꽃마저 보지 못했습니다.

주님! 너무도 조금밖에 죽지 못했음을 용서해주세요.

 

이 오후에, 모든 이들은

내게 묻지도, 청하지도 않은 채 지나갑니다.

 

저들이 잊은 것이 무언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이 내 손에서는 남의 것처럼 이상합니다.

 

밖으로 나갔습니다.

모두에게 큰 소리로 말해주고 싶어서요.

여러분이 잊은 거, 여기 있어요!

 

사람들이 왜 내게 문을 열어주지 않는지

오후에는 언제나, 나는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오후만 되면 내 영혼은 남의 것 같습니다.

 

그 아무도 오늘 제게 오지 않았습니다.

오늘 오후에 나는 너무도 조금밖에 죽지 못했습니다.



하나의 밀알이 썩어

진은영

한 알의 밀알로 썩어

거대한 밀밭을 꿈꾸는 사람들

 

나는 하나의 밀알로 썩어

세상의 모든 바람이 취기로 몰려오는

한 방울 향기

아득한 밀주

아무런 후일담도 준비하지 않는



기도

마리나 츠베타예바

 

그리스도와 하나님! 기적을 갈망해요

하루가 시작되는 지금, 당장!

온 인생이 제게는 한 권 책과 같은 이 동안에

죽게 해주세요

 

현명하신 분이니까 엄하게 말씀하진 않으시겠죠,

“인내하라, 아직 때가 되지 않았느니”라고.

바로 당신이시잖아요, 너무도 많은 것을 제게 준 분은!

모든 길을 한꺼번에 다 갈망해요!

 

모두 다 원한다구요. 집시의 혼을 품고

노래 소리 들으며 도둑질 떠나는 것,

오르간 소리 들으며 모두를 위해 괴로워하다

아마존처럼 전쟁터로 달려가는 것

 

새카만 탑에서 별자리를 읽는 것,

그림자 너머로 아이들을 데려가는 것…

모든 어제는 전설이 될 수 있게,

매일매일은 광란의 하루이게 말이에요!

 

십자가와 실크와 철모를 사랑해요,

내 영혼은 순간들의 발자취일 뿐이지요…

동화보다도 아름다운 어린 시절을 제게 주셨잖아요

그러니 죽음을 주세요, 이 열일곱 살에!



기억하는가

최승자

 

기억하는가

우리가 만났던 그날.

환희처럼 슬픔처럼

오래 큰물 내리던 그날.

 

네가 전화하지 않았으므로

나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네가 다시는 전화하지 않았으므로

나는 평생을 뒤척였다.

미망(未忘) 혹은 비망(備忘) 8

최승자

내 무덤, 푸르고

푸르러져

푸르름 속에 함몰되어

아득히 그 흔적조차 없어졌을 때,

그 때 비로소

개울들 늘 이쁜 물소리로 가득하고

길들 모두 명상의 침묵으로 가득하리니

그때 비로소

삶 속의 죽음의 길 혹은 죽음 속의 삶의 길

새로 하나 트이지 않겠는가.

나를 향한 곱지 않은 시선에 털끝이 쭈뼛 섰다.

마치 내가 주인 없는 개라도 되는 듯.

문간에서 당장 빗자루를 들고 쫓아버려야 할

귀찮은 떠돌이라도 되는 듯.

 

은도금을 한 내 목걸이를 누군가가 낚아 채갔다.

며칠 전부터 텅 비어 있던 내 밥그릇을 누군가가 걷어찼다.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일행 중 하나가

길 떠나기 직전 운전석에서 몸을 내밀었다.

그리고 나를 향해 방아쇠를 두 번 당겼다.

 

심지어 과녁 하나 제대로 맞추지 못했다.

내가 꽤 오랫동안, 고통스럽게 죽어간 걸 보면

버릇없는 파리가 귓가에서 윙윙대는 소리를 들으며 서서히 죽어갔다.

나, 내 주인의 충성스러운 개는.



롤프 디터 브링크만

 

눈: 누가

이 단어를 끝까지

생각할 수 있을까

바로 그때까지

눈이 녹아

다시 물이 되고

 

그 물이 길을 질척거리게 한다

그리고 하늘을 한

시커멓고

 

번지르한 진탕 웅덩이에

비추게 할 때까지, 마치 그것이

녹슬지 않는 철로 된 것처럼

 

그리고 변하지 않고

푸르게 남을 것처럼



작별

가르시아 로르카

 

내가 죽으면

발코니를 열어놔 둬.

 

사내아이가 오렌지를 먹고 있군.

(발코니에서 나는 그를 볼 수 있으니)

 

농부가 밀을 거두고 있군.

(발코니에서 나는 그를 들을 수 있으니)

 

내가 죽으면

발코니를 열어놔 둬!



거리의 악사

빌헬름 뮐러

 

저편 마을 한구석에

거리의 악사가 서 있네,

얼어붙은 손가락으로

손풍금을 빙빙 돌리네.

 

맨발로 얼음 위에 서서

이리저리 몸을 흔들지만;

그의 조그만 접시는

언제나 텅 비어 있어.

 

아무도 들어줄 이 없고,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다네;

개들만 그 늙은이 주위를 빙빙 돌며

으르렁거리고 있네.

 

그래도 그는 모든 것을

되는 대로 내버려두고

손풍금을 돌린다네, 그의 악기는

절대 멈추지 않는다네.

 

참으로 이상한 노인이여,

내가 당신과 함께 가드릴까요?

나의 노래에 맞춰

손풍금을 켜주지 않을래요?



나의 어머니

베르톨트 브레히트

 

그녀가 죽었을 때, 사람들은 그녀를 땅 속에 묻었다.

꽃이 자라고, 나비가 그 위로 날아간다……

체중이 가벼운 그녀는 땅을 거의 누르지도 않았다.

그녀가 이처럼 가볍게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통을 겪었을까!



안녕, 나의 친구, 다시 만날 때까지 안녕

세르게이 예세닌

 

안녕, 나의 친구, 다시 만날 때까지 안녕.

다정한 친구, 그대는 내 가슴 속에 살고 있네.

우리의 예정된 이별은

이 다음의 만남을 약속해 주는 거지.

 

안녕, 나의 친구, 악수도 하지 말고, 작별의 말도 하지 말자.

슬퍼할 것도, 눈썹을 찌푸릴 것도 없어―

삶에서 죽음은 새로운 일이 아니니까,

그러나 삶 또한 새로울 것은 하나도 없지.



수선화에게

정호승

 

울지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공연히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

 

눈이 오면 눈길을 걸어가고

비가 오면 빗길을 걸어가라

갈대숲에서 가슴 검은 도요새도 너를 보고 있다

가끔은 하느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신다

 

새들이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고

네가 물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다

산 그림자도 외로워서 하루에 한 번씩 마을로 내려온다

종소리도 외로워서 울려퍼진다



들길

도종환

 

들길 가다 아름다운 꽃 한 송이 만나거든

거기 그냥 두고 보다 오너라

숲 속 지나다 어여쁜 새 한 마리 만나거든

나뭇잎 사이에 그냥 두고 오너라

네가 다 책임지지 못할

그들의 아름다운 운명 있나니

네가 끝까지 함께 할 수 없는

굽이굽이 그들의 세상 따로 있나니



섬진강3

김용택

 

그대 정들었으리.

지는 해 바라보며

반짝이는 잔물결이 한없이 밀려와

그대 앞에 또 강 건너 물가에

깊이 깊이 잦아지니

그대, 그대 모르게

물 깊은 곳에 정들었으리.

풀꽃이 피고 어느 새 또 지고

풀씨도 지고

그 위에 서리 하얗게 내린

풀잎에 마음 기대며

그대 언제나 여기까지 와 섰으니

그만큼 와서 해는 지고

물 앞에 목말라 물 그리며

서러웠고 기뻤고 행복했고

사랑에 두 어깨 깊이 울먹였으니

그대 이제 물 깊이 그리움 심었으리.

기다리는 이 없어도 물가에서

돌아노는 저녁 길

그대 이 길 돌멩이, 풀잎 하나에도

눈 익어 정들었으니

이 땅에 정들었으리.

더 키워 나가야 할

사랑 그리며

하나둘 불빛 살아나는 동네

멀리서 그윽이 바라보는

그대 야윈 등,

어느덧

아름다운 사랑 짊어졌으리



두 번은 없다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두 번은 없다.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런 예습 없이 태어나서

아무런 복습 없이 죽는다.

우리가, 세상이란 이름의 학교에서

가장 바보 같은 학생일지라도

여름에도 겨울에도

낙제란 없는 법.

반복되는 하루는 단 한 번도 없다.

두 번의 똑같은 밤도 없고,

두 번의 한결같은 입맞춤도 없고,

두 번의 동일한 눈빛도 없다.

어제, 누군가 내 곁에서

네 이름을 큰 소리로 불렀을 때,

내겐 마치 열린 창문으로

한 송이 장미꽃이 떨어져 내리는 것 같았다.

오늘, 우리가 이렇게 함께 있을 때,

난 벽을 향해 얼굴을 돌려버렸다.

장미? 장미가 어떤 모양이었지?

꽃이었던가, 돌이었던가?

힘겨운 나날들, 무엇 때문에 너는

쓸데없는 불안으로 두려워하니?



런던에서 불타 죽은 아이의 죽음을 애도하기를 거부함

딜런 토마스

 

결단코

사람 만드는

새 짐승 꽃 낳는

모든 것 눌러버리는 어둠이

마지막 터 오는 빛과

조용한 시간이

털그덕거리며 바다에서 나왔다고

침묵으로 말하기 전에는

 

그래서 이 몸 다시금 둥근

물방울의 시온성으로

밀 알갱이의 예배당으로 들어가야만 하기 전에는

소리의 그림자조차도 기도하든가

내 짠 씨앗을

조금이라도 베옷 골짜기에 심어

 

아이의 장엄히 타오르는 죽음을 슬퍼하지 않으리라.

무덤같이 심오한 진리와 함께

아이가 갈 곳으로 간 사실을 인간에게서 빼앗지 않을 것이며

천진스런 어린이 운운하는 엘레지를

괜스레 또 하나 지어서

목숨의 당연한 길목들을 모독하지 않으리라.

 

처음 죽은 자들과 더불어 런던의 딸은 누워 있다.

길고 오랜 친구들,

태고 이전의 알갱이들, 엄마의 검은 핏줄들에 옷 입듯 싸여서.

달리는 템스 강의 울지 않는 물가에 남 모르게.

첫 죽음 뒤에 다른 죽음은 없다.



죽음을 향해 똑바로

피에르 르베르디

 

아침이 겨우 그 눈을 뜨려 했다

거인 같은 사람들이 지나갔던 길 위에서

그 홀로 냉담한 눈들 사이에서 자기 공을 굴렸다

그의 모든 고통은 타인들에게 낯설고 그는 그들이

고통을 지녔는지 알려고 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어디로 가는가

만원열차들은 울리는 음악 보표(譜表)들

천상의 목소리들 그들은 전선에 걸리고

레일 위로 다시 떨어져 떠난다

눈물 젖은 전보로

사람들은 희망이 길 위에 그리고 가정에 깨어 있기를 기대한다

내일 저녁이 그의 위로 드넓은 눈꺼풀을 감고

공포가 빛만큼 지속되리

 

지옥의 공간을 지나야 한다

유례없을 정도로 위험을 무릅써야 하고

떠나고 돌아오고 가야 한다

말라붙은 가슴 속에 마침내 이제 눈물은 없다

―회오리 바람이 그를 기습했다―

그리고 밤이 되자 그는 영원히 쓰러졌다

아무도 그가 발음했던 이름을 듣지 않았다



사랑

김남주

 

사랑만이

겨울을 이기고

봄을 기다릴 줄 안다

사랑만이

불모의 땅을 갈아엎고

제 뼈를 갈아 재로 뿌릴 줄 안다

천 년을 두고 오늘

봄의 언덕에

한 그루의 나무를 심을 줄 안다

그리고 가실을 끝낸 들에서

사랑만이

인간의 사랑만이

사과 하나 둘로 쪼개

나눠 가질 줄 안다



나와 함께 모든 노래가 사라진다면

김남주

 

내가 심고 가꾼 꽃나무는

아무리 아쉬워도

나 없이 그 어느 겨울을

나지 못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땅의 꽃은 해마다

제각기 모두 제철을

잊지 않을 것이다.

 

내가 늘 찾은 별은

혹 그 언제인가

먼 은하계에서 영영 사라져

더는 누구도 찾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하늘에서는 오늘밤처럼

서로 속살일 것이다.

언제나 별이

 

내가 내켜 부른 노래는

어느 한 가슴에도

메아리의 먼 여운조차

남기지 못할 수 있다.

그러나 삶의 노래가

왜 멎어야 하겠는가

이 세상에서......

 

무상이 있는 곳에

영원도 있어

희망이 있다

나와 함께 모든 별이 꺼지고

모든 노래가 사라진다면

내가 어찌 마지막으로

눈을 감는가.

 


작년 이맘때 나는 죽었다

에밀리 디킨슨

 

작년 이맘때 나는 죽었다,

내 운구가 농장 옆을 지날 때

옥수숫대 소리를 들었다

술이 달려 있었다

 

리처드가 제분소로 갈 때면

얼마나 노랗게 보였던가 생각하니

밖으로 나가고 싶었다

그러나 그 무엇이 내 뜻을 막았다

 

빨간 사과들이

그루터기 사이사이에 박혀 있고

들판을 빙 둘러 마차들이 기우뚱 서서

호박을 싣고 있겠거니 생각했다

 

누가 나를 가장 그리워하지 않을까 궁금했다

추수 감사절이 되어

아버지가 똑같이 담으시려고

접시 수를 늘인다면―

 

크리스마스 흥이 깨질 텐데

내 양말이 너무 높이 걸려 있어

산타클로스의 손이

내 높이까지 닿지 않으니

 

이런 식의 생각이 나를 슬프게 했다

해서, 달리 생각해 본다

다음 어느 완전한 시절, 그 때에는

그들이 반드시 나를 찾아올 것이라고



문의 마을에 가서

고은

 

겨울 문의에 가서 보았다.

거기까지 닿은 길이

몇 갈래의 길과

가까스로 만나는 것을.

죽음은 죽음만큼 길이 적막하기를 바란다.

마른 소리로 한 번씩 귀를 닫고

길들은 저마다 추운 쪽으로 뻗는구나.

그러나 삶은 길에서 돌아가

잠든 마을에 재를 날리고

문득 팔짱 끼어서

먼 산이 너무 가깝구나.

눈이여 죽음을 덮고 또 무엇을 덮겠는가.

겨울 문의에 가서 보았다.

죽음이 삶을 껴안은 채

한 죽음을 받는 것을

끝까지 사절하다가

죽음은 인기척을 듣고

저만큼 가서 뒤를 돌아다본다.

모든 것은 낮아서

이 세상에 눈이 내리고

아무리 돌을 던져도 죽음에 맞지 않는다.

겨울 문의여 눈이 죽음을 덮고 또 무엇을 덮겠느냐



빈 집

기형도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맺음시

라이나 마리아 릴케

 

죽음은 위대하다.

우리는 웃음을 띤

그의 입일 뿐이다.

우리가 삶 한가운데 있다고 생각하면,

죽음은 우리 가슴 깊은 곳에서

마구 울기 시작한다.



진혼곡(鎭魂曲)

- 클라라 베스트호프에게 바칩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

 

한 시간 전에 이 세상에 사물 하나가 더

생겨났다. 꽃다발 하나가 탄생한 것이다.

조금전만 해도 엉크러진 나뭇잎이던 그것을 내가 엮었다.

그런데 이제 이 담쟁이 덩굴은 이상하리만큼 무겁고,

나의 사물들이 맞이할 미래의 밤들을 모두

마셔버린 듯 그토록 어둠으로 가득 차 있다.

덩굴들이 둥근 테를 따라 마무리되고 나면,

무엇이 될까 전혀 모르는 채

만든 이 꽃다발과 더불어 이제 혼자

오늘 밤을 맞으려 하니 두려움이 앞선다.

그러나 내가 확인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 무엇을 만들어내는 일이 너무나 힘들다는 것뿐.

그 언제나 내가 한 번 보았음에 틀림없는 놀라운

사물들이 자리한, 한 번도 들어가 본 적 없는

생각들 속으로 들어가 그 얼마나 헤매였던가…

 

…뛰놀던 아이들이 잡아뜯은 꽃들이 강물을 따라

흘러간다. 풀려진 손가락들 사이로 한 송이

한 송이 떨어졌다. 마침내 꽃다발의 형체를 몰라볼 정도가

될 때까지 떨어졌다. 그들이 집으로 가져간 나머지가

태우기에 적당한 정도가 될 때까지 떨어졌다. 그러면

모두들 잔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한 사람이 남아

꺾여진 꽃송이들을 위해 한밤 내내 울 수 있었다.

 

그레텔아, 너는 태어날 때부터

그처럼 일찍 죽을 운명이었다,

금발머리로 죽을 운명이었다,

태어날 운명이 정해지기 이미 오래 전에.

그리하여 주께서는 네 앞에 언니 하나와

그 다음에는 오빠 하나를 보내셨다.

이는 네 앞에 가깝고, 깨끗한 두 사람을 두어

네게 죽음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네 것을,

네 죽음을 알리기 위한 것이었다.

너의 형제들은 일부러 보내진 것이다,

단지 네가 죽음에 익숙해지고, 또

두 번의 죽음의 자리를 보면서,

수천년 전부터 너를 위협해온

세 번째의 죽음의 시간과 네가 화해토록 하기 위함이었다.

너의 죽음을 위해서

생명들은 생겨난 것이다.

꽃송이들을 묶던 손들,

장미는 붉게

사람들은 힘차게 느꼈던 시선들,

이것들을 사람들은 만들었다가 다시 없애고,

두 번씩이나 죽음을 지었다,

죽음이 네 자신을 향해서

불꺼진 무대에서 걸어나오기 전까지.

 

… 사랑하는 동무야, 죽음은 네게 무섭게 다가갔느냐?

죽음이 너의 적이었느냐?

너는 가슴으로 죽음을 쓸어안고 울었느냐?

죽음이 너를 따듯한 베개에서

온집안 누구도 잠자지 않는

깜박이는 밤 속으로 잡아끌었느냐……?

죽음의 모습은 어떠했느냐?

너는 그것을 알아야 한다…

그것을 위해 너는 고향으로 갔다.

………………………………

너는 편도들이 꽃피는 모양과

푸른 바다의 모습을

알고 있다.

첫사랑을 경험한

여인의 감정 속에만 깃들어 있는

많은 사물들을 너는 알고 있다. 남국의

늦게 밝아오는 나날들 속에서 자연은

너에게 끝없는 아름다움을 속삭였다,

둘이서 함께 하나의 세계와 하나의 목소리를

지닌 복된 사람들을 향해

복받은 입술들만이 말할 수 있는 그 아름다움을.

참으로 살며시 너는 그 모든 것을 느꼈다,

(오 그런데 그 얼마나 한없이 섬뜩한 것이

너의 끝없는 겸손에 손을 댔는가).

남국에서 온 너의 편지들은

남국의 햇빛을 쬐어 따뜻했지만, 쓸쓸해보였다,

마침내 너는 몸소 너의 지치고 애원하는

편지들의 뒤를 이어 이리로 날아왔다.

너는 반짝이는 빛 속에 있는 것이 싫었던 것이다.

모든 빛깔들은 네 어깨 위에 마치 죄처럼 놓여 있었고,

너는 초조함에 어쩔줄 모르고 살았다.

그것이 전부가 아님을 너는 알고 있었던 까닭이다.

삶이란 단지 일부에 불과할 뿐이다……무엇의?

삶이란 단지 음(음) 하나에 불과할 뿐이다…… 무엇 속의?

삶이란 점점 커가는 공간의 많은 순환들과

연결될 때에만 의미를 지닌다.

삶이란 꿈 속의 꿈일 뿐이다,

 

깨어 있음은 다른 어느 곳에 있다.

그러기에 너는 삶을 풀어주었다,

위대하게 삶을 풀어주었다.

우리는 어린 너의 모습을 알고 있다.

네 것은 그리 많지 않았다, 조그만 미소 하나와, 작고

언제나 우수어린 분위기에 젖은

참으로 부드러운 머리카락과, 네 언니가 죽은 후 좀 넓어진

조그만 방 하나가 전부였다.

이제와 생각해보니, 다른 모든 것은 겉에 걸친

너의 옷에 지나지 않았던 것 같다, 말 없는 동무야.

그러나 네가 가진 본질은

매우 다채로웠다. 저녁 때 네가 방으로 들어오면,

우리는 그것을 가끔씩 느끼고 있었다. 또한 우리는

가끔씩 알고 있었다, 이제 기도해야 한다는 것을.

뭇사람들이 방으로 들어왔다,

네 뒤를 따라 방으로 들어왔다,

네가 그 길을 알고 있는 까닭이다.

그리고 너는 그 길을 알아야 했고,

그 길을 어제

알게 되었다…

자매들 중 가장 어린 나이로.

 

여기를 보라,

이 꽃다발은 그렇게도 무겁다.

사람들은 꽃다발을 네 몸 위에 얹어놓을 것이다,

이 무거운 꽃다발을.

네 관이 그것을 견뎌낼까?

그 검은 무게를 못이겨

관이 부숴진다면,

네 옷의 주름 속으로

담쟁이 덩굴들은 기어들리라.

담쟁이 덩굴은 높이 올라가기도 하며,

네 몸 주의를 빙둘러싸기도 하고,

그리고 그 덩굴 속에서 움직이는 수액은

쏴하는 소리로 너를 불안케 할지도 모른다.

그리도 순결한 너이기에.

그러나 너는 더 이상 닫혀져 있지 않다.

너는 퍼진 모습으로 부드럽게 풀려 있다.

너의 몸의 문들은 반쯤 열려 있고,

축축한 담쟁이 덩굴이

그 속으로 들어갔다……

………………………………

 

덩굴들은

검은 줄을 잡고

간신히 앞으로 나아가는

늘어선 수녀들과 같다,

네 몸 속이 어두운 까닭이다, 너 샘이여.

너의 핏줄의 텅빈 복도를 따라

그들은 너의 심장을 향해 몰려간다.

그곳은 예전엔 너의 부드러운 고통들이

창백한 기쁨, 추억들과

만나던 곳,

그들은 마치 기도하듯

심장 속으로 거닌다, 이제 고동소리도 멎어

모든 것에 문을 열어놓은 어두운 심장 속으로.

 

그러나 이 꽃다발은

빛 속에서만, 여기 내 곁에

살아 있는 사람들 속에서만 무겁다.

그리고 내가 꽃다발을

너에게 놓기만 하면

그 무게는 더 이상 없다.

대지는 균형으로 가득 차 있다,

너의 대지는.

꽃다발은 꽃다발에 매달린 나의 눈길로 무겁고,

꽃다발을 만들기 위해 내딛은

나의 발걸음으로 무겁다.

꽃다발을 본 모든 이들의 불안이

그 꽃다발에 달라붙어 있다.

꽃다발을 받아라, 마무리된 뒤부터

그것은 네 것이니까.

그것을 내게서 가져가라.

나를 혼자 두어라! 꽃다발은 손님과 같다…

나는 그 꽃다발에 부끄러움 같은 것을 느낀다.

너도 두려움을 느끼는가, 나의 친구여?

 

너는 더 이상 걸을 수 없지?

너는 더 이상 나의 방에 함께 서 있을 수 없지?

너는 발이 아프지?

그러면 모두 함께 있는 그곳에 머물러 있어라,

나웃잎 다 떨어진 가로수길을 딸라

내일 꽃다발을 네게 가져다줄 테니, 나의 아이야.

그 꽃다발을 네게 갖다줄게, 안심하고 기다려라,

사람들은 내일이면 네게 더 많이 갖다주리라.

내일 주위가 시끄럽고 혼란스럽다 해도,

그로 인해 꽃들이 상처를 입지는 않을 것이다.

사람들은 꽃들을 네게 갖다주리라, 너는 그것들을

확실히 받을 권리가 있다, 얘야,

내일이 되어 그 꽃들이 검고 좋지 않게

이미 시들어 있을지라도

그렇다고 해서 두려워 하지는 말아라, 너는 무엇이 올라가고

또 무엇이 떨어지는지 더 이상 구별할 수가 없을 테니까.

네게 색깔들은 닫혀 있고, 소리들은 텅 비어 있고,

또 너는 너에게 꽃을 갖다주는 사람들이

모두 누구인지 전혀 모를 테니까,

 

이제 너는 우리가 어둠 속에서 붙잡기 무섭게

우리를 뿌리치는 다른 존재를 안다.

네가 동경했던 것에서 이제 너는

지금 네가 지니고 있는 것으로 구원되었다.

우리들 사이에서 너는 작은 모습이었지만,

이제 너는 바람과, 나뭇잎들 스치는 목소리를 지닌

다 자란 숲인지도 모른다.

동무여, 내 말을 믿으라, 네게는 아무 폭력도 일어나지 않을테니:

너의 삶이 시작되었을 때,

너의 죽음은 이미 늙어 있었다.

그래서 죽음은 삶을 습격하고,

삶은 죽음을 견뎌내지 못한 것이다.

 

………………………………

내 주위에서 무언가가 움직였는가?

밤바람이 들어왔는가?

나는 떨지 않았다.

나는 혼자서도 강하다.

오늘 내가 무엇을 만들었나?

…… 저녁에 담쟁이 덩굴을 가져다가 그것을 엮었다,

그것이 완전히 말을 들을 때까지 구부려서 한데 합쳤다.

아직도 그것은 검은 광채를 발하고 있다.

그리고 나의 힘은

꽃다발 속에 맴돌고 있다.



생과 사

김소월

 

살았대나 죽었대나 같은 말을 가지고

사람은 살아서 늙어서야 죽나니,

그러하면 그 역시(亦是) 그럴듯도 한 일을,

하필(何必)코 내 몸이라 그 무엇이 어째서

오늘도 산(山)마루에 올라서서 우느냐.



담쟁이

도종환

 

저것은 벽

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우리가 느낄 때

그 때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

물 한 방울 없고 씨앗 한 톨 살아 남을 수 없는

저것은 절망의 벽이라고 말할 때

담쟁이는 서두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한 뼘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간다.

푸르게 절망을 다 덮을 때까지

바로 그 절망을 잡고 놓지 않는다.

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담쟁이 잎 하나는 담쟁이 잎 수천 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



잃어버린 선물

심보선

 

이별은 다른 별에서 온 전언

매일매일 죽는 우리에 대한

그러나 받아들일 수 없다

믿을 만한 죽음은 항상 맨 나중 것이기에

네게서 받은 이상한 선물

다른 별에서는 사랑스런 생물이었고

이 별에서는 무서운 사물이었던

그것을 무어라 불러야 했을까

그것을 잃어버렸다

이름도 없어 처량한 그것을

어느 날 밤에

무심코 떨어지는 유성

십 년 전에 멈춘 시계

내 손이 앉았다 떠난 어깨

먼 외계에서 멸망하고 있는 그것들이

길고 낮게 숨쉬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

들으면서 흐느껴 운 적이 있다



작별들

파블로 네루다

 

안녕, 안녕, 한 곳에게 또는 다른 곳에게,

모든 입에게, 모든 슬픔에게,

무례한 달에게, 날들로 구불구불 이어지다가

사라지는 주 週들에게,

이 목소리와 적자색으로 물든

저 목소리에 안녕, 늘 쓰는

침대와 접시에게 안녕,

모든 작별들의 어슴푸레한 무대에게,

그 희미함의 일부인 의자에게,

내 구두가 만든 길에게.

 

나는 나를 펼친다, 의문의 여지 없이;

나는 전 생애를 숙고한다,

달라진 피부, 램프들, 그리고 증오들을,

그건 내가 해야 하는 것이었다,

규칙이나 변덕에 의해서가 아니고

일련의 반작용하고도 다르다;

새로운 여행은 매번 나를 사로잡았다.;

나는 장소를, 모든 장소들을 즐겼다,

 

그리고, 도착하자 또 즉시

새로 생긴 다감함으로 작별을 고했다

마치 빵이 날개를 펴 갑자기

식탁의 세계에서 달아나듯이.

그리하여 나는 모든 언어들을 뒤에 남겼고,

오래된 문처럼 작별을 되풀이했으며,

영화관과 이유들과 무덤들을 바꾸었고,

어떤 다른 곳으로 가려고 모든 곳을 떠났다;

나는 존재하기를 계속했고, 그리고 항상

기쁨으로 반쯤 황폐해 있었다,

슬픔들 속의 신랑,

어떻게 언제인지도 모르는 채

돌아갈 준비가 되어 있고, 돌아가지 않은.

 

돌아가는 사람은 떠난 적이 없다는 말이 있다,

그러니 나는 내 삶을 밟고 되밟았으며,

옷과 행성을 바꾸고,

점점 동행에 익숙해지고,

유배의 큰 회오리바람에,

종소리의 크나큰 고독에 익숙해졌다.

 


미라보 다리

기욤 아뽈리네르

 

미라보 다리 아래 센 강은 흐르고

우리의 사랑을

나는 기억해야 하는가

기쁨은 항상 슬픔 뒤에 왔었다

 

밤이여 오라 종이여 울려라

날들은 가고 나는 머무네

 

손에 손을 잡고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남아 있자

우리 팔의 다리 아래로

영원한 시선의 그토록 지친 물결이

지나가는 동안

 

밤이여 오라 종이여 울려라

날들은 가고 나는 머무네

 

사랑은 가버린다 저 흐르는 물처럼

사랑이 가버린 지금

삶은 얼마나 느린가

그리고 소망은 얼마나 격렬한가

 

밤이여 오라 종이여 울려라

날들은 가고 나는 머무네

 

날들이 지나가고 달들이 지나간다

지나간 시간도

사랑도 돌아오지 않는다

미라보 다리 아래 센 강은 흐르고

 

밤이여 오라 종이여 울려라

날들은 가고 나는 머무네



내가 노래하는 까닭

다니카와 슌타로

 

내가 노래하는 까닭은

한 마리 새끼 고양이

비에 젖어 죽어가는

한 마리 새끼 고양이

내가 노래하는 까닭은

한 그루 느티나무

뿌리를 끊겨 말라가는

한 그루 느티나무

내가 노래하는 까닭은

한 명의 남자

눈을 돌리고 움츠러든

한 명의 남자

내가 노래하는 까닭은

한 방울의 눈물

울분과 자책의

한 방울의 눈물



사건에 휘말린 어느 개의 독백 (콜론, 2005)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개들은 다양하다. 하지만 나는 선택된 개였다.

혈관에는 늑대의 피가 흐르고, 그럴듯한 족보도 있었다.

자연의 향기를 듬뿍 마시며, 고산 지대에서 살았다.

햇빛이 쨍쨍할 땐 풀밭에서, 비가오면 전나무 숲에서,

눈이 내릴 땐 동토凍土에서 지냈다.

 

번듯한 집도 있고, 시중드는 사람도 있었다.

내게 먹이를 공급하고, 씻기고, 빗질하고

우아하게 산책을 시켜주었다.

그것은 친밀감의 차원이 아닌 존경의 표시였다.

내가 누구의 개인지 모두들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기에

 

몸에 이가 들끓는 하찮은 잡종들도 주인을 가질 순 있다.

하지만 주의하시라 - 함부로 비교해서는 안 되는 법

내 주인은 정말 특별한 종류의 사람이었다.

화려한 무리들이 늘 그의 뒤를 졸졸 쫓아다니며

두려움과 찬탄이 뒤섞인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내게는 다들 질투섞인 비웃음만 보냈다.

왜냐면 풀쩍 뛰어올라 주인을 맞이할 권리는

나한테만 주어졌기에

바짓부리를 이빨로 잡아끌며 작별 인사를 하는 것도

그의 무릎에 머리를 파묻는 것도

내게만 허락된 일이었기에

그가 쓰다듬거나 귀를 잡아당기는 대상은

오로지 나뿐이었기에,

단지 나만이 그의 곁에 앉아 자는 척할 수 있었고

그때마다 나를 향해 몸을 숙인 채

뭔가를 속삭이는 그의 목소리를 듣는 것도

나 혼자만 누릴 수 있는 특권이었으므로.

 

주인은 다른 이들에게는 종종 화를 내고 사납게 굴었다.

그들과 다투고, 소리를 지르고.

초조한 듯 이리저리 뛰어다니기도 했다.

그는 오직 나만 좋아한다고.

절대로, 그 누구도 좋아하지 않는다고 확신했다.

 

물론 내게 주어진 의무조항도 있었다: 기다리기, 그리고 믿음을 가지기

주인은 잠깐 나타났다가 오랫동안 사라지기 일쑤였으므로.

골짜기 너머에서 무엇이 그를 붙잡는지 알 수는 없었다.

하지만 뭔가 중요한 일 때문이라는 건 짐작할 수 있었다.

적어도 내가

고양이나 기타 쓸데없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것들과

티격태격하는 일만큼이나 중요한 일임에 틀림없었다.

 

하지만 운명이란 변화무쌍한 것, 내 것 또한 갑자기 변했다.

어느날 봄이 찾아왔을 때,

그는 더 이상 내 곁에 없었다.

알 수 없는 야단법석이 온 집안을 휩쓸었다.

상자와 트렁크, 궤짝이 자동차에 실렸다.

산 밑으로 내려가는 요란한 바퀴 소리도 잠시,

모퉁이 저편에서 잠잠해졌다.

 

발코니에서 부서진 가구와 넝마 조각들이 불태워졌다.

노란 상의와 검은 마크가 새겨진 완장들

무수히 많은 낡은 상자들과

그 속에서 와르르 쏟아져 나온 깃발들도 함께.

 

난장판 속에서 나는 하염없이 서성거렸다.



슬랩스틱 코미디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만일 천사가 있다면,

절망으로 끝난 희망에 대한

우리의 소설을 그들이 과연 읽고 싶어 할는지

의심스럽다

 

애석하게도, 그들은 세상에 대한 원망으로 가득 찬

우리의 시를 외면할 것 같아서

두려움을 느낀다

 

우리의 연극 속에 등장하는

비명과 경련은 -짐작건대-

그들에겐 견디기 힘든 고통이리라

 

천사의 임무를 수행하던 중에

비번을 맞은 천사들,

그러니까 비인간적인 그 존재들은

우리를 보면서

무성영화 시대의 슬랩스틱 코미디를 떠올리리라

 

옷깃을 갈기갈기 쥐어뜯고,

고통으로 이를 갈며,

탄식하고 울부짖는 자들보다는

-적어도 내 생각으론-

물에 빠져 허우적대다가 지푸라기 대신 가발을 움켜잡거나

배고파서 자신의 구두끈을 게걸스럽게 먹어 치우는

저 불쌍한 사내를

훨씬 선호하리라

 

허리에서 위쪽으로는 뜨거운 가슴과 열정,

하지만 그 아래 바짓가랑이 속에는

겁먹은 생쥐 한 마리.

오, 그래,

그들은 틀림없이 손뼉 치며 환호하리라

 

끊임없이 계속되던 무모한 추적은

도망자들을 피해 도망가는 탈주로 뒤바뀐다

터널의 끝에서 기다리는 한 줄기 빛은

호랑이의 눈동자임이 밝혀진다.

백 가지 재앙은

백 가지 심연위를 구르는

백 가지 익살스러운 재주넘기로 탈바꿈한다

 

만일 천사가 존재한다면

-부디 바라건대-

그들을 납득시킬 수 있어야 하리라

공포 속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으면서도

모든 것이 완벽한 적막 속에 자행되기에

차마 '살려달라'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는

이 아슬아슬한 쾌락의 본질을

 

용기 내어 추측해보건대

아마도 그들은 날개를 접었다 폈다 하며

신나게 박수를 치리라.

그들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는 것은

절대로 슬퍼서가 아니다. 그저 너무 많이 웃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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