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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변화 시대의 living literacy글 수 603
무브 출발 전에 말했던 것 처럼 무거운 마음은 내려놓고 밀양에 다녀온 것은 잘 한 것 같다. 밀양의 어르신들은 매우 강인한 분들이셨다. 서로 다친 마음을 헤아리고, 소신을 지키며 시간을 보내고 계셨다. 덜컥 내가 우울해져버렸다면 별로 도움이 안 되는 손님이 되어버렸을 듯 하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단순했다. 열심히 흙벽돌을 나르고 일손을 돕고 마을잔치를 열어주신 어르신들께 감사한 마음으로 즐거운 시간을 만들고 함께하는 마음으로 열심히 악기를 연주하고 이야기를 경청하고 함께 `송전탑 백지화!`를 외치는 것. 밀양에서는 마음이 먹먹해지는 상황이 여럿 있었다. 쌀쌀해지는 요즘에 열악한 환경의 농성장을 보며 너무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송전탑자재를 놓을 공간을 위해 무참히 벌목한 모습, 잠을 청하기엔 너무 춥고 쓸쓸한 농성장, 그리고 할머니 할아버지들. 교육도, 문화도 없는 농촌에는 미래도 희망도 없다고 정부의 말에 분노하는 한 아저씨. (하지만 반대로 소비주의적인 대도시가 시골을 그런 이미지로 만들었다고.) 송전탑 건설에 찬성한 주민과 깊어가는 마을간의 악감정. 각자 살림을 위해서 일해야하지만 송전탑 반대운동때문에 전혀 농사일을 못하는 상황. 늘어놓자면 꽤 많은 상황을 보고 얘기들었다. 그렇지만 조한의 말씀대로 이 투쟁은 밀양의 승리로 끝난다는 것, 그 말에 마음이간다. 간절히 이 투쟁이 끝나길 바란다.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지금이라도 춤을, 노래를 부를 수 있다. 송전탑을 막을 용기와 의지가 있다. 강강수월래가 끝나고 `너희가 있으니 안심이다`라고 해주신 어르신도 있다. 밀양어르신들과는 탈핵운동을 하는 한 계속 만날 것 것 같다. 이번 밀양에 다녀온 나는 아무렇지 않지 않다. 아룬다티 로이의 `작가는 아픈 뜬 눈으로 목격하고, 잊지 않아야한다`는 말처럼 먹먹한 마음도 여전히 있다. 그렇지만 다시 만날 때는 더 단단한 마음, 더 활기찬 모습이고싶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나는 4대강에서, 정선에서, 강정에서, 그리고 많은 탈핵행사에서 악기를 두드리고 사람들과 함께하지 않았는가. 고다
핑두 밀양문자리뷰도 오늘까지네요. 버스안에서 밀양 동화마을 앞쪽 도로변에 붙어있던 '보상은 필요없다!송전탑건설백지화!'같은 천 현수막이 눈을 끌었고 버스를 타고 오며가며, 행진을 할때며 늘어선 그현수막들로 부터 내가 지금 무얼하고있는지 자꾸만 생각하게 되었다. 마을의 나이많은 주민들의 앞으로의 먹고 살기와 벽돌을 나르며 본 나잇살이 사십년은 넘어보이던 토막난 나무들의 모습을 보면 정말 송전탑은 안된다 싶다가도 포크레인을 조종할 시공사 직원들도 먹고살기위해서 충실히 일하려는 것이겠지 싶었다. 그보다 그 위의 한국원자력발전소 또 그위의 사람, 그위의 지시자를 떠올려보려했지만 어쨌든 내가 전기를 끌어다 쓰는것이 송전탑을 짓는일에 한목하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어서 반토막난 나무에게도 부스러기가 된 바위들에게도 미안했다. 어쩌다 우리는 이런관계가 되어버린걸까 싶기도햤다. 가본적도 없는 엄청난 거리너머에 내가 그들에게 매일 영향을 주고있을줄은.. 몰랐다. 그것도 그들의 생활방식을 멈춰버리게 만드는 쪽으로말이다.. 벽돌을 나를때는 마을의 주민들 생각뿐이었다. 벽돌을모아서 겨울집을 짓고 있는모습이 꼭 언제 꿑날지 모르는 일처럼보여서 마음이 좋지 않았다. (주민들의 소망-송전탑건설백지화..) 문재인후보가 영상에서 나와서 자신이 대통령이 되면 꼭 밀양송전탑에 대해 재 검토해보겠노라고 하였는데 단비같은말이지만 역시 마음한쪽은 찝찝했다. 과연 검토를 해서 송전탑을 건설하는걸 백지화 시킬수있을까? 또 주민들만 남게 되는건 아닐까. 우리같이 밀양의 일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긴하지만 농성장으로 벽돌을 나르면서, 마을회관에서 주민들을 보면서, 옆마을에도 우리의 외침을 들려주어야한다며 옆마을까지가서 행진했던 것이며, 난 기사를 읽어볼뿐이지만 주민들에게는 커다란 목소리구나.. 기자가 없었을때도 그들은 목이 터져라 외쳤겠구나.. 싶었다. 한편으로는 평화롭던 마을에 은근슬쩍들어온 시공사의 포크레인과 마을 사람들과의 대치의 역사(?)가 어떻게 이루어져 왔는지 궁금하기도했다.. 동화마을 사람들도 이웃의 할머니 할아버지랑 별다를게 없는데-언제부터 어떻게 그런 확신을가지게되어 쇠줄을 목과 허리에 감을 수있게 된걸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록 밀양에 가기전 어느정도 기대와 걱정에 부풀어있었다. 밀양이라는 곳에 처음가보는 것. 영상팀으로써 촬영을 맡은 것. 실제로 그 현장에서 일한다는 것. 작업장학교 죽돌들과 일박이일로 보내는 시간이라는 것 등.. 우리가 도착한 동화전마을의 첫인상은 따스했다. 감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햇빛을 받아 예쁘게 빛났는데 새삼 가을임을 알려주는것 같았다. 골목골목 밭에는 머리를 내민 무와 배추 같은것들이 있었다. 옥상밭에서 보던것들인데! 반가웠다. 산중턱에는 천막으로 된 농성장이 있었다. 송전탑공사 현장 바로 옆에있었는데 매일매일 그곳에서 주무시기도 하고 아침저녁으로 올라오셔서 투쟁을 하시는 곳이었다. 이제 겨울이 다가와 비닐천막으로는 버틸수가 없어서 벽돌로된 간이 집을 만들고 계셨는데 일반벽돌보다 훨신 무겁고 두꺼운 벽돌을 산중턱까지 나르는게 쉽지 않아 공사 진행이 느린 상황이었다. 우리는 그 벽돌들을 나르는 일을 했다. 대부분의 남자들과 몇명의 여자죽돌들이. 지게를 난생 처음 지어봤는데 무게중심이 한쪽으로 쏠리기도 했고 산을오르며 나무에 치이기도 했다. 마냥 나무꾼이 된것만 같았다. 그것도 잠시. 벽돌의 무게가 온몸으로 전달되었다. 이 벽돌이 어떻게 사용되는지는 잊은채 그저 꼭 나르고야 말겠다는 의지에 불타 이를 꽉 깨물었다. 마침내 벽돌하나를 날랐다. 나르고 보니 하나를 더 날라야겠다고 생각했다. 힘들기도 했지만 더 할수 있을거라 생각했고 농성장을 처음으로 보고, 벽돌집이 세워지는 현장을 보니 당연히 해야겠다고 느꼈다. 천막안의 할머니 두분은 그 순간을 마치 즐기고 계신것 같았다. 노래도 흥얼거리셨고 우리에게 물을 따라주시는 모습을 잠깐씩 봐도 그랬다. 그래도 나에겐 각종 산을 다니며 다져진 것이 있나보다. 다리나 허리가 크게 아프진 않았다. 거리퍼레이드를 했다. 페스테자와 공연팀의 주도로 죽돌들, 주민분들이 뒤따랐다. 4개면을 쭉 도는 코스였다. 미난과 함께 촬영을 했는데 최대한 다양한 샷을 잡으려고 뛰었다. DSLR촬영이라 초점잡기가 쉽지않았다. 그래도 결과물에 핀이 나간 샷이 많지않았던것 같은데 다행이다. 퍼레이드를 하면서 밀양주민분들의 송전탑백지화에 대한 열의?같은것을 느낄수 있었다. 목이 쉬어가면서 백지화를 외치는 모습들이 인상깊었고 찬성하는 집앞에서 공연을 하고 소릴 지르는 모습을 봤을땐 송전탑 하나 때문에 마을이 이렇게 무너지기도 한다는 것이 참.. 그랬다. 저녁엔 마을잔치가 벌어졌다. 여러분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간의 사진,동영상도 보고. 신나게 춤도 추시고 노래도 부르시는 시간. 즐거워 하시는 할머니들의 모습이 정말 보기 좋았다. 굳센할머니가 많이 떠올랐었는데 해맑게 웃는 밀양의 할머니들이 앞으로는 더 떠오를것 같다. 이금자 할머니와 인터뷰도 했다. 예상답변을 벗어나기도 하고 질문에 대답을 얻기가 어렵기도 했다. 서툰 인터뷰였는데 할머니께선 질문을 하지않아도 하고싶은 말씀이 많으셨다. 7년동안 싸워오시다보면 그렇게 될수 밖에 없을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내가 클로즈업샷을 맡았는데 중간에 배터리가 나가는 바람에 파일하나가 손상되어 못쓰게 되었는데 배터리 체크가 안되는 배터리여서 그랬다. 앞으로 인터뷰를 할때는 배터리관리를 신중히 해야함을 느꼈다. 인터뷰를 하면서 영상에 더 집중을 해서인지 내용은 정확히 듣지 못한점도 있었다. 그점은 녹취를 하면서 정확히 이해가 되었다. 다음날도 벽돌을 두개씩 나르고 깻잎밭에 잡초를 뽑는등의 일을 했다. 조금이나마 도움을 드릴수 있어서 좋았다. 가파른 산을 매일 오르시는 할머니들에게 뭔가 죄송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왠지는 모르겠지만. 기사로 보는것, 영상으로 보는것, 얘기로 듣는것과 실제는 좀 다른것 같다. 역시 직접 보고 느껴보는것이 좋다 . 잠시나마 밀양에서 일하고 먹고 만났던 시간들을 소중하게 생각할것이다. 푸른
신상 원래 취지는 그것이 아닌데, 왠지 모르게 농활 하러만 갔다 온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이상했다. 재밌지도 그렇다고 좋다고도 표현하기 어려운 것 같다. 개인적으로 어떤 감정을 가져야 하는지 잘 몰랐을 때 있었는데, 그 때가 푸른, 온, 주님, 스텔라와 같이 농사일을 도와주고 할머니께서 집으로 초대해 감을 우리에게 주면서 송전탑 얘기를 하실 때였다. 우리는 할머니와 같이 이야기를 나눴다. 아니 나눴다기보다는 일방적인 부탁이었지만, 그때 나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 지, 어떤 감정이어야 하는지 갈팡질팡 했었다. 할머니께서 절박한 심정으로 송전탑 짓는 것을 막아달라고 우리에게 부탁을 하실 때 이렇게 표현해도 되는지 잘 모르겠지만, 불편했다. 아니 어쩌면 죄송스러웠다고 하는 것이 맞을 지도 모르겠다. 매번 원전이나 송전탑으로 피해를 보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우리 때문이야 라고 먼 곳에서 자책하고 있었는데, 이번에는 신문이나 인터넷, TV가 아닌 실제로 피해를 보시는 할머니와 대화를 나누니 정말 안절부절 못했다. 아닌 척 했지만, 정말 내가 지금 여기서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생각했다. 솔직히 생각해보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을까? 송전탑이나 원전을 반대하는 절박한 심정들은 많이 봐왔지만, 정말 깊게 들어가 같이 공감하거나 느끼기는커녕 사람들을 관찰했었는데, 절박한 모습, 심정을 바로 코앞에서 보니 정말 미안한 감정들 그리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는 모습들을 보여준 것 같다. 하지만 더 좋게 생각해보면 이번 할머니와의 만남이 내가 핵에 대해 더 깊이 들어갈 수 있는 계기 그리고 할 수 있는 일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할머니를 비롯한 밀양에 많은 분들이 ‘진심’으로 송전탑을 반대하고 있다고 다시 한 번 느꼈다. 마지막 마을에서의 행진이 끝날 때, 누구신지 잘 모르겠지만 가면서 ‘아 속 시원하다’라고 말을 하셨다. 가장 인상 깊게 남는 말이었다. 보통 속 시원하다고 말을 할 때는 내 안에 있는 것들을 밖으로 표출할 때 많이 쓰는데 그만큼 하실 말들, 그리고 안으로만 품고 있으셨던 말들이 많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을끼리 뭉치고 마을 사람들끼리 얘기를 충분히 하셨을 텐데도 말이다. 사실 밀양에 갔지만 아직까지 그 분들의 감정이나 마음을 공감할 수 없는 것은 사실이다. 어쩌면 공감할 수 없을 만큼 멀어져 버린 것 같기도 하다. 아무리 내가 서울에 살고 있다고 하지만 원전이나 송전탑은 나를 위협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무게는 나에게 너무 가볍게 다가온다.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언제나 ‘경험을 하지 않아서, 못해서’, 무엇을 잘 느끼지 못하다고 생각하지만 이번 밀양에 간 것이 계기가 되어 내가 조금 더 이 문제에 대해서 깊이 들어갈 수 있다는 생각이 리뷰를 쓰면서 든다. 마루
고은별 밀양에 하루 가기 전날, 친구와 몇 주 전에 약속을 잡았었다. 밀양가는 당일로 그 약속이 잡혀 있어서 일주일 전쯤에 그 약속을 취소 했었다. 친구가 나에게 밀양에 왜 가냐고 물었다. 나는 , 밀양에 송전탑이라는 것이 세워지고. 그 주변 환경을 그 것이 망치고, 또 그분들의 생활과 연결이 있는 것이라고. 그래서 그 분들은 오랫동안 싸움을 해오고 있다고.. 생각해 보니 왜 가는지는 말 안했다. 이런 이야기가 있어 라고 소개하긴 했지만.. 그 친구는 그렇구나 ~ 말하더라. 나는 시간있으면 찾아봐 달라고 했다. 나는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우리가 모르는 비극이 너무 많은 것 같다고 말하며 생각보다 내가 아는 이야기들은 정말 극히 일부 일지도 모른다는 약간은 비관적인 생각을 했다. 공감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자주 했던 것 같다. 메솟을 다녀 왔을 때에도, 핵이야기를 자주 하면서도.. 막상 사전에 이야기를 조금 나눴으면 서도 직접 현장을 다녀오면, 어떤 생각을 계속 해야될까, 머리가 안 굴러갔다. 어디 저편에서 누군가는 괴롭지만 큰 맥락에서는 그들과 우리가 비슷한 세상을 꿈꾸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나는 지금 내 생활속에서 살고 있다. 으음..사실은 지금 이 글에 이런 긍정적이지 못한 분위기를 내고 싶었던 건 아니었다. 우리가 밀양에 가서도 좀 좋은 기운을 주었으면 하는 마음도 조금 이해하고 있고, 그 마을에서 같은 뜻을 가진 분들이 모이는 자리가 마련되고 또 내가. 우리가 그 곳에 가서 조금 소란 떨며 건강한 기운을 주고 받고 또 우리는 같은 꿈을 꾸고 있어요 ! 우리도 송전탑이 지어지지 않았으면 해요 ! 하는 마음이 조금 전해졌으면 했다. 그 곳 어르신 분들은 우리를 그렇게 바라봐 주었을까? 우리를 어떻게 바라 보실까 ? 7년간 마을을 지켜온 그런 오랜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격한. 말그대로 '투쟁'을 해오신 분들인데.. 그것이 얼마나 용기있는 행동일까는 많이 생각한다. 나는 평소에 학교 다닐 때 학교 생활과 연관 지어서도 생각해본다. 뭔가 내가 목소리를 높이면 다른 한 쪽에서 나와는 생각이 다르다며 밀어붙일까봐 두려워서 말을 아낀 적도 많다. 그래도 하고 싶은 말을 한다는 건 용기있는 행동인 것 같다. 그 날..음 밤에 영상도 보고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고 하던 날. 한 아저씨가 술을 좀 하신듯 열심히 근처에 앉아있는 누군가를 붙들고 말을 하기 시작했다. 그 옆엔 내가 앉아 있었다. 우리가 이렇게 지금 싸우는 이우는 후손들에게 물려줄 땅이기 때문에 싸우는 거다. 너희 세대 애들에게 떳떳하기 위해서인 이유도 있다. 너희도 그런 사람이 되라. 고 말씀 하셨다. 그러면서 핵 이야기도 열심히 하시던 모습이 기억이 난다. 나도 그런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친구에게 밀양에 왜 가느냐고 물었을 때 밀양의 이야기 조금 를 해주면서, 왠지 이런 이야기를 자주 접하지 않을 것만같아..라고 생각하며 소심하게 간결히 이야기 했었다. 근데, 내가 살짝만 말하니까. 그 친구도 자신이 사는 것이 바쁘기도 하고..지금 그 친구가 학교를 안다니고 열심히 밖에서 일하기도 하고.. 자기 세상이 벅차기도 한 것 같고.. 나한테 너 그런 것에도 관심 있구나. 멋지다 화이팅. 이라고만 한 것 같다. 멋지다는 말을 들은 것도 좀 그렇다. 뭐가 멋진 건지 나는 잘 모르겠다. 적어도 내가 핵공부를 해왔고 학교의 이름으로서 참가하는 행사들이 매우 많지만. 나 개인으로서도 정말 남들에게 알리고 싶고 또 심각성을 이야기 하는 편이 좋다면? 내가 정말로 진지하게 한번 맛깔나게 설명해보자. 하는 마음으로 누군가에게 이야기 해본다면? 그 사람이 '아..정말 남일이 아니고 당장 나의 일이기도 하구나..'라는 생각이 들게 하고 싶다는 생각이 요즘은 좀 들고있다.. 이런 정보를 내가 원하는 만큼 잘 전하는 게 힘든 것 같다. 정작 한 집안에서 동거하는 나의 언니라는 가족도 내가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르는데.. (나는 일반학교도 안다니고 머리도 노랗다. 언니랑 별로 친하질 않아서 대화도 필요한 것만 하고 집안에선 행동거지도 나의 극히 일부인, 나답지는 않은 모습도 많은데, 언니의 시선에서는 나를 어리게. 좀 안좋게 보고 있다는 생각이 요새 많이 든다.ㅠㅠ 자신이 사회인이기 때문에 나를 더 그렇게 보는 것 같기도 하고..) 그래서 가족과의 진지한 대화도 필요하다 생각이 들었다. 송전탑.. 행진하며 외치던 구호처럼 백지화라도 되어버렸으면 좋겠다. 나는 무섭다. 우리가 이렇게 또 그 분들과 인연이 닿았는데, 송전탑이 만약 그대로 지어져 버리면 어쩌지? 부디 그 분들께 우리가 좋은 기운을 주었고 또 송전탑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사람이 많이 있다는 사실을 느꼈으면 좋겠다. 물론 느끼셨겠지만..! 풀 우리는 2년 동안 핵에 대해서 배웠다. 그리고 2년 동안 전기도 잘 썼다. 우리는 도시에서 여러 일들을 해왔지만 실제로 현장에 가 본 경험은 별로 없다. 우리에게 핵은 아직 밀양이나 후쿠시마 사람들만큼 당장 피부로 느껴지는 문제가 아니고, 그래서 공감을 어려워했다. 그래서 난 이번에 밀양에 가는 기회가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메솟을 예로 들자면, 적어도 내 경우에는 먼 땅의 이야기이던 버마의 이야기가 메솟에서 느꼈던 공기와 친구들. 직접 들었던 말들, 그 곳에서 했던 일들에 대한 기억 덕분에 한국에 돌아와서도 끊임없이 관심을 가지고 공감을 할 수 있는 이야기가 되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다. 이번에 가는 밀양이 그런 계기가 되어줄 수 있지 않을까. 그런 기대를 가졌었다. 벽돌 나르는 건 겁나 힘들었지만 그렇다고 엄청 죽을 거 같은 건 아니었다. 마을이 갈라져버린 것, 대추즙을 주신 분의 사연은 안타까웠지만 어르신들의 지지 속에 퍼레이드부터 마을 축제까지 즐겁게 잘 마무리되었다. 잘 노시고 웃음도 많으셨다. 우리는 숨 죽이고 봤던 밀양 영상을 깔깔 껄껄 웃으며 보시는 모습을 보며 7년의 세월이 저 분들을 저리 강하게 만드신 건가 하는 생각을 했다. 나는 사실 도시에서 전기는 전기대로 쓰면서 깨작깨작 운동하는 게 너무 지겹고 짜증났는데 그래서 땀을 뻘뻘 흘리면서 벽돌을 지고 올라가니 정말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한다'는 기분이 들어서 좋았다. 쌓아올려지는 결과물이 보여서 좋은 점도 있었던 것 같고, 내가 벽돌을 지고 올라가면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반겨주셔서 좋았기도 했고, 어물쩡 빠지려고 하는 나를 계속 다잡으면서 밀양의 어르신들을 위해 산을 올라가는 과정이 좋은 것도 있었다. 이틀간 악기를 연주하고 재밌게 마을축제에서 놀고 벽돌을 나르고 깻잎하우스에 잡초를 뽑았다. 영상에서 보아온 밀양 어르신들의 싸움에 비하면 너무 미약한 일들이다. 벽돌도 몇 장 안 날랐고, 일도 인원 수에 비해 엄청 못했다. 뭐라도 더 할 수 있는 게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계속 들지만, 우리가 한 일들이 도움이 되었으면 하고 바란다. 일을 하면서 '만약 일박이 아니라 6개월, 1년씩 이 곳에 남아 일을 하게 된다면 잘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꼴랑 이틀 일하는 건 별로 힘들지도 않고 괜히 이상한 자부심도 생기는데, 사실 강정마을 등에 오래도록 머무시는 활동가 분들을 보면은 내가 저렇게 끈질기게 운동을 할 수 있을까 모르겠다. 7년째 싸우고 계시는 어르신들을 보아도 마찮가지다. 오래된 것들은 단지 오래되었다는 이유만으로도 아름다운 것들이 있다는데 이 분들이 그런 것 같다는 생각 했다. 온 밀양의 부드러운 산세를 보면서 참 예쁘다고 생각했다. 어떤 동네가 '예쁘다'고 생각한 건 처음이어서 그런 생각을 하는 나 자신이 신기하기도 했지만 그 곳은 마냥 예쁘다고만 할 수는 없는 곳이어서 씁쓸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이치우 어르신이 돌아가신 뒤로 언제나 내 마음 한 쪽 구석을 차지하고 있던 밀양을 생각하면 비장한 표정의 어르신들과 딱딱하고 차가운 송전탑의 이미지만 떠올라서 사실 밀양은 나에게는 그렇게 긍정적인 느낌은 아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우선 아름다운 밀양의 풍경과 그 곳의 사람들이 아주 밝게,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평화롭게 지내고 있는 모습은 내가 처음에 가지고 있었던 밀양에 대한 이미지를 한순간에 누그러뜨렸다. 그래서 처음에 마을 분들이 우리를 반겨 주시고 농사일을 도우러 갈 때까지만 해도 사실은 그냥 시골동네에 농활을 하러 온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리고 저녁에 거리행진과 시위를 시작하면서 밀양에 대한 나의 이미지는 다시 한 번 바뀌었다. 잠깐씩 멈춰서 짧은 공연을 할 때 주민들은 춤을 추고 함께 흥겨워했지만 송전탑을 찬성하는 쪽의 마을에 사는 위원장의 집 앞에서는 분위기가 확 달라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흥겨움과 절망스러움이 공존하는, 그게 아니면 절망스러움을 흥겨움으로 감추었지만 결국은 절망이 서서히 드러나게 되는 이상한 모습을 단면적으로 보았던 것 같다. 밀양의 주민들은 이런 감정 속에서 일상을 살아가고 있는 걸까 하는 의문과 일을 하다가도 사이렌이 울리면 경찰들과, 우익단체의 사람들과 대치하러 나간다는 강정마을 주민들의 모습이 겹쳐져서 떠올랐다. 위원장의 집 앞에서 악기를 연주하면서 구호를 외치고, '간신뱅이는 나와라' 같은 말들이 이곳저곳에서 터져나오는 것을 보면서 갑자기 너구리 생각이 났다. 자신들의 삶의 터전을 파괴하려는 사람들과 맞서 싸우고 싶지만 변신능력조차 없는 너구리들. 그 곳에서의 짧은 시위를 마치고 먼저 트럭으로 걸어가면서, 그때까지도 멈추지 않은 마을 주민들의 절규 같은 외침을 들으면서 폼포코 너구리 대작전에 나오는 너구리들처럼 이 사람들도 싸움에서 지면 어쩌지 하는 걱정이 곧바로 이어졌다. 아주 잠깐 동안 그 상황에 다른 상황을 대입해서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의 외침을 뒤로 하고 걸어가고 있는 상황이 너무 무서웠다. 물론 사실은 그냥 먼저 트럭으로 가고 있는 거지만, 그 소리들을 뒤로 하고 등을 돌려서 걸어가고 있다는 게 갑자기 너무 부자연스럽게 느껴졌었다. 마치 내가 그것들을 무시하고 다른 곳으로 가 버리고 있는 듯한 느낌이어서 절대로 그러지 말아야지, 하고 다짐했다. 우리 엄마는 생태적인, 사회적인 문제들에 관심이 많은 편이었지만 요즘은 그런 일들이 너무 많이 반복해서 일어나고, 상황은 전혀 나아지질 않으니 이제는 그냥 신경쓰지 않고 살고 싶다고 했다. 그냥 자신과 자신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잘 돌보고, 그들과 함께 잘 살아가면 되는 거라고 했다. 처음에는 좀 헷갈렸지만 이제는 그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적어도 나는 이런 상황을 마주했을 때 외면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감각이라는 단어를 사용해 이야기하자면 그 문제가 어떻게 나와 연결되어 있는지를 아는 감각보다는 그 문제, 그 비극에 대해 알게 되었을 때 외면하지 않고 함께 아파해줄 수 있는 감각이 먼저라고 생각한다. 사실 내가 정말로 외면하고 싶은 건 밀양 주민들 같은 피해자들이 아닌 전혀 다른 제3자들이다. 우리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문제들에 관한 기사들이 인터넷에 올라오면 탈핵을 예로 들었을 때, '그러니까 원전을 폐기하자' 라는 댓글에는 반대수가 훨씬 많은 것이 대부분이고 열에 아홉은 '원전은 계속해서 가동시켜야 한다' 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들의 말투는 온라인의 특성상 그런 것도 있겠지만 정말 공격적이고 절대로 설득이 불가능할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우리가 피해자들에게 등을 돌리고 다른 곳으로 가 버리거나 아니면 앞서 가 버리는 게 아니라 그들과 같이 가고 있는 거라면, 앞으로 그런 사람들과 아주 많이 마주치게 될 텐데 나는 아직도 그게 두렵다. 그래서 나는 그런 사람들을 만나면 일단은 몸을 웅크리고 방어 태세를 취한다. 사실은 전혀 그럴 이유가 없는데도 말이다. 어쩌면 그들을 아예 외면해 버릴 수도 있다. 어쨌든 그런 사람들과 별로 마주하고 싶지 않아서, 그들을 최대한 피해 다니려다 보니 사실 요즘은 뒷걸음질로 앞으로 나아가는 듯한 기분이 든다. 우리 앞에 있는 새로운 사람들, 우리와 생각이 다른 사람들과 마주하기 싫어서 같은 무리의 사람들만 바라보며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 같은. 그걸 과연 '앞으로 나아간다' 고 할 수 있을까? 마을회관으로 돌아와서 영상을 볼 때, 나를 비롯한 작업장학교에서 온 사람들은 얼굴을 굳히고 긴장하면서 봤는데 밀양 주민들은 영상에 나오는 사람들의 이름을 외치며 즐거워하고 때로는 그 때를 마치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후가 된 것처럼 회상하기도 했다. 그게 재미있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고. 또 4개 면 사람들이 모인 잔치라는데 의외로 사람들이 적었던 것도 마음에 남는다. 어떤 분께서 처음에는 시위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아주 많았는데 조금씩 조금씩 줄어들고 있다고 했다. 그것 또한 걱정되는 일이기는 하지만 시위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몸이 약한 노인들이라는 것을 간과하면 안 될 것 같다. 다음 날에는 산 위에 있는 농성장까지 무거운 흙벽돌을 지게로 져서 옮기고 몇 개 조로 나뉘어서 농사일을 도우러 갔다. 우리가 했던 일은 추수가 끝나고 소에게 먹이로 주기 위해 논 위에 널어 놓은 볏짚을 뒤집는 일이었다. 한 시간 만에 일이 끝났고 우리는 할머니 할아버지께서 고맙다고 답례를 하고 싶다고 하셔서 댁까지 가게 되었다. 감을 적어도 여덟 개는 깎아 먹으면서 할머니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할머니께서 농담조로 '느그 없었으면 할매 할배는 벌써 주긋다' 고 하셨다. '경상도 분들은 역시 말이 직설적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웃었지만, 그 말마저 아주 현실적으로 들렸다. 두 분은 서울로 올라가게 되면 인터넷에 밀양에 대한 이야기를 알려달라고도 하셨고, 우리가 와서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모른다고도 하셨다. 사실 서울에서 그렇게 전기를 펑펑 쓰는 것은 다름아닌 우리인데, 그것 때문에 송전탑이 지어지는데 그래서 입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두 분 댁에 들어가자마자 보인 것이 한 쪽 벽에 세로 일렬로 걸려 있는 손주들의 사진이었다. 그 분들의 직계 가족도, 친척도 아닌 처음 만난 사이인 우리가 어떤 좋은 영향을 주었는지는 사실 잘 모르겠다. 아마도 내가 그 곳에 가서 할 수 있는 일과 그럼으로써 그 곳에 미칠 수 있는 영향에 아직 확신이 없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밀양에 다녀오고 나서야 우리는 일을 도우면서 동시에 그 곳에 우리의 좋은 에너지를 전달하러 갔던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혼자서 너무 많은 생각과 고민에 빠져 있었던 것 같아서 그게 후회라면 후회가 된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 이라는,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가장 어려운 것을 자꾸만 까먹는다. '내가 할 수 있는 일' 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앞으로도 그들과 함께하고 싶다. 현장에서 함께하진 못하더라도 마음 한 켠에 언제나 밀양을 가지고 있었으면 좋겠다. 쇼 밀양에 다녀오다. 경남 밀양 동화전 마을에 다녀왔다. 1월 16일의 안타까운 소식을 전해 듣고 밀양에 내려가 본다는 계획을 이번에야 실행할 수 있었다. 6시간 정도 차를 타고 동화전 마을에 도착했을 때 가장먼저 들어왔던 풍경은 햇살 가득한 마을 풍경이었다. 많은 마을들을 돌아다녔지만 동화전 마을만큼 햇살이 좋다고 느꼈던 마을은 몇 안 될 듯하다. 마을에 계신 어르신들의 얼굴 역시 미소가 가득했지만 ‘765 송전탑 건설 저지’ 문구가 적혀있는 티셔츠를 입고 계셨고, 마을 곳곳엔 7년간의 투쟁의 흔적들을 볼 수 있었다. 지난 1월 16일에 있었던 일은 밀양 송전탑 건설 저지를 위해 어르신 한 분이 분신하시는 끔찍한 일이 발생했다. 소수의 사람들의 자본주의적이고 이기주의적인 사고와 다수의 사람들이 맹목적으로 추구하는 편리함과 풍족함으로 인해 지역이 파괴되고, 그 안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환경, 삶까지 파괴되고 희생되고 있는 것이었다. 학교에서도, 뉴스에서도, 성당에서도, 요즘 내가 접하게 되는 많은 시각적 요소들은 한결같이 ‘희생’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만 같다. 이번에 방문하게 된 밀양도, 강정마을도, 삼척, 영덕도, 아무도 남을 돌보아선 안 되는 시대에서의 희생이란 과연 어떤 말일지 생각해 보게 된다. 자의의 희생이 아닌 타의로 희생당하는 일이 이제는 없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로 열심히 일손도 도와드렸고, 신나게 행진도 했고, 마을 축제도 함께 했지만 마음 한 구석에 자리 잡고 있던 ‘죄송한 마음.’은 마지막 밀양을 떠나오면서도 계속 남아있었다. 어르신들께서 내 손을 잡으시면서 고맙다고 말해 주셨지만 내 마음은 그러지 못했던 것 같다. 그것은 분명 평소 내 무의식에 대한 죄책감이었다고 지금은 생각한다. 평소에 내가 무의식 적으로 했던 행동 하나 하나가 그 순간만큼은 내 자신을 돌아볼 수 있게, 진실되게 다가왔던 것 같다. 타인의 일이 아니라고 말로 열심히 외치지만 그것이 내 문제라고 계속해서 인식하고 끌어 들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어찌 보면 너무 무거운 마음과, 많은 생각들 사이에서 보냈던 2틀이었기에 후회가 들기도 한다. 4년 동안 지속해 오고 있는 크리킨디의 이야기가 이제는 몸에 익숙해져서 작지만 어디서든 움직일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을 뒷받침 해줄 수 있는 믿음과 확신을 갖고 그들처럼 움직이고 싶다. 까르 1. ‘좀 더 물어볼걸, 좀 더 알아갈걸, 좀만 더 알려주시지’ 라는 생각에 갔다 와서 답답함에 화만 내고 있다. 모르는 것들이 있었다. 아니, 모르는 것들이 많았다. 그 전에 내가 이번 여행에 대해 아는 것이 있던가? 면과 동과 리의 단위들도, 576kv인지 765kv인지 756kv인지도, 몇 개의 농성장이 있는지도, 그들이 어떤 식으로 산을 지키고 있는지도 모르는 나로써 답은 없었다가 맞겠다. 달밤에 달밑에서 함께 손을 잡고 ‘남생아 놀아라’를 할 때 ‘마을별로 나와서 놀아보라고 하면 재미있겠다.’ 라는 생각이 들어서 제안하려고 했지만 문득 내가 아는 마을의 이름이 오전에 버스로 오다가 본 플랜카드에 적혀있던 이름 동화전과 단장면밖에 없다는 사실 알았다. 그러고나니 ‘이 곳에는 어느 마을, 어느 마을 사람들이 모여있는 거지?’라는 의문이 생겼지만, 그것은 ‘내가 잘 알지도 못하고 흘러가는 대로 참여만 하고 있구나.’ 라고 자각을 하는 계기가 된 것이 아니라 ‘좀 더 우리가 밀양에 대해 잘 알면 남생아 놀아라나 강강수월래를 더 맛깔나게 할 수 있을 텐데.’ 라는 조금 이상한 아쉬움을 남기고 끝이 났었다. 공연팀 행진도 그랬다. 우리가 행진하는 곳이 어느 마을인지, 어느 집 앞인지, 어느 동사무소 앞인지 난 몰랐고, 그렇다고 꼼꼼히 체크하지도 않았다. 그저 트럭타고 왔다갔다하고 행진을 하면서 ‘나의 정신력은 참 흐릿하네.’ ‘이분들은 이런 행진들을 매번하고 계시는 것이겠지?’ ‘걸음 엄청 빠르네, 수루두 괜찮나?’ 정도의 생각을 하며 움직였을 뿐이다. 공연팀의 중요한 무언가가 자꾸 흐릿해져만 간다고 생각하면서 정작 나는 그 중요한 것을 위해 움직이지 않았던 것이다. 생각해보니 ‘벽돌나르기도 나에게는 단순노동에서 끝났던 것 아닌가’라는 생각이 든다. 이젠 거의 절망상태에 도달했다. 난 그 산이 어떤 산인지도 모르고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비닐 농성장에서 언제부터 주무시게 된 건지, 공사는 언제부터 시작된 건지, 무엇이 불편한지도 알지 못 했다. 그곳에서 내가 알게 된 것은 포크레인을 산으로 나를 때는 부품을 하나하나 가져와서 위에서 조립한다는 것과 밀양이 참 산이 많은 곳이라는 것과 이런 건 영화 속에서나 존재하는 것 아니었어? 싶은 밀양의 마을과 산이 함께 어우러져있는 모습과 부러지고 잘려나간 나무들의 모습이었다. 매번 왜 난 몰랐다만 반복하게 되는 걸까, 하다 이것이 ‘선생님’과 ‘판돌’ 이라는 것과도 연결이 되어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난 누군가에게서 처음부터 지금까지의 일들을 배우기를 원하는 것 같다. 내가 스스로 생각하고 공부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먼저 나를 이끌어줄, 내가 찾아보지 않아도 대강의 흐름을 이해하고 정보를 알 수 있게 해주는 ‘선생님’을. 그리고 그런 방식들이 익숙하다. 그렇지만 이곳은 ‘선생님’이 없다. ‘판돌’만 있다. 여기서 문제가 생긴 듯하다. 자꾸 내가 한 발 먼저 나서게 되는 것이 아니라 히옥스가 이야기를 하면 그제야 찾아보게 된다. 그러니 항상 때가 늦을 수밖에. 여기서는 정보와 자료들을 찾는 것은 나의 몫이고 누군가가 먼저 나서서 알려주지 않는다. 내가 공유하고, 내가 만들어가는 것이다. 아.... ‘선생님’과 ‘판돌’을 다시 되새김 해본다. 아니, 그것보다 ‘죽돌’이라는 것을 되새김질한다. 지금도 충분히 바쁘고 충분히 full 에너지로 사는데 거기에 앞까지 관심 갖고 보기란. 또 다시 다음 기회를 기약하기는 싫지만 자신이 있지는 않은 게 사실이다. 아침에 혼자 버스를 타고 하자에 갈 때, 밀양에 대해 너무 모르고 가는 무지의 나에게 처음으로 불안함과 긴장감과 걱정이 엄습했다. 그래서 출발 전 날,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생각하다 난 그곳을 사진으로 찍고 그림도 그리고 노래도 한 곡 만들어야겠어. 그건 나 할 수 있어. 하면서 챙긴 연필과 공책을 생각하며 계속 마음을 다잡았었고, 내가 이번 희망버스에 무엇을 기대하는지, 어떤 마음가짐인지도 확실하지 않아서 그 마음 정리해보자 싶어 나희에게 난 너처럼 많이 알지 못 하고 사건들을 계속 바라보지도 못 해, 그래서 널 보고 많이 배우는 중이야. 라는 식으로 시작을 해 경상남도 밀양에 간다는 것은 그 분들에게 직접적으로 힘을 줄 수 있는 흔치않은 기회라 생각해 열심히 하고 싶은데 무엇을 해야 할지 확실하지가 않아, 물론 가는 것만으로도 힘이 되겠지만 그 분들의 마음을 함께 하고 싶고 더 많은 웃음을 드리고 싶어. 라는 말들을 쓰고 마지막에는 소수의 사람들의 전기를 위해 누군가가 희생당한다는 것.. 그리고 그 희생을 당연하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은 내가 빨리 많은 것을 공부해서 그렇지 않다는 것을 더욱 설득력 있게 말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 라며 문자도 보냈었다. 밀양에 가서도 나름 그곳에서 들은 말들이나 풍경들을 열심히 정리하고 자기 전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며 정리를 해보기도 했었지만 너무 늦게 시작해 희망버스 만의 기회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 것 같다. 아니면 내가 길을 찾는 것이 아닌 준비되어있는 길을 나로써 걷기만 한 식이었던 것이 문제였던 것 같기도 하다. 그렇지만 이번 밀양 희망버스로 인해 난 밀양에 관심가질 수 있게 되었다. 그 곳을 안 만큼 그 곳의 사람들을 만난 만큼 난 더 밀양이 내 일이 되어버렸고, 이번 짧은 1박 2일 여행을 통해 그 곳의 현장감은 내 몸의 무관심 속에 쌓여있던 밀양의 싹을 틔웠고 그 싹을 발견한 난 이제 뿌리내리며 앞으로의 배움을 이어나갈 수 있게 되었다. 사실 이 싹을 틔운 것만으로도 난 밀양의 희망버스가 한 몫 했다고 말하고 싶다. 안 되려나... 2. 강정마을이야기를 들으며 해군기지 때문에 마을의 공동체가 부서지고 구럼비의 해군기지를 반대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힘들어서 그만하게 된다는 사람들이 생긴다는 말을 듣고 다른 곳에서도 그런 일들이 일어나겠구나 싶었는데, 내가 간 밀양은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당당하고 끈끈하게 연결이 되어있으신 것 같았다. 그 모습이 안도가 되기도 하고 ‘이런 공동체가 어떻게 7년 동안 계속 만들어져 갈 수 있는 것일까’ 하는 생각도 들고 ‘내가 잘 몰라서 그런 건가, 사실은 이곳에도 그런 갈등이 있을까.’싶기도 했다. 밀양의 마을의 공동체는 송전탑 문제가 일어나기 전에 끈끈했기 때문에 지금까지 함께 송전탑을 반대할 수 있는 것일까, 아니면 송전탑이 생긴다고 하니까 사람들이 뭉치게 된 것일까. 그 점이 참 궁금했었는데 나는 볍씨학교 보금자리 문제를 떠올리면서 전자일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밀양 송전탑 사건을 떠올리며 난 볍씨학교 보금자리 사건이 생각났었고, 그것으로 더 공감하거나 밀양주민분들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실감할 수 있었다. 우리들이 조금씩 조금씩 땅을 넓히며 하나하나 손으로 가꿔온 땅을 갑자기 정부에서 특별법이라는 이름으로 “나가!”해버리는 것. 졸지에 쫒겨날 상황이 된다는 것. 처음엔 실감이 안 나고 답답하다가 자꾸만 나무 개수와 땅을 확인하러 오는 공무원들을 보면서 두려움도 느끼고 ‘오기만 해봐’하는 눈빛으로 째려보게 되고, 이대로는 안 되겠다 움직여보기도 하고 마을 사람들과 토론을 하고 다른 사람들을 설득해보기도 하던 것은 결코 밀양의 이야기만은 아니었다. 토시하나 안 틀리고 볍씨학교 보금자리 주택지구 선정문제 때도 똑같았다. 히옥스가 전에 그 분들에게 밀양은 목숨보다 소중한 것이라고 했다. 난 그 말이 생소하다고 느꼈고, 그들에게 그런 것은 어떻게 만들어 진걸까, 그런 게 있는 걸까, 했다. 그런데 이번에 볍씨와 연결되어 생각해보니 그 점이 확실하게 무엇인지 알았다. 지금이야 우리 쪽의 입장은 ‘제발 이대로 스윽 사라지길..’이면서 양쪽 다 조용히 기다리고 있는 상태라 그 쪽에 많은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되지만 만약 우리는 이곳에서 계속 교육을 지속시키고 싶은데 볍씨의 교실을 뭉갠다고 나무를 자른다고 했을 때는 나도 뒷산에 오를 것이고 절대로 못 자르게 할 것이다. 그들이 나에게 공무집행방해죄다 뭐다 한다 해도 막을 것이고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린다고 해도 옥길동에 자리 잡고 있는 볍씨를 지킬 것이란 말이다. 우리나라에 마을자체가 그리 많은 것은 아니라고 알고 있는데, 지금 정부에서 그런 마을의 공동체들을 쪼개고 쪼개며 자꾸 갈라놓고 있다는 것이 굉장히 답답하다. 왜 자꾸 사람들을 학생들을 가족과 친구라는 것에서 때어내려고만 하는 것일까, 왜 자꾸 자기만 생각하게 하는 걸까, 왜 자꾸 사람들을 극단적인 상황으로 몰아가 ‘어쩔 수 없어’라는 생각들을 하게만 하는 걸까. 우리 사회는 정말이지 새로운 생각의 혁명이 필요하다. 3. 희망버스를 시작하며 우리들에게 센세이션이 되었던 약속이 하나 있다. 바로 핸드폰 충전을 하지 않는다. 난 이 생각이 얼마나 자랑스러웠는지 모른다. 이런 약속을 실행할 수 있는 공간에 사람들과 함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흥미로웠는지도 모른다. 와우. 첫 날은 어영부영 그다지 신경을 쓰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요즘 내가그린기린그림이라는 3G를 필수로 하는 게임이 유행을 하고 있던 때라는 것을 미루어 보았을 때 붐에 비해 다들 무사히 핸드폰과 집으로 귀환을 위해 다들 신경 쓰며 많이 하지 않았던 것 같다. 만약 이런 규칙이 없었고, 다들 ‘충전기가 있으니 괜찮아’라는 생각을 했다면 다른 풍경이지 않았을까..? 그리고 둘째 날 우리의 자전거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죽돌들의 배터리를 위해. 자전거를 밞으며, 그 모습을 보며 다들 무슨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고 궁금하기도 하지만 내가 생각했던 것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자전거가 아니었다면 저 전기를 모두 코드에서 뽑아 썼겠지였고 하나는 대략 7개의 핸드폰들은 하루를 간당간당하게 넘기는 구나, 죽돌들의 핸드폰 전기 충전양만 해도 굉장하겠지? 지금 대한민국 사람들은 이런 핸드폰을 쓰고 있구나, 핸드폰이란 참 어리석은 물건이구나. 자꾸자꾸 피쳐폰은 사라지고 우리들 사이에서도 고장으로 인해 점점 없어지는 시점에서, 핸드폰 배터리는 5시간용이야 라는 생각이 이미 당연시해진 시점에서, 비싼 요금 내니 스마트폰을 산값은 해야지 하면서 다소 의무감으로 사용량을 늘려가는 시점에서 개그콘서트의 황현희 버전으로 “도대체 얘네들 왜 이러는 걸까요?”라는 시선과 생각으로 우리를 볼 필요가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이번 우리들의 시도가 각자에게 이런 생각들을 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싶다. 4. 어쨌든 내가 주동적으로 움직이면서 참가하지는 못 했던 밀양버스이지만, 순간 순간 그 분들에게 도움이 되려고 많은 노력을 했던 것은 사실이다. 설거지도 춤도 벽돌도 밭일도. 그 분들은 그 곳에서 열심히 산과 밀양을 지키시고 난 여기서 그 분들의 사실을 알리고 듣는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다른 사람들이 나에게 밀양을 물어봤을 때 밀양의 이야기를 조근 조근 해줄 수 있게, 그 사람들도 밀양에 관심 가질 수 있게 하는 그것이 내가 앞으로 할 수 있는 일인 것 같다. 어렵겠지만 거기 계신 그 분들 만큼은 아닐 터이니. 벗아 밀양 가기전에 아빠께 밀양을 간다고 말씀을 드렸는데 아빠가 가는 이유가 뭐냐고 물으셨을 때 원전에서 나오는 전기를 전기 소비가 가장 많은 서울로 옮기기 위해 밀양에 송전탑을 짓는데 우리는 그걸 반대하고 밀양 마을분들을 지지하러 갈거야. 라고 했는데 뭔가 말을 하고 보니까 정말 내가 그러고 싶다거나 마음에서 우러나와서 그 분들을 지지하러 간다는 것 이라기 보다는 그냥 간다니까 나도 가는거야 식인 말이 나왔다. 마을의 모습은 송전탑으로 인해 요동치는 마을이 아니라 평화롭고 안정되어 보였다. 밀양 가기전에 나는 쓸모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원전에서 발생되는 전기를 송전탑을 통해 전기의 수요량이 가장 많은 이곳에서 그 전기를 사용하는 내가 밀양에가서 도움을 드리고 싶었다. 하지만 막상 가고나서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기 위해서 노력하지 않았다. 지금와서 생각 해보면 너무나도 한심했다. 우리가 가고 나면 다시 원래도로일 마을에서 왜 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지 않았을까. 혼자 싸우는듯한 기분은 어떤 기분일까? 많이 외롭고 나 혼자 별종이라는 기분도 들고 힘들 것 같다. 그렇지만 밀양 주민들은 혼자 싸우는 것이 아니다. 국가를 등에 업고 싸우는 한전 앞에서는 한없이 작아지고 뭘해도 안될 것만 같아서 무기력 해지고 나중에는 할 수있다는 희망까지 잃어버릴줄 알았지만 밀양 주민들은 절대 그런 모습이 아니었다. 하고자 하는 목표가 있고 그 목표를 위해 생계도 잠시 미뤄두고 진심을 다해 일하는 분들이셨다. 마을에는 젊은이들이 많이 없어 보였다. 그런데 첫날 벽돌을 나르는데 아빠와 비슷한 연배가 되보이시는 분들이 문풍지에 나르시고 벽돌4개씩 나르시고 정말 얼마나 힘드실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막상 내가 벽돌 1개를 지게에 지고 나르는데 오르는 내내 부끄럽지만 내가 이일을 왜 한다고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었다. 하지만 막상 하고 나니까 이름모를 뿌듯함을 있었다. 하지만 내려오면서 과연 나는 내 생계를 위해서 할 수 있을까? 싶었지만 둘째날에 올라갔을때 첫째날은 지쳐 뻗어 있느라 몰랐던 밀양의 경치를 볼 수 있었다. 산 정상에서 바라보는 밀양마을은 정말 예뻤다. 중학교를 산에서 보내서인지 아니면 땀흘리면서 올라왔는데 시원스러운 바람이 불어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편안했다. 그리고 마을을 보면서 생계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왜 이렇게 소중하게 아끼는 마을이고 이토록 지키고 싶어하는 마을인지 새삼 느끼게 되었다. 다녀온 후에 무관심이 정말 무서운 일이다는걸 느꼈다. 정말 사람이 죽어야지만 우리는 관심을 갖게 되는건가? 큰일이 나야지만 새삼 느끼게 되는것인가? 한발 앞서서 알거나 알아 볼수는 없는것인가? 하는 생각을 하면서 연예 뉴스나 종합 뉴스를 보는 내가 한심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이일을 알았으면 했다. 그리고 가서 마을 분들을 도왔으면 싶었다. 다행이도 송전탑 문제가 밀양의 주민들의 성공쪽으로 거의 다 끝나간다고들 하시지만 새로운 에너지? 밀양에 새로운 바람이 불었으면 좋겠다. 신선한 바람같은! 훈제 버스로 밀양까지 가게 되었는데 밀양에 도착을 해갈 떄 창 밖을 보면서 밀양으로 가고 있었다. 그런데 창 빡에 여러강지의 문구들의 현수막들이 눈에 띄기 시작을 하였다. 각자 쓴 말들은 다르지만 같은 의미를 두는 말이었다. '송전탑을 반대한다.' 이러한 문구들을 보면서 내가 밖에서 말로만 듣던 밀양에 도착을 하였다는 것을 알리려는 것 같았다. 우리가 도착을 해서 도울수 있는 것이라고는 단순한 몸으로 하는 벽돌을 나르는 일 같은 것이었다. 처음 벽돌을 날렀을 떄는 이정도 쯤이야 했는데 올라 갈수록 벽돌의 무게가 실감을 하게 되고 한걸음 한걸음이 힘이 들었다. 하지만 이러한 것들을 우리가 하지 않는다면 다른 누군가는 해야 하고 도울수 있는 일을 했던것 같다. 벽돌을 지고 농성장 까지 올라와서 본 광경은 어이가 없었다. 허름한 천막과 베어져 있는 나무들 그리고 송전탑을 짓기 위해서 가져온 철조물들과 포크레인 그러한 것들을 보고 내가 정말 현장에 왔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지게를 지고 힘들게 벽돌을 운반을 하였는데 한전 사람들은 헬기로 포크레인을 나른다는 것을 들었을떄 뭔가 아이러니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천막에 있는 할머니와 할아버지분 들은 항상 산에 올라 가서 지내야 하는 육체적 고통도 있지만 항상 그곳을 비울수 없다는 불안감에 사셔야 한다고 생각을 하니 육체적 고통보다 정신적 고통이 더할 것이라고 생각을 하였다. 그때는 미처 생각을 못하였는데 서울에 돌아와서 생각을 해보니 저러한 송전탑들은 따지고 보면 내가 살고있는 이 서울을 위해 세워지는 것인데 정작 송전탑에 대한 고통은 서울이 아닌 밀양이 받고있으니 과연 서울 사람들은 내가 쓰고있는 전기가 어디서 오고 어떠한 사람들이 피해를 받고 있는지 알고있을까? 라는 의문이 들었다. 바투카다 행진을 할때 기억이 남은 말이 있다 어떤 한 할머니이 '우리가 송전탑을 반대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확실한 계기가 되었다고 이제 주춤주춤하던 사람들도 반대를 할수있게 힘이 될수 있을꺼라고' (확실히 맞는지는 모르겠지만...)라고 말씀을 했던 기억이 난다 우리가 단순히 그들의 기분을 업 시켜주고 힘을 주는 것 뿐만이 아니라 마을 사람들한테 시작을 할수 있는 계기를 심어 준거 같아서 공연팀의 공연을 다시 생각을 하게 되었던 날이었던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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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1.03 23:15:23
아직 리뷰를 보내오지 않은 사람. 스텔라, 라온, 서키, 아이, 주님, 선호, 주말의 공유.도 좀 해주구요. 미르, 미로, 하얀별, 초코
2012.11.06 21:40:31
동녘 이번 밀양 동화전마을 방문은 이래도 되나 싶기도 한데 즐거웠던 것 같다. 할머니들이 아직 춤을 추고 웃으실 수 있을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열심히 하자는 취지로 갔는데 너무 잘먹고 잘지냈고 고생은 오히려 조금만 안 한 것 같아 죄송하기도 하다. 일을 더 많이 했어야 하는데...우리의 방문과 공연을 어르신들이 좋아해주셔서 감사한 마음이 컸다. 지금와서 생각해보니 별로 한 일도 없는 것 같지만 어쨌든 우리는 농성장에 지을 구들방의 흙벽돌을 지게에 지고 산을 오르고 밭일을 돕는 일, 행진의 흥을 돋구기 위해서 앞장서는 일을 할 수 있었다. 특히 가장 고된 일은 벽돌을 나르는 것이었다. 그냥 공사장에서 벽돌을 여기서 저기로 나르는 일이라면 별 것 아니라고 생각했을 터인데, 한 장에 15kg에 육박하는 흙벽돌을 지게에 지고 올라가려니 허리가 끊어질 것 같아 죽을 맛이었다. 기껏 하루에 두 장 밖에 못 옮기면서 그리 힘들어하는 내 자신이 창피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작은 뒷산이었지만 허리가 아파 힘든 길이었는데 마을의 할머니들은 어떻게 여기를 오르셨을까. 이런 생각들이 지나갔다. 농성장은 공사가 중단된 현장을 바로 앞에서 감시할 수 있게 만들어진 움막이 세워져 있었다. 할머니 두분이 지키고 계셨는데 항상 지켜보고 있어야 하기 때문에 누군가는 꼭 그곳에서 자리를 지키고 있어야 한다고 했다. 한전 때문에 전전긍긍하고 농사일도 바쁜 사이, 이미 충분히 그분들의 삶이 고생스러우실 것 같다는 생각을 했지만 그 사이에서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면서 흥을 잃지 않으신 마을 분들의 모습이 존경스럽게 보였다. 첫째날 밤에 잔치를 시작하며 보았던 영상 한 자락에는 (정확히는 기억 안 나는데)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바깥 세상과의 철저한 고립'이라는 문장이 있었다. 벽돌을 지고 산을 오를 때 들었던 생각이 그 장소에서 그 문장을 읽는 순간 죄송함과 감사함으로 더 커졌던 것 같다. 밀양 송전탑은 수도권으로 전기를 공급하기 위해 세우려고 하는 것인데, 그 수도권에서 살며 (핵을 반대하는)사람들이 늦게나마 힘을 보태는 것 같아서 드는 죄송한 마음이 한편이었고 7년간 고독한 심정으로 막아오셨던 것이 이제 승리가 보이기까지 이어져온 것에 감사함이 동시에 느껴졌다. 핵발전소의 존재는 언제가 될지 모르는 사고가 위험해서일 뿐만 아니라 존재 자체로 이미 누군가를 희생할 수 밖에 없는 문제이기 때문에 적어도 이 나라의 사는 사람들의 문제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 더 많은 사람들이 밀양으로 모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고, 혹시나 그렇게 사람들이 힘을 모으는 자리가 다시 생기면 그때는 더욱 강하고 좋은 에너지를 사람들에게 전할 수 있는 일이 가능했으면 한다. 계속해서 생각하고 갈고 닦지 않으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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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 남아 있던 사람들의 주말. (하얀별, 마, 미르, 미로, 초코)
마
토요일에 집에 들어가는 길에 dvd를 두장 빌렸다. 일루셔니스트라는 영화와 노트북이라는 영화였는데 일루셔니스트라는 영화는 영화 자첸 별로였지만 색감과 배경을 이루는 것들 그리고 소품들이 무척 예뻤고, 노트북이란 영화는 진부하고 뻔한 내용을 잘 연출해내어 전체적으로 멋지고 감동적이었다. 주인공 남자의 여자를 향한 사랑이 너무 한결같고 순정적이어서 여자가 부러웠다.. 일루셔니스트 중 헝가리 황태자의 궁의 복도 벽면에 숫사슴의 머리 박제가 빼곡하게 장식돼있는 장면에서 연극 레일라와 리의 발라드가 떠오르기도 했다.
주말동안은 한 것이 없다. 내내 머리가 아파 끙끙댄 것도 있지만 정말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사실 하루종일 방에 박혀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내 에너지 회복 방법이었는데, 어느 날부터 그렇게 해도 에너지가 충전되지 않았다. 심지어 집에만 있는 것 보다 밖에 나가있는 게 낫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나서 새삼 내가 변했다는 것을 느꼈다. 나는 얼마전 까지도 밖을 무서워하는 히키코모리였는데. 좋은 변화라고 생각했다.
그러고보니 며칠만에 악몽을 꿨는데, 집에 강도가 들어서 큰 칼로 엄마를 마구 찔러서 내가 식칼로 강도의 머리를 잘라 죽이는 내용이었다. 엄마는 칼에 몇번이나 찔리고도 조금 창백할 뿐 멀쩡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며 얼른 시체를 치우라고 말했다. 강도가 엄마의몸에 낸 상처가 무슨 드릴로 뚫은 것 처럼 몸 안이다 보이도록 컸다. 나는 시체를 치우고 엄마를 화장실로 데려가서 상처에 물을 뿌리며 엉엉 울었다. 나는 보통 스트레스 받는 일로 악몽을 꾸는데 이건 대체 무슨 꿈인가 싶다. 개꿈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