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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을 위한 시민문화 워크숍글 수 603
조원규 시인께서는, "시인께선 시를 쓰기 위해 찾아다니는 것이 있으신지"라고 질문했을 때 "없었습니다. 이제 생겼습니다."라고 말씀하셨다. 조원규 시인께서 말하신 이제 생겼다는 것은 강의 중에 큰 비중을 차지했던 문학 공동체가 아니었을까 생각했다. 문학이 죽었다라고 말하는 시대에서 기존과는 다른 문학을 상상해 보는 것, 시민으로서 시민에게 돌려주는 문학, 문학상에 연연하지 않고 삶의 장면들을 문학이라고 말하는 것, 공동체적 가치로 대응하는 문학. 그리고 이렇게 공동체에 대한 생각, 혹은 '말을 걸고 싶다'라는 생각을 하기 까지는 매우 오랜 시간이 걸렸다고 하셨다.
내가 '말을 걸고 싶다는 생각이 창작하는 사람들한테 자연스러운 것인지 어느 순간에 의식하게 되는 것인지'라는 질문을 한 이유는, 부자연스럽게도 나에겐 항상 내 영상으로 말을 걸어야 한다는 의무감 같은 것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무엇을 말할 것인가' 보다 말을 걸어야 된다 라는 생각이 먼저 온 듯하다. 조원규 시인께서, 서른살이 넘고 갑자기 말을 걸고 싶다는 것을 느끼고는 2년 동안 하루도 안 빼놓고 가슴이 아팠고, 심지어 20대 때 감정을 차단한 것에 대한 복수를 당했다라고 표현한 것을 듣고는 '말을 거는 것'이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시인에게는 중요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자신을 치유하기 위해서 상대방을 치유하는 것, 세상이 치유되지 않으면 내가 나을 것 같지 않은 기분. 처음 치유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는 어색함이 있었지만 그것보다는, 아픔을 느끼고, 치유를 하고, 이런 것이 시인과 세상의 관계라고 표현한 것이 대단하다고 느꼈다. 나는 말을 건다는 것이, 사람들이 못 보고 있는 것을 감지한 예술가가 소개해주는 것이라고 생각했고, 매번 '시'라던가, 예술작품을 볼 때도 그것이 나에게 끼치는 영향, 세상에 끼치는 영향만을 생각했다. 그걸 만든 사람 또한 세상의 일부로서 말하는 것이라는 것을 인식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래서 조원규 시인께서 말씀하셨던 세계를 구한다는 것은 내가 나의 내면을 구하는 것. 내가 세상 혹은 다른 사람들을 말할 대상으로만 바라보는 것이 아닌, 서로 끊을 수 없는 협조적인 관계에 있다는 것이 인상에 남았다. ![]()
2009.12.08 08:00:25
현재, 예술에 대한 대부분의 인상이 근대에 발명된 것이기 때문에
예술가란 대단한 에고이스트로서, 칸트적 이성주체를 모델로 하고 있으니 "관계적 존재"로서의 예술가라는 건 발명중이거나 앞으로 새롭게 발명되어야 할 모델일 거야. 그럴 때 예술작업의 내용도 굉장히 달라지겠지. 전에 미술가 이우환 선생께서 말씀해주신 이야기인데, 너무 훌륭한 도쿄미술대학생을 파리로 유학보냈더니 (이우환 선생은 당시 일 년의 반은 도쿄에서, 나머지 반은 파리에서 강의하고 계셨는데) 그 학생이 울면서 편지를 보내오기를, "같은 과 친구들이 첫시간에 교수님에 자신을 가리키면서 고자질하기를, 얘가 이젤을 가져와서는 캔버스에 그림을 그리려고 해요!라고 했다"면서 그때까지도 그는 캔버스에 그리는 그림 외에는 그림을 그려본 적이 없는, 미술가로서의 고민을 온통 "캔버스"라는 화두를 통해 개진하고자 했던 사람이었다는 거야. 오히려 이 하얀 캔버스를 무엇으로, 어떻게 채울 것인가가 아니라, 나에게 "캔버스"는 무엇인가?였어야 했다면서 회한에 가득찬 편지를 보내왔다는 얘기였는데... 그 학생은 이전과는 아주 다른 작품을 하기 시작했었겠지? 갑자기 궁금해지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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