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디오하자 인턴 보고서 (2001. 6. 16 / 원, 디제이, 19세)
 
차례 》》제의 / 준비과정1 / 준비과정 2 / 오픈 / 중단 / 디제이핑크스파이터 / 핑크스파이더의 슬램

--------------------------------------------------------------------------------

제의:
양양과 놀기 위해 (당시) 정보국에 들어갔다. 거기서 인터넷 라디오 방송국에 대한 초기 기획서를 우연히 보게 되었다. 디제이에 내 이름이 들어간 것을 보고 양양에게 이것은 나를 가리키는 것이냐고 물었는데 양양은 그저 웃기만 할뿐 정확한 대답을 피하려는 것 같았다. 그 태도를 통해 나를 가리키는 것이 맞지만 내게 말하기 전에 무척 조심하려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나도 더 이상 묻지 않고 내게 정식으로 어떤 이야기가 전해지기를 기다렸다.

얼마 후, 나는 205호에 초대되었다. 그 방에는 기획부장 종휘, (당시) 대중음악 판돌이었던 고기, (당시) 정보기획팀의 양양, 꼴레지오의 판돌이면서 내 담당 판돌이기도 한 히옥스가 있었다. 그들은 나에게 인터넷 라디오 방송국의 개요를 설명하고 나에게 정식으로 메인 디제이의 자리를 제안했던 것 같다. 하지만 사실 잘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내가 뚜렷이 기억하고 있는 부분은 나에게 디제이를 맡기려는 방송에 관한 것인데, "사쿼터"라는 낯선 제목아래 장르가 다른 네 명의 뮤지션들과 내가 10분씩 얘기를 나눈다는 컨셉이었다. 그들은 내가 방송을 통해 나의 얘기를 들려주기를 원했다. 나중에 양양에게 센터의 아이들 중에서 내가 선택된 과정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건 다음과 같다.

센터장 조한네 집.
양양, 종휘, 고기, 조한 등등이 모여 "창업 프로젝트"에 관한(그러나 이때의 명칭이 정확히 "창업 프로젝트"였는지는 모르겠다) 회의를 했다. 대중 음악방에서 뻗어나갈 수 있는 창업으로 인터넷 라디오 방송국이라는 컨셉이 나왔다. 대중방은 이 때 이미 인터넷 피에스타를 위한 라디오 방송 "귀막지마"를 해본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기본 컨셉은 아무래도 하자센터가 기구한(?) 스토리를 가진 아이들이 많은 곳이다 보니 자기 이야기를 풀어내는 방송 쪽으로 모아졌다. 센터 안의 아이들 중에서 이 컨셉에 적당한 사람을 찾다가 양양의 추천으로 내 이야기가 나왔다고 한다. 그 때 내가 추천된 이유가 될 만한 것들을 찾아보면, 일단 나는 센터의 첫 학생(?)이었고 덕분에 그 때 상황에선 다른 아이들보다 많은 언론과의 인터뷰 경험(자퇴와 센터에서의 생활에 관한)을 갖고 있었다. (참고로 일년이 지난 요즘에도 언론의 인터뷰하는 모양새를 보면 그때 나에게 했던 질문에서 한 발짝도 나아진 게 없다) 그리고 연대 청년 문화 센터와 한겨레 출판사에서 공동 기획한 "10대, 그곳에 가고 싶다"라는 프로젝트에 참가하고 있었으며 "사이버 유스"(www.cyberyouth.org)라는 청소년 웹진의 "우리섹스" 게시판 담당자였다. (당시) 하자센터 안에서의 위치를 생각해보면 일단 영상 디자인 작업장 죽돌이였고 꼴레지오 스텝이었다. 내 생각에 가장 결정적이었던 건 굉장히 자전적인 이야기로 채워졌던 원고지 70매 분량의 "학교는 늙은 아버지 같다"라는 글을 그 무렵에 완성했기 때문인 거 같다. 이것은 계간지 "당대비평"의 청탁으로 쓰여진 것이었다.

아무튼 그러저러한 이유로 나를 메인 디제이로 쓰는 것이 적합하다는 결론이 나왔고, 프로그램에 대한 꽤나 구체적인 아이디어와 디제이로서 지켜야할 계약조건이 첨부된 기획서를 가지고 나를 불렀다. 따라서 내가 제안을 받았을 때는 어느 정도 윤곽이 잡혀있는 상태였다. 우리 팀의 엔지니어로 일하고 있는 제리의 글을 읽어본 사람이 있다면 이상하게 생각해볼 대목이 바로 여기다. 전부터 대중 음악 작업장에서 일해왔던 제리의 경우, 고기모씨가 전화를 걸어 "재식아 니가 인터넷 방송국 엔지니어 좀 해야겠다"라는 한마디로 내가 겪었던 이 모든 섭외의 과정을 결정했다고 한다. 여기에 대한 내 담당 판돌 히옥스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나를 메인 디제이로 쓰기로 결정했던 판돌들(종휘, 고기, 양양..?)은 먼저 히옥스에게 찾아가 설명했다. 그에 대한 히옥스의 의견은 "자기 얘기를 풀어놓는 10대" 포지션으로 접근하는 일이기에 나에게 위험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자신의 이야기를 다 풀어내놓고 나서, 더 이상 들려줄 새로운 이야기가 없게 되면 더 이상 누구도 나의 이야기를 들으려 하지 않을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다. 그러니까 히옥스는 그 무렵의 내가 내 안으로 내공을 쌓을 때지 다 퍼줄 때가 아니라는 생각이었던 거 같다.(하긴 이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이렇게 담당 판돌인 히옥스가 반대하고 나서자 휘, 고기, 양양은 나를 직접 설득하자. 쪽으로 분위기가 몰아졌고 그래서 나에게 그토록 정식으로 이야기를 꺼냈던 것이다. 생각해보니 이 때의 하자는 정말 이랬다. 와.. 감개가 무량하다. 하자의 죽돌이들은 정말 많이 성장했나보다. 

아무튼. 제안을 받는 자리 내내 나는 내가 (어른)판돌이들과 일을 한다는 것에 대한 떨림과 두려움, 선택받았다는 얄량한 기분 좋음, 이 상황에 똑똑하고 의젓하게 대처해야 한다는 강박, 디제이라는, 심심할 때 한번 해보는 상상 속에서도 계산에 없었던 일에 대한 호기심과 걱정이 뒤섞인 잡탕 속에서, 한마디로 제정신이 아니었다.(세상에.. 이때는 정말 이랬다!!)

그 짬뽕같았던 자리를 벗어난 후 나를 둘러싼 고민의 초점은, '아직은 너를 그런 식으로 드러낼 때가 아니며 안으로 쌓아야 할 때다'라는 의견과 '이 경험자체가 배움이며 안으로 쌓는 작업일 수 있다'라는 의견의 대립이었다. 나도 고민 비슷한 것을 해보긴 했다. 하지만 그때 나를 감쌌던 흥분의 길을 내가 걷지 않으면 웬지 평생 후회할 것 같은, 더 솔직하게 말하면 나에게 올 수 있었던 그 자리에 다른 사람이 앉아 잘 나가는 꼴을 보면 속이 쓰릴 것 같은 그런 기분에 그냥 하기로 했다. 나의 이런 성향은 요즘엔 많이 고쳐졌다. 제안이 왔어도, 그때 같이 그런 기분에 확 해버리지는 않는 것 같다. 하고 싶은 마음이나 기분과는 별개로 내 스케줄이나 일하는 능력따위를 고려해서 거절하는 일이 많아졌다. 이게 말은 쉽지만 실제로 그렇게 하는 것은 정말 다르다는 것은 기억해 달라.

준비 1:
고기는 나에게 사이트 디자인이며 방송 내용이며 하여간 이것저것에 대해서 많이 생각해보라고 말했다. 그리고 센터 안에서 이루어진 각종 라디오 하자 회의에 함께 참석했다. 이 무렵 강하게 기억에 남는 두가지 회의가 있는데 하나는 (당시) 정보국에서 이루어진 회의였다. 이 회의에서는 라디오 하자의 기본 틀을 정했는데 양양과 겅민의 활약이 컸다. 특히 양양의 4쿼터에 대한 제안은 획기적이었다. 4쿼터는 라디오 하자의 메인 프로그램의 이름으로서 4쿼터의 디제이는 정기적으로 바뀐다. 4쿼터 외에 존재하는 다른 프로그램들에서 각각의 디제이들이 많은 인기를 얻고 인정을 받으면 4쿼터의 디제이가 되는, 일종의 왕중왕 선발대회같은 형식이었다. 디제이들마다의 개성을 맛 볼 수 있으면서 은근한 긴장감도 함께 가져갈 수 있다는 것이 이 시스템의 장점이었다. 반면 이 부분에서 조심해야 했던 것은 누구 맘대로 그 인기와 인정을 결정하느냐.하는 것이었다. 똑같이 디제이로 일하는데 왜 4쿼터의 디제이는 돈을 받고 다른 디제이들은 그렇지 못하는지, 왜 메인 디제이라고 불러주지 않는 것인지에 대한 설명이 충분했어야 했고 모두의 공감 속에서 출발했어야 했다. 하지만 이 작업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고 이 점은 나중에 가서 고기의 불찰이었던 것으로 정리해버렸지만 내게도 여전히 찜찜한 부분이다. 일하는 내내 (내가 듣지 않는 곳에서) 이 불만은 계속 터져나왔고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 고기는 나중에 가서 그럼 돈을 주겠다. 이런 식의 대응을 했던 것 같다.(게다가 이 얘기가 이뤄질 때 나는 그 자리에 있지도 않았다.) 여기서부터 조짐을 보이던 '소통의 부재'로 우리는 오랫동안 꽤나 고생을 해야 했다.

인상깊었던 두 번째 회의는 시각방에서 이루어졌다. 사이트 디자인에 관한 것이었는데 나는 이때도 뭐가 뭔지 잘 이해를 못하고 있었던 것 같다. 대충 디자인은 활이 하고 웹 작업장에서 만든다는 것이라고 생각했나보다. 하지만 결국에 가서는 창재씨가 디자인을 했는데? 움.. 지금도 잘 모름. 이 회의가 인상깊었던 이유는 오로지 이 날 처음 모든 디제이들과 엔지니어가 다 모여서 얘기를 했기 때문이다. 좀 유감스러운 것은 다 모여 회의를 했던 이유가 이 날 한겨레 신문사와 인터뷰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지만. 나중에 들은 말로는 내가 디제이를 하겠다고 말한 이후에도 107호에서 주로 노는 것을 맘에 걸려하던 고기는 나의 디제이에 대한 각오에 의심을 품고 있었는데 이 날 내가 한겨레 기자에게 말하는 것을 듣고 안심과 믿음을 가졌다고 한다. 이것은 내가 라디오 하자를 하던 동안 가장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던 부분이다. 고기와 히옥도 나름대로 마음 고생이 있었으리라.. 맘 써주는 척 해보지만 사실 이때는 내가 너무 힘들어서 남 돌볼 여유 없었음. 예를 들면 고기의 불만은 왜 내가 밥을 304호에서 고기와 먹지 않느냐 하는 것이었다. 게다가 고기는 이 말을 니 밥은 내가 산다.는 식으로 했단 말이오!! 물론 밥을 함께 먹는 커뮤니티의 중요성과 결속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다. 그 당시에도 고기의 우려에 대해서 인정하고 있었고 내가 빨리 적응하지 못한 탓도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고기나 제리, 무린씨와 함께 밥을 먹을 때마다 내가 돈을 내지 않게 되는 것이 나에게는 또 부담이었다. 경제력은 인간관계에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 내가 누군가에게 밥을 얻어먹는 사이로 정해지는 순간, 그 누군가에 대한 나의 발언권과 위치 또한 밥을 얻어먹는 사이가 되는 것이다. 아무튼 밥을 304호에서 먹는 문제로 대표되는 나의 친밀도에 대한 의심은 내가 304호에서 일하는 것에 고통을 앉어준 또 하나의 이유가 되었다.

이쯤에서 나무린씨를 이야기해야 할까. 이 사람의 원래 역할은 사이트 디자인이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첫 미팅을 할 때 나무린씨는 느끼한 목소리로 전 나무린이고요, 지금은 라디오 하자 사이트를 위한 벤치마킹을 하고 있습니다. 라고 말했다. 무린씨의 가장 큰 문제는 라디오 하자가 오픈을 하는 그 날까지 혼자서 벤치마킹을 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한마디로 한 일이 없다고나 할까. 세상엔 놀라운 사람이 참 많다. 결국 고기가 나무린씨에게 화를 냈고 싸우다가 나갔는데 이 과정이 너무 불투명했다는 것도 나중에 가서 문제가 되었다.

사이트 디자인에 대해서 내가 내놓은 의견은 영화 '벨벳 골드마인' 분위기로 했으면 좋겠어요.였지만 그 말을 듣고 나온 시안은 아인슈타인의 공책에 자주색을 칠해놓은 것 같은 분위기였다. 그래서 결국은 고기가 내놓은 의견, 구형 라디오의 모양을 딴 심플한 느낌으로 가게 되었다. 이 일차 시안에 관해 웹 작업장에서 회의를 했었는데 나는 이 때 창재씨의 무서움을 처음 알았다. 고기가 몇 가지를 지적했더니 그걸 고치려면 내가 몇 시간을 고생해야 하는 줄 아냐며 웹 디자인에 대한 강의를 했다. 게다가 그 때 창재씨는 소매없는 티를 입고 있었다. 무시무시한 팔뚝을 흔들며 목소리는 또 얼마나 큰지 세상에 이런 사람이 다 있나, 싶었다. 나는 그냥 쫄아서 가만 있었는데 고기는 화가 무지하게 났지만 같이 소리 지르지 않고 매끄럽게 잘 넘겼다. 그때처럼 고기가 훌륭하게 보인 적이 없었다. 가장 슬픈 것은 결국 창재씨는 몇 시간 동안 고생하지 않았고 덕분에 그 디자인은 초안에서 전혀 수정되지 못한 채 지금까지 남아있다는 점이다.

준비 2:
이런 우여곡절을 겪으며 어찌됐건 라디오 하자가 일차적인 세팅을 마쳐가는 동안 나는 디제이로서의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일단 녹음실에서 첫 시험방송을 했는데 나름대로 멋있는 척 한다고 스크립트 없이 몇 줄의 간단한 메모와 즐겨듣던 노래 시디를 주섬주섬 챙겨서 녹음실에 들어갔다. 헤드셋을 끼고 이제 말을 하는 순간이 왔는데 어떤 느낌이었냐면, 이건 딱, 맨날 컴컴한 방 안에 앉아 고무판 두드리다가 처음 드럼 세트에 앉을 때의 느낌이랄까.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래도 어찌어찌 모기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방송을 끝냈는데 고기는 어쩌면 그래도 엔쥐 내지 않고 한번에 가냐며 칭찬해주었다. 그러고보니 나도 그것이 신기했는데 나중에 방송을 여러 번 하고 보니 내가 원래 엔쥐를 잘 안 내는 스타일이었던 것일 뿐. 아무튼 나의 첫 방송은 게시판에 공개되어 사람들이 다 듣고 뭔가 말을 해주었다. 발음이 왜 그러냐, 재미없다, 어색하다, 더 막 해봐라, 이런 식으로 할 말 다하다가 끝에 가서 꼭 한 마디, 곡 선정은 좋았다.

첫 시험 방송 이후 고기는 나에게 매일매일 방송을 할 것을 권했다. 이것은 나에게 상당히 도움이 되었다. 나는 다음날 방송부터 당장 스크립트를 쓰기 시작했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스크립트는 좋은데 읽는 내가 너무 어색하다는 의견이 빗발쳤다. 뭐 반응이야 어떻든 나는 방송을 하면서부터는 즐거워했던 것 같다. 가장 멋졌던 것은 그 무렵에 내가 아이덱에 참가하러 일본에 일주일정도 가게 되었는데 이 기간의 나에게 고기가 md를 쥐어준 것이었다. 소리를 채집해오라는 것이었다. 인터뷰도 좋고 길가에서 들려오는 음악도 좋고 아무튼 소리를 담아와서 방송을 하라는 것. 나는 md를 일본에 가기 전 급하게 끝내야 했던 변영주 감독의 인터뷰(당시 내가 스텝으로 일했던 십만원 비디오 페스티발의 매뉴얼에 싣기 위한)를 하는데에 시험삼아 사용했다. 처음 md를 사용해서 했던 인터뷰도, 일본에서 했던 소리 채집도 나에겐 아주 재미있었다. 음.. 그리운 시절이여.

md로 소리를 채집하자는 아이디어는 나중에 인터뷰 쇼로까지 발전했다. 덕분에 잘 하지도 못하는 인터뷰가 내 전문인양 인식된 면이 있었고 그 해 여름, 유스 페스티발 때도 몰려온 외국 밴드의 인터뷰 요원으로 열심히 뛰어다녔다.(하지만 인터뷰 내용은 별로 재미없었다.)

오픈:
오픈을 했다. 모든 일이 바쁘게 돌아갔다. 엔지니어 제리는 죽어가고 있었다. 나도 하루종일 스크립트를 쓰고 미친 듯이 녹음을 했다. 간간이 언론의 인터뷰도 성심껏 해주면서. 수도 없이 내 방송의 인터뷰 할 사람들을 찾아 헤매면서. 하지만 라디오 하자팀은 점점 지쳐가고 있었다. 사실 너무너무 힘들었다. 그러면서도 한심하게 내가 지금 왜 이렇게 힘든 건지 알지 못했다. 자기 목소리에 대한 어색함이 사라질 무렵의 우리들(디제이들)에게 필요했던 건 매일매일 혼자 스크립트를 쓰고 녹음을 계속해대는 것이라기 보다는 각자의 방송에 대해 서로 이야기 나누며 한 번 더 업그레이드하는 경험을 갖는 것이었다. 하지만 우리 사이의 의사소통은 절망적인 수준이었고 아무도 나를 도와주지 않는 느낌에 빠졌다. 어느 순간 우리에게는 작가, 우리의 스크립트를 대신 써주는 작가가 아니라 우리와 대화를 할 작가가 필요해요!라고 외쳐댔지만 일은 답답하게 돌아가기만 했다. 고기는 분명 라디오 하자에 애정이 있었고 어떤 부분에서 능력을 발휘했다. 하지만 라디오 하자에서 일하는 여러 사람 사이의 소통의 공간을 만드는 것이나 상황에 맞는 대처를 하는 순발력 부분에서 아쉬웠다. 라디오 하자에 있어 고기가 책임져야 하는 부분은 이것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또 하나, 이 중요한 일들이 한 명의 판돌에게 달려있게 했다는 점에서 하자의 시스템에도 실수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앞에 기록한 내가 메일 디제이가 된 과정에도 드러나 있지만 확실히 이 무렵의 일 진행 방식은 판돌이 기획하고 죽돌이 따르며 배우는 방식이었다.

외부적으로 봤을 때도 라디오 하자의 운영은 답답하게 느껴지는 부분이 있었다. 일단 오픈을 했으면서도 제때 업데이트가 되지 않았다. 엔지니어 제리는 며칠 밤을 새워가며 일을 했지만 당시 웹마스터였던 친구(이름이 생각 안남)가 시험이라는 이유로 펑크를 내기 시작했던 것. 또한 방송이외의 부가적인 꼭지들, 틴즈 차트라든가 뮤직 뉴스 같은 부분은 아이디어를 냈던 겅민이 미국을 가버리면서 한 순간에 정지되고 말았다. 겅민이 소개시켜 주었던 힙합 디제이들도 그녀가 떠나자 하루아침에 제때 모이기도 힘든 오합지졸이 되고 말았다. 상황이 이러한데 적극적인 홍보란 생각할 수 없었고 따라서 청취자가 생기지 않아 반응이 느껴지지 않는 것도 디제이들의 힘을 뺐다. 나중에 내가 엠비시 스페셜에 나가고 나서 엉뚱하게 옛날 내 방송을 듣고 업데이트는 언제 하냐는 둥의 반응이 있었을 뿐.

중단:
라디오 하자는 결국 중단되었다. 고기는 하자를 떠났다. 이 폭탄 맞은 상황 속에서도 해놓은 약속은 있어서 라디오 하자팀은 신촌 거리 축제에 참가하게 되었다. 우리는 피시방 프로젝트를 맡았는데 어두운 느낌의 신촌 피시방에서 공연도 하고 실시간 방송도 해보자는 컨셉이었다. 고기가 떠났으니 졸지에 내가 담당자가 되어 여러 가지 일을 하게 되었는데 처음에는 빵빵한 예산이 마련된 듯, 기획만 좋으면 다 해준다는 식으로 큰소리 뻥뻥이더니 결국 돈도 없고 상황도 안 좋아서 매우 열악한 환경에서 진행하게 되었다. 당연히 신촌팀하고는 사이가 좋을 리 없었지만 우리끼리는 무척 재미있었다. 피시방 프로젝트의 가장 큰 성과는 고기가 떠난 상황에서 내가 담당자를 만나 여러 가지 딜을 직접 했고 다른 디제이들을 불러 모아 회의를 주재하는 일도 하기 시작했다는 점, 그리고 처음으로 라디오 하자의 10대들이 서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는 점에 있다.

프로젝트가 끝나고 이 일을 하면서 만나게 된 강민정 작가와 종휘와 제리와 나는 새로운 인터넷 방송 만들기에 착수했다. 우리는 서로 이야기를 많이 했다. 하지만 라디오 하자의 상처가 남아서인지 방송을 띄우자!에 모두 혈안이 되어있었다. 전략적인 아이디어가 많이 나왔다. 그 아이디어에 따르면 나는 수많은 십대들의 섹스 이야기를 들어주며 싸가지 없는 발언을 서슴치 않는, 10대 섹스 퀸이 되어야 했다. 처음에는 나도 눈이 뒤집혀 못 할 것 없지, 생각했으나 회의를 마치고 집에 돌아가 곰곰히 생각해 볼 때마다 그건 내가 원하는게 아니라는 결론만이 뚜렷해졌다. 나는 그냥 내 방송이 하고 싶었다. 자퇴한 이야기를 줄줄이 늘어놓는 하자의 10대로서도 아니고, 10대 섹스 대마왕으로서도 아닌, 내가 멋지다고 생각하는 음악을 틀고 가끔 슬램도 한번씩 해주면서 스컹크 애넌시의 한국 공연을 추진하자는 소리나 늘어놓는 진짜 내맘대로 디제이가 되고 싶었다. 너무나 탈진해버린 상황에서 나 못하겠어요.. 해버렸고 그것으로 우리의 계획은 완전히 중단되었다.

디제이:
그 후로 나는 엉망이었다. 해는 바뀌고 하자가 한 살이 되어간다고 난리들인데, 나는 죽고만 싶었다. 하자와 함께 한, 내 인생에 유일하게 의미있다고 생각했던 나의 지난 일 년이 모두 실패했다는, 실패하고 있다는 느낌에 시달렸다. 터덜터덜 107호로 돌아온 나에게 '나는 니가 상업적으로 너무 떠서 고갈되버릴까봐 걱정했지 이렇게 말도 한마디 제대로 못해보고 그만두게 될 줄은 몰랐다'고 말하는 꽤나 화가 난 듯한 히옥스 앞에서 말도 안 나오고, 내가 왜 이렇게 되었나를 생각할 수도 없고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나를 되짚을 수도 없게 되버린 채, 누군가를 원망해야 할까를 생각하던 도중 그냥 정말 죽고만 싶었다.

결국 지독한 어느 밤, 히옥스와 양양 앞에서 닭똥같은 눈물을 줄줄 흘리며 나는 이제 다 그만두고 엄마에게 돌아가 농사나 지을라요~했는데. 양양은 전염 효과인지(하품같이) 괜히 눈물을 한 방울 흘리더니 이건 눈물이 아니야, 분비물이야.라는 말을 남겼고, 히옥스는 그건 정말 최악이잖아. 잠깐 회의하고 올테니까 집에 가지 말고 기다리렴.이라는 말을 남겼다. 그러더니 회의를 하고 돌아와서는 내가 하자는 대로 할거니? 묻기에 끄덕끄덕. 그러면 내가 너의 어시가 될 테니 하자 일년 생일 파티를 맡아서 하려무나.라고 말했다. 그래서 시키는대로 양양과 히옥스, 꼴레지오와 함께 하자 생일파티를 했다. 생일 파티의 이름은 <DJ SHOW:하자에게 선물을 주자>였고 나는 디제이가 되어 기획을 했고 쇼의 시작부터 끝까지 무대에 나와 절대로 들어가지 않았다. 제리는 디제이 쇼의 총연출을 맡았고 오퍼레이팅이며 뭐며 하여간 세상의 모든 일을 다했다. 행사는 성공적이었고 성공적이어야만 했다. 잘난 척 좀 더 하자면 이것으로 나와 제리는 판돌의 서포트만을 받으며 10대가 직접 기획하고 연출하는 최초의 행사를 해냈다. 더 개인적인 의미로 들어가자면 라디오 하자에 대한 한풀이를 했다.

마지막으로 온 세상에 난 디제이 핑크 스파이더야!라는 말을 소리소리 질러댔던 내 슬램의 가사를 소개한다.

난 디제이 핑크 스파이더야!

이 날을 기다려 왔어.
때로는 밤을 새우며 때로는 눈물 흘리며
때로는 벅찬 기쁨에 때로는 어쩔 줄 모르고
때로는 니 얼굴을 지우려 때로는 소리 지르며
때로는 내 귀를 쩌렁쩌렁 때로는 나를 떠나지 않는 너를
때로는 너무 사랑하며 때로 너는 진짜 웃겨서 웃는, 웃을 수 있는 유일한 공동체
때로는 너 정말 꼴도 보기 싫어 때로는 지독하게 혼자라고 느끼며
때로는 지독하게 혼자이길 바라며 때로는 남이를 울리며
그렇게 나는 이 날을 기다려 왔어. 너의 생일.
내가 너와 함께 살아가고 너를 만들어가는 방식 그대로,
그렇게 나는 너를 기다려 왔어.

니가 내 안에 자리잡은 하나의 나이길.
니가 나를 있게 하는 하나의 이유이길.
니가 내가 만들어갈 하나의 세상이 되길.
니가 나의 애인을 초대할 하나의 파티이길.
그렇게 나는 나를 준비해 왔어.

너무 많이 울었지.
니 앞에서 옷을 벗고 화장을 지워야만 할 때
방안에서 시작되고 끝나는 상상속에서
건재하던 나의 존재가 니 앞에 니 속에
모두 앞에 모두 속에 끌어져 내려야만 할 때
솔직하기란 너무 무서워
머리를 툭툭 치는 쪽팔림에 나는 그냥 울었어.

하고 싶은 게 뭔지 찾는 법을,
하고 싶은 걸 하는 법을,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하는 법을,
눈치보지 않는 법을,
궁지에 몰렸을 때 솔직해지는 법을,
나는 학교에서 배운 적이 없고,
마음을 썰렁하게 하는 101가지 비법에서도 읽은 적이 없는데,
끝도 없이 도망가도 도망가도 도망가도 나는 어디에도 갈 수 없어.

dON'T RUN AWAY! BABY! NO EXIT!
(서태지, 환상 속의 그대 섞임)"바로 지금이 그대를 위한 순간이며
바로 여기가 단지 그대를 위한 장소이다!!"
dON'T RUN AWAY! BABY! NO EXIT!

그래서 나는 이렇게 여기 서서,
너를 똑바로 쳐다보면서,
쪽팔림에 울지 않으려 애쓰면서,
너의 생일을 맞이하고 있어.

그래서 너는 이렇게 여기 서서,
나를 똑바로 쳐다보면서,
쪽팔림에 울지 않으려 애쓰면서,
나의 생일을 맞이하고 있어.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여기 서서,
우리를 똑바로 쳐다보면서,
쪽팔림에 울지 않으려 애쓰면서,
우리의 생일을 맞이하고 있어.

밝은 웃음으로만 널 맞지 못하는 날 용서해.
넘쳐흐르는 울음을 그대로 가진 채,
잠들지 못하는 머리 속을 흔들어버리지 않은 채,
우리의 지난 일년을 그대로 가지고 온 채,

나는 너를 사람처럼 느끼며,
나는 너를 나처럼 사랑하며,
시간이 생겨나고 공간이 벌어지는
그 머나먼 꿈에서 오늘 너를 본 듯이,
나는 너와 이야기하고,
너의 시중을 들고,
너의 시선을 대신 크게 외쳐주며,
나는 너를 듣지. 나는 너를 꿈꾸지.
나는 너를 말하지. 나는 너를 이루지.
나는 너를 전달하지.
나는,
DJ! pink spider!!
나는,
DJ! pink spider!!
나도 알아 나를!

..Happy birthday to haja!         

---------
Please consider the planet before printing this post

hiiocks (hiiock kim)
e. hiiocks@gmail.com
w. http://productionschool.org, http://filltong.net
t. 070-4268-9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