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 전에는 삶도 죽음도 스스로 책임질 수 있고 선택할 수 있다고 믿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언제, 어느 나라에서, 어떤 환경에 태어나는 것을 내가 결정하지 못했던 것처럼 죽음도 내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을지 선택할 수 없다. 나는 내가 죽기 전에 지금껏 살아왔던 삶을 모두 정리할 수 있는 시간을 갖고 싶지만 죽음은 우발적으로 일어날 수도 있기 때문에 지금 이 유언장을 쓴다.

나에게 죽음은 단지 지금까지의 삶의 끝을 의미한다. 죽음 이후의, ‘삶’이라고는 할 수 없는 어떤 것에 대해 믿지 않는다. 유언장도 내가 죽기 전까지의 삶에 대한 이야기이고 내가 떠난 뒤 삶을 지속할 사람들에게 쓰는 메세지이다.

내가 20년도 채 살지 못하고 죽더라도 이글을 읽는 사람들은, 너무 짧게 경험하다간 인생이라며 나를 불쌍하게 생각하거나, 미련을 갖거나 하지 않길 바란다. 짧고 길고, 행복도 시련도 적게 혹은 여러 번 경험했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것이며, 더군다나 죽은 사람에게는 아무 의미도 없다. 어떤 사람의 인생을 훌륭하다라고 평가 하는 것, 나는 랭보나 카프카가 아니기 때문에 나의 인생의 업적을 보며 이렇게 평가할 사람들도 없을 것이다. 단지 나의 지인들이 당신들과 내가 함께 했던 시간들을 기억해주었으면 한다. 토토는 고마운 사람이었어 라기 보다 나는 ‘이때’ 토토에게 고마웠어라는 기억의 조각을 간직했으면 좋겠다. 그럼 비로소 내가 죽더라도, 나는 그 기억으로 존재할 것이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겠지만, 내가 죽었기 때문에 슬픈 것이 아니라 나의 죽음을 슬퍼하는 사람들을 떠올리며 나 자신도 슬퍼지는 것 같다. 산 사람의 감정까지 내가 어떻게 해달라고 부탁할 순 없다. 나도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이제는 더 이상 나와 같은 세상에 존재 하지 않는 다는 것만으로도 서러웠고 한편으로 더 잘 해드리지 못한 것을 후회하면서 울기도 했다. 존재하던 것이 사라진다는 것은 무서운 일이지만 후회는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끝이 없단 말이다.

언제 죽을지 모른다고 믿는 사람이, 같이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너무 많은 것을 바라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해 쓴다면 조금 다르게 쓸 것 같다. 하지만 막상 죽음을 맞이하는 입장이 된다면 삶에서 이룬 업적이나 부, 미련 같은 것들은 중요하지 않게 될 것 같다. 죽는 사람의 입장을 상상해 보니 약간은 무책임하고 미안한 마음에 산 사람을 걱정하는 글이 된 것 같기도 하다.

- 시한부 인생에 대한 얘기를 해봐도 좋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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