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In Village 사북/고한 예술마을 프로젝트 Review-

Like A Rolling 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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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박 7일.

짧다면 짧았고 길면 길었던, 지금 생각해보면 강변역으로 가는 지하철 내내 차를 아슬아슬하게 놓칠까봐 마음 조렸던 날 아침이 어제같이 느껴지면서도 그 사이에는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듣고 많은 것을 봤는지….

가지고 갔던 것들.

∴ 음악들.

-개인연구과제

밥딜런을 주제로 공부하려하는 프로젝트인 만큼, 그 일주일동안 책 한권 (바람만이 아는 대답)을 읽어오려고 했다. 핑계겠지만 숙소로 돌아와 씻고, 모여서 저녁을 먹은 후 리뷰 모임을 가지고 잠드는, 분명 자투리 시간을 활용했으면 좋았겠지만 생각도 많고 피곤한 시간들이었다고 생각한다. 결국, 책은 못(안)읽었다는 소리.

-노래를 만드는 것

개인연구 과제는 그저 밥딜런의 연대기를 훑고 노래를 듣고 하는, 지식의 습득에서 그치지 않기로 했었다. 그의 삶과 노래들 속에서 내 노래와 이야기에 대해 생각해보고 ‘고민해보는 것’(이번 학기 들어서 고통스럽게 생각한다는 것은 좀 아껴두어야겠다고 다짐했지만 이것만큼은 정말 고민해야할 필요를 느꼈던 것 같다.), 그게 연구를 통해 계기 마련하고 싶었던 부부이었다. 한 달 내내 계속 진행할 계획이었으므로 정선에서도 진행하려고 했던 부분이었다. 사실 이번 정선 여행, 예술마을 프로젝트와는 별개로 생각했던 부분이 컸는데, 다녀오고 나서는 그렇지 않았다는 것을 느낀다.

-보컬 워크숍 연습용 악보들

외워야 할 노래도 있고, 익혀야 할 노래도 있어서 멤버들과 연습하기 위해 악보를 들고 갔으나 한 번도 모이지 못했다.

-공연

행진도 하고, 그곳 카페에서 파고지 공연도 하려고 악기를 모두 준비해갔다.

처음에 공연 이야기가 나왔을 때는 이 프로젝트에 ‘참여한다는’, 무언가 하나의 손길을 더한다는 마음으로 생각했던 것 기억이 난다. 그러나 이번에 했던 공연들은 개인적으로 정말 최악이었다.

∴ 옷가지들과 세면도구, MP3 플레이어와 휴대폰 충전기.

빨래할 생각이었는데 의외로 캐리어가 터지도록 짐을 챙겼고, 어쩌다보니 빨래할 필요가 없을 정도의 양이었다. 이런, 휴대폰 충전기를 두고 왔다. 이상하게 왜 양말을 그렇게 적게 챙겼지?

∴ 아무 것도.

부끄럽다, 이건.

사실 이번에 정선에 가기 직전까지도 그곳 지역에 대한 호기심, 예술마을 프로젝트에 대한 기대나 궁금증 정도도 없이 무작정 ‘체험’해보자는 식의 생각이었던 것 같은데, 어쩌면 처음부터 어떤 여행이 될 것인지 알 수 있었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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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선에 다녀왔던 경험은 굉장히 특이하면서 특별했다. Season2(아직 아닌가?)가 시작된 이래의 멤버들이 처음으로 24시간가량을 같이 지냈었고, 11월이 시작되자마자 첫눈과 함께 온 매서운 추위를 맞았으며, 처음으로 탄광마을이라는 곳을 가보게 되었고, 그 과정들에서 출발 전의 예상보다 훨씬 머리가 아픈 여행이었다.

개인연구를 가져갔다고 하는데, 처음 생각에는 숙소로 돌아온 후 짬나는 시간에 그것들을 진행시키자는- 이것은 거의 이 예술마을프로젝트와는 별개로 생각했던 것 같다.

적어도 지금 시점에서 가장 온 신경을 집중시켜야할 것은 개인연구과제인데, 그 때도 개인연구과제에 대한 고민만 머릿속을 뱅뱅 돌고 있었으니 사진 아뜰리에를 참여하며 제임스 해리스 씨와 강제욱 씨의 이야기가 잘 들어올 리 없었다.

강제욱 씨의 ‘사진으로 말할 수 있는 이야기’와 제임스 해리스 씨의 ‘구상과 현실의 이미지의 합치’ 정도만이 그나마 나한테 걸렸다.

물론 다른 사람들도 각자 자신의 진행 중인 작업들이나 현재 고민하고 있는 맥락들을 그곳에서도 이어갈 심산이었겠지만, 사실 그것에 발목 잡혀서 들어볼 수 있는 이야기에 흥미를 가지지 못하고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았던 것이 그 시간들과 그 분들에 대한 실례였던 것 같다. 적어도 ‘잘’ 듣기는 해야 하는 것이 예의인 것이다. 더 부끄러운 것은 뭐냐면, 억지로 열심히 듣고 있다는 ‘척’을 하기도 했었다는 것.

가장 빠른 속력으로 뱅뱅 돌던 문제는 노래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그저 해보지도 않고 섣불리 하는 걱정이기도 했으며, 대체 뭐부터 시작해야 하는가? 하는 막연한 어려움이기도 했다. ‘무엇을 이야기 하고 싶은가.’가 첫 번째 관문이었다.

그러다가 이틀째 오후. 오전 프로그램이 끝나고, 점심을 먹은 후 장화도 신고 윤주경 작가를 만나 ‘검은 산’에 대한 이야기도 듣고 작품 감상도 하면서 경석산에 오를 채비를 했다. 여기오기 전 그래도 조금 했던 생각이 있는데, 그것이 ‘검은 산’에 대한 것이었다.

대체 석탄 찌꺼기가 축적되어 산이라고 불릴 정도이며 심지어 나무와 풀들도 자라난다는 무더기를 내가 실제로 접했을 때 어떠한 느낌을 받을 지 궁금했었다.

그래서 하이킹 일정을 내심 고대했다.

40년, 2억년.

그나마 둘 중에 편한 느낌이 드는 쪽을 고르라면 앞쪽을 택하겠지만 40년이라는 세월.
나보다 적어도 2배 이상의 시간인지라 쉽게 느껴지지 않는다. 이날 여기까지 내 시간 약 17년을 살아온 것도 굉장히 어렵사리 오만가지 일과 감정을 겪으면서 나름 숨 가쁘게 달려온다고 한 것인데, 대체 이것의 2배 이상이라면 나는 어떻게 그 시간을 지내갈까?
동원탄좌의 광부들은 40년 동안 땅 속에서 2억~2억 5천만년을 묵어온 석탄들을 지상으로 파 날랐고, 저 검은 산은 그 40년 세월과 2억년을 동시에 반증하고 있는 가장 확실한 물리적 증거인 것이다.
그만큼 작가의 작품에서처럼 내 두 다리와 허파로 직접 맞부딪히는 느낌은 그 시간들에 대한 경이로움과 놀라움, 광부들의 노동에 비할 바는 못 되겠지만 고된 ‘날 것’, 그 자체였다.
폐광되기까지 40년의 세월동안 광부들은 2억년을 쌓아올렸고 그것은 산이 되었다.
폐광 후, 그 무더기 산의 머리 위에는 High 1의 주차장이 들어서도 이 마을에도 경제적 지역사회 발전을 위한 번영회의 결정에 따라 카지노가 유치되기도 했다.
경석산은 40년이 끝나고, 그 이후 자신의 몸 위로 풀과 나무가 자라는 것과 함께 그것들을 겪은 존재라고 생각이 들었다.
그러한 존재는 경석산 뿐만이 아니라 ‘검은 산’의 윤주경 작가가 보고자 했던, 그 산과 직접 부딪히는 광부들의 모습이기도 했을 것 같다.

동원탄좌의 건물 안으로 들어가면 마치 폐광을 맞은 당시의 시간이 그대로 멈춰서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있는 그 시간 그대로의 ‘보존’이며 연출이기도 했던 그 모습을 보면서 (광부들이 사용했던 장비에 겹겹이 묻어있는 손때들이라든지, 오랜 사용에 살짝 닳기도 한 손잡이들, 심지어 사무실에까지 뻗쳐있던 전혀 의도치 않았던 ‘검정들’, 당시 사람들의 어록) 내가 꼭 그 당시의 사람이 되어있거나, 어떤 놀라운 전지적 능력으로 그 당시를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이 ‘흔적’들을 목격하고 나서부터, 개인탐사 때에도, 그 후에도 계속 여기에만 시선이 가고 신경이 쏠렸다. 그것들을 통해 광부들의 삶을 볼 수 있다고 생각했고, 그것을 노래로 쓰고 싶었다. 그렇게 결정하고 나서 개인탐사일정은 모조리 동원탄좌와 경석산에 가는 것으로 쓰고 (카지노와 복지 아파트도 어쩌다보니 가게 되었지만.) 계속 흔적들을 보고 느끼는데에 주력했다. 그러자 계속해서 생기는 자기 질문은 ‘그들의 흔적과 삶에서 현재의 나는 무엇을 느끼고 이야기하려하는가?’였다. 정선에 있는 동안, 보고 느끼고 담는 것에 대한 입장에 대한 이야기들이 참 많이 나온 것 같다. 하지만 그 때마다 내가 이야기하는 입장이라는 것은 어떤 사실에 대해 내가 받아들이고 이야기하는데 누군가의 허락을 받아야할 것 같다는 기분을 말한 것에 지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내 입장은 그것들을 ‘이해’하는, 내 주관을 가지는 것이었을 텐데 말이다.

-Life On Edge, 진짜를 본다는 것.

윤주경 작가에게 물었다.
‘동원탄좌와 경석산, 이 흔적들을 보시고 무엇을 느끼셔서 작업하신 건가요?’

답답했다. ‘끌리는’ 흔적들에게서는 나를 이야기하게 하고자하는 것들을 찾아내지 못했으며, 무엇을 , 그리고 왜 이야기하려는지 스스로도 확실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한걸음, 한걸음만 더 가면 되는데 자꾸 그 위치를 뱅뱅 도는 듯 허무하기도 했었다.

윤주경 작가와의 인터뷰에서 나는 물었다. 무엇을 본 거냐고.
검은 산을 이야기한 것은 ‘왜’인지.
그 분의 대답은 ‘진짜를 보았다.’였다.

동원탄좌에 곳곳에 스며든 검정들, 손때, 언어들과 경석산. 그곳에서 있는 힘을 다해 살았던 광부들의 ‘흔적 그 자체’. 흔적이란 것은 의도와는 전혀 상관없는 것이다. 화장실 불을 키고 들어가려고 스위치를 보면 어느새 스위치 주변 벽지가 손때로 얼룩져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것과 같은 것이라 생각했다. 그들은 그들의 삶을 살았고, 내가 보고 있는 조금 닳은 손잡이들이나 검정들은 그저 자연스레 남겨진 삶의 자국이라고.

내가 동원탄좌와 경석산을 돌며 보고 빠졌던 것들. 그것들에는 광부들이 직접 몸을 부딪쳐 온 세월과 장소가 있었고 그 흔적들이 말하는 사실들에 난 귀 기울였던 것이다.

흔히들 막장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곤 하는데, 더 이상 갈 데도 없이 황당하거나 엽기적인 것을 표현하려는 의미로 사용하고 있고, 나도 그랬다. 완전 막장이라고. 하지만 광부들에게 있어서 막장이란 단어는 내가 생각하는 것 이상의 의미였다. 돈을 벌기 위해서 탄광을 찾아와 탄광 갱도의 끝, 어두컴컴한 땅 속에서 사고의 위험을 무릅쓰며 고된 노동을 겪는, 막장이란 그들의 일터이자 삶터였던 것이다. 모여든 이들은 자기 나름대로의 사연들이 있었을 것이다. 동원탄좌에 갔었을 때 가장 눈에 띈 것임과 동시에 나를 마치 그 시대의 사람인양 착각하게 한 것은 광부들과 주변 사람들의 어록과 문구였다. 무사고, 안전을 항상 기원해야만 했었던 사람들의 언어를 보게 되면서 고되고 위험한, 거칠게 살아갔던 막장에서의 삶에 대해 어떠한 말을 해줄 수 있을지.

-폐광

2004년 이후로 40년간 석탄을 캐오던 동원탄좌와 갱도가 문을 닫았다고 한다. 석탄을 연료로 사용해 오다가 석유의 시대로 접어들면서 석탄은 전보다 많이 필요하지 않게 되었고, 그 때문에 동원탄좌는 폐광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놓고 본다면 광부 역사는 40년 정도인 셈이다. 그 사이에 경석산도 저렇게 거대하게 쌓이고, 동원탄좌와 복지 아파트 벽면의 검정들도 조금씩 조금씩 묻어져왔겠지.

4일째 되는 날 오후, 동원탄좌에 갔다가 그 쪽 관리인으로 보이시는 분과 이야기했었다.
사북사태에 대해 여쭈려고 했던 것이었는데, 쭉 이야기하다가 그분이 동원탄좌의 사무직으로 20년간 근무하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곳에 공개되어있던 명부와 스크랩북을 통해 접한 사북사태는 광부들에게 있어서는 더욱이 비극적이고 슬픈 일이셨을 텐데 담담히 이야기해주시기에 이 곳에서 일하신 분이 아닌가 했었다.

그분에게 동원탄좌 주차장 앞에 있던 개발공사계획의 구상도 팻말에 대해 물었다. (엽이 쓴 리뷰를 보니 ‘하이원 탄광체험문화촌 개발’ 이라고 하더군.) 무슨 테마파크 개발인 것 같아 보였는데, 구상도를 보니 지금의 동원탄좌의 모습을 꽤 바꾸어야 하는 형태이기에 혹시나 염려가 되시지는 않는지 여쭈었다.
그 분은 이곳이 자신이 84년 입사해서 20년 동안 근무했던 일터인데, 되도록 그 때 모습 그대로 보존해오고 있다고 말씀하셨다. 그 일터가 그 전의 모습과는 너무나 다르게 변할 수도 있는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냐고 여쭈었더니.
‘그렇게 되는 걸 막기 위해서 우리 4명이 아직까지 여기 있는 거지.’ 라고 대답해주셨다.
이 말을 들었을 때 왠지 모르게 마음이 잔잔히 울렸던 것 같다.
폐광이 되고나서 하이원 리조트가 유치되고 광부들은 더 이상 광부가 아니게 되었다. 들은 바로는 그 분들은 도시로 나가시거나, 이 지역에 남아서 식당 등의 장사를 하시거나 또는 하이원 리조트의 직원으로 일하시고 계신다 한다.
사람에게 있어서 장소, 공간이라는 것은 어떤 존재로 남는 지 생각해보게 된다.

내가 길찾기로 들어온 지 3달쯤 되었을 때, 창의 서밋에서 주용태 과장이 발표한 청소년 창의존 개발 계획의 일환으로 제 2 유스호스텔이 하자 앞마당에 들어선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 때, 나는 창의성을 존중한다면서 운동장 없애버리고 건물 회벽이나 쳐다보면서 응달에 가려 사는 게 무슨 창의성이냐면서 혼자 화를 냈던 기억이 난다. 아마도 그것은 어느새 나에게 그새 그 공간에 대한 애정이 생겼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3개월의 시간을 보냈을 때의 내가 그런 마음이었는데, 20년 동안 동료들과 일해 오면서 온갖 일들과 함께 보내왔을 그 시간과 공간에 대한 애환을 나로서는 가늠할 수 없다.

나는 그 시대 사람이 아니다. 그럼에도 그 보존된 시간을 체험하며 마치 내가 그 시대를 살고 있기라도 한 시선을 갖는 것은 부적절했다. 현재의 자신이 당시의 어떤 시간들을 캐치해낼 것인지 생각해보라는 말이 생각난다. 지금 시간에 살고 있는 내가, 그 흔적들, 보존된 것들로 볼 수 있는 그 시간들과 그 때와 이어진 지금의 사북을 보는 것이 필요했던 것이다.

마냥 그 시간을 간접적으로 체험하고 있는 듯해서 끌렸다고 말하는 내가 무엇을 노래를 하며, 왜 노래하는지 스스로 이해하기는 아마 불가능했을 것 같다. 그렇게 해서, 나는 그 고된 광부들의 과거의 삶, 흔적, 그 때에 대한 애잔함과 현재 그리고 그곳을 지키고자 하는 사람들에 대해 노래를 만들기로 했다. 내 마음이 잔잔히 울렸던 것들에 관해서. 그들에게 건넬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닿지 못할지는 몰라도 적어도 나는 그 슬픔에 공감하고 위로를 건넬 수 있는 사람이, 뮤지션이 되고 싶은 거다.

-Like a Rolling 柴

FESTEZA의 이름이 지어지고, 그 의미를 갖게 되었을 때 나는 우리 팀과 내가 지향하는 음악의 방향이 같다고 생각했다. 물론 지금도 그 생각이고, 그게 내 음악이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Tristeza[슬픔]+festejar[축제하다]라는 두 단어가 합쳐져 의미하는 ‘슬픔을 넘어 노래하고, 축제를 여는’ 것이 Festeza의 의미였고 우리, 나의 음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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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고한시장에서의 공연은 우울했다. 연습도 제대로 되지 않았고 서로 사인sign도 맞지 않았으며 그루브와 내가 내는 악기의 소리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사실 그 날은 저녁 공연보다 낮에 있었던 정선 5일장에서 있었던 다툼 때문에 마음이 너무 좋지 않아서 악기치기가 겁이 나기도 했고 자신도 없었다.
그렇게 공연 차례가 다가왔고, 우리는 정말 ‘악기만’ 쳤다.

‘무슨 공연이었지? 왜 하는 거였지? 어떻게 했더라?’

이런 물음이 든 건 다음날이나 돼서다. 우리는 정말 눈치가 없었다. 기획자 토크에서도, 이렇게 일주일을 보내놓고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니. 이번 예술마을 프로젝트는 시범 사업이었던 데다가, 2개월간의 촉박한 준비 시간, 주민들과의 충분치 못한 교류, 소통으로 솔직히 말하면 우울한 자기 평가를 해야만 했다.

그리고 우리는 리뷰 모임에서도 어떤 주민들은 이 프로젝트의 존재 자체도 모르고 있다는 이야기를 했었고, 기획자 토크에서는 아예 직접 듣기까지 했었다. 그런데도 공연 시간이 되었으니 나와서 예정했던 레퍼토리대로 ‘그냥’ 연주했고, 그마저도 잘 안되었다.
정선 5일장에서 퀄리티에 대한 이야기도 했던 우리는 정작 고한 시장에서는 어떠한 퀄리티도 갖추지 못한 공연을 펼쳤다.
Festeza는 어떤 팀이었는지, 우리의 기본은 슬픔에 공감하고 위로하며 힘을 실어줄 수 있는, 축제를 여는 것이었는데도 전혀 우리 음악에 대한 이야기와 고민이 공연 전에 있지 않았었다는 게 충격이었다. 더군다나 공연 전에는 수루두의 스틱이 하나 빠지기도 했었으며 브레이크도 한번 더 맞춰보지 못했고, 멘트도 짜지 않았다.
자신 음악의 기본조차도 지키지 않은 나는 내 음악을 배신한 느낌마저 받았다.
그렇게 그날 밤에는 눈물이 나려던 걸 간신히 참았던 것 같다.
음악으로 이야기하고, 소통하고 판을 연다는 것, 낀다는 것, 논다는 것.
이것은 자기 음악에 대한 고민이 항상 지속되어야지만 유지될 수 있는 것 같다.
어머니께서 전에 자주 하시던 말씀이 생각난다.

‘사상이 없는 음악은 죽은 음악이다.’

나는 멈춰버린, 죽어버린 음악을 하지 않기 위해서 언제나 굴러다녀야 하고 움직여야 한다.
구르는 돌에는 이끼가 끼지 않는다고 옛날 조상들이 말했고,
Like a rolling stone이라고 밥딜런이 말했다.
우리는 정선에 ‘섶’으로서 가지 않았었나? 시인으로서 무언가 말한다는 것은 섶이 되는 것부터가 시작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