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남은 한반도의 최남단 땅끝에 자리잡은 전남 최대의 군으로 동쪽에 강진군, 서쪽에 진도군, 남쪽에 완도군, 북쪽에 영암군, 북서쪽으로 목포시가 접해 있다.

해남은 옛날부터 영산강유역의 문화요소들이 파급되거나 형성 되는 배경으로, 혹은 반도의 중심세력이 전파되는 길목으로서, 더욱 크게는 중국-한반도-일본을 연결한 문화이동로 이었다.

태백산맥의 남쪽에 위치한 구릉지대( 해발 고도 200~600미터의 완만한 기복을 이루고 있는 지형. 평지와 산지의 중간적 성격을 지닌다. ≒언덕땅. )를 형성하여 해양성 기후(oceanic climate)로 따뜻하기 때문에, 농업과 어업이 융성한 지역이다.

화원반도를 중심으로 리아스식(해안선의 굴곡이 심하고 나팔 또는 나뭇가지 모양의 만을 이루는 해안. 침식된 산지가 지각 운동이나 해수면의 변화로 말미암아 침수되어 생겼을 것으로 추정된다. 우리나라 남·서해안과 미국 동북부의 체서피크 만이 대표적이다. )의 긴 해안선이 있다.

해남 면적 : 907.24㎢ (2009.3)전남에서 땅 면적이 가장 크다. 이중 325.56㎢(35.9%)가 농경지.
서울 면적 : 605.27㎢(2008.12)
홍콩 면적 : 1,100㎢

인구 : 81,651 (2008.12. 전남 22개의 시, 군 중 6번째로 인구가 많다.)
서울인구 : 10,456000명(2008.12)
홍콩인구 : 7,054,867 (2006)

해남의 시인
고산 윤선도, 김남주, 황지우, 김준태, 고정희 해남의 아기(?) 김시림

특산물
땅끝햇살(쌀) | 해남김 | 해남황토고구마 | 겨울배추

흥미로운 사실. (우항리 공룡 화석지와도 이어질 수 있겠다.)

한반도의 남부는 중생대 백악기 북서태평양 일원에서 있었던 격렬한 화산-심성활동의 지역 중 하나이며 해남이 여기에 속해있다.

백악기 당시 해남은 화산활동이 격렬했다.

한반도의 남부는 중생대 백악기 북서태평양 일원에 있었던 격렬한 화산-심성활동의 지역 중 하나였다.

백악기 당시 해남일대는 경상남북도와 남해안 일대와 마찬가지로 화산활동이 격렬했던 곳으로 퇴적층에서 보이는 화산재 성분은 그때 뿜어져 나온 화산재가 물을 따라 떠내려왔거나 호수위로 비오듯 떨어졌다는 증거이다. 화산재로 만들어진 퇴적층이 쌓인 시기는 8천5백만년전~6천7백만년전 사이의 적어도 1천만년의 기간 동안이다.

중생대 해남의 환경을 재현해 본다면 멀리서 화산 연기 등이 솟아오르는 큰 호수가 있고 그 호숫가로 조각류의 공룡들이 무성한 식물 사이에서 먹이를 찾아 거닐고 있으며 여기저기에 일부 새들과 익룡이 모여 있고 작게는 작은 절지류들이 기어다니며 다른 무리의 익룡과 새들이 하늘 위로 날아다니는 모습을 그릴 수 있을 것이다.

 

불과 2000년전까지만해도 현재의 해남의 해안선의 모양과는 그 생김새가 달랐다. 송지면 군곡리에서 발견된 패총은 바로 그곳까지 바다가 들어왔다는 이야기가 된다. 지금은 논 한가운데 있지만 말이다. 군곡리 패총은 경작지를 개간하는 과정에서 발견되었는데 경작지 한가운데서 패총이 형성된 것은 해안선의 변화때문이다. 2천년전 해남 앞바다는 지금보다 수심이 높아 군곡리까지 바닷물이 들어왔던 것이다.

대흥사

  두륜산을 대둔산(大芚山)이라 부르기도 했기 때문에 원래 사찰명은 대둔사(大芚寺)였으나, 근대 초기에 대흥사로 명칭을 바꾸었다. 일찍이 서산대사가 “전쟁을 비롯한 삼재가 미치지 못할 곳(三災不入之處)으로 만년동안 훼손되지 않는 땅(萬年不毁之地)”이라 하여 그의 의발(衣鉢)을 이곳에 보관한 도량이다

창건설

426년(백제 구이신왕7)의 신라 정관존자(淨觀尊者) 창건설이다. 신라의 정관 스님이 426년 대흥사 산내 암자의 하나인 만일암을 창건, 이후 508년(무녕왕8)에 이름을 알 수 없는 선행(善行) 비구가 중건하였다고하나 안타깝게도 이 자료에서 창건주로 소개한 정관존자는 생애나 활동 내용이 전혀 알려져 있지 않은 인물이다.

  『죽미기』는544년(신라 진흥왕5) 아도화상(阿度和尙)의창건설을 전하며, 자장(慈藏)스님과 도선(道詵)스님이 계속해서 중건하였다는 기록도 함께 실려 있다. 현재 사찰 내에서는 대체로 아도화상의 창건설을 따르고 있다.

  따라서 현재로써는 대흥사의 정확한 창건 시점을 밝히기가 매우 어려운 상태라고 하겠다. 하지만 지금 응진전(應眞殿) 앞에 세워져 있는 삼층석탑의 제작 연대가 통일신라 말기 경으로 추정되고 있는 상태이므로 대흥사는 늦어도 통일신라 말기 이전에 창건된 고찰로 보아야 한다. 또한 정관존자나 아도화상 같은 분들이 창건주로 인식되고 있었다는 점은 그 사실 여부와 관계없이 대흥사의 전통을 이해하는 데 있어 반드시 중시되어야 할 내용이다.

  - 무엇을 더 조사하면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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