팀플레이:함께 놀아보기와 배우기

 

 

*하자작업장학교 그리고 촌닭들과의 만남

 

작은 학교를 졸업하고 나니 집안 여건상 내가 가고자 했던 학교에 갈 수 없던 나는 소속감에 대한 불안함이 생겨났다. 마침 연극을 좋아해서 연극과 같은 것을 할 수 있는 학교를 찾다보니 하자가 있었다. 정작 하자에 들어왔을 때 연극을 할 수 있는 판은 없었다. 대신 공연팀이 있었는데, 공연팀의 쇼하자를 보고 난 공연팀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내가 연극을 하고 싶었던 이유는 무대에 오를 수 있기 때문이었고, 공연팀을 하게 된다면, 무대에 올라갈 수 도 있고, 신나게 악기도 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주니어가 되며 선택한 공연 팀은 나에게 시작부터 크나큰 충격을 주었다. 처음 받았던 충격은 공연팀<촌닭들>의 시작이 내가 생각했던 락과 같은 밴드음악이 아닌 브라질의 월드뮤직이었기 때문이다. 공연팀을 해야 될지 잠깐 망설이기도 했지만 딱히 삼바와 같은 월드뮤직의 장르가 싫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길 찾기 수업으로 퍼커션 수업이 있기도 했고 역시 음악에 대한 관심보다는 무대에 서고 싶다는 마음이 강했기에 그만두지 않았다. 하자는 이 이후에도 나에게 새로운 문화를 인식하는 것에 대한 도전과제를 끊임없이 던져주었다. 솔직히 이런 요구들에 나는 아무런 생각도 없었고, 조금 힘들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길 찾기도 수료했고, 무대에 서는 단계까지 왔으니 일단 해보겠다는 마음으로 도전했다.

 

공연팀에서 새로운 공연의 문화를 받아들이는 것은 즐거웠다. 하지만 나는 팀 안에서의 관계를 맺는 것에 어려움을 겪었다. 하자 안에서의 관계 맺기의 방식은 모두가 동등하고 서로를 존중해주어야 하는 ‘작업자’와 ‘작업자’의 관계 맺기였다. 그동안 직업과 나이로써 상대방을 대해본 적은 있지만 작업자의 태도와 신념으로써 상대방을 대하는 것은 처음이었기 때문에 같은 또래의 친구들에게도 존댓말을 쓴다거나, 말을 하는 방식에 대해서 지나치게 조심해야 된다거나, 화를 내는 것조차 조심해야 되는 것, 내가 했던 일들에 대해서 상대방에게 공유하는 방법, 작업을 할 때 지켜야 되는 예의 등은 나에겐 크나큰 스트레스로써 다가왔다. 그렇게 1학기가 끝나고 처음으로 팀별 회고모임을 가졌을 때 들었던 짜증을 많이 낸다는 말을 듣자마자 나는 처음에 그렇지 않다는 강한 부정을 하며 모임을 끝냈지만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렇게 내가 짜증을 많이 냈었나 하며 한 학기의 내 모습을 상기시켜보았다.“그것은 내가 공연팀을 도전으로 맞아들이는 시작점이었다.”

 

*팀원과 팀이 해야 되는 일

 

그렇게 모두 같은 위치일거라 생각했던 죽돌 들의 관계가 2학기로 접어들면서 팀장제도가 생겨났다. 난 팀장이 되지 못했는데, 그렇게 팀장이 되지 못한 것이 분하기도 했고, 정말로 혼자서는 이해할 수 없어서 히옥스에게 조언을 구했다. 내 역할이 마치 악기만 치고 있는 곰돌이 같고, 지금의 팀장과 부 팀장의 제안과 모습들에 대해서 인정할 수 없다고 했을 때 히옥스는 나에게 서로의 다름과 능력을 인정해주고 서로 도와가야 되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해주셨다. 그 때부터 나는 서포터로써의 역할에 대해 고민해보게 되었던 것 같다. 팀장의 역할과 제안들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고 일단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러자 팀원들과 부딪히는 일이 적어졌다. 그리고 1학기 때의 내 모습을 상기시켜보는 시간을 꼭 학기 마무리를 회고 하는 시간만이 아닌 코멘트를 듣자마자 돌아보는 습관을 가지려고 노력했다. 처음부터 쉬웠던 것은 아니다. 듣기 거북한 코멘트도 있었고, 말도 안 되는 제안과 행동들도 있었다. 하지만 노력하는 부분을 놓고 싶지 않았다. 내가 노력하기 시작하자 팀 안에서 팀원들이 나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지면서 나도 한 팀이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 시간을 통해서 나는 “상대방의 의견을 인정하고 매 순간 자신을 회고해보는 시간”을 가져야 됨을 알았고, 내가 서로의 이야기를 잘 듣고, 무슨 말을 할지 고민해 봄을 통해서 그 이후의 팀 안에서의 내 의견은 힘을 얻을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1학기 때의 모습보다 변화되어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관계 문제에 대해서 어느 정도 풀렸을 즈음 내가 눈을 돌린 것은 공연이었다. 촌닭들의 첫 번째 공연은 영덕의 홍보대사로 초청되어 인사동에서 했던 바투카다 공연이었다. 이 공연 이후 처음으로 ‘모니터링’ 이라는 것도 해보게 된 난 부끄러워서 화면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그 이후 브라질에서 프로로 활동하고 있는 팀들의 영상을 보며 따라 해보려 했지만 초반부터 그런 사운드가 나오지도 않고, 연습이 안 되서 화를 내고 나가거나, 절망한 적도 많았다. 그래도 꾸준한 연습을 통해 발전된 모습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공연을 하고 끝난 뒤에 전화번호를 물어보러 온다거나, “쟤 멋지다.”라고 말해주는 그런 시선들과 반응들도 있었기 때문에(아주 일부분이다.)더욱더 에너지를 받고 열심히 하게 되었다. 그러다보니 우리의 공연을 평가해주는 것은 나뿐만이 아닌 관객이 있음을 깨달았고, 공연은 공연자와 관객이 함께 만드는 것임 또 한 알았다.

모니터링의 다른 방식일 수도 있겠지만 또 하나의 중요한 배움이 있다면 상대방에게 코멘트를 하는 방식에 대해 알게 된 것이다. 새로운 신입멤버가 들어온 뒤에 잘못된 부분에 나도 코멘트라고 생각하고 이야기 했었다. 근데 그 방식은 상대방에게 ‘그저 너가 잘못했다.’ 와 같은 비난의 말 들이었다. 그래서 나누고자 했던 의미가 어긋나서 싸우기 일쑤였다. 그러나 판돌들의 코멘트를 관찰해보니 판돌들의 코멘트는 잘못에 대한 지적뿐만 아니라, 자신의 경험 혹은 다른 사례를 통한 ‘대안점’에 대해 제시함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판돌들처럼 코멘트를 하려고 하다 보니 상대방이 했던 실수의 원인에 대해서 잘 들어야 했으며, 코멘트를 듣다가도 부딪치게 되는 의견충돌에 있어서 왜 충돌이 일어나고 있는지 상대방의 코멘트에 다시 질문을 던질 수도 있었다. 그리고 코멘트를 해보며 코멘트를 해주어야 될 타이밍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다. 예를 들어 워크숍의 진행 도중에 코멘트를 하거나 공연을 끝내자마자 코멘트를 하는 것은 좋지 않다. 그 때의 코멘트는 그 사람이 유지하고 있던 에너지를 끊어버리는 행동이었기 때문이다.

*나의 변화 그리고 팀의 변화

 

공연과 워크숍을 통해 ‘촌닭들’이라는 이름으로 전전긍긍 일년도 안 되어 하는 동안 휘와 제리가 떠나서 담임판돌이 없는 공연팀이 되기도 했다. 이때부터 나는 팀장이 된 나르샤와 사탕을 더 많이 돕기 시작했다. 같이 있던 시간 속에서 부딪히고 그 속에서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는 시간들이 나에겐 팀을 다시 보게 되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도 있다. 그리고 내가 할 일만 다하면 끝을 내는 것이 아니고 공연팀에 필요한 일들을 찾아 하다 보니 팀원들과 판돌들의 태도와 이야기들에 영향을 받기도 했다. 일을 다 끝내고 나면 항상 뒤쳐지는 죽돌들이 있었는데, 그 죽돌들을 보채는 대신 같이 시간내에 끝낼 수 있도록 도와줄 일을 물어본다거나, 팀장이 항상 전체를 이끌어 나갈 땐 그냥 따르는 것만이 아닌 전체를 더 잘 이끌 수 있도록 뒤에서 맞장구쳐주며 의견을 덧붙이는 일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공연에 필요한 물품들을 내가 먼저 챙긴다던가 하는 잡일도 먼저 도맡아하기 시작했다. 이런 시도를 통해 내가 하기 싫은 일들을 팀을 이끌어 나가기 위한 일로 생각하며 더욱 세심하게 할 수 있었다. 팀에 대한 문제점의 대해서 고민하게 되고, 더 좋은 공연을 만들고 싶은 동기도 생겨났다. 나는 해야 될 일을 해봄으로써 하고 싶은 일을 해야 되는 이유를 만들어나갈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우리끼리 남았기 때문에 전전긍긍하는 것을 벗어나는 것보단 더 많은 트러블이 일어났다.대신 팀이 아무리 싸워도 굴러갈 수 있던 것은 같이 공연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공연회의가 잘 풀리지 않더라도 같이 악기만 치고 나면 회의내용과 달리 공연이 만들어졌고, 무대아래에선 뭉쳐지지 않던 단합도 무대에서 만큼은 눈빛만 봐도 통했다. 1년이 지나는 동안 팀은 같이 말을 하는 것보다 같이 무대에 서는 일이 있었기 때문에 계속 뭉쳐있을 수 있었다. 같이 공연을 하는 것이 너무 즐거웠기 때문이다. 내가 아무리 팀원들과 부딪혀도 팀에 있을 수 있던 건 같이 만들 수 있는 공연과 연주가 있어서 에너지를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공연을 기억할 수 있는 거라곤 합주가 잘 되었던 어디의 공연 합주가 잘 안되었던 어디의 공연만 남을 뿐이지만, 그것들은 우리의 대화 주제를 이어주는 작은 연결선들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겐 어디서 무슨 공연을 했지만, 왜 했는지에 대한 기억이 없었다. 그러면서 공연에 대한 기획에 새로운 문제점이 들어왔지만, 그 문제점을 풀어나가는 것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이 문제를 통해서 처음으로 자신이 하고 싶은 공연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그동안의 팀에서 우리는 계속 똑같은 고민과 문제들만을 풀어왔기에 팀 안에서 자신이라는 존재보다 자신조차 팀이라는 생각이 강했기에 각자의 의견을 만들어보는 일은 또 새로운 경험이었지만 결과는 또 다시 “즐거운 공연을 하자” 로 전과 다름없이 굳어져 버렸다. 대신 이 이후 달라진 점이 있다면 그 행사의 분위기와 얘기하고자 하는 내용에 어울리는 레퍼토리 구성과 꼭 브라질 악기와 노래만이 아닌 우리나라 노래들, 그리고 시와 같은 것으로도 구성할 수 있게 되었다.

 

*새롭게 자신을 위치시키는 것 

주니어 수료 이후 시니어 작업으로 공연팀에 다시 들어가면서, 나는 공연팀의 매니저겸 공연자겸 멘토의 역할을 하겠다는 생각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이 계획이 처음부터 잘 이루어졌던 것은 아니다. 주니어 수료 이후 들어간 공연팀은 혼란 상태였다. 그래서 내가 시도하고자 했던 것은 나 바로 다음으로 들어온 멤버들의 역할 분담과 의욕을 돋워 주는 것이었다. 처음에 이 부분을 한다고 했을 때는 그때의 3학기 멤버(오래된 팀원들)들은 시큰둥하거나, 동조하지 않았다. 그래서 대상을 바꿔 신입단원들에게 사기를 북돋아주려고 하면 내 말투나 행동들이 이해도 안가고 위압감이 느껴졌는지 대답을 얼버무리거나 이해를 못하겠다는 표정을 보였다. 그래서 나는 모든 일들을 나 혼자 다 처리해버리겠다는 마음으로 뛰어들었지만, 그것은 팀원들에게도 좋지 않아보였고, 나 또한 힘들게 만드는 방식이었음을 금세 깨닫고, 3학기 멤버들을 한 명씩 만나서 지금의 상황과 문제점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모두들 불편해했던 것은 불명확한 나의 역할이었음을 알게 되었고, 나는 내가 만들고 싶은 팀에 대한 이야기와 팀원으로써 해주었으면 하는 역할과 태도에 대해 이야기 해주었다. 그리고 3학기 모임을 만들며 모임을 통해 분산되었던 팀의 분위기를 모으기 시작했다. 이 시간을 통해 그 전에 있던 회의에 대한 의견조율의 방식이나, 지각문제와 같은 문제가 해결되었다.

 

기본적인 문제들을 해결하고 나니, 다른 문제점이 보이기 시작했다. 3학기 모임 중에는 2학기와 신입멤버들은 ‘흉내내기 워크숍’을 진행하고 있었는데, 우리가 함께할 공연의 레퍼토리 구성에 있어서 실력 차가 많이 난다는 점이었다. 이 부분을 보안하기 위해서 나는 전문 바투카다 공연팀을 기획하게 되었다. 전문바투카다를 기획했던 이유는 당시 다니고 있던 에스꼴라 알레그리아와 라퍼커션의 영향이 컸다. 에스꼴라 알레그리아는 촌닭들을 2년 동안 해오면서 나에겐 언제나 바투카다의 롤 모델이었고, 거기에 계신 복철은 내가 음악을 하는 마음가짐에 커다란 영향을 준 존재였다. 복철을 보며 나도 항상 모든 음악은 마음으로 받아드리고 영혼을 내 뱉듯이 노래하고, 춤추고, 악기를 쳐야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에스꼴라 알레그리아를 다니면서 다녔던 라퍼커션은 주니어 이 후 나의 퍼커션 실력을 향상시키는데 가장 도움이 많이 된 팀이다. 그 팀에서 만났던 호영이형은 에너지가 넘쳐났으며, 일을 진행시키는데 거침없었고, 항상 브라질의 전통적인 리듬만을 추구하던 에스꼴라 알레그리아와 달리 하우스음악을 접목시키거나 마라카투와 같은 새로운 리듬의 방식들을 배울 수 있었다. 이 두 팀을 통해서 나는 공연 팀에서의 바투카다 팀을 꿈꾸었지만, 이 시기에 많은 팀원들이 나가면서 팀의 분위기를 다잡는데 다시 힘을 써야 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에스꼴라 알레그리아와 라퍼커션이 나에게 한 팀에만 집중해주기를 요구하면서, 나는 혼란에 빠지기 시작했다. 원래 라퍼커션은 에스꼴라 알레그리아에 있던 프로그램 중 바투카다 워크숍에서 더욱더 실력이 발전하기를 원하는 회원들의 연습시간이었는데, 복철과 그 프로그램 진행자였던 호영이형의 의견이 맞지 않아서 팀이 갈리게 되었다. 그래서 원래 한 팀이었던 팀에서 다시 한 팀을 고르는데 있어서 나는 정말 힘들었다. 결과적으로 에스꼴라 알레그리아를 골랐던 이유는 라퍼커션에는 호영이형 외에도 많은 조력자가 있었지만, 복철에게는 그만큼의 조력자가 없다고 생각이 들기도 했고, 복철은 길 찾기 때부터 나의 퍼커션 선생님이시기도 했다. 그리고 그 당시의 공연팀은 복철이 계속 강사로 오시고 계셨기 때문에 나는 에스꼴라 알레그리아를 선택하게 되었다.

그 이후 에스꼴라 알레그리아를 다니며 복철이 브라질에 가시면서 내가 6개월 간의 워크숍 진행을 맡게 되며, 소량의 페이를 받기도 했다. 난 에스꼴라 알레그리아의 경험을 통해 조급함과 답답함에 대해서 느긋해질 수 있었다. 초반에 회원들과 함께할 레퍼토리를 처음부터 다시 다 만들어야 했기 때문에 많이 조급했지만, 후에는 아무리 같은 리듬을 가르쳐도 일주일에 한 번 나와서 취미로 하시는 분들에게는 무리였기에 난 조급함보다는 답답함에 이르게 되었다. 하지만 이 분들의 생활을 생각해보면 나와 다르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삶의 찌들어 있는 회원들을 기쁘고 즐겁게 해주는 것이 나의 역할이라고 생각하자 사람들에게 악기의 숙련도를 고집하는 것은 잊어버린 채 나도 즐겁게 같이 악기를 치겠다는 마음으로 회원들을 접하게 되었다. 그렇게 에스꼴라 알레그리아에 다니다가 밴드 알레그리아를 접하게 되었다. 지금의 밴드 알레그리아는 ‘화분’ 이라는 이름을 가진 밴드로 삼바와 보사노바 위주의 자작곡을 만들고, 공연을 하고 있으며 난 거기서 퍼커션 주자를 맡게 되었다.


에스꼴라 알레그리아와 공연팀의 문제점들을 거치며, 내 위치에서 함께 하고 있는 이들이 누구인가를 다시 한 번 되돌아보게 되는 경험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은 지금 나와 어떤 마음으로 같이 하고 있는가를 잘 바라보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 사람들과 함께 일을 하면서 되지 않는다고 모든 일들을 내 방식대로 하려다 보면 모두가 힘들다는 것도 알았고, 그것은 같이 일을 하는 방식으로서는 도움이 되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위의 시간들은 계속해서 내가 팀과 함께하기 위해서 무엇인가 필요한 것들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알게 되는 과정들이었다.  

*혼자가 아닌 함께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들

에스꼴라 알레그리아와 라퍼커션, 화분을 거치고 나면서 대략 나도 홍대의 음악판에서 놀고 있다고 생각이 들자 자만심도 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시니어의 1년의 과정들을 통해서 나는 선배의 입장이라고 생각도 하게 되어 위치와 역할 등, 내가 보여지는 모습에 대해서 신경 쓰게 되었다. 모든 것을 알고 있어야 된다고 생각했고, 조언을 해주는 조언자의 역할이 되어야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보니 모두가 모인 자리에서 리뷰를 하거나, 공연팀 회의를 할 때 과정은 빼먹은 채 책이나 강의시간에 들은 내용으로 아무도 내 의견에 반박할 수 없는 ‘정답’을 이야기 하곤 했다. 하지만 판돌들과 죽돌 들은 내가 말하는 정답의 과정에 대해 질문했고 난 대답할 수 없었다. 팀을 위해서 한 이야기라고 생각했는데 그 의견들은 도움이 될 수 없었다.  

난 이 과정을 해결하는데 정선을 갔다 온 후에 작업을 하는 과정을 통해 잘못된 방식을 고칠 수 있었다. 작업물을 만들어 내는 과정에서 나는 정선에서 알게 된 사실과 내 생각들을 계속해서 조합해보는 과정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 과정을 통해서 내가 직면했던 과정의 대한 질문도 답할 수 있게 되었다. 그 답들은 적어도 내가 본 사실과 정보에 근거한 것이었기 때문에 자신감 있게 대답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모르는 것을 아는 체하고 있었던 내 모습에 대해서 한심함을 느끼며,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도 들게 되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멕시코의 선조들이기도 한 '톨텍'족이 남긴 "예술가" 라는 시에 나오는대로 내가 (“썩은 예술가는 닥치는 대로 일하고, 사람들을 비웃고, 불분명한 물건을 만들고, 사물 안면의 표면을 붓질하고, 부주의하게 일하고, 사람들을 속이는, 도둑놈”) 이었나를 되돌아보며 내가 했던 말들과 작업들을 전체적으로 돌아보는 것을 통해서 ‘예술가’에 나오는 사람처럼 내 작업과 일상을 대하겠다고 다시 다짐했다.  


하자에 들어올 때도 하자를 졸업하는 과정에서도 나에겐 끊임없이 문제를 풀기 위한 시도들이 필요했다. 그것들을 하자에서는 ‘해야 되는 일’이라고 부른다. 하자에서는 내가 해야 되는 일을 해도 해야 되는 일은 다시 또 생겼다. 그럼 또 다시 난 새로운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하자 밖을 나가는 것도 나에겐 새로운 문제로써 직면된다. 가장 오랜 시간 직면해온 ‘무엇을 하며 먹고 살 것인가’에 대한 문제다. 하지만 나에게는 하고 싶은 일을 하며 먹고 살기라는 하자의 비젼이 있고 그동안 문제를 풀어보기 위해서 시도했던 과정들도 남아있다. 그리고 난 이 시도했던 과정들이 문제를 풀고 버리는 것이 아니라 다음 문제를 풀 때도 사용할 수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리고 직면하는 문제들을 풀기 위해선 꼭 내 경험만이 아닌 다른 사람의 지식과 정보가 담긴 공부를 통해서도 도움을 받을 수 있음도 알게 되었다. 그러므로 나는 꾸준히 공부하며, 다시 또 다가올 앞으로의 문제들을 피하지 않을 것이다. 나에겐 문제를 직면함을 통해 배웠던 시간들과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동안의 문제들을 해결하고 시도 할 수 있었던 것은 3년동안 함께한 공연팀이 있었기 때문이다. 공연팀과 공연을 하면서 즐거웠던 기억들, 회의를 하고 일을 같이 진행하며 서로를 알아가는 그 과정은 나에겐 배움과 경험의 전부였다. 함께 놀고 배운 시간들은 앞으로 다른 사람들을 만나도 함께 놀고 배울 수 있는 과정을 만들어 나가는 것에 크나큰 나의 자원이 될 것이다.

profile
오앙! 엽입니다.
e-mail: yeop@haja.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