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volve, 얽히고설켜 함께 살기

하자작업장학교에서의 학습에 대한 얘기를 하기 이전에 학교에 대한 얘기를 먼저 해보려고 한다. 1998년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나는 2010년인 지금까지, 쭉 어떤 학교들 안에서 살아왔다. 사실 1학년 부터 3학년까지 다녔던 한국의 초등학교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오히려 나에게 강렬한 인상으로 남은 학교에서의 생활은 영국에 있었을 때 인 것 같다. 영국에서 나에게 학교에 간다는 것은 홀로 남는다는 것이고, 알아서 모든 것을 헤쳐가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언어를 알아듣지 못하는 상황에서, 직접적으로 나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은 학교에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스스로 '눈치'라는 것을 기르며 눈치껏 남을 따라다니며 교내식당이 어디 있는지 알아내고, 흘낏흘낏 주변을 훔쳐보며 숙제가 뭔지 알아내는 방법을 터득했다. 이때 나 자신의 표현이란 것은 없었고 그저 남들이 학교에서 기본적으로 하는 일들을 나도 똑같이 하기 위해서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언어를 배우고 나서는 비교적 자유로워졌지만 그렇다고 해서 학교라는 곳이 편해진 것은 아니었다. 학교의 입장에서 볼 때, 성적이 좋았던 나는 별 문제가 없어 보였을지 모르지만 나에게 학교는 지식과 앎이 있는 배움터도 아니었고 그저 나 자신을 학교 안에 있는 인간으로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곳이었다. 당시 나에게 있어 학교는 세계의 전부였다. 지금 와서 보면 그렇게나 좁은 세계 안에서 공부에 열을 올렸던 것도 아니고 도대체 무엇에 대해 고군분투 했는지 뚜렷하지는 않다. 하지만 적어도 그 상황을 한 바탕 겪고 나서, 내 마음은 이미 학교를 떠났다. 한국에 와서도 상황은 그렇게 다르지 않았다. 내가 관계하는 것은 사적인 공간인 집과 공적인 공간인 학교, 이 둘뿐이었고 내 모습도 자연히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으로 나뉘어갔다.

하자작업장학교는 처음으로 집도, 학교도 아닌 곳으로 다가왔다. 아니, 집과 학교가 따로 분리되지 않는 것을 경험했던 곳이 하자작업장학교라고 생각한다. 하자에 다니는 동안 나는 영상을 계속 만들어왔지만, 영상을 만드는 나와 또 다른 내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자에서 친구들과 북적북적 영상을 만들었다면 집에서는 영화를 보거나 내일 또 만들 영상을 생각했다. 처음으로 내가 지금 하는 일이 하나의 연속성을 가질 수 있는 것이고, 학교 안에 있는 다른 친구들도 나와 같이 배우고, 또 일상을 공유하기도 하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할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때로 나는 하자 안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참여하는 데 집중하기도 했고 조금씩 시야를 넓혀, 하자라는 공간이 속해 있고, 내가 속해 있는 사회와 세상을 인식하는 노력을 했다. 그렇게 해서 알게 된, 하자가 만들어진 배경, 지금도 하자가 존재하는 이유가 되는 사회란 내가 이곳에서 경험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문제들을 안고 있었고 십대로서 내가 하자에서 여태 누려왔던 '자율'이라는 것이 얼마나 희소하고 소중한 것인지 다시 한 번 깨닫게 했다. '자율'과 '자기주도적학습'을 바탕으로 둔 하자의 판 안에서 시작된 나의 학습은 그 나름대로의 역경과 고민이 있었지만 궁극적으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찾고 실험해볼 용기를 가지게 해주었다. 이제 하자를 졸업하고 밖으로 진출할 시점에서 나의 가장 큰 고민은 어떻게 지금껏 이어왔던 나의 학습을 지속시킬 것인지, 또, 이것을 단지 내 선에서 이어가고 잘 사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다른 사람들과 나눌 수 있을 지이다. 이 문제는 지금 내게 굉장히 중요하다. 3년 동안의 시간 동안 내가 하자에서 학습해왔던 것은 '함께 살아가는 법'에 대한 고민을 시작하게 된 계기였기 때문이다.

지난 졸업식 송사를 쓰면서, 나는 졸업이라는 것이 하자작업장학교에 하나의 기여가 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했었다. 내가 생각하는 '졸업'이라는 것은, 하자라는 대안적 공간 안에서 그 동안 쌓아왔던 나의 경험과 시간을 하나의 흐름, 연장선으로 잇는 작업이고 그것의 완결성을 부여하는 것이다. 또한, 이곳에서의 시간을 '완료'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다른 현장에서의 시작을 여는 것이기도 하다. 이때 졸업이 기여가 된다고 말한 것은, 하나의 완결성을 띄게 된 졸업생들의 경험 그 자체가 그의 동료, 후배들, 심지어는 판돌과 학부모들에게 대안적 학습경로에 대한 영감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제 하자작업장학교는 9년 동안의 긴 시간을 정리하고 새로운 시즌 2를 준비하는 일정을 앞두고 있다. 나는 이 변화가 슬프거나 안타까운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꼭 필요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2007년에 입학한 죽돌로서, 나보다 6년전에 하자센터에 다녔고 내가 지금 다니고 있는 하자작업장학교라는 것을 구상해낸 죽돌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뭔가 래디컬하고, 자기주장이 강한 것이 하자 스타일이라고 생각했는데 나로서는 그렇게 하기가 쉽지 않아서 힘들었던 적도 있었다. 그러나 누가 누구처럼 되고 못되고, 하자 고유의 문화가 있고 없고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하자라는 동네는 그 이전에, 변화를 수용할 수 있고, 일부로 적극적으로 변화를 만들어가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이제는 10년이 지나서 새롭게 이슈화 되는 것들이 생겼고, 하자를 찾는 10대들 또한 여러 의미로 달라졌다. 탈학교한 10대들이 찾아갈 수 있는 새로운 배움터가 전보다 훨씬 많아졌고 하자 죽돌들의 기대도, 분위기도 다르다. 나는 시즌 2라는 것, 혹은 시즌 1을 마무리 하고 시즌 2를 시작하기까지의 시간이, 이러한 변화에 작업장학교가 자기 몸을 맞춰가는 데에 꼭 필요한 시간이라고 생각한다. 9년 전 하자센터 죽돌이었던 원이 학교 만들기를 했던 것처럼 지금 시즌 1의 수료생 중 몇 몇은 시즌 2의 학교 만들기를 같이 한다고 한다. 나는 시즌 1의 마지막 졸업생이자, 마지막 8개월을 그들과 함께 했던 죽돌로서, 한 번쯤 격려의 말도 해보고 싶고 앞으로 다른 곳으로 가지만 항상 마음 한 구석에 하자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을 거라고 말하고 싶다.


1. 캐치스코프라는 팀과의 만남

누구나 처음 새로운 공간에 발을 들일 때면 적응기를 겪는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적응기를 마친 후 다시 한 번 이곳에 붙어 있을지, 아니면 또 다른 곳을 찾아 떠날지 고민하곤 한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영국으로 가게 된 나에겐 2004년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입학한 제도권 중학교의 3년 과정이 한국생활에 대한 적응기였고 학교라는 곳에 대한 적응기였다. 3년을 그럭저럭 보낸 후 내가 선택한 것은 다른 곳을 찾아 떠나겠다는 것이었고 그렇게 해서 찾은 공간이 하자였다. 어딜 가나 깊숙이 나를 연루시키지 못했던 나는 보이진 않지만 항상 떠날 채비를 한 채 하자작업장학교의 길찾기 과정을 보냈다. 그때까진 오로지 나 자신만이 어떤 결정의 기준이 되었고 외부의 어떤 것이 내 선택에 영향을 끼칠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길찾기 과정은 생각보다 빨리 끝났고 내가 처음 이곳에 와서 해보고자 했던 영상은 차마 다 해보지 못한 것 같았다. 그래서 주니어 과정을 시작하기로 마음먹었고 2007년 9월, 새롭게 만들어진 캐치스코프라는 영상팀의 멤버가 되었다. 캐치스코프에서의 시간은 나에게 진정 어떤 팀의 구성원이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팀 작업이라는 것은 나 스스로에게 어떤 요구가 필요한 것인지를 경험하게 해 주었다.

첫 번째 팀 작업이었던 'Focus on: interview'는 우리가 직접 인터뷰 하고 싶은 사람들을 선정해서 그들을 리서치하고, 실제 이 영상을 보게 될 10대들에게 영감이 되어줄 질문리스트를 만들고 직접 인터뷰까지 하는 과정을 담고 있었다. 영상은 찍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던 초짜인 나에게 한 편의 영상을 만들기까지 필요했던 기획(수많은 회의와 토론), 촬영(세트 제작까지), 편집(보여줄 대상을 생각하며 전달하고자 하는 말을 명확히 하는 것)의 과정은, 영상이 하고 싶다는 마음 하나 가지고 만만하게 볼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해주었다. 또한 이 만만치 않은 과정을 혼자 할 수 없고 끊임없이 코멘트를 던져주는 작업동료들이 필요하다는 것과 나도 그런 작업동료가 될 수 있도록 우리가 함께 하는 작업에 자신을 commit해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첫 팀 작업을 무사히 끝내고 나의 주니어 1학기를 마무리하는 시간이 다가왔다. 이때 영상방 판돌이셨던 유리는 우리가 각자 개인작업을 해보는 것이 좋겠다는 제안을 하셨다. 그래서 나의 첫 개인영상작업인 '그리고 문을 열었다'를 만들게 되었다. 이유는 잘 알 수 없지만 대개 처음 자기 영화를 찍는다거나, 그림을 그리는 죽돌들을 보면 약간은 알 수 없는 추상적인 언어로 자신을 표현하고, "표현했다"는 것에 굉장히 큰 의미를 둔다. 나 또한 첫 개인작업의 주제를 '표현'이라는 것으로 가지고 갔고 그때 카메라라는 것은 나 자신을 들여다 볼 수 있는 도구, 이전까지 나 자신에게 무심했던 시간에 다시 집중하며 스스로를 치유하는 하나의 도구로서 다가왔다.

주니어 수료와 더불어 8번째 개교기념을 준비하며 당시 수료생들과 이 치유의 도구라는 것에 대해 얘기를 나눴던 적이 있다. 그때 우리는, 처음 매체를 접한 경험이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문을 열어주었다고 동의했었다. 하자작업장학교가 개교한지 8년이 되었고 첫 졸업생들과 우리 사이에는 약 10년의 나이차가 존재한다. 학교를 뛰쳐나와 하자센터의 문을 열었던 첫 졸업생들에게는 학교를 나온 경험이 어쩌면 자신의 문제와 제도, 혹은 사회의 문제가 연결되어있다는 인식의 시작이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들의 목소리와 경험이 담긴 10년 전 영상과 글들을 보면서 마치 그것들이 하나의 투쟁 같다는 생각을 했고 한편으론 어떻게 저렇게 대담하게 자신의 문제를 10대의 문제, 나아가서 사회의 문제라고 하면서 발표할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나는 제도권을 나올 때 그것이 나 이외의 누군가를 대변할 수 있는 움직임이라든가 제도에 대한 고발이라든가 하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중학교 졸업을 하는 시점에 나에게 여러 가지 길들이 있었고 그 중 하나가 대안학교에 진학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학교에 다닐 때, 나는 스스로를 어느 부분에서 특별하다고 생각했지만 그 특별함이 겉으로 드러나거나, 내가 특이한 인간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약간 쿨한척 하면서 누군가 말을 시키면 할 말이 있어도, 격렬히 반응한다기보다는 그 말을 되려 삼켰고, "좀 내버려둬"라는 태도를 취하며 이것이 바로 나의 시크함을 유지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때 하자에서 접한 매체라는 것은 다시 한 번 나에게 "너의 이야기가 뭐니? 표현해봐"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한 번도 이전에 나의 이야기가 없다 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그냥 내가 말 안할 뿐이지..," 그러나 정작 하자에서 말을 시작해 보려고 하니 그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일목요연하게 말하는 것도 안됐고 내 말은 남들에게 잘 전달되지 않는 것 같았다. 나는 말하지 않았던 그간 동안 나의 언어, 말하는 법 또한 잊었던 것이다.

2007년 3월에 들어온 우리 기수의 개인작업들을 살펴보면 유난히 "내 방에서 나오다", "나 자신을 맞닥뜨리다"라는 말을 많이 하고 있다. 우리는 그렇기 때문에 '표현할 수 있기까지'의 시간을 중요시 여겼던 것 같다. 다시 자기 자신의 이야기에 집중해보고, 그것을 매체를 통해 표현해보는 경험을 통해, 우리는 각자가 겪고 있던, 일종의 '실어증의 상태'를 치유했다고 말한 것 같다.

나는 나의 첫 영상에 '그리고 문을 열었다'라는 제목을 붙이면서, 나 자신을 내 방안에 고립시켰던 시간들에 대해 성찰하며 영상을 통해 그 방문을 열었다라고 말하고 싶었다. 영상을 접하고, 팀을 만나고 했던 주니어 1학기는 나에게, 처음으로 어떤 공간과 사람들 속에 나 자신을 involve시키는 것을 시작하게 된 계기였다고 생각한다.

처음으로 involving되는 것을 경험했다. 늘 떠날 채비를 하고 있던 나에겐 다른 사람들에 대한 인식, 내가 시작한 일, 관계 맺는 사람들에 대한 책임감 같은 것은 없었다. 하지만 캐치스코프와 보냈던 6개월이라는 시간 동안 나는 팀 안에 깊숙이 연루되어봤고 내가 다른 팀 멤버들로부터 배운 점, 나아가 하자가 나에게 제공해준 이 경험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이 '감사함'은 내가 조금 더 이 공간에 머무르면서 이제 막 할 수 있게 된 일들을 캐치스코프가 나에게 나누어줬던 것처럼 다른 죽돌들과 나누고 싶게 했고 내가 이 공간에서 영상을 배우는 것, 사람들과 관계 맺는 것에 대한 책임감을 가지게 했다. 그저 내킨다고 나가는 것은 이제는 무책임한 행동이라고 생각했다.


2. 글로비시, 소통의 언어

2008년, 히옥스가 '글로비시로 말하다'라는 책을 가지고 왔다. 당시 나름 '유학'생활을 하다 와서 영어를 잘하는 죽돌, 리사, 환, 나에게 하자 죽돌들 대상으로 '글로비시'수업을 진행해보라는 제안을 하셨다. 영상방에 있으면서 '내 일'에 대한 책임의식은 느끼게 되었지만 사실 누군가를 가르쳐본 경험은 없었고 남들 앞에 서는 것도 무서웠다. 약간은 판돌들 눈치를 보며 "안 하고 싶은데..."라는 말을 속으로 삼키며 결국 시작했다. 시작한 일에 대한 책임감은 막강했으므로 이 글로비시 수업은 2008년 이래로 시니어 과정을 하고 있는 지금까지, 아마 내 졸업식 바로 전날까지 계속할 것 같다.

글로비시(글로벌 잉글리쉬)는 프랑스인인 장 폴 네리에르씨가 창시한, 언어의 새로운 개념을 제시하는 영어이다. 수많은 세계인이(영.미권 제외) 글로벌 랭귀지인 영어를 배우려 안간힘을 쓴다. 한국의 십대들, 이십대들, 직장인들 또한 "영어는 기본이니까..."라며 주저 없이 대형 영어학원에 등록하고 영어능력을 증명하려고 토플, 토익점수를 올리는데 시간을 쏟는다. 이때 영어는 '언어'가 아닌 개인의 능력치를 증명하는 스펙일뿐이다. 높은 토플 점수를 받는 것은 자신의 지위를 높일 수 있는 하나의 출구이다. 장 폴 네리에르는 이러한 배경에서 영어를 대신할 글로비시를 새롭게 고안했다. 기존의 영어가 '소통'이라는 언어의 근본적인 의미를 잃었다면 글로비시는 '소통'의 목적을 가장 중요시 여긴다. 다른 언어를 쓰는 사람과의 만남을 피할 수 없는 세계화 시대에 서로가 서로를 가장 잘 이해할 수 있고, 내 말을 알아듣기 쉽게 전하는 방법을 택한 것이 글로비시이다. 때문에 글로비시는 소통에 방해가 되는 문화적 특성을 가진 표현들을 포함하지 않는다. 농담, 비유, 우리가 암기할 수 밖에 없었던 관용구들이 문화적 특성을 가진 표현들이다. 그 대신 영어를 이루고 있는 가장 기본적인 문장구조 24개를 배우고 가장 많이 쓰이는 단어 1500개를 외운다. 네리에르씨는 이 두 가지를 완벽히 소화하면 전 세계 사람들과 소통하는 데 아무런 어려움이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네리에르씨는 비즈니스맨이었다. 네리에르의 글로비시는 글로벌 마케팅을 추진하는 기업인들이 서로 효율적이고, 경제적으로 소통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것이었다. 어쩌면 글로비시라는 개념이 만들어진 '세계화'라는 배경이, 네리에르씨의 관점에선 기업과, 비즈니스맨들이 중심에 서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따라서 글로비시라는, 영어의 '대안'이라는 것이 세계화 시대에 살고 있는 모든 글로벌 시티즌에게 해답이 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우리의 일상이 비즈니스만으로 이루어져있지 않기 때문이다.

하자에서 글로비시를 가지고 들어온다고 했을 때는 100%를 원본에 의지한다기보다, 글로비시의 기본적인 원칙들, 어려운 단어를 안 쓴다거나, 불필요한 표현들을 외우지 않는다거나 하는 것, 그리고 어떤 소통의 언어로서의 의미를 가지고 오기로 했다. 그래서 리사와 나는 '하자 글로비시', 또는 대안학교에 있는 청소년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할 때 유용할 단어들로 1500단어를 재구성하고, 기존에 있는 글로비시 텍스트 북 외에 우리만의 워크북을 만들고 텍스트들을 써나가는 등의 노력도 했다. 이때 하자의 글로비시 수업은, 거의 영어를 처음 배워보는 죽돌들을 대상으로, 비교적 쉬운 표현들을 통해 영어를 배워보고, 한편으론 계속 self-study 방법들을 제안하고, 유도하는, 일종의 동기부여를 위한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하자에서 글로비시를 하는 의미는 무엇일까. 내가 봐왔던 하자는 매번 새로운 것을 실험하는 데 적극적인 사람들이 있는 동네였다. 그러나 이 새로운 것은 '無'에서 창시된 새로운 것이 아니라 기존에 있는 것의 문제점을 보고 그것에 대한 대안을 말하는 제안인 것이다. 이때 이 실험을 주도하는 우리는 기존에 있는 그 '문제'에 대해서도 알아야 하고 이 실험은 우리의 입장을 말하는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앞서 졸업을 한 리사는 자신의 졸업에세이에 "내가 글로비시를 하는 것은 스펙사회에 저항하는 일종의 운동이다."라고 썼다. 나도 일부분 공감한다. 그러나 앞으로 하자에서의 글로비시 실험이 '저항적인' 이미지보다는 그것을 넘어 우리가 열심히 실험한 것을 하나의 대안으로 제안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러기 위해선 글로비시를 실전에 옮겨보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다고도 볼 수 있다. '운동', '실험'이라 했을 때,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제안을 하려 했을 때는 무엇보다 결과와 효과에 대해 설명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글로비시를 가지고 우리가 사람들을 만난 경험의 가장 좋은 예로는 올해 1월말에 떠났던 현장학습이 있다. 15일간의 여정에서 우리는, 'changemaker'가 되자고 입을 모아 말하던 홍콩의 십대들을 만났고 우리와 전혀 다른 조건에서 공부하고 있는 태국, 버마 국경지역에 사는 버마 난민 청소년들을 만났다. 가기 전 부터 우리는 굉장히 많은 시간을 글로비시 복습을 하면서 보냈다. 이때 강조했던 것은 첫 번째로 하자를 소개하고, 자기 자신을 소개하는 데 필요한 단어와 문장구조를 정리하는 것, 두 번째로는 우리가 만날 사람들이 많이 쓰고 있는 단어들을 외우며 그들의 삶의 배경을 들여다보면서 우리가 함께 나눌 이야기들을 준비하는 것이었다. 나는 사실 이 과정이 지금까지 우리가 말해왔던 글로비시의 의미의 가장 가까운 실험이었다고 생각한다. 들을 준비를 하는 것, 나눌 이야기를 준비하는 것이 내가 생각하는 글로비시(소통의 언어)를 공부하는 것이다.


3. 다른 세상과 마주하기

실제로 태국에 갔을 때 우리가 직면한 상황은 준비할 때 예상했던 것 보다 훨씬 더 어려웠다. 이야기를 너무 듣고 싶고, 내가 하고 싶은 말도 너무 많고. 하지만 양쪽 다 기본적으로 영어가 잘 안 됐다. 통역을 겸하기도 했던 나 또한 내가 통역하는 말들이 이해될 수 있을까 의심이 되었다. 내가 마주한 벽은 어려운 단어, 발음 등의 언어의 벽이 아닌 문화적 차이에서 비롯된 언어의 벽이었다. 때론 남들보다 더 잘 알아들을 수 있으니까 그곳의 분위기나, 그곳 사람들이 궁금해 하는 지점이 뭔지 더 빨리 캐치해 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들이 듣고 싶어 하는 질문을 전달해야 할지 말 그대로를 전달해야 할지 여러 번 망설였다. 예를 들어 버마 친구들이 "한국의 교육 상황은 어때?"라는 질문을 하면 나는 그들이 정말 객관적인 정보를 원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자신들의 상황, 또는 버마 안의 상황과 비교할 수 있게끔 말이다. 하지만 그 질문을 그대로 전하면 하자 죽돌들은 자기 경험에서 비롯한 주관적인 이야기를 한다. 나도 그랬을 것 같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제껏 하자에서 자신의 개인적 경험과 자신이 속한 사회를 연결시켜보는 연습을 해왔고 그것이 너무나 당연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모든 문장의 첫 글자가 "I"로 시작하는 우리가 있었고 반대로 우리가 질문 할 때도 그들이 "I"의 대답을 해주었으면 했다. 그러나 버마 친구들의 대답은 거의 항상 "We"로 시작했다. 그들이 느끼기에 우리는 과거 이곳을 방문했던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이고 우리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버마의 상황. 우리에게 바라는 것이 있다면 이 이야기를 더 널리 퍼뜨려주었으면 하는 것 같았다. 이곳에 오기 전 우리가 준비하고, 기대했던 '만남'이란 게 있었지만 실제 만나보니 우리의 바램만 주장할 수도 없는 것이었다. 대신 이곳에 온 이상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서로가 조금 더 개인의 경험과 이야기들을 꺼내놓을 수 있는 자리들을 기획해보는 것이었다. 영상팀, 공연음악팀, 디자인팀은 각각의 매체를 이용한 함께 하는 액티비티들을 시도해보기도 했다. 영상팀은 우리가 청소년으로서 서로가 나눠볼 수 있는 이야기를 중심으로 액티비티를 짰었고 짧은 자기 홍보물을 만든다거나, 조를 짜서 단편 영화를 찍어보는 등의 시도를 했다.

내가 이 현장학습을 통해 배운 것은 마음만 앞서서 소통하고 싶다고 하는 게 아니라, 그 이전에 서로의 대한 이해가 필요하고, 각자가 들을 준비를 하는 것이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하는 것만큼이나 중요하다는 것이었다. 또한, 버마의 상황을 듣고 마음이 울컥해서 섣불리 몸을 던지는 것이 아니라, 혹은 좀 더 생각해보니 내가 정작 바꿀 수 있는 힘이 없어서 좌절하는 것이 아니라, 우선은 그들이 우리에게 "우리의 문제에 시선을 주는 것이 시작이다. 우리는 더 많은 사람들이 버마 문제를 알아주었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던 것처럼 그들의 말에 귀 기울여주고 한국에 돌아와서는 우리가 들은 것들을 또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해주는 것을 하면 되는 것이다.


4. 넓어지는 세계

하자에서는 우리가 태국으로 현장학습을 갔던 것처럼, 직접적인 '만남'들을 기획하고 그 만남들을 통해서 배우는 것이 많은 것 같다. 시민문화워크숍을 진행한다고 했을 때도 나는 책에 얼굴을 파묻고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현장에서, 각자의 위치에서 꾸준히 활동하고 있는 분들을 만날 수 있었다. 

이런 만남들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학습했을까. 8개월의 전반부를 마무리하는 시점에서 우리는 해보면서 배우는, "learning by doing"을 실천했다고 말했다. 책이나 교과서를 통해서는 절대로 경험할 수 없는 learning by doing이란 우리의 일상에서 한 발자국 벗어나 우리와 동시대에, 같은 하늘 하지만 다른 공간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을 직접 만나며 자신이 인식하는 현실의 영역을 넓혀가는 것이었다. 우리가 직접 메솟에 가지 않고, 버마 청소년들과 친구가 되지 않고 그들이 우리와 동시대에, 동일한 세상에 살고 있다는 것을 인식할 수 있었을까? TV로, 인터넷 기사로밖에 접할 수 없는 곳에 살고 있는 그들에게 연민을 넘어 서로의 꿈에 지지하고 함께 일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 수 있었을까. 여행을 떠나기 전, 긴 시간을 준비했다.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공감할 준비를 했고 우리가 해줄 수 있는 이야기를 준비했고, 함께 고민해볼 수 있는 지점에 대해 생각했다. 이런 만남을 준비하면서 비로소 우리는, 이 세상에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과 공감하고 만날 수 있는 감수성을 기르고, 때론 발 빠르게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을 해나갈 수 있게 스스로를 단련해 왔다고 생각한다.


5. 역할

내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인식하고 내가 살아가는 시대의 다양한 문제들을 의식하게 되면서 자연히 나와, 같이 이곳에서 학습하고 있던 작업장학교의 많은 죽돌들은 "그래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부딪히게 되었다. 의욕만 앞서서 각 현장들에 뛰어든다고 해서 내가 과연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인가? 다시 한 번 자연스럽게 내가 내 손에 들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란 고민으로 이어졌다. 3년 동안 내가 흥미를 느끼고 '하고 싶은 일'이라 자부해왔던 영상이라는 것이 이제는 나만의 만족을 위한 도구가 아니라 내가 이 세상에 참여할 수 있는 하나의 도구로, 나와 사회를 이어주는 하나의 매체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자에서 나는 어딜 가나 카메라를 들고 움직였다. 'Save my city'프로젝트에서 도시를 탐사할 때도, 홍콩창의력학교를 방문할 때도, 태국으로 현장학습을 갈 때도. 처음에는 무언가에 대한 기록촬영을 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지 깨닫지 못했지만 꾸준히 카메라를 들다보니 점점 왜 기록을 하는지, 이 기록이 어디에 쓰일 수 있을지, 나는 어떤 것에 대한 기록을 하고 싶은지 라는 질문을 하게 되었다. 영상을 만든다는 것은 방안에서 상상만 주구장창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직접 현장으로 카메라를 들고 들어가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기도 했다. 말로 못하던 나의 이야기를 표현하는 도구로 처음 들게 된 카메라를 조금씩 내 주변으로 돌려보면서 이것이 내가 살아가는 공간의 이야기를 기록할 수 있는 도구이고, 때문에 나만의 이야기가 아닌 같은 공간에서 살고 있는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할 수 있는 매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6. 영상, 서로 귀 기울여주는 사람들

"피디가 될까? 영화감독이 될까?"를 질문하던 나는 그동안 영상방에 있으면서 조금 다른 종류의 질문을 하게 되었다. "어떤 영상을 만들고 싶나?", "어떤 영상작업자가 될 것인가", "내 매체를 어떻게 쓸 것인가". 이 질문들은 내가 섣불리 대답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계속 영상을 만들어간다고 했을 때, 카메라를 잡은 내 태도에 대해 고민해보는 것은 꼭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하자에서 내가 영상뿐만 아니라 다른 인문학 프로젝트, 시민문화워크숍, 현장학습 등에 참여할 수 있었던 것이 정말 감사하다. 카메라 하나만 붙들고 있었으면 그것을 잘 조종하는 능력을 기를 수 있었을 테지만 이 프로젝트들은 내 영상의 내용을 채울 수 있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영상을 만드는 것이 나에게 있어 '말하는 것'이었다면 상대적으로 나는 말하는 것보다 듣고, 관찰하는 시간이 많았다. 그리고 나만의 경험에 집중하기보다는 이곳에서 새롭게 사람들을 만나면서 '우리'가 경험하게 된 것들을 영상으로 만들어왔던 것 같다. 이때 우리란 나, 그리고 나와 만난 사람들일 때도 있었고, 작업장학교일 때도 있었다. 
나는 내 영상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었을 때 공감대가 형성되고 때론 피드백이 오는 것이 정말 좋았다. 사실 좀 무섭기도 했지만, 이 경험은 내가 영상을 만드는 데 있어 '관객'이란 것을 고려하게 되었다는 것에 있어서 중요했다.

현실 속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 영상으로 이야기 하고 싶다고 했을 때 나에게 관객은 나와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나는 나뿐만아니라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이야기들을 담은 영상을 만들고 싶다. 관객의 '취향'에 맞춘 영상이 아닌, 내가 알아야 할 이야기, 우리가 알아야 할 이야기에 대해서 말이다. 그러기 위해서 나는 하자에서 꾸준히 해온, 타인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것, 내 주변을 관찰하는 것을 계속 하고, 들을 줄 알고, 사람을 만날 줄 아는, 영상이라는 언어를 통해 말하는 작업자가 되려고 한다. 그리고 내가 하는 말들이 어떤 10대의, 미래에 대한 희망사항으로 읽히지 않았으면 한다. 나는 내 10대의 많은 시간을 실제로 내가 하고 싶은 얘기를 영상을 직접 만들어보며 보냈고 이 경험이 중학교 때 머릿속으로 몇 십번의 영화를 찍은 것과는 다르게 내 꿈에 현실성을 더해주었고, 나에게 보장된 길이 없다고 해도 계속 영상을 만들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을 주었기 때문이다.


7. 하자의 홍콩지부

나는 하자를 졸업하는 동시에 홍콩이라는 도시로 가려고 한다. 국가 간의 경계라는 것이 더욱이 없어진 지금, 나는 내가 속한 사회, 세상을 한국사회라고만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나에겐 내가 발 딛고 서있는 공간이 어디인지가 더 중요하다. 어디로 이동하든 나는 끊임없이 내가 서있는 위치에서 관찰하고, 영상을 만들어 갈 것이다. 물론 어디로 이동하는 가는 나의 선택이니만큼 내가 관심이 있는 주제들을 따라 찾아갈 것 같다. 지금으로써 나에게 각별한 곳은 홍콩이다.

나는 홍콩영화의 빅팬이기도 하고 홍콩에서 쓰는 말, 광동어에도 굉장히 관심이 있다. 요즘엔 그곳으로 갈 나름의 준비를 하느라 홍콩에 대한 논문이나, 지금 그 도시에서 벌어지는 뉴스들을 스크랩하고 있기도 하다. 한 2년 동안 나는 홍콩이라는 도시의 팬이자, 그곳의 문화와 이야기들을 수집하기만 하는 사람이었다면 이제 내가 그곳에 간다고 했을 때는 내가 보게 된 것들을 가지고 작업하고, 무언가 생산해 내는 일을 하러 가는 것이다. 나는 그동안 충분히 여러 차례 학교 밖을 넘나드는 작업을 해봤고, 실질적인 영상 제작과정 뿐만 아니라 무엇을, 어떻게 관찰하고 영상으로 풀어내는지에 대한 감도 생겼다. 나에게 앞으로 남은 과제라고 생각하는 것은 어떻게 내가 영상을 만들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 갈 것인가를 지속적으로 고민하고, 실천해가는 것이다. 영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생각보다 많은 자원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같이 하자고 할 사람들도 있어야 하고, 돈도 있어야 하고, 무엇보다 소재가 있어야 한다. 하지만 나는 하자작업장학교에서의 경험이 충분히, 나에게 이것을 할 수 있는 자신감을 갖게 해 주었다고 생각한다.

2008년 1월, 홍콩창의력학교에서 열린 창의교육서밋에, 당시 하자 공연팀이었던 촌닭들이 초대 되면서 나는 처음으로 홍콩에 가 보았다. 하자를 벤치마킹 했다는 이 학교는 겉보기엔 사이즈며, 교복을 입는 것이며, 일반 학교와 별반 다르지 않았지만 조금 더 들여다보면 이곳 또한 나름의 실험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예술을 일반 과목과 접목시킨다든지, 선생님과 학생의 관계를 조금 바꿔보는 시도를 한다든지. 아마도 이 학교는, 홍콩에서 대안학교가 존재하는 방식을 보여주는 것일 것이다. 2008년 이래로 꾸준히 홍콩창의력학교와 교류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나는 직접 이곳에 교환학생으로 가는 것도 생각해 볼 수 있게 되었다. 지금은 내가 하자 졸업생으로서 어떤 교환들을 그곳에서 할 수 있을지, 어떤 것을 같이 하자고 할 것인지를 더 고민해 봐야하는 것 같다. 하지만 이것이 걱정스럽거나 불안하지는 않다. 내가 여태껏 하자에서 참여했던 방식, 해 왔던 일들을 조금 다른 판에서 실험해 보는 것이라고도 생각한다. 그리고 다른 판을 겪어보며 새롭게 깨닫는 것도 있을 거라 기대한다.

2009년 9월에 한 번 주니어 수료를 하고 그때도 하자 밖으로 나간다는 것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있었다. 그때 나를 고민스럽게 했던 화두는 "어떻게 나의 학습을 이어갈 것인가"였다. 지금도 물론 이것에 대한 고민은 하고 있고, 실천하고 싶지만, 이번에 졸업에세이를 쓰면서 더욱 더 생각하게 된 것은, 하자라는 물리적 공간을 염두에 두고 안과 밖을 분리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다른 곳에서 하자를 만들어갈 수 있을까"이다. 내가 한 명의 하자출신, 작업장학교 졸업생이 된다는 것이고 나는 그 신분을 가지고 어떤 일들을 벌여보는 것에 관심이 생겼다. 더 이상 나는 소속이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내 10대의 일정 기간을 하자에서 보내면서, 처음으로 매체를 가져보고, 인문학과 시민문화가 내 삶에서 어떤 영향이 있는지 알고, 동료 죽돌들과 재미있게 작업해보는 경험이 있었던, 이 경험을 제공해 주었던 '판'이 아직 존재한다는 것이 중요하기도 하다. 하자출신인 내가 앞으로 어떤 학습을 이어가고, 내 일을 만들어가는 것에 있어서 하자는 직간접적으로 나를 지지해준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내가 어떤 대안적 학습 실험의 사례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나는 앞으로 내 나름의 현장에서 내가 이곳에서 경험했던 것들을 연결해보고 다른 사람들과 나누고 싶다. 내가 하자의 케이스가 된다는 것이 졸업으로써 완전히 끝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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