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5

너를 내 가스에 들여앉히면
너는 나의 빛으로 와서
그 빛만큼 큰 그늘을 남긴다
그늘에 서 있는 사람
아벨이여
내가 빛과 사랑하는 동안
그늘을 지고 가는 아벨이여
나의 우울한 숙명,
단 하나 너마저 놔야 하느냐?



내 슬픔 저러하다 이름했습니다
편지11

어제 나는 그에게 갔습니다.
그제도 나는 그에게 갔습니다
그끄제도 나는 그에게 갔습니다
미움을 지워내고
희망을 지워내고
매일 밤 그의 문에 당도했습니다
아시는지요, 그러나 
그의 문은 굳게 닫혀 있었습니다
완강한 거부의 몸짓이거나
무심한 무덤가의 잡풀 같은 열쇠 구멍 사이로
나는 그의 모습을 그리고 그리고
그리다 돌아서면 그뿐,
문 안에는 그가 잠들어 있고
문 밖에는 내가 오래 서 있으므로
말 없는 어둠이 걸어나와
싸리꽃 울타리를 만들어주었습니다
어디선가 모든 길이 흩어지기 시작했고
나는 처음으로 하늘에게 술 한잔 권했습니다
하늘이 내게도 술 한잔 권했습니다
아시는지요, 그때
하늘에서 술비가 내렸습니다
술비 술술 내려 술강 이루니
아뿔사, 내 슬픔 저러하다 이름했습니다
아마 내일도 그에게 갈 것입니다
아마 모레도 그에게 갈 것입니다
열리지 않는 것은 문이 아니니
닫힌 문으로 나는 갈 것입니다



변증의 노래



관계

싸리꽃 빛깔의 무당기 도지면
여자는 토문강처럼 부풀어
그가 와주기를 기다렸다

옥수수꽃 흔들리는 벼랑에 앉아
아흔번째 회신 없는 편지를 쓰고
막배 타고 오라고 전보를 치고
오래 못 살 거다 천기를 누설하고
배 한 척 들어오길 기다렸다

그런 어느 날 그가 왔다
갈대밭 둔덕에서
철없는 철새들이 교미를 즐기고
언덕 아래서는
잔치를 끝낸 들쥐떼들이
일렬횡대로 귀가할 무렵
노을을 타고 강을 건너온 그는
따뜻한 어깨와
강물 소리로 여자를 적셨다

그러나 그는 너무 바쁜 탓으로
마음을 가지고 오지 않았다
미안하다며
빼놓은 마음 가지러 간 그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고
여자는 백여든아홉 통의 편지를 부치고
갈대밭 둔덕에는 가끔가끔
들것에 실린 상여가 나갔다

여자의 히끗히끗한 머리칼 속에서
고드름 부딪는 소리가 났다
완벽한 겨울이었다



사십대

사십대 문턱에 들어서면 
바라볼 시간이 많지 않다는 것을 안다 
기다릴 인연이 많지 않다는 것도 안다 
아니, 와 있는 인연들을 조심스레 접어 두고 
보속의 거울을 닦아야 한다 

씨뿌리는 이십대도 
가꾸는 삼십대도 아주 빠르게 흘러 
거두는 사십대 이랑에 들어서면 
가야 할 길이 멀지 않다는 것을 안다 
방황하던 시절이나 
지루하던 고비도 눈물겹게 그러안고 
인생의 지도를 마감해야 한다 

쭉정이든 알곡이든 
제 몸에서 스스로 추수하는 사십대, 
사십대 들녘에 들어서면 
땅바닥에 침을 퉤, 뱉아도 
그것이 외로움이라는 것을 안다 
다시는 매달리지 않는 날이 와도 
그것이 슬픔이라는 것을 안다 



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

무덤에 잠드신 어머니는
선산 뒤에 큰 여백을 걸어두셨다.
말씀보다 큰 여백을 걸어두셨다.
석양 무렵 동산에 올라가
적송밭 그 여백 아래 앉아 있으면
서울에서 묻혀온 온갖 잔소리들이
방생의 시냇물 따라
들 가운데로 흘러흘러 바다로 들어가고
바다로 들어가 보이지 않는 것은 뒤에서
팽팽한 바람이 멧새의 발목을 툭, 치며
다시 더 큰 여백을 일으켜
막막궁산 오솔길로 사라진다.
 
오 모든 사라지는 것들 뒤에 남아 있는
둥근 여백이여 뒤안길이여
모든 부재 뒤에 떠오르는 존재여
여백이란 쓸쓸함이구나.
쓸쓸함 또한 여백이구나.
그리하여 여백이란 탄생이구나.
 
나도 너로부터 사라지는 날
내 마음의 잡초 다 스러진 뒤
네 사립에 걸린 노을 같은, 아니면
네 발 아래로 쟁쟁쟁 흘러가는 시냇물 같은
고요한 여백으로 남고 싶다.
그 아래 네가 앉아 있는



네가 그리우면 나는 울었다
 
길을 가다가 불현듯
가슴에 잉잉하게 차오르는 사람
네가 그리우면 나는 울었다
목을 길게 뽑고
두 눈을 깊에 뜨고
저 가슴 밑바닥에 고여 있는 저음으로
첼로를 켜며
비장한 밤의 첼로를 켜며
두 팔 가득 넘치는 외로움 너머로
네가 그리우면 나는 울었다
 
너를 향한 기다림이 불이 되는 날
나는 다시 바람으로 떠올라
그 불 다 사그러질 때까지
어두운 들과 산굽이 떠돌며
스스로 잠드는 법을 배우고
스스로 일어서는 법을 배우고
스스로 떠오르는 법을 익혔다
 
네가 태양으로 떠오르는 아침이면
나는 원목으로 언덕 위에 쓰러져
따스한 햇빛을 덮고 누웠고
달력 속에서 뚝, 뚝,
꽃잎 떨어지는 날이면
바람은 너의 숨결을 몰고와
측백의 어린 가지를 키웠다
그만큼 어디선가 희망이 자라오르고
무심히 저무는 시간 속에서
누군가 내 이름을 호명하는 밤,
나는 너에게 가까이 가기 위하여
빗장 밖으로 사다리를 내렸다
수없는 나날이 셔터 속으로 사라졌다
내가 꿈의 현상소에 당도했을 때
오오 그러나 너는
그 어느 곳에서도 부재중이었다
달빛 아래서나 가로수 밑에서
불쑥불쑥 다가왔다가
이내 바람으로 흩어지는 너,
네가 그리우면 나는 울었다



소외
편지4

최후의 통첩처럼
은사시나무 숲에 천둥번개
꽂히니
천리 만리까지 비로
쏟아지는 너,
나는 외로움의 우산을
받쳐들었다



살풀이



묵상

잔설이 분분한 겨울 아침에 
출근버스에 기대앉아 
그대 계신 쪽이거니 시선을 보내면 
언제나 
적막한 산천이 거기 놓여 있습니다 
고향처럼 머나먼 곳을 향하여 
차는 달리고 또 달립니다 
나와 엇갈리는 수십 개의 들길이 
무심하라 무심하라 고함치기도 하고 
차와 엇갈리는 수만 가닥 바람이 
떠나라 떠나거라 떠나거라...... 
차창에 하얀 성에를 끼웁니다 
나는 가까스로 성에를 긁어내고 다시 
당신 오는 쪽이거니 가슴을 열면 
언제나 거기 
끝모를 쓸쓸함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운무에 가리운 나지막한 야산들이 
희미한 햇빛에 습기 말리는 아침, 
무막한 슬픔으로 비어 있는 
저 들판이 
내게 오는 당신 마음 같아서 
나는 왠지 눈물이 납니다



만월


상한 영혼을 위하여  
 
상한 갈대라도 하늘 아래선
한 계절 넉넉히 흔들리거니
뿌리 깊으면야
밑둥 잘리어도 새순은 돋거니
충분히 흔들리자 상한 영혼이여
충분히 흔들리며 고통에게로 가자

뿌리 없이 흔들리는 부평초 잎이라도
물 고이면 꽃은 피거니
이 세상 어디서나 개울은 흐르고
이 세상 어디서나 등불은 켜지듯
가자 고통이여 살 맞대고 가자
외롭기로 작정하면 어딘들 못 가랴
가기로 목숨 걸면 지는 해가 문제랴

고통과 설움의 땅 훨훨 지나서
뿌리 깊은 벌판에 서자
두 팔로 막아도 바람은 불듯
영원한 눈물이란 없느니라
영원한 비탄이란 없느니라
캄캄한 밤이라도 하늘 아래선
마주잡을 손 하나 오고 있거니



하늘에 쓰네

그대 보지 않아도 나 그대 곁에 있다고 
하늘에 쓰네 
그대 오지 않아도 나 그대 속에 산다고 
하늘에 쓰네 

내 먼저 그대를 사랑함은 
더 나중의 기쁨을 알고 있기 때문이며 
내 나중까지 그대를 사랑함은 
그대보다 더 먼저 즐거움의 싹을 땄기 때문이리니 

가슴 속 천봉에 눈물 젖은 사람이여 
억조창생 물굽이에 달뜨는 사람이여 

끝남이 없으니 시작도 없는 곳 
시작이 없으니 멈춤 또한 없는 곳, 
수련꽃만 희게 흔들리는 연못가에 
오늘은 봉래산 학수레 날아와 
하늘 난간에 적상포 걸어놓고 

달나라 광한전 죽지사 
열 두 대의 비파에 실으니 
천산의 매화향이 이와 같으랴 
수묵색 그리움 만리를 적시도다 
만리에 서린 사랑 오악을 감싸도다 

그대 보지 않아도 나 그대 곁에 있다고 
동트는 하늘에 쓰네 
그대 오지 않아도 나 그대 속에 산다고 
해지는 하늘에 쓰네



땅의 사람들 7 
ㅡ호산나,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늦어서, 느져서 죄송합니다
안경알을 반짝이며 그가 들어섰을 때
서울시 주민등록증을 가진 그에게서
나는 딱 호랑이 냄새를 맡았다
죽은 것과 썩은 것
먹지 않는 호랑이
단식의 고통으로 빛을 뿜는 호랑이,
 
눈을 휘둥그레 떠보니
그는 기산지절 별건곤 암호랑이였다
호랑이의 새끼를 밴 호랑이였다
온갖 오염 눈부신 서울에서
왼갖 잡새 지저귀는 반도에서
공해 없는 털가죽과 흰
발톱이라니,
붕새의 웅비라니·······
맹물 두 잔에 마른번개가 쳤다
정ㆍ전ㆍ이ㆍ라ㆍ며
물잔 옆에 촛불이 너풀거렸다
들어오던 문으로 그가 다시 나갈 때
여느 때와 다름없이 그는
온순한 사람들의 등을 보였다
그가 앉았다 일어선 자리에서
오월의 초저녁 바람이 불었다
나는 심장에 플러그를 꽂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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