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보단 알아보고 싶은 예술가에 대해서 조사했습니다.



피에로 만초니 [1933-1963 손치니, 이탈리아]

 

미술, 예술가가 사회와 어떻게 연계되어 있으며 그 기능에 대해서 탐구하던 만초니는 실험적인 작품을 만들었다. 1957년 밀라노에서 열린 클랭의 모노크롬 전시에 깊은 감명을 받고 그해 말 그는 ‘아크롬’이라는 작품을 시작한다.

 

캔버스에 석고를 발랐는데 후에는 헝겊에 고령토를 흡수시켜 캔버스에 붙인다. 그럼으로써 순수하고 절대적 미술의 무한정한 의미를 발견하게 하기 위해 노력하고 했다. 순수재료가 순수에너지로 변형될 수 있다고 믿었다.

 

실험적인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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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개의 깡통에는 ‘미술가의 똥, 30g, 신선하게 보존됨, 1961년 5월 생산’ 등의 문구가 적혀있고, 그것들은 해당하는 무게의 금값으로 판매되었다.

 

1959년 종이조각 위에 선을 그어 돌돌말은 뒤 그것들은 상자에 넣고 봉하는 작업을 시작한다. 상자위에는 선의 길이, 날짜, 그리고 서명을 한다. 이 상자가 깨지면 그것은 더 이상 작품일 수 없기 때문에 비물질적이고 비가시적인 작품이 될 수 있었다. 관람자는 그 안에 진짜로 선이 들어있다고 믿는 수밖에 없다.

 

풍선이 담긴 상자로써 미술가의 호흡도 가질 수 있었다. 그는 공기 1리터당 20센트를 받았다. 그것들은 나무와 대좌 위에서 점점 바람이 빠져 시들시들한 형태가 된다.

 

코펜하겐에서 열린 한 전시에서 만치니는 달걀을 삶아 그 위에 엄지손가락 지문을 찍는다. 그리고 관람자에게 먹으라고 권하며 70분만에 전시는 끝이 났다.

 

그는 진정한 작품이라는 의미로 신체에 서명했다.





이브 클랭 [1928-1962 니스, 프랑스]

 

구상화가 프레드 클랭과 추상화가 마리 레몽, 예술가 부모아래 1928년 프랑스에서 태어났다.

 

이브 클랭의 또 다른 이름은 ‘Blue’다. 8년의 짧은 예술인생에 그는 그만의 통찰력과 감각은 팝아트와 미니멀리즘의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클랭은 처음부터 예술가적 삶을 선택하지 않았다. 이때까지는 취미였던 그림을 모노크롬의 그림들을 자신의 방에 전시하면서 아티스트의 길에 들어서게 된다.

 

모노톤 경향은 1950년쯤부터 본격화되었다. 물론 이것은 단순히 특정 색에 대한 기호나 부정이라기보다 하늘이나 바다와 같은 자연계의 비물질성 자체를 회화화한 깊은 의도가 담겨 있다. 현대 미술의 중요한 지향점이 '어떤 요소가 회화를 성립시키는가' 하는 물음이

었다면, 클랭이 제시한 모노크롬을 통한 비물질화가 하나의 중요한 해법이라 할 수 있다.

 

55년 클랭은 역시 단색의 작품들을 전시하기 시작하고 그 즈음에 만난 피에르 레스타니라는 비평가를 만나면서 자신의 화법을 진중히 이끌어가기 시작했다. 그는 이탈리아를 여행하던 중 하늘에서 본 색을 자신의 모노크롬페인팅의 주인공으로 삼았다.

 

그의 동료인 아르망은 아래와 같이 회상한다

[클랭은 ‘푸른 하늘은 나의 첫 미술작품이다.’라고 하면서 서명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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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 부모님을 둔 클랭이지만 그는 신비화 된 물감의 속성을 싫어했, 뿌리고 붙이는 방식으로 작업하였다. 그의 블루는 단순한 블루를 넘어 이브 클랭만의 블루 ‘IKB_international klein blue’를 이름짓는다. 합성지수와 솔벤트를 혼합하고 화학자들의 도움을 받은 구체적인 컬러의 탄생이었다.

 

1958년 파리의 전시에서 그는 '공백'을 주제로, 모든 표면을 흰색으로 칠하고, 큰 케비넷을 제외한 모든 것을 제거했고, 오프닝을 위한 정교한 출입절차를 만들었다. 갤러리의 창문은 파란색으로 칠해졌고, 파랑커튼을 로비입구에 매달았고, 파란 칵테일을 제공했다. 전시에서 푸른색 소변을 보게 하기 위해서 관람객에게 파란색 칵테일을 제공했다. 뒤샹이 소변기를 탈신화화 하려고 했다면 그는 반대로 대상을 재신화한 셈이다.

그는 이 전시에서 ‘텅 빈’ 것을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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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 거주하며 유도를 배우고 가르치기도 했던 이브 클랭은 Zen,선 사상에 영향을 받아 공백(텅 빔)을 묘사하게 된다. 클랭에게 공백은 '열반' 같은 것이었다. 그것은 한 인간스스로의 감각과 실존을 지각함으로써 영감을 받은 중립적 공간이었다. 그의 작업은 철학과 이론적이었다.


이브 클랭의 블루안에는 많은 개념을 주입하지 않는 심플함 때문에 더 힘있다. 물론 세계 2차 대전의 큰 세기의 전쟁직후 회화를 비판 그리고 대상을 비물질화하려는 시도의 결과였지만 그가 수많은 색중에서 파랑을 선택한 것도 블루가 주는 심플함 때문이었다. 자연 속에 존재하는 가장 추상적인 것이 블루라고 생각하며 그의 예술 속에 녹여냈다.

 

텅빈 화랑 내부 전체를 희게 칠한 것만으로 작품을 대신한 것과 캔버스를 비바람 속에 고의로 노출시킨 작업, 불에 의도적으로 태운 그림 등도 물.불.공기 등 원소를 사용해 비물질성을 강조하고자 한 일관된 관심의 산물이었다.

 

당시 회화의 가능성에 대한 클랭의 사고가 드러난다. 시대가 국면한 상황에 미술이 어떻게 영향을 받고 작용하는지 잘 보여준다. 이러한 반회화적인 작업들은 물감을 뿌리고, 물감을 머금은 스펀지가 조각화되는 작업으로 나타났다.

 

1959년 모노크롬에서 벗어나 골드와 핑크를 추가하는 큰 반향을 보인다. 이렇게 그를 상징하는 블루의 일관성에 큰 변화를 준 만큼 탄탄한 그의 철학과 상징을 담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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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국제 현대 미술 갤러리에서 그는 마침내 '인체측정' 연작으로 명명된 작업을 하나의 엄숙한 의식(儀式)처럼 진행했다. 이 작업에서는 붓 대신 누드상태로 안료를 칠한 여성 모델들이 클랭이 직접 작곡한 연주와 지시에 따라 바닥에 깔린 종이 위에 뒹굴어 다님으로써 신체 자체가 창작행위의 주체이자 객체가 되는 충격적인 장면을 선보였다(액션 페인팅). 관객들은 이 퍼포먼스를 통해 순수한 색이 사람의 육체에서 화폭으로, 화폭에서 감상자의 시선으로 옮겨가는 과정을 지켜보게 된다. 또한 그 색을 바라보는 관객은 심리적 변화까지도 체험하게 되는데 다시 말하면 화가의 행위를 통하여 순수한 하나의 색이 시각적으로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회화의 물질성의 거부가 낳은, 행위의 강조라는 또 다른 국면으로 전개된 그의 해프닝 예술의 진면목으로 평가되어 대단한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클랭은 34세의 나이에 심장마비로 요절했다. 그에게 명성을 가져다 준 친구이며 평론가인 피에르 레스타니와 함께 클랭은 신사실주의의 기수이자 전후 프랑스를 대표하는, 국제적으로 가장 중요한 예술가 가운데 한 사람으로 손꼽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