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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평론에 소개되었던 '힐러리에게 암소를: 자급관점'이라는 책이 조만간 출판될 예정이라고 하는군요. 거기서 소개된 힐러리 에피소드를 소개하려고요 아무튼 우리가 종종 언급하고 있는 '자급'의 범위를 찾아가는 중. ---------------- 1996년 7월 방글라데시에서 온 배우이자 사회활동가인 패리다 액터 Farida Akhter는 독일 뮌헨 여성학 여름학교에서 개최한“여성의 힘을 전 세계로Women Power Worldwide”국제회의에 모인 여성들에게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1995년 4월, 북경 유엔 세계여성대회가 개최되기 몇 달 전에 당시 미국의 영부인인 힐러리 클린턴이 방글라데시를 방문했다. 그녀는 익히 들어왔던 대로, 방글라데시 그라민 은행Grameen Bank프로젝트 성공신화의 현장을 몸소 목격하게 되었다. 그라민 은행의 소액대출사업은 방글라데시 여성들의 상황을 눈에 띄게 향상시켜왔다고 전해졌다. 힐러리 클린턴은 여성들이 정말 이 소액대출로 힘을 얻게 됐는지 알고 싶었다. 그라민 은행과 개발 지원 기관들에 따르면‘여성이 힘을 얻는다는 것’은 여성 자신이 소득을 가지고 있고 어느 정도의 자산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힐러리 클린턴은 방글라데시 농촌마을인 마이샤하티를 방문하여 그 곳 여성들의 상황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여성들은 대답하기를,“ 네, 우리는 지금 우리 자신의 수입이 있어요. 소, 닭, 오리 같은‘자산’도 가지고 있답니다.”그리고 그들은 아이들이 학교에도 다닌다고 말했다. 클린턴 부인도 만족스러워했다. 마이샤하티의 여성은 분명 힘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 다음 그들이 힐러리에게 똑같은 질문을 했을 때, 힐러리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패리다 액터는 마이샤하티의 여성들과 힐러리 사이에 오고 간 질문과 대답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아파(자매님), 당신은 암소가 있나요?” “아니오, 나는 암소가 없어요.” “아파, 당신은 자신의 소득이 있나요?” “네, 전에는 제 소득이 있었어요. 하지만 남편이 대통령이 되어 백악관으로 이사 오고 난 후에 나는 일을 그만뒀어요.” “당신은 아이가 몇 명 있나요?” “딸 한 명이요.” “아이를 더 낳고 싶은가요?” “네, 나는 한두 명 정도 더 낳고 싶지만, 우리 딸 챌시와도 지금 충분히 행복하답니다.” 마이샤하티의 여성들은 자기들끼리 서로 바라보면서 작게 중얼거렸다. “불쌍한 힐러리! 그녀는 소도 없고, 자신의 소득도 없고, 딸도 하나밖에 없다네.”마이샤하티 여성들의 눈에 비친 힐러리 클린턴은 결코 힘이 있는 여성이 아니었다. 그들은 그녀를 불쌍하게 여겼다. 독자들은 우리가 자급 관점subsistence perspective에 대한 책의 첫 장을 왜 이 이야기로 시작하는지 궁금해 할 것이다. 계에서 가장 강하고 부자나라인 미국의 영부인이 대체 암소를 키우며 사는 방글라데시 여성들의 자급 이야기와 무슨 관계가 있을까? 소와 닭, 아이들이 있기 때문에 힘이 있다고 느끼는 마이샤하티 마을의 여성들과 그녀는 무슨 관계가 있을까? 이‘가난한’여성들은 왜 힐러리 클린턴을 불쌍하게 여길까? 힐러리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모두 가진 사람이 아닌가? 이 여성들이 단지 순진하거나 무지한 것일까?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클린턴 부인이‘부자’나라에서 왔고, 그녀가 많은 돈을 갖고 있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힘이 있는 상태라고 보지 않는다. 이 에피소드는 힐러리 클린턴과 마이샤하티 마을 여성들 사이의 관점 차이를 아주 집약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여성들의 대화내용을 보면, 마이샤하티의 여성들은 미국의 영부인과는 다른 관점으로 세계를 바라본다. 그들의 관점은‘아래로부터의 관점’, 즉 필요에서부터 세계를 보는 관점이다. 이 관점이 바로 자급 관점이다. 이 관점으로 세상을 보면, 모든 사물과 관계는 전혀 다르게 보이기 시작한다. 특히 좋은 삶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개념에서 차이가 난다. 클린턴 부인이나 선진국의 대다수 여성들은‘좋은 삶’이란 더 많은 돈과 상품, 사치품을 요구한다고 보며, 소위 말하는‘좋은 삶’을 북반구의 부자 나라와 부자 계급에서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그외의 다른 모든 사람들은 가난하다고 여긴다. 아마도 클린턴 부인에게 마이샤하티 여성들과의 만남은 일종의 문화충격이었을 것이다. 그녀는 마을 여성들이 자신에게 작은 사업을 위해 돈을 요청할 것을, 그리고 세계에서 가장 부자 나라에서 온 가장 강한 남자의 아내인 자신을 부러워할 거라고 기대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여성들은 힐러리처럼‘위로부터의’관점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대화에서 보듯이 그들은 부와 빈곤에 대해 전혀 다른 개념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수입품으로 가득 찬 슈퍼마켓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우리가 갖고 있는 빈곤과 부와 좋은 삶에 대한 개념은 얼마나 어리석은가. 어쩌면 클린턴 부인은 처음으로 자신의 삶에서 무엇인가 결핍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지도 모른다. 자신이 사는 나라가 축적한 온갖 부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근본적으로 어떤 것을 잃고 있다. 그것은 마이샤하티 여성들이 아직까지 분명하게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자부심, 위엄, 자기 확신, 자신의 힘으로 살아가는 능력일 수 있다.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부르던 간에, 이 능력은 자급 관점, 즉 스스로 삶을 생산하고 재생시키며, 자기 힘으로 서고 자신의 목소리로 말할 수 있는 데에서 나온다. 이 책에서 우리 역시 자급 관점을 채택했다. 우리는 힐러리 클린턴처럼 부유한 나라에서 살고 있긴 하지만, 이러한 부의 모델을 더 이상 받아들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모델은 나머지 세계로까지 일반화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좋은 삶’을 추구할 때 그 뒤에 남겨지게 되는 여러 가지 파괴들, 자연에 대한 파괴, 이민족에 대한 파괴, 자립과 위엄의 파괴, 아이들 미래의 파괴, 인간성의 파괴 때문에 더더욱 이러한 부의 모델을 받아들일 수 없다. 상품, 서비스, 재화의 끊임없는 성장을 목적으로 하는‘위로부터의’관점으로는 이 체제가 만들어내는 막다른 골목으로부터 결코 벗어날 수 없다. 따라서 지배 패러다임에 근본적인 균열을 내고 새로운 관점과 전망을 모색해야 한다. 마이샤하티 여성들, 그리고 다른 많은 여성들의 이야기는 자급 관점의 윤곽을 그리는 데 좋은 스승이 되어 줄 것이다. 힐러리 클린턴과 나눈 대화는 비단 그들뿐만 아니라 세계 곳곳의 모든 사람에게 ‘좋은 삶’을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지를 분명히 보여준다. 중요한 사실은 독립적인 자급을 지키는 일이다. 방글라데시 여성들에게서 우리가 얻은 다섯 가지 중요한 교훈은 다음과 같다. 첫 번째, 아래로부터의 관점이다. 이 관점은 우리가 현실을 볼 때, 그리고 어디를 가고 무엇을 할지에 관한 명확한 지침을 얻고자 할 때, 여성의 관점, 특히 남반구 농촌 여성과 가난한 도시 여성들의 관점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나아가 우리는 여성들이 삶을 유지하는 전략인 일상생활의 정치에서 출발해야 한다. 이 아래로부터의 관점은‘맨 꼭대기’에 있는 사람들이 창조한 삶과 삶의 방식이 최상의 것일 뿐만 아니라 지구상의 모든 사람을 위한 미래상이라는 환상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해준다. 이러한 탈신비화를 통해서 우리는 이제까지 이른바 좋은 삶이 특정한 소수에게만 가능했다는 사실, 나아가 자연, 타인, 여성, 아이들과 같은 타자의 희생 위에 가능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두 번째, 방글라데시 여성들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교훈은, 자급 관점이 단지 돈과 교육, 지위, 특권이 아니라 한 마리의 암소, 몇 마리의 닭, 아이들, 땅, 약간의 독립적인 현금수입과 같은 실질적인 생계수단을 확보함으로써 현실화된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외부의 힘이나 기관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의 삶을 살아가는 공동체의 역량이 필요하다. 세 번째, 마이샤하티 여성들은 독립적으로 살 수 있는 능력에 대한 의식을 가짐으로써 미국의 영부인을‘자매’라고 부를 수 있는 자신감과 위엄, 용기, 평등 의식을 얻게 된다. 이들은 남에게 구걸하는 비굴한 거지가 아니라, 스스로 두 발로 설 수 있는 사람들이다. 우리가 배운 네 번째 교훈은, 이 여성들이 프리드리히 엥겔스의《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의 마지막에 나오는 다음 문장을 믿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지배계급에게 좋은 것이 그 지배계급이 속한 사회전체에 좋은 것이 되어야 한다”(Engels, 1976, p. 333). 오히려 마이샤하티 여성들의 질문은 정반대의 사실, 즉 “방글라데시 마을 여성에게 좋은 것이 전체 사회에 좋은 것이 되어야 한다”고 제안한다. 이것은 구체적으로 사회주의적이고 성차별적이지 않고 비식민주의적이고 생태적인 유토피아이다. 좋은 사회는 모든 사람이 빌라와 고급 승용차를 소유해야 한다고 믿는 지배계급의 생활양식을 모델로 삼을 수 없다. 유토피아는 모든 사람의 자립적인 삶을 재생, 유지하는 데에 기초를 두어야 한다. 그동안 현존하는 사회주의 국가들에서 엥겔스의 유토피아를 현실화하기 위해 이루어졌던 역사적인 기획들이 결국 붕괴로 끝났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다섯 번째, 이 책에서 우리는 세계를 ‘제1세계’와 ‘제3세계’로 나누는 정신분열증을 버리고자 한다. 방글라데시 여성들도 물론 이 구분이 존재하는 것을 알고 있다. 그들은 자신과 미국 영부인 사이의 간극을 알고 있다. 그러나 이 여성들은 이러한 구분과 그에 따른 차별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들에게 힐러리 클린턴은 무엇보다도 ‘자매’이자 같은 여성이며, 기본적으로 자신과 같은 욕망을 가진 여성이다. 말하자면 ‘암소’와 같은 자급적인 삶의 수단과 남편으로부터 독립된 자기 소득과 아이들이 있는 여성이다. 그들은 이러한 삶에 대한 지향이 자신뿐 아니라 힐러리 클린턴에게도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우리는 방글라데시 마을 여성들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 스스로 자급을 하는 삶의 관점이 소위 개발도상국이나 낮은 계급 사람들에게만 좋은 것은 아니다. 선진국과 지배계급 사람들도 계급-이원론적이며 위계적 구분 위에 짜여 진 경제 체제를 더 이상 용납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면, 이것은 새로운 관점이 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주장은 ‘경제’에 대한 일반적인 통념에 도전한다. ‘ 경제’를 끊임없는 상품의 생산과 소비, 자본축적, 산업의 확장에 목표를 둔 체제로 정의한다면, 그러한‘경제’는 자급 관점과는 양립할 수 없다. 독일 베를린 장벽 붕괴 이래로 현재의 이 체제가 경제를 살리는데 유일한 생존 모델로 장려되어왔다. 우리는 종종“대안은 없다(There Is No Alternative: TINA)”고 이야기한다. 이런 ‘대안부재’ 신드롬에 감염되는 대신, 이 책에서는 다른‘경제’개념이 존재하며 그것이 여성과 타자, 그리고 자연에 대한 지속적인 식민화를 근간으로 하는 자본주의 가부장제 경제체제보다 더 오래되고 더 새로운 경제체제라는 사실을 보여주려고 한다. 이 ‘다른’ 경제는 우리의 사회 경제 활동의 중심을 죽은 돈을 끝없이 축적하는 데 두지 않고, 그 대신에 삶을 생산하고 유지하는 데 필요한 모든 것에 중심을 둔다. ‘살림’ 혹은 ‘자급’이란 개념은 흔히 빈곤이나 낙후된 삶과 연결된다. 그러나 이 책에서‘자급’은 단지 생존의 가장자리에서 고된 노동으로 살아가는삶을의미하지않는다.‘ 자급’은 삶의 즐거움과 행복, 그리고 풍요로움과 연결된다. ‘자급’을 이렇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람들, 특히 여성들이 자신의 일과 문화, 힘을 과소평가하지 않고, 나보다 ‘높은 곳’에 있는 사람들이 우리에게 좋은 삶을 내려줄 것이라는 기대를 버려야 한다. 이러한 과소평가는 그동안 우리에게 강요되었던 식민성과 천박성의 결과이다. 이는 여성만이 아니라 식민화된 모든 사람의 마음 속에 내면화되어 있다. 이 과소평가로 인해 우리는 ‘따라잡기 식 개발’과 ‘따라잡기 식 소비주의’라는 또 다른 환상을 가지고 살고 있다. 이 환상은 사회의 피라미드 구조에서 아래층에 있는 사람들이 언젠가는 맨 위쪽의 수준에 도달할 것이라는 약속에 의해 유지된다. 이 책에서 우리는 비단 마이샤하티 여성들만이 아니라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이런‘따라잡기 식’ 경제 모델을 거부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줄 것이다. 맨 마지막 장에 나오는 이야기(9장의 나야크리쉬 안돌론 이야기)는 방글라데시 농민들도 이 개발 모델을 거부하고 있다는 내용이다. 이들에게 따라잡기 식 모델은 더 이상 바람직한 목표가 아니다. 전 지구적으로 팽창하고 있는 가부장제 자본주의 경제에 대항하는 아래로부터의 관점은 혹자들이 두려워하는 것처럼 우리를 절망으로 이끌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우리가 좋은 삶을 원할 때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이며, 이를 위해서 필요한 힘의 원천을 어디에서 찾아야 할지 성찰하도록 도와준다. 패리다 액터는‘가난한' 여성들을 위한 ‘임파워먼트’담론이 중요한 핵심을 놓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마이샤하티 여성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방글라데시와 남반구의 다른 국가에 있는 농촌 여성들은 백악관이나 다른 부유한 국가로부터 어떤 도움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들은 강한 여성들이며, 이들이 정말 필요로 하는 것은 오히려 자신을 억압하는 여러 세력들이 떨어져 나가는 것이다. 여기에는 자기 나라의 가부장적인 남성, 다국적 기업, 세계은행과 IMF의 구조조 정 프로그램, 그리고 이러한 국제자본의 보호질서를 따르는 국가기구들이 포함된다. 진정한 힘이란 우리 자신의 내부에서 그리고 우리 주위에서 일어나는 자연과의 협력에서 발견된다. 이 힘은 돈이라는 죽은 물질에서 나오지 않는다. 그것은 상호성에 있지 경쟁에 있지 않다. 스스로 행동하는 것에 있지 수동적인 소비생활에 있지 않다. 함께 일하는 즐거움과 관대함에 있지 개인주의적인 이해관계나 시기심에 있지 않다. 이 힘은 지구상의 모든 생물체가 우리와 관계되어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데에 있다. 이 책에서 우리는 독자들에게 현재 지배 경제 체제가 어떤 불변하는 자연법칙의 산물이 아니라, 수세기 전에 인간(남성)이 만든 체제이며, 따라서 변화가능한 체제라는 사실을 상기시키려 한다. ‘ 대안부재’ 신드롬을 앓고 있는 사람들의 생각처럼, 대안이 결코 없는 게 아니다. 우리는 “자급야말로 대안(Subsistence Is The Alternative: SITA)”이라고 믿는다. 특히 오늘날 지구화되는 경제 현상이 완전히 새롭고 특이한 현상이 아니라, 애초부터 자본주의 가부장제의 일부였던‘원시축적’과 식민화의 불가피한 연장이라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오늘날 지속적인 식민화와 그에 따른 결과는 소위 선진국의 산업 국가에서도 감지되고 있다. 제1세계가 제3세계로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선진국에서 증가하는 빈부 격차에서 뿐만 아니라 현재 산업화된 사회를 강타하 고 있는 재정, 경제 위기에서도 나타난다. 북반구 사람들은 급작스럽게 자신들이 방글라데시 마을 여성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아야만 했다. 여전히 물리적인 격차가 큰 것은 사실이나, 구조적으로 북반구의 가난한 사람과 남반구의 가난한 사람의 상황은 더 이상 다르지 않다. 이러한 통찰에 직면하면, 대부분은 거부반응을 보이거나 공포를 느낀다. 경제학자와 정치가는 궁극적으로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은 없다고 항상 주장해왔다. 선진국과 부자들뿐 아니라 후진국과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도, 궁극적으로는 따라잡기 식 개발이 ‘지속가능한’ 부를 성취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라는 것이다. 이제까지 사람들은 이러한 개발이 하나의 신화일 뿐이며, 한 쪽의 부와 진보가 다른 쪽의 빈곤과 퇴보와 관계되며, 이 둘 사이의 격차가 점점 더 커져 간다는 사실을 한 번도 깨닫지 못했다. 그러나 최근의 위기 상황에서 사람들은 지배적인 경제 체제의 안정에 대한 확신이 너무 지나치게 과장되었음을 인식하게 되었다. 소수에게 돌아가는 부의 축적이 보다 더 많은 사람들, 심지어는 선진국 사람들의 빈곤과 실업 증가를 수반하고 있다는 사실을 더 이상 간과할 수 없게 되었다. 러시아를 비롯한 아시아의 경제 위기를 통해 사람들은 돈과 자본이 더 이상 안정된 삶을 바라는 데 있어서 든든한 기반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최근 태국처럼, 이 기반은 하루아침에 무너져 심지어 은행가까지도 일시에 거지로 만들 수 있다. 이 상황에서 세계 대도시에 사는 다수의 사람들, 자신의 일생을 현금소득에만 의존하는 사람들은 엄청난 위기를 맞게 된다. 그들에게 경제 붕괴는 세상의 끝이자 물질적 안정의 종말을 의미하는 것이다. 마이샤하티의 여성들과 달리, 이들에게는 먹고살기 위해 의지할 수 있는 암소 한 마리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방글라데시 마을 여성들의 관점으로 세계를 본다면, 이러한 종말론적 절망의 분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다. 사실상 방글라데시 마을 여성들의 관점은 세상을 살아가는 대다수 사람들의 관점을 대표한다. 이들의 관점에서 보자면 종말론적인 절망은 선진국의 소수 응석받이들의 사치에 불과하다. 이 절망감으로 인해 그들은 지금의 상황을 사실로 받아들이고 그에 따라 행동하지 못한다. 이들의 특권이 타자에 대한 약탈에 근거하고 있으며, 모두를 위한 좋은 삶은 이러한 특권이 필요치 않다는 사실도 이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자급 관점에 대한 가치관을 공유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밖이나 위에서 작동하는 외부 기관에 의해 커다란 사회변화가 일어날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는다. 이들은 자신의 힘을 알고 있고, 개인으로서 그리고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행동한다. 이 책에서 우리는 자급 관점으로 세계를 바라보고 이 새로운 가치관이 이미 세계 각 지역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시작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한다. 이 관점은 생태적이고, 경제적이고, 페미니즘적이고, 반反식민주의적인 시각에서부터 나오며, 여기에서 모든 기본적인 사회관계들의 변화, 즉 남성과 여성 사이의 관계, 세대 간 관계, 도시와 농촌의 관계, 계급 사이의 관계, 민족들 간의 관계, 인간과 자연 사이의 관계에 변화가 일어날 것이다. 모든 경제, 사회 활동의 주요 관심사가 죽은 돈을 축적하는 데 있지 않고 지구상의 생명을 창조하고 유지하는 데 있었다면 지금과 같은 상태는 계속되지 않았을 것이다. 자급 관점은 단지 추상적인 이론이 아니다. 우리는‘진짜 삶’에 대한 자급 이야기로 이 책의 각 장을 시작할 것이다. 이 이야기들은 자급 관점이 이미 다양한 형태로 존재하고 있으며, 이러한 삶의 방식이 바람직하고 필요하며 또 가능한 것임을 보여준다. 이 내용은 단순히 통계와 이론적 정교함을 넘어서 개념적 깊이와 풍부함을 제시하고 있다. 이 관점으로 세상을 볼 준비가 된 사람들은 아주 오래되었거나 혹은 아주 새로운 자급 이야기들을 많이 발견해나갈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자급 관점은 단지 하나의 경제 모델이 아니라 하나의 관점, 세계관의 전환이기 때문이다. "힐러리에게 암소를: 자급관점" 중에서 서문 옮김 저자: 마리아 미즈/베로니카 벤홀트-톰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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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8.14 19:28:45
마리아 미즈의 "자급의 관점" http://blog.jinbo.net/manic/128 2005/11/03 17:48 마리아 미즈의 자급의 관점 O. Ressler의 비디오에서 발췌한 번역문 2005년 독일의 Cologne에서 녹화 저는 마리아 미즈라고 하고, 은퇴한 사회학 교수입니다. 파흐호흐 학교의 여기 사회교육대에서 1972년에부터 연구를 시작했었죠. 저는 또 여러 가지 사회운동에 참여했습니다. 여성운동에서부터 시작해서 생태운동, 평화운동, 1997년 이후에는 반세계화 운동에 적극 가담하고 있죠. 먼저 우리가 얘기하려고 하는 것이 자급 경제에 대한 구체적 묘사가 아니라는 것을 미리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우리”란 저와 저의 두 친구인 클라우디아 폰 베르호프와 베로니카 벤홀트 톰슨을 말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 두 사람과 함께 1970년대에 이 이론을 함께 발전시켜 왔죠. 우리가 얘기하고자 하는 것은 “자급 경제”가 아니라 “자급 관점(perspective)”입니다. 즉, 구체적인 경제 모델이 아니라 새로운 지향성, 경제를 보는 새로운 접근법이죠. 그 두 가지는 완전히 다릅니다. 자급 관점은 단지 경제에 적용되는 것뿐만이 아니라 사회, 문화, 역사, 그리고 다른 모든 분야에도 다 적용이 되는 것이지요. 이밖에도 많은 사람들이 물어보는 질문이 있는데, 도대체 ‘자급’가 무슨 의미냐는 거예요. 저는 이렇게 대답하곤 합니다. 자급란 바로 상품생산의 정반대에 서 있는 것이라고요. 상품생산은 자본주의 생산의 목표입니다. 모든 생산되는 물건들은 상품화를 거쳐야 하죠. 이는 오늘날 ‘세계화’의 과정 속에서 더욱 뚜렷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자급 생산은 이것과는 완전히 다른 목표를 향해 있습니다. 즉, 인간의 욕구를 직접적으로 충족시키는 것이죠. 이것은 돈과 상품의 생산을 통해서는 결코 실현될 수 없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 스스로 직접 삶을 생산, 재생산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상품의 생산”이 아닌 “삶의 생산”을 이야기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 자급의 관점을 발견하게 된 계기는 여성의 가사노동문제를 다루게 되면서 부터입니다. 그때 전 세계적인 토론이 하나 진행되고 있었는데 각지의 페미니스트들이 참가했었죠. 주제는 “자본주의에서의 가사노동의 의미”였습니다. 즉, 가사노동은 왜 노동으로 인정되지 않는가, 왜 임금이 지불되지 않는가, 왜 부불노동인가? 라는 문제였죠. 우리는 자본주의 하에서 가사노동은 지불될 수 없다 인식에 도달하게 되었습니다. 만약 가사노동의 대가가 지불 된다면 자본주의의 축적모델은 붕괴하고 말테니까요. 더 이상 자본주의가 존재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게 아니라, 엄청난 비용 상승이 필연적으로 따라오게 된다는 거죠. 모든 가사 노동에 임금을 지불한다고 생각해보세요. 출산, 육아, 남성을 위한 재생산 노동, 각종 보살핌 노동 등. 만약 이런 것들이 정규직만큼 임금을 보장받는다면 궁극적으로 자본주의 모델이 완전히 바뀌어야 할 겁니다. 그런 과정 속에서 우리는 자급의 개념에 도달하게 되었습니다. 이 개념은 우리가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원래 있던 개념인데, “삶의 생산” 이라고 불리는 이 자급 노동은 모든 지불노동의 선결조건으로서 필수적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주장했어요. “자급 노동이 없으면 모든 지불노동은 존재불가능하다. 하지만 지불노동이 없어도 자급 노동은 여전히 존재한다.” 라고요. 음식, 집 등 살림에 관련된 노동들은 온갖 형태의 “삶”뿐만 아니라 노동 전체를 뒷받침하는 필수전제조건입니다. 이 일들은 매우 가치 있지만 결코 금전적으로 보상받지 못하죠. 꼭 가사노동만이 비용으로 환산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전 세계 곳곳에 존재하는 자급농들도 이와 비슷한 노동을 통해 생계를 이끌어 가고 있습니다. 비록 그들도 시장에 물건을 내다팔지만 임금노동자는 아닙니다. 눈여겨 봐야할 것은 그들의 노동도 여성과 마찬가지로 국민 총생산(GNP)이나 국내 총생산(GDP)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뉴질랜드 여성인 마릴린 워링이 “만약 여성이 계산된다면(If Women Counted)”이란 책에서 쓴 표현처럼 그들은 계산되지 않고 있는 겁니다. 만약 여성이 계산된다면 어떨까요? 매우 흥미로운 책입니다. 그리고 나서 세 번째로 우리가 발견한 것은 자급농 또한 가사노동과 관련이 있고, 나아가 둘 다 식민지의 노동과 연관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은 우리 셋이 모두 제3세계에 체류하면서 가지게 되었죠. 저는 수 년 동안 인도에 있었고, 제 두 친구는 남미에 있었어요.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세계의 모든 나라들이 오랜 기간 동안 식민지로 착취 받지 못했다면 자본주의는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요. 그리고 만약 오늘날 “식민지”(저는 아직도 이들을 식민지라고 부릅니다)가 평등한 대우를 받는다면 축적될 자본이 없어질 겁니다. 우리는 이런 관계를 식민지적 관계라고 부릅니다. 남녀 관계도 식민지적이고, 자급농과 기업의 관계 또한 식민지적입니다. 거대도시와 시골의 관계 역시 식민지적 관계지요. 무엇보다 제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자급 관점과 자급 사회와 경제는 저절로 사라진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의도적인 정책들을 통해 파괴되었다는 것입니다. 자급 사회는 2차 세계대전 전에 시골과 도시를 가릴 것 없이 세계 전역에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여기 독일에서는 소농들이 전체 농산물의 대부분을 생산해서 사람들에게 공급했었죠. 또 놀랍게도 도시에도, 심지어 미국에서조차 광범위한 자급 생산물이 존재했었습니다. 어느 미국 페미니스트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1960년대까지 주요 산업도시의 동네마다 상당량의 자급 활동이 지속되고 있었다고 해요. 우선 이웃 간의 상호부조가 존재했습니다. 상호부조의 원리, 호혜의 원칙이 작동하고 있었어요. 이웃끼리 서로 도와가며 작은 텃밭에서 채소나 과일을 가꾸거나, 시장에서 싸게 사다 집집마다 저장해두었죠. 바느질이나 작은 규모의 수선 등도 이런 식으로 진행되었습니다. 가난한 노동 계급에게 이런 상호부조가 없었다면 도시에서 살아나기가 어려웠을 겁니다. 그런데 미국 정부가 위에서부터 완전히 새로운 경제 모델을 이식하기 시작했어요. 그것이 바로 포디즘입니다. 첫째 기업 노동자들의 임금이 높아졌고, 그 임금으로 살 수 있는 것들과 직접 만들어내는 것을 비교해 봤을 때 그 차이가 어마어마해졌죠. 그래서 사람들은 점점 스스로 만드는 일을 그만두게 되었습니다. 또 농가들은 빚더미에 허덕이게 되고 더 이상 생활을 유지할 수 없어 “농사짓고는 더 이상 못살겠다. 떠나야겠어.” 하며 농촌을 등졌어요. 오늘날까지 똑같은 정책이 이어지고 있죠. 뿐만 아니라 산업을 촉진한다는 명목으로 농업 전체를 단일경작, 대량생산, 화학 비료와 농약, 거대 농기계 체제로 바꾸려는 압력이 가해졌습니다. 이 모든 것이 석유에 기반하고 있습니다. 농부들은 이제 우유, 버터, 고기, 계란 등을 대량생산하는 역할을 맡게 되었고 이제는 여기저기에 거대한 기업농이 들어서 있습니다. 그들은 정부 보조금을 받아 잉여 농산물을 생산하고, 이 생산물들은 잘 알려진 대로 제3세계에 덤핑 판매됩니다. 반면 제3세계의 농민들에겐 이러한 기회는 전혀 주어져 있지 않죠. 더구나 똑같은 농업 정책이 “녹색혁명”이라는 이름으로 제3세계에도 이식되어 있습니다. 소농들은 기업농과 경쟁 상대도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엄청난 빚더미를 짊어진 채 땅을 잃거나 팔아버릴 수 밖에 없었어요. 그들은 농촌을 떠나 도시의 슬럼가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슬럼가에서도 그들은 자급 생산에 종사할 수밖에 없었죠. 우리가 자급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바로 이 지점입니다. 여기 이 Bielefeld 회의의 초점도 바로 제3세계에서의 자급 생산에 관한 것입니다. 많은 분들이 아프리카 등 여러 나라들의 슬럼가 사람들이 어떠한 생활을 하고 있는지를 조사하고 관찰하였습니다. 이들은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하지만 붙여먹을 땅을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그들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해야 해요. 일용직, 절도 등등. 닥치는 대로 일을 하거나 하인, 식모 일들도 서슴지 않습니다. 아무도 그들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그들을 보호해줄 어떠한 사회 안전망도 존재하지 않죠. 자급 생산이 농촌에서는 산업개발 정책에 대항하는 저항으로서 요구되었지만, 도시에서는 그 자체가 생존의 정치학이 된 것입니다. 지금 아주 적절하게 제게 질문을 해 주셨는데요, 그렇게 박탈당한 삶이 어떻게 더 나은 사회에 대한 비전을 제공해줄 수 있냐는 것이죠? 좀 터무니없는 말로 들렸을 법도 합니다. 하지만 그 사람들의 생존방식과 생활을 면밀히 관찰하면서 우리는 방금 전에 얘기했던 그 오래된 원칙들이 그들 속에서 되살아나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그들은 서로 상호부조하며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합니다. 비록 아주 낮은 수준이긴 하지만 스스로의 삶을 생산하는 주체성과 권리를 회복한다는 측면에서 볼 때 보다 새롭고 긍정적인 관점임에 분명합니다. 우리가 스스로의 삶을 공동으로 생산하고 조직할 수 있다는 것은 매우 가치 있는 발견이죠. 물론 현금이 필요합니다. 그걸 부정할 생각은 없어요. 하지만 오직 돈을 위해 일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라는 겁니다. 돈을 버는 것은 삶의 한 부분일 뿐이지요. 자급 생산 또는 자급 지향은 돈으로 사는 상품보다 훨씬 더 포괄적으로 우리의 욕구를 해결해줍니다. 사실 상품 속에는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아요. 오직 물질화된 죽은 노동뿐이지요. 그들은 사용되면 버려집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새로운 상품을 구입하면서도 영원히 욕구를 만족시키지 못합니다. 이것은 가전제품의 기술혁신과 함께 갑니다. 흑백 TV만으로는 부족해서 컬러TV를 장만합니다. 그리고 나면 컴퓨터와 휴대폰이 필요해지지요. 이제는 아이들도 휴대폰을 가지고 다니는 세상이 되었어요. 말하자면 끝이 없죠, 그렇다면 지금 행복하고 만족스런 사회에서 살고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미국에서 좋은 삶(good life)을 추구하는 운동이 일어나고 있다는 얘길 들었습니다. 그것은 오래된 경제 개념인데, 일찍이 아리스토텔레스가 경제활동의 목표로 설정한 바 있었죠. 경제활동의 목표는 좋은 삶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런데 미국인들은 어떻게 된 일인지 일하고 또 일해도 좋은 삶은 찾아오지 않는다고 말해요. 그렇다면 좋은 삶은 어디에 있는 걸까요? 바로 그것이 자급의 목표입니다. 자급은 우리가 계속해서 세뇌되었듯이 빈곤이나 비참한 삶이 아닙니다. 개인적인 자급이 아니라 (그런 것은 가능하지도 않습니다.) 제대로 된 자급이라면 생존뿐만 아니라 보다 좋은 삶을 위해 다른 사람들과 협동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때 비로소 좋은 삶이 실현가능해지죠. 우리 스스로가 권리의 주체이고, 남과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자주적인 존재라는 것을 다들 인정하시겠죠? 이건 8시간 노동을 하고 돈을 받는 것과는 완전히 종류가 다른 만족감을 줍니다. 마치 65살이 되면 좋은 삶이 올 것 같이 생각들을 하는데 현실에서는 전혀 그렇지 않지요. 많은 이들이 행복하지 못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아무리 많은 돈도 소외된 노동을 보상할 수 없어요. 반면 자급 관점에서 보면 좋은 삶은 충분히 가능합니다. 몇몇 사례들을 여러분들께 말씀드리지요. 방글라데시에 있는 제 친구들에 대한 얘깁니다. 그들은 농촌에 침투해 들어온 다국적 기업에 대항하는 행동을 시작했습니다. 그들이 들어오고 나서부터 토양은 황폐화되고 물은 비소로 오염되었으며 수확량은 점점 떨어지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던 거죠. 단일경작을 하게 되면 생산량이 엄청나게 증가한다는 것이 녹색 혁명의 약속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었죠. 먼저 여자들이 “나야크리쉬 안달론”이라는 새로운 농민 운동을 전개했습니다. 여자들은 녹색혁명과 함께 남자들이 자신들을 때리기 시작했다는 것을 깨달았죠. 예전에 여자들이 종자 관리를 맡아 할 때에는 찾아볼 수 없었던 폭력이었어요. 그 전에는 종자가 여자들 손에서 관리되었고 농부들은 이들로부터 언제 씨를 뿌려야 좋을지 조언을 듣곤 했었어요. 상황을 인식하게 된 여자들은 단결해서 세상을 바꾸기로 했죠. 운동은 전적으로 여자들의 주도로 전개되어 나갔어요. 운동의 제 1 목표는 충만하고 행복한 삶을 되찾는 것이었죠. “우리는 행복한 삶을 원한다!”는 거죠. 실제로 이 운동에 참가하고 있는 농민들은 하나같이 오직 행복한 삶을 원한다고 얘기해요. 여성들이 내놓은 첫 번째 주장은 절대 다국적 기업을 허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마을을 무독성 마을로 선언하고 어떤 다국적 기업도 독성물질을 가지고 들어올 수 없다고 못을 박았죠. 아, 깜빡 잊을 뻔했는데, 많은 여성들이 삶을 비관해서 농약을 마시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경우가 많이 있었죠. 오늘날 똑같은 원리들이 다시 작동하고 있는 겁니다. 사실은 예전부터 있어왔지만 다시 새롭게 부활된 이 원리들로 인해, 산업국가의 자본 투입에 의존하지 않는 풍요롭고 생산적인 농업이 가능해진 것이죠. 그 외에도 우리는 많은 것을 재발견해냈습니다. 가령 다양성을 들 수 있죠. 그들은 단일경작을 지양하고 직접 만든 퇴비를 썼습니다. 또 서로 도우며, 더 이상 종자회사에서 종자를 구입하지 않았어요. 거의 대부분의 마을에 씨앗 창고가 있는데 이것도 여성들의 관리 하에 놓이게 되고, 여성들이 씨앗을 저장하고 보관하는 역할을 도맡아 하면서 다시 주권을 되찾게 되었어요. 이들은 전 세계 소농 연대 기구인 비아캄파시나가 주장하는 ‘영양주권’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모든 자급은 이 영양주권과 함께 시작된다고 봅니다. 이런 운동이 방글라데시에서 아주 크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제가 얘기한 것은 일례에 불과하지요. 여기 독일에서도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자급 관점의 예가 많이 있죠. 좀 잘 알려진 예를 들자면 “니더카우훙겐”이나 “롱고 마이”와 같은 공동체를 들 수 있는데, 이들 공동체는 벌써 오래전부터 자급 라이프스타일을 견지하며 살고 있습니다. 또 가장 제 흥미를 끄는 것 중의 하나가 국제 공동 텃밭운동입니다. 이 텃밭들은 괴팅겐의 난민 여성들에 의해서 만들어졌습니다. 여성들로부터 괴팅겐에 텃밭을 만들게 된 계기를 들어보았는데요. 난민의 생활이 너무 불행하고 늘 자선에 의지해서 살아가는 것에 신물이 나 있던 중, 한 사회사업가가 가장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어보았대요. 그들은 텃밭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대답했어요. 곧 이들은 한 복음교회로부터 조그만 땅을 얻어서 함께 경작하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땅을 분할해서 각자에게 배당하는 대신 여러 나라에서 온 이주 여성과 남성들이(남성들은 나중에 참여하게 되었다고 해요) 함께 경작하는 공동 텃밭으로 운영을 하게 된 거죠. 그러는 동안 독일 여러 도시에서 벌써 7개의 국제 공동 텃밭이 생기게 되었어요. 퀠른에도 몇 개가 생겼죠. 오늘날 전체를 볼 수 있는 시각이 매우 중요합니다. 마을이나 도시 어딘가에 작은 자급 섬을 세우고 거기에 만족할 수는 없어요. 세계화된 경제체제에서라면 우리도 전지국적인 시각을 견지해야만 하죠. 그것이 현실입니다. 오늘날의 개인주의적 이기주의(모든 경제활동의 중심에 개인의 이익과 효용을 두는 것)를 극복하고 그 대신 새로운 원리들, 가령, 상호부조, 호혜, 공동체의 연대감, 협동, 공유 등의 원리가 들어선다면 문제는 달라질 겁니다. 또 오늘날처럼 소비와 생산을 분리시키지 않는다면 문제는 달라질 거예요. 물론 쉽지 않다는 것을 압니다. 지금의 삶이 비록 행복하지 않다고 느끼더라도 당장 우리가 가지고 있는 소비 모델을 벗어던지는 것은 정말 힘들지요. 또 한가지, 만약 우리가 자급을 지향한다면 다른 종류의 기술이 필요해질 겁니다. 현재의 기술은 늘 소모적이고 쉽게 낡아버립니다. 기술 개발에 드는 스트레스 비용 또한 만만치 않죠. 또 현대기술은 결코 체제 중립적이지 못하고 지나치게 자본주의에 편향되어 있어요. 물론 가부장적인 것은 두말할 것도 없고요. 우리는 기술에 대한 다른 사고방식이 필요합니다. 더 많은 상품을 시장에 내놓기 위해서가 아니라 좀 더 손쉽게 일을 하려면 어떤 기술이 필요한가, 하고 물어야 합니다. 공업사회와 획일화된 산업문화가 가장 생산적인 시스템이라는 믿음이 사람들 사이에 만연해 있습니다. 이런 생각은 농업뿐 아니라 다른 모든 형태의 획일적인 문화에 두루 팽배해 있어요. 즉, 이런 종류의 일이 가장 생산적다, 저런 방식의 일이 가장 생산적이다, 자급 생산은 완전 비생산적이다 등등의 신화 말입니다. 그래서 자급 생산은 국민 총 생산 속에도 포함되지 않죠. 오직 화폐가치로 환산되는 것만이 생산적인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런 생각은 이미 잘 알려진 생산성 개념에도 부적합할 뿐만 아니라 너무 편협하기 때문에 노동과 자급의 생산력을 제대로 포착하지 못합니다. 동물, 식물, 인간 등 다양한 생물 간의 공생, 한 장소에서 서로 도우며 좋은 삶을 일구어가는 것. 이러한 삶은 아무리 많은 상품문화를 한 자리에 모아놓는다고 한다고 해도 결코 얻어지는 것이 아닐 겁니다. 영문번역 - 리사 로젠블랫 한글번역 - 매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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