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가베르토프는 너무 들어 익숙한, 그러나 찾아보지 않아 어색한 사람이었다. 나는 이번 시간을 통해, '지가베르토프'를 찬양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화면 하나하나에 말을 하면서, 계속해서 하루의 시간을 이끌어 나간다. 머리가 아플수도, 너무 말해 목이 마를 수도 있는데 쉰다는 느낌없이 '파바박' 거리면서 끝까지 밀고 나간다. 그에게 있어 카메라란 '선동'의 도구 였을까, 이 좋은 것을 사람들에게 알려주고자 했던 순수한 욕심이었을까.

카메라가 나에게 어떤 의미냐, 라는 질문을 2008년 8월의 도쿄슈레에서 받았다. 그 때는 나를 돌아보게 해주는 가장 훌륭한 거울. 내가 나를 들여다보기 위해 가장 중요하고 솔직한 것이라고 답했다. 지금은? 이라고 물어본다면, 나는 어떤 대답을 할 자신이 없다. 왜 지금 들고 있냐 고 물어본다면, 들고 있었기 때문에 혹은 들려져 있었기 때문에라고 대답하게 될 것이고,  왜 들게 되었냐고 물어볼 것이다. 나는 눈 앞에 보이는 것이 그 하나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무조건 '카메라'를 집었다고 대답할 것이다.
지금 다시 집게 된다하면 나는 이것이 익숙하기 때문에 집게 될지도 모른다.

이것은 질문을 듣자마자 당황스러워진 내가 대답한 것.
질문을 머리속에서 굴려대며 생각한 지금 나는 어떻게 대답할지 보자.

카메라는 지가베르토프가 보여준 것 처럼, 또 하나의 눈이다. 내가 직접보는 것과 렌즈를 통해 한 번 걸러진 이미지를 볼 때, 그 이미지에 대해 조금 더 멀리 떨어져서 볼 수 있게 된다. 그렇게 되면 내가 보지 못했던 것들을 볼 수 있게 되고, 난 그것들을 통해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된다. 이야기 할 수 있다는 것은 어떤 것이고, 그것은 누구를 향했는가! 라는 질문이 다시 생긴다.
이야기 할 수 있다는 것은 기억할 수 있는 것이고, 남을 것이며, 전달되는 것이 아닐까. 그것은 나눌 수 있는 것이고 함께 할 수 있는 것이 될 것이고, 나의 존재는 (과연 내가 찍은 것은 나의 '사적인' 이야기 인 것일까?) 무언가 되지 않을까?

질문을 이어가다 보면 사실 어떤 답이 나오는 것은 아니다. 그 질문을 다른 질문으로 발전 (이것이 맞는지는 모르겠다.) 할 수 있다면 그것이 답이 될 수 있는 듯 하다. 즉, 저 질문에는 아직 답하지 못하겠다.

2009년에 나는 살아가고 있다. 현재 카메라를 든채, 그것도 서울에서.
내가 찍는 영상은, 오직 내 이야기로 읽히는 것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을 것이다. 배경을 볼 수 있고, 캐릭터를 볼 수 있고 그것을 만든 감독 (나)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잘 읽게 되면, 관객은 '허브'를 보는 게 아니라, 허브와 같은 사람'들'을 보게 될 수 있지 않을까?

근데
이것은 나를 보는 사람들에게나 통하는 말이고, 나에게는 어떤 의미인가? 섣불리 대답할 수가 없다. 대신 다른 질문을 해본다. 내가 이번에 찍는다는 그 '영화'는 무엇을 위한 (나or관객에게) 어떤 이야기를 담고 싶은 영화인가. 그 질문에 대해선, 아직 관객에 대해선 이야기할 수 없다. 시나리오를 쓰게 되면 자기 정리나 자기 치유가 목적으로 거의 쓰게 되서 관객은 나중에서야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나는 왜 영화를 찍을려고 하나?
매 학기마다 이 질문이 다가오는데 나는 아직 이 질문에 대해 나를 객관적으로 보게 되면서, 그 때의 내가 지금의 내가 되는 것을 보게 된다. 이 다음에 어떻게 살아야할까? 라는 질문은 있지만, 그것은 자주 떠오르지 않을 뿐더러 어떤 답을 주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그 질문에서 피하고 싶어하는 나를 보여준다. 피한다는 것을 알아 더 이상 피하고 싶지 않다. 그 전까지 나는 너무 답을 내리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질문에서 다른 질문으로 넘어가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닐까.
영화라는 매체와 그것이 생긴 배경을 아는 것도 좋지만, 그렇게 해서 생겨난 것들을 내가 어떻게 다루고 나에게 마이크를 갖다대느냐 아님 밖으로 마이크를 갖다대느냐 를 생각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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