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는 늙은 아버지 같다
(계간지 당대비평 2000 봄 호 기획산문 ‘누가 학교의 붕괴를 슬퍼하랴’에 기고한 글)


초등학교 육학년 - 원래 다 그런 건 줄 알았다

원래 다 그런 건 줄 알았다.
내가 학생회장이 되었다고 말했을 때, 자랑스러워 하던 엄마의 얼굴 뒤로 살짝 흐르던 한숨소리에 나는 무감했다. 돈을 받는 선생과 갖다 바치는 엄마들 - 잘 알고 있었지만 신경 쓸 것 없이 나만 잘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선생들은 늘 놀고 먹었다. 소풍이나 운동회, 심지어 시험 때조차도 선생들은 '한 턱'을 바랬고 언제나 그 '한 턱'을 받쳐주는 건 엄마와 아빠의 피 같은 돈이었다. 나의 엄마는 60년대 드라마에 나오는 시골 아줌마처럼 "넌 몰라도 된다, 그저 공부만 열심히 해라"라고 말하진 않았다. 사실을 감추려 들거나 미화시키지도 않았다. 오히려 힘없고 돈 없고 빽 없는 우리 가족이 당하고 있는 괴로움에 대해서 매우 상세히 설명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너도 보다시피 선생과 경찰들은 대체로 다 개새끼다. 거기에 돈을 갖다 주고 있는 엄마도 깨끗하다고는 할 수 없다. 그래도 엄마가 자존심을 잃지 않을 수 있는 건 너에 대한 자부심 때문이다. 공부 열심히 해라". 그래서 나는 열심히 공부했다. 내가 시험을 잘 보면 잘 봤다는 이유로, 어디서 상을 타오면 상 받았다는 이유로 끝없이 계속되던 '한 턱 행진'에 혼란스럽기도 했지만 그냥, 원래 다 그런 거라고 믿었다. 어른들의 세계란 원래가 다 그렇고 그런 거라고, 어쩔 수 없는 거라고 생각했다.
다만, 다시는 반장이나 회장 같은 미친 짓을 해서 어른들의 세계에 깊이 관여하지는 않겠다고, 절대로 그런 일은 없을 거라고 스스로에게 다짐했을 뿐이다.
 

중학교 일학년 - 학교가 너무 싫어요

"학교가 너무 싫어요."
나는 국어 선생님을 좋아했다.
보라색 스타킹을 신은 선생님이 복도를 걸을 때면 세상의 모든 봄이 선생님의 치마 속으로 달려드는 것 같았다.
밤낮 '선생님, 선생니임~'하고 졸졸 따라다니던 나를, 친절한 선생님은 여기저기 데리고 다녔는데 함께 하는 모든 곳과 모든 때에 햇살이 따뜻하던 예쁜 기억들이 가득하다.

"그냥.. 복도두 너무 어둡고.."
내 친구 말에 따르면 모든 발언은 정치적이라지만, 때로는 멍청한 상태에서 저절로 나가버리는 말도 있는 것 같다. 선생님과 함께 계단에 앉아 있다가 문득 내뱉은 "학교가 너무 싫어요"도 그런 종류의 말이었다. 선생님은 잠시 가만히 있다가 "왜?"하고 물었다. 뭔가 그럴 듯한 대답이 하고 싶었는지 모르지만 그때 나의 느낌은 적절한 대답이 없다는 것. 그래서 서둘러 찾아낸 말이 "그냥.. 복도도 너무 어둡고..."였다.

"벌써 그러면 어떡하니.. 앞으로 몇 년을 더 다녀야 하는데.."
문제가 있었던 건 아니었다. 하지만 싫었다. 못 견딜 정도가 아니었을 뿐 싫은 느낌은 확실했다. 하지만 그때 내가 갖고있던 언어로는 나의 '싫음'을 표현할 수가 없었다. 어른들이 일년에 한번정도는 꼭 하던 그 설문조사 - 청소년의 고민원인, 1위: 교우관계, 2위: 성적, 3위: 가족문제 - 따위의 말들이 내가 상상할 수 있는 학교가 싫을만한 이유의 전부였던 것이다. 
한참동안 선생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어떤 말이든 하고 싶었지만 할 수 없었다. 무슨 느낌들이 내 안을 가득 메우고 있으며, 그 느낌들은 어디에서 출발하여 어느 곳을 향하는지.. 그때 내가 할 수 있었던 모든 것이란 다음 수업을 받기 위해 어두운 복도 속으로 걸어가는 것 뿐이었다.
"벌써 싫으면 어떡하니.. 앞으로 몇 년을, 앞으로 몇 년을, 앞으로 몇 년을, 앞으로 몇 년을, 앞으로 몇 년을, 앞으로 몇 년을, 더 다녀야 하는데.."


중학교 삼학년 - 재수 없어, 정말

칙칙하게 쉰 목소리에 고구마 같은 얼굴을 한 체육 선생이 들어왔다.
"..처음엔 여자들이 더 잘해, 공부나 생활이나. 근데 중학교 고학년이나 고등학교 쯤 되면 남자들이 두각을 드러내지. 수학이나 과학은 말할 것도 없고, 모든 분야에서 남자들을 못 따라가게 되는 거야. 그게 선천적으로 뇌의 구조가 그렇게 되어있대."
땅딸한 학생주임이 말했다.
"..남자였으면 30도, 40도 되는 여름에도 운동장 딱 집합시켜 가지고 한 열 바퀴 돌려 버릴텐데 말이야.. 여자들이어서 내가 봐주는 줄 알어라."
조그만 눈을 가진 여자 국어 선생이 들어왔다.
"..하여튼 여학교에 오면 제자가 없다니까, 제자가. 남자애들은 가르친지 십 년이 지나고 이십 년이 지나도 일년에 한번씩은 선생님을 찾아오는데, 여자들은 딱 해 바뀌면 끝이야. 절대 안 찾아와."
너희들이 열등한 여자인걸 반성이라도 하라는 건지 잊을만하면 한번씩 선생들마다 돌아가며 펼쳐놓았던 이런 얘기들 앞에서 나와 내 친구들의 얼굴은 흥분으로 벌개졌지만 누구 하나 제대로 따질 줄을 몰랐다. 선생에게 이러니 저러니 길게 말한다는 것도 어려운 일이긴 했지만 사실은 딱히 할 말이 없었던 것 같다. 과학적으로 그렇게 생겼다는데 우리가 어쩌겠는가? 자기들이 실제로 경험했다는데, 자기들이 그렇게 잘 안다는 데 뭐라고 하겠는가...
결국 우리는 그 문제에 대해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어느 때쯤 가서는 그리 심각하게 받아들이지도 않았던 것 같다. 그런 헛소리를 한시간 내내 듣고 난 쉬는 시간이면 모두가 책상을 걷어차며 한마디 해줬을 뿐이다. "뭐 저런 게 다 있냐, 재수 없어, 정말."


중학교 삼학년~고등학교 일학년 - 넌 아직 세상을 몰라

중학교 삼학년, 기말고사까지 깔끔하게 끝난 어느 겨울 밤이었다.
그때 내가 느낀 시간의 여유는 너무나 짜릿한 것이어서, 좁은 방안에 누워있어도 세상의 모든 시간이 다 내 앞에 예약되어있는 것만 같았다. 
예술가 -
충분히 느리게 흐르던 시간,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던 흥분사이에서 나의 인생은 결정되고 있었다. 세상의 비밀을 알아내는 것, 미지의 땅을 밟는 것.. 외로운 시간들이 모여서 만들어낸 거창한 꿈들이 중학생의 심장을 달아오르게 했다. 그래, 난 예술가가 되는 거야.
영화 -
남달리 뜨거운 열정이 있었던 건 아니었다. 하지만 영화엔 뭔가 자극적인 냄새가 있었다. 때로 어떤 영화들 속엔 또 하나의 시계가 돌아가고 완전히 새로운 법칙이 모든 움직임을 지배하는 듯이 보였다. 그 무렵 내가 보기에 그건 '진짜 창조'였다. 한참 '우주의 진실이 어쩌구..'에 빠져있던 나에게 영화는 재고의 여지가 없는 선택이었다.
학교 -
'사람들은 그대의 머리 위로 뛰어다니고 그대는 방안 구석에 앉아 쉽게 인생을 얘기하려한다.' -서태지, 환상 속에 그대 
서태지 말처럼, 방안에 앉아 천리를 보던 나의 다음 결론은 그럼 학교에 갈 필요가 없잖아? 였다. 지금도 나아진 건 별로 없지만, 내가 중 삼이었을 때 영화를 공부할 수 있는 고등학교는 없었다. 고등학교는커녕, 일반대학 연극영화과의 교육도 실망스런 수준이라고 알고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보나마나 끔찍할 고등학교에 삼년이나 붙어 있는다는 건 정말 무의미해 보였다. 생각이 여기까지 이르니 갑자기 내가 투사라도 된 듯, 별 관심 없던 제도교육에 뜨거운 분노가 일었다. 
곧장 내 머리 속을 가득 메운 이미지들이-
'TV시사프로에 즐겨 등장하는 획일적 제도교육'
'됐어!됐어! 이제 그런 가르침은 됐어!'
'어릴 때 보았던, 진실한 남자선생이 애들을 구원하는 내용의 청소년 영화들'
'식사도 않고 후식을 바라냐!'
'늙은 남자들이 줄줄이 나와 어둔 밤에 벌이던 현 교과과정 비판토론'
'언제나 옥상에서 자살을 하는 심각한 여고생이 나오는 청소년들이 만든 단편영화'
'선생~ 다 죽여~ 하는 가사의 인디 밴드들'
나에게 일어나 싸우라고 말했다.


고등학교ONE -

나의 첫 전투 전략은 엄마에게 편지를 쓰는 것이었다. 내 모든 원대한 꿈과 날카로운 사회비판을 담은 지극히 합리적인 편지를.
말은 길었지만 결국 고등학교 안 가겠다는 내용의 글을, 믿었던 딸에게 받은 엄마의 심정도 절대 편하진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그 때는 집안의 여러 가지 골치 아픈 일로 엄마의 몸과 마음이 많이 지쳤을 때였다. 하지만 엄마의 처음 반응은 예상외로 매우 긍정적이었다. '그런 생각 충분히 할 수 있다, 얘기해 보자.'하는 식의 대단히 너그러운 엄마의 자세는, 우와~ 나 정말 학교 안가도 되나봐! 하는 흥분에 나를 잠시 들뜨게도 했었다. 그 러 나,
엄마의 얘기를 들어보니 그게 아니었다. 엄마는 내가 학교를 안 가는 것에 긍정적인 게 아니라 내가 이런 거창한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해 긍정적이었던 거다. 내가 엄마의 속을 뒤집지 않은 채 버텨볼 수 있는 마지막 선은 '그런 편지를 보내보는 것'까지 였다. 어쨌든 학교는 반드시 가야 하는 곳이었다. 그리고 그 주장은 여러 가지 논리적 근거들로 뒷받침되었다.


말, 말, 말, 말, 말, 말, 마알 ~

"사람의 생각이란 늘 바뀌는 거야. 일년 전에 니가 하던 생각이랑 지금 생각이랑 어디 같더냐? 지금은 니가 영화를 하겠다고 난리지만 나중에 딴 게 하고 싶어지면 어쩔 거냐? 그럴 때를 대비해서 학교는 다녀둬야 하는 거야."
"학교 다니면서 얻는 게 얼마나 많은데 그러냐. 지금은 니가 뭘 잘 몰라서 그렇다."
"당장 내년에 죽을 것도 아닌데 젊은 놈이 뭐 그렇게 급하냐? 그 영화, 삼 년 뒤에 대학가서 하면 안 되냐?"
"대학이란 데, 고등학교랑 다르다. 고등학교 삼 년 고생해서 다녀볼 가치가 있어."
"그 영화란 게, 종합예술 아니냐? 인생도 좀 알고 인문학적 지식도 있고 그래야 제대로 된 영화가 나오지. 지금 니가 영화 찍는다고 아무리 애써봐야 나중에 대학 나오고 공부 많이 한 사람 깊이를 못 따른다니까."
"엄마생각 좀 해라. 그저 너랑 니 오빠만 바라보고 사는데 이렇게 더 힘들게 해서야 쓰겠냐? 엄말 위해서라도 삼 년만 꾹 참어."
"여자가 세상 살려면 간판이 있어야 해. 아직 우리사회가 여자들 대접 안 해주는 세상 아니냐? 영화판이라고 뭐 다르겠냐? 심하면 심했지. 너도 알겠지만 우리가 뭐 집이 잘 사냐, 빽이 있냐? 너의 간판은 오로지 학벌 뿐이야. 나야 남자라, 안되면 몸으로라도 부딪쳐 살수가 있지만."
"난 너와 같은 시절도 겪었고 인생경험도 풍부해. 내가 보기에 넌 지금 눈앞의 것밖에 못 보고있어. 그럴 땐 어른의 말을 듣는 게 시행착오를 줄이는데 도움이 돼. 넌 아직 세상을 몰라."

말, 말, 말들이 내게 와서 꽂혔다. 
너무나 너무나 너무나 피곤했다. 엄마 일동도 물론 지쳤겠지만. 
고등학교를 안 가기 위해 이렇게 많은 인간들의 말 같잖은 잔소리에 얻어맞아야 한다는 건 코미디다.
'넌 아직 세상을 몰라' 따위의 쓰레기 같은 말을 하는 인간이야말로 끔찍하게 멍청하다.
내가 학교를 가느냐 마느냐에 대한 문제의 결정권이 이렇게 많은 사람에게 분포되어 있다는 것은 나에 대한 엄청난 폭력이다.
하지만 언제나 그랬듯이, 정작 그 당시에는 이와 같은 말을 단 한마디도 생각하지 못했다.


고등학교 TWO -

마침내 엄마는 소리쳤다.
"헛소리 말고 학교 가라. 그렇게 말했으면 알아들어야 할거 아니냐? 니가 학교를 안 가면 그 뒤는 엄마의 책임이다. 엄마는 학교를 보내지 않고서도 너를 받쳐줄 경제적, 정신적 여유가 없다. 그렇다고 이 험한 세상에 너 혼자 알아서 하라고 내버려 둘 수는 없지 않냐?"
우리 엄마의 가장 멋진 모습이다.
세상의 어떤 부모도 이보다 더 솔직할 수는 없을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자식이 학교를 안 가겠다고 버틸 때, 대부분의 부모들은 온갖 이유를 대며 말린다. 그리고 대체로 그 온갖 이유에는 자식의 앞날에 대한 부모로서의 현명한 걱정이 서려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정말 그게 다 일까? 엄마로서의 책임을 다 할 수 없게 될지 모른다는 불안감, 기대했던 대로 미래가 꾸려지지 않기 시작한 것에 대한 화, 또는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지키고픈 욕심까지.. 내 문제를 대하는 엄마의 태도가 '엄마'로서 뿐만 아니라 그냥 '한 개인'으로서 일수도 있다는 사실을 엄마는 시인하고 있었다.
내가 좀 더 현명했더라면,'엄마와 딸'이라는 수직적 관계에서 '개인과 개인'의 수평적 자리까지 용기 있게 내려와 준 엄마의 솔직함을 믿고 마음을 열어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때까지도 피해의식에 시달리는 청소년 캐릭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던 것 같다. 내가 택한 두 번째 전투 전략은 엄마가 책임질 수 없다던 나의 앞날을 스스로 책임져보자는 것이었다.


어떻게 -

정말 아무 것도 없었다.
강제로 고등학교에 들어간 나는 끊임없이 나의 뒷날을 약속해 줄, 아니 길이라도 일러줄 뭔가를 찾고 있었다. 그게 뭐든 가릴 처지가 아니긴 했지만 이왕이면 학교의 형태를 띄고 있는 게 엄마를 설득시키기 편했다. 그러나 정말 아무 것도 없었다.
초조한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대충 때우고 있던 어느 날, 명문 미국 영화학교의 한국 분교가 설립 중이니 응모하라는 신문광고를 보게 되었다. 간단한 전화 상담을 한 후, 그 동안 준비해 두었던 비디오 작업과 시나리오를 들고 찾아갔다. 아무 것도 확실치는 않았지만 내게는 마지막 희망이었다. 더 이상 나로서는 어쩔 수가 없다는 걸 이미 느끼고 있었고 그 무렵엔 정말 지쳐있었기 때문이다.
어렵게 찾아간 그 곳에서 들은 대답은 정말 가관이었다. 학생의 작품은 잘 보았다, 미숙하지만 용기가 좋다..하면서 내 인생상담을 해주는 분위기로 몰고 가더니 결론은, 예기치 못한 환율 급등으로 언제 문을 열지 알 수 없는 상황이라는 거였다.


컴백 -

상황이 이쯤 되자 난 정말 견딜 수가 없었다.
거지같은 학교라도 이것 외에 다른 대안은 없는 걸까? 그렇다면 애당초 선택 따위는 있지도 않았던 거였다. 나 자신에게, 나의 믿음에게, 나의 의지와 미래에게 완전히 속은 느낌이었다. 할 수 있는 건 하나뿐이었다.
마지막 희망이었던 그 영화학교(?)에서 돌아온 다음날, 나는 나의 마음을 움켜잡고 학교로 돌아갔다.
"그러게 내가 뭐랬냐, 넌 아직 세상을 모른댔지?"
하는 엄마 일동의 의기양양이 반쯤 섞인 한숨소리를 들으면서.


고등학교 일학년 - 학교에 적응하기

왔으면 잘 해야 했다. 
제도와 싸우는 투사로서의 자존심은 "학교 따위, 맘만 먹으면 적응해 줄 수도 있지만 정의를 부르는 시대의 양심상 나는 이렇게 밖에 할 수 없다!"를 외쳐야만 했으니까. 떨어진 성적도 쨘! 도로 올려놓아야 했고 나를 아는 사람들에게 나의 방황이 얼마나 뜻 있고 외로운 것인가를 수시로 일깨워줘야 했다.
어쨌든 나는 잘 할 수 있을 거라고 믿고 있었다. 개나 소나 다 하는 학교 생활 따위 문제될 것 없다고.
그걸 증명해 보이기 위해 내가 선택한 두 가지 일은 공부하기와 밴드 만들기였다.


공부공부공부

공부공부공부공부공부공부를 위해 나는 정말 별 짓을 다 했다.
생전 받아 본 일 없던 과외에, 문제집을 들입다 사기 시작했고 얼마 후엔 학원 수강증을 끊었다. 머리 속엔 온통 이번 달엔 뭐를 어디까지 끝내고 하루에 단어는 얼마나 외우고..
그 이름도 무서운 '학급붕괴' 폭탄에 맞아 책상 위로 쓰러져 일어날 줄을 모르는 아이들 사이에서도 나는 일어나 앉았다. 지겨운 것도 같았지만 지겹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공부가 하기 싫은 것도 같았지만 그런 건 다 공부 못하는 놈들의 헛소리라고 믿었다.


밴드밴드밴드

밴드는 참 해보고 싶었던 일이었다. 당장 학교에 광고를 해 애들을 모으고 활동을 시작했다. 악기를 몸에 익히는 연습을 하거나 밴드 일로 이리저리 뛰어다닐 때는 온 몸을 꽉 채우는 듯한 기쁨을 느끼기도 했다. 부모들의 반대나 경제적인 문제, 성적을 유지해야 하는 문제 등, '스쿨밴드'하면 누구나 쉽게 떠올릴 수 있는 뻔한 문제들로 머리가 아플 때도 있었다. 
하지만 그 과정이야 어떠했든 결국 내게 밴드는 일종의 자위였다. 흐트러짐 없는 학교생활 속에 멋지게 어우러진 모범 스쿨 밴드. 나는 이렇게까지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자부심. 그 시절 밴드가 내게 줄 수 있는 최고의 기쁨이란 바로 그런 것들이었다.


고등학교 이학년 - 뭘까 생각해 보는 사이에 쫒겨나면 안돼

"뭘까 생각해 보는 사이에 쫒겨나면 안돼"- 서태지 take 4

성적은 올라가고 있었다. 내 상상처럼 '단숨에 정상탈환!' 뭐 이런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제법 꾸준히 올랐다.
밴드는 학교 축제를 비롯한 세 번의 공연을 마친 후였다. 실력은 날림이었지만 멤버들 중 아무도 그런 거엔 별로 신경 쓰지 않았고, 무엇보다 축제를 성공적으로 끝내 아이들의 부러움을 샀으니 나의 불순한 목적은 달성한 셈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행복하지 않았다.
아니, 사실은 너무너무 힘들었다.
하루종일 나는 짓눌렸다. 길을 걷거나 아무 생각 없이 있을 때면 시간이 머리 위를 팽글팽글 도는 거였다. 어떤 때는 팽글팽글 소리가 내 귀에 들린다고 까지 느꼈다. 수업시간에는 갈수록 집중력이 떨어졌다. 수업 중에 문득 내가 딴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으면 그때부터는 또 초조해져서 집중할 수가 없었다. 이야기가 이쯤 되고 보니 해결책은 꽤 간단한 것 같다 - 정신과의 상담을 받으며 그 집중력을 향상시켜준다는 기계를 착용하는 것.
그런데 사실 나는 이미 오래 전에 알고있었다. 다만 인정하지 못했을 뿐이다.


고등학교 일학년~고등학교 이학년 - 체제 부적응자, 패배자, 낙오자, 비겁자, 평범한 자, 글러먹은 자, 재능없는 자, 삼십센치 자

"체제 부적응자, 패배자, 낙오자, 비겁자, 평범한 자, 글러먹은 자, 재능없는 자, 삼십센치 자.."
이 무렵의 내가 스스로를 설명하던 말들이다. 나는 아주 어릴 때부터도 학교는 절대 결석하는 게 아니라고 배웠다. 너무 아파 조퇴를 하는 한이 있어도 마음대로 빠져선 안 된다는 거다. 이렇듯 학교는 내게 필수였지 선택이 아니었다. 따라서 내가 학교에 적응하지 못한다는 것은 사회에서도 싹이 노란 나무라는 뜻이었다.
엄마가 나를 꾸중할 때 하는 말들을 나는 한번도 의심해본 적이 없다. 오히려 엄마가 원하는 모습을 닮고 싶었다.
문제는 내가 그렇게 될 수 없는 종류의 인간이라는 데 있었다. 어느 순간 이미 내가 그것을 깨달아 버렸다는데 있었다. 내가 학교에 안 가려고 발버둥쳤던 건 거창한 명분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저 학교가 너무너무 싫고 내가 더 이상 적응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는 것을 나는 이미 오래 전에 알고있었다. 다만 인정하지 못했을 뿐이다.
상황이 이쯤 되자 나의 모든 관심사는 '대학'으로 몰렸다. 지긋지긋한 고등학교야 어찌됐건 대학만 잘 가면 성공 아닌가?  '공부도 공부지만 요즘엔 수상실적도 크게 도움된다더라...' '아~ 그래요?'
그래서 미친 듯이 온갖 대회란 대회는 다 나가기 시작했다.
그래서 미친 듯이 대학을 향한 발버둥을 치기 시작했다.


고등학교 이학년 - 내가 지금 왜 우는 거지?

친구에게서 양파CD를 빌려왔다. 학교에서 돌아온 늦은 밤, CD를 플레이어에 넣고 책상 앞에 앉았다. 달착지근하게 좋은 대중가요다. 간단한 영어숙제를 하며 CD를 두 번쯤 반복해서 들었을 때, 갑자기 울음이 새어나왔다. '새어나왔다'기보다 차라리 '삐져나왔다'가 더 적절한 표현일 것이다. 물 젖은 스펀지를 주먹 안에 넣고 천천히 움켜쥐면 물이 삐져나오는 것처럼 나의 갑작스런 울음도 그런 식이었다. 간헐적으로 심장을 옥죄는 느낌이 들었고 그때마다 울음이 터졌다. 나중에는 책상에서 내려앉아 몸을 웅크린 채 본격적으로 울었다. 한시간도 넘게 울면서 계속 하던 생각은 "내가 지금 도대체 왜 우는 거지?"
그 일이 있은 일주일 후, 나는 마침내 자퇴했다. 


지금 - 학교는 반드시 붕괴되어야 한다.

자퇴한지 넉 달이 지난 지금, 나는 영등포에 있는 하자센터(서울특별시립 청소년 직업체험센터) 영상 디자인 작업장에서 공부하고 있다. 하자 사람들과 함께 일하고 배우는 동안 내가 얻은 것은 '세상을 낯설게 볼 줄 아는 힘'과 '혐오할 것을 혐오할 줄 아는 예민함', 그리고 '나의 언어'이다.
십 년이 넘는 학교생활 동안 내 몸은 온통 싫다고, 여기가 아니라고 말하고 있는데도 나의 교육 받은 이성은 그걸 이해하지도 인정하지도 표현하지도 못했다. 언론에서 귀에 못이 박히도록 떠들어대고 있는 제도교육의 모순에 관한 이야기는 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다 죽은 말이다. 학교 안에 있는 학생들의 입에서 학교의 역겨움과 남성주의와 안이함과 무지에 관한 이야기가 끊임없이 쏟아져 나올 때, 그리고 그 이야기들이 언론과 학교에 의해 세뇌된 죽은 언어가 아니라 스스로의 가슴으로 느끼고 찾아낸 자신만의 언어일 때 학교는 쓸모 있는 배움의 공간으로 남을 수 있다. 
이제, 힘겹게 찾은 내 언어로 말한다 - "학교는 늙은 아버지 같다."
내가 이 말을 하는 순간 세상의 모든 늙은 아버지들이 당대비평을 내던지는 모습이 떠오른다. 그것 자체가 이미 모든 것을 설명하고 있다. 나는 왜 아버지를 비판할 수 없나? 나는 왜 아버지의 가르침을 따라야만 하나? 나는 왜 아직도 아버지의 인생경험에 근거한 삶을 살아야만 하나? 아버지와 다른 꿈을 꾼다는 이유로, 아버지와는 다른 생각을 한다는 이유로, 나는 왜 이렇게 많은 사람의 이해와 동의를 빌어야만 하며, 그 모든 짐을 혼자 져야만 하나? 아버지는 세상을 잘 알아서? 아버지 말을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생겨서? 이유는 하나뿐이다. 아버지는 아버지이기 때문이다. 아버지라는 이름 뒤에 쌓인 권위의 무게와 전통은 너무나 엄청난 것이어서 그 내용이야 어떠했든 나는 존경해야 하는 것이다. 나는 복종해야 하는 것이다.
나는 앞에서 "내가 학교에 안 가려고 발버둥쳤던 건 거창한 명분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저 학교가 너무너무 싫고 내가 더 이상 적응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는 것을 알고있었다. 다만 인정하지 못했을 뿐이다."라고 말했다. 나로 하여금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게 만들었던 것, 그것은 바로 학교의 권위다. 그것도 현실을 편견 없이 볼 줄 아는 능력 따윈 잊어버린, 다양한 생각과 언어를 길러내는 힘 같은 건 알지도 못하는, 무능하고 늙은 권위다. 그리고 아직도 학교 안에 있는 수많은 '나'들은 권위의 족쇄에 온 몸과 마음과 정신을 사로잡힌 채 괴로워하고 있다. 또는 착각하고 있다.
이제, '나'들의 언어를 찾기 위해 말한다.
'나'들은 스스로의 눈으로 세상을 볼 수 있어야 한다.
'나'들은 스스로의 몸으로 삶을 알 수 있어야 한다.
'나'들은 스스로의 언어로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나'들의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우리는 '나'들의 이야기를 인정해야 한다.
'나'들이 숨쉴 수 없는 사회,
'나'들이 깨달을 수 없고 성장할 수 없는 사회,
'우리'가 아닌 '당신'이 지배하는 사회...
이런 사회가 학교라면,
학교는 반드시 붕괴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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