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자작업장학교 첫 번째 졸업생들이 기획/진행하는 콜로키엄 <새로운 길을 가는 어려움 1>

자기주도학습의 여정



사람의 가슴 속에는 난로가 들어있다. 시기적절하게 난로에 불을 붙여 평생 꺼뜨리지 않는 사람도 있고, 너무나 거센 불에 타죽는 사람도 있으며, 단 한 번도 그 난로에 불을 당겨보지 못한 채 죽은 듯 살아있는 사람도 있다. 하자센터와 하자작업장학교에서 보낸 4년은 내가 나의 난로에 불을 당기는 법을 배웠던 시간이었다. 겨울 같은 세상. 아마도 변덕스런 나의 난로는 숱하게 식었다 꺼졌다 할 것이다. 하지만 내가 자신 있게 졸업을 이야기할 수 있는 건, 꽁꽁 얼은 난로라도 언제든 다시 불을 지필 수 있다는 덤덤한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지금부터의 나의 이야기는 내가 나의 난로에 불을 붙이는 법을 배운 과정에 대한 것이다. 자신의 난로에 불을 당기는 방법. 이것을 하자작업장학교에서는 '자기주도학습'이라고 부른다.

하자에서 내가 받은 첫 번째 선물은 '정보와 자극'이었다. 고교생 토론대회에서 허우적대던 날 건져내 하자로 데려온 양양과 조한은 나를 이런저런 탈학교 심포지엄이나 회의장에 데리고 다녔고 나는 눈앞에 펼쳐진 별천지에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 '자퇴하고도 성공한 사람'을 아무리 찾아도 80년대 자퇴생 서태지밖에 나오지 않던 팍팍한 인천 자퇴생에게 '21세기형 탈학교생', '대안적 문화작업' 등의 단어들이 넘쳐나는 하자는 정말 기가 막힌 정보의 바다, 자극의 샘물이었다. 그 무렵 내가 썼던 글 <학교는 늙은 아버지 같다'는 우울한 학교 안에 갇힌 채 '이건 아닌데...'만 읊조리던 내가 '학교는 늙은 아버지'라는 나만의 말을 만들어낸 최초의 글이었다. 새로운 언어는 발견하는 것이고 발명하는 것이다. 이러한 발견과 발명의 과정에는 왜곡되지 않은 많은 양의 정보가 필요하다. 일차적으로 하자는 탈학교생들에게 그러한 정보를 줄 수 있는 곳이며, 주려고 만들어졌다. 이러한 정보를 흡수하는 과정에서 하자의 언어 만들기 과정에 동참할 수도 있음은 물론이다. 어떠한 문화작업을 하든 이 과정은 매우 중요하며 하자작업장학교가 가진 큰 장점이다.

신이 나서 이곳저곳을 '구경하던 시기'가 끝나고 나는 (조한의 말에 따르면) '나 같은 아이를 위해 만들었다'는 <하자꼴레지오>에 들어가게 되었다. 꼴레지오 방이었던 107호에는 문화작업자라기보다 기획자에 가까운 히옥스와 나같은 아이들 한 무리가 있었다. 나는 이곳에서 slammer로 시작해 DJ pinkspider로 끝나는 학습여정을 겪었다. 이 여정의 과정에서 꼴레지오 역시 한충 발전한 현재의 작업장학교로 변모하게 되었다.

꼴레지오에서 내가 처음 한 일은 <얼터너티브 패션쇼 - 몰개성의 시대는 갔어>의 기획과 진행에 참여한 것이다. 이 패션쇼는 하자패션방의 패션쇼를 보고 난 남이가 "모델들의 생김새와 표정이 너무 똑같아서 누가 누군지도 알 수 없었다"고 투덜거린 것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그 말을 듣고 있던 히옥스는 "그럼 우리 패션방의 쇼에 대한 답가로 좀 더 개성적인 패션쇼를 해보자"라고 받아쳤고, 곧 회의가 소집되었다. 히옥스는 꼴레지오 아이들에게 패션쇼가 어떤 의미를 갖고 어떤 식으로 진행되어야 좋을지 물었고 우리는 열심히 머리를 굴려 갖가지 아이디어들을 냈다. 그러한 의견들을 종합해 히옥스는 기획서를 썼고, "너희들이 했던 이야기가 모두 잘 들어 있느냐"며 보여 주었다. 사실 그때 나는 '기획서'라는 것을 태어나서 처음 보았다. 게다가 그 기획서에는 우리가 했던 얘기보다 훨씬 많은 것들이 훨씬 깊이 있는 언어로 표현되어 있어, 솔직히 무슨 말인지 반은 알아듣고 반은 깜짝짬짝 놀라면서 읽었지만, 나는 히옥스에게 그냥 "잘 썼다"라고 대답했다. 패션쇼를 준비하는 과정 역시 마찬가지였다. 회의를 진행하고 일을 분담하는 방법, '피곤해서 하기 싫어요', '슬램하는 거 쪽 팔려요'하며 궁시렁대는 아이들을 설득하는 방법, 대중음악작업장까지 찾아가 쇼의 개념을 설명하며 녹음작업을 부탁하는 방법, 사람들을 초대하기 위해 게시판이나 메일로 홍보하는 방법 등을 히옥스는 아이들을 데리고 진행시켜 나갔고, 나는 아는 척 담담히 있었지만 사실은 놀라워하며 그 과정을 지켜 보았다. 솔직히 그때의 나로서는 행사 전 날, 패션쇼 무대인 쇼케이스에 검은 천을 치는 단순작업조차 해낼 능력이 없었다. 그것은 그 패션쇼가 내 수준에 맞지 않는 너무 큰 일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히옥스가 우리와 '함께' 작업하고 있는 척 하면서도 실제로는 우리를 '데리고' 기획부터 진행까지의 모든 공정을 노출시킨 작업 스타일은 그때의 나에게 적절한 것이었다. 히옥스는 우리가 '처음'이라는 걸 알았고, 그래서 우리 생각과는 달리 우리가 잘 하지 못할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때문에 단순작업을 동반한 진행파트는 자기 혼자 자신의 친구들을 불러 밤을 새워가며 했다. 하지만 기획파트만큼은 반드시 우리와 함께 해서, 이게 어떤 행사이며 지금 우리가 무엇을 하고 있는 건지는 분명히 알도록 했다. 이러한 학습스타일을 지금의 나는 '얹혀서 가는 경험'이라고 부르는데, 그 때의 패션쇼가 그러한 방식으로 진행되었었다는 걸 깨닫는 데만도 나만의 시간과 내공이 필요했다. 그로부터 1년 뒤 나와 제리는 <하자 1주년 생일파티>를 기획, 진행했다. 판돌들의 도움 없이 우리 둘이 처음부터 끝까지 다 해낸 행사였고 게다가 매우 성공적이기까지 했지만, '얹혀서 가보는 경험'이 없었더라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행사를 할 때 나는 무엇부터, 어떤 순서로, 적어도 어떤 퀄리티 이상으로 해야 하는지 이미 몸으로 배운 상태였다. 그 모든 것을 혼자 진행할 만한 내공이 생겼기에, 배운 것을 그대로 해본 것일 뿐이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그렇게 믿고 따르던 히옥스에게 반항하기 시작했다. 나 혼자 반항하는 걸로 모자라 다른 꼴레지오 아이들을 꼬셔서 같이 반항했다. 반항했다고 히옥스 꼴을 안 본다든지 밖으로 겉돌았다든지 했던 건 아니었고, 같이 붙어 앉아서 반항을 했다. 회의시간 누군가 이러저러한 게 하고 싶다고 말하면 대체로 히옥스는 '너가 지금 그걸 할 때냐?'라고 대답했다. 그러면 난 정신이 번쩍 들어서 말하는 것이다. "히옥스 말 듣지 마. 그냥 너 하고 싶은 대로 해." 히옥스는 슬슬 웃으면서 "너가 무슨 목립군이냐"라고 말했는데, 진짜 그때의 나는 '독립군으로 전환'해가는 시기를 겪고 있었다. 말하자면 나에게 큰 영향을 끼치는 사람들로부터 거리두기를 시작한 것이다. 하자 초기 죽돌들의 경우, '죽돌(하자에 죽치고 있는 사람)'이라는 말 자체에서 드러나듯이 하자센터와 판돌들을 매우 믿고 의지하는 경향이 있었다. 나만 해도 학교 안 가겠다고 가출을 결심했을 때는 정말 길에 누워서 자야 되는 줄 알았다. '아무도 없고 난 혼자야'라고 믿던 마음이 하자에 온 뒤 '어른이라고 다 그렇게 몹쓸 인간들인 건 아니군'하며 안심을 하게 되고, 더 나아가 '믿을만한 어름, 그 이름 판돌'이 되면서부터는 판돌에 대한 의존도가 매우 높아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판돌들의 말 한 마디에 삶까지 좌지우지되고 (실제로 그렇지는 않겠지만 그런 기분이고), 내가 설계하는 나의 학습과정과 판돌이 설계하는 나의 과정 사이에 충돌이라도 생기면 큰 갈등이 빚어지곤 했다. 지금 시점에서 생각해보면 이는 매우 자연스러운 단계인 듯 하나 그때는 뭐가 뭔지 이해도 잘 안 가고 참 힘들었었다. 그래서 내가 취한 전략은 '귀를 막고 히옥스의 말로부터 자유로워지자'였다. 그게 꼭 옳았다고 말할 수 없으나 내게는 어른이 되어가는 중요한 과정이었다. 그래서 나는 귀를 막은 채 '하자1주년 파티'와 '영화<눈물>과 함께 하는 디스토리영화제'를 기획했고 나 혼자도 이렇게 잘한다는 자신감과 기쁨에 취해있기도 했다.

'독립군 시절'이 나에게 주었던 또 하나의 변화는 나의 작업 파트너를 찾음에 있어서 판돌 대신 죽돌 쪽으로 눈을 돌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마침 나는 <소녀들의 페미니즘>이라는 하자 내 십대 페미니즘 그룹에 속하게 되었고, 처음 하자에 들어와 판돌들과 그랬던 것만큼이나 깊은 믿음과 애정을 동반하는 동료 죽돌 그룹을 만들게 되었다. 8회에 걸친 페미니즘 워크숍과 숱한 행사를 기획하며 소녀들은 서로의 차이(대학생 소녀와 하자소녀, 부자 소녀와 가난한 소녀)를 조심스레 이해했고, '파트너십'에 대한 고민을 할 수 있었다. 그 시절 우리가 찾아낸 좋은 파트너십이란 MT와 술자리로 맺어지는 일시적인 친분도, 같은 것을 겪었기에 만들어지는 동질감도, 일을 하려고 보니 사람이 필요해서 생겨나는 표면적인 유대감도 아니었다. 생각과 경험의 차이를 '불화'가 아닌 '풍부함'으로 이해하고, 서로의 존재를 이해하고 지지하는 법을 배워가면서 소녀들은 일도, 술자리도, 삶도 함께 해나갈 수 있는 파트너십을 만들어낸 것이다.

스스로 프로젝트를 설계해서 진행할 수 있는 내공과 그걸 함께 할 수 있는 동료들을 찾아가면서 나는 그제야 미뤄두었던 명화작업을 할 수 있게 되었다. 22분 분량의 단편 <바다를 간직하며>를 만들고 나서야 나는 나의 독립군 시기를 청산하고 좀 더 다른 인간이 되어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고백하자면 이러한 '독립군', 다른 표현으로 진짜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에는 사실 하자센터와 히옥스의 묵묵한 지켜봄과 도움이 있었다. <하자생일파티>, <눈물영화제> 심지어 <소녀들의 페미니즘>까지도 실은 히옥스와 조한, 그밖의 많은 판돌들의 제안으로 생겨난 프로젝트다. 진행과정에서도 보이지 않는 많은 물주기가 있었음은 물론이다. "말이 좋아 독립군이지 다 도와준 거구만!"하고 생각할 지 모르나, 내가 물주기의 가치를 충분히 이해한 채 받는 것과 그렇지 못한 것에는 엄청난 태도의 차이가 있다. 내가 진행했던 프로젝트들의 질적인 면에서도 그 차이는 쉽게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힘겹게 맞이한 본격적인 자기주도학습의 단계에서 나는 작업장학교를 만나게 되었다. 더 정확히는 만들게 되었다. 꼴레지오에서 보낸 2년간의 내공을 모아 더 발전된 형태의 학교만들기를 시작한 것이다. 이 무렵 내가 썼던 <왜 다시 학교인가>는 낵 학교만들기 프로젝트의 의미와 목적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나 같은 아이들을 위해 만들었다니 내가 안 갈 수 없겠군'하며 들어갔던 꼴레지오 시절과는 확실한 차이를 보인다는 점에서 나는 '학교만들기'프로젝트를 진행할 자격을 갖추고 있었다. 학교를 만든다는 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미처 알지 못했어도 말이다. <왜 다시 학교인가>라는 글로 대안교육심포지엄에서 작업장학교가 필요한 이유를 외친 것을 시작으로 나는 학생을 몇 명이나 받아야 하는지에 대한 회의부터 담임을 선발하는 면접자리에 참석하고, 심지어는 작업장학교의 공간을 디자인하기 위해 시장을 돌아다녔다. 하지만 간간이 김이 새기도 했는데 그것은 확실히 달라진 나를 보지 못하고 여전히 그저 똑똑한 십대 취급을 하는 하자 내의 시선 때문이었다. 나는 심사위원 자격으로 담임 면접자리에 앉아 있다고 생각했지만(내 담임 내가 뽑는다는 마음에서), 그것은 곧잘 직원선발에도 십대들의 참석을 가능케하는 하자의 자유로운 분위기 정도로 취급되었다. 이 모든 설움(?)에도 나는 두 번째 입학생들까지는 입학쇼하자에 참석하고 신입생을 위한 오리엔테이션 캠프를 기획하는 데 참여하는 등 나름대로 노력을 했다.

하지만 우리가 지난 2년간 애써서 만들어낸 하자의 좋은 문화들이 신입생이라면 받아들여야만 하는 하자식 관습처럼 되어버릴 때, 또 그 관습들에 대해서 질문하지 않는 학생들과 대답하지 못하는 담임들을 보면서 실망이 컸던 것도 사실이었다. 때맞춰 조한은 '포스트 서태지 시대'라는 용어까지 사용하며 뛰어난 서태지들을 키워내던 소수정예시대는 갔고 이제는 다소 평준화된 하자 스타일이 나올 때라는 식의 뉘앙스를 풍겼다. 나는 뛰어나기 때문이 아니라 절실했기 때문에, 하자에 오면 행복했기 때문에 글을 쓰고 영화를 찍고 슬램을 불렀다. 꼭 그때의 나와 같은 절실한 감정이나 행복감 때문이 아니더라도 나는 여전히 작업장학교에 입학할 결심을 하는 학생들이라면 새로운 에너지와 고뇌의 흔적이 역력해야 한다고 믿고 싶다. 그리고 그 에너지를 '하자는 왜 나에게는 물을 주지 않는 거냐' 쪽으로 몰고 가는 학교는 좋은 학교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자는 여전히 주류사회에서 접할 수 없는 멋진 언어들과 정보들이 가득한 동네다. 심지어 그걸 차곡차곡 정리, 가공까지 해놓은 <소리없는 방 - 자료실>이 있고, 작업장학교 학생들의 글과 작업을 모두 볼 수 있는 <디빌리지>까지 갖춰져 있다. 변한 것은 없다. 오히려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 다만 그것의 소중함을 읽지 못하는 둔한 감수성이 달라졌다면 달라진 것이다. 영상작업장만 해도 현재 진행되고 있는 <영상아카데미>는 매우 뛰어난 영상제작 프로그램이다. 기획서를 작성하는 것부터 영상축제로 마무리 짓는 것까지 그야말로 시스템에 '얹혀서 가보는' 사이 작품까지 한 편 완성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아닌가.

내가 쓴 대부분의 글은 나의 사이트에 공개되어 있고, 꼭 사이트가 아니어도 토요일마다 일간스포츠를 펼쳐보면 나의 드라마 리뷰를 읽을 수 있다. 내가 했던 슬램은 CD로 제작되었고 나의 영화작업은 모두 자료실에 있다. 한 학생이 하자에서 배우고 발전해간 과정이 그가 졸업을 하고 난 후라도 충분한 학습의 교재로, 매뉴얼로 죽지않고 살아갈 수 있을까. 졸업을 해본 적이 없는 작업장학교는 졸업생에게 졸업식까지 스스로 만들어가며 졸업을 해야 하는 지나치게 자기주도적인 상황을 연출하기도 한다. 가끔은 답답하지만 처음 새로운 길을 가는 입장에서 할 일이라 생각하고 받아들이고 있다. 나머지는 남아있는 재학생들의 몫이다. 내가 땀 흘려 작업한 모든 것들이 버리지못해 놔두는 쓰레기가 되느냐 아니면 유용한 자료가 되느냐 하는 것은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역할이라는 뜻이다.

<바다를 간직하며>와 <헬멧>을 만들고난 후, 나는 필름작업과 주류의 영화언어를 한 번 배워봐야겠다 싶어 영상원과 영화아카데미에 시험을 쳤고 둘 다 떨어졌다. "올 해 시험운이 없어서 그렇다"고 점장이는 말하고, '영상원은 너와 맞지 않아', '아카데미를 가기에는 나이가 너무 어려'하고 주변사람들은 나를 위로하지만, 나에게는 여전히 '끝나지 않은 세상과의 싸움이며 그렇기 때문에 또 한 번 독립군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자에서 보낸 시간만큼 나는 달라졌고 성장했지만, 그걸 모두가 알아주는 것은 아니다. 때문에 표면적으로는 고등학교를 자퇴해버린 그날처럼, 나는 졸업이라는 마침표 앞에 다시 한 번 혼자가 되는 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4년 전의 그날처럼 도통 갈 데가 떠오르지 않아 무작정 경찰서에 들어가 '길을 잃었으니 하룻밤만 재워달라고'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내가 누구인지, 나의 장점과 나만의 경쟁력이 무엇인지 이제 분명히 알고 있다. 미로 같은 세상에서 다시 혼자가 되어도 길을 잃어버리지 않을 '자신감', 추운 겨울에도 내 마음을 다스려 난로에 불을 당길 수 있는 '지혜', 그것을 배우게 해준 학교가 내게 있는데 무엇을 더 바랄 것인가.



졸업생 원
문지원, 1982년생
2002 개인프로젝트 <바다를 간직하며> 시나리오, 연출
2002 서울여성영화제 프로그램 '딥포커스' 초청상영 <바다를 간직하며>
2002 서울독립영화제 단편부문 본선진출 <바다를 간직하며>
2003 전주국제영화제프로그램 '디지털의 정서'초청상영 <바다를 간직하며>
2003 활력연구소 프로그램 '국내영화제 완전정복' 초청상영 <바다를 간직하며>
2003 광주국제영화제 초청상영 <바다를 간직하며>
2003 하자작업장학교 졸업프로젝트 단편 <헬멧> 시나리오, 연출
2003 인디비디오 페스티벌 구애작품 선정 '비됴 액티비즘' 부문 <헬멧>
2002-2003 하자센터 놀자프로젝트 <성폭력 예방훈련> 강의
2003.05-07. 케이블TV Mnet프로그램 <What's up Yo!>의 '아이엠샘' 코너 고정강의
2003.04`현재(졸업당시) '21살 원의 드라마 일기' 연재  


원의 졸업프로젝트 <헬멧>
2003년 5월 1일부터 10월 31일까지 진행. 단편퀴어영화. 헬멧(the helmet). 25min. 6mm DV. Drama.
"동성애자 활동가들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준비하던 중 나는 '보여지는' 영상과 얼굴을 '드러내기 어려운' 동성애자들의 입장 사이에서 고민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얼굴 보호장비이면서 동시에 얼굴가리개이기도 한 "헬멧"을 떠올렸고, 이를 이용한 판타지드라마 형식의 우화를 만들어 보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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