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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을 위한 시민문화 워크숍글 수 603
기형도의 시집 [잎 속의 검은 잎]을 보다가 맨 끝, 문학평론가 김현이 쓴 시평중에 한 단락을
옮겨 적었어요. 죽은 시인의 육체를 살리기 위해 '그의 시들을 접근이 쉬운 곳에 모아놓고, 그래서 그것을 읽고 그를 기억하게' 하고 싶다는 얘기에 해남여행 준비팀은 어떤 마음으로 시인이 나고 죽은 곳으로 가는지 궁금하기도 하여.. 영원히 닫힌 빈방의 체험 -한 젊은 시인을 위한 진혼가 김 현 -살아 있으라, 누구든 살아 있으라. 어느 날 저녁, 지친 눈으로 들여다본 석간신문의 한 귀퉁이에서, 거짓말처럼, 아니 환각처럼 읽은 짧은 일단 기사는, [제망매가]의 슬픈 어조와는 다른 냉랭한 어조로, 한 시인의 죽음을 알게 해주었다. 이럴 수가 있나, 아니, 이건 거짓이거나 환각이라는게 내 첫 반응이었다. 나는 그 시인과 개인적인 관계를 맺은 적이 없다. 우리의 관계는 언제나 공적이었지만, 나는 공적으로 만나는 사람좋은 그의 내부에 공격적인 허무감, 허무적 공격성이 숨겨져 있음을 그의 시를 통해 예감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가 갑자기 죽었다. 죽음은 늙음이나 아픔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육체가 반드시 겪게 되는 한 현상이다. 한 현상이라기보다는, 실존의 범주이다. 죽음은 그가 앗아간 사람의 육체에 대한 기억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들의 눈에서 그의 육체를 제거하여, 그것을 다시는 못 보게 하는 행위이다. 그의 육체는 그의 육체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머릿속에 환영처럼, 그림자처럼 존재한다. 실제로 없다는 점에서, 그의 육체는 부재이지만, 머릿속에 살아 있다는 의미에서, 그의 육체는 현존이다. 말장난 같지만, 죽은 사람의 육체는 부재하는 현존이며 현존하는 부재이다. 그러나 그의 육체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다 사라져 없어져버릴 때, 죽은 사람은 다시 죽는다. 그의 사진을 보거나, 그의 초상을 보고서도, 그가 누구인지를 기억해내는 사람이 하나도 없게 될 때, 무서워라, 그때에 그는 정말로 없음의 세계로 들어간다. 그 없음의 세계에서 그는 결코 다시 살아날 수 없다. 그 완전한 사라짐이 사실은 세계를 지탱한 힘일는지도 모른다. 그것이 무서워서, 그것이 겁나서, 사람들은 그를 영구히 기억해줄 방도를 찾는다. 제일 쉬운 방도는, 그를 기념하여, 제사를 지내줄 사람을 만들어 놓는 것일 것이다.....그러나 기형도에게는 아이들이 없다. 그는 혼자 죽었다. 그의 육체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살아 있을 때, 그가 완전한 사라짐 속에 잠기는 것을 막아야 한다. 어쩌면, 그를 완전히 사라지게 하는 것이 더 바람직할지도 모른다. 완전히 사라지면, 모든 역사적 소추에서 자유스러울 것이고, 그는 우연 속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그가 남긴 모든 글들을, 카프카가 바란 것처럼, 다 태워 없애야 한다. 그의 글뿐만 아니라, 그 글들이 실린 모든 지면을 없애야 한다. 그것은 바랄 수는 있으나, 이룰 수는 없는 꿈이다. 그렇다면, 차라리 그를 살리는 것이 낫다. 그의 시들을 접근이 쉬운 곳에 모아놓고, 그래서 그것을 읽고 그를 기억하게 한다면, 그의 육체는 사라졌어도, 그는 죽지 않을 수 있다. 그의 시가 충격하는 사람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는 리 되살아나, 그의 육체를 모르는 사람들에게도 그의 육체를 상상할 수 있게 해줄 것이다. 나는 그의 시들을 모아, 그의 시들의 방향으로 불을 지핀다. 향이 타는 냄새가 난다. 죽은 자를 진혼하는 향내 속에서 새로운 그의 육체가 나타난다. 나는 샤면이다.....아니다, 나는 그에 대해 좋은 추억을 갖고 있는, 갖고 있으려 하는 한 사람의 문학비평가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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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설헌에게는 동생이 있었고
기형도에게는 김현?
고정희에게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