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의 공동작업장, 하자센터가 되기까지 

하자센터 부센터장 김희옥

하자센터는 ‘일, 놀이, 자율의 청소년 문화작업장’으로 시작했다. 

저성장 고실업 시대로 진입해가고 있는 우리 사회의 재활력화와 증가하는 청년실업의 우울을 탈피하기 위한 인문학자들과 문화작업자들(영상, 음악, 디자인 등의 분야에서 막 각광을 받기 시작한 젊은 아티스트들)의 문화적 실험이 시작된 것이다. IMF위기의 후유증과 더불어 세기말과 새 밀레니엄 사이에서 적잖은 혼란이 있던 때라고 기억한다. 하자가 만들어진 지2년 되던 시기에 하자센터의 큰 프로젝트로서 비인가 대안학교인 하자작업장학교를 개교하던 날은 심지어 911테러가 발생한 다음날이기도 했고, 모두가 불안한 마음과 극적인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그런데 하자센터에서 새로운 문화적 돌파를 생각하고 있던 사람들 말고도, 그 즈음 한국사회에서 청소년이슈가 크게 대두될 수 있었던 것은, 소위 ‘학교붕괴’현상 (실업계 고등학교의 경우, 한 해 한 반 규모의 아이들이 가출이나 폭력사건의 이유로 퇴학을 당하거나 스스로 탈학교를 하고 있다는 보고가 있었다)이 심각해졌다는 것과 학부모들을 중심으로 한 과열된 입시교육열 탓이기도 했지만, 7년쯤 지난 지금에서야 생각해보기 시작한 것은 그 청소년의 부모세대, 소위 한국에서는 386세대라 불리는 (30대이며, 80년대에 대학을 다녔고, 60년대에 태어난) 지금은 30대 후반, 40대 초반이 된 세대들의 특수한 경험 탓이 아닐까 하는 추측도 해보게 된다. 부모세대와 달리, 386세대는 과거의 유산으로부터 정신적인 절연을 한 번 해보았고, 혁명에 대한 간절한 소망과 실천을 병행해본 경험을 가진 세대이다. 그리고 어쩌면 그 혁명의 시도의 결과로 우리 사회의 정치적, 사회문화적 민주화를 제도적으로 안착시키는데 일부 성공하였다고 할 수 있는데, 그 과정에서 이들은 거대담론과 미시담론 사이의 괴리를 목도하고 있는 것 같다.

하자센터에서 일종의 '창업공신'들은 좀더 새로운 대안 문화적 실험이 가능하다고 믿는 인문학자나 아티스트들이었고, '공략하기보다는 낙후시켜라'라는 '쿨한' 슬로건으로 일했다. 그들에게 매료되며, '서태지'(당시 한국의 가장 유명한 가수이자 문화적 아이콘)와 같은 아이들이 "스스로" 하자로 왔는데, 그 아이들은 대단히 비판적이며, 개인적이고, 자기재능에 몰입할 줄 알고, 자기주도학습을 해내는 아이들이었다. 아이들에게는 롤모델이 되는 장인들이 필요했고, 거친 삶을 살아가기 위한 자기나침반을 갖게 되는 것이 목표였다. 교사와 장인들은 '민주적 교육학'에 대해서 생각했고, 함께 수행하는 문화적 프로젝트 속에서 교사와 청소년들 모두가 함께 성장해 갔다. 이때의 교사와 아이들이 '하자작업장학교'를 만들었다. 계층적으로도 어렵고, 부모의 학력이나 여건상 어떤 지원도 기대할 수 없었던, 당시의 청소년들이, '하고 싶은 일 하면서 먹고 살기'를 화두로, 잠자지 않고, 신나게 일하고, 바쁘게 학습하던 시기를 기억하고 있다. 

그러면서 그것이 너무 행복해서, 그런 행복을 함께 나누지 못하는 하자바깥의 다른 아이들을 염려하며,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학교를 만들 던 해의 추석에, 다른 아이들을 위해 기도하던 한 소녀(작업장학교 졸업생)가 달맞이축제의 '소원종이'라는 의례를 만들었다. 달맞이축제는 하자에서 기획한 행사였는데, 추석은 전 민족이 이동하는 것 같다는 한국식 reunion의 날이다. 이 날 부엌에서 하루 종일 음식을 하고 설거지를 해야 하는 여자들과 가족과 집이 없거나 멀리 있는 사람들, 새터민들, 외국인들, 이주노동자들에게는 가장 외롭고 쓸쓸한 날이다. 하자에도 그런 십대들이 있었고, 그를 위한 파티를 가장 번잡한 시내 한 가운데 작은 공원에서 준비했다. '소원종이'는 그들이 잠깐 자신을 돌아보고 자신을 위해 기도하는 시간을 갖게 하는 것이다. 아름다운 실로 줄을 만들어 나뭇가지에 걸어두고, 예쁜 한지 조각을 나눠주면서 그 아이는 ‘이 종이에 소원을 적어 줄에 걸어주세요. 나중에 제가 깨끗하고 조용한 곳에 가서 태워드릴 거예요’라고 말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위해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 당시에는 그런 일들이 아이들과 교사들에 의해서 빈번하게 일어났다. 

그러나 2-3년 사이에, 하자시계는 너무 빨리 돌아간다는 불평들이 여러 곳에서 들려왔다. 상황이 바뀌기 시작한 것이다. 이제 겨우 7년째를 맞이하고는 있지만, 저성장 고실업의 분위기는 빠르게 진화하던 하자의 속도와 맞지 않았고, 증가하는 불안과 위기감 속에서 '열심히 일하는 것'보다는 좀더 '의미 있게' 일하는 것이 더 중요해진 것이다.

2년 전 쯤부터 감지된 이 변화는 대안학교의 선생님들을 초대하는 과정에서 먼저 나타났다. 인터뷰에 참여한 많은 사람들중에는, 선생님이 되는 것이 자신의 삶의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올 것이라 믿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잘 나가는 직장에 다니고 있다고 해도, 언제 실업할 지도 모를뿐더러, 실업하지 않기 위해서 열심히 일한다는 것만으로는 자기 삶의 의미가 확보되지 않는다. 잘 팔리는 아티스트가 된다고 해도, 돈이 있는 누군가의 개인적 취향에 좌우되는 (작품이 아닌) 상품을 만드는 일을 하고 싶지 않다. 그런 사람들이 하자센터에 와서 '길잡이교사'(advisor)가 되거나, 문화작업교사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삶의 작은 의미에 집중하는 '따뜻한' 교사들을 보면서, 이번엔 좀더 관계적이고, 공동체적인 일과 놀이에 기여하는 것, 관계에의 헌신 같은 것들을 중요하게 여기는 아이들이 오기 시작했다. 

물론 모든 아이들이 그런 것은 아니다. 전 세계적으로, 청소년들은 '동기상의 위기(motivation crisis)'를 겪고 있다. 하자도 예외는 아니다. 대부분의 아이들이 '네가 원하는 게 뭐야?'라는 질문에 대답하기를 주저한다. 커서 뭐가 되고 싶으냐고 하는 질문이 제일 싫다고 한다. 서태지 시대의 아이들이나 포스트 서태지 시대의 아이들이라는 것은 하자의 교사들에게 응답하는 아이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포스트서태지 시대의 아이들에게 '롤모델'의 개념은 어쩌면 너무 무겁다. '서태지'는 당시 한국의 음악 지도를 새로 그려낸 사람이고, 음악비평의 언어를 수준급으로 구사할 수 있지만, 자수성가한 (그 또한 탈학교한 사람이다) 대중음악계의 '마이더스'이자 어느 누구와도 비견될 수 없는 독보적인 존재로 보였는데, 이들은 서태지를 '숭배해야 하기 때문에', 더이상 생각하고 싶지 않은 사람으로 분류했다. 친근한 오빠 같고, 만만하고 귀엽고 조금 덜 성공할 것 같은 아이돌 스타들의 시대로 옮아간 것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새로운 교사들은 이 아이들과 함께 '돌봄 교육학'을 고민하게 되었다.

'돌봄'이 하자교육학의 키워드가 되면서, 우리 사회의 재활력화를 꿈꾸는 것이 더 이상 개발도상국가식의 '토건적 발전'으로 존재할 수 없다는 생각이 다시 확인되었다. 이때 즈음 노리단이 만들어졌다. 작업장학교가 만들어지던 시절에도, 고아원이나 복지관, 양로원을 다니며 공연하던 '하자 서커스 유랑단'이라는 밴드가 있었고, 그 다음에는 작업장학교 아이들로 구성되고, 탄광촌, 반전시위, 환경시위 등에서 공연하던 '유랑하는 물고기'(Nomad Fish)가 있었다. 

노리단은 그런 역사 속에서 탄생했다. 그러나 노리단 퍼포먼스의 핵심적인 철학과 원리는 호주의 허법과 그 대표인 스티브 랑턴에게서 왔다. 스티브 랑턴을 시작으로, 국내외의 독특한 '장인급' 문화작업자들이 다시 하자에 등장했다. 그러나 이 장인들은 '롤모델'로서 있기보다는 '후천적 가족'과 같은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사람들이었다. 카리스마가 있다기보다는 '친절하게도' 자신의 재능과 노하우를 '공동의 식탁'에 기꺼이 내놓고, 모두가 생산자이자 퍼포머가 되도록 독려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에 의하면 재능 있는 특별한 사람만이 아니라, 그런 사람은 그런 사람대로, 그렇지 못한 사람은 그렇지 못한 사람대로 함께 문화적 작업을 나눠할 수 있다. 음악과 디자인을 함께 하는 이들의 작업은 다분히 공동체적이고, 그래서 이 그룹은 열살부터 마흔살까지다양한 세대와 성별과 배경의 사람들이 모일 수 있다. 다양한 사람들의 모임이기 때문에 '쿨'해져서는 상처받는 사람이 나타나기 쉽다. 이들 모임의 원리는 좀더 '웜'(warm)해지는 것에 있다. 모두가 나름의 '쓸모'가 있게 되는 것, 그런 공동체를 떠올리며, 하자에서는 그것을 '마을'이라 부르기 시작했는데, 도시에서 마을이라니. 그 마을에 대한 논의는 아직 진행중이다.

고실업시대를 돌파하기 위해서, 하자에서는 초기부터 다품종 소량생산시대의 '생비자'(prosumer)가 되는 것에 대해서 생각해왔지만, 때때로 노리단에서는 생비자라는 개념조차 어색한 단어가 되고 만다. 문화를 소비하고 오로지 '향유만 하는' 사람이 되지 않도록 극단적으로 경계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공동체적 놀이, 공동체적 음악, 공동체적 디자인이라는 것이 오랫동안 훈련된 개인들(우리 사회의 문화적 소비자들)의 '취향'을 어떻게 만족시킬 지, 문화작업으로서 창조성과 수준quality?을 어떻게 확보할 지 아직은 잘 모르겠다. 그것은 아직 시작단계의 실험에 불과하므로. 이 실험에 참여한 청소년들 중 '장인급' 작업자의 뒤를 잇는 아이들을 위한 특별한 훈련의 과정은 아직 하고 있지 않다. 필요하지 않을까? 이 실험은 우리 사회의 문화적 소비자들이 생비자 혹은 생산자들로 자기위치를 바꿀 때까지 지속되어야 하는 것일까? 그런 질문들이 아직 남아 있다.


* 이 글은 2006년 11월 홍콩에서 열린 Creative Education Summit의 internal meeting에서 각 기관(/학교)의 현재와 이슈에 대한 소개를 부탁받고 speech원고로 쓴 글입니다. speech직전에 2006년 10월 추석 달맞이축제의 이모저모를 담은 스케치영상을 상영하였습니다. 이 회의에서는 시대적 돌파로서의 창의적 학습과 관련하여, 스웨덴, 네덜란드, 홍콩, 싱가폴, 대만, 중국, 그리고 하자센터의 경험과 비전을 경청하였고, 앞으로 위험사회/저성장사회를 살아갈 청소년들에게 필요한 자기주도학습과 공공적 기여와 공존의 의지, 그리고 무엇보다 자활의 “태도”와 “동기”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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