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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지난 4월부터 8월까지의 시즌 2 준비기간부터 시즌 2를 시작했다, -지난 3월, 시즌 1을 마무리하는 마지막 학기를 마치고 시즌 2를 하겠다고 마음먹었을 때는 우리가 학교를 만든다는 사실에 긴장하기보다는 막연한 기대에 잔뜩 들떠있었다. 하자에서 3년여를 있었는데도 전체적인 구조를 의식하지 못한 상태에서 학교가, 우리가 하는 일에 참여했었고, 학교의 큰 틀을 만드는 것은 담임들의 몫이지, 우리는 그 안에서 작은 틀을 만들어가며 안전하게 생활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4월부터 지금까지 학교 만들기 팀으로서, 시즌 2를 새롭게 하는 사람으로 한 학기를 보내면서 그 동안의 생각들은 큰 착각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학교를 만든다는 것은 꽤 오랜 시간을 작업장학교에서 지내면서도 처음 경험하는 낯선 일이었고, 담임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의 역할이었다. 학교를 열고 땡, 하는 것이 아닌 나도 다닐 학교였다. 그 학교에서 어떤 것을 배울지, 뭐가 하고 싶은지를 좀 더 진지하게 고민했어야 했다. 시간이 지나고 시즌 2를 열어야 할 날이 점점 가까워져옴에 따라 처음 그 설렜던 마음은 온데간데없이 남아있는 것은 학교를 열면 들어올 신입생들을 어떤 모습으로 맞이해야할지, 과연 우리가 그들보다 선배로서 같이 학교생활을 잘 할 수 있을지, 이 학교가 어떤 학교가 되어야하는지 끊임없는 걱정뿐이었다. 그리고 지난 9월, 여덟 명의 신입생들과 학교 만들기 팀 일곱 명은 시즌 2를 시작하는 ‘시작파티’를 열었고, 각자의 각오와 포부가 담긴 글을 여러 사람들 앞에서 읽었다. 나는 앞으로 작업장학교에서 이런 마음으로 생활하겠다는 것을 다른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다짐하는 한편 스스로에 대한 약속을 하는 것이기도 했다. 9개월 동안 하나하나 말로 표현 할 수 없는 많은 일이 있었다. 집중해야 하는 것이 분명히 있었기에 생각의 과정도, 감정의 변화도 그 어느 때와는 달랐다. 그 당시에는 하루하루가 힘들고 지치는 날들이었지만 지금 생각하기에는 나 혼자가 아닌 그 시간들을 같이 하는 사람들이 있었기에 그 모든 과정을 겪으며 지금까지 올 수 있었던 게 아닐까. - 시작 파티 때 다른 사람들의 서포터가 되고 싶다고 말했던 것. 2. 프로젝트/여러 일들 평화워크숍, 영상언어, 서밋, 구로코, 북카페 (따비에, 민욱의 작업, 율면) 1) 여러 가지가 있지만 지금 집중하고 싶은 건 영상언어 수업인데 내가 지난 학기에 카메라를 든 사람으로서의 자세와 생각들에 대해 고민했던 것에 이어서 이번 학기 영상팀에 있으면서, 촬영을 하면서, 편집을 하면서, 영상언어 수업을 통해서 어떤 자세였는지, 지난 학기와 달라진 생각이나 고민은 무엇인지. -영상팀에서 보냈던 지난 학기는 팀별로 해야 하는 일들이 많았다. 한 편의 영상이 만들어지기까지 모든 사람들은 각자의 역할이 있었고, 그 역할에 충실해야 하면서도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알아야했다. 팀워크가 굉장히 중요한 작업이었다. (이번 학기에는 여러 행사들과 강의 영상을 주로 찍었다.) 이번 학기에 준과 함께 한 영상언어 프로젝트의 결과적 목표는 각자 Self- Portrait를 만드는 것이었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영화를 만들 때 기본적으로 알아야 하는 Scene이나 Cut, Shot에 대한 개념들을 배웠고, 실제로 영화를 보면서 그런 개념들이 어떤 상황에서 사용되는지도 알았다. 대부분의 작업들이 다 그렇다고 생각하지만 영화 역시 그 시대의 상황을 많이 담고 있고, 장르 또한 다양했다. 우리는 고전영화에서부터 자전적 이야기를 담은 영화까지 시대를 넘나들며 여러 영화들을 봤다. Self- Portrait는 각자 작업을 한다. 팀에서처럼 같이 의논을 하고 역할을 나눠서 만드는 것이 아닌, 혼자서 만들고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야 하는 입장이 된 것이다. 그렇기에 더욱 부담이 되는 한 편, 홀가분하기도 하다. 2) 그리고 서밋 때 여러 나라 사람들을 만나면서, 심포지엄과 세미나를 들으면서 어땠는지(막연한 느낌을 얘기하는 것이 아닌 서밋에서 뭘 배웠는지, 내가 생각하는 것에 어떤 도움이 됐는지). 2-1) 김만리 선생님의 신체표현 워크숍에 이어서 구로코로 활동하면서 내가 어떤 생각들을 하고 있는지. - helper가 아닌 구로코. 장애인들을 배우로 대하는 것. 그들의 움직임을, 상황을 존중하는 것. (공책에 썼던 서밋 워크숍) 3) 평화워크숍. 지금 생각해도 여전히 평화라는 건 쉽지 않고 너무 추상적인데 처음 평화워크숍을 시작하면서 생각했던 것과 마무리 된 지금, 그 동안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없으면 왜 없었는지). 4) 북카페 시즌 1을 마무리하고 2로 넘어오는 그 시간동안 가지고 있었던 하자 안에 북카페를 만드는 것에 대한 이야기. 이 이이기를 하면서는 ‘책임감’에 대한 이야기도 같이 하고 싶다. 내가 그렇게 하고 싶다고 외쳤던 북카페에 대한 책임감. (지난 번 두 번째로 간 율면에서 나은이 얘기한 농촌의 상황이나 콩세알팀의 상황을 내가 잘 이해하지 못 했다고 얘기했는데 3. 그리고 ‘어떤 사람으로, 어떻게 살고 싶은가’ 라는 질문에 집중했던 학기. 학기를 시작하기 전, ‘하자를 졸업 할 때쯤에는 어떤 사람이고 싶은지’를 생각해보라고 하셨던 히옥스의 말을 떠올리면서 지낸 학기이기도 했지만 특히 스무 살을 앞두고 있는 입장에서 더 고민하고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 있다. 그리고 하자에서 보낸 시간이 긴 만큼 내가 하자에 있는 지금은 어떤 사람이고 싶은지, 학기를 마무리 할 때쯤에는 어떤 사람이기를 바라는지 더 생각하게 된 것.
2010.12.19 04:02:01
prologue 지난 3월, 시즌 1을 마무리하고 ‘운동’과 ‘움직임’이라는 키워드가 나에게 계속 공부하고 싶다는 마음을 가지게 했을 때, 마침 시즌 2를 같이 해보는 것이 어떨까? 하는 제안이 들어왔다. 집에 가서 이야기해보겠다고 하고 자리를 빠져나왔지만 맘속으로는 이미 하겠다고 결정한 상태였다. 시즌 2의 시작은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는 상황에서 가지고 있는 막연한 기대와 긴장뿐이었고, 가끔은 강의를 듣고 ‘공익활동’을 하고 있는 우리를 보면서 이게 학교를 만드는 게 맞긴 한가, 싶은 생각까지 들었다. 그러던 중, 연대에서 ‘문화와 경제‘라는 강의를 들었었다. 그 중 “자본주의의 공간과 일반통행로” 라는 주제로 진행되었던 김영옥 선생님의 강의 중 이런 말이 있었다. “다 부수고 다시 만들어 내는 그 것이 얼마나 큰 힘을 발휘하는가.” “무엇을 실제로 일으켜내고 있는가. - 그것을 어떻게 지속시킬 수 있는가.” “모였다가 흩어지는 것이 자연스럽게 되는 것이 아닌, 어떤 조직을 이룰 수 있었으면.” 모두 우리가 하는 말이고 했던 말이다. 다 부수지는 않았지만 기존의 것을 품고 있되 일으킬 수 있는 것을 일으키려고 하고, 창의 서밋의 주제이기도 했던 ‘지속가능’을 이야기 했고 하고 있다. 우리가 지금 지속시키려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너구리의 마음을 잊지 않고, 크리킨디의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우리가 낼 수 있는 최대치의 힘을 모으는 것이 필요하고, 그렇게 하기위해 노력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나는 우리가 우리 안에서 모였다가 흩어지는 것이 자연스럽게 되기를 바랐고, 그 전에 우리 스스로가 지금 내가 있는 이곳을 믿고, 누구에게나 손을 내밀 수 있는 공간이 되었으면 했다. 다른 사람들의 서포터가 되고 싶습니다! 지난 9월, 여덟 명의 신입생들과 학교 만들기 팀 일곱 명은 시즌 2를 시작하는 ‘시작파티’를 열었고, 각자의 각오와 포부가 담긴 글을 여러 사람들 앞에서 읽었다. 나는 앞으로 작업장학교에서 이런 마음으로 생활하겠다, 는 것을 다른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다짐하는 한편 스스로에 대한 약속을 하는 것이기도 했다. 어디 가서도 만나기 쉽지 않은 열다섯 명이 모여 하나의 학교를 만드는 과정을 같이 하겠다고 뛰어든 것이다. 긴장 반, 설렘 반으로 시작한 학교생활은 어느덧 12월을 맞이했다. 내 속도에 대해 유난히 콤플렉스가 있던 나는 이번에야말로 그 속도를 잘 이용하겠다고 마음먹었다. 내가 앞에서 단결력 있게 끌어주는 것은 잘 못하지만 조금 뒤에서 다른 사람들이 어떤 이야기를 하고 뭘 하고 싶어 하는지를 보면서 뒤에서 잘 밀어주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렇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아차, 싶었던 것은 뒤에서 밀어주는 사람이야말로 전체의 분위기를 잘 알고 파악할 수 있어야 했는데 나는 아직 그런 능력이 부족했다. 그렇기에 처음의 그 포부와는 다르게 점점 내가 밀려나는 것 같았다. 매체를 가진 사람으로서 영상언어, 디자인 워크숍을 했던 것. (소제목생각중) 작년부터 영상팀에 있으면서 매체를 든 사람으로서의 입장에 대해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나와 매체를 이어주는 것은 무엇인지, 내가 왜 이 매체에 관심을 갖고 계속해서 가지고 가려고 하는지, 아니면 또 다른 것에 관심을 갖게 되었는지, 질문을 받으면 항상 머뭇거리게 되는 부분이었다. 작업장학교에 있으면서는 그냥요. 좋은데. 괜찮은데. 상관없어요. 같은 말들이 통하지가 않았다. 무엇이 왜 좋았는지 그게 나한테 어떤 생각을 하게 했는지 입 밖으로 표현하는 것이 중요하게 여겨지는 곳이었다. 영상언어의 이해 이번 학기 준과 함께 했던 ‘영상언어의 이해’ 라는 프로젝트는 지난 학기 영상팀에서 했던 프로젝트와는 조금 달랐다. 지난 학기에는 실제로 움직이면서 촬영을 했고 편집과정에서도 끝없는 회의와 각자 맡은 책임이 확실했던 반면에 이번에는 팀으로써 움직이는 것보다는 영화사의 전반적인 흐름이나 실제로 어떤 영상이 만들어지는지를 많이 보았다. 내 생각에 ‘언어’는 무엇이든지 될 수 있는 것 같다. 언젠가부터 많은 사람들이 필요하다고 말했던 ‘나의 언어를 찾고, 그 언어로 표현하는 것’ 과도 연결 지을 수 있는 맥락인 것 같다. 우리가 소리 내서 말하는 방법도 있지만 만약 말을 하지 못 한다고 했을 때는 어떤 것을 사용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내 생각을 전달할 수 있을까? 소리일 수도 있고, 그림일 수도 있고, 행동일 수도 있다. 어떤 것이 나의 언어가 될 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 프로젝트는 말 그대로 ‘영상언어’라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었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영화를 만들 때 기본적으로 알아야 하는 Scene이나 Cut, Shot에 대한 개념들을 배웠고, 실제로 영화를 보면서 그런 개념들이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사용되는지도 알았다. 대부분의 작업들이 다 그렇다고 생각하지만 영화 역시 그 시대의 상황을 많이 담고 있고, 장르 또한 다양했다. 우리는 고전영화에서부터 자전적 이야기를 담은 영화까지 시대를 넘나들며 여러 영화들을 봤다. 비슷한 시대에 만들어진 영화라도 감독이 어떤 사상을 가지고 있는지, 배우가 누군지, 어떤 장소에서 찍었는지, 그 당시에는 어떤 배우들이 영화에 많이 출연했는지, 어떤 효과들이 사용됐는지, 같은 여러 가지 조건에 따라서 영화 내용이 확 달라지는지를 알 수 있었다. 그리고 화면이나 소리같이 영화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을 통해서 어떤 감독은 어떤 감각이 뛰어난지도 알 수 있었다. 이번 학기의 결과적 목표는 각자의 Self- Portrait를 만드는 것이었는데, 보여지는 방식은 ‘영상의 형태’이지만 각자 어떤 과정을 통해 그 주제까지 이르렀는지 사람마다 그 과정도, 표현하고자 하는 것들도 달랐다. 영상을 그저 나는 말도 잘 하는데 이건 그냥 한 번 보여줘 보는 거야, 라고 생각하면 잘못 된 태도이다. 다른 매체들도 그렇지만 영상을, 그림을, 사진을, 음악을 표현 가능한 ‘언어’로써 받아들이는 것이 우리가 작업을 할 때 가장 먼저 생각해야 하는 것 같다. Self- Portrait는 각자 작업을 한다. 내가 계획을 짜고 필요한 장면을 촬영하고, 편집하는 과정에서는 보여주는 사람의 입장이 강하기 때문에 아무래도 관객들의 시선이나 반응을 살펴야 한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팀에서처럼 같이 의논을 하고 역할을 나눠서 만드는 것이 아닌, 혼자서 만들고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야 하는 입장이 된 것이다. 그렇기에 더욱 부담이 되는 한 편, 홀가분하기도 하다. 내용 또한 자유롭고 내가 표현하고 싶은 것을 드러내는 작업이라서 어떻게 보면 관객들에게 불친절한 결과물이 나올 수도 있다. 그렇지만 영상이 가지고 있는 특성이라는 것이 있기에 어떤 부분에서는 말로 하는 것보다 영상으로 보여주는 것이 상대방에게 더 잘 전달이 될 수도 있는 것 같다. 디자인 워크숍 처음 작업장학교에 입학했을 때 디자인팀으로 들어왔었다. 그 때는 디자인에 대해 곰곰이 생각을 했다기보다는 내가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하니까 다른 팀보다 디자인팀에 들어가는 것이 낫겠다 싶어서 결정한 것이었다. 이번 학기 디자인 워크숍을 진행하신 달갱과도 그 동안 여러 번 워크숍을 같이 했었다. 솔직히 말하면 주니어 2학기 정도까지도 디자인을 떠올렸을 때는 뭣도 모르고 그냥 그림을 그리고 뭔가를 꾸미는 정도로만 생각했었다. 그리고 시즌 2를 시작하기 얼마 전부터 우리는 달갱과 디자인 워크숍을 시작했는데 그 때부터 디자인이 무엇이고,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같은 이야기를 나눴던 것 같다. 디자인 수업을 하면서 보게 된 ‘디자인의 디자인’ 이라는 책에는 “무엇인가를 안다는 것은, 그것에 대해 정의하거나 상세히 적을 수 있다는 뜻이 아니다. 때로는 아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대상을 전혀 모르는 것으로 가정하고, 그 실체에 도전해 보는 것이 대상을 조금이라도 더 깊이 인식하게 해 준다.” 라는 말이 있다. 요즘 들어 늘 생각하긴 하지만 그 동안 내가 디자인이라는 것을 너무 쉽게 생각했나 싶은 생각이 든다. 어느 순간 데이북이 부담이 되고 숙제처럼 느끼게 되었고 스스로 그런 사실들을 느끼면서도 한동안은 부정했었다. 데이북으로 쓰는 공책을 바꾸면 되려나, 하면서 바꾼 공책도 세 권이나 되는데 솔직히 말하자면 공책이나 재료의 문제가 아닌 내가 데이북을 데이북으로써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에 문제가 있었다. 내가 내 블로그에 들어가 거의 매일 뭔가를 끄적이는 것처럼 데이북도 할 수 있었을 것 같은데 데이북은 그것과는 전혀 다른 문제라고 생각했다. 데이북의 목적은 그림을 잘 그리는 것도 아니고, 스크랩을 잘 하는 것도 아니고, 한꺼번에 많은 양을 채우는 것도 아니었다. ‘매일매일 꾸준히 한다’는 것이 중요했다. 그렇지만 평소에 내가 하던, 그리고 싶을 때 아무 종이에 그리고, 어떤 의미나 방향 없이 무의식적으로 그리기도 하는데 데이북을 하려고 하면 왠지 마음을 단단히 먹고 시작해야 했다. 그래서 꽤 오래 전부터 가지고 있던 텅 빈 종이를 보면 겁이 나면서 내 머릿속도 같이 비어버리는 이상한 증상이 데이북에서도 여지없이 드러났다. 그러다보니 그 넓은 종이위에 작고 깔끔한 것만이 남게 되었다. 달갱은 늘 내 데이북을 보면서 좀 더 지저분하게 해도 좋다고, 낙서처럼 시작하라고 했지만 쉽지가 않았다. 나는 주로 나 혼자 작업을 하고 그게 편하다고 생각하지만 때에 따라서는 협동 작업을 하는 것도 좋아한다. 그렇지만 협동 작업 자체는 즐겁게 잘 해도 작업을 하면서의 과정은 잘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생각이 시즌2를 준비하면서 만들었던 45보드를 떠올리면서 들었다. 그 때도 보드 자체를 완성해나가는 것을 즐거웠는데 돌이켜보면 만드는 과정에 참여하는 것은 쉽지가 않았다. 그리고 여전히 그림을 그리는 것과 디자인을 하는 것은 별개라는 생각을 하고 있고, 그 두 가지를 어떻게 연결 할 수 있을지가 지금 내가 풀어나가야 할 문제이다. ‘공익 활동’, ‘불편한 진실’ -누구를 위한 진실일까. (소제목생각중) 우리가 하는 ‘공익 활동’은 다른 사람들에게는 자원봉사처럼 보이기도 하고, 솔직히 말하면 왜 하는지 모르겠다고 하고, 그런 활동들을 하는 것이 배움에도 도움이 되냐는 질문들을 많이 받는다. 처음엔 나도 '공익‘이라는 말이 뭘 뜻하는지도 잘 모르면서 괜히 불편함을 느꼈었다. 이런 활동들을 한다고 해서 사람들이 금방 바뀌는 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고, 이 행동들이 우리가 학교를 만드는 것에 도움이 되는 건지, 신입생들이 들어오면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어려운 부분이 많았다. 우리가 지금까지 했거나 하고 있는 것들을 보면 마음을 내는 것이 쉽지 않고, 설사 마음이 있더라도 마음만 가지고는 하기가 어려운 일들이 대부분이다. 앞에 나서서 해야 하는 일들도 많아서 사람들의 시선을 많이 의식하는 나로서는 불편한 점도 많았다. 지난 8월, 우리는 기후변화행동연구소와 함께 여름철 폭염이 독거노인들에게 미치는 영향을 조사하기 위해 돈의동에 있는 쪽방촌에서 2주일동안 조사를 했던 적이 있다. 우리는 하루에 두 번씩 찾아갔는데 늘 술에 취해계신 분들이 많아서 늘 긴장상태를 놓을 수가 없었다. 돈의동 쉼터에 계시는 선생님들은 쪽방촌 분들이 말을 걸어도 무시하고 지나가라고 하셨지만 그러는 것이 쉽지가 않았고, 늘 어떤 문제에 부딪쳤다. 2주일 동안 우리는 동정, 연민의 감정을 느끼는 동시에 분노를 느끼기도 했는데 항상 그 감정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전전긍긍해하고, 이런 감정을 느끼는 것이 당연한 것인지 어리둥절해하고, 내일도 가야 한다는 사실에 불편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이미 살고 계시는 쪽방촌 분들이나 쉼터에 계신 선생님들에 비하면 턱없이 짧은 2주라는 시간이었지만 그 시간이 어서 지나갔으면 하고 바랐다. 어느 날 감정이 극으로 달했을 때는 그렇게 삶을 이어가시는 분들을 만나봤자 지금 당장 그분들에게 도움이 되는 일도 못 하는데 도대체 이런 온도는 왜 재고 있는지 싶으면서 당장이라도 때려치우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이 들었다.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던 사는 게 뭔지, 사람으로서 대우받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머릿속에서 떨칠 수가 없는 문제들이 자꾸 비집고 들어왔다. 4대강 문제 또한 비슷한데, 우리는 민욱의 ‘손의 무게’라는 4대강 관련한 작업에 참여도 했고, 재판에도 가봤으며, 문수스님의 추모제에도 참여했었다. 뜻을 같이 하려는 많은 사람들이 모였고, 4대강 공사가 어떤 영향을 미칠지 그렇게 얘기했지만 공사를 멈출 기미는 없어보였다. 우리가 아무리 4대강 공사를 반대하는 콘서트를 열고 정신 좀 차리라고 말하고, 공사 현장에 드러누워도 정부는 꼼짝도 하지 않았고 도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더 죽어야 공사를 중지할 것인지, 하는 부정적인 생각이 절로 들었다. 나 혼자 잘 살려고 하는 것도 아니고 우리 모두 함께 평화롭게 잘 살아가기 위함인데 도대체 이런 상황에서도 평화가 성립이 되나 싶었다. 지난 학기, 우리가 메솟에 갔다 오지 않았더라면 버마가 처해 있는 상황을 잘 몰랐을 것이고 몰라도 잘 살았을 것이다. 4대강 문제도, 쪽방촌 문제도 뉴스에 나오긴 하지만 내가 큰 관심을 두지 않는 이상 몰라도 모르는대로 잘 살아갔을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사실을 알면 마음 한 구석이 ‘불편해지는 문제’에 관심을 갖고 공부하고, 실천하려고 한다. 작업장학교에 있으면서 많이 느낀 것은 아무리 불편하고 어려운 문제라도 우리 삶과 연결되어 있지 않은 것은 없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움직이려고 하고, 일단 움직이는 것이 필요하다고 하고 정말 움직인다. 나는 항상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 사람들의 반응은 어떻지 늘 걱정해서 결국 움직일 타이밍을 놓치고 후회하고는 하지만 어떤 문제들은 일단 움직이는 것이 정말 필요하다. 히옥스의 말씀처럼 정리되지 않은 말도 일단 말을 하면서 정리되기도 하는 것처럼 어떤 행동들도 일단 움직이다보면 정리가 되기도 하는 것 같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가 하는 일을 보고 대단하다고 하는데 나는 그렇게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내가 만약 그 사람들과 같은 입장이었어도 대단함을 느꼈을 것이다. 그렇지만 남의 문제가 아니고 우리가 사는 세상이 처한 문제이다. 나를 둘러싼 모든 세계가 순식간에 무너질 수도 있는 문제인 것이다. 관심을 갖는 것이 움직이는 것의 시작이지만 그 관심을 계속해서 가지고 가는 것 또한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 생각해본다. 평화워크숍 - 평화? 그냥 평화로운 게 평화 아닌가? ‘평화’라는 말을 언제부터 들었는지는 기억이 잘 안 나지만 꽤 자주 들었던 말이라 그렇게 큰 부담감도 낯섦도 없었다. 그런데 평화워크숍 첫 날, 나는 평화가 그렇게 광범위한 것인지 처음 알았다. 머릿속에서는 분명히 잘 정리되어 있는데 막상 입 밖으로 뱉으려고 하니 그건 평화에 대한 어렴풋한 느낌뿐이었다.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 평화인지도, 내가 평화롭다고 느낀 적은 언제였는지도 하나도 생각이 안 나고 평화는 그저 평화로운 것이지, 도대체 평화롭다는 것 말고 뭐가 더 분명해야 해야 싶었다. 머릿속에 온통 멍해진 채로 끝이 났고, 평화가 뭔지 더 미궁 속으로 빠져드는 듯한 느낌이었다. 매 워크숍 때마다 나온 얘기지만 ‘평화’라는 것은 정확한 답이 있는 것도 아니고 확실한 모양새가 있는 것도 아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다 보니 뜬구름 잡는 것 같은 질문만 생기고 왠지 확실한 것을 찾아야 할 것 같고 어찌해야 할 바를 더 모르게 된 것 같다. 평화워크숍 첫날 적어두었던 메모에는 ‘도대체 뭐가 평화고, 왜 우리는 평화를 바라는 것이고, 그게 우리한테 뭘까?’ 라는 것이 강조되어 있다. 아마 ‘평화’가 무엇인지를 얘기함으로써 내가 가지고 있던 평화로움이 너무 쉽게 무너지는 것에 당황했던 것 같다. 그러다가 ‘나와 우리’라는 평화단체에서 일을 하고 계시는 조진석 선생님을 만나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그날, 선생님은 남과 북의 상황에서부터 정신대 할머니들에 대한 이야기까지 많은 이야기를 해주셨는데, 언제든지 다시 전쟁이 일어날 수 있는 분단국가라는 특이한 상황 속에 살고 있고, 어릴 때부터 평화에 대한 책들을 그렇게 읽었으면서도 나는 그 상황이 평화와 이어질 것이라는 생각을 진지하게 했던 적이 없다. 정신대 할머니들은 지금도 수요일마다 일본 대사관 앞에서 사과를 요구하는 수요 집회를 하고 계시지만 사실상 사과다운 사과를 받은 적은 없다고 하신다. 사실 할머니들의 고통이 얼마나 괴롭고 끔찍했을지는 이야기를 들어서 알 뿐, 짐작조차 가지 않는다. 전쟁을 겪지 않은 세대라서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드는 한편, 어쩌면 이렇게 무심할 수가 있었나 하는 마음도 들었다. 조진석 선생님의 이야기와 지난 번 오셨던 평화박물관에서 일하고 계시는 김영환 선생님의 이야기를 같이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우리나라가 일본의 전쟁피해국가인 것처럼 베트남도 우리나라 군인들에 의해 죽임을 당한 사람들이 많고, 그래서 베트남에는 ‘증오비’라는 것이 세워져 있다고 한다. 우리가 일본에 사과를 바라는 것처럼 베트남 또한 우리나라가 사과하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가 전쟁피해국가인 줄로만 알았는데 우리 또한 다른 누군가의 평화를 망치고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줬다는 사실에 약간 당황스럽기도 했다. 김영환 선생님은 사죄만 한다고 해서 끝날 문제는 아니라고 말씀하시면서 진상규명을 하고, 보상도 해야 하지만 사죄를 누가, 어디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가 제일 중요하다고 하셨다. 그 얘기를 들으면서 나같이 전쟁을 겪지 않은 세대에게 ‘역사’는 사회책에서나 보는 정도로만 남아버리는데 그렇지 않게 교육에 힘쓰는 것도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평화박물관 홈페이지에 들어갔을 때 제일 눈에 띄었던 것은 ‘사회적 기억운동 - 평화의 가치를 확고하게 하는 사회적 기억운동입니다.’ 라는 글이었다. 그 글을 읽는데 이런 곳에서 ‘운동’을 만나니 뭔가 뜻밖인데 반갑다, 싶으면서도 ‘기억운동’은 무엇일지 궁금해졌다. 그 순간에는 잘 몰랐는데 생각해보니까 사람들이 평화에 대한 생각을, 우리가 겪었던 평화가 필요했던 상황을, 그리고 앞으로도 평화가 필요할 것이라는 것을 잊지 않게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 학기에 그렇게 내 마음을 흔들었던, ‘운동은 다른 방식으로 얼마든지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생각할 수 있는 계기였다. 평화는 우리 삶과 아주 가까운 문제이고, 평화를 얻기 위해서는 싸워야 한다고 김영환 선생님이 말씀하셨는데, 그 말을 듣고 나는 마음이 불편했다. 가까이 있기는 하지만 저마다 바라는 것이 다르고, 나타나는 방식이 다르고, 상황이 다를 뿐 평화는 누구나 다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나로서는 과연 ‘싸움’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헷갈렸다. 싸워야 한다면, (설사 그 싸움이 온 몸을 부딪치는 것이 아니더라도) 싸움이라는 말이 주는 느낌은 너무 격렬한 것이라서 그렇게까지 애써야하고, 치열하게 행동해야만 얻어지는 것이 평화인가, 그렇게 해서 얻어낸 평화가 평화일까 싶기도 했다. 그런데 그날 강의가 끝나고 노트정리를 하는데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 내가 가족이 죽어가고 내가 누리던 모든 것들이 사라져가는 상황에 처해있다면 분명히 온 힘을 다해서 그 모든 것들을 되찾기 위해서 ‘정말’ 싸웠을 것이다. 그 상황에서는 평화고 뭐고 앞뒤 생각하지 않고 누군가를 구하기 위한 행동이겠지만 그 속에 숨어있는 또 다른 이유는 위험에 빠진 소중한 사람들을 구해서 다시 평화로워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지난 번 춘천 집에 갔는데 ‘평화를 위한 어린이 동요대회’ 라는 플래카드가 걸려있고 그 옆에는 ‘우리 모두 힘을 합쳐 북한을 응징하자!’ 라는 또 다른 플래카드가 걸려있었다. 어린이들은 평화를 지키기 위해 동요대회를 여는 마당에 어른들은 우리나라와 북한은 한민족이라고 그렇게 얘기하면서 왜 서로 으르렁대고, 싸우려고 하고, 서로에게 상처만 남기는 상황을 만드는 걸까? 우리 오빠는 지금 철책선 안에 들어가 군 생활을 하고 있는데 연평도 사건이 터지고 지금 같은 위급상황이 벌어졌을 때는 무슨 일이 생기면 언제든지 뛰어 나갈 수 있도록 밤에도 무장을 하고 잔다고 했다. 과연 이런 행동들이 평화를 유지하는데 도움이 되는 행동일까? 두 달여간의 평화워크숍을 마치면서 마음이 편해졌다거나, 평화가 무엇인지 확실히 알았다거나 하는 것은 없다. 다만 평화는 따로 구분 지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평화를 원한다면 그 과정 또한 평화로워야 된다. 어디를 가든, 누구를 만나든, 무엇을 하든 평화는 늘 옆에 있고, 그 모든 것의 바탕이 될 수 있다. 나를 위한 평화, 내가 원하는 평화가 있듯이 다른 사람들도 그들의 위한 평화, 원하는 평화가 있는 것이다. 타이헨 극단, 구로코, 신체표현 워크숍 - 몸의 언어에 귀를 기울이다. 이번 학기에 했던 여러 가지 일들 중에서도 특히 타이헨 워크숍에 신경이 많이 쓰이는데, 타이헨 극단과의 첫 만남은 지난 5월이었다. 연극에 출연할 한국 엑스트라들을 뽑는 워크숍 마지막 날에 가서 무대를 지켜봤고, 워크숍이 끝날 때쯤에는 타이헨 극단은 어떤 극단이구나, 대략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처음 타이헨 극단의 이야기를 듣고 우리가 해야 하는 역할에 대해서 들었을 때는 약간의 부담감은 느꼈지만 큰 걱정은 하지 않았다. 그저 ‘배우들을 막 뒤에서 준비시키고 무대로 내보내고 다시 막 안으로 들여오는 일’ 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몇 차례의 워크숍이 진행되고 우리가 타이헨 극단에서 하고 있는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구로코’의 역할이 그렇게 녹록치만은 않다는 것을 알았다. 단지 몸을 쓰는, 체력만 가지고는 될 일이 아니었고, 몸을 쓰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이 생각도 해야 했다. 구로코 워크숍을 할 때마다 가장 많이 듣는 말은 "We are not helper. We are KUROKO." 와 "Safely, Quickly, Quietly" 였다. 구로코들은 무대 조명이 꺼졌을 때 살그머니 들어가서 배우들이 막 안으로 들어올 수 있게 도움을 드리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무대 위에서는 없는 존재나 마찬가지이다. 단순히 도와드린다고 말하기에는 ‘구로코’ 역할 자체가 가지고 있는 표현하기 어려운 무언가가 있는데, 지금까지 구로코를 하면서도 이 무언가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찾지 못했다. 구로코는 우리와 배우들의 몸과 몸이 맞닿아야 할 수 있는 일이고 그렇기에 서로에 대한 믿음이 없으면 하기 힘들었다. 배우들의 입장에서는 내 몸을 생판 모르는 우리들에게 맡겨야 하는 것이기에 걱정이 태산일것이고, 우리는 우리대로 처음 해보는 일이기에 더 바짝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지난 10월, 창의서밋 때 김만리 선생님은 ‘신체표현 워크숍’을 진행하셨고 나도 그 워크숍에 참여했다. 처음에는 구로코 연습의 연장이라고 예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김만리 선생님은 워크숍에 참가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바닥에 누워서 아무 생각도 하지 말고 몸이 움직이는 대로,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하셨다. 처음에는 생각을 안 하려고 하니까 오히려 이것저것 생각이 더 많이 들었고 몸에 집중을 하는 것은 어떤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워크숍 내내 氣(기)라는 말을 들었고, 바닥에 누워서 약 2시간 정도를 내 몸 속에 흐르는 氣(기)에 집중을 하다가 잠깐 쉬기 위해서 일어나니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몸이 뻐근했다. 그 때 장애인 배우들이 생각나면서 나는 내 몸에 집중하는 것도 힘든데 배우들은 불편한 몸을 가지고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무대에서 활동한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하고 힘든 일인지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그들의 속도와 움직임을 더 존중해야 하고 구로코로서 일을 한다는 것에는 이미 그러한 마음이 밑바탕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만리 선생님은 氣(기) 라는 말을 굉장히 많이 사용하셨는데 나는 그 단어와 표현에 대한 어렴풋한 느낌은 있었지만 막상 내 입 밖으로 꺼내려니 쉽지가 않았다. 사실은 지금까지도 잘 모르겠다. 그렇지만 그렇게 바닥에 누워 있다가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움직이고 있는 내 몸을 느끼고, 내 몸 속에서 피가 어떻게 흐르고 있는지, 어느 부위가 갑자기 따뜻해지고 심장이 다른 곳에 붙어있는 것 같은 것을 느끼는 것, 같은 경험을 하면서 이게 氣(기)가 움직이는 건가? 하는 생각도 들었고, 어떤 부분에서는 氣(기)가 정말 있는지 없는지 헷갈렸던 상황들이 조금은 정리가 되는 것 같았다. 워크숍을 떠올려보면 생각하는 것 보다 느껴지는 것이 훨씬 많았고, 어떤 말로써 쉽게 정리하기도 어렵고 표현하는 것도 잘 되지 않는 시간이었다. 처음에는 장애인 배우들의 힘듦을 이해하는 시간일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것보다는 무의식과 가까운 상태에서 귀만 열고 어느 순간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게 되는 상황에서 움직이는 내 몸과 氣(기)에 대해서 생각하게 될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신체표현 워크숍은 나에게 몸, 신체라는 것에 대해 더 알고 싶고 흥미를 불러 일으켰는데, 내가 지난 학기에 계속해서 얘기했던 ‘마음에 따른 사람들의 움직임, 마음이 움직여서 일어나는 변화, 변화에 따라 움직이는 마음’ 과는 다른 맥락에서 ‘움직임’ 자체를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김만리 선생님이 프레젠테이션을 하실 때 말씀하셨던 것처럼 장애인들의 몸은 ‘컨트롤되지 않는 몸‘이기에 예측이 불가능하다. 그래서 내가 생각하기에 배우들이 전하려고 하는 연극의 내용이나 감정도 중요하지만 그걸 받아들이는 관객의 입장 또한 중요할 것 같다. 비슷한 증상을 가지고 있어도 저마다 움직이는 것이 다르고 그 움직임은 누구도 따라할 수 없다. 그 움직임에서 나오는 차이들을 차이로써 받아들이는 것은 배우들을 포함해서 모든 사람의 몫인 것이다. 김만리 선생님은 배우들 스스로도 자신이 어떤 움직임을 취하게 될지 알 수 없다고 하셨다. 그렇지만 그런 과정을 계속해서 반복하고, 공연 때 내 몸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기 위해 딱 달라붙는 레오타드를 입음으로써 연극 안에서 내가 표현하고 싶은 것을 찾고 무대 위에서 배우로서 몸을 내놓는 것이 더 이상 부끄럽거나 이상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게 된다면 좋을 것 같다. 보는 사람들도 처음엔 낯설고 기분이 이상하고, 처음의 내가 그랬던 것처럼 마음이 불편할 수도 있겠지만 배우를 배우로 대하는 것, 그리고 그들의 움직임뿐만 아니라 움직이고자 하는 마음까지도 전달받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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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목차
1. 지난 4월부터 8월까지의 시즌 2 준비기간부터 시즌 2를 시작했다,
prologue
- 2007년부터 작업장학교에 있으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으면 때로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잊어버릴 때도 있고, 내 속도는 어땠는지 내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도 흐릿해질 때가 있다.
(우리가 하필 이 시대에, 이 시간에 만나 학교를 같이 꾸려가는 것은 어떻게 된 일일까?)
- 지난 3월, 시즌 1을 마무리하는 마지막 학기를 마치고 시즌 2를 하겠다고 마음먹었을 때는 우리가 학교를 만든다는 사실에 긴장하기보다는 막연한 기대에 잔뜩 들떠있었다. 하자에서 3년여를 있었는데도 전체적인 구조를 의식하지 못한 상태에서 학교가, 우리가 하는 일에 참여했었고, 학교의 큰 틀을 만드는 것은 담임들의 몫이지, 우리는 그 안에서 작은 틀을 만들어가며 안전하게 생활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4월부터 지금까지 학교 만들기 팀으로서, 시즌 2를 새롭게 하는 사람으로 한 학기를 보내면서 그 동안의 생각들은 큰 착각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학교를 만든다는 것은 꽤 오랜 시간을 작업장학교에서 지내면서도 처음 경험하는 낯선 일이었고, 담임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의 역할이었다. 학교를 열고 땡, 하는 것이 아닌 나도 다닐 학교였다. 그 학교에서 어떤 것을 배울지, 뭐가 하고 싶은지를 좀 더 진지하게 고민하는 것이 필요했다.
시간이 지나고 시즌 2를 열어야 할 날이 점점 가까워져옴에 따라 처음 그 설렜던 마음은 온데간데없이 남아있는 것은 학교를 열면 들어올 신입생들을 어떤 모습으로 맞이해야할지, 과연 우리가 그들보다 선배로서 같이 학교생활을 잘 할 수 있을지, 이 학교가 어떤 학교가 되어야하는지 끊임없는 걱정뿐이었다.
그리고 지난 9월, 여덟 명의 신입생들과 학교 만들기 팀 일곱 명은 시즌 2를 시작하는 ‘시작파티’를 열었고, 각자의 각오와 포부가 담긴 글을 여러 사람들 앞에서 읽었다. 나는 앞으로 작업장학교에서 이런 마음으로 생활하겠다는 것을 다른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다짐하는 한편 스스로에 대한 약속을 하는 것이기도 했다.
2. 프로젝트/여러 일들
평화워크숍, 영상언어, 서밋, 구로코, 북카페 (따비에, 민욱의 작업, 율면)
1) 영상언어
내가 지난 학기에 카메라를 든 사람으로서의 자세와 생각들에 대해 고민했던 것에 이어서 이번 학기 영상팀에 있으면서, 촬영을 하면서, 편집을 하면서, 영상언어 수업을 통해서 어떤 자세였는지, 지난 학기와 달라진 생각이나 고민은 무엇인지. (아직 안 씀)
2-1) 김만리 선생님의 신체표현 워크숍에 이어서 구로코로 활동하면서 내가 어떤 생각들을 하고 있는지.
- helper가 아닌 구로코. 장애인들을 배우로 대하는 것. 그들의 움직임을, 상황을 존중하는 것.
- 이번 학기에 했던 많은 것들 중에서도 특히 타이헨 워크숍에 신경이 많이 쓰인다. 타이헨 극단과의 첫 만남은 지난 5월이었다. 연극에 출연할 한국 엑스트라들을 뽑는 워크숍 마지막 날에 가서 무대를 지켜봤고, 타이헨 극단은 어떤 극단이구나, 대략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처음 타이헨 극단의 이야기를 듣고 우리가 해야 하는 역할에 대해서 들었을 때는 약간의 부담감은 느꼈지만 큰 걱정은 하지 않았다. 그저 ‘배우들을 막 뒤에서 준비시키고 무대로 내보내고 다시 막 안으로 들여오는 일’ 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몇 차례의 워크숍이 진행되고 우리가 타이헨 극단에서 불리는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구로코’의 역할이 그렇게 녹록치만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지 몸을 쓰는, 체력만 가지고는 될 일이 아니었고, 몸을 쓰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이 머리도 써야 했다.
그리고 지난 10월, 서밋에서 김만리 선생님은 ‘신체표현 워크숍’을 진행하셨고 나도 그 워크숍에 참여했다. 처음에는 구로코 연습의 연장이라고 예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김만리 선생님은 워크숍에 참가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333 바닥에 누워서 아무 생각도 하지 말고 몸이 움직이는 대로,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하셨다. 처음에는 머릿속에서 이것저것 생각이 더 많이 들었고 몸에 집중을 하는 것은 어떤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워크숍 리뷰를 할 때 내 생각의 방향은 氣(기)에서 ‘존중’으로, ‘존중’에서 ‘움직임’으로 움직였다. 바닥에 누워 있다가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움직이고 있는 내 몸을 느끼고, 내 몸 속에서 피가 어떻게 흐르고 있는지, 어느 부위가 갑자기 따뜻해지고 심장이 다른 곳에 붙어있는 것 같은 것을 느끼는지. 생각하는 것 보다 느껴지는 것이 훨씬 많았고, 쉽게 정리되지 않는 시간이었다. 처음에는 장애인 배우들의 힘듦을 이해하는 시간일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것보다는 무의식과 가까운 상태에서 귀만 열고 어느 순간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게 되는 상황에서 움직이는 내 몸과 氣(기)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는 계기였다.
선생님은 氣(기) 라는 말을 굉장히 많이 사용하셨고 나는 그 단어와 표현에 대한 어렴풋한 느낌은 있었지만 막상 내 입 밖으로 꺼내려니 氣(기)를 잘 모르고 있었고, 사실은 지금까지도 잘 모르겠다. 내가 지난 학기에 계속해서 얘기했던 ‘마음에 따른 사람들의 움직임, 마음이 움직여서 일어나는 변화, 변화에 따라 움직이는 마음’ 과는 다른 맥락에서 ‘움직임’을 생각하게 되었다. 이 ‘신체표현 워크숍’은 나에게 몸, 신체라는 것에 대해 더 알고 싶고 흥미를 일으켰다.
워크숍을 할 때마다 듣는 말들 중에 가장 많이 들은 말은 "We are not helper. We are KUROKO." 와 "Safely, Quickly, Quietly" 였다. 몸과 몸이 맞닿아야 할 수 있는 일이고 그렇기에 서로에 대한 믿음이 없으면 하기 힘든 일이었다. 배우들의 입장에서는 내 몸을 생판 모르는 우리들에게 맡겨야 하는 것이기에 걱정이 태산일것이고, 우리는 우리대로 처음 해보는 일이기에 더 바짝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3) 평화워크숍.
지금 생각해도 여전히 평화라는 건 쉽지 않고 너무 추상적인데 처음 평화워크숍을 시작하면서 생각했던 것과 마무리 된 지금, 그 동안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없으면 왜 없었는지).
- ‘평화’라는 말을 언제부터 들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꽤 자주 들었던 말이라 그렇게 큰 부담감도 낯섦도 없었다. 그런데 평화워크숍을 처음으로 했던 날, 나는 평화가 그렇게 광범위한 것인지 처음 알았다. 머릿속에서는 분명히 잘 정리되어 있는데 막상 입 밖으로 뱉으려고 하니 그건 평화에 대한 어렴풋한 느낌뿐이었다.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 평화인지도, 내가 평화롭다고 느낀 적은 언제였는지도 하나도 생각이 안 나고 평화는 그저 평화로운 것이지, 도대체 평화로운 것 말고 뭐가 더 분명해야 해야 싶었다. 평화워크숍 첫날 적어두었던 메모에는 ‘평화롭게 되어야 하는 것, 평화롭게 만드는 것이 의무일까?’, ‘도대체 뭐가 평화고, 왜 우리는 평화를 바라는 것이고, 그게 우리한테 뭘까?’ 라는 것이 강조되어 있다. 아마 ‘평화’가 무엇인지를 얘기함으로써 내가 가지고 있던 평화로움이 너무 쉽게 무너지는 것에 당황했던 것 같다.
그러다가 ‘나와 우리’라는 평화단체에서 일을 하고 계시는 조진석 선생님을 만나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그날, 선생님은 남과 북의 상황에서부터 정신대 할머니들에 대한 이야기까지 많은 이야기를 해주셨는데, 언제든지 다시 전쟁이 일어날 수 있는 분단국가라는 특이한 상황 속에 살면서도, 어릴 때부터 평화에 대한 책들을 그렇게 읽었으면서도 나는 그 상황이 평화와 이어질 것이라는 생각을 진지하게 했던 적이 없다. 정신대 할머니들은 지금도 수요일마다 일본 대사관 앞에서 사과를 요구하는 수요 집회를 하고 계시지만 사실상 사과다운 사과를 받은 적은 없다고 하신다. 사실 할머니들의 고통이 얼마나 괴롭고 끔찍했을지는 이야기를 들어서 알 뿐, 짐작조차 가지 않는다. 전쟁을 겪지 않은 세대라서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드는 한편, 어쩌면 이렇게 무심할 수가 있었나 하는 마음도 들었다.
조진석 선생님의 이야기와 지난 번 오셨던 평화박물관에서 일하고 계시는 김영환 선생님의 이야기를 같이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우리나라가 일본의 전쟁피해자인 것처럼 베트남도 우리나라 군인들에 의해 죽임을 당한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평화박물관 홈페이지에 들어갔을 때 제일 눈에 띄었던 것은 ‘사회적 기억운동 - 평화의 가치를 확고하게 하는 사회적 기억운동입니다.’ 라는 글이었다. 그 글을 읽는데 이런 곳에서 ‘운동’을 만나니 뭔가 뜻밖인데 반갑다, 싶으면서도 ‘기억운동’은 무엇일지 궁금해졌다. 그 순간에는 잘 몰랐는데 생각해보니까 사람들이 평화에 대한 생각을, 우리가 겪었던 평화가 필요했던 상황을, 그리고 앞으로도 평화가 필요할 것이라는 것을 잊지 않게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 학기에 그렇게 내 마음을 흔들었던, ‘운동’은 ‘다른 방식으로 얼마든지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생각할 수 있는 계기였다.
평화는 우리 삶과 아주 가까운 문제이고, 평화를 얻기 위해서는 싸워야 한다고 김영환 선생님이 말씀하셨는데, 그 말을 듣고 나는 마음이 불편해졌다. 가까이 있기는 하지만 저마다 바라는 것이 다르고, 나타나는 방식이 다르고, 상황이 다를 뿐 평화는 누구나 다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나로서는 과연 ‘싸움’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헷갈렸다. 싸워야 한다면, (설사 그 싸움이 온 몸을 부딪치는 것이 아니더라도) 싸움이라는 말이 주는 느낌은 너무 격렬한 것이라서 그렇게까지 애써야하고, 치열하게 행동해야만 얻어지는 것이 평화인가, 그렇게 해서 얻어낸 평화가 평화일까 싶기도 했다. 그런데 그날 강의가 끝나고 노트정리를 하는데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 내가 가족이 죽어가고 내가 누리던 모든 것들이 사라져가는 상황에 처해있다면 분명히 온 힘을 다해서 그 모든 것들을 되찾기 위해서 정말 싸웠을 것 같았다. (아직 다 안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