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주 작가라는 분이 계셨네요.

올해가 10주기. 

친구들이 구본주 상을 만들고(올해가 3회째), 

전시회도 진행중이에요.

친구들이 아끼는 <세상을 사랑한> 예술가라니

어쩐지 고정희 생각도 나고.


25일 저녁에 시상식이 진행된다고 하여

오후에 전시회 갔다가 저녁 먹고

시상식 보러 가려고 합니다. 

용접 수업팀은 시간 의논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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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년 전 2003년 10월 친구들이 쓴 영결사. (아래) http://www.semonemo.org/




구본주 선생 영결식 추모사

 

영원한 청년작가 구본주 선생을 기리며...


경기도 포천군 소흘읍 무봉리 (560-2번지) 작업실. 자르고, 두드리고, 구부리고, 붙이고, 갈고, 닦고, 깎아내며 예술혼을 불태우던 곳, 당신의 작업실입니다. 당신이 20-30대 꽃다운 청춘을 바쳐 땀흘리던 뜨거운 창작의 산실입니다. 작업실 입구에 무거운 쇠를 들어올릴 수 있는 7·8미터 짜리 크레인을 세워놓고는 세상을 다 얻은냥 기뻐하면서, 이젠 철공소 못지 않은 시설을 갖췄으니 떵떵거리며 작업할 수 있다며, 자랑을 늘어놓던 그 작업실입니다.


당신의 짧고 굵은 삶이 묻어있는 곳. 저 작업실을 먼발치에 두고 오늘 우리는 당신을 자연의 품으로 되돌리고자 이곳에 모였습니다. 이곳에 참석하신 모든 분들의 애통한 마음을 모아 불의의 사고로 먼저간 영원한 청년작가 구본주님의 넋을 기리는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지금 당장이라도 잔주름진 눈가에 한가득 미소들 띤 채 씩 웃으며 나타날 것만 같은 구본주 선생. 스무살 파릇파릇한 학생시절부터 서른 중반의 늠름한 청년작가로서 당신이 우리에게 새겨둔 깊은 자리를 어찌하라고 이렇듯 갑자기 떠나십니까. 이렇듯 많은 사람들에게 커다란 야속함을 두고, 당신은 훌쩍 먼 곳으로 떠나셨습니다. 앞길이 창창한 아까운 사람, 구본주 선생이 떠난 자리가 두고 두고 가슴에 남을 것 같아 긴 한숨만 앞섭니다.


평온하게 영원한 잠자리에 들어있는 고인 앞에서 살아있는 사람의 넋두리를 더 길게 하지는 않겠습니다. 이제 떠나는 당신을 배웅하러 여기 모인 사람들과 함께 구본주 선생이 못다 이루고 남겨둔 뜻을 새겨보려고 합니다.


  1. 구본주 선생의 삶과 예술을 깊이 새겨 두겠습니다. 구선생이 남겨둔 것은 작품 뿐만이 아닙니다. 근 몇 년 동안 구선생은 리얼리즘 미술의 21세기적 변모를 꿈꾸면서 예술가로서의 깊은 고뇌를 안고 있었습니다. 30대 중반을 넘긴 청년작가로서 당대성을 구현하는 리얼리즘 미술에 대해 깊은 고뇌를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압니다.
    구선생. 뒤를 돌아보면 앞이 보인다고 했습니다. 구선생이 지금까지 걸어온 10여년의 창작은 우리 현대미술계의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학생시절 구선생은 억센팔뚝을 내두르는 <혁명은 단호한 것이다>로 날카로운 대립각을 세웠습니다. 10년전의 구선생은 금호미술관 천정에 빠뜻하게 닿을 정도의 높이로 죽창을 내지른 <갑오농민전쟁>을 남겼습니다. 지난해에는 철판을 두드려서 5미터짜리 구두를 만들고 겨대한 기둥을 새운 <아버지의 기둥>으로 예술의 전당 전시장을 가득 채웠습니다. 10여년전 구선생은 수배를 피해 수원의 선배 작업실에 숨어 지내며 흙으로 빚은 작은 조각들을 만들었고, 오늘날의 구선생은 포천 작업실에서 거대한 규모의 작업을 위해 고된 땀방울을 쏟아왔습니다. 청년작가 구본주의 짧은 세월을 봐도 이렇게 역동과 굴곡이 확연합니다. 앞으로의 10년 20년을 위해 우리는 구선생이 짧고 굵게 남기고 간 역사를 꼼꼼하게 되짚어 보겠습니다.

  2. 다음은 당신이 이루려했던 진보적인 미술운동에 관한 말씀입니다. 구선생은 학생시절부터 평등과 평화 자주와 민주를 열망해왔습니다. 작품을 통해서 현실주의 미술을 일궈왔을 뿐만 아니라, 지난 몇 년간 민족미술인협의 이사로 활동하면서, 수많은 선배 동료 후배들과 민족민중미술의 미래를 함께 이야기해왔습니다. 지금까지 해온 일들보다 해야할 일들이 더 많이 남아있는 당신이 이렇게 허망하게 가시다니 그 충격과 허망함을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습니다만, 당신이 열망했던 진보미술의 꿈은 우리들 가슴 깊이 남아있습니다.

  3. 마지막으로 구선생께 부탁말씀 한 마디 드리겠습니다. 이승에 남긴 일 염려하지 말고, 저승에서 편히 잠드시길 바랍니다. 당신의 아버님과 형님 누님들, 그리고 아내 전미영님, 그리고 당신이 그토록 사랑했던 두 자녀 세모와 내모. 남아있는 사람들과 함께 용기와 신념을 가지고 살도록 힘과 지혜를 모를 것입니다. 구선생이 서른을 넘기면서 따뜻한 감성으로 만들어둔 가족 연작을 우리 모두 잘 알고 있습니다. 그 따뜻함을 잃지 않도록 당신의 가족들과 지인들이 함께 할 것입니다.


구본주 선생. 오늘 우리는 당신을 여기 묻고 갑니다만, 우리들 가슴 속에 영원한 청년작가 구본주로 깊이 새겨두겠습니다. 이승에서의 무거운 짐 다 벗어두고 영면의 그곳에서 부디 편히 쉬소서...


2003년 10월 1일



그리고 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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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21에 실린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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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멋있는 민중미술! [2013.09.30 제979호]
[문화] 투쟁 현장에서 쉼터가 되고 수호자가 되고 생활도구가 된 강철무쇠, 세상 떠난 지 10년 여전히 노동현장을 위무하는 고 구본주 회고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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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곡미술관에서 구본주의 작품을 설치하기 위해 애쓰고 있는 사람들. 동료 작가와 농성 노동자가 힘을 합쳐 그의 전시장을 완성했다. 신유아 제공
8월 중순 태양이 작열하던 어느 날 서울 종로구 신문로에 위치한 성곡미술관 앞마당이 시끄럽다. 거대한 신발이 크레인 위에 둥둥 떠 있고 대형 트럭이 마당을 가득 채우고 있다. 2003년 세상을 떠난 고 구본주의 10주기 전시 준비 중이다.

나르고 청소해주러 달려온 해고노동자들

구본주의 부인 전미영은 나와 인연이 있다. 서울 용산 참사 현장에서 전시 기획 및 현장 미술작업을 함께 했고 이때 모인 몇몇 작가와 파견미술팀이라는 이름으로 활동을 함께했다. 노동의 현장, 소외된 현장에서 미술작업과 설치작업을 함께하기도 하고, 파견미술팀에 속한 작가들의 개별 전시나 현장 설치작업이 있을 때면 누구랄 것도 없이 모여 작업을 함께해왔다.

의리를 지켜야겠다는 생각에 찾아간 성곡미술관은 말 그대로 아수라장이었다. 구본주의 작품은 그 규모나 양이 엄청났다. 지난 9년간의 전시와는 다르게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유작들이 한 공간에 모이면서 전시 준비 기간과 설치해야 할 작품의 양은 그동안 전시 준비를 함께 해왔던 몇몇 작가가 진행하기엔 터무니없이 많아 보였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구본주의 전시를 알리고 함께해달라고 요청했다. 다음날 그리고 또 그 다음날 함께하는 사람들이 나날이 늘어간다. 하루는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가, 다음날은 콜트·콜텍 해고노동자가, 또 다음날은 기륭전자 노동자들이 한걸음에 달려와 작품을 나르고 전시장을 청소한다.

짧은 삶을 살다 간 구본주의 작업은 그 양이나 질 면에서 놀랍다. 그만큼 그의 작업에 대한 열정을 가늠할 수 있다. 혼자 한 작업이라고 생각하기엔 그 규모가 엄청나다. 성곡미술관 앞마당에 한가득 서 있는 그의 신발은 미술관을 찾은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사진가, 판화가, 시인, 미술가, 그리고 투쟁 현장의 많은 해고노동자들이 구본주의 작품을 나르고 닦는다. 여름 뙤약볕에 아랑곳하지 않고 정성스레 닦고 있는 한 사진가의 이마에 송글송글 땀이 맺힌다. 작업이 길어질수록 수다는 늘었고 사람들이 기억하는 구본주가 스멀스멀 성곡미술관으로 걸어온다.

기륭전자 해고노동자 투쟁 당시 구본주의 작품은 농성 현장과 함께 있었다. 농성장 바로 앞에 서 있던 <비스킷 나눠먹기>는 노동자들의 쉼터이자 생활의 도구가 되었다. 그의 작품 위에서 늘어지게 낮잠을 자기도 하고, 식사 때가 되면 음식을 만드는 테이블로 쓰기도 했다. 경기도 평택 대추리 마을 분교에 있던 <갑오농민전쟁>은 마을 주민들을 위로하고 마을을 지키는 수호자였으며, 쌍용차 해고노동자의 분향소가 설치됐던 대한문에 있던 <노동>은 삶의 고단함을 함께하는 동지였다. 노동자들은 구본주를 몰랐지만 그의 작품과 함께 그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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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본주 전시회 포스터. 아래는 그의 작품. 성곡미술관 제공
전시 준비 첫날 대형 크레인에 몸을 맡긴 채 허공에 떠 있는 작품들이 아슬아슬하다. 미술관 여기저기에 내려진 작품들을 사람들이 전시장 안으로 옮긴다. 강철무쇠. 구본주의 작품 대부분이 철과 동으로 이루어졌음을 감안하면 그 무게는 짐작하고도 남을 것이다. 육중한 남성 대여섯이 옮기기에도 버거운 작품을 들었다 놨다 반복하기를 수십 번.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을 즈음 시원한 바람이 분다. 잠깐 쉬는 시간을 틈타 담배를 입에 물고 후 내뱉는 연기 속에 구본주를 회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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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본주와 대학 시절을 함께 보낸 연영석은 지금 민중의 삶을 노래하는 가수다. 그는 대학 시절 미술학도였다. 그의 삶에 민중을 끌어 들인 게 구본주였다. 연영석이 구본주의 작업실을 자주 드나들었고 가끔 귀가 시간이 지나면 작업실을 숙소로 사용했다. 어느 날 새벽 작업실에서 자던 연영석을 깨우며 구본주는 뜬금없이 “내일 서울대 가자!”고 했다. 아마도 당시 서울대에서 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노협) 출범식 같은 집회가 있었던 모양이다. 연영석은 “거길 뭐하러 가냐”며 도리질을 쳤고 구본주는 “너 집에 가라”며 단호하게 말했다. 연영석이 대학 1학년 때의 이야기다.

‘조각가 구본주’가 ‘무직의 자살자’로

전시 준비 둘쨋날, 셋쨋날, 넷쨋날…. 다시 작품을 닦고, 나사를 박고, 부서진 부위를 수리하면서 설치 공간을 만들어간다. 몇몇 작가는 아예 집에서 짐을 싸들고 나와 미술관 앞 어딘가에 숙소를 잡고 밤을 새우기도 했다. 그중 한 사람이 판화가 이윤엽이다. 1996년 수배자로 도망 다닐 당시 경기도 수원으로 피신해 있던 구본주는 노동미술연구소라는 공간에서 생활을 했고 수원에 살던 판화가 이윤엽은 노동미술연구소를 들락거리며 민중미술을 접하던 시기에 그를 처음 만났다. 구본주의 작업은 민중미술에 염증을 느낀 이윤엽의 작품세계에 적잖은 영향을 미쳤다. 구본주의 초기 작업은 구상 작업에 충실했으며 인체에 대한 해박한 이해는 그의 이후 작품세계에 큰 에너지가 되었다. 구상에 충실했던 작업이 점차적으로 신체의 변형과 과장을 만들어냈고 그의 과장과 변형은 불편함보다는 속 시원한 카타르시스를 제공한다. 이윤엽은 “민중미술이 저렇게 멋있을 수도 있구나”를 연발하며 자신의 작업 안에 구본주를 불러들였다.

전시 준비가 거의 마무리될 즈음, 성곡미술관에 위치한 카페에 앉아 전시 과정에서 힘들었던 이야기와 작품에 대한 이야기로 수다 삼매경에 빠졌다. 그러던 중 구본주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구본주는 2003년 교통사고로 죽었다. 그의 죽음으로 인연이 된 사진가 노순택은 그를 처음 알게 된 사연을 이야기한다. “그의 죽음은 뉴스로 흘러나왔다. 죽었다는 뉴스가 아니라, 그 죽음에 대한 보험금 산정을 두고 벌어진 해프닝이 뉴스였다. 보험회사는 황망한 그의 죽음을 ‘자살과 다를 바 없는 교통사고’라 불렀다. 인정할 수 있는 ‘예술가 경력’은 길어야 3년, 사실상 육체노동이므로 ‘가동연한’은 60살까지라 했다. 수입을 증빙할 서류도 없으므로, 계산되어야 할 나머지 삶에 대한 보험금은 ‘일용직 노동자’에 준해야 마땅하다는 거였다. ‘조각가 구본주’가 ‘무직의 자살자’로 처리되는 데 걸린 시간은 짧았다. 삼성화재 앞마당에서 ‘무직자들’의 망측한 1인시위 릴레이가 이어지던 어느 날, 나도 불려나감으로써 고인과 연을 맺었다.”

‘노동’을 철거해 소각했다는 중구청

끝없이 회자되는 사람들의 이야기 속에 구본주는 기억 밖으로 나왔다. 지난 6월 대한문 쌍용차 해고노동자 분향소가 있던 자리에 함께했던 구본주의 작품 <노동>은 경찰과 서울 중구청 직원들에 의해 철거됐는데 구청에서 보관하고 있다는 경찰의 말에 중구청에 확인한 결과 철거 물품 보관 이후 전부 소각했다고 한다. 강철무쇠로 만든 <노동>을 소각한 중구청은 작품 탈취 및 훼손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신유아가, 연영석이, 이윤엽이, 노순택이 그리고 수많은 노동자가 구본주를 만난 것처럼 사람들은 구본주와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 구본주 10주기 전시 중인 성곡미술관 1층 전시실에 가면 우르르 쏟아져 내려오는 샐러리맨들이 있다. 밤이면 더욱 반짝거리는 무수한 사람들, 그 속에 내가 있고 우리가 있다. 샐러리맨 한명 한명을 천장에 매달며 뻐근해진 목덜미를 움켜쥔다.

조각가 구본주는 지금도 뻐근해진 목덜미만큼 고단한 작업을 하는 중이라고 생각해본다. 성곡미술관에서 구본주의 전시는 10월까지 진행된다. 그의 작품과 함께 삶의 고된 땀을 흘려보면 좋겠다.

신유아 문화연대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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