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자에 와서

지금 생각해 보면 자퇴할 만큼 심각한 이유도 아니었다. 단지 내 마음이 너무 약했던 것이다. 초등학교에서 중학교로 올라가면서는 두근두근 기대됐다. 과목마다 선생님이 바뀌어 들어오고, 교복도 입고. 중학교란 나에게 한 차원 다른 세계로 가는 문이었다. 그러나 나에겐 초등학교 때부터 달고 온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가끔씩 일어나면 학교가 가기 싫어진다는 것. 언제부터였을까. 기억 안 난다.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났는데 약간 피곤하기도 하고 하루쯤 학교 안가도 되지 않을까하는 마음에 엄마한테 졸랐던 것이다. 오늘 하루 안 가도 되냐고. 그렇게 하루 쉬다보니 다음날도 가는 게 귀찮아졌다. 게다가 가기 껄끄러워지고 말았다. 당연하지만 친구들은 너 왜 어제 안 왔냐고 물을 게 뻔하다. 아예 안 가버리는 게 편하다. 그렇게 학교에 나가다가는 안 가고 하는 걸 몇 번 반복하다보니 선생님도 이제 익숙해졌다. 사실 친구들과도 그리 깊은 관계를 가지진 못했던 것 같다. 그냥 가서 웃으면 술렁술렁 넘어가는 사이였다. 그런 게 있었는지도 의문이지만, 하여간, 심각한 얘기도 별로 나누지 않았다. 그리고 내 성격이 그런 것을 아빠 탓이라고 생각했다. 다른 집 아빠는 아이들과 잘 놀아주는데 우리 아빠는 집에도 늦게 들어오고 쉬는 날에도 바둑만 두거나 퍼질러 자기만한다고. 사실 이런 건 어디서 주워들은 것이다. 언젠가 엄마가 말했었나? 아마 농담 삼아 말했을 터였다. 그 말을 듣기 전엔 그냥 아빠란 그런 사람이구나 싶었는데, 그 말을 듣고는 요령이 생긴 것이다. 사실 놀이공원 같은데도 자주 데려가주고 해서 별 불만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사실 성격 따윈 세상에 질리도록 많고, 내 성격도 그다지 문제 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그저 좋은 변명거리가 있었고, 써먹기 좋은 상황이었다. 참 나쁜 놈이다. 어쩌면 마음속으로만 생각하고 있었을지 모른다. 말은 안하고. 어쨌든 그런 상황에서 중학교를 가게 됐고, 중학교에서도 예상대로 차차 학교를 안가는 날이 늘어갔다. 방과 후 보충수업이라는 것이 굳이 안 해도 되는 것 아니냐는 생각이 들게 됐고, 그래서 그것도 거부하게 됐다. 원래 정규수업은 9시부터 6교시,3시 반에 청소하고 끝나는 것 아닌가. 그런데 그걸 굳이 1시간 더 보태려 하는 데에 짜증났다. ‘왜 그러지?’

그러다 고등학교는 외가가 있는 안동으로 갔다. 기숙사 있고 성적 잘 받은 애들이 가는 곳이다. 처음에는 역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여기 있으면 좋은 대학갈 수 있겠지?’하며. 그리고 학교에서 산다고 생각하니 이제 지각도 결석도 안 하겠지 싶었다. 무엇보다 재미있을 것 같았다. 학교에서 산다니, 후훗! 이제는 가족도 필요 없었다. 그런데 그 때 전화 오는 엄마. 왜 걸었냐고 물었더니 옆에 있는 아줌마가 걸어보라 그래서 전화했단다. 짜증났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다. 아, 적응이 안 돼는 것인지 그만 집에 가고 싶어져버렸다. 난 그리고 그 원인이 엄마가 첫날 전화한 데 있다고 했다. 정말 유치하다. 친구들도 늘 그랬듯 ‘예의바른 나’를 만들기 위한 들러리였다. 게다가 경쟁자이기도 했다. 순식간에 주위가 모두 적으로 변했다. 시간이 날 때마다 엄마에게 전화해 하소연했고, 도저히 더 있을 재간이 없었다. 엄마한테 전화는 하면서도 엄마 역시 나를 괴롭히려는 속마음을 품은 적과 한통속인 것만 같이 여겨졌다. 한심하다.

여차저차 해서 학교를 자퇴하게 됐다. 집에서 혼자만 있어도 그리 심심하진 않았다. 사는 것도 너무 재밌기만 하면 큰일이다. 요즘 히키코모리다, 니트다, 말들 많이 하곤 하는데 그게 다 생길 만한 조건이 갖춰져 생기는 것이다. 일어나서 컴퓨터만 켜면 밤새라도 방안에 틀어박혀 있을 수가 있다. 요즘엔 텔레비전도 좋아져서 하루 종일 시간가는 줄 모르고 소파에 누워 있을 수 있다. 나도 그 비슷한 생활을 누렸다.

그러다 하자에 대해 알게 됐고, 당시 사는 게 그리 마음에 들지도 않았으므로, 한 번 가보자는 식으로 오게 된 거다.

하자라는 곳을 처음 아저씨한테 듣고 인터넷으로 찾아봤다. 하자작업장학교. 거기엔 음악/공연, 디자인, 영상언어 등의 작업장이 있었다. 예술 고등학교인가? 그런 생각을 하며 하자에 면접을 보러 왔고, 면접장엔 떠비,OP와 쇼가 참관인으로서 있었다. 그리고 쇼하자까지 하면서 입학전형은 끝이 났다.

하자란 나에게 어떤 곳이었을까? 이런 곳에 이런 학교가 있었던 것조차 몰랐으므로 우선 신기했다. 일반 학교를 거부한 아이들. 그리고 그들이 만든 학교. 하자의 등교시간은 아침 10시다. 일반 학교는 수업이 9시에 시작하는데도 보통 7시 반까지는 교실 안에 있어야 한다. 그래서 아침을 먹을 시간도 없고 또 설사 있다하더라도 먹으며 안절부절 못하며 먹는 게 마음에 안 들었다. 10시부터 10시 반까지는 오늘의 문장과 무브의 박자 교실이 있다. 오늘의 문장이라 함은 하교한 때부터 등교할 때까지 생각한 것, 느낀 것을 한 문장으로 말해보는 것이다. 단, 대충 아무거나 말하는 게 아니다. 나중에 봤을 때 도움이 될 만한 것들, 혹은 멋있는 인용구들을 말하는 것이다. 처음엔 다들 ‘~하자’란 식으로 다짐하는 식으로 문장을 만들었던 것 같다. 예를 들어 지각한 사람은 ‘지각하지 말자‘ 라던가, 늦게 일어난 사람은 ’일찍 일어나자’ 라던가 하는 식으로 말이다. 그러다 다들 눈치 챘는지 어쨌는지 며칠 지나다보니 읽은 책들에서 좋다고 생각한 문장들을 뽑아 온다거나, 하여튼 제법 시적인 문장들이 나오게 됐다. 무브의 박자 교실은 나머지 5분정도의 자투리 시간에 이루어진다. 무브가 박자를 알려주면 우린 무브의 악기연주에 따라 손뼉을 친다. 쌈바 리듬, 무슨 리듬 같은 걸 가르쳐 주긴 하는데 이름하고 리듬하고 연결해서 외우기는 어렵다. 가르쳐 줄때는 곧잘 ‘아, 이게 쌈바 리듬이구나’ 하며 치지만 돌아서면 까먹어버린다. 그러나 아침에 일어나 부스스한 눈을 하고 와 다들 침울한 분위기를 연출 할 때 박수 한 번씩 치고 하루 일과를 시작 하게 해주는 무브가 고맙다.

10시 반부터 12시까지는 글로비시Globish 시간이다. 바야흐로 글로벌Global 시대를 맞아 우리가 세계인을 만나는 데 의사소통 할 언어를 배우는 시간이다. 글로비시는 일단 영어다. 단, 어려운 영어, 즉 필요 없는 영어는 필요 없다. 우리는 될 수 있는 한 간단한 영어를 구사하려 한다. 우리가 말 할 대상이 사용할 단어를 미리 알아보고, 또 어려운 단어는 대체가능하다면 좀 더 쉬운 단어로 바꿔 쓴다. 그래야 듣는 사람도 쉽게 알아들을 테니까.

12시부터 12시 반까지는 오도리(おどり)시간이다. 오도리는 춤이란 뜻의 일본어다. 점심먹기 전이라 배고플 수도 있지만 잠깐 잊고 춤추다보면 그 후의 점심은 더욱 맛있다. 난 이 오도리 시간이 제일 마음에 든다. 어쩌다 장소가 마땅치 않을 때는 가끔 못하는 경우도 있다. 보통 333에서 하는데, 외부에서 대량으로 체험을 하러 오거나 한다면 그 날은 오도리가 없다. 슬프게도. 333이란 것은 3층의 마루를 말한다. 왜인지 거기를 333이라고 부른다. 또 2층의 강당은 999라고 하는데 왜인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이런 식의 작명은 재미있다고 생각한다. 강당이나 3층 마루라고 부르기 보다는 333이나 999라고 부르는 게 훨씬 나은 것 같다. 또 하자의 특징 중 하나는 화장실 마크의 색이 반대라는 것이다. 남자 화장실은 빨간 색, 여자 화장실은 파란 색으로 ‘ㄴ’, ‘ㅇ’ 이라고 써져 있다. 각각 남자와 여자의 ‘ㄴ’ 과 ‘ㅇ’이다. 또 층마다 남자 화장실과 여자 화장실의 좌우 위치가 달라서 하자에서 화장실을 가려면 조심해야 한다. 이처럼 하는 이유는 고정관념을 깨보자는 데 있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남자의 상징색은 파란색, 여자의 상징색은 빨간색인데, 그런 고정관념을 깨자는 것이다. 화장실마크의 색이 뚜렷한 이유는 급할 때 빨리 색만으로 어디로 들어가면 될지를 알 수 있게 해주기 위해서였다고 들었는데, 하자에선 그와는 또 다른 이야기가 쓰여 지고 있다.

점심은 하모니 식당에서 먹는다. 맛있고, 얼마든지 먹을 수 있고, 싸다. 설거지는 각자 자기 스스로 한다. 하자에 오기 전엔 설거지 한 횟수를 손에 꼽을 정도였는데 이제 그거 세고 있을 시간은 없을 것 같다. 자기가 사용한 식기를 자기가 씻는다는 것은 좋은 문화인 것 같다. 집에서는 엄마나 할머니가 다 해줘서 전혀 몰랐는데 그런 건 굳이 내가 안 할 필요가 없는 것이었다. 밥 먹고 나면 만사가 귀찮을 수도 있다. 그냥 싱크대에 넣어두기만 하면 어느새 씻겨있으니 그보다 편할 수가 없지만, 조금쯤 수고해볼 수도 있지 않을까.

점심은 2시까지. 만약 밥 먹고도 시간이 남는다면 2시까지는 자유다. 2시부터는 요일별로 각각 다른 워크숍을 진행한다. 화요일은 영상언어, 수요일은 사운드, 목요일은 평화, 토요일은 디자인 워크숍이 있다. 토요일에는 또 포이트리poetry 시간이 있다. 각자가 일주일마다 준비해온 것을 공유하는 시간이다. 기타를 칠 수 있으면 기타를 쳐도 되고, 일주일동안 읽었던 시집에서 감명 받은 시나, 혹은 직접 쓴 시가 있다면 그걸 읽어도 좋다. 요는 일주일간 자기가 관심을 가져봤던 것, 그래서 같이 공유해보면 좋겠다싶은 것을 보여주면 되는 것이다.

3개월간 있으면서 많은 프로젝트를 같이 기획하고 진행해 왔다. 가장 먼저 같이 만든 행사는 달맞이 축제였던 것 같다. 아직 하자에 온지 얼마 안 돼 말하자면 적응기에 동참한 프로젝트라 그런지 아직도 기억에 남아있다. 추석에 친척들과 다함께 모이는 것이 우리나라의 연중행사 아니겠는가. 그런데 요즘엔 워낙 바쁘게, 서로 연락도 변변히 안하고 어느새 추석에도 가족끼리만 모이는 사람들이 많아진 것 같다. 우리 집도 대가족이라 추석에는 일곱이나 되는 고모들이 모였더랬다. 사촌들도 열댓 명 돼서 무슨 날이라도 있다 치면 좁은 집이 북적북적해졌더랬다. 그게 요즘은 다 커서 그런지 아님 내가 하도 이상해져서 그런지 없어졌다. 와도 할머니 할아버지 생신 때나 띄엄띄엄 왔다가 금방 갈 뿐이다.

추석라든가 명절이 되면 확실히 엄마들은 바빠진다. 음식만 해도 사람이 사람이라서 하루 종일 만들고, 또 친척 분들이 오시면 그것 또 일일이 대접을 해 드려야한다. 옛날이야 워낙

남아우월사상이 지대했기에, 그게 자체로 하나의 문화로서 받아들여졌기에 별 문제가 없었지만, 그게 지금 세대에까지 통용될 가치는 아니게 됐다. 그런고로 추석에 쓸쓸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사람들 혹은 여타 한가한 사람들이 모여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게 달맞이 축제의 의도였던 것 같다. 예전에 쪽방촌 어르신들의 건강조사를 위한 온도재기 프로젝트란 걸 할 때 만난 어르신들도 이번 달맞이 축제에 초청했다. 점점 추워지는 가을. 혹여나 부족한 것이 있을까 가시는 길 선물로 옷과 음식을 준비했다. 난 쪽방촌 프로젝트에 참여하지 않았으니 그분들을 잘 모르지만, 아무도 돌봐주는 사람 없이 거동하기 불편한 몸으로 지내신다는 것은 참 외로울 것 같다고 생각했다. 달맞이 축제 한 켠에서는 소원쪽지를 팔았다. 소원을 적어서 나무에 매듭지어 놓으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소원쪽지는 다른 곳에서 태워지게 된다. 축제 때 그래도 꽤 사람이 모여서 강강술래를 할 때는 자리가 모자랐다. 모처럼인데도 달이 안 나와 ‘달아 나와라’ 하며 기도했지만 결국 안 나왔다. 비라도 안와서 다행이었다.

그다음으로 기억에 남는 것은 쿠로코(黑子、くろこ)다. 쿠로코라 함은 연극 같은 걸 할 때 연극이 순조롭게 진행될 수 있도록 무대장치라던가, 배우의 분장이라던가, 무대 뒤에서 여러 보조를 해주는 것이다. 나도 어렸을 때 연극을 본 적이 있으므로 무대장면이 바뀔 때마다 사람들이 무대 배경을 바꾸기 위해 분주히 움직이는 걸 알았다. 우리가 보조할 연극 극단은 타이헨(たいへん)라는 일본의 극단이었다. 한자로는 태변態變. 배우는 모두 중증장애인이다. 극단을 이끄는 김만리 선생님도 장애인이시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재일교포 2세다. 처음에는 ‘장애인이 연극을?’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는데 연극을 어떻게 한단 말일까. 타이헨 극단은 지난 83년부터 활동을 시작했다고 한다. 다른 나라에서도 여러 번 공연을 했던 적이 있다고 한다. 그 때마다 그 지역의 사람을 일정 부분 배우로 쓴다고 한다. 이번에도 한국인 중에서 엑스트라를 뽑아서 공연을 한다고 한다.

우리 쿠로코가 해야 했던 일은 배우 분들이 제대로 연극을 할 수 있도록 도와드리는 것이었다. 즉, 다음 무대 장면으로 빨리 전개될 수 있도록 배우 분들을 무대 안쪽으로 옮겨드린다거나, 옷을 갈아입혀 드린다거나, 힘들진 않은지, 어떻게 연기해야 할지를 잘 숙지하고 있는지 물어본다거나 하는 것들 말이다. 몸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다른 연극의 배우들과는 달리, 제대로 걸을 수도 없는 타이헨의 배우 분들은 쿠로코가 직접 옮겨드려야 한다. 나갈 때는 나가는 것 자체가 연기이기 때문에 상관없지만, 장면이 바뀔 때는 어둡기도 하고, 또 굳이 퇴장하는 것까지 보여줄 필요는 없지 않겠는가.

옮겨드릴 때는 조심해야한다. 또, 신속해야한다. 더욱 중요한 것은 예술성에 지장이 없어야한다는 것이다. 즉, 당연하지만, 연극을 망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의 예술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사람을 든다는 것은 똑같은 무게의 다른 물건을 드는 것보다 더 힘이 드는 일이다. 걸을 수 있으신 분들은 한 명이 부축해 드리기만 하면 되지만 설 수조차 없으신 분들이 타이헨엔 많다. 그런 분들은 두 명이 들어야 하는데, 그 때 그냥 들기만 하면 되는 게 아니다. 배우가 불편하지 않은지, 안을 때 아프진 않았는지 등을 수시로 확인해야 한다. 만약 벨트라던가 혹은 반지 같은 딱딱한 물건을 착용하고 있으면 그게 안기는 사람에게는 아플 수가 있다. 안는 자세도 중요하다. 안을 때 뒤에서 안는 사람이 배우의 팔만, 즉 겨드랑이를 들면 그건 배우에게 힘들 수 있다. 안을 때는 최대한 정성을 다해서 안기는 사람을 생각하며 안아야한다. 뒤에서 안는 사람은 허리를 젖혀 배로 받쳐서 배우를 안아야한다. 앞에서 다리를 드는 사람은 자칫 뒤에서 안는 사람과 마주안기 쉬운데, 그러면 움직일 때 위험하다. 들기 전에는 꼭 배우의 양해를 구해야한다. 아무 말 없이 덥석 들면 배우에게는 막 다뤄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하나 쿠로코에게 요구되는 것은 전체적인 흐름을 이해하고 있어야한다는 것이다. 해당 신이 무슨 흐름 속에서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를 파악하고 누가 나가야하는지 알고 미리 준비해야 한다. 이번에 한국 엑스트라 분들이 맡으신 신은 다섯 신 정도밖에 없다. 우리도 그 분들만 보조해드리면 되지만 쿠로코가 전체적인 이야기를 파악하고 있지 않으면 그 영향이 배우 분들에게까지 끼치게 된다. 그러면 어느새 우왕좌왕 하게 되는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

배우들은 이 연극을 완성시키기 위해 자신의 몸을 기꺼이 내보이고 있다. 직접 연극을 본 적이 있다면 알겠지만 배우들은 전원 전신타이즈를 입고 있다. 만약 내가 그런 옷을 입어야한다면, 과연 거리낌 없이 입을 수 있을까. 배우들은 자신의 장애를, 지금까지 멸시받고 조롱받으며 사람들 곁에 다가가지 못했던 자기를 당당히 예술로 승화시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김만리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인간의 신체는 많은 훈련을 통해 현재의 움직임을 획득한다. 장애인의 움직임은 이러한 훈련 이전의 인간 움직임의 원형을 보여준다.’고. 처음엔 그저 장애인들을 도와 연극을 만드는 게 쿠로코의 일이라고 생각했다. 장애인들은 제대로 못 움직이니까 우리가 없으면 연극이 성립되지 않는다고. 하지만 워크숍이 진행되면서 차차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그들이 있어 비로소 우리가 필요해진 거라고.

이 사람들은 얼마나 힘들고 답답할까. 자기 몸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 고통. 그리고 그걸 온몸으로 안고 살아온 사람들. 아마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결코 모를 것이다. 몇몇은 힘겹게나마 겨우 걸을 수 있다. 하지만 의사소통을 하려고한다면 그건 역시 익숙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어렵다. 모두 다소의 언어장애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한마디를 알아듣는데 몇 번을 재차 물어봤는지 모른다. 각자 말하는데 굴곡이 있는 것 같다. 어디서는 빵 터지는가 하면 어디서는 콱 막혀버리곤 하는 느낌이다. 한 명 한 명 말하는 습관이 다르다. 다른 사람과 얘기하면서 이렇게까지 생각해본 적은 없었던 것 같은데 이상하다. 초등학교, 중학교를 다니며 죽 같이 지내온 친구가 있다. 그 애도 언어장애가 있었다. 그 놈의 경우는 생각만 너무 빠른 탓에 말이 따라가지 못하는 경우였다. 언제나 숨이 찬지 개인물병을 들고 다니던 녀석은 자폐증상도 약간 있어서 곧잘 놀림거리가 되곤 했다. 그런가하면 성격은 왜 또 그리 다혈질인지 조금만 놀려도 금세 얼굴이 시뻘개 지고는 했다. 그럼 우리는 더 신이 나서 놀리곤 했던 것이다. 원래 놀리는 대상이 반응을 잘 해주면 더 놀리는 맛이 나게 마련이다. 지금 생각하면 참 미안하고 우리가 했던 짓이 참 아이들이기에 할 수 있는 짓이구나 싶다. 그 놈도 그리 놀림 받으면서도 용케 계속 다닌 걸 보면 성격이 좋은 것이다. 배도 이렇게 나와선 성격 좋게 생기긴 했다. 자퇴하고서는 연락을 끊고 지내고는 있지만 만약 이 글을 읽고 있다면 용서하길. 그래도 넌 재밌었어.

내가 우리나라에서 만난 장애인들은 거의가 말을 제대로 못하는 경향이 있던 것 같다. 일본에서 온 배우도 그렇고 다른 나라 장애인들은 그래도 이렇게까지 말을 못하지는 않은 것 같은데 말이다. 아무래도 우리나라에서는 아직도 장애인들에 대한 선입견이 있는 것 같다. 언젠가 ‘오체불만족’이라는 책을 읽었다. 일본의 한 장애인에 대한 얘기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양발양손이 없는 채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일본의 그 유명한 와세다 대학을 나왔고, 방송국의 리포터 일도 했으며, 근간에는 그의 꿈이었다는 교사를 하고 있다고 한다. 태어날 때부터 남들과는 출발선부터가 달라보였던 그가 다른 사람 못지않게, 아니 오히려 성공적인 인생을 꾸려낼 수 있었던 데는 부모님과 주위 친구들의 관심과 도움이 컸다고 한다. 물론 그는 정신은 말짱했다. 그러나 그런 정신조차도 주위의 끊임없는 믿음과 사랑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자퇴하고 1년가량 방에 틀어박혀 사람과 거의 말할 기회를 가지지 않던 기간, 나는 점차 말을 잃어가고 있었다. 내 목소리를 잊고, 말투가 달라졌으며, 무엇보다 말 할 의지가 없었다. 모든 사람이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사람의 말이란 결국은 일종의 약속일뿐이므로 쓰지 않으면 녹슬어 그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되고 만다. 우리나라는 어떤가. 물론 한국인 무뚝뚝하기는 세계적으로 정평이 나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소위 일반사람들이라고 하는 사람들에게는 말 할 기회가 많다. 학교에서, 회사에서, 거리에서. 장애인들은 어떤가. 그들은 아기 때부터 차이가 벌어지기 시작한다. 자고로 아기는 부모의 행동여하에 따라 매일매일 커가는 것인데, 자기아이가 장애가 있다고 생각하면 도무지 정이 안 붙는 것이다. 알게 모르게 거리감을 느껴버린다. 좀 커서 학교를 가야 하는 나이가 되면 그들은 특수학교에 가게 된다. 오체불만족의 저자처럼 정신에는 문제가 없다하더라도, 우리나라에서는 휠체어만으로 일반학교진학의 결격사유가 될 수 있다. 그만큼 주위에서는 매서운 감시의 눈초리를 항시 켜고 있다. 우선 밖에만 나가면 온통 계단이어서 돌아다니기도 힘들뿐만 아니라, 학부모들은 자기아이가 그런 아이들과 같은 교실에서 수업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못 견디는 것이다. 결국 거의 모든 장애인들은 특수학교에 가게 되고, 우리나라에서 오체불만족의 저자와 같은 경우는 보기 어렵다는 게 현실적인 개찰이다. 일부 진보적인 부모들은 ‘장애인의 나라’라고도 불리는 만큼 장애인에 대한 우대정책을 잘 펴놓은 미국 같은 나라로 가기도 하는듯하지만 그것은 역시 회피성 대책일 뿐 우리나라에서부터의 의식변화/정책변화는 기대하기 어렵다.

오체불만족의 저자는 계속 일반학교를 다녔다. 팔다리가 없지만 그런 건 문제가 되지 않았다. 친구들은 그가 자기스스로 뭔가를 하려할 때 도와주려는 동정의 손을 잠시 넣어둔 채 곁에서 응원했다. 그는 글씨쓰기는 물론, 수영, 등산, 농구, 럭비도 할 줄 안다. 그는 매번 ‘너는 왜 팔다리가 없니?’하고 질문 받았지만 그건 그에게 있어 친구가 되기 전의 통과의례일 뿐이었다. 그가 ‘응, 원래부터 없었대.’하면 친구는 ‘아, 그러니?’하며 친구가 됐다. 우리는 장애인을 보면 우선 동정의 시선부터 보낸다. 그 다음에 생각나는 것은 ‘뭔가 도와줘야 할까.’하는 것이다. 그런 시선이 장애인에게는 얼마나 부담일지 생각해봐야한다. 심지어 도움 받아야할 때조차 말이다. 그냥 지나가는 길에 할머니의 무거운 짐을 들어주는 것과는 약간 다른 친절함. 기어코 다른 세계에 몰아넣어버리고 마는 우리의 비겁함. 다시 한 번 고찰해 봐야할 필요가 있다.

창의서밋 때는 그야말로 정신이 없었다. 온 하자가 바빴던 것 같다. 따비에의 마웅저 선생님도 처음 만났다. 마웅저 선생님은 버마에서 오셨다. 지금 버마는 상황이 그다지 좋지 않다. 지금 정부는 무력으로 정권을 잡고 있고, 그에 또다시 저항하는 사람들이 있다. 버마를 떠나 다른 나라로 간 피난민도 많다. 그런 상황에서 마웅저 선생님은 도서관을 짓고 싶어 하신다. 적어도 다음세대에 버마를 짊어질 아이들에게 책이라도 많이 주고 싶으신 마음에서 일 것이다. 그래서 생긴 것이 따비에란 단체다. 버마의 현재 상황을 알리고 도움을 받는 단체라고 한다. 우리나라도 혹은 대다수의 나라가 그렇겠지만 이미 지나온 길을 지금 버마도 지나고 있는 중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나라는 결국 남과 북으로 분단되어 슬픈 현실을 맞았지만 버마는 꼭 후회 남지 않는 선택을 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브루노와 함께하는 평화워크숍에서도 현재 버마의 상황을 가지고 직접 역할극을 해봤다. 버마 정부, 야당이 있고, 거기에 중재하는 UN과 미국, 중국, 그리고 초국적 기업과 NGO가 참여하는 회의다. 또 버마 시민과 피난민 대표도 각각 자리를 했다. 그야말로 지금 버마의 문제를 타파하기 위한 원탁회의였다. 만약 정말 이런 자리가 마련된다면 버마의 문제가 해결 될 수 있을지 궁금했다. 회의가 시작됐다.

여당은 이런 식으로 말한다.

“현재 버마는 내외적으로 큰 혼란을 겪고 있습니다. 주변엔 호시탐탐 우리를 노리는 나라들이 있고, 안으로는 정부에 반대하는 반동분자들이 나라의 근간을 뒤흔들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린 언제나 무기를 들고 경계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여있습니다.”

시민들 입장에서는 억울하다. 먹고살기도 바쁜데, 세금은 있는 대로 거두고 갈수록 탄압은 심해진다. 개중에는 무력으로 맞서 싸우는 사람도 있고, 아예 포기한 채 다른 나라로 가버린 피난민들도 있다. 야당은 이들의 입장에서 말한다. 미국과 중국에게 버마는 어찌 되도 상관없는 다른 나라였고, 초국적 기업은 어떻게 하면 이 개발도상국에서 이득을 볼 수 있을까만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나마 NGO가 다소간의 의료지원을 하고 있을 뿐이다.

모두 자기 얘기만 하고 있었지, 도무지 결론이 나지 않았다. 버마는 지금 이런 상황에 놓여있는 것이다. 그걸 생각하니 가슴이 갑갑해졌다. 마웅저 선생님이 하고 계신 활동에도 조금이나마 공감할 수 있게 됐다.

이번 워크숍에서뿐만 아니라 우리가 쭉 진행해온 평화워크숍에서 자주 나온 말 중에 아힘사, 즉 비폭력이라는 말이 있다. 브루노는 이 비폭력이라는 말을 한단어로 볼 것인지, 비-폭력이라는 두 단어로 볼 것인지 물어왔다. 만약 이걸 두 단어로 본다면 ‘폭력이 아닌’이란 뜻이 된다. 즉, 폭력을 부정하는 것이다. 아힘사란 단어는 산스크리트 어로,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가 영국의 식민지배에 반대해 ‘비폭력 무저항’을 외치며 사용한 말이다. 과연 이 말을 일상에서도 사용할 수 있을까? 브루노는 예를 들어줬다. 만일 어떤 사람이 나를 툭 때린다면 나는 대체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일단 맞은 나는 화가 난다. 그건 당연한 것이다. 난 십중팔구 ‘이 자식이...’ 하면서 덤빌 것 같다. 물론 상대가 터무니없이 강해보이면 꼬리를 내릴 수밖에 없겠지만; 어쨌거나 분명한 건 때리는 데는 그에 상당하는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건 나에게 있을 수도 있고, 혹은 때리는 사람에게 있을 수도 있다. 그런 관점에서, 한번 대화를 해보면 어떨까. 지구상엔 경악스러울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아니 거기까지 안 나가더라도 우리주변엔 모두 기억하기는커녕 만나보지도 못 할 만큼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다. 그리고 모두 각자의 생각이 다르다. 지역별로는 문화가 다르고, 다른 나라도 그런지 모르겠지만 한국에서는 세대차도 난다고 한다. 관심 있는 게 다르고, 가치관이 다르며, 하고 있는 생각이 다르다. 10명에게 물어보면 10개의 다른 답을 한다. 그리고 그런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매일처럼 부듯 껴 산다. 그러니 거기엔 다양한, 정말로 다양한 충돌이 있을 수 있다. 아니, 없으면 오히려 이상할 정도다. 크든 작든 서로 의견 충돌이 있다. 그리고 그 충돌을 평화적으로 해소할 방법은 대화밖에 없다. 서로 뭘 생각하고 있는지 얘기해보면 상대방이 뭘 생각하고 있는지 조금씩 알 수 있다. 그게 나와는 약간 안 맞을 수도 있다. 어쩌면 아주 이상하게 취급받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건 나중문제고, 우선은 나를 보여주는 게 중요하다. 만약 다른 사람들이 나와 판이하게 생각이 다르다면 그건 내가 다시 한 번 생각을 재고해볼 필요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말했듯이, 이 지구상에 나 혼자만 살고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하자에 와서 한동안 일본 옷만 입고 온 적이 있다. 일본 옷이라고 했지만 일본 옷도 일본 옷 나름이라, 웃옷으론 진베라고 일본에선 목욕을 한 후에 간단히 입는 옷과 겉옷으론 유카타라 해서 역시 목욕 후에 입는 약간이나마 더 그럴듯한 옷이었다. 고등학교를 자퇴하고 일본애니메이션에 빠져 살다시피 했던 나였다. 고등학교에 실망하면서 한국에까지 거부감을 느껴버린 나에겐 피난처가 필요했고, 그게 옆 동네 일본이었다. 예전엔 일본이 단순히 싫었다. 할아버지, 할머니한테 일제 때 얘기를 많이 들었었고, 실제로 일본이 한 짓은 나쁜 짓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본은 여행가기 좋은 나라였고, 그게 여행간 기분이라 그런지는 몰라도, 살기도 좋게 느껴졌다. 일본은 나에게 파라다이스였다. 요즘 ‘못 먹는 떡이 더 커 보인다.’는 속담이 어느덧 나의 생활신조가 돼있다는 걸 어렴풋이 깨닫고 있지만 그럼에도 그런 건 지나보지 않으면 깨닫지 못하는 법이라고 애써 무마시키는 나다. 어쨌든 일본의 애니메이션은 매일 가던 학교를 안 가도 되게 되어 비게 된 시간을 보내기에는 충분히 재미있었다. 한번 보기 시작했다하면 주구장창 앉아서 보기 일쑤였다. 부모님이 일하러 나가시면 안방은 내차지가 되었다. 지난 1년은 그런 나날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마침 그런 생활도 이력이 나던 참에 예전부터 알고 지내던 여동생친구네 아저씨가 우연히 하자란 곳을 알려주셨고, 그렇게 이곳에 오게 된 것이다. 오랜만에 가게 된 학교. 설랬다. 그런 와중에 일본 옷이 어쩌다 손에 들어오게 되었고, ‘오, 이거 괜찮은데?’하며 입고 가게 된 게 주말에만 빨며 계속 입게 된 것이다. 처음엔 그냥 입고 다녔지만 언제부턴가 제제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하자에서는 그러면 안 되는 것이다. 뭐, 다른 곳에서도 마찬가지겠지만. 그 후론 평상복을 입고 오게 됐지만, 아직 문제는 남아있었다. 다음은 샌들과 운동복이었다. 둘 다 편하다는 이유에서 애용하고 있는 것들이다. 결국 샌들과 운동복도 안 입고 오게 됐다. 그런 것이다. 다른 사람도 있으니 배려할 줄 알아야 하는 것이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만약 지나가던 괴한이 나를 친다면 난 어찌할 텐가. 비폭력을 외치며 가만히 있으면 될까. 그러면 좋겠지만 내 생각엔 아쉽게도 그리 간단한 문제는 아닌 것 같다. 인도와 간디가 몸소 실천한 ‘비폭력 무저항’이란 것은 국가적 차원에서 일어난 항쟁이다. 즉, 무언의 항쟁이라 해서 아무런 의사소통도 안한 게 아니란 거다. 그 꺾이지 않는 의지가 전해졌기에 영국은 인도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만약 그저 한 명의 인간이 나를 때려왔을 때 내가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는다면 그건 그 사람을 무시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어떤 사람이 날 때린다는 것은 분명 어떤 원인이 있을 것이고, 그게 내가 단순히 무시한다고 해서 해결될 거라고 보이지는 않는다. 그럼 과연 어떤 이야기를 해야 좋을까. 내 생각에 여기서 중요한 것은 상황을 받아들이는 태도다. 브루노가 별다른 추가사항을 말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떤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모른다. 정말 무섭게 생긴 괴한일 수도 있고, 쪼끄만 꼬맹이일 수도 있다. 만약 정말 모르는 괴한이 나를 때려오는데 난 그 이유도 모르겠고 한다면 재빨리 도망쳐 경찰에 신고하는 편이 좋다. 그게 그 사람에게도 결국 나을 테니까. 단, 비폭력을 잊어선 안 된다. 상대가 날 때려올 때 나도 씩씩대며 대든다면 그것보다 미련한 것은 없다.

이야기 중에 가시리 이야기가 나온 적이 있다. 그곳 사람들은 4.3항쟁의 피해자들이라고 한다. 그들은 그 사건을 ‘우리 대에서 끝을 봐야한다.’며 함묵하는 관조를 보인다. ‘복수는 복수를 부른다.’는 관점에서 본다면 일리가 있다. 서로 으르렁대기만 할 뿐이라면 그건 서로 이해할 생각이 없다는 것이므로 더 이상의 싸움은 무의미할 수 있다. 그러나 만약 그들이 스스로 억울하다고 생각한다면 언젠가는 그 의사를 표현해야한다. 물론 그게 다시 싸움의 양상으로 가면 곤란하겠지만. 대화라는 것은 그런 것이다. 서로를 이해하려는 것. 그게 원활하지 않으면 그건 평화롭다고 안할 것 같다. 그건 피해자라고 하건, 가해자라고 하건 간에, 서로 불공평하다. 분쟁이 있다면 거기엔 무릇 원인이 있게 마련이다. 그 원인을 알고 대처하는 방법을 찾아가야 한다.

언젠가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어느 날 술에 절어 싸움을 벌이고 있는 두 젊은이가 있었다. 모두들 말려야지 생각하고는 있었지만 정작 싸움에 말려들까봐 엄두를 못 내고 있는 것이다. 그 때 두 젊은이는 갑자기 물세례를 받고 젖은 생쥐 꼴이 되고 말았다. 그 마을의 가장 연로하신 장로가 보다 못해 물을 바가지 째로 뿌린 것이다. 두 젊은이는 잠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어안이 벙벙해서 정신을 못 차리고 있다가 이내 정신을 차리고는 얼굴이 벌개져서는 유유히 각자 갈 길을 갔다는 이야기다. 할아버지는 현명했다. 그는 싸움이 무의미한 것이라고 판단하고, 재치 있게 사건을 매듭지었다. 요즘 이런 이야기가 통용될까. 모두 마을이 없어지면서 같이 그 자취를 감춘 이야기들이다.

전에 마을과 공동체에 대해 얘기한 적이 있다. 공동체는 구성원들에게 공통분모가 있어 비슷한 사람들끼리 모인 것이고, 그래서 공동체가 안 맞는다고 생각하면 나가거나, 혹은 공동체로부터 추방당할 수 있다. 다른 공동체를 찾아가면 그 뿐이기에 별 문제가 안 된다. 그러나 마을은 약간 다르다. 마을은 내가 살고 있는 곳, 여러 부류의 사람이 공존하는 곳, 다양성이 인정되는 곳이다. 그래서 이 마을을 나가면 더는 갈 곳이 없게 된다. 그러나 요즘엔 이 마을이란 개념이 유야무야 되어버리고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나도 마을에서 사람을 만나도 모르는 사람이 너무 많다. 그리고 인사하기가 어렵다. 오히려 인사하면 이상한 사람 취급받게 된다. 홍콩에서 온 호사는 모르는 사람을 만나도 지칠 줄 모르고 말해대는데 무슨 말을 하는지 참 궁금하다. 호사는 원래 말이 많은 성격이라 치고, 나도 나 나름대로 사람들에게 문을 열어둘 수 있을 텐데도 그게 쉽지가 않다. 어렸을 때 살던 아파트에서는 관리실을 지나갈 때마다 할아버지한테 인사도 잘 하고 해서 사탕도 받거나 했는데 말이다.

평화워크숍을 진행하면서 가장 어렵다고 느낀 점은 바로 일상에의 적용이다. 우리 마을에서는 강 너머 바로 북한이 보인다. 그러나 아무리 철창이 쳐져있고 군인들이 곳곳에 보초를 서고 있어도 별 실감이 안 난다. 그야 처음 이사 왔을 땐 북한에서 쳐들어오면 어쩌나 하는 불안도 있었지만 얼마쯤 지내다보니 어쩌다 라디오에서 북한 방송이 나와도 웃음만 나온다. 한반도가 분단되면서 이산가족이 생겨나고, 텔레비전에서도 서로 만나는 장면이 몇 번 보이긴 했지만 그다지 와 닿지 않았다. 한반도가 통일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는 있지만 막연한 생각뿐이다. 구체적으로 뭘 해볼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개중에는 남북이 통일되면 경제적으로 많이 어려워질 거라며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다.

평화워크숍의 처음과 마지막을 맡아주신 이마까라 상은 어깨동무라는 북녘의 아이들을 위해 여러 가지 원조 사업을 하는 단체에서 일하고 있다. 필기구를 만들기 위한 공장을 세운다거나, 굶주리는 아이들을 위해 두유를 조달한다거나, 큰 소아과병동을 짓는다거나하는 일을 하는 단체라고 한다. 이마까라 상은 그래도 꽤 구체적인 일을 하고 계신 것 같다고 생각한다. 이마까라 상이 이런 일을 하게 된 계기는 우연히 만나게 된 3명의 고등학생에게 있다고 한다. 북한에 쌀을 조달하는 활동에 참가했을 때, 고등학생 3명을 만났다고 한다. 이마까라 상은 힘들어서 슬렁슬렁 가고 있는데 갑자기 그 고등학생들은 숨이 차서 씩씩대면서도 더욱더 서둘렀다고 한다. 쌀을 빨리 옮긴다고 그만큼 북한 아이들에게 그 쌀이 빨리 전달되는 것도 아닐 텐데 말이다. 별 일 아닌 것 같은데도 이마까라 상은 거기서 뭔가를 느낀 것이다. 그리고 그게 지금의 이마까라 상을 있게 한 원동력이 되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뭘까,’하고 고민한 후 행동하려하면 영원히 못 할지도 모른다고 이마까라 상은 말했다. 중요한 건 먼저 평범한 일상에서부터 평화를 찾아야봐야 한다는 것이다. 세상에 사소한 평화, 거창한 평화가 어디 있겠는가. 우선 나부터 평화롭고 나서야 비로소 다른 사람에게도 평화를 얘기 할 수 있는 것이다.

난 어떨까. 가족과는 평화로운가. 서로 이해하고 공감하려 하는가. 가족이란 어떤 것이지.

우리는 같은 민족이니까 당연히 통일되어야 한다는 생각도 있다. 그러나 그렇게만 봐도 되는 것일까. 중요한 건 통일일까. 나에게 한반도 통일이란 너무나도 막연하다. 이마까라 상은 통일은 되도록 천천히 되었으면 한다고 한다. 난 지금까지 빨리 통일이 되어야 한다고만 생각했는데 막연한 생각에서 나온 조급함이었던 것 같다. 통일이란 차근차근 서로를 알아가고 여기저기 조율 해가며 자연스레 이뤄져야 하는 것이지, 그것 자체가 목표가 되어서는 곤란하다. 이마까라 상과 어깨동무는 통일이 되기 전에 꼭 해야 할 일들, 꼭 필요한 조건들을 채워나가고 있었다. 다음 세대를 이어갈 아이들. 우리와 같은 시대를 만들어갈 아이들. 그 아이들과 우리가 서로 만나도 어렵지 않게 손을 흔들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일제 강점기 때 억지로 끌려가 성노예로 살 수밖에 없었던 위안부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일본은 우리나라를 속국으로 지니면서 참 몹쓸 짓을 많이 했다. 다시 말해 식민지에 대한 예우를 안 지켰다. 일본은 끊임없이 전쟁을 하려했고, 그러기엔 자원이 더 필요했다. 일본은 우리나라로부터 그 자원을 얻었다. 전쟁에 지친 군사들에게는 위안거리가 필요했다. 그래서 우리나라 처녀들을 데려다 위안부라 이름 붙인 곳도 만들었다. 일본은 이 사실을 외면하려 애쓴다. 당시 가해자 군인 중 나카무라라는 사람은 상황이 어쩔 수 없었다고 한다. 다른 사람 다 하는데 나만 안 할 순 없었다고. 아마 이지메 비슷한 걸 우려했나보다. 어쩌면 정말 별 수 없었을지 모른다. 설령 나카무라가 기어코 그걸 하지 않았다손 치더라도 이미 끌려온 여자들에게 다른 상황이 전개 될 거라곤 생각하기 어렵다. 그럼 책임은 일단 국가로 넘어가게 된다. 즉, 일본으로. 그러나 일본은 휘휘 돌며 결정적으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진 않는다. 그렇다는 것은 또다시 같은 상황이 벌어졌을 때 일본은 충분히 똑같은 만행을 되풀이 할 수 있다는 것을 시사해준다. 나카무라의 경우도 그렇다. 설령 어쩔 수 없었다 하더라도 사죄정도는 진심으로 해야 하지 않을까싶다. 만약 그들의 딸, 손녀들이 그런 일을 당해도 태연히 있을 수 있을까.

하자작업장학교에서는 크리킨디라는 세상에서 가장 작은 벌새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어느 날 숲에 불이 났다. 불은 무서운 기세로 번지고 동물들은 서둘러 도망가기 바쁘다. 그 때 한 마리의 작은 벌새가 그 작은 주둥아리로 물을 한 방울 두 방울 옮겨 불을 끄려하고 있는 것이다. 어딘가 물가가 있는지 끊임없이 나른다.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다. 다음 이야기는 우리의 몫이다. 그 작은 새가 그 작은 부리로 한 방울 두 방울 물을 뿌려서 숲의 불이 꺼질 거라고는 도저히 생각되지 않는다. 다른 동물들도 같이 불을 끄는 데에 동참한다거나, 혹은 기적적으로 비라도 내리지 않으면 숲의 불은 더 이상 태울 것이 없을 때까지 꺼지지 않을 것이다. 지금 우리는 이야기 속의 크리킨디와도 같은 상황에 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는 것. 우리가 이 숲을 떠나서는 살 수 없을 때, 우리는 숲을 지켜야만 한다. 그게 아무리 보잘 것 없고 무모한 짓이라 하더라도 우선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어쩌면 도망가던 동물들이 도와줄 지도 모른다. 혹은 때마침 지나던 비구름이 손을 빌려줄 지도 모를 일이다.

난 솔직히 아직 우리가 지켜야 할 숲이 정확히 무엇이고, 그 숲에 불이 났는지 안 났는지, 혹은 호수가 어디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내가 여기에 계속 있어도 좋을지 조심스럽다.

원래 있던 7명과 새로 들어온 8명으로 모두 15명이 하자 시즌2의 시작을 알렸다. 그러나 한 명,두 명 나가더니 어느새 새로 들어온 사람은 3명밖에 남지 않았다. 자네, 날개, 빈, 너울, 율리아, 영환. 각자가 가는 길이 다르다는 것을 알고는 있지만 그래도 널러해 진 교실을 보고 있자면 쓸쓸해진다.

 

なにかが まちがって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