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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을 위한 시민문화 워크숍글 수 603
평화워크숍 마지막 12월 16일 w/이마까라 내가 할 수 있는 평화의 움직임이란 것은 답이 없고, 각자의 내용과 각자의 주제로 만들어가는데에 내가 도움이 될까 싶어 같이 이야기하구요, 오늘은 어깨동무에 대해서 이야기하려고 해요. 예전에 여기저기 다니면서 홍보하느라 만든 압축적인 자료로 이야기하는 자료인데, 볼까요. 그냥 질문하는 것인데, 사람이 사물을 인지하는 방법이 느끼는 만큼 보이고 안다고 생각하세요, 아는만큼 느끼고 보인다고 생각하세요? 이게 평화에 대한 것이나, 북녘에 대한 것도 관련되어있어서 문제 제기하는 식으로 보여드리는 것이에요. 일반적으로 그렇다-는 것은 뒤에 가서. 지금은 북쪽에 대해 다양한 정보가 있어서 여러분들이 알고 있는 것들이 많지만 예전에는 딱 블랙박스 같았어요. 북한이라는 나라가 있는데 어떤 나라인지 아무도 모르고, 사람이 사는지 안 사는지 이야기해주지 않았을때 어깨동무가 활동을 시작한것인데, 남녘과 북녘 어린이가 어깨동무하는 그림처럼 어깨동무하자는 뜻이에요. 어깨동무할 때 키가 비슷하지 않으면 불편하잖아요? 신체적인 차이에서, 혹은 마음의 차이에서 같아질 수 있도록 활동하며 기다림과 준비하는 단체입니다. 남북 어린이 어깨동무할때 남북은 한반도를 놓고서 생각하시는 분들 많은데, 이 단체가 공동육아에서부터 시작되었고 모든 어린이가 같이 자라나고 지내는 것처럼, 한반도 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빈곤과 부의 차이인 남북의 모든 어린이가 잘 살수 있도록 준비하는거에요. 앞으로 통일 되었을 때에는, 지금 어린이들이 1세대일텐데 나중에 북쪽에 친구들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면 어떻게 되겠나 싶어서 철학적이든 어떤 방향으로 접근하기보다는 우선 알고 아이들을 준비시키자는 거죠. 처음에는 안녕, 친구라는 프로젝트를 진행했는데 남녘 어린이들한테 자기 그림을 그리고 편지를 써 보내는 켐페인이었는데 너희가 식량난이 생겼고 식량을 주고 싶어라고 쓰면 마음은 알겠지만 우선 너를 소개하는 편지를 쓰라고 해요. 그림이나 글씨를 못쓰면 손과 발 도장을 찍어 보내죠. 당시 북쪽에 대한 지원에 대해서도 미비한 상황이었고 민간단체가 독자적으로 도울 수도 없고 적십자를 통했어야 했어요. 부모님 세대들은 자기들은 북쪽에 대해 어떤 지식도 없고 정확히 아는 바도 없는데 우리 아이들은 알게하고 친구하게 하자는 인식의 전환이 있었어요. 본격적으로 북한에 식량난이 터졌을 때 '북녘어린이에게 쌀을'이라는 행사로 많은 사람들이 쌀을 모았는데 사실은 준다고 줄 수 있는 것은 확실치 않았지만 내 가족, 내 친구를 돕는다는 마음으로 참여하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북녘 어린이 살리기 행진 행사를 98년도에 어개동무 통일대행진을 어린이들과 함께 했는데, 살이 데일 정도로 날이 뜨거웠는데 끝까지 걸은 아이들은 우리가 기업에 스폰을 받아서 그 아이들의 이름으로 북녘에 기부를 할 수 있게 하는 행사였어요. 마지막은 북쪽에 편지, 자기 이름, 쪽지를 써서 풍선에 달아 떠나보내는 순서가 있는데, 풍선을 날리기 전에 이사장님이 북녘 아이들이 듣게 소리치자고 하는, 콘티에도 없던 일이 생겼어요. 아이들이 메세지쓰면서 훌쩍훌쩍 울고 있는데 이사장님이, 또 거기있던 어른들이 이런 분단상황이 있는데 어린이들의 시선으로 문제를 풀어내지 못한 것에 미안한 마음이 들었나봐요. '아이들아! 살아만 있어다오, 우리가 갈께!'라고 소리치자 마침 북녘으로 바람이 불어서 풍선이 잘 날아갔어요. 남쪽 아이들의 그림을 가지고 북녘에 전달하러 간 적이 있었는데, 거기 있던 만경대 학생소년 궁전이라는 일종의 예술학교 아이들 중에 어떤 아이가 너의 소개를 쓰고 그림을 그려달라고 하자 '네!'라고 대답하고 새를 그리는 거에요. 그 아이가 한국화를 수업받느라고 계속 한동안 새만 그렸던 아이여서 그랬데요. 그 학교에서는 체육, 미술, 음악 이런 종류의 예체능에 특출난 아이들을 모아서 훈련하는 학교인데, 그 새만 그리던 아이한테 4~5번 설명을 전하니까 그제야 자기 얼굴과 소개를 써주더라구요. 북녘아이들도 남녘아이들과 똑같이 한반도를 그리거나 서로 뭘 배우냐고 물으면서 통일을 바란다고 썼던 게 기억나요. 북쪽 아이들의 사망 1,2위가 설사와 폐렴이에요. 설사를 많이 하면 탈수를 많이 하게 되는데, 기본적으로 영양상태가 좋으면 문제없지만 영양상태가 나쁘기 때문에 점차 내장기관이 썩어들어가고 죽게되거나 폐렴은 약이 없다보니 면역이 약해져 죽는 경우가 많다. 어머니가 영양상태가 나빠서 출산 후에 충분한 젖을 먹이지 못하는 일도 많았어요. 남과 북의 교류를, 평화운동을 목적으로 남과 북의 아이들의 몸과 키를 맞추자는 것이 어깨동무의 주사업이 되었어요. 96년도 부터 북측으로 인도적 지원을 시작한거죠. 일단 아이들을 먹이자!해서 영양 사업을 하고, 의료 사업을 하는 것이 일반적인 대북 지원 단체의 사업인데 우리는 다음 통일 세대를 통일을 맞았을 때 같이 살 수 있는 준비를 시키는 교육 사업을 시작했죠, 하지만 처음에는 의료, 영양 사업은 그렇다쳐도 북쪽에서 교육은 시키는데 그것까지 우리가 알아서 해야 하냐며 반대의견도 많았죠. 두유를 북한에서는 콩우유라고 하는데, 우리가 한번은 북한 접경지역의 중국으로 가서 아이들의 영양상태를 조사한 적이 있어요. 처음에는 콩우유 사업을 하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고, 작은 빵을 하나 먹으면 하루에 필요한 영양분과 칼로리를 섭취할 수 있는 영양빵을 개발했는데, 그런 지원을 하면 다 북한 군인들이 먹는다는 회의적인 의견이 많아서 그러면 어른이 들고 먹기도 좀 그렇게 아주 어린이용 처럼 포장하자는 아이디어를 냈었어요. ... ... 의료사업에서는 중구난방식으로 어른들도 아이들도 이렇게 하지않고 어깨동무는 아이들 지원과 연결된 단체이기 때문에 아이들 먹거리로만 긴급구호를 보내고, 아이들 전문 병동만 짓는 쪽으로 가고 북쪽의 아이들에게 샤프와 볼펜을 생산할 수 있게 북쪽 전역에 중고생 400만명 아이들에게 하나 씩 줄 수 있도록 공장을 설립했어요. 이런 지원사업은 단순히 지원에서 끝나지 않고 특정한 공간을 지어서 지속될 수 있도록 계속 물자를 공급하고 계속되는 사람과의 관계가 중요하기 때문에 어깨동무는 공간, 물품 그리고 지속적인 사랑을 원칙으로 잡고 있어요. 북측에 지원으로 지어진 건물들을 보면 참 쉽게 지어진다고 생각할 수 있겠는데, 예를 들면 설사와 폐렴을 치료하는 전문 병동을 만들자고 의견을 내고 조율하는 데에 만 2년이 걸린 적도 있었다. 최근까지도 대북사업을 하면서 제 숙제가 같은 말을 사용하는데도 왜 이렇게 소통이 힘들까라는 생각을 해요. 북한은 처음에 남한에 평양 이외의 지역을 개방하지 않았어요. 남쪽 사람이지만 미국 시민권자는 여기저기 쉽게 잘 다닐 수 있지만 다른 사람은 그렇지 않아요. 북한 사람들은 어릴 때부터 정형화된 이념교육으로 철저한 체제를 지키고자 하기 때문에 너무 많은 남쪽과의 교류를 국가 기반의 위협으로 생각해서 두려워했어요, 그래서 우리쪽에서도 무조건적인 도움이 아니라 저쪽의 페이스에서도 문을 열기를 기다릴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어요. 평양 같은 경우는 그나마 좀 사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들의 기반과 정신이 흔들리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지역으로 갈 수록 사는 환경이 열악하기 때문에 더욱 쉽게 흔들릴거라고 북한쪽에서는 생각했나봐요. 또 그런 열약하고 가난한 모습을 보여주기 싫었겠죠. 장교리에 가보니까 '아, 이래서 보여주기 싫었겠구나'하고 이해가 되기도 했어요. 우리 시골의 폐허같이 살고 있기도 하고, 병동을 지으려면 정수 상태도 중요해서 우물 좀 보자고 하니까 안된다면서 결국에 우물을 확인하는데에 3개월을 썼다. 우물을 보니까 구덩이 파놓고 빗물이 고인 구정물 웅덩이였다. 이 사람들이 얼마나 열악하고 약한 모습을 보여주기 싫은 자존심과 이 상황을 타개하고 싶은 마음으로 얼마나 갈등했을까 했다. 평양 의학대학병원 소아병동을 지을 때는, 다른 게 아니라 못 같은 물자가 없어서 건물을 못 짓는다. 언제는 공사 속도가 너무 느리길래 봤더니 하나 있던 드릴이 없어져서 망치로 박고 있었는데, 드릴을 다시 달라는 말을 자존심 때문에 하기가 어려워서 그냥 없이 하고 있었다. 이 병원은 우리로 이야기하면 서울대학병원이랑 같은 것이다. 북쪽에서는 우리랑 제도가 달라서 20가구 정도를 담당하는 호담당 의사라는 것이 있어서 매일 집집마다 회진을 도는데, 거기서 진료가 안되면 1차, 2차, 종합병원 이런 식으로 점점 올라가는 식인데, 종합병원에서 소아과가 하나도 없었고, 이 병원에만 있어서 여기에 병동을 짓게 되었다. 처음에는 그냥 아무것도 없이 깨끗한 공간 하나 만들어서 환자들을 옮겨놓기만 해도 나아질 정도로 기존의 시설이 열악했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는 더욱 많은 사람들을 북쪽으로 방문하게 하고, 북쪽 사람들과 접촉할 수 있는 면을 넓히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건물을 짓는데도 공사 관련 각 분야별 인부들을 가게 해서 물건만 주고 마는 것이 아니라 공정 별로 아주 평범한 사람들을 데리고가서 그쪽의 평범한 사람들과 같이 일하는 것이죠. 그럼 남녘 상황은 어땠냐, 하면 그다지 좋지도 않았어요. 어깨동무가 평화사업을 하면서 또 하나 중요했던 것이 남녘의 상황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것이었어요. 남녘에서는 체제 , 이념, 군사 차원의 통일로만 바라보았는데 어깨동무는 사람들의 생각과 의식의 통합이 평화적으로 폭력성을 잠재우고자 했어요. 통일이라는 것이 어느날 사건처럼 일어나는 통일이 아니라 시간이 걸리더라도 천천히 과정으로 있을 수 있는 통일로서 우리의 문제를 해소하는 것이에요. 남쪽은 흡수통일, 북한은 적화통일을 생각하고 있는 제로섬관계에 있는 두 편인데 공생의 관계로서 하나가 되는 것 자체가 통일의 의미가 아니라 우리 사회의 문제를 성찰해서 해소하고 잘 살게 되는 것이 통일이라는 것이다. 우리 사회의 기형적인 문화로, 선거철에 여당이 불리하면 간첩을 만들어서 안보에 대한 불안감을 유리하게 작용시키려 하는데, 간첩은 한 사람의 자백으로는 법적으로 성립이 안되서 그와 친한 사람들을 잡아서 고문해서 거짓자백을 하게 하는 그런 부메랑 효과가 있다. 우리 문화는 모두 의견이 합일되어야지 안정감을 느끼는데, 이것이 여러 의견과 다양성을 두고 못보고 없애려 하는 경향이 있늗데 그것은 혼란이고 그래서 안된다고 한단다. 부산 아시안게임 때 응원문화에 대해서 TV토론이 있었는데 우리가 얼굴 한쪽에는 태극기, 한쪽에는 인공기 그려서 동시에 양쪽을 응원하게 하자는 어떤 교수의 약간 수위높은 말이 있었는데 인터넷에는 저놈 누구냐, 북으로 보내버리라는 식의 반응으로 어떻게 우리나라에서 인공기를 얼굴에 그려넣고 응원할 수 있냐는 획일적인 의견들이 많았다. 우리가 어떤 다양성을 없애는 것들을 해소하고, 다양하게 존재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남한의 반공주의로 북한보다 잘 살아야 한다며 박정희 시대 개발논리가 성행했는데, 그런 논리로 자연과 인간의 관계가 일반적인 자원의 약탈관계가 되는 것처럼 우리가 평화를 생각할 때는 전반적인 고려가 필요하다. 이렇게 거창한 것을 실제로 해석해내고 일하려면 또 다른 문제인데, 그래서 우리는 학교로 가서 어린이들과 북에 대해 정말 사실을 전달하는 부분으로 찾아가는 교육을 했었어요. 북쪽에 대해 아이들이 전혀 모를 때는 일단 사실을 알려줬고, 김대중 대통령이 북쪽에 다녀오고 나서는 텔레비전으로 북한을 처음보고 여러 북한에 대한 무조건적인 긍정 현상이라던지 하는 것들이 생기기도 했었어요. 학년 체제라던지, 만점이 5점이라던지 하는 식의 다른 사실들을 알려줌으로서 우리가 통일로 이야기할 수 있는 것, 그리고 차이로 인해 생길 수 있는 어려운 부분에 대해서 톤다운해서 아이들 시각에서도 생각해보는 거죠. 전에 어디서 북쪽의 어떤 40대 남성이 외박을 했는데, 왜 그럴까요? 라고 질문했더니 당에 끌려가서 교육을 받았다는 대답이 많았는데 북한에서도 상이 나면 상갓집가서 자고 올 수도 있고 친구들끼리 술마시다가 늦을 수도 있는데 남쪽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일종의 선입견이 얼마나 경직되어있는지 알 수 있는거죠. 북녘에 대한 이미지는 여러가지 혼재되어있어요, 같은 민족인데 이념이 다르니까 적이라고 생각하고 북쪽이 묘령의 실체없는 단체가 아니라 유엔에 가입된 하나의 국가로서 알아야 한다며 교육하고, 한 나라의 대표자를 지칭하는 공식적인 것들도 아이들에게 알려주며 예의를 갖추자고 생각했죠. 어깨동무에서는 북녘이라는 말을 북한 대신에 사용하는데, 그것도 서로 다른 이름을 부르는게 아니라 서로가 만났을 때 거부감이 들지 않는 단어를 사용했으면 좋겠다 싶어서 남녘, 북녘 혹은 북측, 남측 이런 식으로 부르자고 정했어요. 이렇게 공존이라는 거대한 계획을 만났을 때 어떻게 할 것인가를 아이들에게 준비하게 하는거죠. 저희가 활동하는 데에 있어 원칙은 일방적으로 하지 않고, 상호 존중의 마음을 가지고 이해하도록 노력하며 한판 승부가 아니라 지속적으로 천천히 단계적으로 해나가며 서로 신뢰할 수 있게 하고, 부끄러운 것을 보이는 것이 부끄럽지 않는 관계가 되어서 부족하다고 말하는 것이 부끄럽지 않게되고, 아이들이 서로 만날 수 있게 하자는 것입니다. 맨처음에 그림을 서로 교환하는 행사를 했을 때 북측에서 이것은 교류이긴 하지만 그 단어는 북측이 체제를 포기했다는 것으로 인민들에게 들릴 수 있으니 써주지 말았으면 한다는 말이 있었다. 교류라는 단어가 그다지 큰 의미가 이닌 것 같아도 그 쪽에서는 그 자체로도 어떤 의미가 있을 수 있으니 상호의 고려가 필요한 것이다. 아직은 아이들간의 교류가 공식적인 단계가 아닙니다. 북쪽 사람들이 남쪽 남자들과 교류하는 것을 가장 부담스러워 하지 않아요. 남자들은 북쪽에서의 경험을 가장 친한 친구에게만 이야기하고, 그 다음으로 아줌마들은 동네방네, 또 아이들은 어디를 가든 자기 경험을 터뜨리므로 농담삼아 통일이 10단계가 있으면 아이들은 9.8단계라고 해요. -개인적 관심 저는 고등학교 때부터 북쪽 특히 어린이, 고아들에 대해서 관심이 많아서 고아원을 들락날락거렸는데, 나중에도 그런 쪽의 일을 막역하게나마 생각했어요. 고아원에서 일하면서 느꼈던게 애들이 불쌍하게만 여겨지는 것이 싫었어요. 제가 일했던 곳이 상록보육원이라는 언론매체에도 자주 나오는 곳이었는데 추석날만 되면 인근 초등학교에 다니는 상록보육원 아이들이 괴로워했어요. 학교에서 상록보육원 아이들 모이라고 해놓고서 협찬받은 똑같은 , 사이즈만 다른 원피스를 주고 그랬는데 아이들은 그게 상처인거에요. 어린 아이들이 정말 잘 누릴 수 있는 시설들을 여러가지 네트워킹을 통해서 도울 수 있는 누구로부터도 무시 안받는 시설을 만들고 싶다고 생각했고 내가 로비스트 기질이 있는가 싶어서 그런 쪽으로 일해볼까? 했어요. 대학원을 졸업할 때 쯤에 나의 길을 어떻게 잡을 것인가 생각해보는데 말씀드렸던 것처럼 북쪽에 대해 관심은 있는데 그땐 NGO에 대한 개념도 별로 없었고 뭘 해야 할지 모르겠는 거에요. 그런데 어느날 연변에서 아동들을 위한 교사를 모집한다는 광고를 보고 내가 교육학과 나왔으니까 자격증도 있겠다 한번 가게 되었어요. 제가 생긴 것보다는 공부를 꽤 좋아했기 때문에 대학원에 갔고, 그래서 어깨동무를 만나게 되었어요. 그 때 든 생각이 '아, 내가 막연하게나마 생각했던 북쪽 관련 일을 할 수 있겠다.'라고 생각해서 어깨동무에서 일하게 되었어요. 내가 일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이 뭐냐면, 97년도에 북녘 어린이에게 쌀을! 이라는 행사에서 준비를 하고 있는데 장소가 용산 전쟁기념관 근처여서 한쪽에서는 미군 헬기가 훈련하느라 계속 올라갔다 내려갔다가 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었지요. 그러다가 어느 남자애 셋이 가방을 메고서 와서는 이 쌀을 빨리 줘야 한다고 말하는 거에요. 아직 행사 시작이 한시간남아서 너희들 김밥이라도 먹고 쉬면서 기다리고 있을래? 라고 말했더니 그 아이들이 아니라고, 빨리 한시라도 전달해야하지 않겠냐고 , 이거 빨리 한시라도 빨리 모으시라고 말하는거에요. 그런 절박한 아이들의 눈빛을 잊지 못해서 아직도 이 일을 하고 있는 것 같아요. 미적지근한 감정과 일이 아니라 절박한 마음이요. 북한에 방문한 어떤 사람들이 처음에는 북한에 대해 어떤 애정이 있이 들어갔다가 정작 당사자는 그만큼 반응해주지 않는다며 실망하고 돌아서는 경우도 많아요. 저는 이데올로기고 뭐고 잘 모르고 아이들 생각만 하고 가는데도 힘들어요. 똑같은 말을 몇번이나 해도 서로 이해가 달라서 몇날이고 이야기하는 경우도 있고 어떤 경우에는 강경하게 정색하며 말해야 할 때도 있는, 그런 피로로 평양에 가면 몸이 평양화가 되고, 평양을 나오면 몸 속에서 혈액이 팍 떨어져나오는 것 같아요. 김영환 씨랑 같은 강제징용 관련 발굴을 갔었을 때, 주위 교수님들이 휴가차 같이 다녀오자고 했는데 저는 엄마같이 아이들 밥해먹이고 하는 일로 가는거라 가면 또 일이구나, 라고 생각했고 97, 98년도 다녀오고 나서 땡이지만 김영환 씨는 그 일을 평생 업으로 삼고 가시는 것처럼 여러분도 각각 평화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게 하고 마음을 끌며 움직이는 것들, 주제들이 있는 것 같고 그런 일들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평화교육에 대해서는 내용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전하는 분위기, 관계 설정도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아프리카에서 축구공 만드는 아이들 이야기를 하면서 빈곤의 격차 등을 이야기하면서 같이 하는 아이들 중 누군가한테 '빨리 이야기해봐'같은 게 아니라 같이 둘러앉아서 이야기나누고 듣는 것이 중요해요. 그런 세팅, 분위기, 과정도 그 내용만큼이나 중요하고 그래서 처음에 저는 너무나 전할 게 많아서 조급하다고 생각하면서 머리로 하는 다름의 이해에 대해서만 고민했다고 생각해요. 여러 일들을 하면서 여러 사건이나 상황에 부딪힐 일이 많고 피로에 몸이 지치기도 하지만 그러면서 몸으로 체험하며 어떤 사람들과 맺는 관계에 대해서, 나와 관련된 실천의 영역에 대해서 고민할 부분이 많은 것 같아요. 그러다보니까 내 일상, 내 주위의 관계들을 내가 어떻게 만들어가는지, 일상에서부터 토대가 만들어지는 평화가 중요한 것 같아요. 대북협력사업을 하면서는 남북통합에 대한 구체적인 고민이 많은데, 오랜 시간 다른 방식으로 떨어져 살면서 단어 하나에도 해석이 다르고 살아가는 방식과 사고가 다른데 저만 해도 북녘 사람들을 만나면서 의사소통하기도 힘들고 도대체 그 코드를 이해하기가 힘들어서 연구해볼까 생각도 했다니까요. 하물며 나중에 남북이 통합해야할 때가 오면 우리가 얼마나 어려움을 겪을까 생각해요. 제가 남북한을 먼저, 많이 갔다온 사람으로서 나중에 제가 거기에 조금이나마 기여할 수 있지 않을까 해요. 다름에 대한 이해- 남북 사람들이 서로 제일 어렵게 생각하는 것 중의 하나가 속도의 차이라고 생각하는데, 교류 초기에 팩스롤 북측에 보내면 답이 안 왔어요. 같은 연락을 7,8번 보내야지 겨우 오고 그랬어요. 언제 방북하는지 확인하려고 계속 연락하는데 그 일정도 딜레이되고 그 쪽에서도 자기들 일정을 계속 맞춰야 하는 거죠. 시공할 때도 북측 인부들은 일을 천천히, 그리고 길게 하지 않는 편인데 저는 그쪽 인부들 보고 속이 터질 지경이어서 어쩌면 저렇게 무기력하고 무능력할 수 있냐고 생각했는데 또 다른 편에서 생각해보면 그 공산주의 체제에서 같이 일하고 같이 생산하는데 주어지는 게 같으면 그 체제 안에서 급하게 일할 사람이 누가 있냐는, 그런 생각도 들더라구요. 여러분들이 새터민들을 만나보셨는지 모르겠지만 그들이 가장 한국 사회에 적응하기 어려워하는 것들이 뭐냐면 이미 습득되어 있는 부분에서 다시 습득해야 하는 부분들이 있는데 사회가 요구하는 것에 미치기 힘드니까 그들이 느끼는 상대적 박탈감이 있을 수 있어요. 통일이 된다면 우리가 해야할 것은 기다리는 것, 속도를 맞추는 일이에요. 저는 최근에 쉬고 있어요. 휴식기인데, 요즘 드는 생각이 평생 이 일을 할 필요가 있지는 않은 것 같았어요. 내가 해온 일을 재밌게 한 것 같지는 않고 해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했던 것 같은데, 그러면 나의 가슴을 뛰게 하는 일은 뭘까요? 나에게 다른 평화운동은 뭘까요? 얼마전에 코칭 프로그램에 연수로 잠깐 참가해본 적이 있는데 그중에 40년 후의 자기 모습을 써보는 시간이 있었어요. 대북사업하면서 많이 힘들고 그래서 다시는 안한다며 그만 정리하려고 했는데 쓰다보니 제가 북쪽 8개도에 어린이 종합센터를 개원하는데 자강도에 마지막 센터를 개원하는 모습을 그리며 쓰고 있는거에요. 내가 정말 하고 싶은 일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쪽에 관련된 일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고, 요즘에 다시 돌아가는 중입니다. 계속 과정인 것 같아요, 내가 무엇인가 하고 있다고 할 때는 어느것도 확실히 정리할 수 있는 일은 없는 것 같아요. 무언가 복잡하고 난잡한 조각들이 모자이크처럼 제 인생을 만들어가고 있다는 생각을 하고, 무언가 명확해야할 필요는 없고 지금 보이는 것도 있고 나중에 보이는 것도 있으니 급하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질문에 답을 가지고 움직인다고 생각하면 평생 못움직일 수도 있어, 움직이다 보면 답을 보이는 경우도 있지. 그런데 그 답이라는 친구는 항상 변화해. 변화무쌍한 정답. 정답이 변화하니까 우리가 할 수 있는, 해야 하는 일들이 무궁무진하다는 것 아닐까? 나, 나의 일상, 나의 관계부터 평화를 실천하는게 시작이다. 그 안에서 비평화적인 것을 찾고, 제거하면서 평화로운 상태를 만들어가는 것, 더 발전적인 평화의 모습을 만들어 가는 것. 이게 바로 평화운동이지. 거창한 평화는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이 해도 돼. 내가 다 해야 하는 일은 아니지. 세상에 있는 약자, 소수자에 대한 감수성을 갖는게 출발인 것 같아요. 예민한 감정이 아니라 섬세한 감수성을 갖는 것이 중요한 것 같다는 생각도 들어요. 그 감수성은 계속 섬세해지도록 연습해야 하는 부분이에요. 이것이 평화운동의 시작이고요. 나에게 평화로운 것이 다른 사람에게 폭력이 될 수도 있다는 이야기, 평화라는 이름으로 전쟁을 가하는 미국의 경우가 있을텐데, 여러분의 글을 읽다보면 다른 사람에게 폭력이 될 수 있기 때문에 무엇 하나 시작하기가 조심스럽다고 느끼는 걸 읽을 수 있었어요. 하지만 이것은 어떻게 보면 아무것도 못하게 하는 것일 수도 있어요. 그런 강박관념이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무엇이든 시작해보는 게 좋다는 것을 생각했으면 해요. 또, 평화라는게 어떤 단계적 학습이 아니에요. 생각하고 있다는 것, 내가 무언가를 위해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UNGO행사 때도 여러분이 그 악기 소리를 내주었기 때문에 한번도 조선학교에 대해 들어보지도 못한 사람들이 그 문제를 알게 되고 관심갖게 되고 지지로 연결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준 것일지도 모르니까요. 최근에 조선학교 다녀오면서 여러 세대의 재일조선인을 만났는데 50대의 선생님들은 북한이, 공화국이 내 나라라는 인식이 있고 남한이 좀 멀기도 한데 내 조국인 것 같기도 한 그런 감정의 줄다리기를 하게 되고, 그 아래 세대로 내려갈 수록 차라리 그런 정체성이 없어도 좋겠다는 생각하는 사람들도 여럿있지만, 우리가 왔다갈 때마다 펑펑 우시곤 하세요. 자기가 재일 조선인으로서 자신들을 알고 있고 영영 만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하다가 동포를 만나고 자기 정체성을 확인하며 살아갈 수 있는 그런 힘을 얻는다는 것인데, 어떤 사람들은 계속 메일만 써주는 게 평화운동이 될 수도 있지요. - 가장 느린 통일이 가장 좋은 통일이라고 생각해요. 다양성의 혼란이 아니라 천천히 서로의 다름을 확인하고 수용하면서 같이 뒤섞여 살아갈 수 있는 준비와 시간이 필요하고 되도록 평화롭게 느리게 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그치만 단절된 상태에서 오래 가자는 것은 아니고, 교류하면서 접촉의 면을 넓혀가는 이해를 늘리자는 거에요. 교류를 해나감에 있어서 북측 사람들도 남측에 대한 이미지가 점점 좋아지고 있고 이해하고 변화하는 스펙트럼이 넓어져가고 있어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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