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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의 시들은 '연시' 중심이 되어버렸노라는 후일담)



남도행

고정희

 

칠월 백중날 고향집 떠올리며

그리운 해남으로 달려가는 길

어머니 무덤 아래 노을 보러 가는 길

태풍 셀마 앨릭스 버넌 윈이 지난 길

홍수가 휩쓸고 수마가 할퀸 길

 

삼천리 땅 끝, 적막한 물보라

남쪽으로 남쪽으로 마음을 주다가

문득 두 손 모아 절하고 싶어라

호남평야 지나며 절하고 싶어라

 

벼포기 싱싱하게 흔들리는 거

논밭에 엎드린 아버지 힘줄 같아서

망초꽃 망연하게 피어 있는 거

고향 산천 서성이는 어머니 잔정 같아서

 

무등산 담백하게 솟아 있는 거

재두루미 겅중겅중 걸어가는 거

백양나무 눈부시게 반짝이는 거

오늘은 예삿일 같지 않아서

그림 같은 산과 들에 절하고 싶어라

무릎 꿇고 남도땅에 입맞추고 싶어라



편지5

고정희

 

너를 내 가스에 들여앉히면

너는 나의 빛으로 와서

그 빛만큼 큰 그늘을 남긴다

그늘에 서 있는 사람

아벨이여

내가 빛과 사랑하는 동안

그늘을 지고 가는 아벨이여

나의 우울한 숙명,

단 하나 너마저 놔야 하느냐?



내 슬픔 저러하다 이름했습니다

편지11

고정희

 

어제 나는 그에게 갔습니다.

그제도 나는 그에게 갔습니다

그끄제도 나는 그에게 갔습니다

미움을 지워내고

희망을 지워내고

매일 밤 그의 문에 당도했습니다

아시는지요, 그러나

그의 문은 굳게 닫혀 있었습니다

완강한 거부의 몸짓이거나

무심한 무덤가의 잡풀 같은 열쇠 구멍 사이로

나는 그의 모습을 그리고 그리고

그리다 돌아서면 그뿐,

문 안에는 그가 잠들어 있고

문 밖에는 내가 오래 서 있으므로

말 없는 어둠이 걸어나와

싸리꽃 울타리를 만들어주었습니다

어디선가 모든 길이 흩어지기 시작했고

나는 처음으로 하늘에게 술 한 잔 권했습니다

하늘이 내게도 술 한 잔 권했습니다

아시는지요, 그때

하늘에서 술비가 내렸습니다

술비 술술 내려 술강 이루니

아뿔사, 내 슬픔 저러하다 이름했습니다

아마 내일도 그에게 갈 것입니다

아마 모레도 그에게 갈 것입니다

열리지 않는 것은 문이 아니니

닫힌 문으로 나는 갈 것입니다



사십대

고정희

 

사십대 문턱에 들어서면

바라볼 시간이 많지 않다는 것을 안다

기다릴 인연이 많지 않다는 것도 안다

아니, 와 있는 인연들을 조심스레 접어 두고

보속의 거울을 닦아야 한다

 

씨뿌리는 이십대도

가꾸는 삼십대도 아주 빠르게 흘러

거두는 사십대 이랑에 들어서면

가야 할 길이 멀지 않다는 것을 안다

방황하던 시절이나

지루하던 고비도 눈물겹게 그러안고

인생의 지도를 마감해야 한다

 

쭉정이든 알곡이든

제 몸에서 스스로 추수하는 사십대,

사십대 들녘에 들어서면

땅바닥에 침을 퉤, 뱉아도

그것이 외로움이라는 것을 안다

다시는 매달리지 않는 날이 와도

그것이 슬픔이라는 것을 안다



변증의 노래

고정희

 

밤마다 하루만큼의 살갗에 돋아난

밤마다 하루만큼의 슬픔에 돋아난

부정의 가시를 자르며 운다

그 어둠의 기슭에 흐르는 물처럼

바람 부는 마당을 가로질러 가는 너.

더운 목숨의 정으로도 어쩌지 못하는

그대 붙박힌 혼 앞에서

정물 하나까지 소리내어 끊는 밤은

하늘의 정적이 지상을 덮는다

아는가, 우리가 등돌려

거리에서 돌아올 때

하늘로 귀를 연 나무들이

본능으로 사랑하는 바람의 고향을,

그리고 사라지는 황홀한 경악을.

사랑아, 내 더운 부분만을

잘라내는 사랑아,

눈물겨워라



지리산의 봄

-뱀사골에서 쓴 편지-

고정희

 

남원에서섬진강허리를지나며

갈대밭에엎드린남서풍너머로

번뜩이며일어서는빛을보았습니다

그빛한자락이따라와

나의갈비뼈사이에흐르는

축축한외로움을들추고

산목련한송이터뜨려놓습니다

온몸을싸고도는이서늘한향기

뱀사골산정에푸르게걸린뒤

오월의찬란한햇빛이

슬픈깃털을일으켜세우며

신록사이로길게내려와

그대에게가는길열어줍니다

아득한능선에서계시는그대여

우르르우르르

우뢰소리로골짜기넘어가는그대여

앞서가는그대따라협곡을오르면

삼십년벗지못한끈끈한어둠이

거대한여울에파랗게씻겨내리고

육천매듭풀려나간모세혈관에서철철샘물이흐르고

더웁게달궈진살과뼈사이

확만개한오랑캐꽃웃음소리

아름다운그대되어산을넘어갑니다

구름처럼바람처럼

승천합니다



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

고정희

 

무덤에 잠드신 어머니는

선산 뒤에 큰 여백을 걸어두셨다.

말씀보다 큰 여백을 걸어두셨다.

석양 무렵 동산에 올라가

적송밭 그 여백 아래 앉아 있으면

서울에서 묻혀온 온갖 잔소리들이

방생의 시냇물 따라

들 가운데로 흘러흘러 바다로 들어가고

바다로 들어가 보이지 않는 것은 뒤에서

팽팽한 바람이 멧새의 발목을 툭, 치며

다시 더 큰 여백을 일으켜

막막궁산 오솔길로 사라진다.

오 모든 사라지는 것들 뒤에 남아 있는

둥근 여백이여 뒤안길이여

모든 부재 뒤에 떠오르는 존재여

여백이란 쓸쓸함이구나.

쓸쓸함 또한 여백이구나.

그리하여 여백이란 탄생이구나.

나도 너로부터 사라지는 날

내 마음의 잡초 다 스러진 뒤

네 사립에 걸린 노을 같은, 아니면

네 발 아래로 쟁쟁쟁 흘러가는 시냇물 같은

고요한 여백으로 남고 싶다.

그 아래 네가 앉아 있는



아시아의 아이에게

고정희

 

어느 태양의 나라에서

아시아의 배고픔을 우는 아이야

슬픈 이야기가 여기 있구나

네가 태어나기 전부터 아시아엔

네 탯줄을 결정짓고

네 길을 결정짓는 힘이 따로 있었구나

네가 네 발로 걷기도 전에 아시아엔

네가 두 손으로 절하며 받아야 할

밥과 미끼가 기다리고 있구나

 

고개를 똑바로 들려무나 아이야

아시아의 운동장을 뛰어가려무나

네가 두 손으로 절하며 밥을 받을 때

그것은 아시아가 절하는 거란다

네가 무릎 꿇며 미끼를 받을 때

그것은 아시아가 무릎을 꿇는 거란다

네가 숨죽여 고개 숙일 때

그것은 아시아의 하느님이 고개 숙이는 거란다

 

크게 소리치려무나 아이야

너는 우리의 살아있는 희망

크게 소리치려무나 아이야

너는 아시아의 평등의 씨알

너는 이제 자본의 하느님을 버려야 한다

아아 너는 이제 평등의 밥으로

평등의 밥으로 울어야 한다

아시아를 깨우는 힘찬 징소리로 징소리로

징~ 징~ 징~ 울려 퍼져야 한다



하늘에 쓰네

고정희

 

그대 보지 않아도 나 그대 곁에 있다고

하늘에 쓰네

그대 오지 않아도 나 그대 속에 산다고

하늘에 쓰네

 

내 먼저 그대를 사랑함은

더 나중의 기쁨을 알고 있기 때문이며

내 나중까지 그대를 사랑함은

그대보다 더 먼저 즐거움의 싹을 땄기 때문이리니

 

가슴 속 천봉에 눈물 젖은 사람이여

억조창생 물굽이에 달뜨는 사람이여

 

끝남이 없으니 시작도 없는 곳

시작이 없으니 멈춤 또한 없는 곳,

수련꽃만 희게 흔들리는 연못가에

오늘은 봉래산 학수레 날아와

하늘 난간에 적상포 걸어놓고

 

달나라 광한전 죽지사

열 두 대의 비파에 실으니

천산의 매화향이 이와 같으랴

수묵색 그리움 만리를 적시도다

만리에 서린 사랑 오악을 감싸도다

 

 

그대 보지 않아도 나 그대 곁에 있다고

동트는 하늘에 쓰네

그대 오지 않아도 나 그대 속에 산다고

해지는 하늘에 쓰네



묵상

고정희

 

잔설이 분분한 겨울 아침에

출근버스에 기대앉아

그대 계신 쪽이거니 시선을 보내면

언제나

적막한 산천이 거기 놓여 있습니다

고향처럼 머나먼 곳을 향하여

차는 달리고 또 달립니다

나와 엇갈리는 수십 개의 들길이

무심하라 무심하라 고함치기도 하고

차와 엇갈리는 수만 가닥 바람이

떠나라 떠나거라 떠나거라......

차창에 하얀 성에를 끼웁니다

나는 가까스로 성에를 긁어내고 다시

당신 오는 쪽이거니 가슴을 열면

언제나 거기

끝모를 쓸쓸함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운무에 가리운 나지막한 야산들이

희미한 햇빛에 습기 말리는 아침,

무막한 슬픔으로 비어 있는

저 들판이

내게 오는 당신 마음 같아서

나는 왠지 눈물이 납니다



네가 그리우면 나는 울었다

고정희

 

길을 가다가 불현듯

가슴에 잉잉하게 차오르는 사람

네가 그리우면 나는 울었다

목을 길게 뽑고

두 눈을 깊에 뜨고

저 가슴 밑바닥에 고여 있는 저음으로

첼로를 켜며

비장한 밤의 첼로를 켜며

두 팔 가득 넘치는 외로움 너머로

네가 그리우면 나는 울었다

 

너를 향한 기다림이 불이 되는 날

나는 다시 바람으로 떠올라

그 불 다 사그러질 때까지

어두운 들과 산굽이 떠돌며

스스로 잠드는 법을 배우고

스스로 일어서는 법을 배우고

스스로 떠오르는 법을 익혔다

 

네가 태양으로 떠오르는 아침이면

나는 원목으로 언덕 위에 쓰러져

따스한 햇빛을 덮고 누웠고

달력 속에서 뚝, 뚝,

꽃잎 떨어지는 날이면

바람은 너의 숨결을 몰고 와

측백의 어린 가지를 키웠다

그만큼 어디선가 희망이 자라 오르고

무심히 저무는 시간 속에서

누군가 내 이름을 호명하는 밤,

나는 너에게 가까이 가기 위하여

빗장 밖으로 사다리를 내렸다

수없는 나날이 셔터 속으로 사라졌다

내가 꿈의 현상소에 당도했을 때

오오 그러나 너는

그 어느 곳에서도 부재중이었다

달빛 아래서나 가로수 밑에서

불쑥불쑥 다가왔다가

이내 바람으로 흩어지는 너,

네가 그리우면 나는 울었다



살풀이

고정희

 

(넘보지 말아다오, 간밤에

내가 꾸어 버린 꿈)

그대 영혼 찌르는 불칼이로다

그대 몸 바수는 곤장이로다

에덴은 여전히 불꽃에 싸이고

당신들 영혼 江岸에 갇혔다

깊이를 감추는 건 그대가 아니라

강이다 갈 곳 때문에 울부짖는 건

바다가 아니라 그대 더운 목숨이다

시리고 떠는 건 겨울이 아니라

뿌리 뽑힌 영혼이다

어둠에 묶인 건 밤이 아니고

대낮에 드러나는 건 자유가 아니다

그대 총명은 탈출을 꿈꾸지만

밤마다 마지막 골목에 돌아와

몰래몰래 문 하나 닫아 건 잠 속

여인아, 세상 때문에 우는 것이 아니라

너와 너희 자녀 때문에 울어야 하리라

생나무 마른나무 함께 불에 던지고

산더러 우리를 덮으라 하리라

그대 영혼 찌르는 불칼이로다

그대 몸 바수는 곤장이로다



상한 영혼을 위하여

고정희

상한 갈대라도 하늘 아래선

한 계절 넉넉히 흔들리거니

뿌리 깊으면야

밑둥 잘리어도 새순은 돋거니

충분히 흔들리자 상한 영혼이여

충분히 흔들리며 고통에게로 가자

 

뿌리 없이 흔들리는 부평초 잎이라도

물 고이면 꽃은 피거니

이 세상 어디서나 개울은 흐르고

이 세상 어디서나 등불은 켜지듯

가자 고통이여 살 맞대고 가자

외롭기로 작정하면 어딘들 못 가랴

가기로 목숨 걸면 지는 해가 문제랴

 

고통과 설움의 땅 훨훨 지나서

뿌리 깊은 벌판에 서자

두 팔로 막아도 바람은 불듯

영원한 눈물이란 없느니라

영원한 비탄이란 없느니라

캄캄한 밤이라도 하늘 아래선

마주잡을 손 하나 오고 있거니



관계

고정희

 

싸리꽃 빛깔의 무당기 도지면

여자는 토문강처럼 부풀어

그가 와주기를 기다렸다

 

옥수수꽃 흔들리는 벼랑에 앉아

아흔번째 회신 없는 편지를 쓰고

막배 타고 오라고 전보를 치고

오래 못 살 거다 천기를 누설하고

배 한 척 들어오길 기다렸다

 

그런 어느 날 그가 왔다

갈대밭 둔덕에서

철없는 철새들이 교미를 즐기고

언덕 아래서는

잔치를 끝낸 들쥐떼들이

일렬횡대로 귀가할 무렵

노을을 타고 강을 건너온 그는

따뜻한 어깨와

강물 소리로 여자를 적셨다

 

그러나 그는 너무 바쁜 탓으로

마음을 가지고 오지 않았다

미안하다며

빼놓은 마음 가지러 간 그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고

여자는 백여든아홉 통의 편지를 부치고

갈대밭 둔덕에는 가끔가끔

들것에 실린 상여가 나갔다

 

여자의 히끗히끗한 머리칼 속에서

고드름 부딪는 소리가 났다

완벽한 겨울이었다

 


땅의 사람들 7

ㅡ호산나,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고정희

늦어서, 느져서 죄송합니다

안경알을 반짝이며 그가 들어섰을 때

서울시 주민등록증을 가진 그에게서

나는 딱 호랑이 냄새를 맡았다

죽은 것과 썩은 것

먹지 않는 호랑이

단식의 고통으로 빛을 뿜는 호랑이,

눈을 휘둥그레 떠보니

그는 기산지절 별건곤 암호랑이였다

호랑이의 새끼를 밴 호랑이였다

온갖 오염 눈부신 서울에서

왼갖 잡새 지저귀는 반도에서

공해 없는 털가죽과 흰

발톱이라니,

붕새의 웅비라니·······

맹물 두 잔에 마른번개가 쳤다

정ㆍ전ㆍ이ㆍ라ㆍ며

물잔 옆에 촛불이 너풀거렸다

들어오던 문으로 그가 다시 나갈 때

여느 때와 다름없이 그는

온순한 사람들의 등을 보였다

그가 앉았다 일어선 자리에서

오월의 초저녁 바람이 불었다

나는 심장에 플러그를 꽂았다



만월

고정희

만월이 떴다

소돔성에 만월이 떠오르자

버들가지는 더이상 흔들리지 않았고

고향에 두고온 깊은 강물도

더이상 잠자리를 적시지 않았다

이미 문 밖에는

예비된 공포가 기다리고 있었으므로

새벽이 오는 게 두려운 사람들은

이불깃에 이빨을 지그시 깨물며

절망으로 단단히 무장한 다음

가까스로 건진 희망 몇 가닥을

모세의 목에 걸어주었다

가까스로 얻은 희망 몇 가닥이

공동묘지에서 빛나는 아침

모세는 가야 했다

소돔성 떠오르는 만월이 되어

죽음보다 어두운 애급 땅으로

뚜벅뚜벅 사라진 다음에야

희망 몇 가닥에 잎이 돋는다는 것을

우리의 모세는 알고 이었다

그러나 모세는 가지 않았다

마을에 남아 있는 다른 사람들처럼

만월이 되는 것은 아득했다

 

문 밖에는 미증유의 적막이 다가서고

승냥이 울음소리 음산하게

빈 벌판에 가 닿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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