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자작업장학교 첫 번째 졸업생들이 기획/진행하는 콜로키엄 <새로운 길을 가는 어려움 3>

두 장의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되다 

제리


나는 테크니션이었다. 초등학교 시절의 내 꿈은 컴퓨터 수리공이었고, 중학교 때에는 컴퓨터를 조립해서 용돈을 마련하곤 했다. 음악을 좋아하면서 드러머가 되고 싶었지만, 곧 사운드 엔지니어를 꿈꾸게 되었다. 음악에 관심을 가지면서 그만 둔 컴퓨터 분야에서는 정보기기 운용기능사와 정보처리기능사 자격증 시험을 준비한 지 3주만에 합격해서 학원 기록을 세웠다. 기계에 관한 것들은 나에게 너무나 쉬웠다. 자격증이 필요하면 언제든 딸 수 있었고, 나는 아무래도 기계에 천부적인 감각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해서 나는 기술자의 꿈에서 벗어나 본 적도 없고 나의 길을 의심해 본 적도 없었다. 악기를 배우기 위해서 처음 하자에 왔을 때도 나는 테크니션이었고, 연주를 배우려고 했던 것도 사운드 엔지니어가 되는 과정으로 생각했다. 

하자에 온 지 3주만에 하자녹음실의 인턴이 되었고, 당시 판돌들과 인턴들이 내부 논의와 토론을 벌였던 인트라넷(intranet, 내부사용자게시판)의 구성원이 되었다. 인트라넷은 하자운영에 관한 전반적인 논의들과 업무상의 문서들, 프로젝트나 제안 등 구체적인 사항들이 올라오는 곳이었다. 사용권이 생기고 나서 하자센터를 만들어 나가는 논의에 개입하기 시작했다. 그해 말 하자 1주년 생일파티에서 조한이 낭독한 글에 이르면 나는 "멀쩡하게 지내다가 판돌들을 갈구는 제리"라고 말했다. 

지금 게시판 논쟁글들을 다시 읽어보면 참 당돌하고 겁이 없었던 나를 발견하게 된다. 나에게 '겁'이란 관계에 대한 '겁'이다. 많은 사람들이 나보고 '갈구리' 또는 '싸움꾼'이라고도 했지만, 당시 난 대부분의 상황에서 싸운다기보단 올바른 길로 가기 위해 문제제기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내 발언에 의해 모든 것이 바로 잡히기만 한다면 내가 욕을 먹는 것은 아무렇지 않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나는 곧이어 관계의 언어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되면서 내 언어에 대해 의심을 하기 시작했다.

난 내가 주장하는 바를 쇼크를 주는 방식으로 말했다. 게시판에 쓰는 글뿐만 아니라 일상 대화에서도 그렇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것이 게시판에서 문제제기로 발현될 때 주로 은유, 다른 사람의 표현을 쓰자면 빙빙 돌려 말하기, 비꼬기와 같은 방식으로 나타났었다. 누군가가 나의 그런 글 때문에 상처받았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면서 어떻게 하면 그렇지 않은 방식으로 소통할 수 있을지 고민하게 되었다. 내가 그랬던 것은 논리나 개념으로 표현하는 방법을 몰랐기 때문이기도 하다. 나와는 다른 방식으로 말을 하는 사람들을 보며 내가 글을 못 쓰고 말을 못 한다는 생각에 빠졌다. 올바른 표현인진 모르겠지만, 언제부턴가 나는 언어가 없다고 말하게 되었다. 이 말은 말과 글에 대한 열등감, 그리고 소통 즉 관계의 언어에 대한 고민을 담고 있었다.

그 무렵 이래저래 자주 들락날락하게 된 하자 꼴레지오에서 언어트레이닝을 시작했다. 인문학교실이었던 꼴레지오에서 텍스트를 일고 글을 쓰는 수업이 진행되었다. 책 한 권 제대로 읽어본 적이 없었던 나에게 텍스트들이란 무척 생소하고 어려운 것이었다. 지금도 무슨 글이라 불러야 할지 정확히 잘 모르는 그 글들은 단편소설을 비롯해 문학, 예술, 철학의 주위에 있는 텍스트들이었다. 숙제로도 글을 썼는데 이를 테면 카프카의 글을 읽은 날에는 카프카를 흉내내서 글을 쓰거나 여행기를 읽은 날엔 여행기를 쓰거나 그런 것들이다. 그리고 토론을 했다.

사실 그것보다 더 도움이 되었던 것은 여러 가지 문화와 사상을 접했던 것이다. 그것은 페미니즘, 성감수성, 젠더감수성, 언어감수성, 정치적 올바름, 운영마인드, 경영마인드, 디지털 마인드, 생산적 공동체 등 '하자 마인드'라는 말로 정리되는 어떤 단어들, 개념들이다. 그것은 그냥 휙휙 지나가는 이야기들을 듣게 되는 것이기도 하고, '소녀들의 페미니즘' 팀과 같은 공간(107호)을 쓰면서 점점 익숙해진 것이기도 하고, 토론과 수업을 통해서 알게 된 것들이기도 하다. 그런 새로운 문화, 사상 혹은 개념들은 나에게 '관점'에 대한 문제의식을 갖게 했고, 어떻게 볼 것인지 어떻게 해석할 것인지에 대해서 생각이 시작되었다. 이게 내 인문학적 소양의 바닥이다. 이 때가 아마 내 인생의 방향을 가장 크게 꺾은 때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이런 학습을 해나가는 한편 작업도 계속 해나갔다. 하자1주년 생일파티, 디스토리 페스티벌, 눈물영화제 등 하자에서 주최하는 여러 행사에 참여했다. 행사를 만들고 운영하고 기술적인 면들에 대해 직접 경험하면서 보고 배웠다. 기계적인 면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나을까?

언어에 대한 고민이 감수성 훈련으로 이어지는 동안 작업에 관한 고민의 내용도 바뀌었다. '어떻게 하면 더 깔끔하게 행사를 할까. 어떻게 하면 더 좋은 소리를 뽑을 수 있을까'를 더 생각하게 되었다. 이 때부터 이미 기획에 대한 생각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어떤 메시지를 담아서 어떻게 말할 것인가. 그런 과정에서 나는 근 일 년에 가까운 장시간 동안 나도 모르게 변했고 곧 아주 자연스럽게도 기획자로 전향할 것을 선언했다. 그 후로도 여러 행사에 직접 참여하면서 시간을 다 보냈지만 다른 점은 테크니션이 아니라 기획자로 학습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렇게 하자 꼴레지오에서 감수성 훈련을 하고 행사기획을 하는 동안 하자작업장학교가 개교했다. 학교 만들기에 참여하면서 자연스럽게 하자작업장학교에 입학했다. 인문학교실인 하자 꼴레지오가 하자작업장학교로 진화한 것이기 때문에 나의 입학 동기 역시 내 언어를 찾고 싶은 욕망 때문이었다. 그 때까지도 나에게 언어라는 개념이 모호하기만 했고 뜬구름 같았기 때문이다. 

하자작업장학교를 졸업하는 지금까지도 대부분의 시간을 행사기획을 하는 데에 보냈다. 그렇게 언어에 대한 욕구를 채우지 못한 갈증에서 벗어날 수가 없을 뻔 했는데, 두 번째 학기가 끝날 즈음 모호하고 자신 없던 언어라는 것에 훌쩍 다가갈 수 있는 계기가 생겼다. 담임인 휘가 개인잡지를 제안했을 때까지도 그랬지만 개인잡지인 '제리넘버원'을 다 쓰고 나자, 나는 그 풀지 못했던 언어에 대한 감을 잡기 시작했다. 오랜 시간 경험했던 것들을 처음으로 정리해보면서 왜 그렇게 했었는지도 알게 되고 나를 좀 더 알게 되었다. 그렇게 많은 글을 써보기는 처음이었다. 직접 겪은 일들을 어떤 '관점'을 통해 풀어내는 작업이었다. 신기하게도 글에 대한 열등감이 사라졌다. CBS방송국으로의 외부 인턴십을 다녀온 경험을 정리한 두 번째 잡지를 쓰고 나서는 글에 자신감까지 생겼다. 그리고 실제로 글도 점점 나아졌다.

개인잡지가 나에게 준 것들 중에는 이런 것들보다 훨씬 대단한 것이 있다. 그건 '성찰'이라는 말에 대해서 알게 해준 것이었다. 나는 경험으로 치자면 정말 어지간한 사람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파란만장하게 다양한 경험을 해왔다고 생각한다. 나는 항상 생각을 잘 하지 않는다고 말해 왔는데, 그것은 생각이 없는 게 아니라 평소에 관찰한 데이터를 분석하는 과정이 없었던 것이다. 개인잡지의 글을 쓰면서 그것들을 성찰하고 정리하는 작업을 통해 경험으로 배우는 학습의 과정을 완성했다. 예전부터 직접 경험하는 방식을 좋아했었는데 사소하게 보고 듣는 것까지 배움으로 남길 수 있게 된 것이다. 어디에 가서도 배울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 나의 졸업일 것이다.

신영복님의 <나무야 나무야>에 나오는 이야기다.
"나와 같이 징역살이를 한 노인 목수 한 분이 있었습니다. 언젠가 그 노인이 내게 무얼 설명하면서 땅바닥에 집을 그렸습니다. 그 그림에서 내가 받은 충격은 잊을 수 없습니다. 집을 그리는 순서가 판이하였기 때문입니다. 지붕부터 그리는 우리들의 순서와는 거꾸로 였습니다. 먼저 주춧돌을 그린 다음 기둥 도리 들보 서까래 지붕의 순서로 그렸습니다. 그가 집을 그리는 순서는 집을 짓는 순서였습니다. 일하는 사람의 그림이었습니다. 세상에 지붕부터 지을 수 있는 집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붕부터 그려온 나의 무심함이 부끄러웠습니다."

테크니션이었던 나는 주춧돌부터 그리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하자센터에서 지붕부터 그리는 법을 배웠고 이제 두 장의 그림을 그리게 되었다. 이것은 내가 기획자가 될 수 있게 하는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판을 읽는 능력, 그 안에서 새로운 것을 상상할 수 있는 능력, 상상한 것을 실행해볼 수 있는 능력의 토대가 되었다. 이렇게 나의 언어가 생기고 나서는 사람들과 불필요한 갈등을 만드는 일도 줄어들었다. 심지어 최근에는 '관계를 잘 푸는 사람'이라는 말도 들어봤다. 그러나 그렇다고 모든 것들이 해결되진 않았다. 하자밖에서 작업을 하면서 문화기획을 하는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다. 내가 만난 '기획'을 한다는 사람들은 종종 비슷한 또래가 있었지만 나보다 어린 사람들은 없었고 대부분은 '어른'들이었다. 나는 가끔 그 '어른'들과 갈등을 빚게 되었는데 이전처럼 나의 언어 때문만은 아니었다. 하자밖에서 일을 해도 내가 나이가 많지 않다거나 경험이 더 적다고 해서 주눅이 들거나 자신감 부족에 시달리진 않았다. 내 언어가 생겼다는 것은 한편으론 내 신념과 시각이 있어서 판단할 수 있는 근거와 능력이 있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어른'들의 활동을 보면서 종종 내가 이해할 수 있는 한도를 벗어나고는 했다는 점이다. "이미 가진 것이 너무 많아서"일까? 인맥, 권력, 지위, 돈, 명예, 가족, 직장, 신용 등 이미 가진 것이 너무 많아서 무엇 하나 버리기가 쉽지 않은 사람들. 그래서 의욕은 있으나 '안전빵'이 제일이고, 조금 위험하다 싶으면 하고 싶은대로 하지 못한다. 이해할 수는 있으나 나는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아서 갈등이 생긴다. 나는 각 개인이 놓인 현실의 조건들 때문에 생기는 문제를 인정하지만, 그것을 인정한다고 해서 나까지 그렇게 하거나 할 수는 없다.

이들 '어른'들은 무언가를 기획하는 데에서 나와는 비교할 수 없이 전문가들이지만 '문화기획자'는 아니다. 이들은 문화를 '생산'하지 못한다. 그래서 가끔은 그들이 충분히 가능한 것을 보고도 불가능하다고 말할 때가 많다는 것을 알았다. 예를 들면 참가자들이 각자 자율적으로 지내는 캠프를 하자는 제안에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불가능하다고 한다. 무정부상태를 걱정했을까? 나는 하자에서 그런 캠프를 성공적으로 기획했던 현장에 함께 있었고 직접 운영하기도 했다. 이런 것은 기획력 부족이라고 하기보단 상상력 부족이라고 하는 게 맞을 듯하다. 내가 경험이 부족해서 무언가를 빠뜨린 것이 아니라 가끔은 도리어 '어른'이 경험이 부족해서 기획이 떨어질 때도 있다. 하지만 '어른'이 경험이 더 많다는 이유로 '아이'들의 목소리는 결국 묻히게 된다.

회사에서 일할 때였는데, 한번은 행사를 기획하는 일이 너무나 재미없었던 시기가 있었다. 나는 아무리 힘들어도 그런 적은 별로 없었다. 그런데 그 행사를 기획하면서 내가 느낀 것은 그저 '일' 그 자체일 뿐이었다. 아무 열정도, 흥미도, 재미도 없는, 어디가서 얘기하면 이름과 규모는 그럴 듯해서 모두들 '우와-'하는 행사였지만 나는 일을 하면서 그저 돈이나 벌자고 하는 것 같아 재미없이 서류 정리하는 일처럼 느껴졌다. 창의적 발상도, 공동작업도, 신선함도 없는, 고민할 필요조차 없는 그저 그런 이벤트, 그래, 다들 돈은 벌어야 되겠지 하고 생각할 뿐이었다. 하지만 타협주의자인 나도 계속 그런 상태로 일하는 것을 더는 용납할 수 없었다. 나는 얼마 지나지 못해 그만 뒀다.

나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돈벌이가 되는 그저 그런 일이 아니라 새로운 것들을 고민하고 실험해 볼 수 있는 공간이고, 기획력과 추진력이 있는 작업 그룹이다. 그게 차라리 가진 게 없어서 생기는 불만의 욕구 때문이든 새로운 것을 만들고 싶은 욕구이든 간에, 나이를 떠나 그런 기획자들과 함께 시너지를 내며 작업을 할 수 있다면 나는 그 에너지로 무슨 일이든 해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 에너지로 어떤 일이든 할 수 있는 것은 내가 경험을 통해 스스로 배울 수 있는 사람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은 시민운동 분야에서 새로운 작업을 하려는 사람들과 함께 작업을 하려고 준비를 하고 있다. 물론 현재 각자의 위치에서 뜻있는 일을 하는 '어른'들을 무시하는 것은 전혀 아니다. 나름대로 노력해서 자리를 잡고 좋은 기획들을 하고 있는 '어른'들과 함께 작업하며 경험을 쌓고 노하우를 배우는 것은 언제 어디서든 늘 거쳐야 할 과정이다. 중요한 것은 내가 어떤 일을 하고 누구를 만나든 나는 그 경험들을 돈벌이나 기술습득 이상의 차원으로, 나를 성찰하며 스스로 배우는 단계까지 발전시켜 나갈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내가 나에게 주는 졸업장의 의미이다.


졸업생 제리
박재식, 1983년생
2001. 10                    알바서바이벌 게임PT Show연출
2001. 10                    LG카이홀맨 십대비즈니스 캠프 공동기획/진행
2001. 12-2002. 2     제2회 디스토리페스티벌 공동기획/이벤트 기획 및 진행/협찬&후원
2002. 01                   LG카이홀맨 디지털 부팅캠프 진행
2002. 05                   5월의 E-mail Side Project(수다방송) 공동기획/음향엔지니어
2002. 08                   제1회 어린이 S/W지킴이 캠프 1-2차 운영기획/진행총괄
2003. 01                   디지털 Tool & Jam 캠프 캠프운영/일부 프로그램 기획
2003. 03.15-05.10 맘맘 바이러스 (내가 전쟁을 반대하는 이유) 공동기획/연출/제작/진행
2003. 06.7-8            6월 난장-6월 민주대항쟁 프로듀서/홍보팀/메인콘서트 조연출
2003. 10.11               가족콘서트-가을밤 벌레우는 밤 무대감독보/진행


제리의 졸업 프로젝트 "반전 콘서트"
미-이라크전이 발발한 뒤, 2003. 3월부터 5월까지 3개월간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에서 토요일마다 진행.
"CBS인턴십을 하는 동안 반전시위 취재를 가게 되었다. 반전에 대한 충분한 공감을 하면서도 거대담론이 개인의 목소리를 잠식해 들어간 반전 집회가 되는 것이 안타까웠다. '사람', '개인'이 중심이 된 문화적 반전운동이어야 한다. 바이러스가 퍼져나가듯, 평화에 대한 서로의 교감의 번져나가는 실험을 작은 반전콘서트 형식으로 표현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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