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ro:


3년 동안 하자는 나의 community였다고 이제는 말할 수 있겠다. 하지만 이것은 하자가 다른 제도권 학교와는 달리 공동체 지향적 성격을 띄고 있어서라고 설명되기엔 부족하다. 스스로가 어떤 community에 속한다고 말하는 것은 단순히 몸이 그곳에 있어서가 아니라 실제로 내가 그것의 구성원으로서 책임을 지며 때론 내 위치에서 할 수 있는 일들을 가지고 기여하는 것도 필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하자의 일곱 가지 약속 중 하나인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해야 하는 일도 할 거다"라는 문장은 하자 죽돌들에겐 한 번씩 실감하고 실행해봤던 것이라고 추측한다.

하자에 오면 내가 하고 싶은 공부 골라서 할 수 있고, 다양한 자원과 기회들 속에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찾고 해볼 수 있을 거라 기대했다. 어쩌면 나는 굉장히 계획적으로, 한 1, 2년 영상 배우다가 대학에 진학하는 상상을 하며 하자에 있는 자원들을 마냥 나에게 당연히 주어진 것처럼 쓰다가 나가려 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1년, 2년 있을 수록 무언가가 나를 하자에 붙잡아 두었다. 영상방 안에서의 돈독한 멤버쉽 때문이었을까? 그 동안 나를 키워준 하자를 조금 더 잘 나가고 싶어서? 함께 하고 있는 동료들에게 무책임한 사람으로 보이기 싫어서? 아마도 이 모든 것이 다 해당이 될 것 같다. 사실 하자를 나온다고 해서 어떤 특별한 자격증명이 된다거나 전문가 같은 포트폴리오가 생긴다거나 하지 않다. 나를 졸업까지 시키는 이 원동력과 동기는 아마도 하자라는 공간, 사람들이 나에게 제공해준 일시적 community에 대한 책임감과 감사함 때문이 아닐까 한다.


이전에 나는 졸업이라는 것이 하자작업장학교에 하나의 기여라고 생각한다고 작년 졸업식 송사 글에 썼었다. 이 말은 단순히 졸업에세이를 쓰는 과정에서 자신의 학습을 기록으로 남겨 사람들이 볼 수 있게 만드는 기여뿐만이 아니라 졸업생들이 졸업에 오기까지 하자 안에서 나름의 위치와 방식대로 기여와 헌신한 것이 있으리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제부터 나는 내가 하자 죽돌로 있었던 정확히 3년이라는 시간 동안 어떤 방식으로 배우고 한편으로 내 community에 기여하는 훈련을 해 왔는지 차근차근 짚어보려 한다. 자신의 community라는 것을 의식하는 과정, 거기서 구성원으로서의 기여와 헌신을 배우게 된 것, 이제는 나의 community를 확장시키고자 하자를 떠나는 것이 하나의 하자 죽돌 학습의 사례가 될 수 있기를 바라면서.



1. 캐치스코프라는 팀과의 만남, 팀의 구성원이 되다.


내가 하자를 처음 찾아보고, 오기로 결심하게 된 이유 중 하나는 영상이라는 매체를 배워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2006년, 중학교 3학년 때 아빠가 선물해준 작은 핸디캠을 손에 쥐고 머릿속으로 수많은 시나리오를 그리며 의욕에 넘쳤던 때가 있었다. 그리고 내 주변 친구들을 보며 아무도 내 영화 계획에 동참해주지 않는 것에 대해 의욕을 상실하곤 하기도 했다. 길찾기 과정에 있을 때는 당장 주니어가 되서 영상방에 들어가면 멋있는 작업동료들을 만나서 찍고 싶은 영상 마음껏 찍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길찾기 때 만들었던 걸어서 바다까지 영상은 원래 내가 하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기에 멋있는 영상이 나오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미리 상상했던 작업동료라는 것은 그저 나의 계획에 동참해주는 스텝일 뿐 나도 그들의 조력자로서, 작업동료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은 미처 알지 못했다. 이때 캐치스코프라는 팀, 6명의 20대들과 5명의 10대로 구성 된 그룹은 나에게 팀 작업이라는 것은 무엇인지, 팀의 구성원이 된다는 것은 스스로에게 어떤 요구가 필요한 것인지를 경험하게 해주었다.


첫 번째 팀 작업이었던 'Focus on: interview'는 우리가 직접 인터뷰 하고 싶은 사람들을 선정해서 그들을 리서치하고, 실제 이 영상을 보게 될 10대들에게 영감이 되어줄 질문리스트를 만들고 직접 인터뷰까지 하는 과정을 담고 있었다. 영상은 찍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던 초짜인 나에게 한 편의 영상을 만들기까지 필요했던 기획(수많은 회의와 토론), 촬영(세트 제작까지), 편집(보여줄 대상을 생각하며 전달하고자 하는 말을 명확히 하는 것)의 과정은, 영상이 하고 싶다는 마음 하나 가지고 만만하게 볼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해주었다. 또한 이 만만치 않은 과정을 혼자 할 수 없고 끊임없이 코멘트를 던져주는 작업동료들이 필요하다는 것과 나도 그런 작업동료가 될 수 있도록 우리가 함께 하는 작업에 온 정신을 commit해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자연스럽게 캐치스코프와의 만남 그리고 팀 작업은 길찾기 때 겉돌던 나를 하자 안으로 정착할 수 있도록 큰 역할이 되어줬다.


첫 팀 작업을 무사히 끝내고 나의 주니어 1학기를 마무리하는 시간이 다가왔다. 이때 영상방 판돌이셨던 유리는 우리가 각자 개인작업을 해보는 것이 좋겠다는 제안을 하셨다. 그래서 나의 첫 개인영상작업인 '그리고 문을 열었다'를 만들게 되었다. 이유는 잘 알 수 없지만 대개 하자에서 처음으로 자기 영화를 찍는 다거나, 그림을 그리는 죽돌들을 보면 약간은 알 수 없는 추상적인 언어로 자신을 표현하고 "표현했다"는 것에 굉장히 큰 의미를 둔다. 나 또한 첫 개인작업의 주제를 '표현'이라는 것으로 가지고 갔고 그때 카메라라는 것은 나 자신을 들여다 볼 수 있는 도구, 이전까지 나 자신에게 무심했던 시간에 다시 집중하며 스스로를 치유하는 하나의 도구로서 다가왔다.


주니어 수료와 더불어 8번째 개교기념을 준비하며 당시 수료생들과 이 치유의 도구라는 것에 대해 얘기를 나눴던 적이 있다. 그때 우리는, 처음 매체를 접한 경험이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문을 열어주었다고 동의했었다. 하자작업장학교가 개교한지 8년이 되었고 첫 졸업생들과 우리 사이에는 약 10년의 나이차가 존재한다. 학교를 뛰쳐나와 하자센터의 문을 열었던 첫 졸업생들에게는 학교를 나온 경험이 어쩌면 자신의 문제와 제도, 혹은 사회의 문제가 연결되어있다는 인식의 시작이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들의 목소리와 경험이 담긴 10년 전 영상과 글들을 보면서 마치 그것들이 하나의 투쟁 같다는 생각을 했고 한편으론 어떻게 저렇게 대담하게 자신의 문제를 10대의 문제, 나아가서 사회의 문제라고 하면서 발표할 수 있을까 라는 의문이 들기도 했다. 나는 제도권을 나올 때 그것이 나 이외의 누군가를 대변할 수 있는 움직임이라든가 고발이라든가 하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중학교 졸업을 하는 시점에 나에게 여러 가지 길들이 있었고 그 중 하나가 대안학교에 진학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딱히 나 자신이 특별하다고 생각한 적도 없었고 나의 이야기가 사회에서 어떤 중요성을 띌 수 있다고 생각해보지 못했기 때문에 나의 경험을 탐구하고 전달하는 것을 시도해 본적이 없었다.


그래서 이때 하자에서 접한 매체라는 것은 효과적인 전달방식의 실험으로 다가오지도, 내가 표현할 수 있게 도와주는 매개로 다가오지도 않았다. 누군가 내 의견을 물으면 "딱히 할 말 없다"라고 말하며 내가 속해있는 공간과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스스로를 아웃시키고 있던 나에게 카메라는 "너의 이야기가 뭐니? 표현해봐"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꼭 하자라는 공간이 아니어도 카메라나 컴퓨터 프로그램을 접할 수 있는 기회가 비교적 많았던 나는 매체에 적응하거나 기술적인 부분을 습득하는 데에는 어려움을 느끼지 않았을지 모르지만 그 이전에 '나의 이야기'를 들여다보고 표현해보는 과정은 생소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다만 나에게만 해당된 것이 아니다. 2007년 3월에 들어온 우리 기수의 개인작업들을 살펴보면 유난히 "내 방에서 나오다", "나 자신을 맞닥뜨리다"라는 말을 많이 하고 있다. 우리는 그렇기 때문에 '표현할 수 있기까지'의 시간을 중요시 여겼던 것 같고 매체를 처음 잡아보며 이전까지 덮어버리고 있었던 자신의 문제를 다시 수면위로 꺼내는 과정이 마치 스스로를 치유하는 것 같다고 표현했다고 생각한다. 나는 나의 첫 영상에 '그리고 문을 열었다'라는 제목을 붙이면서 나 자신을 내 방안에 고립시켜갔던 시간들에 대해 성찰하며 영상을 통해 그 방문을 열었다라고 말하고 싶었다. 영상을 접하고, 팀을 만나고 했던 주니어 1학기는 나에게, 처음으로 어떤 공간과 사람들 속에 나 자신을 involve시키는 것을 시작하게 된 계기였다고 생각한다.



2. 하자 안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찾다


처음부터 내가 하자에 기여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고민하지는 않았다. 처음에 글로비시 수업(하자에서 진행되는 영어수업)에 대한 제안이 들어왔을 때도 갈등했던 시간은 굉장히 길었다. 중학교 때부터 가지고 있던 영어에 대한 콤플렉스에 맞서는 것도 사실 용기가 필요한 것이었다. 어렸을 때 4년 간 영국 유학생활을 했던 나는 학교를 다닐 적 '영국'이라는 꼬리표가 붙었고 할 줄 아는 게 영어밖에 없다고 규정되기 싫어서 영어 실력은 철저히 숨기며 살아왔었다. 그렇기 때문에 처음에 글로비시 수업을 진행해보라는 제안이 들어왔을 때는 거의 울며 겨자 먹기로, 사실은 안 하고 싶다고 말할 용기가 없어서 하게 되었다. 한편으론 나에게 익숙한 사람들이었던 캐치스코프들을 대상으로 진행한다기에 한 시름 놓은 것도 있었다. 아직 영상방 밖은 편하지만은 않은 공간이었고 사람들 앞에 서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컸던 나에겐 엄두내지 못할 것이었다.

3개월, 한 학기 동안 영상방안에서 글로비시 수업을 진행했다. 조금은 내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에 대한 자신감이 붙어서였을까, 같이 글로비시 수업을 하고 있던 '하자통역교실 Spikaja'의 멤버인 리사와 환과 작업장학교 주니어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글로비시 라운지를 진행하기로 결정했다. 글로비시 라운지는 영어를 조금 더 공부하고 싶은 죽돌들이 모여 심화학습을 하는 하나의 스터디 그룹의 형태를 띄었다. 리사와 환과 나는 자체적으로 커리큘럼을 짜며, 때론 심화학습에 즐거움을 더하는 영어 게임에 대한 연구도 하면서 조금씩 죽돌들이 진행하는 영어 수업을 기획해갔다.


주니어 수료를 하고, 시니어 과정에 들어서면서도 어느새 동료가 된 리사와 함께 글로비시 수업을 기획하고 진행해왔다. 글로비시는 내게 영상만큼이나 꾸준히 해온 작업인데 그렇기 때문에 어느 순간에는 영상과 글로비시 사이에서 갈등했던 적도 있었다. 영상은 내가 처음부터 선택하고 하고 싶다고 말했던 것이고 글로비시는 어느새 내가 하고 있게 된 일이였다. 글로비시 수업을 기획하고 진행하는 것이 영상프로젝트와 병행하게 되었을 땐 버거운 짐으로 느껴지기도 했으며 나는 영상작업자이고 앞으로 영어 선생님이 되려고 하는 것도 아닌데 왜 하고 있나 라는 회의적인 질문도 가졌었다. 도무지 영상작업과 영어수업이라는 것이 이어지는 맥락을 찾지 못했다. 그때마다 생각했던 것은 "이것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다"라는 것이었다. 생각해보니 영상방에서도 항상 내가 개인적으로 만들고 싶은 영상만 만든 것도 아니었다. 청소년창의서밋이 진행된 기간에는 영상팀으로서 영상기록을 담당했고, 이후 그 기록들을 편집하고 영어자막까지 달면서 자료영상을 만들기도 했었다. 내가 어떤 공간에서 학습하고 몸담고 있는 사람으로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통해서 기꺼이 어떤 일들을 진행하는 것이었다. 나의 학습의 의미가 부여 되야 한다면 영상방에서 강의 편집이나 기록촬영이 영상작업자로서의 훈련이라고 생각했던 것처럼 글로비시도 커리큘럼을 짜고 수업을 진행하는 동안 내가 배우게 된 것들을 생각하면 되었다. 하자 안에서의 자율 학습이라는 것은 내가 하고 싶은 공부만 주장한다거나 나의 배움만을 우선시 하는 것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하자 안에 있는 다양한 기회와 판 안에서 스스로의 역할을 찾고, 할 수 있는 일들을 통해 다른 죽돌들과 자신의 자원을 나누는 과정, '나의 일'을 만드는 것 또한 포함 된다고 생각한다.


3. 자립


16살의 나에게 꿈이 뭐냐고 물었다면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독립!"이라고 외쳤을 것이다. 그때 내가 말했던 독립은 아마 거의 모든 청소년들이 한 번쯤은 간절해봤을 가족으로부터의 독립이었다. 일찍 들어오라는 잔소리도 싫고 내가 하고 있는 생각에 대해 매번 구구절절 설명하는 것도 귀찮았다. 나는 틈틈이 부동산 사이트를 뒤져보고 전세나 월세를 살려면 얼마나 돈을 모아야하는지 계산하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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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하자 밖에 상황들에 대해 인식하다. 시선의 영역을 확장하는 것.


올해 1월22일부터 2월5일, 15일간 하자작업장학교의 18명의 죽돌들은 홍콩에서 진행된 MaD(Make a Difference)포럼과 메솟에 있는 버마 난민들을 만나는 현장학습을 다녀왔다. 밖에 나가거나 하자에 손님이 왔을 때 가장 먼저 하는 것은 작업장학교를 소개하는 것이다. 이렇게 소개를 하는 과정에서 나는 하자작업장학교가 지금 어떤 맥락의 학습을 진행하고 있는지를 다시 들여다보게 되었다. 이때 내가 한 말은, "작업장학교에서는 정해진 교과서를 따라 공부하지 않고 우리 주변과 사회에서 일어나는 흐름을 읽고 글로벌 이슈와 다양한 사회적 이슈들을 텍스트 삼아 학습한다."였다. 이렇게 설명하는 바탕이 된 프로젝트들은 'Save my city', '기후변화시대의 living literacy', 작년 9월부터 진행한 '시민문화워크숍: 세계를 구하는 시인들'이었다.


'Save my city'프로젝트는 나에게 있어 처음으로 영상을 통해 내 주변의 상황을 인식하고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해보는 작업이었다. 당시 열린작업장에 속해 있던 영상팀, 디자인팀, 글로벌학교팀이 모여 3개의 프로젝트 팀을 구성했고 각 팀별로 주제를 정해 서울이라는 도시를 탐사하며 하나의 영상물을 만드는 프로젝트였다. 여태 서울에 살면서도 한 번도 내가 살고 있는 공간, 도시를 관찰하려는 노력은 해본 적이 없었다. 쉽게는 내가 이 공간에 소속되어있는 구성원이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했고 마치 허공을 떠다니는 유령처럼 나의 삶이 이곳에 대입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Wavy City'라는 애니메이션을 만들면서 비로소 영상 안에 캐릭터를 통해 내 자신을 이 공간에 투영해 보는 것, 도시에서 관찰한 것을 우리 팀의 관점으로 풀어내보는 경험을 했다. 이후 나는 내가 살고 있는 도시에 대한 탐사를 더 해보고 싶어서 '999 city'라는 제목의 개인프로젝트를 진행했고 당시에 진행되었던 '기후변화시대의 living literacy'라는 프로젝트를 통해 새롭게 인식하게 된 기후변화문제에 대한 의식을 함께 담아 '999 city'라는 애니메이션을 제작하기도 했다.


주니어 수료 작품이기도 했던 '999 city'를 완성하면서 나는 조금 더 사회적 이슈에 관심을 가지고 그것을 영상에 담아 사람들에게 전달해보는 작업을 해보고 싶었다. 'Wavy City'와 '999 city'는 아직 어떤 내용과 전달 방식에 있어서는 개인적 경험에 치중했고 때문에 이것을 보여줬을 때에 영향력이 부족했다. 시니어 과정을 시작하면서는 "My work is my world"라는 문장을 깊이 새기며 영상작업자로서 내가 카메라를 들고 내가 사는 세상에 어떻게 기여할 수 있을까 라는 질문을 시작하게 되었다. 지난 3년 동안 하자라는 community 안에서 조금씩 글로비시를 통해, 영상을 통해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을 실험해 왔다면 이제는 조금 더 영역을 확장해 "This world"를 보는 작업자가 되고 싶었고 실제로 작업을 하는 것에서도 게으름을 피우면 안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처음으로 시도했던 것은 새롭게 구성된 영상팀 멤버들과 기후변화를 주제로 한 'tck tck tck' 캠페인 영상을 만드는 것이었다. 아주 성공적이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캠페인'이라는 새로운 형식을 시도해 봄으로써 작업에도 목표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찍는 영상들이 누구를 대상으로, 어떤 움직임을 만들어내기 위해 제작 되는가." 무언가를 만들어내고자 하는 사람으로서 나의 작업물이, 어떤 사회에서, 어떻게 영향을 끼칠 수 있을지 생각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하다. 하지만 이것을 생각하려면 먼저 카메라 뒤에 있는 나는 어떤 위치와 입장을 가진 사람인지 알아야 하는 것 같다.


특히 이런 입장과 위치에 대한 고민은 내가 카메라를 들고 밖으로 나가서 무엇을 찍고자 했을 때 많이 인식하게 되었던 부분이다. 2009년 9월부터 12월까지 진행되었던 시민문화워크숍은 작업장학교에 있는 우리에게, 다양한 판에서 열심히 활동하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볼 기회를 주었다. 시민운동가, 시인, 예술가, 동네병원의사 등, 우리는 그들에게 각각 다른 '시'자를 붙여주면서 우리들 스스로는 '섶 시(柴)'를 가지고 현장학습을 다녀왔다. 나에게 섶이란 듣고, 보는 사람이었다. 옛 탄광마을이었던 강원도 정선 사북, 고한읍은 폐광이후로 마을의 문화와 역사를 지속시켜나가는 데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고 마침 그때 예술가들이 마을의 재활력화를 희망하며 작가 residency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었다. 나는 그곳에서 마을 주민도 아닌, 마을의 예술가도 아닌, '섶'으로서 정말 관찰과 기록에 대해 충실했다고 생각한다. 비록 정선현장학습이 또 하나의 작업물로까지는 이어지지 않았지만 지금까지 하자에서 상상하고, 경험해 왔던 종류의 삶과는 전혀 다른 현실을 보면서 앞으로 나는 나의 주변을 어디까지라고 말할 수 있을까라는 고민과 하나의 세상아래 있는 수많은 이슈와, 다양하기도 너무 다양한 상황들 중 내가 심지를 둘 곳은 어디인지에 대한 질문을 시작하게 되었다.


하자에서 마지막 현장학습이라고 할 수 있는 홍콩과 태국 메솟으로의 여행은 카메라 뒤에 서있는 나를 다시 발견하게 된 계기였다. 이번에는 정선과 달리 더욱 더 철저한 사전준비를 하면서 영상팀은 어떤 내용을 카메라에 담을 것인가에 대한 논의를 많이 했다. 사실 'tck tck tck' 영상을 만들면서 우리의 입장이 드러나지 않는다는 코멘트를 여러 번 들었다. 그 후 우리는 스스로를 기후변화문제에 먼저 움직이기 시작한 'youth'라고 말하며 아직 우리 모두가 직면한 상황의 심각성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세계의 다른 youth들에게 함께 실천해가자라는 메세지를 담겠다고 했다. 이번 현장학습을 준비하면서도 영상팀은 다른 youth들을 만나길 기대했고 우리가 만났을 때 서로의 이슈를 공유하기도 하면서 한편으로 기운을 줄 수 있는 기회가 되었으면 했다.


그렇게 해서 우리가 만난 youth들은 홍콩과 같이 우리와 비슷한 상황에서 비슷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기도 했고 메솟과 멜라캠프에서 만난 youth들처럼 완전히 다른 종류의 현실을 마주하고 있기도 했다. 홍콩에서는 비교적 쉽게, "네가 하고 싶은 일은 뭐니? 그것을 하기 위해 어떤 것들을 지금 하고 있니?"라든가 "사회에 기여한다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니?"라는 질문을 할 수 있었고 결과적으로 비슷한 생각을 공유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면 버마의 youth들을 만났을 때는 언어의 장벽 이상의 어떤 문화적 장벽이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어떤 경우에는 "We have nothing"이라고 단호히 말하는 그들 앞에서 말을 이을 수 없을 정도로 당황하기도 했으며 교육의 기회뿐만 아니라 이동의 자유조차 없는 이들과 무엇을 어떻게 같이 하자고 말할 수 있을까 굉장히 고민스러웠다. 자신의 community에 꼭 기여하고 싶다고 말했을 때도 이 community는 자신이 속한 소수민족의 community를 지칭하거나 버마라는 나라를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하자를 소개하며 우리는 '글로벌이슈'에 대해 공부 한다 라고 말했지만 글로벌이란 단어는 내가 이동이 자유롭고 세계 각국의 정보를 손쉽게 접할 수 있는 조건에 있기 때문에 별다른 이질감 없이 쓸 수 있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소통하기 위해 필요했던 것은 동일한 경험이나 동일한 고민이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이런 상황일 수록 더욱더 각자의 위치에서 상상할 수 있는 기여를 생각해보면 되었다. 우리가 버마 상황에만 집중하지 말고 세계를 봐야한다 라고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삶에서 심각한 문제로 다가오는 버마의 문제 상황에 대해서 우리도 찾아보고, 한 편에서 그들의 움직임을 지지해주면 되는 것이었다.



4. 나의 현실과 community, 그 안에서 작업자로서 살아가는 것.


하자에서 나는 영상을 배우는 동시에 나를 둘러싼 다양한 현실의 문제들을 인식해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그러나 그것은 사회적 책임을 져야한다는 주입식 교육이 아니다. 나는 하자에서 실제로 자신을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 involve시키며 그 안에서 이야기 되어야 하는 것들을 작업으로 풀어내는 예술가들을 만나보기도하고, 지속적으로 어떤 문제 상황을 보며 새로운 방식을 제안하는 운동가들을 만나고, 바로 눈앞에 보이는 상황뿐만 아니라 건너편 세계에서 또 다른 문제 상황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youth들을 만날 수 있었다. 또한 단지 이것을 책에서 읽은 것이 아니라 직접 그들을 만나고 대화해보았기 때문에 그들이 말하는 현실의 문제들이 내가 살고 있는 공간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들이며 나의 현실이기도 하다는 생각을 할 수 있었다. 하자의 판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만남과 경험은 나에게 스스로 어떤 삶을 살아가고 싶은지 구체화시켜갈 수 있도록 해주었다고 생각한다.


이때 영상이라는 매체언어는 나에게 이것들을 그저 멀리서 지켜보는 것이 아니라 카메라를 들고 현장에 들어갈 수 있도록 어떤 다리 역할을 해주었다. 물론 처음에는 무언가에 대한 기록 촬영을 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지 깨닫지 못했지만 꾸준히 카메라를 들다보니 점점 왜 기록을 하는지, 이 기록으로 무엇을 보여줄 수 있을지, 어떤 것에 대한 기록을 하고 싶은지 라는 질문을 미리 준비하게 되었다. 말로 못하던 나의 이야기를 표현하는 도구로 처음 들게 된 카메라를 조금씩 내 주변으로 돌려보면서 이것이 내가 살아가는 공간의 이야기를 기록할 수 있는 도구이기도 하며 카메라는 이 기록과 이야기들을 편집해서 다른 공간에 있는 사람들과 나눌 수 있는 하나의 매개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시점에 나는 영상작업자로서 나의 관점과 언어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것이 곧 나의 취향에 대한 탐색이나 자아발견에서 그치면 안 된다. 나의 경험에 다가가는 과정 또한 생산적일 수 있고 사회적 영향을 의식하며 한다면 나의 이야기를 통해 다른 누군가를 대변할 수 있고 어쩌면 내가 속한 사회에 대한 이야기를 전달하는 것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어느 때부터 나는 자기 이야기에 갇혀서 방밖으로 나오지 않는 예술가가 되고 싶지 않다고 다짐했고 영상은 어떤 이야기를 전달하는 언어로써 사람들에게 일방적인 이야기를 전달하는 것도 아니고 그것을 만드는 나와 내 영상을 보는 사람들이 서로 공감하고, 공유하는 이야기가 담겨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때문에 때때로 나는 나의 취향에 맞서는 일도 필요하며 공감과 공유되는 이야기를 찾아 내가 살고 있는 곳을 주의 깊게 관찰하는 것도 필요하다.


하자에서 나는 영상 프로젝트를 통해, 또 시민문화워크숍, 인문학 프로젝트들 안에서 카메라를 가지고 나의 학습과정을 만들어왔고 틈틈이 내가 할 수 있게 된 일들로 하자라는 community 안에서 기여하는 법을 배웠다. 이제는 이것들이 하자를 떠나서 어떻게 이어져야 할지 생각하고 있다. 나는 앞으로도 계속 영상을 만들면서, 나의 영상이 사회에 어떤 기여가 되기를 바란다. 또한 이것이 긍정적인 움직임을 촉진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나에게 있어 영상을 만드는 의미가 내가 마주한 현실에 주눅 들지 않으면서 어떤 변화를 촉구하는 움직임이듯이 나의 영상을 통해서 사람들이 어떤 변화를 바라고, 움직일 수 있는 힘을 받았으면 좋겠다. 때문에 나는 지금 이미 제시되어진 길이 아닌 새로운 길을 계속 만들어가고 싶고 나의 경로가 현실과 맞닿아있으면서도 새로운 제안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러기 위해서 나는 내 스스로의 삶을 계속 긍정할 수 있는 힘을 지켜가고 싶고 이런 에너지를 전달하는 영상을 만들어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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