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정희 시인
고정희는 해남에서 태어난 한국의 여성 시인이다. 1991년 산행도중 실족사하여 생을 마감한 이 시인은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아있다. 그는 여러가지 사회에 기여하며, 서정적인 시 뿐만 아닌 '현실적인' 시를 많이 남겼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그를 '치열한 사회 활동가이자 시인'이라고 기억하고 있다. 기독교 신문사, 크리스챤 아카데미 출판간사, 가정법률상담소 출판부장, 광주 YMCA 간사 등의 일을 해오며 그는 광주민주화운동, 기독교정신 등의 사회적 이야기들을 시에 담았다. 그를 설명할 때 빠지지 않는 가장 큰 키워드는 '여성'인데, 여성으로써 살고, 시를 쓰고, 무언가를 하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여성신문> 초대 편집주간과 여성문화운동 동인 <또 하나의 문화>에서 활동함으로서 보여주었다. 남녀평등을 지향하던 이 시인은 조신하기만 해야하는 역사적으로 뿌리박힌 여성상의 이미지를 깨뜨리고 여성 중심의 문화를 사회에 알리고자 <여성신문>에 끊임없이 글을 쓰고, 여성에게는 모순된 제도와 비합리적인 현실을 시를 통해 비판을 하며 '행동문학'의 한 모형을 보여주기도 했다. 이렇게 치열하게 현실에 대응하는 방식을 보여준 고정희는 <또 하나의 문화>에서 여성 동료작업자들을 만나 활발하면서도 애틋한 관계를 이뤘으며, 그의 이러한 모습들은 다음 세대의 소녀들에게 여성 롤모델로 다가왔다. 고정희의 실족사 후에 더욱 더 그의 여성해방정신을 퍼뜨리고, 다음 세대의 소녀들에게 그를 롤모델로 심어주고자 <또 하나의 문화>는 1년에 한번씩 <고정희 청소년 문학상>를 만들었다. 이 행사를 참가하는 청소년들은 고정희의 생가과 무덤을 방문하며 그의 흔적과 '여성' 관련 담소를 나누기 위해 해남에서 캠프를 진행한다. 이렇게 고정희를 추모하기 위해 생전에 그를 알고 지낸 사람 뿐만 아니라 그를 몰랐던 사람들도 그를 기억하며 아직까지도 그의 생가에는 방문자가 끊이지 않는다.

김남주 시인
김남주는 사회변혁운동을 통해 혁명적 목소리로 한국을 단합시킨 '민족시인'으로 알려졌으며, '시인'보다도 '전사'라는 호칭이 많이 따를 정도로 그는 사회문화운동에 헌신을 다했다. 그는 1946년 해남에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일반학교를 다녔으나, 입시 위주의 교육에 반대하며 자퇴를 하고 검정고시를 치렀다. 이후 그는 전남대 영문과에 입학하였다. 대학 1학년때부터 그는 3선개헌 반대 운동과 교련 반대 운동을 주도했으며 반독재 민주화 투쟁에 앞장섰다. 전국 최초의 반유신 투쟁 지하신문 <함성>과 <고발>을 제작하고 배포함으로 그는 8개월의 옥고를 치르게 되었다. 그가 석방된 이후로도, 그는 계속해서 사회문화운동을 진행시켰으며 그는 체포와 석방을 두 세 차례 반복하며 10년정도의 세월을 감옥에서 보냈다. 그는 생전 470여편의 시를 남겼는데, 그 중 300여편의 시는 옥중에서 쓴 것이다. 1994년, 그는 옥중투쟁에서 얻은 지병(췌장암)으로 투병하다가 마흔 아홉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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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에는 김나주 시인과 그의 아내에 관한 정보

80년대 이후 한국민족문학을 대표하는 저항시인(抵抗詩人) 김남주는 해남군 삼산면 봉학리에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70년대 유신독재에 맞서고 80년대를 옥중에서 보내면서 도 <나의 칼 나의 피> <조국은 하나> 등의 옥중시집을 발표해 현실비판의 문학지평을 열어왔다. 투옥생활을 끝낸 88년에는 민족문학작가회의 상임이사, 한국민족 예술인 총연합 이사 등을 맡아 죽는날까지 민족문화 운동에 힘을 쏟았다. 10여년간의 영어생활로 얻은 지병 때문에 출소후에도 고생을 해온 시인은 타계하기 3개월전 췌장암 이라는 불치의 병을 선고받고 94년 2월 13일 망월동 5.18 묘역에 안착했다.

"나는 나의 시가 호사가의 장식품이 되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는 그의 시처럼 김남주의 시는 그가 함께 해야할 민중들의 삶속에서 등대처럼 반짝이는 현실타계의 힘이었다.

타오르는 불길

그녀는 서울에서 태어나 숙명여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중학교 국어 교사로 제직하던 중 남민전에 가담했다. 조직활동 중 김남주 시인을 만났고 시인과 함께 구속되었다가 집행유예로 석방 된 뒤, 10년을 옥바라지하면서 연서와 면회를 통해 사랑을 나누었다. 시인에게 편지와 책과 영치금을 보내준 삶도 그녀였다.

하지만 지금 그녀 곁에는 10살난 토일이(노동자는 1주일에 사흘을 쉬어야 된다는 뜻으로 이름을 '김토일'로 지었다)밖에 없다. 그래서인지, 마흔이 되어서 낳은 아들 토일이 는 그녀의 전부나 다름없는 존재가 되었다.

<그리움은 동화나라에 있는 잭의 콩나무만큼 자라 아빠가 있는 하늘에 너를 실어다주곤 했지만, 그러나 너는 번번이 그리운 얼굴을 만나지 못한 채 콩나무 아래로 굴러떨 어져 마음을 다친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지>(「빈 들에 나무를 심다」중 '내 고향은 해남')

토일이는 간혹 아빠의 죽음을 인정하지 않는 것 같다.동화 속 '잭'처럼 콩나무를 타고 하늘나라에 가서 그리운 아빠를 만나고 싶으리라. 그것은 아마도 김남주 시인을 추억하 는 우리 모두의 마음일 것이다.

김남주는 80년대 이후 한국민족문학을 대표하는 저항시인(抵抗詩人)이다고 할 수 있는데 그래서 그에게는 시인이자 전사라는 명칭이 따라다니기도 한다.

김남주시인은 1973년 제4공화국이 유신을 발표하자 이에 정면으로 대응하는 내용의 지하신문 '함성' '고발'을 발간하여 10개월간의 처절한 감옥생활을 경험하는데 시인은 이 를 '잿더미'라는 시로 '창작과 비평'에 내어 데뷔한다. 이후 10개월이라는 투옥생활의 상처가 가시기도 전에 79년 남민전사건으로 투옥돼 88년 12월 형집행 정지로 석방될 때 까지 고뇌와 투쟁으로 일관된 삶을 살아 왔다.

그는 70년대 격변의 시기에 전남대 영문과에 입학하여 3선개헌 반대, 교련반대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불의한 시대인 70년대에 유신독재체제와 맞서 그는 행동으로 뿐만 아니라 칼날 같은 시를 쏟아냈으며 민주주의로 향하던 80년대를 옥중에서 보내면서도 '나의 칼 나의 피', '조국은 하나'등의 옥중시집을 발표해 현실비판의 문학지평을 열었 다. 그의 짧은 삶과 문학속에는 70, 80년대 우리 정치.사회사의 굴곡과 음영이 그대로 새겨져 있어 민족문학의 큰 별로 낮고 어둡게 살아가는 민중들의 앞을 밝혀 주었다.

김남주시인은 48년의 세월동안 반외세 반독재 투쟁의 절규를 시와 삶으로 맞서왔다. 그는 투옥 생활을 끝낸 88년에는 민족문학작가회의 상임이사, 한국민족예술인 총연합 이 사 등을 맡아 죽는날까지 민족문화운동에 힘을 쏟았다.

시대와의 불화

시인보다 때로는 민주화의 전사로 더 많이 불려온 김남주. 80년대 민주화 투쟁에서 그의 시만큼 강한 무기는 없었다. 누구보다도 시 가 무기가 되기를 원했던 사람이 바로 그였다. 그래서 그의 시는 가장 선동적인 격문(檄文)이었고 가장 투쟁적인 구호였다.

남민전 사건으로 15년 형을 받고 '푸른옷의 수인'이 되면서 그의 시와 삶은 더욱 뜨겁게 세상을 불지핀다. 감옥이라는 숨막히는 공간이, 80년대적 억압과 그에 맞선 싸움을 가장 잘 상징하는 곳이었기 때문일까. 투옥기간 중 그가 쓴 시들은 그 어느 시인의 시보다도 투쟁적이었다. 집필의 자유가 허락되지 않은 감옥에서 시인은 읽던 책의 여백이 나 우유곽을 해체해서 생긴 은박지에 못으로 꼭꼭 눌러 시를 썼다.

'시는 혁명을 이데올로기적으로 준비하는 문학적 수단'이어야 하며, '시인은 싸우는 사람, 전사이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문학관이었다. <민족해방과 민주주의 투쟁에 시 인 자신이 몸소 뛰어들어야 합니다. …투쟁과 운동에 깊이 참가하면 할수록… 그가 쓰는 시와 그가 부르는 노래는 그만큼 폭이 넓어질 것이고 깊이가 있을 것입니다>(김남 주 연서〈편지〉중 '시인은 싸우는 사람')에 그것은 잘 나타나있고, 그가 쓴 시에서도 그의 문학관은 그대로 드러난다.

<나는 문득 생각한다 /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 / 그것이 무엇일까 하고 // 별 하나 외로이 / 서산 마루 위에서 빛나고 / 바람이 와서 / 내 귓가에 속삭인다 / 싸우는 일이라고 / 푸르고 푸른 조국의 하늘 아래서 / 조국과 인민의 이름으로 / 싸우다가 죽는 일이라고 > (시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

그것은 80년대가 또는 그 사회가 그만큼 절박했고 싸움이 필요한 시대였다는 증거이리라. 시인은 노동자, 농민, 도시빈민들이 겪고 있는 삶이 비참함과 비인간성을 결코 도외 시할 수 없었다. 시인의 순정함으로 독재정권에 치열하게 대항한 것이었다.

한국 현대시사에서 김남주(1945∼94)의 시들은 선명한 메시지와 강렬한 어조로 하여 두드러진다.

김남주가 외세에 대한 거부와 부자들을 향한 증오, 독재권력을 상대로 한 싸움을 노래한 유일한 시인은 아니었지만, 그 거부와 증오와 싸움을 노래 바깥의 현실로 옮기려 했 다는 점에서 그는 다른 많은 시인들과 구분된다. 그는 시인인 동시에 전사였으며, 그것은 결코 비유적인 의미에 머무는 것이 아니었다.

박정희가 암살되기 보름여 전 내무부는 '남조선민족해방전선'(남민전) 사건을 발표했다. 김남주는 중심인물인 이재문 등 20여명과 함께 그 때 이미 체포된 상태였다.

김남주의 대부분의 시는 남민전 사건과 관련해 15년 징역형을 선고받고 복역중이던 감방에서 쓰러졌다. "시는 혁명을 이데올로기적으로 준비하는 문학적 수단" 이라고 규정한 그에게 선동의 효과가 미학적 고려에 우선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김남주는 하이네, 네루다, 마야코프스키 등 외국 시인들의 영향을 진하게 받았다고 밝힌 바 있지만, 한편으로는 '노래'에서 보듯 '새야 새야 파랑새야'에서 김지하에 이르는 참여적 서정시의 전통 위에 굳건히 서 있다. 제국주의/신식민주의, 독재/자유, 자본/민중의 명료한 이분법에 입각한 그의 세계관은 상황의 핵심을 꿰뚫는 촌철살인의 절창을 낳았다. 그의 대부분의 시들은 비정상적인 환경에서 비상한 수단과 방법으로써 쓰여졌다. 집필의 자유가 허락되지 않는 대한민국의 감옥에서 시인은 머릿속에 시를 써두었다 가 면회온 친지들에게 불러주거나, 읽던 책의 여백이나 답배갑을 해체해서 생긴 은박지에 못으로 눌러서 시를 썼다.

시인이 남긴 것

전투적인 것만이 그의 시의 전부는 아니었다. 최근에 소설가 황석영씨가 엮은 시집 「옛 마을을 지나며」에는 전사 김남주에 가려진 서정시인으로서의 면모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 누구보다도 조국과 민족을 사랑했던 사람으로서 어쩌면 그것은 당연한 귀걸이었는지 모른다. 그의 시심은 <찬서리 / 나무 끝을 나는 까치를 위해 / 홍시 하나 남겨둘 줄 아는 / 조선의 마음이여.(시 '옛마을을 지나며')라고 읊은 그의 마음에서 발원한 것이었다. 그의 이데올로기적 유토피아가 계급 해방, 민족해방 의 세상이었다면, 그의 본성이 희귀하고자 한 곳은 <고추를 따고 있는 어머니의 밭>, <숫돌에 낫을 갈아 벼를 베고 있는 아버지의 논>, <염소에게 뿔싸움을 시키고 있는 아이들의 방죽가>(시 '이 가을에 나는')였다.

그리고 그의 성정성은 그가 죽기 직전에 쓴 시에서 절정에 이른다. <아빠 아빠 우리는 고추로 쉬하는데 여자들은 엉뎅이로 하지? // 이제 갓 네 살 먹은 아이가 하는 말을 어이 없이 듣고 나서 / … 저만큼 고추밭에서 / 아낙 셋이 하얗게 엉덩이를 까놓고 천연스럽게 뒤를 보고 있었다. // … / 산마루에 걸린 초승달이 입이 귀밑까지 째지도록 웃고 있었다>( 시 '추석무렵' 부분)을 보면 그의 서정적 본성은 화연해진다.

그는 민족시인, 혁명시인이었고 또한 서정시인이었다.

김남주는 1984년에 70년대 후반 5년간 발표한 스물넷 편의 시들을 모은 첫시집 <진혼가>가 출간되면서 시인으로서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의 초기시는, 주로 유신치하에서 인간의 존엄성이 파괴되고 마지막 양심까지 지킬 수 없는 상황에 대한 저항하는 고뇌하는 양심적 지식으로서 소외된 농촌 현실과 피폐한 농민들의 생활 정서를 그의 농촌체험을 바탕으로 노래했다.

김남주는 '우리 시문학사상 그 누구와도 비교될 수 없는 첨예한 의식과 혁명적 순결한 정신을 열정적으로 단호하게 때로는 냉정하게 단순화시켜 노래한' 옥중시가 1987년 6월 항쟁 이후 비로소 <나의 칼 나의 피>에 실리게 되고, 1988년 <조국은 하나다>가 출간되면서 <노동의 새벽>의 박노해와 더불어 대표적인 80년대 민중시인으 로 부상하게 되었다.

그후 1989년 출감 후에 시선집 <사랑의 무기>와 <솔직히 말하자>가 나왔으며, 1991년 <사상의 거처>와 시선집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산문집 <시와 혁명>이 출간 되었고, 1992년 <이 좋은 세상에>와 옥중 시선집 <저 창살에 했살이1.2>가 나왔다. 그리고 1995년 유고 시집 <나와 함께 모든 노래 가 사라진다면>이 시인의 마지막 작품집이 되었다.

김남주는 출옥의 시를 투쟁의 무기로만 파악하던 이전과는 달리, 시가 생활에 근거하는 것임을 새롭게 인식하고 인간적이고 생활적인 시를 많이 남겼다. 그 자신도 「사상의 거처」 후기에서 "생활이 있어야겠다. 생활의 중요한 구성인자인 노동과 투쟁이 있어야겠다. 노동과 투쟁이야말로 콸콸 흐르던 시의 샘이 아니던가!"라고 말하고 있다.

[사랑은] '사과 하나 둘로 쪼개 나눠가질 줄 안다'고 노래했듯이, 그는 고향과 민족과 사람을 사랑하는 사랑의 시인이었다. 그리고 그가 <개똥벌레 하나>에서 "개똥벌 레야 나는 네가 이슬로 환생했다고 / 노래하는 시인으로 살련다 / 먼 훗날 하늘나라에 가서" 라고 노래했듯이, 그는 영원히 우리 곁에 시인으로 남을 것이다.

이제 시인 김남주는 이 지상을 떠났지만 억압과 부조리와 불평등이 남아 있는 한 대지를 비추는 아름다운 별이 되어 우리들 가슴속에 영원히 빛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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