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세상 두드리기


...............................................1학기, 공연음악팀, 다미(김예담)



판에 발을 들여놓기 전 까지

중학교를 입학하기 전까진 난 그저 평범한 아이였다. 남들처럼 부모님 말씀 잘 듣고 공부를 위해 학원을 다니고, 친구들과 노는 것을 좋아하는 그런 아이였다. 그래서 부모님은 별 걱정안하시고 일반 중학교를 보내셨다. 그러나 부모님의 생각과는 달리 중학교에 입학하자마자 새로운 것에 눈을 뜬것일까? 일찍 사춘기가 왔다. 이제 와서 과거이야기를 말하면 오글거리고 허세에 빠졌었지만 그 시절엔 그걸 몰랐나보다. 

입학하게 된지 며칠 안돼서, 친구들과 학교 앞 문방구에서 먹을 것을 훔치다가 걸리게 되고, 두려운 마음에 집에다가는 '많이 생각해 보았어요'라는 별 의미도 없고 오글거리는 메모를 남겨두고 돈 11만원을 챙기고 다른 친구들 2명과 함께 집을 나왔다. 그때는 나름, 아르바이트도 해서 돈도 벌고 자유로운 삶을 살아갈 것이라는 생각을 갖고 친구들과 기분 좋게 거리를 활보하고 다녔다. 핸드폰도 위치추적을 못하게 배터리를 아예 빼놓고, 집에서 가져온 돈으로 최소한의 먹을 것을 먹는다는 계획까지 짜놨었다. 밤이 되기 전까지는 학교 선배들과 어울리며 다녔고 저녁엔 지하철이나  건물 계단 등에서 노숙을 했다. 그렇게 지내다, 찜질방에서 아빠에게 걸리고 다시 집에 돌아오게 되었다. 

학교를 무단으로 며칠 결석하고 돌아 왔을 땐 선생님은 나를 ‘문제아’라고 부르셨다. 그 후 선생님께선 학급에서 누군가가 사고를 치거나 학급 분위기가 안 좋아 졌을 땐 나를 따로 불러서 “다 너가 학급을 망쳐 논거야 난 정말 너가 싫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사셨다. 솔직하게 말하면 정말 억울했다. 자랑은 아니지만 그 시절에 난, 애들끼리 싸울 때 관심도 없었을 뿐더러 수업시간엔 잠을 자서 시끄럽게 하지도 않았고 반애들이 시끄럽게 굴면 잠자는데 방해된다고 오히려 화도 냈었다. 그래서 선생님과 벽을 쌓고 틈만 나면 싸우게 되었다. 선생님이 애들 앞에서 대놓고 내 욕을 하시고, 나무토막으로 때리셨을 때 난 오히려 더 ‘약올라봐라’ 라는 심정으로 비웃기까지 했다. 그런 생활을 1년 동안 반복했고 괜한 반항심 때문에 크고 작은 사고들도 쳤었다. 

2학년으로 올라와서는 그런 행동들이 유치한 행동이라는 것 을 깨달고 그런 행동들을 같이하던 친구들과 서서히 멀어지려고 일부로 싸움도 걸기도 했다. 그래서 바라던 대로 그 친구들과 멀어질 수 있었다. 하지만 서서히 시간이 흐르고 2학년 전체에 나에 대한 이상한 루머가 돌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여자로서 치욕스럽고 정말 화가 나는 루머였다. 처음엔 참고 지내다가 주위에 나에 대해 잘 모르던 아이들까지 날 그런 시선으로 보는 것을 느꼈고 화를 참을 수 없어서 그런 소문을 퍼트린 근원의 아이를 찾아다녔다. 결국 그 애를 찾았고, 해선 안 될 짓들도 했다. 그 후 반 년을 혼자 다녔고 학교는 거의 관심 밖이었고, 선생님들과 친구들은 믿으면 안 될 존재들 이라는 생각까지 박혔었다. 그래서 고민이 생기면 친구들에게 가장 먼저 상담하는 것이 아닌, 아빠에게 상담을 하였고 밖에서 같이 노는 친구들은 다른  학교 아이들만 어울리며 다녔다. 

그렇게 3학년이 되고 슬슬 바닥을 깔게 된 내 성적부터 미래까지 걱정이 되었다. 초등학교 때는 나름 상위권에 들어서 장래희망이 변호사였지만 중학교 올라와서 성적이 떨어지고 장래희망도 사라졌었다. 그래서 흔히 "넌 꿈이 뭐니?"라고 질문하면 “없어요”라고 답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내가 말한 “꿈이 없어요” 는 ‘난 얼마나 많은 직업들이 있는지도 잘 모르고, 아직까진 내가 하고 싶은 일이 없어서 지금 정해진 장래희망은 없다’는 소리였는데 사람들은 말 그대로 ‘꿈이 없는 아이’라는 시선으로 날 바라보았다. 그래서 사람들이 “넌 꿈이 뭐니?“ 라고 질문하면 ”청소년 상담가요”라고 대충 얼버무리고 희망하지도 않는 직업을 말하기도 했다. 

이렇게 장래희망에 별 생각을 갖고 있지 않다가 어느 날 ‘무릎팍 도사’라는 TV프로그램을 보게 되었고 거기서 한비야라는 분을 알게 되었다. 그분을 잘 알진 못하지만 내 머릿속엔 여전사 같이 보였었고 한비야 선생님의 모든 행동들이 존경스러웠다. 평소, 아빠의 직업 특성상, 나는 장애인분들이나 노인 분들 을 접할 많은 기회가 있어서 ‘봉사’라는 단어를 의무처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다 크게 나아가서 세계에 있는 많은 기아나 생명문제를 다루는 모습을 보고 감명을 받고 한비야 선생님 같은 사람이 될 것 이라는 막연한 꿈을 갖게 되었다. 그렇게 별 탈 없이 1년을 마무리 할 때 쯤 고등학교 입학 문제가 다가왔다. 난 평소 학교에 대한 반감도 있었고 솔직히 말하면 고등학교를 입학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부모님께는 더 실망시켜드리고 싶지 않았고, 앞으로 잘하는 모습도 보여드리고 싶어서 일반 고등학교 입학을 생각하고 있다고 말하였다. 그렇지만 생각지도 못하게 부모님께선 ‘대안학교’라는 또 다른 길을 제안하셨다. 평소 대안학교를 생각하는 이미지가 나쁘지 않았던 터라 나 또한 대안학교를 입학하길 희망했다. 중학교에도 대안학교를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을 땐 선생님은 거의 포기 상태라 별 반대 없이 “너 알아서 해라”라고 하셨고 그렇게 대안학교를 준비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꿈틀학교 교장선생님의 소개로 하자작업장학교를 알게 되었고, 하자센터에 있는 유자살롱의 어떤 분의 소개로 하자작업장학교가 어떠한 학교인지, 무엇을 배우는지 소개 받을 수 있었다. 그렇게 난 하자작업장 학교에 입학하길 희망 했고 3번의 심사를 거쳐서 판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같이 모여 앉아 식사하기

어느덧 ‘작업장학교‘ 라는 판에 발을 들여놓게 된지 4개월이 되었다. 4개월 동안 가장 많이 생각해보고, 고민 한 것이 뭐냐고 물으면 ‘공동체’라고 답 할 수 있다. 판에 발을 들여놓기 전까진 대인관계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해본 적 도 없었고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하지도 않았다. 중학교 때를 생각해보면 오히려 그런 관계를 쌓는 것을 일부러 피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이곳에 와서는 ‘함께 살기’라는 키워드를 갖고 생활해야 했다. 평소 먼저 다가가지 못하는 성격이라 친해질 수 있을까 생각을 했지만 고맙게도 여러 사람들이 먼저 다가와줘서 자연스럽게 여러 사람들과 친해질 수 있었다. 하지만 평소 말 한마디, 한 마디를 생각하지 않고 툭툭 내뱉는 게 익숙해져서 쉽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을까 걱정도 되었었다. 그래서인지 더 깊은 관계로 갈수 있는 사람들의 폭이 좁아졌던 거 같다. 

항상 생각하는 것이지만 사람들과 친해지는 것은 쉽지만 그 관계를 이어가기란 힘들다. 친해지다 보면 그 사람의 단점도 보일태고 나와 안 맞는 것도 있어서 쉽게 틀어지는 것 같다. 그 사이에서 감정적으로 다가가면 안 되는 부분도 많았는데 감정이 상해 버리는 게 문제이다. 그리고 그것을 소통을 하면서 풀어갈 수 있는 부분이 많았지만 이야기를 하고 풀어가는 과정 속에서 또 서로의 감정이 상할까봐 쉽게 다가가지 못했다. 시간이 한참 흐른 후에야 말 할 수 있고 서로의 문제를 고칠 수 있는 상황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누군가가 나한테 “넌 너무 그런 것 에 예민해!”라는 소리를 들은 후에야 이러한 문제들을 잠시 손 놓을 수 있었다. 


홀로 앉아 생각하기

판에 발을 들여놓고, 판에 맞춰 생활하는 사람처럼 염색하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이미 9년 동안 틀 에 박힌 교육에 맞춰서 살아왔기 때문에 그것을 쉽게 바꾸는 것은 굉장히 어려웠다. 내 생각을 남들에게 말하고, 내가 보고 느낀 것을 말하는 게 가장 익숙하지 않았다. 남들이 보기엔 ‘그게 왜 어려워? 솔직하게 말하면 되는 거 아니야?“ 라는 질문을 가질 수 도 있다. 다른 사람들은 자신만의 생각이 뚜렷하게 있고, 느낀 것을 표현하는 것에 어려움이 없을 수도 있겠지만 이전의 나는 그런 것을 오글거린다고 피하게 되고, 남들 앞에 나서서 말하는 것 을 싫어했다. 그래서 더 과장시키게 되고 생각하지도 않은 것을 생각한 척 하며 남들 앞에서 말하게 되었다. 그게 틀리고 안 좋은 짓 인 걸 알면서도 쉽게 고쳐지지가 않았다. 지금 와서야 어느 정도 내 생각을 말 할 수 있게 되었지만 그것은 시간이 흘러야만 가능했던 것이다. 

두 번째로 많이 생각했던 것이, 이 판과 나와 맞는 것인지 생각을 했었다. 평소 배우지도 않았고 접해 볼 수 있는 기회가 거의 없던 문제들을 다루고 배우는 것이 쉽지 않았다. 남들이 ‘넌 이 문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니?’라고 물으면 대충 얼버무리기 일쑤였다. 솔직하게 말하면 아직 그런 문제에 대한 기본 배경지식조차 없어서 생각도 할 수 없었는데 나의 이런 상황이 너무 부끄러워서 숨겨왔었다. 하지만 이러한 문제의 답은 의외로 쉽게 나왔었다. 내 노력이 부족한 탓 이었다. 더 습득 하려고 노력하지 않았고 누군가가 시켜야지만 하게 되는 상황이었다. 대충 알고는 있었지만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은 쉽지 않았다. 지금도 아직까진 그 문제는 제대로 풀리진 안은 상황이지만 노력 중 이다.


공연팀

‘슬픔을 넘어서 축제로 간다’ - 내가 소속해 있는 페스테자 팀명의 뜻이기도 하면서 공연의 목적이기도 하다. 처음에 어떤 매체로 정할지 골랐을 때 디자인 팀과 공연  팀을 굉장히 고민했었다. 디자인 팀은 평소에 웹디자인부터 여러 다른 디자인까지 관심이 있었을 뿐더러 평소에도 공부를 해왔던 것이었다. 그렇지만 공연팀을 선택한 이유는 간단하다. 악기 연주를 좋아하고, 음악을 듣는 것이나 음악으로 즐기는 것을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전에 키보드 연주나, 드럼을 잠깐 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는 그 악기로 무엇인가를 연주하는 자체의 즐거움을 느꼈지 그것을 매체로 해 본 적이 없었다. 입학식을 할 때 바투카다 연주를 눈앞에서 본 건 처음이었다. 평소 듣던 어쿠스틱 한 음악이나, 힙합 종류의 음악과는 사뭇 달랐다. 그렇지만 서로 웃으면서 연주를 하고, 누가 봐도 ‘저 사람은 즐기고 있구나’를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즐기고 있었고 행복해 보였다. 나도 공연 팀에 들어와서 그런 연주를 하고 싶었고 남들과도 공유 하고 싶었다. 내가 처음 악기를 선택했을 땐 많은 생소한 악기들이 있었다. 굉장히 매력적인 악기도 많았지만 눈에 들어온 것 은 ‘아고고’라는 악기와 ‘수루두’라는 악기 였다. 아고고 는 소리가 매력적이지만 크기가 너무 작아서 쉽게 다가가지 못했고, 수루두가 가장 눈에 들어왔었다. 크기도 클뿐더러 소리도 좋았다. 그래서 결국 수루두 를 선택하게 되었고, 배울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생각과는 달리 수루두는 은근 어려운 악기였다. 가장 기본적인 베이스를 깔아주는 악기로서의 의무를 이루긴 힘들었다. 드럼을 쳤을 때는 한쪽 귀에 메트로늄을 들으면서 해서 박자 감각에 대해 생각을 안해봤던 터라, 박자를 맞추는게 정말 힘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남과 아이컨텍을 하면서 커뮤니티를 하는 것 은 더더욱 힘들었다. 그래서 혼자 연습도 엄청 했었다. 처음 쇼케이스 를 하면서 첫 공연을 했지만 좋진 않았다. 박자도 맞지도 않고 표정부터 몸 동작까지 맘에 드는 것이 없었다. 예전에 악기연주를 하면서 공연을 했을 때엔 이정도로 실망한 것도 없었고 답답했던 것 도 크지 않았다. 그렇지만 바투카다 연주를 하면서 느끼는 감정들은 생소했다. 

그 후에 철쭉제 공연을 했었다. 그렇지만 철쭉제 또한 굉장히 실망스러운 연주였다. 이유는 저번 때 와 같다. 공연 팀에 들어오기 전까진 공연을 매체로 해서 즐기고 싶었는데 막상 와보니 즐기는 거보다 자기 자신을 채찍질 하고, 우울해져 있는 경우가 더 많았다. 물론 연습량 부족부터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힘든 부분이 한 두 개가 아니었다. 남들에게 코멘트를 받는 게 익숙하지 않았지만 그렇게 기분 나쁘지도 않았다. 하지만 코멘트가 아닌 그냥 못한다고 지적 받았을 때엔 정말 기분이 나빴다. 속으로 ‘내가 못하고 싶어서 못하는 줄 아냐!!!!’라고 소리도 쳐봤지만 정말 못하는 것을 어쩌겠냐 하는 심정이었다. 

그렇지만 분해서 더 연습을 할 수 있었다. 연습을 하다가 물집이 잡혀서 터지고, 터진 살 들이 밀려서 진물이 흘리기도 반복 하고, 평소 싫어하던 춤 연습도 해보고 그루브 연습도 했다. 하지만 남들 눈 에는 잘 보이지 않았다. 내심 ‘남들에게 연습량을 보이기 위해 하는 것도 아닌데’라는 생각도 했다. 그렇지만 공연이나 남들과 함께 즐기는 자리 에 서는 나의 실력이 즐기는 대에 굉장히 큰 걸림돌이 되었다. 그렇게 항상 같은 고민들이 풀리지 않은 채 시간이 흐르고 결국 악기를 바꾸게 되었다. 처음에 악기를 바꿔야 겠다 는 소리를 듣고 정말 창피하고 슬펐지만 남에게 피해를 주는 거 보단 내가 악기를 바꾸는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아고고 라는 악기를 다시 선택하게 되었고 배울수 있게 되었다. 아고고 는 수루두 의 정박자에 맞춰 엇박자 까지 연주하는 악기 이다. 

예전에 한참 힙합 노래를 즐겨 들었을 때 ‘엇박 의 미’라는 소리를 잠깐 들었던 게 기억나기도 했다. 그렇게 아고고 의 매력에 빠졌었고 솔직히 수루두 연주 했을 때보다 아고고 연주 했을 때가 더 즐거움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더 연습을 즐겁게 할수 있었다. 하지만 수루두 를 쳤을 땐 옆 에 있는 사람과 즐거움을 공유 하면서 연주 할  수 있었지만 갑자기 혼자가 되었을 땐 자주 길을 잃었다. 그래도 금세 옆에 있는 사람과 커뮤니케이션 을 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공연을 할 때엔 뭔가 달랐다. 예전에 수루두 를 연주 했을 땐 무대에 서고 싶었고, 남들 앞에서 연주를 하며 같이 즐기고 싶었지만 아고고로 연주 했을 땐 내가 아직 무대에 설 만큼은 준비가 안 되었다 는 생각이 자주 들었다. 그리고 평소 ‘공연을 위한 공연을 하지말자’라는 말을 들었는데 아고고 를 잡게 된 후에 하는 공연들은 거의 ‘공연을 위한 공연 같다’는 생각이 자주 들었다. 물론 공연들의 의의는 그것이 아니겠지만 정해진 무대 위에서 하는 연주는 나에겐 그렇게 느껴졌었다. 바투카다 연주를 볼 때 마다 드는 생각이지만, 이런 연주는 스테이지가 아닌, 사람들 사이에 둘러 싸여서 정말 축제 같이 연주 하는 게 더 멋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인지 다 같이 서는 무대지만 하기 싫었던 적이 많았다. 공연 팀 을 매체로 선택 했을 때 의 목적은 점점 사라져 가는 느낌도 들었다. 같이 연주하는 연주자 들 과 그걸 구경하는 관객들과 어떻게 소통을 할 수 있을지 더 생각을 해봐야 하는 거 같다.


현미네홉

현미네홉 은 쉽게 생각하면 도시농업을 배우는 프로젝트이다. 흔히 농사, 농부 이 두 가지를 들으면 논에서 모내기 하는 모습이 상상 된다. 처음에 현미네홉 이라는 도시농업 을 배운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 신선한 걸 배운다는 느낌에 기분이 좋았다. 어렸을 때부터 농업 보단 해산물 양식 에 더 가깝게 자라서 ‘농사’ 라는 것을 직접 체험 해보지 못했었다. 처음에 하자 마을 사람들과 밭을 만들고, 채소 모종을 가져다가 심었다. 더운 날씨에 허리도 자주 굽혀야 해서 몸이 좀 피곤했지만 여러 사람들과 이야기도 나누면서 해서 즐거웠다. 이렇게 현미네홉 프로젝트는 시작되고 도시농업이라는 게 한층 다가왔다. 평소 농업은 나 와 는 좀 멀게 느껴졌었다. 내가 나중에 커서 직업을 갖게 되고, 도시에 사는 모습만 상상했던 터라, 농사는 생각해 본적도 없었다. 그저 집 앞 베란다 에다가 간단한 텃밭 키우기 정도 밖에 생각을 못했다. 그러다가 도시농업이란 것을 배우게 되고, 키우고 먹는 것 뿐만 아니라 흙이나 미생물 같은 다른 부분에도 관심을 가질 수 있었다. 

학교에 있는 조그마한 밭에 이름을 붙이고, 거의 매일 매일 을 밭에 가서 채소들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액비 나  퇴비 를 직접 만들어 보는 경험도 하였고 내가 기른 채소들을 사람들 과 나누어 먹었다. 또 여러 사람들 과 함께 밭에 가서 모내기도 해봤었다. 솔직히 말하면 이 프로젝트는 생각 보단 몸으로 하는 게 많아서 좋았던 거 같다. 거의 한 학기 동안 한 프로젝트 여서 인지 알게 모르게 생활에 작은 변화들을 가져다가 주었다. 쉽게 사먹을 수 있는 쌈 채소부터 무심코 지나칠 수 있는 작은 텃밭 들 까지 눈이 갔었다. 처음엔 자급자족을 생각하면서 배운 도시농업 이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채소의 소중함과 우리의 먹거리 들이 길러지는 과정도 생각하면서 감사함을 느낄 수 있어서 좋았다.


문명의 전환기

나에게 ‘인문학’이란 것 은 가까운 것이지만 피하고 싶은 것 중에 하나였다. 일반 중학교 를 다니면서 배운 인문학은 오로지 책과 글로만 배운 것 이라 재미도 없었고 흥미도 가지 않았다. 그렇지만 문명의 전환기 라는 프로젝트는 영상으로 인문학을 배운다 길래 관심이 갔다. 평소 책보단 영화 나 다큐멘터리를 좋아하는 편이라 영상 인문학도 기대가 되었었다. 하지만 기대하는 것 도 잠시, 앉아서 만 강의를 듣고 영화를 보는 것 이라 졸음이 자주 왔었다. 그래서 놓친 부분도 없지 않아 많다. 영상을 보기 전에는 생각해야 하는 부분이나 중요한 부분을 찾으면서 봐야 해서 영상을 감상 하기에는 좀 어려웠다. 그렇지만 평소에 관심 갖고 있지 않던 역사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해준 기회였었다. 

학교에서 역사 교과서로 공부했던 부분들이 몇 개 나왔을땐 드디어 아는 것 이 나와 반가운 것도 있었다. 중학생 때 역사 공부하기가 싫어서 선생님한테 “지금은 현대를 배우기도 바쁜데 왜 역사를 배워야 하나요?”라고 유치하고 반항기 섞인 질문을 한 적이 있었다. 선생님은 “역사를 알아야 요즈음의 문제가 풀린다”라는 말을 했던 기억이 난다. 그 당시도 이해가 잘 가지 않았고 지금 와서도 영상 인문학 을 통해 역사를 배웠지만 이해가 잘 가지 않은 부분이다. 인문학을 듣기 전에 왜 역사를 배워야 하는지부터 알았어야 했는데 그게 안 되었고,옛날엔 어떤 것 들이 있었고, 어떤 문화 였는지 만 알게 된 상태로 이 프로젝트는 아쉽게 끝났다.


탈핵

작업장학교에 들어오자 마자 접했던 것이 ‘탈핵’이다. 평소에는 아예 관심이 없었을 뿐더러 이곳에 오기 전까진 핵에 대해 거의 모르는 수준이었다. 핵 하면 핵폭탄 밖에 생각나지 않은 난, 오자마자 ‘3.10 아이들에게 핵 없는 세상을’이라는 공동행동 시위를 하게 되었다. 처음엔 정신없이 시키는 대로 하다가 핵에 관련된 강의도 듣고 워크숍도 들으며 다녔다. 아직까지도 탈핵 에 대해 제대로 설명하진 못 하겠다. 그저 처음엔 핵은 안 좋은 것 이고 최대한 빨리 폐쇄시켜야 하는 고리원전에 대해 가볍게 알 수밖에 없었다. 

기본적인 지식이 없는 상태로 강의를 듣는 건 무리였다. 하지만 이곳의 수업이 거의 탈핵과 관련 된 것 이였기 때문에 최대한 빨리 알아야 한다는 의무감과 압박감이 있었다. 그런 상태로‘후쿠시마 원전사고’를 알게 되었고 그곳엔 원전사고 의 피해 와 고통을 겪는 사람들을 접할 수 있었다. 직접 경험해 보지 못해 그 사람들의 피해가 어느 정도인지 정확히 알기 어려웠지만 여러 사진들이나, 직접 일본에서 오신 원전사고 피해자 들이 해주신 말씀을 들으며 실감 할 수 있었다. 어른들 뿐만 아니라 아이들 까지 큰 피해를 얻고 불편한 생활을 하고 있었으며, 아직 태어나지 않은 뱃속에 있는 아이들마저 방사능에 의한 피해를 입고 있었다. 내가 아무리 핵에 대해 관심이 없었고 알게 된지 별로 안 되었지만 이러한 문제들을 접하는 대엔 어렵지 않았다. 

그러면서 핵이 만들어진 원인부터 우리나라의 고리원전, 주변 나라와 세계의 나라에 있는 핵 문제까지 보이게 되었다. 그리고 내 아래 세대가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물론 지금도 우리나라 의 고리원전이 언제 폭파 할지 모르는 노릇이지만 내 밑 세대도 굉장한 피해를 입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내 위에 세대들은 왜 이렇게 무책임하게 진행해 왔는지 질문 거리가 생겼었다. 탈핵 시위를 나갔을 때 평소 스크린으로만 봐왔던 생존문제가 달린 사람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고 탈핵은 내게 좀 더 가깝게 다가왔다. 아직까진 한참 어렵기만 하고 복잡한일 이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것부터 찾아가고 실천하며 탈핵에 대해 더욱 자세하게 공부를 해야 하는 상태 이다.


시 그리고 페미니즘 

나에게 '시' 란 그저 '중학교 때 분석하며 읽어야 했던 골치 아픈 것' 정도 밖에 안 됐다. 그러다가 작업장 학교에 다니면서 시 라는 것 을 또 접하게 되었다. 처음에 고정희 라는 시인을 알게 되었고 그 시인의 시를 접했다. 처음에는 생각 없이 그 시인의 시를 읽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별 느낌은 없었다. 평소 시를 즐겨 읽지 않아서 인지, 아직 시 의 맛 을 몰라서 인지, 어떠한 시를 읽어도 와 닿지는 안았다. 그런 상태로 고정희 시인이 어떠한 사람 이였는지를 배우게 되었다. 그 시인은 페미니즘 이였다. 처음에 페미니즘 라는 것 을 들었을 때 남녀평등 을 떠올리게 되었다. 내가 아는 페미니즘은 여성의 권리를 주장하는 주의 정도 였다. 

그러다가 고정희 시인의 생가 가 있는 해남에 가게 되었다. 그곳에서 고정희 시인의 친구 분들 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고, 요즘의 페미니즘은 여성의 권리를 뛰어넘는, 남성보다 더 우월적인 권리를 요 한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러면서 우리나라의 여성부가 떠오르기도 했다. 처음에는 남녀평등을 주장 하였을 탠데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는지 궁금하기도 했었다. 또 그곳에 가서 고정희 시인의 생가를 들렸을 땐 기분이 묘했다. 한번 도 얼굴을 뵌 적 없는 분 이였지만 돌아가셨다 는 게 실감이 안 났다. 그리고 그 집안에서 어떤 분이 방명록 같은걸 남기신걸 보았는데 그곳엔 '주인을 뵈려 집에 들려보았다가 어디 나가셨는지 안 계셔서 다시 되 돌아갑니다.' 라는 글을 보았을 땐 더더욱 실감이 안 났다. 그런 상태로 무덤가 에 갔을 땐 괜히 멍하게 되기도 했다. 그리고 거기서 살아생전에 좋아하셨던 노래를 불러드리고 인사를 드리고 집에 다시 왔다. 오랜만에 간 해남은 정말 좋았지만 굉장히 피곤했던 것 이 기억에 남는다.


난민

작업장 학교라는 판에 발을 들여놓고 배웠던 것 들 중에 가장 기억에 남고 관심이 있었던 분야다. 이 판에 오기 전까지 도 꿈이 난민을 돕고 난민과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삶을 사는 것 이였다. 그러다가 이곳에서 난민에 대해 공부 한다고 해서 기대가 되었다. 난민을 가장 처음 배운 것 은 난민의 종류 에 대해 배우게 되었다. 사회적 난민부터 여러 난민이 있었다. 내가 평소에 알던 난민의 종류 보다 더 훨씬 많은 난민이 있었고 그 수 도 상상하지 못할 만큼 많았다. 그리고 인권에 대해 배우게 되었고 미얀마에서 온 분들의 강의도 듣게 되었다. 여러 강의를 들으면 들을수록 꿈이 더 굳건하게 다져지지는 않고 오히려 세상의 현실을 알게 되고 책임감과 여러 가지를 요하는 것을 알게 돼서 약간 뒷걸음질 치게 되었었다. 

난민에 대해 배우면서 봤던 다큐멘터리 중에 어떤 분이 "해외 봉사활동은 단기간 을 하면 감동을 얻을 수 있고, 장기간 을 하면 책임감 이 필요하다"  라는 말을 듣고 계속 생각을 해봤을 때 내가 나중에 그런 사람이 되고 싶은 이유가 진정으로 그 사람을 돕고 싶어서 인가, 아니면 돕고 나서 감동의 느낌이 좋아서 인가 생각을 해보면 후자가 좀 더 컸다. 하지만 장기간 봉사활동은 책임감 도 필요하기 때문에 좀 더 난민에 대해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평소에 난민 이라고 하면 거의 생명문제, 기아를 생각 했다. 하지만 이 세계에서는 여러 난민이 있었고 그 상황도 복잡했었다. 인권 문제부터 주위 청소년들의 교육 문제까지 여러 문제가 있었다. 난 너무 극적인 상황만 봐왔던 것 이였고 주위를 둘러보니 그런 비슷한 환경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그래서 이번 난민에 대해 배운 것들은 나에게 약간의 충격과 더욱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준 계기였다.


한 학기를 마무리 하면서

이번 학기는 너무 빠르게 모든 것 이 훅훅 지나갔던 시기였다. 그렇지만 그 짧은 기간 속에서도 나름대로 스트레스도 많이 받았었고 힘들었던 시기 이였다. 거의 모든 것 들이 새로운 것 이였고 그것을 내 삶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쉽지만은 않았던 거 같다. 지금 와서는 예전보단 덜 힘들다고 느낀다. 그렇지만 몸이 익숙해져서 인거 같기도 하다. 예전 중학교에 가서 3학년때 선생님과 친구들을 만난 적이 있었는데,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 "드디어 사람이 되었네" 라는 소리 이었다. 생각해보면 '그전까진 사람이 아닌 짐승 같았단 것인가' 라는 생각을 잠시 했지만 변했다는 소리로 알아듣기로 했다.

그리고 그 변화가 좋은 변화 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다. 아직까지 많이 턱 없이 부족하고 고쳐나가야 할 일들이 많다. 그리고 그것을 자신 있게 고쳐 나갈 수 있다고는 말 못하겠다. 그렇지만 노력도 해보고 부딪혀 볼 것이다. 지금까지는 힘든 것 을 피하려고 만하고 엄살 부리기 바빴지만 그런 모습들이 차차 변화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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