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20대]⑨ 고정희-가슴속 불길을 간직한 시쓰는 노동자

1948-1991 평등과 해방을 향한 목마른 기다림

편집국 기자

나누는 밥 나누는 기쁨
이 밥으로 힘을 내고 평등세상 건설하게
이 밥으로 다리삼아 해방세상 이룩하세
('밥을 나누는 노래-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 中)


1991년. 한 시인은 아시아 곳곳에서 자행되고 있는 폭력에, '악령의 시대'에 분노했다. '지배와 권력과 행복의 근본이 영원히 자본의 식민통치에 있'고 '밥은 가난한 백성의 쇠사슬'이며 '죄없는 목숨을 묶는 오랏줄'이지만 평등과 해방을 향한 그의 목마른 기다림은 사라질 줄 몰랐다. 아, 그 기다림이 그의 시를 지탱해주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다가 그는 매년 그랬듯이 문득 배낭 하나 둘러메고 자신의 시의 모태라고 할 수 있는 지리산으로 철쭉맞이가 늦었으랴 조바심하며 훌쩍 가버렸고, 그렇게 뱀사골 계곡물의 '푸른 강물에 섞이어 단숨에' 떠났다. 그리곤 '기나긴 사연의 흰 시트' 한 장만이 어둠에 묻히기 전의 그를 감싸줄 뿐이었다.
그는 시인으로서 12년이라는 길지 않는 시간 속에서 10권의 시집을 냈고, '민족문학작가회의'의 열성적인 회원으로 활동했을 뿐 아니라 여성문제에 뜻을 품고 '또 하나의 문화' 동인으로서의 치열한 활동을 벌여냈으며 '여성신문' 초대주간으로서 그 기틀을 잡는데 혼신을 다했다.

'완료형일 수 없는 시작이다'
대한민국 정부가 아수라장 속에서 수립되던 해인 48년, 전남 해남에서 태어난 고정희(본명 고성애)는 넉넉지 못한 농가 5남 3년 중 장녀였고, 독립적으로 성장했다.

그녀는 수유리의  한국신학대학에 재학중일 때 박남수의 추천을 받아 현대시학에 '연가(戀歌)를 발표, 문단에 데뷔하게 되었는데, 그는 '추천완료감'에서 "완료형일 수 없는 내 출발은 부끄럽다. 10여년도안이나 시를 붙들어온 내가 부끄럽고, 이 정도의 무게밖에 유지할 수 없었던 내 체질이 부끄럽다."며 의지를 밝힌다.
그 시절은 암울하고 숨이 막힐 듯 했다. '캄캄한 어둠이 우리 덮는 밤에는 / 제 십자가 무거워 우는 소리 들리고 / 한 사람의 시인도 이 땅에는 없읍니다'(-‘탄생되는 시인을 위하여’ 中). 첫 시집 <누가 홀로 술틀을 밟고 있는가>의 후기에서 '최소한의 출구와 사랑을 포함'한다던 그의 약속처럼 나날이 확장되는 그녀의 시세계 속에서 끊임없이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시대에 대한 통렬한 풍자와 분노, 그리고 좌절과 허무주의를 승화하려는 의지, 그리고 그 속에서 보여지는 인간에 대한 희망의 메시지이다.

등단 직후 그는 주간신문의 사회부 기자로 일하면서 사회의 불평등한 부조리를 몸소 체득하게 되고, 광주라는 시대의 열병을 앓게 된다. 그는 '다 평안하신지 잠잠한 오월 / 다 무고하신지 적막강산 오월'에, '뿌리 있는 것들만 성난 오월에는 / ... / 바람이 따다 버린 병든 이파리'같은 우리의 말, 믿음, 사랑, 침묵을 찔러대고 '왜 이리 고향이 갈 수 없는 땅인지 / 왜 이리 고향이 신화보다 슬픈지' (‘서울사랑 - 침묵에 대하여’ 中) 애타게 묻는다.
그녀는 또한 '실로 최초로 역사적 진실에 절제하기 어려운 노여움을 품게 된' 5공비리 청문회와 신보수주의로 회귀하는 동시대인에 대해 '오월이라는 기다림을 / 그대 난롯불에 화장하지 말라 / 광주는 그대의 봄, 우리의 봄, / 서울의 봄이다' (우리의 봄, 서울의 봄 2 중)며 절규했다. 그녀는 '압박의 현실이 인간들의 의식을 침몰시키는' 세태 속에서 허물어지는 광주를 보며 참담해했으리라.

조금 먹고 조금 자고 많이 쓰는 노동자
고정희의 나머지 생애를 바치게 된 '또하나의 문화' 창립에 참여하게 된 것은 그가 가정법률상담소 출판부장으로 일하면서 여성문제에 눈뜨기 시작한 84년도이다. 여성주의적 관점에서 사회과학을 하는 몇 명의 사람들이 모여 그 실천적 대안을 찾기 위해 만든 그 모임에 참여하게 된 것은 이전부터 가져온 여성문제에 대한 고민과 시인이라는 한정된 역할을 벗어나려고 하는 자신의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동인들과 함께 일하고 함께 마시고 함께 싸워댔으며 <여성해방의 문학>(동인지 3호)에서 그는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
"한편에서는 여성의 고통을 가볍게 아는 '머슴아'들에게 치이고, 다른 한편에서는 민족의 고통을 가볍게 여기는 '기집아'들에 치이면서 그 틈바구니에서 누구보다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살"(조혜정, 영결식에서의 조사 中)아야했고, 글쓰기게 안주한하는 무감각한 정실부인과 정신없이 바쁜 페미니스트 사이에서 외로워하기도 했던 그녀는 "그래 한번 결혼해보지","아이라도 한번 낳아보지"하는 핀잔에 여성운동 하는 사람들이 왜 그렇게 이해의 폭이 좁은가를 통렬히 비판하고 "바닷물이 짠지 먹어봐야 아는가?"라는 유명한 논쟁을 일으키기도 했다.
그러나 그 틈바구니 속에서도 그녀는 진심으로 여성이 하나되어 그 속에서 동지를 발견하기를 바랬다. '아아 그러나 때때로 / 나는 당신 속에서 동지를 만납니다 / 좌절의 밭고랑에 토악질하는 등두드리는 손끝에서 / 나는 동지의 순정을 만납니다'(‘무엇이 그대와 나를 갈라놓았는가’ 中)

그녀는 글쓰는 노동자였다. 조금 먹고, 조금 자고, 많이 썼으며, 해가 어슴푸레 떠오르고 안개가 살며시 걷히는 새벽이면 꼭 일어나 책상 앞에 정좌를 하고 시를 쓰고 했다. '가장 맑은 상태에서 자신이 견딜 수 있는 최대한 힘을 다해 파지를 내지도 않으면서 글씨를 써내려가는 모습'은 어떤 위엄을 느끼게 했다. 그녀의 언어는 편협하고 삭막한 제도권 교육이 베풀 수 없는 독특한 정서가 베여 있었고, 그녀의 걸죽한 입담에 걸맞는 마당굿시와 같은 뜻깊은 실험을 해냈다. 또한 그녀가 '밥과 자본주의' 연작에서 보여준 자본주의와 제국주의에 대한 그녀의 래디컬한 입장은 현실에 직접 부딪히며, 공부해가며 그녀가 깨우쳐간 결과물이었다.

나의 피를 흩뿌려 어둔 새벽 밝히리
그녀는 술이 취할 즈음 혼신을 다해 ‘너의 침묵에 메마른 나의 입술’을 부르곤 했다. 외로움이라는 정서에 이미 익숙하다고 했지만, 남다른 감수성 탓에 ‘불임’의 고독을 상흔처럼 지녀야했고(화육제별사)고, ‘사십대 들녘에 들어서면 / 땅바닥에 침을 퉤, 뱉아도 / 그것이 외로움이라는 것은 안’(사십대) 그녀는 매우 짧고 강렬하게 침묵 속에 빠져들기도 했다.
또한 그녀는 언제나 간과하기 쉬운 아픈 현실에 대하여 절절하게 인식하고 동인들에게 일깨워주기도 했다. ‘너희가 쫓아 버린 아벨 / 너희가 쫓아 버린 아벨 / 너희가 쫓아 묻고 버린 아벨 / 너희는 모른다 모른다 모른다 시치미 뗀 아벨의 울음 소릴 들었느냐?’ (‘이 시대의 아벨’ 中) 그녀는 우리와 ‘함께 살기 원하던’, ‘함께 몸을 비비던’ 아벨을 살인하고 쫓아낸 것은 바로 우리들이 아니냐고 통렬하게 외친다. ‘그때 한 사내가 / 불탄 수염을 쥐어뜯으며 / 대지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 그리고 이렇게 외쳤습니다 / 우리가 눈물을 흘리는 동안만이라도 / 주는 우리를 용서하소서.’
그녀는 불행한 시대에, 그 한 사내가 되길 염원했는지도 모른다. 불탄 수염을 뒤어뜯는 고통을 무릅쓰고라도, 호세리잘의 시처럼 ‘피를 흩뿌려 어둔 새벽 더욱 밝히’고자 했는지 모른다.
그런 그녀를 삼키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흘러내리는 뱀사골 계곡물이 저주스럽다. 닳아빠져 미끄러운 그녀의 구두가 원망스럽다. 그리고 몸을 가누지 못하게 만든 그녀의 무거운 짐을 덜어주지 못한 우리네 삶이 부끄럽다.

[김지현 기자 / 1995년 11월]

2003년 6월 28일 20시 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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