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시플루 속에서, 정감교육

하자작업장학교 김희옥

지난 해 10월 다음 아고라에는 한영외고 2학년 학생이 자사고와 외고를 폐지하자며 글을 올렸다. 그는 이렇게 썼다: “역사적으로 1%가 99%를 짓밟은 사례는 무수히 많습니다. 성적이 좋은 아이들끼리 모이면 성적 좋은 아이들의 마음만 헤아리게 됩니다. 사람이 나빠서가 아니라, 사람은 무의식적으로 함께 생활하는 사람들을 기준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그 아이들이 자라 사회에 지도자적인 위치를 차지했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 아이들은 학생시절에 입시 명문 고등학교를 다니고, 국영수 문제 풀이를 잘해서 소위 '인재'라고 인정받고 자라왔습니다. 그 학생은 당연히, 자신과 친하게 지내던 소수의 아이들의 생각만 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러한 아이들이 늘어날수록 우리 사회에 얼마나 큰 걸림돌이 될 지 생각해보아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우리 사회의 입시압박은 다른 나라의 교육사례를 벤치마킹하는 것만으로는 교육상황을 정상화하고, 성과를 높이기 어려울 정도로 특이하고 대단한 것이다. 오죽하면, (실제로 죽음을 선택하는 학생들이 많다는 의미에서) “입시플루”라는 말도 나왔겠는가. 내년에 창의인성교과가 만들어진다는데, 외국의 방법론들을 상당히 많이 연구한 것 같았다. 우리 교육이 안고 있는, 혹은 우리의 교육적 상황이 초래한 문제에 대한 해법을 찾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나라가 창의인재가 창조자본(creative capital)이 된다니까 따라하는 것은 아닌지 무척 걱정이 된다. 물론 창조자본도 중요하다. 그러나 함께 생각해봐야 할 일들은 훨씬 더 시급하다.

최근 탈대학이 줄을 잇고, 지성인이라 할 대학생들의 패륜사건이 연달아 보도되고 있다. 청소년들의 성범죄나, 졸업생동영상파문 같은 것들은 이제 그 범위가 단순히 질풍노도의 사춘기를 겪을 십대만의 문제가 아니게 되었다는 뜻이다. 장기화되고 있는 저성장고실업의 상황으로 인하여 ‘일자리’만 강조하는 최근의 사회적/정치적/문화적 분위기와 우리교육의 결과가 맞물리면서 만들어낸 사건들이다. 그리고 정직하게 들여다보자면 이러한 사건들은 고등학생(앞서의 한영외고 학생의 글)도 예견할 수 있는 일들이란 것이다. 정감교육의 필요는 그런 점에서 어떻게 정감교육을 할 것이냐는 물론 그에 앞서 우리 사회에서 정감교육이란 더 이상 미룰 수가 없다는 공감의 확보가 분명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방법론적으로 교육행위에 대한 성취를 평가하고, 입시에 반영할 수 있다고 대학과 학부모를 설득하는 일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작년 신종플루가 휴교령으로까지 이어지던 무렵, 언론이나 학교, 교육청 등 정부는 신종플루에 대해서 어떤 ‘교육적’ 태도를 보여줬던가. 우리 아이들의 감염을 걱정하면서 과감하게 휴교령이 내려졌다. (3명이상의 감염자가 있으면 무조건 휴교조치를 해야 했다.) 그러나 물론 고3들은 마스크를 쓰고 특별교실에서 수업을 계속했다. 신종플루보다 입시플루가 더 무서운 플루라는 것이 맞는 모양이다. 고1, 고2는 집에서 입시준비를 할 수 있도록 꼼꼼하게 상당한 양의 숙제를 내줬다. 감염된 아이들은? 격리된 채 치료에 전념하게 했다. 문제가 생기면 다른 전문기관과 학부모의 돌봄으로 인계된다. 입시에만 ‘사’교육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격리’가 불가피하더라도 그와 같은 초국적 플루의 위협에서 서로를 격려하고 따뜻하게 위로하는 마음을 전하는 법을 가르치는 일이 가능했을 것이라는 점은 여전히 아쉽다. 공동체적 감수성과 돌봄의 인성은 언제 학습되고 발휘될 수 있을까? 이를 위해 “체험교과” 하나를 더 만들어야 할까? 약이나 병원의 치료보다는 할머니의 약손으로, 친구들의 병문안으로 씻은 듯이 병이 나아본 경험이 기성세대에는 존재한다. 그리고 입시플루에서 문제가 생겨 ‘격리’되는 아이들도 사실 비슷한 경로를 거쳐 꼭 같은 처지에 놓여있다.

‘격리’된 상황에서, 혹은 언제라도 ‘격리당할’ 수 있는 처지에서, 99% 타인의 마음을 헤아리기 어려운 아이들이 감행하는 일들의 수위도 상당히 심각한 수준인 것은 다시 말할 필요도 없다. 졸업생동영상, 성(매매)범죄, 로우킥사건, 냉장고애완견파문 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건 속에서도 그것은 1%를 만들어내는 일과 무관하다며 모른 척해서는 안 된다.

최근 인문학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데, 입시와 수능평가는 인문학마저도 암기과목으로 왜곡시키고 말았다는 지적이 많다. 창의, 인성, 정감의 경우는 아마도 “체험과목”으로 분류될 것이다. 체험의 맹목성도 미리 살펴보면서 이를 보완할 기본교과의 중요성도 강조된다. 

체험교과로 분류되더라도, 정감/인성교육은 일회적 체험이어서는 안 된다. ‘체험’을 통한 교육(learning by doing)이 이뤄지려면 일정기간의 지속성이 주어져야 한다. 일본의 뉴스타트 센터에서 히키코모리와 니트족을 위한 프로그램으로 거동이 불편한 노인들의 데이케어 센터에서 일을 하도록 했는데, 1단계에서는 그저 옆에 앉아서 노인들의 얘기를 듣기, 2단계에서는 식사 시중, 3단계는 동네 한 바퀴 돌기, 4단계는 목욕시켜 드리기 등 3개월 이상이 걸리는 일을 단계적으로 맡아 하게 했다. 아주 천천히 진행하지 않으면 노인들의 필요와 요구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3개월간 주1회’가 아니라. 하루에 네 시간씩 주5일을 일한다.) 또한 관찰과 같은 낮은 단계의 체험으로부터 시작했더라도 일정수준의 ‘전문성’을 체득할 수 있도록 높은 단계의 체험으로 넘어갈 수 있어야 한다. 체험만 주고, 그 이상의 체험은 ‘사교육’을 통해서 하라고 ‘인계’해서는 안 된다.

지속할 수 있는 학교 안팎의 ‘사회적 활동’으로 연결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1992년 유엔환경회의(브라질 리우 회의)에서는 스스로를 “모든 미래 세대”를 대표한다고 소개한 12세의 시번 스즈키는 “저는 울음소리가 들리지는 않을지 모르지만 전 세계의 굶주리는 어린이들을 대표해서 여기 왔습니다. 저는 이제 더 이상 옮겨갈 데가 없어서 우리 별 전역에서 죽어가는 셀 수 없는 동물들을 위해서 여기 왔습니다. 우리는 귀 기울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라고 말한다. 아이들을 격리시킨다면, 이런 정감의 연설은 분명 불가능할 것이다. 천성산 도롱뇽을 대변하여 “줄기차게 좌절하겠다”는 지율스님이나 4대강을 살리라며 소신공양을 하는 문수스님의 연설도 들리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사회적 활동을 가능하게 하고, 정감과 인성의 학습이 입시의 스펙쌓기나 암기과목으로 전락하는 것을 중지시키고자 한다면, 우리교육에 대한 완전히 다른 관점을 수용해야 한다. 입시교육의 보완이나, 보상교육이 아니라, 우리 교육 전반에 대한 관점의 전환이 요구된다. 선진국으로부터 “어떻게 창의성 교육을 성공했나” 혹은 “어떻게 정감교육이 성취되었나”를 방법론적으로 배우기보다는, 입시와 학벌 만큼이나 중요한 다른 가치들을 관철시키고 작동하게 만드는 교육시스템과 사회적 분위기가 요구된다. 최근 몇 년간 ‘사회적 기업’의 관심이 높아졌지만, 정작 사회에 대한 깊은 관심과 99%의 타자들, 다른 지역, 다른 세대, 심지어는 모든 종에 대한 “정감”으로부터 발생되지 않는 한, 사회적 기업의 근간인 “사회적 활동”이란 성립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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