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한 판을 경험하며 맥락의 폭을 넓히다

나는 하자작업장학교를 다니기 전 호주에서 유학생활을 했다. 이국의 땅에서 가족 없이 홈스테이 생활을 했기 때문에 나는 졸업 이후 지속시키고 싶은 공부에 대한 질문을 어렸을 때부터 받아왔다. 이 대답에 나는 당연히 음악이라고 생각했다. 어렸을 때부터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배워왔기 때문에,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곧 직업이 되어야한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처음 이 곳에 와서 하자투어를 하며 서로 다른 방들에서 진행되고 있는 프로젝트들을 보게 되었고 하자작업장학교에는 다양한 자원이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렇지만 그 자원은 매체나 프로젝트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그 프로젝트 안에서 배우는 감수성(sensitivity)과 내가 던질 수 있는 질문을 만드는 과정,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해 개개인의 임무와 목표를 만들며 성장할 수 있는 자기주도적학습이란 것을 알게 되었다. 하자작업장학교에서 나의 학습방식은 다양한 판을 이동해오며 이 다양한 경험들을 연결시키고 맥락의 폭을 넓히는 자기주도적학습의 여정이었다.

내가 처음으로 머물렀던 곳은 노리단이다. 노리단은 돈을 받으며 공연을 하는 전문적 공연팀이면서도 동시에 다세대가 모인 공동체 지향적인 그룹이었다. 때문에 이곳에서 음악을 배우고 공연만 했던 건 아니었다. 모든 사람이 공동체를 꾸려나가는 일원이었기 때문에 모두가 공연자이며, 장인이며, 워크숍 강사가 되어야 했다. 어둡고 먼지가 날리는 악기발전소에서 무서운 기계를 다루고 등이 휘어지리만큼 아플 때까지 악기를 만드는 건 힘들었지만, 스스로 악기를 만들고 그 악기를 연주하는 과정에서 공연이 만들어지기까지에 전 과정을 직접 체험해볼 수 있었다. 나만 노리단에서 배운 것이 아니라 나도 노리단에 내가 가지고 있는 자원을 나누기도 했다. 약 두달 정도 초등단원인 나마스테를 대상으로 영어 수업을 진행하며 자원을 공유하는 노리단의 문화를 경험했다.

당시 나는 호주에서 생활을 해왔기 때문에 한국말도 잘 못했을 뿐더러 ‘말을 한 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다. 그래서 단원들이 사용하는 노리단 인트라 게시판에 하고 싶은 말을 글로 쓰기 시작했다. 단원들은 나의 글에 댓글을 달아줬고 때로는 나에게 역으로 질문을 던졌으며, 그렇게 나는 온라인으로 단원들과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노리단의 판돌이었던 팅은 그런 나에게 광주에 교사직무 연수를 하러가는데 자신과 함께 가지 않겠냐고 제안을 했다. 다양한 곳에서 교사로 활동하시는 분들이 모인 자리에서 나는 노리단에 오기까지의 경로와 노리단에서 배웠던 점, 힘들었던 점을 설명하며 나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이 순간이 내가 처음으로 나의 경험을 이야기했던 순간이었다. 노리단에서 워크숍을 진행할 때나 하자투어를 할 때 노리단의 문화를 설명하면서 논리적으로 말을 잘 하는 방법을 배웠으며, 광주 세미나와 같이 여러차례 프레젠테이션을 하며 나의 언어를 키우는 방법을 배우기도 했다.

노리단에서 생활을 하며 나는 기획자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 이유는 두 가지가 있는데, 첫 번째는 공연자를 안 보이는 곳에서 멋있게 연출하는 기획자가 멋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다른 이유는 노리단에서 공연 뿐 아니라 워크숍과 프레젠테이션, 발표 같은 것을 계속 기획하며 무언가를 새로이 ‘만드는’ 행위가 즐겁다고 생각되어서이다. 나는 ‘기획자’가 되고 싶어 하자작업장학교에서 별자리 파티 기획팀이나 작업장학교의 자치회의를 관리하는 학생회 같은 것을 만들 수 없나 생각하던 중 글로벌학교에 들어가게 되었다. 새 학기 시작 전 통역가 겸 예비 죽돌로써 이 판을 알아가고자 영어들 캠프와 태국 현장학습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래서인지 나에게는 세계화를 배우고 다른 환경에 사람들과 만나는 배움보단 노리단에서 배웠던 몸벌레를 연극이나 자서전 쓰기 활동과 병행하여 하나의 새로운 워크숍을 기획했던 경험으로 더 기억에 남았다.

내가 글로벌학교에 들어가며 글로벌학교의 판은 세계에서 서울로 바뀌었다. 그러면서도 서울에서 존재하고 있는 다문화의 순간들을 포착하며 ‘글로벌’이라는 키워드에 끈을 놓지 않았다. 우리끼리 다문화가정, 이주노동자, 코시안 등의 대해 조사하고 프레젠테이션을 함으로써 공부를 해왔고, 삐까번쩍한 서울과 관계가 멀며 이주노동자들이 많은 창신동과, 한국의 전통인 한옥이 재개발되고 개량한옥으로 바뀌고 있는 북촌과 같은 장소들을 방문하였다. 서울이란 도시에 수많은 이미지와 이야기들을 모으며 우린 이 장소들을 투어로 개발하고 가이드 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하자센터에 방문하는 손님들을 대상으로 서울투어 의뢰가 들어왔으며, ‘돈’을 받으며 우리가 방문하고 모은 이야기들이 담긴 장소를 가이드해줬다. 나를 포함한 몇몇 죽돌들은 ‘여행을 하는 것’과 ‘돈을 받는 것’에 로망을 갖고 있었다. 그 죽돌들과 모여 ‘여행디자인센터’라는 임시 명의로 창업 준비팀이 꾸려졌다. ‘여행디자인센터’라는 것은 투어 뿐 아니라 여행에 관련된 정보들을 최대한 많이 모으고, 여행 상담이나 코치도 해줄 수 있는 사람들이 되자는 의지와 욕망이 담겨있었다.

많은 것을 보고 배웠지만 모든 경험이 즐겁고 신나기만 했던 건 아니다. 항상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하기 싫은 일’도 존재했다. 매번 하고 싶은 일은 많고 의욕은 불타올랐지만, 예정된 시간에 끝내지 못하다보니 할 마음은 없고, 여유도 없지만, 정해졌으니 해야만 하는 일들로 변했다. 때로는 어려운 질문들이 생기기도 했지만, 그 질문들에 답할 수 있는 시간이 많이 없었고, 언제나 생각이 지속되기도 전에 프로젝트가 끝나버리곤 했다. 내 자신이 ‘경험’한 것을 ‘학습’으로 소화시키지 못해 혼란스러웠던 적이 대부분이었다. 어느 덧 3학기가 되고 글로벌학교의 팀장을 거치며 주니어 수료가 코앞에 다가왔지만 “무엇을 기획하고 싶니?”에 대한 질문은 여전히 대답하기 어려웠다.

글로벌학교를 하면서 동시에 진행되었던 프로젝트 중 스피카자(통역팀)이 있었다. 스피카자가 처음 결성하게 된 이유는 소위 외국에서 살다온 경험이 있는 하자작업장학교의 ‘유학파’가 한국에 살며 잊혀지고 있는 영어를 공부하기 위함이었다. ‘유학파’라고 한다면 한국 사람들은 굉장히 멋있고 이상적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막상 유학생활을 경험한 우리들의 입장은 달랐다. 유학생활을 마치고 한국에 정착했을 무렵 우리는 가는 곳마다 영어를 잘하냐는 질문세례와 유학파니 잘 사는 집이라며 무시를 받고는 했다. 스피카자의 멤버들은 이러한 이유로 ‘유학’이란 걸 굳이 알리고 싶어 하진 않지만, 우리가 가진 자원이 도움이 된다면 기꺼이 나눠주겠다는 것을 협의한 죽돌들이 모인 팀이었다.

일주일에 한두번씩 모여 번역과 통역을 연습하던 중 스피카자팀이 촌닭들과 홍콩에 갈 기회가 생겼다. 홍콩 창의력학교에서는 창의성 서밋을 개최하게 되었으며, 각국에 많은 활동가와 단체들이 모이는 이 자리에 하자작업장학교의 공연팀인 촌닭들이 초대되었고 스피카자가 통역으로 함께 가게 되었다. 스피카자는 의전과 통역을 임무로 이 여행에 참여했으며, 나는 여행 코디네이터라는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 홍콩이라는 전혀 새로운 환경에서 일정 중 마지막 3일은 판돌들 없이 우리 스스로 일정을 추진하며 나는 태도와 역할의 전환을 경험할 수 있었다.

촌닭들은 워크숍을 진행하기도 했으며, 그 곳에 초대되었던 다른 단체의 워크숍을 듣기도 했다. 이러한 공식적인 행사에서 통역가로 초빙된 것은 처음이었고, 당연히 통역이 매끄럽게 되진 않았다. 하지만 그 워크숍을 그대로 통역에서 전달하는 것보다 이 여행에서 할 수 있는 이야기와 촌닭들이 중요시하는 경험의 장을 만드는 것이 더 중요했다. 지속적으로 촌닭들이 공연과 워크숍 관련 회의나 하루의 리뷰를 할 때 나는 그들에게 코멘트를 해주며, 때로는 안건을 내고 회의를 진행하는 역할이 되기도 했다. 팀별로 찢어져 워크숍을 진행할 때는 1층에서 3층까지 뛰어다니며 필요한 것을 체크하고 촌닭들의 워크숍을 모니터링하기도 했다.

업그레이드 된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건 지금까지 경험했던 것들이 연결되며, 내가 생각할 수 있는 맥락이 조금 더 넓어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노리단의 시간을 통해 조직을 꾸려가기 위해 필요한 요소들, 공연팀이 되기 위해 갖춰야하는 요소들을 어렴풋이 알게 되었기 때문에 촌닭들에게 코멘트 할 수 있는 역할이 될 수 있었고, 여행을 하며 비상사태에 대처할 수 있는 순발력과 몸을 다져왔기 때문에 여행의 판을 진행할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었다. 지금까지 ‘감’으로 알게 되었던 것들이 하나의 시스템으로 인지되며 몸이 움직일 수 있었던 경험이다.

홍콩의 경험을 통하여 스피카자는 두 개의 다른 언어를 그대로 통역하는 사람보다, 다른 두 문화를 만나게 연결할 수 있는 cultural translator에 대한 생각을 지속시키며 한층 업그레이드 되었다. 외국과 한국 두군데 다 정착하지 못하고 혼란스러워하는 유학생이 아닌, 그 중간에서 두 개의 문화를 매개할 수 있는 입장이 되며 하자센터에서 개최한 청소년창의서밋에서 초대장들을 영어로 번역하고, 외국인 손님들을 에스코트하는 역할을 했다.

2008년 스피카자는 efficiency before accuracy(정확성보다 효율성)이라는 모토를 내세우고 있는 글로비시를 알게 되었다. 장 폴 네리에르가 창시한 글로비시(글로벌 잉글리시)는 글로벌한 상황에서 가장 효율적으로 소통을 할 수 있게끔 도움을 주고 있다. VOA(Voice of America)가 선정한 가장 많이 사용하는 1500단어와 24개의 문장구조로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다는 글로비시를 배우고, 서밋을 대비하며 작업장학교의 죽돌들에게 글로비시를 가르치는 작업을 시작하였다. ‘효율성’을 내세우는 글로비시는 학교에서 배우는 입시 영어와는 달리 다양한 영어 발음과 문법이 틀려도 알아들을 수만 있으면 다를 줄 알았으나, 나의 기대와는 달리 글로비시에서는 문법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오히려 스피카자도 헷갈려하는 문법을 죽돌들에게 이해시키기 위해 힘들게 외워야하는 모습을 보며 다른 영어와 다를 것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글로비시와 영어의 차이점을 이해하게 된 순간은 시니어 졸업 프로젝트로 글로비시 인턴을 시작하고 나서였다. 4일간 글로비시 캠프를 진행하고, 하자작업장학교와 꿈터학교를 대상으로 워크숍을 진행하며, 나는 비즈니스맨을 위한 글로비시를 10대를 위한 글로비시로 변환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그러면서 현장학습 때 배운 englishes(영어들)과 글로비시를 비교할 수 있었다. 글로벌학교 때는 사회적 약자, 소수자를 중심으로 현장학습을 해왔으며 나와 다른 공간에서 다른 삶을 살았던 사람들을 만나고 글로벌 감수성을 키우게 되었다. 우리와 틀리다(wrong)라고 말하는 게 아니라 우리와 다른(different) 그들을 인정하며 그들과는 영어들로 소통을 하였다. 영어들은 미국이나 영국, 캐나다와 같이 영어권 지역에서만 사용되는 영어가 아닌 필리핀, 말레이시아, 일본에서 사용되고 있는 문화에 따라 독특한 표현과 발음이 되는 영어도 영어로서 존중을 하자는 취지에서 만들어진 개념이다. 발음이 달라도, 말하는 게 익숙지 않아 손발을 사용하며 말을 해도 우리는 서로의 다름을 통해 서로의 문화를 아는 게 더 중요한 시간이었다. 하지만 현재 나는 하자작업장학교에 있고, 서밋에서 통역을 하는 입장에서 영어를 사용하는 취지 자체가 달랐다. 서밋에서는 각자 다른 학교나 기관에서 창의적인 방법과 길에 관해 듣고 토론을 하기 위해 모인 것으로, 서로의 다름과 문화적 요소들을 존중하는 것보다 서로간의 의사소통이 잘 되는 것이 우선이었다. 글로비시는 오히려 소통에 방해가 되는 문화적인 요소들을 최대한 뺀 진정한 소통의 언어이다. 허나 글로비시 같은 경우는 나와 상대방 둘 다 글로비시를 사용하자는 약속이 되어야 소통이 가능한 하나의 문화를 만들어주는 약속이다. 글로비시는 다양성과 문화를 이해하는 영어이며, 글로비시는 세계화사회에서 평등을 요구하며 소통을 가능하게 하자는 영어이다. 나는 이 둘을 배우며 think global act local을 이해하고 실천하게 되었다.

이런 이해 단계를 거치며 하자작업장학교와 꿈터학교를 대상으로 글로비시 워크숍을 진행했지만, 이들이 글로비시에 이런 부분을 이해했는지는 의문이다. 특히나 꿈터학교는 영어를 잘 하지 못하는 중학생들이었으며, 이들이 영어를 배우는 이유는 검정고시를 잘 보기 위해서였다. 글로비시의 문장구조를 이해하는 부분을 꿈터학교는 굉장히 어려워했으며, 쓰기 연습도 많이 했지만 게임이나 노래를 통해 배우며 영어에 대한 두려움을 재미로 승화하는 단계까지밖에 접근하지 못했다. 하자작업장학교의 문제점은 또 달랐다. 개개인이 글로비시를 스스로 지속시킬 수 있게 글로비시팀은 24개의 문장구조와 1500단어를 사용하여 작업장학교에서 자주 사용하는 문장이나 상황을 주제로 글을 썼으나, 이 텍스트를 가지고 공부를 하며 자기주도적으로 복습을하고 학습을 하는 방식을 찾지 못했으며 나와 글로비시팀이 ‘강사’가 되었다.

어느 순간 ‘강사’가 되고, 회의, 글쓰기, 프린트의 글로비시 텍스트 제작방식이 되풀이되며 글로비시는 나에게 또 하나의 ‘하기 싫은 일, 해야 하는 일’이 되어버렸다. 시니어 과정에서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을 하며 먹고 살고 싶은가?“에 대한 질문이 생겨나며 나는 주니어 때 ’어떠한 기획을 하고 싶은가?‘에 대한 질문과 비슷한 질문을 또 직면하고 있었다. 물론 시니어 과정에서 living literacy나 youth talk 프로젝트를 통해 사회와 졸업 이후 나의 위치를 생각하며 먹고 살기의 맥락으로 질문은 주니어 때보다 더 구체적이면서도 현실적이게 되었다.

living literacy, 즉 삶의 맥락을 읽는 이 프로젝트에서 우리는 슬럼독 밀리어네어, 11번째 시간과 같은 자료들을 함께 보며 토론을 하는 시간을 가졌다. 또한 우리는 홍콩창의력학교와 비디오 컨퍼런스로 youth talk를 진행하며 도시, 그 안에서 살고 있는 10대의 문화와 삶에 대해 토론을 해볼 수 있는 시간이 되었다. 지금은 공사로 인해 흙으로 뒤덮인 하자작업장학교의 옛 운동장의 추모식을 치르면서도 이렇게 재개발되고 빠르게 움직이는 도시 속에서 정규 직업을 가질 수 없기 때문에 ‘소비’만을 하게 되는 10대의 입장을 생각하면서, 이제는 졸업을 앞둔 내가 작업장학교의 소속이 사라진다면 어떤 사람이 될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은 커졌다.

시니어 게더링 시간 때 시니어들은 옛 글로벌학교 판돌이셨던 기호의 ‘아무도 남을 돌보지 마라’라는 책을 읽게 되었다. 신자유주의시대가 되며 사람들은 질적으로 빠르고 최고인 것을 선호하고, 이렇게 형성된 스펙사회가 많은 사람의 생계의 문제로 연결되고 있음을 느꼈다. 나는 이 사회의 전체적 맥락을 알면서도 제도에 끊임없이 질문을 하며 녹아들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하자작업장학교를 찾은 모든 죽돌들은 사회에서 당연하다고 여기는 제도권 학교를 어떠한 방식으로든 이탈한 사람들이고, 스스로 새로운 길을 만들어 나가야하는 여정을 시작한 사람들이다. 나와 함께 프로젝트를 했던 많은 동료 죽돌들은 현재 대학에 들어가 있거나, 대학을 준비하고 있다. 처음 하자작업장학교에 들어왔을 때는 대안학교를 다녔으며 대학을 가는 건 아이러니한 행동이라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그들이 대학에 가는 이유는 하자작업장학교에 와서 스스로에게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질문하는 법과 가고 싶은 길을 만드는 법을 배우며, 그 곳에 가기 위해 현실과의 타협도 필요하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제도권학교와는 달리 대학은 우리의 최종목표가 아니며, 우리가 하고 싶은 것을 하기 위해 사회에 정착하고 우리의 영역을 만들기 시작하는 하나의 단계일 뿐이다.

나는 스펙사회에 녹아들고 싶지 않다. 영어도 한국 사회에서는 하나의 스펙이 되고 있으며, 내가 글로비시를 했던 것은 스펙사회에 맞서는 일종의 시위라는 것을 말하고 싶다. 기획자에서 판을 만드는 사람으로, 통역가에서 문화를 연결 짓는 사람으로 성장해온 나는 이제 제 4섹터에서 작업을 하는 문화매개자가 되고 싶다. 1섹터가 정부, 2섹터가 민간기업, 3섹터가 비정부 비영리 단체라면 4섹터는 최근에 등장한 새로운 영역이다. 영리적인 사업활동을 통해 이익을 만들며 비영리적인 사회활동을 하는 단체를 제4섹터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이 영역에서 계속 의문이 드는 제도에 녹아들지 않고 새로운 문화와 공간을 만들면서도 생산적인 이야기와 이익을 낼 수 있는 곳을 만들고 싶다. 하자작업장학교에서 나는 새로운 문화를 만들 수 있는 가능성과 힘을 기르게 되었다. 이제 하자작업장학교의 보호망에서 벗어나 사회에 나가게 되며 나는 불안하기도 하고, 걱정이 되기도 하지만 나는 이제 하고 싶은 일을 구상하면서도 현실적으로 계획해나갈 수 있는 방식을 알게 되었다. 많은 판을 이동하며 계속해서 깜빡거렸던 나의 불이 지속될 수 있길 바라며, 나는 문화매개자가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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