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한 판을 경험하며 맥락의 폭을 넓히다

하자작업장학교는 자원이 많은 공간이다.

 나의 주니어 때 학습 방식은 연출된 판을 이동하며 제각기 다른 판을 관찰하는 것이었다.

 내가 처음으로 머물렀던 곳은 노리단이다. 노리단은 돈을 받으며 공연을 하는 전문적 공연팀이면서도 동시에 다세대가 모인 공동체 지향적인 그룹이었다. 때문에 이곳에서 음악을 배우고 공연만 했던 건 아니었다. 모든 사람이 공동체를 꾸려나가는 일원이었기 때문에 모두가 공연자이며, 장인이며, 워크숍 강사가 되어야 했다. 어둡고 먼지가 날리는 악기발전소에서 무서운 기계를 다루고 등이 휘어지리만큼 아플 때까지 악기를 만드는 건 힘들었지만, 스스로 악기를 만들고 그 악기를 연주하는 과정에서 공연이 만들어지기까지에 전 과정을 직접 체험해볼 수 있었다. 나만 노리단에서 배운 것이 아니라 나도 노리단에 내가 가지고 있는 자원을 나누기도 했다. 약 두달 정도 초등단원인 나마스테를 대상으로 영어 수업을 진행하며 자원을 공유하는 노리단의 문화를 경험했다.

당시 나는 호주에서 생활을 해왔기 때문에 한국말도 잘 못했을 뿐더러 ‘말을 한 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다. 그래서 단원들이 사용하는 노리단 인트라 게시판에 하고 싶은 말을 글로 쓰기 시작했다. 단원들은 나의 글에 댓글을 달아줬고 때로는 나에게 역으로 질문을 던졌으며, 그렇게 나는 온라인으로 단원들과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노리단의 판돌이었던 팅은 그런 나에게 광주에 교사직무 연수를 하러가는데 자신과 함께 가지 않겠냐고 제안을 했다. 다양한 곳에서 교사로 활동하시는 분들이 모인 자리에서 나는 노리단에 오기까지의 경로와 노리단에서 배웠던 점, 힘들었던 점을 설명하며 나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이 순간이 내가 처음으로 나의 경험을 이야기했던 순간이었다. 노리단에서 워크숍을 진행할 때나 하자투어를 할 때 노리단의 문화를 설명하면서 논리적으로 말을 잘 하는 방법을 배웠으며, 광주 세미나와 같이 여러차례 프레젠테이션을 하며 나의 언어를 키우는 방법을 배우기도 했다.

노리단에서 생활을 하며 나는 기획자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 이유는 두 가지가 있는데, 첫 번째는 공연자를 안 보이는 곳에서 멋있게 연출하는 기획자가 멋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다른 이유는 노리단에서 공연 뿐 아니라 워크숍과 프레젠테이션, 발표 같은 것을 계속 기획하며 무언가를 새로이 ‘만드는’ 행위가 즐겁다고 생각되어서이다. 나는 ‘기획자’가 되고 싶어 하자작업장학교에서 별자리 파티 기획팀이나 작업장학교의 자치회의를 관리하는 학생회 같은 것을 만들 수 없나 생각하던 중 글로벌학교에 들어가게 되었다. 새 학기 시작 전 통역가 겸 예비 죽돌로써 이 판을 알아가고자 영어들 캠프와 태국 현장학습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래서인지 나에게는 세계화를 배우고 다른 환경에 사람들과 만나는 배움보단 노리단에서 배웠던 몸벌레를 연극이나 자서전 쓰기 활동과 병행하여 하나의 새로운 워크숍을 기획했던 경험으로 더 기억에 남았다. 이처럼 글로벌학교에서는 다양한 것을 기획할 수 있었다. 노리단처럼 사회에서 활동하는 전문적인 팀은 아니었지만 오히려 그랬기 때문에 이곳에서의 커리큘럼은 계속 변했으며 다양한 것을 기획해볼 수 있었다. 다문화, 이주노동자, 코시안 등을 조사하고 프레젠테이션을 함으로써 공부를 하기도 하고, 돌아가면서 일주일에 시간은 워크숍을 진행해보는 시간을 갖기도 했다. 2007년부터는 글로벌학교가 여행디자인센터로 전환되기 위해 아시아의 소외지역을 방문하는 대신 서울을 여행하며 투어를 기획하였다.

그 밖에도 많은 판을 이동해오며 ‘기획’을 배우려고 하였다. 하지만 모든 경험이 즐겁고 신나기만 했던 건 아니다. 매번 ‘하고 싶은 일’을 하지만 어느 순간 그 ‘하고 싶은 일’은 정말 ‘해야 할 일’로 변해버리고는 한다. 그 이유는 내가 경험한 것을 학습으로 소화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 스피카자 : 영어를 배우고 싶다 로 시작했지만, 통역을 하는 팀에서 글로비시를 접하고 영어를 가르치는 팀이 되었다. 글로비시와 영어의 차이점도 모르면서 가르치는 게 힘들다. 억지로 해야 하는 일을 했던 경험.
* 결국 언제나 무엇을 기획하고 싶나? 나의 이야기는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대답을 할 수 없었다.

* 경험을 이해했다고 생각했지만, 시간이 지나서 어떠한 순간이 오며 그 이해함이 다음 단계로 발전되었을 때
* 그때 촌닭들이 홍콩 창의력학교에 가며 통역으로 스피카자 팀이 가게 되었다. 언제나 뺀질거리고, 하고 싶은 일이 해야하는 일로 변하는 나에게는 내가 할 수 있는 일과 나의 포지션이 불분명했다. 그렇지만 홍콩에 가게 되어서 나는 여행 코디네이터로써 확실히 내가 성장했다는 느낌을 받았다.
* 여행 코디네이터는 내가 글로벌학교에서 했던 가이드의 역할과 달랐다. 그것은 지금까지 내가 경험한 것들이 연결되고 한 단계 발전하며 발생했던 포지션이었다. 노리단에서는 공연을 기획하고 직접하고, 모니터링을 하기도 했지만, 조직을 꾸려가기 위해서 필요한 요소들과 공연팀이 되기 위해 갖춰야하는 요소들을 알게 된 셈이었다. 글로벌학교에서는 사람들을 만나오면서 감수성(sensitivity)라는 것이 생겼으며 전체적으로 판이 진행이 될 때 어떤 그림이 보여야 하는지를 어렴풋이 알게 된 것이었다. 그러한 경험들이 모이면서 나는 이 여행에서 촌닭들에게 공연과 워크숍에 대한 코멘트를 해줄 수도 있으며 홍콩 담당자에게 필요한 것과 일정에 대한 문의를 할 수 있었다.

* 홍콩에서의 경험을 하며 기획과 코디네이터의 역할에 대한 생각을 지속하고 있을 찰나에 하자센터에서 08청소년프리창의서밋이 개최되었다. 이 곳에서 나는 공동체를 지속시키고 있거나 제 4섹터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만나왔고, 내가 생각하는 기획의 이미지가 조금 더 구체화 되었다. 하자작업장학교와 같은 공동체적이며 문화를 스스로 만들면서도 생산적인 작업들이 나올 수 있는 공간을 기획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 과정에서 사회적 기업을 양성하는 덴마크의 학교 카오스필로츠를 알게 되었다.

* 시니어가 시작되었을 땐 이러한 나의 학습의 단계를 좀 더 업그레이드 시키고 구체화 시키면서도, 내가 졸업 이후 사회에 나가 어떻게 먹고 살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시작하게 되었다. 나는 졸업 프로젝트로 스피카자에서 시작되었던 글로비시를 지속하였다. (이 경험이 내가 하자작업장학교에서 학습하며 learning by doing에 가장 가깝다고 생각한다.)
* 영어들과 글로비시가 연결된 지점
* cultural translator, cultural animator가 되고 싶고 그런 사람으로써 글로비시를 했다.
* 글로비시를 가르치면서도 사람을 만났다. 이번에는 제4섹터에서 작업을 하는 사람들이 아닌 같은 대안학교를 다니고 있지만 다른 환경에서 자라고 있는 10대들. 이들의 문화를 관찰하다.

* 글로비시를 하면서 글로비시가 '해야하는일'이 된 적도 물론 있었다. 하자작업장학교에서 나의 여정을 되돌아봤을 때 나는 불이 계속해서 켜졌다 꺼졌다를 반복해왔던 것 같다. 하지만 경험들이 연결되고 이해를 했던 맥락이 발전하는 순간이 있었고, 그 순간에는 내가 자발적으로, 그리고 자기주도적으로 프로젝트를 진행할 수 있었다. 깜빡거렸던 불이 지속되는 힘을 길렀던 것 같다. 졸업을 하는 나는 이제 하자작업장학교를 나와도 스스로 하고 싶은 것을 찾으며 성장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이 말에 뜻은 나 혼자 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경험들이 연결되는 지점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처음엔 하나의 개체였던 것이 서로 연결되며 결국엔 전체가 연결된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것만을 알았다고 해서 앞으로만 나아갈 수 있는 건 아니다. 분명 앞으로도 힘든 순간과, 길을 몰라서 두려운 순간과, 실수를 하는 순간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나의 길을 만드는 방식을 알았고, 그 길을 향해 자신감을 갖고 나아가는 법을 알게 되었다. 힘들고 두렵고 실수했다는 것을 알았을 때도 나의 불이 지속될 수 있길 바라며, 나는 cultural animator가 되겠다.




급하게 써서 다시 수정해야함-
노트북 고장나서 부랴부랴 집 컴터로 씀미다 ㅜㅜ 어쩌지 이 시기에 노트북 고장나냐,,,,,,,

profile
Lisaa
lisaa@haja.or.kr
http://lisaa.tistor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