볍씨학교 홈피에 탈핵버스를 다녀오신 최미자 이모가 밀양에서의 이야기를 올려놓으신글 공유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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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에서 도토리와 저문 노을을 담아 왔습니다.

 

10월3일, 2박3일의 보길도 여행을 마치고 한전의 공사재개로 어수선한 밀양으로 출발하였다. 오전 6시일어나 준비하고 8시 배를 타고 밀양 시외버스 터미널에 도착한건 4시 반이 넘어서였다. 날마다 뉴스가 나오는 지역치곤 너무나 조용하였다.

 반찬이 떨어져 김과, 김자반을 사들고 표충사 가는 버스에 올랐다. 옆 통로에 앉은 할머니들께서 어디 가느냐 하기에 바드리 마을에 간다 하니 왜 가느냐 하신다. 송전탑 반대하러간다 하니 잘못 알아들으시고 “송전탑 구경 간다고?” 아는 민박집 얘기를 하며 갈 때 없으면 소개 해 주신단다. 앞자리에 앉으신 중년의 남자가 끼어들며 바드리 마을 입구 정류장을 소상히 알려 주며 왜 송전탑이 문제가 있는 지 조목조목 설명을 해주시는데 목소리가 워낙 나긋하시고 건너편 앞자리라 잘 들리지가 않아 안타까웠다. 중년의 남자가 차에서 내리고 한 정거장쯤 가니 바드리 마을이다.

 이미 해는 기울고 산속 그림자는 을씨년스러웠다. 긴장된 전야의 바드리마을 답지 않게 입구에는 웬 모텔들이 즐비한지……. 시멘트로 포장된 길이라 어둠이 내리기 시작했지만 길은 훤하게 보였다. 한 1키로 갔을까? 젊은 사람들 목소리와 남자 어르신 목소리가 웅웅거리며 들려온다. 흥분과 긴장이 들며 배낭가방 끈에 손힘이 실린다. 모퉁이를 돌며 올라가는 데 구급차를 비롯하여 5~6대의 소형차와 봉고차가 주차해 있다.

 다시 경사진 언덕길을 올라가는데 “ 누구여? 우리 편이여 아녀? 차림으로 볼께 영락없는 우리 편이여” 머리가 하얗게 세신 어르신의 말씀과 동시에 웃는 소리로 주변 사람들이 반겨 주신다. 7~8살 정도 되어 보이는 아이들이 여섯 명 정도가 농성장 주변을 맴돌며 놀고 있고 60대에서 80대 된 어르신 일곱 분 정도가 은박지 돗자리에 앉아계셨다. 광명 볍씨학교 학부모라 소개하니 그 먼데서 왔느냐 하시며 반겨 주신다. 울산 지역의 ‘밀양네트워크’ 계신 분들이 4분이 있었는데 우리가 온 것을 대 환영하였다. 아이들 때문에 갔다 와야 하는 데 사람이 없어서 걱정했다며 컵라면에 뜨거운 물을 부으며 어르신들 드릴 저녁밥을 챙기고 있었다. 10미터 떨어진 곳에는 의경 20여명이 방패를 들고 서있었다. 보이지 않지만 더 위쪽으로 여경과 의경들 200여명이 상주하고 있다고 한다.

 

 점점 어두워지면서 냉기가 온몸을 파고든다. 움직이는 데도 산속이라 가만히 있어도 덜덜 떨린다. 나도 이런데 어르신들은…….

간혹 송전탑에 찬성한 윗마을 사람들이 차를 이용해 통로를 지나가는 데 감정에 복받친 어르신들이 “몇 푼 쥐어 주고 , 도로를 놔 준다하니 찬성 할 수 있느냐” 하면서 간간히 고성이 오간다. 열시가 넘어서며 어르신들 한분, 두 분 잠자리에 드신다.

 누런 오리털이 군데군데 빠져 나온 낡은 침낭과 얇은 여름이불이 전부다. 그것을 온몸에 뒤집어쓰신다. 그 위로 허연 비닐을 한 장 덮고 누우신다. 바닥에는 은박지 돗자리가 전부다. 농사질 때 쓰는 모자가 침낭 위로 그리고 위의 허연 비닐 사이로 삐져나왔다. 어르신들 얼굴은 보이지 않고 목소리들만 오고 가신다. 내가 숨을 내 쉬니 입김이 허옇다.

열두시가 넘어서고 잠을 자려고 노력했지만 안 온다. 도시에서는 어느 집 아이 천장 장식으로 쓰일 별이 지금 내 눈앞에 쏟아진다. 오늘 따라 왜 이리 밝은지 웬수같다 별아…….

 

냉기가 올라오니 뒤척인다. 미선이는 어떻게 자고 있을까? 노인네 병들면 안 된다 하며 두꺼운 오리털 침낭 나주고 저는 얇은 것 뒤집어썼는데……. 웅성웅성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대안교육 교사 한마당을 밀양에서 하기로 했다며 백여 명의 사람들이 시간을 두고 연대하러 왔다. 내 옆 하자센터에서 온 버들이는 털실로 짠 토씨를 나한테 준다. 끼고 자라고 한다. 고맙다.

자다 깨다 자다 깨다를 반복, 여섯시 기상이라며 한 청년이 일어난다. 도저히 눈이 떠지지 않지만 차라리 일어나는 게 나을 것 같아 온 몸에 힘을 준다. 침낭이 산이슬에 젖었다. 비닐을 침낭위에 덮고 잤지만 고정된 것이 아니어서 무거울 정도로 젖어 버렸다. 서서히 뜨는 햇빛이 고맙고 고마울 뿐이다.

  어느 단체에서 주먹밥을 공수해 와 아침겸 점심으로 늦은 시간에 밥을 먹었다. 의경들이 교대하러 왔다. 400명의 의경들이 온 산을 에워쌌다. 주민들이 점거한 통로를 내주라 하며 무전기로 “말을 듣지 않으면 밀어붙이라” 하며 위의 경찰 상사에게 교신한다. 이 소리에 주민들이 격분하여 경찰간부에게 “어디 나이 드신 분들한테 밀어붙이라 하노. 너는 부모도 없냐. 찬 산 바닥에서 밤새 떨며 주무신 노인들한테 할 소리냐” 하며 거세게 항의 하니 슬며시 내뺀다.

 밤새 밤을 같이 해준 교육연대 사람들은 4공구 사무실 현장 움막을 사수하러 아침이 되자 그 쪽으로 갔다.

 싸움의 장기전과 윗마을 사람들의 생활권 보장하는 의미에서 공간을 이동하기로 하였다. 꺾어져서 올라가는 곳으로 탁 트이고 넓어 어르신들이 지내기에도 좋을 듯하였다. 천막도 치고 스치로폴도 깔아 전날보다는 양호해 보였다.

 주민들의 경계가 치밀해 지자 한전 직원이 정화조 직원으로 위장하여 정화조 차를 같이 타러 왔다가 발각이 되자 줄행랑치기도 하였다. 기자라고 사칭한 남자가 증명서를 제시하라고 요구하자 완력으로 무슨 기자를 이런 식으로 대접 하냐며 항의하다가 마침 취재하러 온 한겨레 신문기자에 의해 사칭한 것임이 드러나기도 하였다.

 

 긴장 국면이 아니면 어르신들과 얘기를 나눴다. 8년 동안 거대 권력과 싸워 온 그 분들은 이미 거인이 되어 있었다. 세상의 치열함속에 다져진 연륜은 농사만 짓고 사는 평부가 아닌 현부가 되어 세상을 내려다보고 계셨다. <보상도 싫다, 지금 사는 이곳에서 숨만 쉴 수 있게 해 달라> 절박한 말씀은 간혹 물질이 주는 안락함에 기대어 가치를 상실해 버리는 우리들에게 자본을 넘어선 사람 사는 세상을 구현하라는 일침을 주신다.

 

 때가 되면 거둬야하는 게 농사다. 이 농사철을 악랄하게 이용한 게 한전이고 이 나라의 국가 권력이다. 이런 말씀, 저런 말씀 들려주시다 말미에 꼭 이런 이야기를 덧붙이셨다. “지금 이럴 때가 아닌데 가서 들깨도 떨어야 하고, 콩도 베야 하고 떨어진 밤도 주워야하고 속 타 죽는다”. 애매한 은박지 돗자리를 손으로 훑으신다. 추수의 계절을 인질로 하여 한전은, 이 정부는, 어르신들 가슴에 대못을 치신 것이다.

 

 볍씨학교 아이들을 기억하시고 계셨다. 볍씨학교라는 기억은 없으셨지만 대안 학교는 알고 계셨다. “ 아이구 그 얘들 고생 엄청했다 아닌가? 걔들 없었으면 어떡할 뻔 했노? 한전 놈들은 공사한다하지, 경찰놈들은 진 치지, 노인네들 밖에 없지, 기특하다아닌가.” 제가 그 학교 학부모예요.

“그런가? 대단하다” 눈과 목소리가 커셨다.

 그러면서 작년에 왔던 대안학교 학생들 이야기를 하셨다. 산이 가팔라 올라가기도 버거운 농성장이 있었다. 농성장은 칠순, 팔순 할머니들이 농성하기에는 그리 편한 곳이 아니었다한다. 그런데 대안학교 아이들이 할머니들 쉴 곳을 만든다하며 등짐으로 벽돌 한 장, 한 장을 져 날라 방하나 정도 되는 황토방을 만들었다 한다. 할머니들이 그놈들에게 다 뺏겨도 피땀흘려 만들어 준 그 공간만은 애들 생각하면 뺏길 수 없다며 동네 할머니들이 사수하고 계신다 한다.

 

 농성장에 어진이란 남학생이 있다. 어진이는 일반고등학교 이학년이다. 점거 농성 첫날부터 학교 대신에서 이곳에서 생활하고 있다. 집과 학교가 구미에 있다. 밤에는 낮에 해온 나무로 불 피우고, 다 잠자는 밤에 불침번을 서고, 아침에는 커피를 타 어르신들에게 차를 돌리고 이불을 널고 바닥을 빗질한다. 낮에 겨우 쪽잠을 자고 산에 나무 하러 가는 등 온갖 궂은 일을 도맡아 하고 경찰과 대치되거나 싸우면 맨 먼저 총알처럼 튕겨 나가, 그 앞에서 벌러덩 누워 경찰을 꼼짝달싹 못하게 한다. 학교 안 가니? “학교보다 더 많은 배움을 여기서 배워요” 하며 항상 싱글벙글이다. 이름값 한다. 어진이는 어진이답게.

 

 간이 화장실 가는 길에 도토리가 떨어져 있다. 금방 떨어진 도토리인가 보다. 냄새를 맡아 보니 도토리 특유의 단내가 어느 때보다 진하게 밀려온다. 호주머니에 넣어둔다.

 

 4공구 사무실 현장 맞은편 단정마을 할머니들이 움막에서 목숨도 불가 하겠다며 쇠사슬을 목에 걸고 계신다는 소식을 마을 주민이 알려 주셨다. ‘할머니는 할머니 몸보다 무거웠을 쇠사슬을 목에 거시면서 어떤 생각을 하셨을까?’ 고개 들어 하늘을 보니 깊이를 알 수 없을 만큼 파랗다.

 

 희망버스를 타고 오늘은 집으로 가야한다. 이렇게 가면 남은 어르신들은 참 많이 외로워 하셨다. 힘듬과 아픔의 연대를 몸으로 함께 한 사람들이여서 떠난 사람의 빈자리가 크게 다가온다. 나도 그런데 어르신들은 오죽할까? 더군다나 도착 첫날부터 가는 날까지 뜬눈으로 새우며 누구보다 주민들을 위해 앞장서서 싸워 온 한미선이는 발걸음이 떨어질까 싶다. 이렇게 가면 안 되는데, 많은 죄를 짓고 가는 기분이다. 다시 온다 하지만 이보다 허망한 말이 있을까싶다. 그나마 주말이면 사람들 발길이 있지만 월요일부터 걱정된다. 태풍에 비까지 온다는 데 말이다.

 

세분의 어르신들이 집에 들렀다 와야 하신다며 동승하였다. 동화 마을에서 내리신 그 분들은 비탈진 밭길을 지팡이 짚고 올라 가다 신호등에 걸린 차가 출발할 때 까지 잘가라고 손을 흔들고 계셨다. 지팡이가 춤을 추고, ‘탈핵’ 글자가 써 진 노란색옷이 흔들린다. 그러면서 서서히 내 머릿속에 저장되고 있었다.

 

 이백 명 정도의 밀양에 연대하러 온 사람들이 4공구 사무실 앞에 집결하여 간단한 집회와 인원을 배정하는 안내 방송이 나오고 있었다. 떠나가는 사람들 배웅해주려 어르신들이 나오셨다가 수녀님을 붙들고 기어이 울음을 토해 내셨다. 어르신의 울음소리는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의 가슴에 진하게 퍼런 멍을 내신다.

 

한전의 사무실과 온갖 기자재가 즐비하게 늘어선 4공구 정문 뒤로 저녁노을이 지고 있었다. 소설 태백산맥에 하대치가 노을은 학대받는 민중들의 핏빛이라고 말하는 대목이 나온다. 천연하게 슬프도록 아름다운 노을이다.

 

2박3일동안 가까이에서 겪은 밀양의 아픔은 그 어떤 것으로 치부 되어서는 안 될 삶과 역사가 어디로 가야 하는 지 일깨워 주는 우리 생활의 이야기이며 우리 역사의 이야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