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자작업장학교 여섯 번째 졸업식 에세이

일하는 것이 공부하는 것, 공부하는 것이 먹고 사는 일입니다.

나르샤

 좋은 학교란 늘 다채로운 말이 오가고 새로운 실험이 시도되며 때문에 항상 변화의 가운데에 놓여 있을 것이다. 하자작업장학교는 학교를 그만 두었지만 삶에서의 학습을 지속시키고픈 청소년들과 그것을 지지하는 어른들이 모여 있다. 안에서는 자의든 타의든 재미있는 실험들이 학습과 성장을 가늠하며 일어나곤 한다. 나는 이 복작거리는 곳에서 하고 싶은 일 하면서 먹고 살기를 실험해왔다.


 가끔 마음을 추스르지 못하고 하자에서의 생활을 돌이켜 보는 친구들은 자신이 꼭 실험실의 모르모트 같았다는 이야기를 하고는 한다. 이처럼 안타까운 말이 또 어디 있을까. 돌이켜 본 경험이 추억과 케케묵은 감정을 넘어서 무언가를 배웠다는 것은 우선 자신의 경험에 주체성을 가져야 한다.
학습은 일방향의 주입에 불과하고 선생님은 다 위선자라고 생각했던 시절에 마주하게 된 하자는, 새로운 정의와 방식들로 가득 찬 마법세계였다. 담임과 죽돌이 테이블에 마주보고 앉아 매 학기의 학습계약을 하고 스스로 자신의 매체를 선택하여 작업물을 생산하는 모습을 보면서 여기라면 무언가를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확신을 얻었다. 모든 것이 다 서툴 수밖에 없는 길찾기 때, 담임들의 조언을 듣고 싶지 않다며 쇼하자를 우리들끼리 해보겠다고 선언하기도 했다. 스물 한명에 달하는 인원이 각자의 할 일을 찾는 법, 쇼하자를 보러온 사람들에게 어떤 이야기를 할지 고민 해보는 것, 큐시트를 짜는 법, 세련된 영상을 만드는 법 등 구체적인 방법을 몰랐던 우리는 결국 쇼하자의 역사 동안 제일 지루했다고 평가될 4시간짜리 길찾기 쇼하자를 선보였다. 당시 담임이었던 히옥스와 싸이먼은 (척 보아도 실패할 것이 확실한)우리의 실험을 묵묵히 지켜보았다. 쇼하자는 성공적이었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성공 유무와 상관없이 시행착오는 우리에게 무엇이 부족했고 무엇이 필요한지 알게 해주어 다음에 더! (잘해야지) 마음먹게 하는 기폭제가 되었다. 실험이 이루어지는 학교는 마법사의 골방이라고 여겨지면 좋을 것 같다. 그 안에서는 실험자와 피실험자가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하자에서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이 두 가지 역할을 동시에 할 수 있어야 한다.


 촌닭들 : '활력을 팝니다'

4년 동안의 내 학습경로를 돌이켜 보면 무대를 중심으로 협업을 요구하는 활동들이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길찾기 시절에는 밴드공연팀 <소리 위 2.0>, 주니어 시절에는 아프리칸 브라질리언 스타일의 십대 공연팀 <촌닭들>에서 활동하면서 또래 동료들과의 협업 경험을 가졌다. 나 스스로 급성장하였다고 생각하는 터닝 포인트는 촌닭들 때이다. 만들어질 당시 팀원 여섯 명과 담임 한명으로 구성되었던 촌닭들은 반년 후 담임과 팀원 두 명을 떠나보내야만 했다. 폭풍처럼 휘몰아친 변화에 촌닭들은 무담임 / 팀장체제로 바뀌어 팀을 이끌어나갈 수밖에 없었다. 그 때부터 나는 촌닭들의 팀장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기껏해야 반장이나 동아리장 밖에는 해보지 않았던 내가 이렇게 담임도 없는 장업장 팀의 팀장을 하다니. 겉으로는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했지만 속으로는 책임감이 막중했다. 팀의 디렉터였던 휘는 촌닭들에게 ‘파트너십’과 ‘리더십’ ‘서포터십’ 이라는 키워드를 소개시켜 주었다. 나는 그 개념들을 내 안의 필터링으로 한번 걸러내어 인식했다. 팀이 잘 돌아가기 위해서는 리더와 서포터가 존재하며 팀원들 사이에서는 파트너십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이끄는 사람과 이끌림 당하는 사람이 당연히 존재한다는 듯 말이다. 일년이 넘는 시간 동안 촌닭들은 '스윙걸즈'나 '훌러걸즈'와 같은 십대 공연단으로서의 창업을 꿈꾸며 빡빡한 스케줄을 소화해 나갔다. 나는 촌닭들이라는 판과 더불어 하자가 돌아가는 판을 조금씩 볼 수 있게 되었다. 시야가 넓어진 것이다. 그 전에는 몰랐지만, 죽돌이 죽치고 작업하고 있을 때 안 보이는 곳에서 판돌들이 판을 돌리는 노력-예컨대 기획서와 기안을 쓴다거나 죽들이 어떤 상태인지, 지금 대로 학습을 해나가면 어떤 경로를 만나게 될는지 예측하고 도움을 주는-들이 눈에 들어왔다. 시간이 지나면서 팀장체계가 더더욱 명확해 지기 시작했다. 아주 사소한 것도 내가 결정을 내려야 했고 나오지 않는 의견들을 이끌어 내느라 힘이 빠지기 시작했다. 들쑥날쑥 하는 팀원들의 의견을 조율하느라 짜증도 많이 부렸다. “오늘은 공연 준비해야하니까 열시까지 연습하자” 라고 하는 말에 “좀 힘든데 조금만 하면 안 돼?” 답변이 오면 노트 뒷장에 쓰여 있는 柔를 보며 욱하는 마음을 부여잡곤 했다. 히옥스는 ‘팀장은 잘 듣고 잘 봐야한다’라고 말씀해 주셨지만 여간해서 팀을 보기가 힘들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팀 안의 다양성과 차이를 보지 못하고 아집으로 둘러싸이기 시작했다. 아마 함께 촌닭들을 하고 있는 동료들에게는 또 다른 ‘꼰대’로 비추어졌을지도 모른다. 주니어 수료식과 방방파티 때까지 이 꼰대기질을 버리지 못하는 나를 보면서 다른 판에 들어가지 않으면 촌닭들에서 계속 이런 식으로 작업하게 되겠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꼈다.

 

때맞추어 하자는 지난 십년간의 사업을 돌아보고 앞으로의 십년을 준비하고 있었다. 지난 십년 동안은 청소년들의 문화작업장을 잘 만들어 왔다면 앞으로의 십년은 대안교육 판에서 자란 청년들의 일의 판을 만들기 위해 사회적기업을 인큐베이팅하는 ‘창프로젝트’를 기획하기 시작했다. 사회적기업은 사회의 공공적 이익을 우선으로 가지며 기업의 이윤도 동시에 추구한다는 새로운 개념의 제 4섹터이다. 세이렌은 나에게 <이야기꾼의 책공연>에 인턴 활동을 해보면 어떻겠냐는 제안을 해주었다. 프로페셔널한 이십대, 삼십대들과 함께 작업을 해보고 싶다는 꿈과 사회적기업에 대한 궁금증과 기대가 컸던 나는 그 제안을 덥석 받아들였다.


이야기꾼의 책공연 : 프로페셔널하게 일한다는 것

주 연령층이 삼십대인 이갸기꾼의 책공연 안에서 나는 가장 어린 사람 즉 후배가 되어버렸다. 촌닭들에서 또래끼리 지지고 볶고 공부하고 놀며 진한 경험을 했었다면 이곳에서는 나보다 앞서나간, 경험이 많은 '선배집단'을 만날 수 있었다. 선배들을 만난다는 것은 나의 과거-미래와 계속 만나는 과정이었으며 이 시간들은 나에게 굉장히 특별했다. 삼십년 넘게 아동 연극에 몸담고 있는 생이나 이런 저런 기획의 판을 거쳐 우리 팀에 합류하게 된 황PD,  무용수 활동을 하다가 이제는 사회적기업의 대표인 분홍신  그 외에도 콘, 문,  학구 등 여러 삶의 경로들을 가진 ‘어른’들을 볼 수 있었다. 다들 자신만의 노하우나 시선의 관점 뚜렷했다. 말이 멋들어지거나, 뽀대 나지 않아도 몸에서 무언가를 풍겼다. 그건 오랜 시간 동안 일상의 꾸준한 훈련에서 나오는 아우라 혹은 노하우일 것이다. 그들을 보며 하고 싶은 것을 꾸준히 그리고 절실히 하면 먹고 사는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겠구나 싶었다. <이야기꾼의 책공연> 인턴을 하면서 나는 여러 워크숍을 진행하고 공연을 제작하는 일을 했다. 노원에서 아동복지센터 워크숍을 끝낸 후 커피숍에 모여 앉아 밤 열시를 넘기면서까지 평가서를 작성하고는 했는데, 함께 작업하는 ‘선배집단’인 콘과 영심이의 꼼꼼함과 예리함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아이들이 언제 어떤 말과 행동을 했는지, 어떤 돌발 상황이 발생했었는지 캐치하면서 하나하나 섬세하게 평가서를 적어 내려갔던 것이다. 또한 앞으로 비슷한 상황이 발생하면 강사로서 어떻게 행동해야할지 대처 방안까지 놓치지 않고 마련해나갔다. 촌닭들 워크숍 때 내가 놓쳤던 것이 많았다는 것을 느끼면서 이게 정말 돈을 받으면서 일한다는 ‘프로페셔널’이란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콘과 영심이라는 두 멘토와 작업할 때 나는 무척 즐거웠다. ‘내가 이들과 한 멤버로서 일하고 있구나.’ 라는 확신이 종종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험과 수준이 결코 같지 않을 것이라는 것은 나 자신이 더욱 잘 알기에 나를 같은 어깨 위치에 올려주고 함께 쟁점을 고민하며 문제를 풀어 나가주어 감사하면서도 즐거웠다.

 

약 반년 정도의 인턴 생활이 지나자 나는 자연스러운 듯이 정직원으로 계약하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의 나는 정직원이라는 것이 어떤 위치일지 확실히 파악하지 못한 채 인턴의 생활을 정리하게 되었다. 인턴 생활 동안에는 팀이 어떻게 굴러가는지 세심히 관찰하는 것이 중요하다면 정직원에서는 실제 창업 동료가 되어 팀의 미래를 함께 고민하고 목표를 설정해 달려가는 태도의 변화가 필요했다. 인턴 때는 질문하던 입장이었다면 이제는 그 질문을 동료들과 함께 묻고 답하는 입장인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더 많은 사람들과 몸을 부딪치며 일 하게 되자 초기에 예상치 못했던 문제가 속속 일어났다. 나는 하자의 문화는, 대안적인 문화를 원하는 여러 사람들의 노력으로 긴 시간 공을 쌓으며 만들어진 독특한 문화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면 스스로 이름을 짓는 문화나 각자의 개성을 존중하여 주기. 또한 스스로 학습하고 업그레이드 하려고 노력하는 것. 나이차별, 학력차별, 지역차별 하지 않기 등 진지한 약속들이 지켜져 왔다. 하지만 이제 지난 십 년간의 문화 위에 또 다른 시도들이 펼쳐지고 있었다. 나는 지난 하자의 문화가 제대로 공유되고 있는지 걱정되면서 적어도 우리 팀 안의 문화는 잘 형성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있었다. 특히 나이, 계급에 관한 일반적인 관습, 습관은 스스로 알아차리기도 힘들뿐더러 제도적으로 개인이 초월하기 힘든 문제이기 때문에 어떤 식으로든 나에게 가장 민감한 부분으로 다가올 것 같았다. 차별은 아니지만 나이에 관한 아주 미묘한 어떤 것. 예를 들면 아주 사소하게 팀에게 음식이 오면 나이 많은 사람부터 챙겨준다든지, 내가 어리기 때문에 어떤 것을 양보 받는다든지 하는 것이 나쁘다고 볼 수 는 없지만 그것이 어떠한 영향을 주는지 알게 되었다. 또한 “~는 어리니까 좋겠다.” “젊은 나르샤” 등 쉽게 오가는 말들이 나의 위치를 구속시켰다고 느낀다. 종종 나는 어리니까 책임을 조금만 져도 괜찮겠지? 라는 생각이 들게 되더라.

 

또 하나 내 골머리를 앓게 했던 것은 ‘프로페셔널’에 관한 문제였다. 함께 일하는 삼사십대의 ‘어른’들은 작업물이 ‘뿅!’하고 튀어나오는데 나는 아직 만드는 중일 때. ‘탈극’에서 쓰는 움직임이 뭔지 감조차 못 잡았을 때,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말 꺼냈던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하지만 나는 설득하기 힘들 때, 팀 안에서 ‘배우로서 훈련이 되어있지 않는 사람은 무대에 올리지 말자’ 라는 이야기가 나올 때. 차라리 대학에서 배우고 여기에 왔으면 더 나았겠지. 싶으면서 무기력증에 빠졌다. 내가 여기서 뭘 하는 걸까? ‘프로페셔널하다는 것이 뭘까?’ ‘프로페셔널과 아마추어를 나누는 것을 뭘까?’ 한 10년 하면 ‘프로페셔널’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가끔은 묻지도 따지지도 설명하지도 않아도 되는 작업장학교로 돌아가고 싶었으며 히옥스의 가르침 아래에서 또래들과 토론하고 배우고 작업하고 생산하며 신나게 공부하고 싶었다. 실제로 징징 짜면서 슬쩍 말 꺼내 보았다가 단칼에 잘리기도 했다. 그 때도 지금도 히옥스의 ‘단칼’이 뭘 뜻하는지, 이유가 뭔지 (아마도)알고 있다.

 

‘단칼’ 덕분에 그리고 <이야기꾼의 책공연> 팀원들이 (내가 무엇 때문에 힘들어 하는지 알았는지 몰랐는지 모르겠지만 어찌되었든) 나의 모든 과정을 묵묵히 지켜봐 주었기 때문에 힘들든, 느리든 팀 안에서 계속 남아 작업을 할 수 있었다. 그러면서 주니어 때 판돌들과 주위에서 말하던 협업과 팀의 다양성이란 것이 무엇인지 점점 알 수 있었다. 리더가 확실하고 굳은 의지로 처음부터 끝까지 팀원들을 끌고 나가는 것을 언뜻 보면 뒤 끝 없고 속도가 빠를 것처럼 보이나 그 팀은 아마 리더의 역량 이상의 팀이 나오기는 힘들다고 생각한다. 리더의 그런 자세는 어느새 팀원을 수동적이게 만들어 버린다. 반대로 수동적인 팀원만 많다면 리더는 일방적인 자세를 취할 수밖에 없다. 역동적인 팀은 살아있는 유기체처럼 계속 변화하며 힘의 방향이 매시간 달라질 것이다. 아니, 리더와 팀원이라는 경계가 무의미해 질 것이다. 그렇게 서로간의 차이와 그것이 뭉쳐졌을 때의 다양성이 팀 창의성의 원천이 아닐까 싶다. 때문에 일을 대할 때의 가장 필요한 것은 ‘우리 함께 해결하자’라는 마음 자세였다. 촌닭들 당시 이해하지 못했던 ‘리더십’ ‘서포터십’ ‘파트너십’은 따로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좋은 팀이라면 팀원 모두가 다 갖고 있어야 할 자질이었다. 또한 이제는 실력이나 ‘나는 프로페셔널하지 않다’ 는 것에 더 이상 머리 아프지 않기로 했다. 프로페셔널과 아마추어를 나누는 기준이 도대체 뭘까? 라는 질문에 그 질문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답을 내리기로 했기 때문이다. 얼마나 잘하느냐, 못하느냐 실력여부를 따지는 것보다 내가 지금 자기 주도적일까? 정말 그 일을 좋아할까? 의 질문으로 바꾸기로 했다. 계속되는 자기 자책용 질문은 나를 갉아먹을 뿐이다.

이렇게 촌닭들과 이야기꾼의 책공연이란 두 개의 상이한 판은 나의 지난 역사를 되돌아보고 역으로 작업장학교 안에서의 학습을 정말 깨우치게 만드는 순간이기도 했다. 요즘 나의 화두는 사회적 기업에 대한 것이다.  하지만 나는 ‘진짜’ social problem과 solution, story를 찾고 싶다. 내가 해서 즐겁고 행복한 일들이 남도 즐겁고 행복하게 만들었으면 한다. <이야기꾼의 책공연>이 걸어 나가는 행보 하나하나에 그것들이 결정될 것이라 생각하고 그 행보에서 좋은 답을 얻어낼 수 있도록 나 또한 노력할 거다.


하고 싶은 것 하면서 먹고 살기

작년 겨울 할아버지가 나에게 전화를 하시더니 대뜸 대학 가냐고 물으시더라. 첫 월급을 받기 시작할 때에도 할아버지의 전화가 한번 왔고 요즘도 대학관련 전화와 문자가 가족에게서 종종 들이 닥치고 있다. 대학을 가도 나쁘진 않겠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별로 한스럽지도 않고 고민스럽지도 않으며 목매달고 싶지도 않다. 나는 ‘하고 싶은 것 하면서 먹고 살기’를 실험하면서 학습은 대학에만 있지 않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물론 학교에서 공부하고 사회에 나가 일하면서 깨져보는 것과 그때 그때 해보면서 배우고 여정에 따른 공부를 하면서 성장하는 무엇이 더 좋을지 나쁠지 따질 수 없다. 각자 자신의 노선이 있고 새로운 노선은 계속 만들어 만들어지고 있다는 것이 중요할 뿐이다. 초기에는 탈학교 한 것이 불안했지만 해보니 이제야 알겠다. 해보는 경험이 바로 학습이며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싶으면 주체성과 자발성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앞으로도 경계를 넘어서 실험하는 것들을 해보고 싶어 당분간은 책공연 팀에서 그리고 그 이후에는 또 다른 사회적기업과 여타 새로운 실험들에 계속 도전하게 될 것 같다.  변화의 주체가 되는 일들을 하며 ‘우리’가 같이 사는 방법까지 고민할 수 있는 문화작업자가 되고 싶다. 앞으로의 실험이 성공할지 실패할지 혹은 멋진 하나의 시도로 남게 될지 아직 누구도 예상할 수 없다. 작업장학교에서 봐왔고 해왔던 숱한 실험들을 본보기 삼아 내 실험을 주도하며 그러면서 배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