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고 싶은 일 하면서 먹고살기
포지션의 변화를 통해 일을 대하는 태도를 배우다.

오년 전 나는 내 가슴을 불쏘시개처럼 뜨겁게 만드는 것에 집중하고 있었다. 당시 내가 억압당하고 있는 것-이해할 수 없는 아빠의 행동과 두발자유냐 두발자율이냐 혹은 체벌문제가 옳나, 그르냐에 의견을 표하며 집과 학교 안 밖으로 집회를 하러 다녔다. 그것을 통해 만났던 운동 판의 20대, 30대들과 혁명이란 단어를 서슴없이 쓰며 지금 생각해보면 일회적이고 욕지거리에 그쳐버리는 대화를 일상적으로 나누었다. 뒤돌아보면 이런 경험들이 모아져 깊은 수준의 공부와 사유를 할 수 있었으리라는 생각이 들지만 그저 일상적 자극으로만 남게 되었다. 이 때를 단순화시켜 말하고 싶지는 않지만 어찌 되었든 아빠와 학교, 선생님에 대항하며 짧은 시간 동안 큰 에너지를 발생시킨 시간이었다. 중학교를 졸업하면서는 더 이상 일반학교나 선생님은 필요치 않으니 다른 교육을 받고 싶다고 말하면서 내게 ‘도망치는 거냐?’ 라고 반문하던 운동판을 떠났다. 그렇게 오게 된 하자센터는 나에게 별천지였다. 공존과 배려에 대한 일곱 가지 약속과 멍석방의 멍석을 보면서 가슴 떨리면서도 학교라면 당연히 이래야지하고 아무렇지 않은 척 했다. 하자센터가 지키고 있었던 약속과 문화들이 얼마만큼의 노력과 기다림이 요구되는지 짐작하지 못했다.

길찾기 시절 들어간 공연단은 나에게는 처음으로 ‘같은 팀원’이라는 누군가가 생기는 경험이었다. 당시의 공연단은 자시의 미래가 얼마나 불안한지에 대해 재확인하며 서로의 애정과 관심에 목말라 있었다. 울기도 많이 울고 실랑이도 많이 벌였다. 그러면서도 -대견하게도- 약 반년 동안 여러 파티를 기획하고 공연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크리스마스 파티>나 <합숙 깜짝 공연> 등의 파티는 누군가와 함께 즐기는 공연이라기보다는 소리 위가 학기 동안 갈고 닦았던 것을 뽐내는 것에 집중되었다. 뮤즈는 일련의 과정을 통해 공연단 안에 파트너십과 끈끈한 정이 만들어지기를 바랐지만 생각처럼 그것들이 잘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서로가 서로에게 찰나의 위로가 있을지언정 그 다음 단계로의 진행이 힘들었던 것이다.

다음 년도 봄, 공연단은 휘의 Directing 아래 브라질리언 스타일의 음악과 공연을 하는 팀 ‘촌닭들’로 다시 탄생했다. 공연을 대하는 방식도 바뀌었다. 더 이상은 학예회를 하는 학교 공연단이 아니라 돈을 받으면서 일하는 ‘프로페셔널’한 팀으로 변화하는 것이 초기의 목표였다. 하지만 그 ‘프로페셔널’ 한 것이 과연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는 일을 처음 접하는 십대로서는 정확히 알기 어려웠다. 팀이 결성될 당시 휘는 몇 가지의 룰과 키워드를 제안했다. 어느 정도 이상의 실력을 위해 주 2회씩 보컬/퍼커션 워크숍을 통해 훈련 할 것, 출석부를 만들어 지각/불참을 몇 회 이상 하는 팀원에게 패널티를 줄 것, 아침마다 정해진 책을 읽고 이야기 하는 시간을 가지는 것 등이었다. 출석부 같은 반강제적 체크 도구가 과연 긍정적인 도구일까? 라는 회의가 들었지만 공연단의 지지부진한 경험을 다시 하고 싶지 않아 일정 기간 출석부 제도가 존재하는 것에 동의했다. 공연단 때와는 달리 휴식을 허락지 않는 스케줄과 엄격한 페널티 부여는 생각보다 더 효과가 있었다. 지각과 잠수타기가 일과였던 기존 공연단 멤버들은 예전과는 다른 필사적인 몸부림을 보였던 것이다. 그 즈음 촌닭들의 첫 번째 외부 공연 제안이 들어왔다. 바로 인사동에서 진행되는 <영덕군 홍보 공연>이었다. 약 30분의 공연을 채우기 위해 촌닭들은 갖고 있던 노래들을 총 동원하여 레파토리로 만들어야 했다. 이렇게 body-change 프로젝트는 성공적인 것처럼 보였으나 그렇지 않았다. 얼마안가 다시 예전 수준만큼은 아니지만 지각문화가 만연해졌고 우리의 공연 수준도 더 이상 나아지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때맞춰 급작스럽게도 촌닭들의 담임이었던 제리와 후일 팀장을 하려던 팀원 테리가 촌닭들을 나가게 되면서 예기치 못하게 내가 팀장역할을 맡게 되었다. 준비되지 못하고 무담임 체제로 바뀐 십대 공연단의 팀장을 맡기 위해서는 나도 팀도 작정하고 몰입하는 시간이 필요했다. 과연 촌닭들이 프로페셔널한 팀이 될 수 있을까? 존속 가능할까? 라는 의문이 끊임없이 들었지만 생색내지 않고 아침모임, 연습, 워크숍 등을 이전 학기와 다름없이 진행하기 위해 노력했다.

 

2009년에 접어들면서 하자센터의 메인 사업이 하자작업장학교에서 사회적기업을 인큐베이팅하는 ‘창프로젝트’ 로 변하게 되었다. 하자센터 안에 예비 사회적 기업들이 본격적으로 만들어지는 움직임으로 사업설명회가 열렸다. 이야기꾼의 책공연 팀에는 약 삼십명 정도의 사람들이 모였다. 각자가 이곳에 왜 오게 되었는지, 어떤 바람을 갖고 있는지 자유롭게 이야기가 오가면서 나는 새로운 사람들이 모였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지금까지 나는 소리위와 촌닭들을 통해 또래친구들을 만나며 진한 경험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야기꾼의 책공연에 들어가면서 구도가 조금 바뀌면서 내가 가장 어린 사람이 되면서 나보다 앞서나간, 경험이 많은 '선배집단'을 만날 수 있었다.
선배들을 만난다는 것은 나의 과거-미래와 계속 만나는 과정이었으며 이 시간들은 나에게 굉장히 특별했다. 2008년의 겨울이 지나자 팀이 본격적으로 조직화되었다. 이야기꾼의 책공연 팀에는 20대부터 50대까지 다양한 연령층의 사람이 모이게 되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연출, 연기를 이미 해오던 사람으로 이십대들은 보통 대학을 졸업한 후 이 팀에 바로 오거나 또래 사람들끼리 자발적으로 팀을 이루어 작업 및 프로그램을 해오던 분들이다. 30~40대 분들은 노리단 단원이나 대안학교 선생님 등 여러 분야에서 다양한 작업을 해오던 사람들이었다. 때문에 더더욱 내 태도나 위치에 관한 고민이 들었다. 경력과 실력이 그저 후배로만 있고 싶어 이 팀에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 것은 나이의 지난 하자의 문화를 모르고 이곳에 온다면 어떤 문화가 만들어질지 걱정이 되면서 적어도 우리 팀 안에서의 문화는 잘 형성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있었다. 특히 나이, 계급에 관한 일반적인 관습, 습관은 스스로 알아차리기도 힘들뿐더러 제도적으로 개인이 초월하기 힘든 문제이기 때문에 어떤 식으로든 나에게 가장 민감한 부분으로 다가올 것 같았다. 그런 것은 사소한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우리 팀 안에는 Hot한 사람들이 많았다. 전반적으로 유쾌하고 유머러스하고 친절했다. 스킨십도 잦고 충돌하거나 다툼도 별로 없고 모두 상부상조하면서 살아간다. 때문에 내가 너무 분위기에 휩쓸리면 정말 막둥이 이미지를 갖겠구나 싶었다. 어떻게 해야 될까 고민하다가 내가 내 이미지를 스스로 만들기로 마음먹었다. 막말하지 않고 절제해서 말하기, 정제된 행동하기 등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조금 웃기지만 예를 들면 이렇다. 우리 팀원 중에 한명이 “우리 나르샤~” 하면서 엉덩이를 두드리고 지나가면 나는 최소한의 반응만 보이는 것이다. 살짝 웃으면서 네? ^^ 라고 대답하기. 엉덩이 두드리지 마세요. 너무 가벼워질 것 같습니다. 라고 말할 수도 없고 으잉! 변태! 라고 얘기하면서 나도 가벼워질 수도 없으니 저런 방법을 택한 거다. 효과가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적어도 다른 사람에게 애교를 부리거나 귀염 떨지 않으려 한 것에는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가 하면 개개인의 위치를 구속시키는 것들이 있다. 이런 나이, 계급에 관한 차별 아닌 차별 예를 들면 아주 사소하게 팀에게 음식이 오면 나이 많은 사람부터 챙겨준다던지, 내가 어리기 때문에 어떤 것을 양보 받는다던지 하는 것이 나쁘다고 볼 수 는 없지만 그것이 어떠한 영향을 주는지 알게 되었다. “~는 어리니까 좋겠다.” “젊은 나르샤” 등 쉽게 오가는 말들이 나의 위치를 구속시켰다고 느낀다. 때때로 나는 어리니까 좀 더 risk를 적게 가져가도 되겠지 라는 생각이 들게 되더라. 프로젝트가 하나 진행될 때도 거기에 참가하는 모든 이가 동등한 개체로 프로젝트를 꾸리고 가게 될 수 있다면 좋겠다. 그렇다면 내가 어떻게 유연하게 대처할 것인지, 만나는 사람들에게 내 모습이 어떻게 보여 졌으면 좋겠는지 고민을 해야 한다. 이미지는 스스로 만들어가야 하는 것이다.

여름이 되자 정직원으로 계약을 하게 되었다. 당시 인턴에서 정직원으로의 계약이 물 흐르듯 진행되어서 예상치 못했지만 내 포지션에 많은 변화가 있었다. 없더라도 있어야 했다. 지난 인턴에서의 생활이 팀의 관찰이나 흐름을 파악하는 것에 좀 더 중점을 맞춘 것이었다면 정직원으로 계약한다는 것은 사회적기업을 준비 중인 예비 기업의 창업멤버로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즉 내가 원하는 이야기꾼의 책공연의 상, 내가 원하는 이야기꾼의 책공연의 멤버 모습 그리고 그 안에서의 내가 뚜렷이 설정되어 그것을 목표로 삼고 이야기꾼의 책공연팀의 동력이 될 수 있도록 스스로 움직여야 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관찰자의 시선을 버리지 못했다. 이야기꾼의 책공연팀이 왜 사회적기업인지, 의미있는 활동인지 의문을 갖게 되면서 이야기꾼의 책공연팀의 이상적인 모습은 물론 확신이나 희망 조차 갖기 어려웠다. 히옥스의 말마따나 그런 부정적인 에너지가 병을 불러 일으켰는지 내 몸은 여기저기 아프기 시작했다.  급하게 휴가를 내고 몸도 추스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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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업과 다양성이 팀의 발전에 도움이 되는 이유
질문을 던지고 도망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질문을 스스로 풀기 위해 몸을 던지는 것이 중요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야기꾼의 책공연 멤버들과 실제작업을 하게 되면서 더욱더 깊게 만날 수 있었다. 다들 자신만의 노하우와 시선이 있었다. 말이 멋들어지거나, 뽀대 나지 않아도 몸에서 풍겼다. 그건 오랜 시간 동안 일상에서의 꾸준한 훈련에서 나오는 오로라 혹은 노하우였다. 또래 집단들과 있을 때는 아이디어가 많아도 실제로 그것을 구현하는 하는데 많이 애를 먹고는 했다. 하지만 이야기꾼의 책공연에서는 하나의 아이디어가 수십가지의 노하우와 경험을 통해 프로젝트로 만들어지는 사례가 많았다. 한마디로 경험과 아이디어 그리고 추진력이 아우러져 탁상공론이 없었던 것이다.


서문, 맺음말 준비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