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를 판 사나이 

김현경


여러분은 아마 <그림자를 판 사나이>에 대해서 들어보았을 것이다. 아델베르트 폰 샤미소Adelbert von Chamisso 원작의 이 소설은 1824년에 Peter Schlemihls wundersame Geschichte(페터 슐레밀의 기이한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샤미소는 프랑스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는데, 대혁명 당시 아홉 살의 나이로 독일에 망명하여, 그 후 계속 독일에서 살면서 독일어로 글을 썼다. 이런 개인적 이력은 이 소설의 주제와도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 
소설의 구조는 그리 복잡하지 않다. 우선 이야기에 그럴듯함을 더해주려는 장치로서, 저자가 편집자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의 서문이 있다. 여기서 주인공 페터 슐레밀은 그들이 알고 지냈던 실존 인물로 그려진다. 그는 키가 크고 늘 검은 재킷을 걸쳤으며 어수룩하고 굼뜬 데가 있었다. 그는 몇 년간 행방이 묘연하였다. 그러다가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어느 날, 장화 위에 슬리퍼를 신은 괴상한 차림으로 저자를 방문하여 이 수기를 놓고 간 것이다. 그들은 이제 이것을 세상에 공개하는 게 좋을지 어떨지 망설이는 중이다……
그리고 나서 일인칭 시점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나>는 힘든 항해 끝에 어떤 항구도시(역주에 따르면 함부르크)에 내린다. 그리고 제일 좋은 옷으로 갈아입은 뒤에 추천장을 품에 넣고 토마스 존의 저택을 찾아간다(저자는 주인공이 곤궁에 빠져 있으며 추천장에 한 가닥 희망을 걸고 여기까지 왔음을 암시한다). 마침 저택의 정원에는 파티가 열리고 있다. 존은 <나>를 친절하게 맞이하지만 다른 손님들을 접대하느라 바빠서 거의 눈길을 주지 않는다. <나>는 사람들 틈에 끼어 정원을 산책한다. 그런데 그 자리에는 회색 옷을 입은, 정체를 알 수 없는 남자가 있다. 놀랍게도 그 남자는 외투 안주머니에서 손님들이 청하는 대로 온갖 물건을 꺼낸다: 망원경, 양탄자, 천막, 나중에는 안장을 갖춘 세 마리의 경주마까지. 더욱 놀라운 것은 집주인을 포함하여 참석자 중 누구도 이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는 두려움을 느끼며 파티장을 빠져 나간다. 하지만 어느 새 따라왔는지 회색 옷의 사나이가 말을 건다. 아무 면식도 없는데 이렇게 다가와 무례한 부탁을 하는 것을 용서해 달라고, 다름 아니라 조금 전 정원을 거닐 때 햇빛 아래 펼쳐진 당신의 멋진 그림자를 보았노라고, 그 그림자가 몹시 마음에 드는데 자기에게 그걸 주지 않겠느냐고, 대신에 이 주머니 안에 있는 신기한 보물을 마음대로 골라가지라고. <나>는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금을 무한하게 만들어내는 ‘행운의 자루’와 그림자를 바꾼다. 회색 옷의 사나이는 그림자를 풀밭에서 살짝 거둬들여 둘둘 말더니 주머니 안에 집어넣는다. 
이 소설에 발단-전개-위기-절정-결말이라는 고전적인 구분을 적용해도 좋다면, 여기까지가 발단에 해당한다. 그 다음 단계 또는 국면은 슐레밀이 그림자를 판 후 예상치 않은 문제에 직면하는 것이다. <나>는 더 이상 마음 놓고 대낮의 길거리를 걸을 수 없다. 가는 곳마다 손가락질을 당하기 때문이다. (“성문에 도착했을 때 다시금 어느 문지기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니 당신은 그림자를 어디다 두고 오셨소?’ 마찬가지로 몇 명의 아낙네 목소리도 들렸다. ‘하느님 맙소사! 저 불쌍한 인간에겐 그림자가 없네!’ 그 말을 듣자 몹시 역겨운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나는 태양 아래에서 걷는 것을 조심스럽게 피했다. 그러나 태양을 받지 않고 다닐 수 있는 곳은 아무 데도 없었다.”) 그림자의 중요성을 뒤늦게 깨달은 <나>는 후회에 휩싸인다. 그리하여 회색 옷을 입은 남자를 만나서 거래를 취소하려고 한다. 하지만 그 남자는 몇 년 몇 날이 지나면 다시 오겠다는 말만 남기고 어디론가 사라진 뒤이다. <나>는 솜씨 좋은 화가를 불러 가짜 그림자를 그려달라고 부탁하기도 한다. 그러나 화가는 <나>의 청을 거절하면서 “그림자가 없는 사람은 차라리 햇빛 아래에서 걸어 다니지 말아야 한다”고 충고한다. 악마와의 거래 덕택에 슐레밀은 산더미 같은 금화를 얻었지만, “보물을 지키는 파프너(니벨룽겐의 보물을 지키는 용)처럼” 고독한 신세가 된다.
세 번째 단계는 자신의 정체를 숨긴 채 제 2의 인생을 살아가려는 주인공의 노력이 파국으로 끝나는 것이다. <나>는 충실한 하인 벤델의 도움을 받아, 가까운 휴양지로 이사한다. 그리고 멋진 집을 짓고 저녁마다 파티를 열어 손님들에게 선물을 나누어준다. 마을 사람들은 <나>를 ‘페터 백작’이라고 부르며 칭송한다. 그러다가 <나>는 미나라는 청순한 소녀와 사랑에 빠진다. 마침 회색 옷의 사나이가 약속한 날짜가 다가오고 있기에, <나>는 그림자를 곧 되찾을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면서 미나에게 청혼을 하러 가겠다고 말한다. 하지만 회색 옷의 사나이는 끝내 나타나지 않고(사실은 슐레밀이 날짜를 잘못 계산한 것이었지만), 자포자기한 <나>는 미나와 그녀의 부모 앞에서 자신의 정체를 밝힌다. 미나의 부모는 화를 내면서 딸을 다른 남자와 결혼시키기로 한다. 
네번째 단계는 슐레밀과 악마의 동행이다. 절망에 빠진 <나>의 앞에 회색 옷을 입은 악마가 나타난다. 악마는 <나>에게 그림자를 돌려줄 테니 죽은 뒤의 영혼을 자기에게 달라고 한다. <나>는 단호하게 거절한다. 하지만 악마는 <나>를 귀찮게 따라다니면서 자신의 제안을 다시 생각해보라고 한다(“질문을 해도 괜찮다면, 도대체 당신의 영혼이란 어떤 물건입니까? 그것을 본 적이나 있습니까? 언젠가 죽을 때 그 영혼을 가지고 무엇을 할 작정이십니까? 오히려 저 같은 수집가를 만난 것을 기뻐하십시오. 저는 당신에게 X라는 덩어리, 즉 전기가 흐르고 양극 전자장을 지닌 몸 덩어리―그 외에 이 쓸모 없는 덩어리는 무엇이겠습니까마는―가 남긴 영혼에 대해 실제적인 대가를 지불하려는 것입니다. 당신의 생기 있는 그림자 말입니다”). 악마는 <나>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그림자를 빌려주기까지 한다. 일시적이나마 다시 그림자를 갖게 된 <나>는 악마가 이끄는 대로 세상을 돌아다니며 인생의 온갖 편안함과 화려함을 즐긴다(“비록 빌린 그림자였지만 나는 자유롭고 가볍게 움직일 수 있었고, 도처에서 돈이 가져다 주는 존경심을 누렸다”). 파우스트와 메피스토펠레스의 동행을 연상시키는 이 대목은 소설 전체의 클라이맥스라고 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주인공은 여기서 영혼을 상실할 지도 모르는 위험에 처하기 때문이다. 그림자가 영혼과 비슷한 어떤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과 대립하는, 외적이고 현세적인 무엇이라는 점도 이 대목에서 분명해진다. 
그런데 악마가 슐레밀한테 계속 붙어 있을 수 있었던 것은 슐레밀이 여전히 ‘행운의 자루’를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헤어질 것을 요구하는 <나>의 말에 악마는 이렇게 대답한다. “알겠습니다. 가지요. 그런데 가기 전에 알려드릴 것은, 만약 이 비천한 하인 녀석을 찾고 싶다는 생각이 드실 경우 어떻게 제게 신호를 줄 수 있는지에 대해서입니다. 그럴 경우 당신은 그저 자루를 흔들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수많은 금화가 쏟아질 것이고 그 금화소리가 순식간에 저를 불러낼 것입니다.” 자루를 깊은 물 속에 던져버린 후에야 슐레밀은 악마로부터 해방된다. 
결말에 해당하는 마지막 단계는 돈도, 그림자도 없어진 슐레밀이 정처 없이 방황하다가 우연히 한 걸음에 7마일을 가는 전설의 장화를 얻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그의 운명을 다시 한번 바꾸어놓는다. 지구 여기저기를 내키는 대로 돌아다닐 수 있게 된 그는 자연을 마음껏 연구하면서 살기로 한다. 그는 장화를 신을 발이 제멋대로 날아가는 것을 막기 위해 슬리퍼를 덧신는다. 그리고 시계와 나침반과 책 등을 마련한다. “나는 이내 모든 것을 준비했고, 즉시 개인적인 학자로서의 새로운 인생을 꾸려나갔다. 먼저 대지 위를 살펴보면서 다녔다. 때로는 산 정상을, 때로는 수온과 대기 온도를 재기도 했고, 때로는 동물이나 식물을 관찰하고 조사하기도 했다. 나는 에콰도르에서 폴란드까지 가기도 했고, 세계의 구석구석을 다니기도 했으며, 많은 경험을 서로 비교하기도 했다. 아프리카의 타조 알과 북쪽지방의 해조 알, 열매들, 특히 열대 지방의 야자나무와 바나나를 일상 음식으로 먹었다.” 그는 연구에 열중한 나머지 과로로 쓰러져서 자선병원(다름 아닌 벤델이 옛주인을 기리기 위해 세운 병원이었다)에 실려 갔다가 벤델과 미나의 모습을 다시 보기도 한다(하지만 자신의 존재를 알리지 않고 그곳을 빠져 나온다). 
슐레밀은 자신이 여러 권의 중요한 책을 썼고, 죽기 전에 원고가 베를린 대학에서 출판되기를 기대한다고 한 뒤에, 다음과 같은 말로 수기를 끝맺는다. “사랑하는 벗 샤미소, 나의 환상적인 이야기를 간직해줄 사람으로서 다름 아닌 자네를 선택했네. 물론 내가 죽고 나면 이 이야기가 많은 이들에게 유용한 가르침을 줄 수 있을 거라는 목적에서 말일세. 벗이여, 만약 사람들과 함께 살고 싶어하는 이들이라면 부디 무엇보다도 그림자를 중시하고, 그 다음에 돈을 중시하라고 가르쳐주게나.”

이 이야기의 주제는 무엇일까? 그리고 그림자는 무엇의 알레고리일까? 어떤 사람은 이 이야기가“돈만 중시하는 시민사회를 비판한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 말은 이상하게 들린다. 슐레밀은 돈이 아주 많은데도 그림자가 없다는 이유로 배척을 당하기 때문이다. 차라리 “돈보다 그림자를 더 중시하는 사회” 또는 “돈도 중시하지만 그림자는 더욱 중시하는 사회”에 대한 비판이라고 해야 옳지 않을까? 주인공 역시 수기의 마지막에서 분명히 말하고 있지 않은가? 사람들과 함께 살고 싶어하는 사람은 먼저 그림자를 중시하고 그 다음에 돈을 중시해야 한다고(이 충고는 제사의 형식으로 첫머리에 인용되어 있기도 하다). 그림자는 사람들 사이에서 살기 위해 갖추어야 할 조건이다. 구원을 위한 조건은 아니다. 영혼을 잃은 사람도 그림자만 있다면 잘 살아갈 수 있다. 악마가 슐레밀을 유혹하기 위해 그림자를 빌려주고 현세의 향락을 맛보게 하는 대목은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악마에게 남몰래 영혼을 저당 잡힌 채 빌린 그림자로 행세하면서 살아간다는 듯한 여운을 남긴다. 
그러므로 그림자의 상실을 영혼 상실의 전초단계로 보는 해석들, 즉 그것을 구원의 가능성을 결정적으로 상실하지는 않았지만, 부분적으로 상실하는 사건으로 파악하는 해석들은 모두 방향을 잘못 잡은 것이다. 보드리야르의 해석이 그러한 예이다. <소비의 사회> 말미에서 그는 이 소설을 30년대 표현주의 영화 <프라하의 학생>과 나란히 놓으면서, 두 작품이 모두 상품사회에서의 인간소외를 그리고 있지만 전자는 후자에 비해 “우화로서의 일관성이 부족하다”고 평가한다. 
<프라하의 학생>에서 주인공은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악마에게 팔아 넘긴다. 그 결과 그는 거울에서 자신이 배제된 세계만을 보는데, 보드리야르는 이것이 세계와 주체의 관계가 투명성을 상실한다는 의미라고 말한다. 세계는 낯설어지며, 주체의 자기 인식은 더 이상 불가능해진다. 보드리야르는 학생의 상(像)이 우연히 분실되거나 파괴된 것이 아니라 팔린 것임을 강조한다. “악마가 이 상을 하나의 사물로서 주머니에 넣는 장면은 상품이 물신화되는 실제 과정의 환상적인 묘사이다. 우리의 노동과 행위는 우리의 손을 벗어나 객체화되고 문자 그대로 악마의 손으로 넘어버린다.” 악마는 거울에서 떼어낸 이미지에 혼을 불어넣어 주인공 행세를 하며 돌아다니게 한다. 자신의 분신이 어디에서나 자신을 앞지르며 방해하기 때문에 주인공은 그를 없애려고 총을 쏜다. 하지만 분신이 사라지는 것과 동시에 주인공 자신도 방바닥에 쓰러진다. 그는 죽어가면서 깨어진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본다. 이러한 결말은 죽음 외에는 소외를 피할 방법이 없다는 것을 암시한다. 
보드리야르는 <그림자를 판 사나이>가 <프라하의 학생>과 동일한 주제를 형상화하고 있다고 본다. “두 작품의 알레고리는 같다. 거울 속의 상이든 그림자이든, 그것이 파괴될 때에는 자기 자신 및 세계와의 관계의 투명성이 파괴되며, 따라서 삶 그 자체도 의미를 잃어버린다”. 하지만 <그림자를 판 사나이>는 “그림자에서 물질로의 변용과정을 철저히 밀고 나가지 않았기 때문에” 이러한 메시지를 분명하게 전달하는 데 실패한다. 이 소설에서 그림자는 사물처럼 분리되어 악마의 주머니에 들어간 후에도 여전히 주인공에게 친숙한 것으로 남아 있다. 주인공은 자신의 그림자를 알아보며, 악마는 그것을 주인공에게 다시 붙여주기도 한다. 마찬가지로, 주인공은 그림자를 판 뒤에도 여전히 영혼을 갖고 있다. 즉 그는 변하지 않은 채 자기동일성을 유지한다. 하지만 “소외된 인간이란 쇠약하고 가난한, 그렇지만 그 본질은 변하지 않은 인간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해 악이 되고 적으로 변한 인간이다.” 보드리야르가 보기에 <프라하의 학생>의 뛰어난 점은 이 진실을 극명하게 드러내었다는 데 있다. 반면에 <그림자를 판 사나이>에서는 “소외가 외관상으로만 사회적 갈등을 초래할 뿐이어서, 슐레밀은 사회적으로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것으로 이 갈등을 추상적으로 극복할 수 있었다.” 
보드리야르는 이 소설이 우화로서 일관성을 가지려면, 그림자가 영혼의 알레고리여야 한다고 믿는 듯하다. 소외란 결국 영혼의 상실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만일 샤미소가 그림자와 영혼을 굳이 구분하지 않았다면 그러한 해석이 가능했을 것이다. 하지만 샤미소는 둘을 나눈다. 그에 따라 악마와의 거래도 두 차례로 나뉜다. 주인공은 첫 번째 거래에서 손실을 입은 뒤에도 다음 기회를 갖게 되는 것이다. “<프라하의 학생>의 경우에는 두 번째 거래가 없고, 첫 번째 거래의 논리적 귀결로서 냉혹한 죽음을 어쩔 수 없이 당하게 된다. 이 차이에서 알 수 있듯이 샤미소에게 있어서는 자신의 그림자를 팔아도, 즉 개개의 행동에 있어서는 소외되었어도 혼을 구하는 것이 가능하였다(강조는 원문).” 하지만 개개의 행동에서 소외된 인간이 어떻게 혼을 구할 수 있겠는가? ‘개개의 행동에서 소외되었지만, 아직 혼을 잃지는 않았다’는 것은 소외된 인간 자신의 착각(또는 주관적이고 관념적인 “소외의 극복”)이 아니겠는가? “소외를 관념적으로 극복하고자 하는 모든 시도는 좌절할 수밖에 없다. 소외의 극복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소외는 악마와의 거래의 구조 그 자체, 상품사회의 구조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강조는 원문)” 다시 말해, 상품사회에서 인간은 영혼상실의 운명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이 보드리야르의 주장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림자를 판 사나이>를 상품사회에 대한 비판으로 단정지을 수 있느냐는 것이다. 상품사회는 화폐의 논리가 전면화되는 사회이다. 상품사회에서 모든 것은 화폐가치로 환산되어 사고 팔린다(즉 상품이 된다). 그런데 악마에게 그림자를 판 뒤에 슐레밀이 직면하는 현실은 그와 정반대이다. 그는 돈이 전부가 아니며, 이 세상에는 돈을 가지고 살 수 없는 것이 많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의 엄청난 재물은 사랑하는 여인과 결혼하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그는 가는 곳마다 금화를 뿌리지만, 자신을 보고 수군거리는 사람들의 입을 막지 못한다. 솜씨 좋은 화가에게 많은 돈을 주면서 가짜 그림자를 만들어달라고 부탁해보지만, 돌아오는 것은 차가운 거절뿐이다. 심지어 그는 하인에게조차 서비스를 거부당한다. 그의 정체를 눈치 챈 하인 라스칼은 “하인이란 본래 충실하지만 그림자 없는 주인을 섬기지는 않는 법”이라면서 자기를 해고해달라고 말한다. 만일 그림자가 영혼의 알레고리라면, 슐레밀은 돈보다 영혼을 더 중시하는 사회에 살고 있는 셈이다. 물론 이 소설에서 그림자는 영혼처럼 고상한 무엇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지극히 세속적인 어떤 것,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반드시 필요한, 특수한 성격의 재산처럼 그려진다. 이는 딸의 혼사를 두고 미나의 양친이 주고받는 대화에서도 드러난다. 미나의 어머니가 라스칼은 하인 출신이라서 사윗감으로 부적당하다고 말하자, 아버지는 이렇게 대꾸한다. “하지만 그 녀석은 아무도 탓할 수 없는 그림자를 갖고 있잖아.” 라스칼처럼 비천하고 사악한 인간도 그림자가 멀쩡하다는 이유로 사위의 자격을 얻는 것이다. 이 대화는 그림자의 소유 여부가 신분이나 계급과는 별개라는 것도 알려준다. 실로 이 소설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주인공을 제외하면 다들 그림자를 갖고 있는 것 같아 보인다. 그림자가 조금 희미하거나 남보다 작을 수는 있겠지만. (휴양지에서 만난 한 상인에 대해 슐레밀은 이렇게 회고한다. “한 번 파산한 적이 있지만 다시 재산을 모은 그 남자는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약간 희미하지만 커다란 그림자를 갖고 있는 이였다.") 
이처럼, 이 작품을 찬찬히 읽을수록 우리는 그것이 “상품사회에서의 인간 소외”를 그린 것이라는 생각에서 멀어지게 된다. 사실 보드리야르는 텍스트를 그리 꼼꼼하게 검토한 것 같지 않다. 그는 이야기의 전개 방향에 실망하여 뒷부분을 건성으로 넘겼을 것이다. 그 증거로, 그는 결말을 잘못 기억하고 있다(슐레밀은 “자선병원에서 편안하게 죽지” 않는다). 또 그는 작품 구조상 매우 중요한, 악마와 주인공이 동행하는 대목을 “황당무계한 에피소드”라고 일축하며, 7마일 장화에 대해서는 언급조차 하지 않는다. 한 마디로 말하여 보드리야르는 이 작품의 상징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의 해석에 거리를 두면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림자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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