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판작업을 한다는 얘기를 들었을때는
 '그럼 우리 집에 가는 길에 늘어서 있는 무수히 많은 간판들을 기록해야 되는 건가'  싶었다.

매일 매일 같은 길을 지나다니면서도 그 길에 늘어서있는 간판들을 주의깊게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가게는 있지만 간판은 없는 곳들도 많았고, 딱히 좋아하는 가게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다가 문득 발자국으로 간판을 표현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집에서부터 200발자국안에 있는 간판들을 적겠다는 생각을 하고 다음 날 아침, 크로키북을 들고 나왔다.

한 걸음 한걸음 걷고 수를 세고, 간판들을 기록하면서 내가 센 발자국 수를 잊어버리지 않으려고 계속 중얼거렸다.
200발자국 안에 있는 가게는 많지 않았다.
내가 생각했던 200발자국은 우리 집으로 가는 골목을 훨씬 벗어나있었는데 실제 걸어본 200발자국은 딱 우리 집으로 들어오는 골목까지였다.

발자국을 사용해서 작업을 하려니 생각보다 어려웠다,.
처음 내가 하고 싶었던 건 플립북이었는데 발자국이라고 하니 왠지 플립북이 어울리는 것 같았다.
예주의 의견과 다른 여러 의견들을 듣고 들떠서 시도를 해봤지만 생각처럼 잘 되지는 않았다.
그래서 결국 그림을 그렸다.

그렇지만 그냥 아무런 형태가 없는 그림보다 접어도 될고 세워도 되는 입체 형태의 책을 만들기로 했다.
A4용지보다 조금 작은 사이즈의 종이로 간단한 책을 만들고 우리 집에서 200발자국 안에 있는 간판들을 그려넣었다.
내가 자주가는 편의점과 세탁소, 우리집 앞에 있는 치안센터였는데 각각의 이유가 있었다.
그 이유들을 생각하며 그림을 그리니 훨씬 잘 그려졌고, 동네에 대한 생각도 다시금 해볼 수 있었다.

나는 형광등 불빛을 싫어해서 평소에도 작은 스탠드 하나만 켜놓고 생활을 한다. 게다가 이번에는 밤에 간판작업을 해서 그런지 완성된 작업물도 배경이 밤이었다 (사실 밤에 혼자 작업하는 게 집중도 잘 되고 익숙한 이유도 있다).

생각보다 작업도 별 어려움 없이 잘 됐고,  완성된 작업물도 꽤 만족스러웠다.
처음엔 간판작업을 부담스럽게만 생각했었는데 막상 해놓고 나니 그렇게 부담을 갖고 미루지 않아도 될 일이었다는 걸 알았다.
사실 간판이라는 건 그 동네의 특성이나, 환경같은 걸 말하기도 하는데  그 동안 우리 동네에 너무 무심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내가 가는 길에만 신경이 쓰여 간판이나 동네를 둘러볼 여유는 없었을 거다.

이번 기회로 내가 평소에 우리 동네를 어떻게 보고 있었는지도 생각할 수 있었고, 똑같은 길과 건물, 풍경이었지만 시간의 차이에 따라 얼마나 다르게 보이는지도 알 수 있어서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